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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다음 세대의 리더가 될 누군가를 위하여”
- 얼마 전 월간목회 발행인이신 박종구 목사님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고 김창인 목사님 추모집을 내는데 추천사를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요청을 받고 한참 망설였습니다. 제가 김창인 목사님 밑에서 부목사를 해본 적도 없고 또 가까이에서 모셔본 적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저 딱 한 번 뵌 것은 그분이 천국 가시기 전에 휠체어를 타고 계실 때 인사를 드린 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긴 망설임 끝에 이런 추천사를 조심스럽게 썼습니다. “저는 김창인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한 번도 모셔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딱 한 번 천국 가시기 전에 휠체어를 타셨을 때 인사를 드린 적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목회 사상과 영성, 설교관이 제 안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옛날에 CBS 라디오 강단을 통해서 그분의 설교를 접했습니다. 맑고 청명하고 때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시다가 찬양을 부르시고, 청중을 향하여 조용하고 거룩한 울림으로 파문을 일으키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정말 청교도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영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성장에 눈을 뜨셔서 수십 년의 미래를 보시고 강남으로 교회를 이전하여 우리 교단의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로 성장시키셨습니다. 오늘날 저도 설교를 하는 걸 보면 그분의 설교 혼과 정신이 스며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저도 설교를 하다가 찬양도 하고 또 간증을 합니다. 설교뿐만 아니라 한 번도 부목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목사님이 저술하신 기독교 예식서를 아마 수십 번을 더 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의 결혼주례, 성찬예식은 다 목사님의 저술을 기본으로 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을 좀 가까이 모시고 사역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큰 영광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비록 방송과 활자를 통해서 만났지만, 그분의 스피릿과 영성이 제 안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멀리서 존경해왔던 목사님은 떠나셨지만, 그분의 목회 영성은 아직 제 안에 잠들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모시지도 못한 제가 추모집의 추천사를 쓴다는 것이 송구해서 진짜 무릎 꿇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행여 이 추천사가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한국교회의 큰 거목이요 거성이신 고 김창인 목사님의 추모집 발간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목사님이 남기고 가신 깊고 맑은 목회 사상과 영성이 한국교회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의 가슴에 향기롭게 새겨지기를 소망합니다.” 저 또한 제가 알지 못하는 어느 누군가에게 조용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고 한 권, 한 권 찍는 책 그리고 유튜브와 방송으로 전해지는 한 편의 설교를 더 성실하게 준비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죽은 이후에도 지인들에 의해서 저의 추모집이 출간된다면, 제가 김창인 목사님을 생각하듯,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런 날을 위해서라도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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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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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다음 세대의 리더가 될 누군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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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평화 뒤에 도사린 전쟁을 살펴야 한다
- 제22대 국회가 시작되면서 다수당에 의하여 ‘입법독주’ ‘입법독재’ ‘입법횡포’를 우려했는데, 그런 염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17인은 ‘국가정보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대표발의: 이기헌, 공동발의: 윤건영, 박해철, 박민규, 김남근, 김성회, 복기왕, 김원이, 박상혁, 이용우, 강준현, 조계원, 박홍근, 박희승, 김 현, 윤종군, 안태현 의원) 이들은 지난 7월 2일 국가정보원에 관련된 법률개정안을 제출했는데(의안번호: 1323호)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가히 기가 막힌다. 이들의 소속 국가는 어느 나라인지, 누구를 위하여 국민의 대표가 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 내용을 보면 ‘국가정보원이 내란죄, 외환죄, 국가보안법위반죄, 군사기밀보호법위반죄 등 안보범죄에 관한 정보업무 수행을 위해 다른 국가기관에 대해 사실 조회, 확인, 자료 제출 등의 권한을 삭제한다’는 것과 ‘국가정보원이 안보 업무에 관련된 정보업무 수행을 위한 현장조사, 문서열람, 시료채취, 자료제출 요구와 진술요청 등 방식의 조사권을 삭제한다’는 것이다. 또 ‘국가정보원이 취득한 정보를 대공수사권을 가진 수사기관에게 범죄 정보를 제공할 것과, 국가정보원이 수집한 정보를 신원조회를 위하여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크게 축소 시켜 정치적 개입과 정략적 이용을 막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대한민국의 안보와 보안, 그리고 국가 중앙 행정 기관의 존립을 위한 것이 맞는지 의아스럽다. 지금 전 세계는 소리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그중에 정보(情報)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 자산이며, 국가를 지키는데 필요한 수단이 된다. 국가에도 필요하고 정확한 정보가 없이는, 국가 간 교류와 통상, 외교와 심지어 전쟁에서의 위험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020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대공수사권’을 박탈하여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손발을 자르더니, 이제는 아예 국가를 위한 정보 수집과 그에 따른 수사권을 모두 박탈하여 목까지 치겠다는 것인가? 그러려면 왜 막대한 국민의 세금에서 국가정보원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는가? 한낱 권력자들의 이용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인가? 더불어민주당 방식대로 한다면 우리나라는 모든 정보에서 밀려 고도의 정보 수집이 어렵게 되고,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할 간첩 활동이나 중요한 기밀의 유출 등을 획책하는 세력들을 붙잡을 수 없게 된다. 혹시라도 정보기관에 의하여 국민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면, 이는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손익 계산에 의한, 국가의 보안과 방첩 기능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보 수집과 활용의 용도는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대공수사권’을 빼앗더니, 이제는 대부분의 중요한 권한과 역할마저 박탈하여 유명무실한 국가 정보기관으로 추락시키려는가?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구를 이롭게 하려는가? 파수꾼이 없는 병영(兵營)은 이미 적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겠다는 실책이다. 국가정보원의 역할과 책임은 어떠한 적의 도발과 음모로부터 방비하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최일선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재량을 주어야 한다. 국민과 국가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 행정기관은 불필요하지만, 그 행정기관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가로막고 나서는 행위야말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아야 한다. 평화는 내가 힘이 있어야 상대편이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는 것이며, 지피지기(知彼知己)일 때, 우리의 안위는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들은 이를 모를까? 목욕물을 버리겠다며 아이까지 버리려는가? 사실 제22대 국회는 정식으로 아직 개원식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구잡이식으로 ‘입법폭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국민들은 ‘악법’과 ‘떼법’과 ‘국가망할법’을 양산하려는 국회의원들을 잘 감시해야 한다. 이제는 밖으로부터 도전해 오는 세력뿐만 아니라, 안에서부터 국가를 허물려는 세력들에게서도 국가를 지켜내는데,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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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평화 뒤에 도사린 전쟁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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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공산폭동을 진압하여 공적 받은 사람의 서훈을 박탈?
- 지난 6월 18일 조국혁신당을 비롯하여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614)을 발의하였다. 발의한 의원은 조국혁신당의 정춘생, 차규근, 신장식, 조국, 이해민, 김재원, 서왕진, 김선민, 강경숙, 황운하, 김준형, 박은정과 더불어민주당의 민병덕, 박지원, 김한규 의원이 입법 발의에 참여하였다. 이 법은 지난 2000년 1월 12일 공포되었다. 그런데 이 법률안을 개정하는 이유는 뭔가? 하나는 제주4·3사건의 왜곡·폄훼·허위 사실 유포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다는 것, 또 하나는 이를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홍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4조의 2항에서 ‘제주4·3사건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상훈을 받은 사람의 서훈(敍勳)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월 3일 소요 사태와 이를 진압하기 위한 1954년 9월 21일까지의 제주도에서 발생한 공산 조직의 소요·파업·폭동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사건을 다루는 것을 말한다. 이 사태는 왜 일어났는가? 핵심적인 공산주의자 김달삼과 이덕구와 잘 훈련된 외부 인사들에 의하여 일어난 소요(騷擾) 때문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제주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방해할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식에 약 30,000여명이 참석했는데, 그 중에 남로당 계열 17,000여명이 소요를 일으키므로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3월 9일에는 제주도 직장인 95%에 해당하는 4만여명이 파업하는 등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제주4·3사건은 명백히 남로당, 좌익, 북한에서 내려보낸 공산당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1947년 3월 19일 미군정 정보 보고서에서도 제주도민 70%가 좌익이거나 동조자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도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4·3은 공산폭동’임을 인정했다. 물론 이때 당시에 억울하게 죽은 선량한 도민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 폭동이 절정에 이를 때, 제주도 인민군 규모가 4,0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니, 무법 지대가 되고, 그 사이에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도 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민들의 희생은 모두 진압군에 의한 것이 아님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선량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편으로 국가의 안위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진압에 나섰던 군인과 경찰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법률을 개정하여 그런 공로가 있는 분들의 공적과 서훈을 박탈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제주4·3사건을 위한다며, 다른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또 이런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실제와 실체를 밝히는데, 처벌을 일삼아 양심적, 공정한 목소리에 재갈을 물려서도 안 될 것이다. 제21대 국회에서 3,000개 이상의 법률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도대체 국민들은 그러한 법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국민들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직 ‘입법 독재’ ‘입법 독주’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법이라면, 그 자체로도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그런데 제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법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권욕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의 권력 남용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이를 잘 살펴야 한다. 제주4·3사건이 분명히 공산 세력에 의하여 시작된 반정부 활동이었는데, 이때 진압한 군·경의 명예를 흔들고 그들의 활동을 때려잡기 위한 법률안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또 역사적 실체를 가리거나 편향적인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한 ‘입법 놀이’가 되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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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공산폭동을 진압하여 공적 받은 사람의 서훈을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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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광고 수입에 눈이 멀어 반기독교 언론이 되나
- 지난 2년 전부터 한국의 메이저급 언론들이 기독교에서 이미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의 반기독교 광고를 버젓이 매주간마다 내고 있고, 반기독교 활동을 부추기는 상황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들이 지난 3개월간 낸 광고의 일부를 살펴보자. ‘예수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 예수 이름으로 하는 기도도 하나님께서 절대 듣지 아니하신다’(동아일보 2024년 6월 27일) ‘성자 예수라는 거짓을 심판하시는 하나님’(동아일보 2024년 6월 20일) ‘영원히 멸절당한 예수’(동아일보 2024년 6월 13일) ‘악인 예수에서 선한 하나님께로 돌아서라’(동아일보 2024년 6월 7일) ‘예수의 이름으로 걸린 치명적인 약한 병’(동아일보, 중앙일보 2024년 5월 30일) ‘사망하여 죽은 자는 하나님께서 기억도 아니하신다. 이미 죽은 지 이천년이 다 된 예수는 어떠하겠는가’(동아일보 2024년 5월 23일) ‘타작, 주의 징계가 없는 사생자인 예수’(동아일보 2024년 5월 17일) ‘사망하여 소멸한 자 예수’(2024년 5월 10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예수와 예수를 섬기는 귀신의 처소’(동아일보 2024년 5월 3일) ‘예수의 부활이 거짓인 증거’(동아일보 2024년 4월 19일) ‘인생 예수의 모든 증거는 허사다’(동아일보 2024년 4월 12일) ‘똥처럼 망한 예수’(동아일보 2024년 4월 5일) 이처럼 한국의 메이저급 언론인 동아일보는 지난해부터 과천 은혜로교회(현재는 해빛교회-신옥주)의 주장을 받아 버젓이 광고로 1주일 단위로 자기 신문에 게재하고 있다. 지금 전 세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 약 25억 명에 이른다. 그런데 유독 동아일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심각하게 부정하고 폄훼하는 이단 종파의 광고를 수년간, 그것도 주기적으로 실어주는 것은 이단 종파의 대변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미 한국교회언론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동안 모니터링한 것을, 지난 4월 1일 동아일보에 “기독교를 부정하는 이단 광고 중지의 건”으로 공문을 보낸 바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런 기독교계의 우려와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후 6월 27일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이는 정신 나간 행위이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거나 부정하는 것은 곧 반기독교이며, 이단이다. 심지어 여타한 이단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만큼 지독한 이단 집단의 반기독(反基督) 광고를 실어주는 동아일보는 언론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언론에서 광고는 직접적으로 기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건전한 종교를 부정하고, 더군다나 교주격인 사람이 이미 여러 가지 범죄로 인하여 복역 중인데 그들의 터무니없는 종교 부정 광고를 게재하는 언론사에도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언론이 앞에서는 아무리 좋은 기사로 지면을 채운다 하여도, 광고란에는 세계인 수십 억명이 믿는 종교를 부정하는 반기독교, 반종교적 광고를 지속적으로 내보내는 것은 언론의 수준을 스스로 추락시키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언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 보도’일 것이다. 세계 인구의 1/3이 믿는 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이단의 광고를 게재하는 것은 언론이 스스로 고유 종교가 가진 교리와 진리를 폄훼하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더군다나 광고의 주체인 신옥주는 공동상해, 특수 폭행, 특수 감금, 사기 등으로 7년의 징역형을 받고 감옥에 있다. 신옥주 집단은 종교를 가장하여 신격화, 범죄 행위를 일으킨 집단이다. 그런데도 동아일보가 이런 자들의 광고를 주기적으로, 수년간 게재한다는 것은 언론이 마땅히 지켜야 할, 사회 질서, 공공복리,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데 앞장서야 할 마땅한 역할을 내팽개친 것이다. 동아일보가 신속히 이단 집단의 저속한 광고를 중단할 것과, 그동안 기독교계에 정신적, 영적으로 피해를 준 것에 대하여 사과해야 한다. 이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동아일보를 반기독교, 반종교, 반사회적인 나쁜 언론으로 규정하여, 계속 반대운동을 펼쳐나갈 것이다. 동아일보가 이단 집단의 광고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것을 생각한다면, 언론의 품위와 가치를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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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광고 수입에 눈이 멀어 반기독교 언론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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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세 가지 큰 절기’(출 23:14-19)
- 구약의 절기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절기를 통해 그 당시 역사와 사회법을 통합하여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절기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 강림의 진리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절기라는 히브리어는 ‘약속을 지키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정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시기 위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이 나와야 하는 날과 이 특별한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절기를 정하신 목적은 주님의 백성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신앙생활에 힘을 얻어 더욱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감사 절기에 중요한 것은 내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사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지켜야 할 세 가지 절기는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이때 모든 남자는 예루살렘에 가서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에는 각자 주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서 그 힘대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수확을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짐승의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 먹는 것을 별미로 즐겼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잔인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하찮은 동물이라도 잔인하게 취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2:6-7) 무교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날에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온 이스라엘 지파를 이끌어냈기 때문입니다.(출 12:17) 누룩은 부패와 죄를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마 16:11-12) 무교절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죄 된 삶에서 돌이켜 믿음으로 성숙하도록 깨닫게 해주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고난과 죽음으로 죄인 된 우리가 속죄와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완전한 희생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9장 25-26절을 보면,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아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이하시기 위하여 시대의 종말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희생제사를 따로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는 평생 감사해야 합니다. 맥추절(칠칠절, 오순절)을 지키는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주위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신명기 16장을 보면, 칠칠절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과 곧이어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해야 할 우선 순위는 먼저 하나님입니다. 그후에 이웃을 섬기는 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은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한 120명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성령충만을 받은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행 2:1-4)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성령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장소는 바로 교회입니다. 수장절(초막절, 장막절)은 “여호와의 절기”(레 23:39)라고 부르기도 했고, “명절”(요 5:1)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 40년 동안 초막에서 산 것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레 23:42-43)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10월 중순경에 곡식 추수한 것을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로서 수장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추수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삶을 인도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였습니다. 특히 종과 이방인 과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기쁨을 누리는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명절 끝날 곧 큰 날”(요 7:37)에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주님께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이날이 큰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기 때만이라도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구원의 은혜를 맛보고 즐겁게 살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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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세 가지 큰 절기’(출 2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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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 지난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전반기 교역자 워크숍이 있었습니다. 이번 워크숍 주제는 ‘체인 리액션’(chain reaction, 연쇄 반응)이었습니다. 체인 리액션은 원료가 되는 화합물에서 생성물이 얻어지는 과정이 몇 가지 소반응의 조합으로 성립하고, 하나의 반응(연쇄 개시반응)이 시작되면 그 생성물(라디칼, 이온 등)이 다음 반응을 일으켜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반응을 말합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의 눈덩이가 다른 눈덩이와 뭉쳐서 큰 눈덩이가 되고 그 큰 눈덩이들이 구르고 뭉쳐서 눈사태를 일으키는 것으로 말입니다. 즉 엔트로피(entropy, 높은 에너지, 높은 확률) 법칙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워크숍의 주제를 체인 리액션으로 정한 이유는, 지금의 새에덴교회에 머물고 싶지 않고, 오늘의 새에덴교회라는 성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강의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반기에 거룩한 눈사태를 일으키고 거룩한 생명과 부흥의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조별로 발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토의와 발표는 첫날밤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부교역자도 힘들었겠지만, 전체를 총괄하고 지휘하는 담임목사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저녁에 워크숍이 끝나고 주전골 계곡을 걷기도 하고 온천 사우나를 하기도 했으며 스크린 야구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강원도에 가서 계곡 길을 걷고 온천도 즐기고 스크린 골프나 야구를 한다는 게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저도 이런 낭만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제가 누구보다 산을 좋아하고 계곡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점심 먹고 한 15분 정도 걷고 오긴 했어요. 그런데 옆에 함께 걷던 선 목사님이 “저녁 워크숍이 끝나고 주전골 계곡 끝까지 걸어가 볼 수 없습니까?”라고 했지만, 저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늦게 잠들면 다음 날 워크숍을 인도할 능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 일찌감치 약을 먹고 잠을 청했습니다. 사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 30분까지 앉아서 워크숍을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것도 체리(체인 리액션의 줄임말)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잠을 청했지만, 이따금씩 꿈을 꾸고 또 잠에서 깨어날 때는 계속 ‘체리’생각만 나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생각만 났습니다. 그렇게 잠을 청했기 때문에 제가 마지막 통성기도 시간까지 잘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끝나고 나서라도 주전골 계곡을 걷고 싶었지만 춘천에 들러야 하는 일정 때문에 그마저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색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 또 춘천에서 교회로 오는 길에 마지막 수련회 7강과 8강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교회에 돌아와서도 ‘체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교역자 워크숍을 다시 한번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주중에 하룻저녁이라도 다시 모여서 더 토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기보다는 놀기를 좋아했고, 사춘기 시절에는 문학소년 내지는 낭만 가객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워크숍 전후로 저는 이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레임이 가득가득 밀려오는 것입니다. 마치 가슴 속에 밀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체리'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어떨 때는 부담감으로, 어떨 때는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강원도에 가서 낭만적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럴 환경이 못 될 뿐만 아니라 제 스스로가 자제를 한 거죠.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담임목사의 자리는 낭만보다 부담감이 더 크고, 현재의 즐거움보다 미래의 설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체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제가 오색을 떠나면서 다짐했던 것이 있습니다. “장년여름수련회를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오색을 한 번 찾아오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과 그 기나긴 주전골 계곡을 걸어보겠다고 말입니다. 그 다짐이 지켜질지, 안 지켜질지는 모르지만, 저는 반드시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주전골에 12폭포까지 걷고 오리라고 다짐해 봤습니다. 물론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을 전제로 하고 말입니다. 부디 후반기 사역에는 우리 새에덴교회에 '체리'의 바람, '체리'의 파도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체리'의 바람과 파도가 불어올수록 담임목사의 자리는 더 고독하고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더 무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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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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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생각과 말’(잠 18:21)
- 사람은 하루에도 수천수만의 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말 가운데도 유익을 끼치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말도 있습니다. 적절한 말은 유익이 되지만 넘치는 말은 오히려 해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말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엡 4:29). 더러운 말이란 유익이 되지 않는 말로서 남에게 시험을 주고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며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더러운 말은 신자답지 못한 말이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에게 유익 되지 않는 말이나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요 은혜인 것입니다. 검(劒)은 사람의 육체에 보이는 상처를 주지만 간사하고 거짓된 혀는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준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혀의 사용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55:22, 57:5, 잠 18:21, 26:18). 얼마나 말이 중대한 영향을 끼치면 예수님께서 말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겠습니까?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탐지하고 평가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전부 탐지해서 다 기록하십니다. 물론 회개하면 없어지지만 그 이전에는 다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혀가 실수를 많이 하고 실패를 많이 하고 죄를 많이 짓는 것은 왜 그럴까요? 혀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바깥으로 쏟아내기 때문입니다(잠 15:28, 마 15:18).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기 위해 무릇 제어할 것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과 입술을 제어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약 3:2).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혀를 보면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면 우리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은 자신의 약점조차도 장점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은 바뀌게 됩니다. 생각은 열쇠라는 말이 있듯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일이 나타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일이 나타날 뿐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이 사탄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운명이 아닙니다. 생각이 인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 내가 생각한 결과이고, 내일은 오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로 결정됩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삶은 무엇보다도 생각과 말이 믿음에서 나와야 하겠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말에 달려 있습니다(21절). 누에고치의 입에서 실이 나와 집을 만들어가듯이 사람은 자신의 입으로 하는 말에 의해 인생의 집을 짓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음의 집을 짓게 되고, 소망의 말을 하는 사람은 소망의 집을 짓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걱정의 집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하). 우리는 삼가 경계하여 항상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한 말만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쓰십시다. 원망과 불평하지 말고, 위로의 말을 하고 격려의 말을 하고 긍정의 말, 축복의 말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냐고, 그래 같이 기도하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서로에게 선한 말, 감사하는 말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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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생각과 말’(잠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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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고마움과 송구함에서 시작한 밤 기도회
- 우리는 해마다 6월이 오면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했습니다. 올해는 18년째가 되었습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민간 교회가 하다 보니 뿌듯한 마음도 생기지만 부담스러운 마음도 갖습니다. 이 일이 1, 2년도 아니고 18년을 해왔으니 목사와 성도들의 마음에도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교회만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일이요, 표지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경제가 힘들다고 해서 제가 거의 헌신을 강요하거나 강조한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올해대로 최선을 다해서 성도들이 헌신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해외와 국내에서 참전용사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언론에서도 새에덴교회의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실추된 한국교회의 신뢰도와 이미지를 고양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행사였다고 평을 해주었습니다. 저도 행사가 끝나고 나면 어디 가서 푹 좀 쉬면서 여름수련회 말씀을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가 너무 송구하고 미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 밤 기도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밤 기도회를 한다고 해서 특별한 헌금이 나오거나 제가 특별한 사례비를 받는 것도 아니지만, 제 나름대로 몸과 마음을 구별하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수요일에는 낮 집회와 저녁기도회를 또 다른 말씀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모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억지로 동원한 것도 아닌데 본당 1층이 거의 차도록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차량 돌아가는 시간이 다 됐는데도 성도들이 집에 가려고 생각을 안 하고 계속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도들이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제가 전한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겠죠. 저는 정말 6.25 참전용사 행사에 헌신하고, 또 보훈음악회에 참석해 줬던 분들이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빚진 자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밤 기도회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은혜와 격려와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게 저의 소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저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즐겁고, 또 한편으론 부담스러운 기도회였습니다. 왜냐면 성도들이 무언의 요구이지만, 그만큼 새로운 말씀과 새로운 은혜를 원하고, 또한 새로운 갈망함의 눈빛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충 원고를 준비했다가도 원고를 버리고 다시 설교를 준비할 때도 있었습니다. 대충 준비했다가는 자칫 시간이 길어지고 성도들을 지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약을 하면서도 생명력을 느끼게 하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은사를 더 갈망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저는 강단에 올라갈 때까지 말씀을 준비하며, 또 내용을 축약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올라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금요일까지 ‘성령 축제의 밤’을 하려다가 목요일에 마치고 금요일에는 ‘솔로몬 성경 인물 시리즈’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인격으로 존재하신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를 강조했지만, 가을밤 기도회 때는 성령의 권능과 능력 그리고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강요하지 않았지만, 많이들 나와주셔서 감사하고 갈수록 많이 모이는 성도들로 인해 저는 은근한 부담감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도들에게 고마운 마음에서, 또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에 이런 밤 기도회를 자진해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목사님도 몇 주 좀 쉬세요”라는 권고를 많이 들었지만, 한 주간 밤 기도회를 인도하고 나니 마음이 개운하고 가뿐하고 가벼운 것 같습니다. 다음 주는 또 전반기 교역자 수련회를 인도해야 하고 8월 초가 되면 전교인여름수련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부담감과 압박감은 더해가겠지만, 그 후로는 더 많은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이 있게 되겠죠. 모든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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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고마움과 송구함에서 시작한 밤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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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식탁 교제’(요 21:9-14)
- 창세기를 보면, 개인과 개인이 계약을 맺을 때도 음식을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 언약을 맺을 때도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창 26장)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을 때도 잔치를 벌이고 함께 먹었습니다.(창 31장) 시내산에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재로 계약을 맺을 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음식을 먹고 언약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마셨습니다.(출 24장)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모일 때마다 식탁 교제를 했습니다.(행 2장) 이처럼 식탁 교제는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언약을 맺는 자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과 하신 일은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깊은 만남도 식사 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먹는 식사를 통해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식탁 교제를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알게 되고,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위한 초대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신 후부터 공동체의 식탁 교제는 주님의 임재라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서 중요한 것은, 혼자 드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점과 누구하고라도 함께 식사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식탁의 벗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식탁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의 정체성을 깨우쳐 주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식탁 교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절제하던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불러모아 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식탁을 기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12-14) 우리는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도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눅 22장)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그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만 부활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 8:22)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 떠나시지 않도록 항상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행 2:38)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신도의 수가 약 3,000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이처럼 회개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밥을 먹듯이 회개해야 합니다. 건강한 가족의 큰 힘은 식사를 함께하는 것입니다. 식탁 교제를 하려면 우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모여서 교제해야 합니다. 식탁 교제는 주님을 만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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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식탁 교제’(요 2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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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별은 아쉽지만 소망이 더 크죠”
- 지난주 목요일에 저희 교회를 섬기던 최해규 장로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요일 오후에는 위로예배를 드려 드렸고, 금요일 오후에는 입관예배를 드렸으며, 토요일 점심에는 하관예배까지 인도했습니다. 제가 미국 가기 전에 최진경 장로님이 기도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위중하시기 때문에 기도를 해달라고 오신 것입니다. 저도 솔직히 약간 겁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미국에 가 있을 때 최해규 장로님이 천국 가시면 누가 장례식을 인도해 줄 것인가... 물론 부목사님들이 있지만, 어찌 제가 마음으로 스승처럼 존경했던 최해규 장로님의 마지막 길을 그들에게 맡기겠습니까? 그분은 평생을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시면서 올곧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각종 민방위훈련이나 군부대를 다니면서 효와 충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한번도 민폐를 끼치지 않고 언어생활도 자제를 하시며 사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세월이 흘러서 노환으로 고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장남인 최진경장로님이 저에게 기도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목사님, 제발 우리 아버님이 90세까지만 살면 좋겠습니다. 85세의 연세도 단명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 욕심으로는 90세까지 붙들고 싶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에게는너무나 잔혹한 고통이 될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그렇게 붙들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제 곁에 모시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아버님께서 90세까지 산다는 보장은 못하지만, 지금 아무리 위중하다하더라도 제 마음에 기도의 감동의 확신이 오는데 제가 미국 가는 일정 중에는 하나님이 불러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제 확신을 믿으십시오. 만약에 제 감동이 틀려서 미국 가기 전에 최 장로님이 돌아가신다면 제가 미국 일정을 포기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제가 자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도 혹시나 해서 최 장로님께 전화도 드리고 또 교구 전도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정말 건강 상태가 호전이 됐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사히 미국 일정을 마치고 왔습니다. 그런데 최진경 장로님이 그날따라 보고 싶어서 아버지를 면회했는데 면회하고 바로 그 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들임을 인지하고 눈인사를 하고 나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으셨으니 임종을 하신 것이죠. 제가 그 사연을 듣고 원주에서 달려와 위로 예배를 드려주었습니다. 예배 후에 이런 문자가 왔습니다. “목사님, 장례예배가 천차만별인데 아쉬움이 있거나 껄껄껄 잘했으면 좋았을 걸 등 마음 아픈 장례식도 있는데요. 오늘 장례예배는 정말 특별했습니다. 이별의 아픔은 있으나 감사가 있고 고인이 되신 최해규 장로님이 잘 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나 세상에나 특히 자녀들에게나 성도들에게 모범된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진경 장로님의 인사도 감동이었어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하나님께도 교회에도 더 잘하겠다는 인사가 너무 은혜스러웠습니다. 이별의 아쉬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 며느리와 손자의 모습도 인상이 깊더라고요. 이건 불효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시아버님이 너무나 인생을 잘 살아내신 것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느껴지는 눈물이었어요.” 저도 위로예배 때 이런 말씀을 전했죠. “저도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누가 제 장례를 치러야 될지 모르지만 우리 소 목사님이야말로 정말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눈물과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질병이 없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위로를 받고 안식을 얻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하는 설교 그대로 누군가가 제 장례식에 그런 설교를 하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장례식에서도 저를 아는 성도들이 이별에 대한 아쉬움뿐만 아니라 삶을 위대하게 살고 하나님의 사역을 잘 일구신 존경에 대한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를 원합니다. 저도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 천국 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별의 아픔보다 더 큰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천국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1도 없어요. 어떻게 남은 삶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은 있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해규 장로님의 천국환송예배를 하면서 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천국 소망이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내가 목사 되기를 너무나 잘했지. 내가 목사 안 되고 돈을 많이 벌어서 방탕하게 살았으면 내 영혼이 지옥에 가지 않을까. 앞으로도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의 상급을 위해서 달리고 또 달리며 살아야지.” 그렇습니다. 이별의 아픔보다 더 큰 것은 천국 소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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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별은 아쉽지만 소망이 더 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