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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팽나무 동네
    멀리 바라보이는 산들은 아련한 옛 모습이다. 굴렁쇠를 굴리며 달렸던 신작로와 열매를 따러 부지런히 오르내렸던 팽나무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다. 수면위로 동네정경을 찬찬히 끄집어 올려 보려는 순간 동구 밖 팽나무가 제일 먼저 다가선다. 우람한 모양새의 오래된 팽나무는 가지들이 사방으로 잘 뻗어있어, 여름이면 그늘이 좋았고 팥알 만 한 초록 열매가 잔득 열려 호기심을 자극했다. 애들과 전쟁놀이를 하느라 시누대로 만든 딱총의 실탄이 되는 열매를 따려고 나는 팽나무에 노상 붙어살았다. 아이들을 위해 늘러진 한쪽 가지에 작은 그네가 메어 있었지만 팽나무 가까이에 사는 천 씨 네의 늙은 숫염소가 훼방꾼이었다. 염소를 무서워하는 누이동생을 위해 나는 그놈과 싸워야 했다. 뿔에 받히지 않을만한 안전거리에서 딱총을 쏘아대고 침을 뱉은 후에 그래도 용을 쓰는 놈을 작대기로 때려 물리쳤다.봄 부터 가을까지 팽나무 아래에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밭일하러 온 여인네들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점심때면 왁자지껄하다가 따라온 여자애들이 아기를 업고 비켜나면 조용해졌다. 잠간씩 오수를 즐기다가 금방 젖을 물렸던 하얀 젖무덤이 드러난 채로가 보통이었다. 엄마들이 밭으로 나가면 팽나무는 온통 우리들 차지가 됐다. 여자애들은 아기를 그늘에 눕혀놓고 그네를 타고. 남자애들은 다른 쪽 가지에 올라 열매를 따면서 자동차 달리는 시늉을 내느라 부르릉부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밑에 있는 가지를 발로 굴러댔다. 나는 위로 잡은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나가떨어져 이마와 머리를 다쳐 피를 흘렸지만 그런 게 일상이었다.우리 마을은 강 상류의 동쪽에 있다 해서 강동江東이 지만 팽나무 동네로 통했다. 팽나무가 정자나무인 동네는 강동뿐이라 다른 동네 아이들이 부러워했다. 면소재지인 송정리에 속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만 모여 사는 이방인 촌이었다. 물 건너 공수평 마을은 둘째 고모님 댁을 중심으로 한 장 씨들이 반듯하게 살고 있어 우리 마을과는 격이 달랐다. 우리 동네보다 배나 크고 느티나무가 정자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열매가 열리지 않고 그네를 못했다. 그래서 여자나 아이들이 쉴만한 장소가 아닌 듯 할아버지들 차지였다. 윗동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 팽나무에 오르며 놀다가기를 좋아했다. 그 중에는 동산리에 사는 같은 반 고재봉(후일 남다르게 알려진 분)이 끼었다.우리 동네사람들은 성씨가 각각 달랐다. 팽나무 정자를 기준으로 웃 강동 아래 강동이라고 불렀다. 아래쪽에는 영암 댁이라고 부르는 우리 집을 포함해 일곱 집이 살았다. 바닷가 강진에서 왔다는 강진 댁, 더 멀리 안동에서 왔다는 안동 댁과 하동 댁 등 모두가 타관사람들이라 대대로 마을 어른들이 주관하여 행사를 치루는 이웃 동네로부터 하대를 받기도 했다. 위쪽에 사는 네 가구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앞에는 숯과 장작을 실러 오는 일제 목탄차가 덜컹대며 지나다녔다. 커브를 돌아 냇물을 건너려고 주춤 거릴 때 나는 뒤에 메어 달려가다가 떨어져 다치기도 하고 조수에게 붙잡혀 얻어맞으면서도 재미가 있어 그 짓을 계속했다.우리 동네에서 더 깊은 산속의 골짜기에는 화전민들이 살았다. 숯을 굽고 화전을 일궈 붉은 감자와 콩, 팥, 수수 등을 경작하고 있었다. 장날이면 숯과 감자 등의 잡곡을 한 짐씩 메고 이고 나와 소금과 젓갈 등을 사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팽나무 아래서 쉬었다가곤 했다. 그들 중 한 가정이 공비소탕 때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와서 한동안 같이 지냈었다. 상당히 배운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다 정든 고향을 떠나 깊은 산골로 들어가게 된 사정을 우리에게만 알려주었다. 그해 겨울엔 상황이 바뀌는 통에 토벌대에게 쫓겨 우리가 그곳으로 십여 일간 피난을 간적도 있었다.건너편 공수평 뒷산 너머의 깊은 골짜기 엉골에는 곰과 호랑이가 산다고 했다. 그 초입에 외가 문 씨들의 제각과 관리하는 집이 몇 채있는 노루목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강동으로 이사를 하기 전에 한겨울을 보내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신라 때 불교의 선종이 인도와 중국을 거쳐 제일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된 곳이 봉덕리 가지산이었다. 울창한 비자나무 숲 아래로 흐르는 냇물을 막아 보림사라는 절을 세우려할 때였다. 깊은 물에 살고 있던 용이 쫓겨나면서 가로 막힌 바위산을 처서 생겼다는 용소龍沼 앞에 있는 용문리라는 큰 마을이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이었다. 꼬리를 다친 용이 피를 흘리며 넘어갔다 해서 생긴 피재를 넘으면 장흥군 장평면이다. 장흥읍내와 보성군 벌교로 가는 길목인데 해방 전에는 산적들이 진을 쳤고,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출몰하는 통에 함부로 통행이 어려운 비상지대였다.우리 동네 앞에는 어설프게 만든 콘크리트 다리가 무너진 채로였다. 우마차가 그냥 물길로 어렵게 다녔고 물속에 잠긴 다리는 물고기들의 서식처가 됐다. 동네 애들과 고기도 잡고 돌출된 부분에서 다이빙을 즐겼다. 위쪽에 있는 보의 물이 수로를 따라 동네 앞으로 흘러 팽나무 옆 실개천과 합쳐지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도록 놓인 작은 다리 밑에는 수초가 우거져 있어 붕어와 새우, 징거미가 바글댔다. 형을 따라 바구니로 그것들을 훌쳐 잡아가면 어머니는 햇감자를 넣어 조림을 맛있게 해주어 물고기 잡는데도 열심이었다. 팽나무 열매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에는 딱총놀이를 접어두고 군것질 서리를 하느라 열중이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또래 용석이와 곤식이를 불어냈다. 팽나무 아래에서 서리한 고구마와 풋콩에 옆 개울에서 가재를 잡아 구워먹느라 누가 어찌된다 해도 모른다 할 지경이었다.산에는 동삼動蔘이 라는 오래된 산삼이 있어 산신령이 점지해준 사람들만이 캔다고 했다. 산나물과 약초는 물론 여우, 오소리, 산돼지, 노루가 자주 보였고, 늑대와 곰 호랑이를 봤다는 이들의 이야기 재미있었다. 마을 앞 냇물에는 메기, 쏘가리, 모래무지와 은어가 흔했고 자갈처럼 깔린 게 다슬기였다. 일대의 군주 같은 외할아버지가 문중 일로 나타시면 전답과 선산을 관리하는 둘째외삼촌댁과 우리 집엔 비상이 걸렸다. 누나와 나는 다슬기를 잡아오고 어머니는 국을 끓여서 외할아버지께 바쳐 드렸다. 외삼촌이 그간의 보고를 하느라 야단을 맞으며 진땀을 빼는 게 당연지사 인 듯싶었다. 나는 외할아버지께 불려가 용돈을 받고 대가로 다리를 질근질근 밟아 드렸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빨치산 토벌이 마무리 되고 정전이 되었던 다음해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위해 부산으로 떠나가 살게 되었다.팽나무 동네를 정점으로 엮어지기 시작했던 행적의 그림들이 나를 붙잡는다. 해방이 되던 이듬해 봄부터 시작된 밤사람(야산대)들, 여순 반란군 잔당들, 인민군 패잔병들이 합쳐진 빨치산들 속에서 겪어낸 시간들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간 태어난 일본 고베를 두 번이나 찾아가 봤고 또 찾아 갈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유소년시절을 유별나게 보내야 했던 곳을 찾아 볼 수 없음에 허탈감이 든다. 그래도 기억의 창고에 들어있는 것들 때문에 해마다 한 두 번은 파란 물만 차 있는 현장을 찾는다. 물방울 같은 편린들을 모으려고 타임머신도 타고 노루처럼 달리며 솔개처럼 살피게 된다. 어쨌든 그 시절을 진솔하게 기술記述해야 속이 풀릴 것 같다.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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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0
  • 자살자 유가족 지원과 우리의 생각-하상훈 원장
    숨진 지 2개월 만에 발견된 증평 모녀의 죽음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인간 비극의 극단적 현상을 또 다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의 자살 후 반년 가까이 두 모녀는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전업 주부였던 A씨의 “남편이 먼저 떠나고 난 후 혼자 살기가 너무 힘들다.”라는 유서의 한 마디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지난 6개월간 모녀의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없었다. 가족도 이웃도 국가도 하지 못했다. 아주 큰 구멍이 뚫린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저 안타까움과 자책만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자살자 유가족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지원책을 만들고 실행해야 한다. 이에 필자는 앞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몇 가지 차원에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자살유가족에 대한 인식개선이다. 미국의 유명한 자살심리학자인 슈나이더만은 자살 유가족들은 가장 큰 정신건강의 피해자들이며 그들은 평생 자살자의 유골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살자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오명으로 심한 수치감과 무력감, 그리고 우울감과 절망감의 홍수에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이른다. 그렇기에 유가족들은 밖으로 손을 내밀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또다시 끄집어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도움 요청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한다. 우리 사회는 유가족들도 자살의 피해자로 생각하고, 그들 때문에 고인이 죽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인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정상적인 애도과정을 거쳐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절망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자살 유가족에 대한 상담 및 치료이다. 자살 유가족들은 자살한 가족의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다. 죽은 고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갖게 된다. 이 장애의 특징은 처음 받은 충격이 계속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는 계속된다. 한국생명의전화는 유가족 지원센터를 운영한다. 지난 10년 동안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이 프로그램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후 매월 개최되는 자조모임에 참여하도록 인도된다. 그리고 전화상담을 통해서 서로 보살피는 기회를 주고 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유가족들에게는 병원 치료를 의뢰한다. 자살 유가족들에게 좀 더 많은 상담과 치료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셋째, 법적, 제도적 확충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자살 유가족은 자살 고위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인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새로운 역할로 적응하면서 살아야 한다. 남편이 자살로 죽은 사람들은 가사와 남편이 담당했던 경제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부모가 자살로 죽은 유자녀들은 다른 기댈 언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유가족들은 자살로 인해 생긴 정신적 충격을 감당하면서 또한 외적, 환경적 적응을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큰 재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족들이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법적, 제도적으로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그들의 신상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들이 직접 도움을 요청해야만 알 수 있다면 이미 그들은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자 유가족이 발생하면 그들과 접촉하는 경찰이든 동사무소 직원이든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법률지원, 긴급지원, 상담 및 치료 지원 등에 대한 안내가 반드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넷째, 유가족 지원을 위한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유가족들은 사회적 오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상담이나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가령 자살사건 현장에 경찰이 가서 조사하게 될 때, 정신건강복지센터 혹은 생명의전화 같은 민간단체 상담사들이나 유가족 출신 상담사들이 경찰과 함께 가서, 유가족들을 만나 상담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향후 유가족 지원 프로그램 및 지속적 상담 치료를 안내하면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또한 유가족 지원은 정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경험이 있는 민간단체나 여러 종교단체가 함께 참여하도록 유도해서 심리적 도움과 종교적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유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은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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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6
  • 재경영남장로회 특별강연회 설교
    어느 시대에나 세대 간극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사기 2장 10절에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31절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수아 및 같은 세대 사람들의 신앙과 경험을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알지 못하므로 신앙에서 떠나 우상숭배와 이방족속을 쫓게 된 세대 간극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출애굽기 1장 8, 9절에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라고 말하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탄압과 박멸정책을 세워 시행하게 됩니다. 나라 사정이 과거보다 달라진 점도 있겠으나 요셉 시대와는 오랜 세월이 경과한 역사적 시대적 간극이 자리한 때문이었습니다.오늘의 십년은 예전의 백년보다 더욱 시대 격차가 큽니다. 그런 점에서 세대 갈등이란 자연스런 현상이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화의 단절과 이해의 부족이 그 간격을 더욱 벌여놓았고 갈등과 불신을 증폭시킨 점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세대를 알아야 하고, 부모들은 자녀 세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현장과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교과서적 이해는 가능해도 심정적 공감은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불신과 선입견, 이념적 기준과 정치적 목적, 시대정신과 대중성향에 따르는 입장일 때 자녀들은 죽었다 깨어난대도 부모세대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지금 우리네 사회에서 증폭되어 가는 세대간격은 혈육지친인 가정의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사이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대화불통의 사이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의 해에 자녀들이 부모세대와 어떻게 다른 지점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1.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식민지 생활을 압니까?194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짧게든지 길게든지 일본제국의 식민지 통치를 경험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권을 상실한 망국의 백성이었습니다. 이 강산은 일본 사람이 들어와 주인 노릇했고 한국인은 그들의 식민지 백성에 불과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일어가 국어였고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황민화 정책에 따라 학교는 물론 교회에까지도 신사참배와 동방요배가 강요되었고 나중에는 거부자에 대하여 투옥까지 하게 되었습니다.따라서 죽어지내든지, 이주하든지, 망명하든지, 협력하든지 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나도 부모님을 따라 네 살 때 만주로 이주하여 거기서 살다가 해방된 이듬해인 일곱 살 때 국경선인 압록강을 빙판으로 건너 조국 땅에 귀환한 입장입니다.나라 잃은 백성으로 태어난 부모세대의 아픔과 설움을 과연 자녀들이 얼마나 압니까?2.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진주군 시대를 압니까?일제시대가 오래갈 줄 알고 있었던 이 땅의 대다수 국민들에게 뜻밖에도 해방의 기쁨이 왔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신다 하셨듯이 도적같이 온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연합군의 승전으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게 된 까닭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38도선 남쪽엔 미국군대가 진주하여 관활하게 되고, 38도선 북쪽엔 소련군대가 진주하여 관활하게 되었습니다. 남한은 진주군 사령관이 하지 중장이었고 아놀드 장군이 군정장관이었으며, 북한은 진주군 사령관이 치스차코프 대장이었고 로마넨코 장군이 군정장관이었습니다. 뜻밖에도 나라가 두동강난 가운데 외국 군대가 들어와 군정을 펴게 되고 건국하기까지 3년간 군정시대를 살아야 했던 게 부모세대였습니다. 내가 내 나라, 내 고향 찾아 귀환한 1946년에 압록강은 국경선이라 치더라도 38선을 넘는데 안내원을 사서 밤중에 몰래 넘어야 했으니 해방되고도 국권이 회복된 게 아니었고 한반도가 분단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좌우 이념의 갈등과 혼란이 극심하여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게 부모세대였습니다. 모든 게 정돈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받아야 했고 연명해야 했으니 정말 서러운 세월을 보낸 세대입니다.3.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건국한 과정을 압니까?해방 후 북한은 계획이 치밀했고 부드러운 포고령 속에 철권을 숨긴 소련군정 치하에서 이내 북한 노동당 단일세력이 그 사회와 인민을 장악하게 했으나 남한은 좌우익 대립과 대결이 매우 치열한데다가 통일정부란 이상론에 치우쳐 오히려 북한의 정치공작을 강화시켜 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는 건국의 결단이 내려진 것입니다.북한에선 국민적 지지를 받는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장로가 연금되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기독교도와 지주계급의 사람들이 남쪽으로 월남하게 되었고 남한에선 남로당계열과 반공정부 수립으로 발판을 잃은 이상적 민족주의자들 일부가 월북하게 되었습니다.이런 와중에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었으니 망국의 세월 38년 만에 내 나라를 갖게 된 그 감격을 체험한 세대가 바로 부모세대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반쪽나라로 건국하게 된 허전함도 어쩔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이때 소련 지배하의 38도선 이북은 이미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앞서 ‘인민위원회’란 실질적 정부가 수립되어 북한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 2월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임시인민위원회 창설, 3월에 토지개혁 법령 발표, 7월엔 김일성 종합대학 개설, 10월엔 북조선 중앙은행을 임시인민위 직속으로 이관, 47년 1월엔 김일성 신년사 ‘전국 인민에게 고함’ 발표, 2월엔 ‘임시’란 꼬리표를 떼고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조직했습니다. 그러므로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당연지사입니다. 형식상으로 북한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출범한 날자가 1948년 9월 9일이므로 그보다 25일 앞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2국가.2체제의 책임을 떠 넘기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지금에선 왜 그 때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느냐지만 그 때로선 자칫 실기하면 나라 전체가 공산화 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부모 세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 때 독립운동의 원훈이란 이승만 박사의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단독정부의 결단과 난국의 수습은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4.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6.25동란을 압니까?건국 된지 이년 만에 동족상잔의 6.25동란이 터졌습니다. 북한 공산군의 전면 남침으로 발발한 이 전쟁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16개국에서 군대를 파견했고 북한쪽에 중공군이 가담하여 서울이 두 번, 평양이 한 번 주인이 바뀌게 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1953년 휴전하게 되므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3천리 강토는 폐허가 되다시피 파괴되었고 얼마나 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외국군대도 엄청나게 죽고 다쳤습니다. 1950년 7월에 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이 전사했고, 9월에는 강건 인민군 총참모장이 전사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소개명령에 따라 피난가야 했고 혹은 적치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경산의 자인까지 피난하게 되었는데 낙동강은 물로 건넜으며 나는 아버지 어깨 위에 목말 타듯이 올라타고 건넜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고아가 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며 외국에 건너간 경우들도 흔하였습니다. 정말 살기 위해 허둥대고 먹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대였습니다.젊은 청년들은 전쟁에 나가는게 죽으러 가는 길이었고 역에서의 전송장은 눈물 바다였습니다. 한 집에서 몇 사람씩 전사자 아들 생기는게 흔하였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도 미군이 주둔한 고로 우리학교 학생들은 같은 지역의 고등학교에 곁방살이했고 졸업식도 거기서 했습니다.정말 전쟁의 참화 속에 허둥대며 발버둥질 치며 살아온 게 부모세대입니다.5.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물질적 설움을 압니까?일제시대의 수탈, 해방 후의 혼란, 6.25동란의 상흔과 더불어 정말 가난한 삶을 살아온 게 부모세대입니다. 초근목피란 말이 생소하지 않았습니다. 구호물자로 연명해야 했고 단칸방에 온 식구가 살아야 했습니다. 분뇨 퍼는 사람들이 냄새를 피우며 온 골목을 헤매는 시대였습니다. KBS에 사람 찾는 게 방영되었었지만, 그 때 식구 한 둘 줄이려고 남의 집에 애보기로 보내고 고아원에 맡기는게 예사였습니다. 그렇게 헤어졌다가 서로 만나지 못하여 수십 년 만에, 더러는 반세기를 지나 찾으러 나온 경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머리 좋은 아이들 중 집안 사정 때문에 진학 못하고 썩은 아이들이 늘려 있는 판이었습니다. 간혹 그 시절에 외국에 나가도 장학금 받아가되 배타고 긴긴 여행을 해야 했고 결혼한 사람은 가족과 떨어져 몇 년 간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보다 훨씬 후인 70년 전후에도 미국에 유학 간 친구 목사님이 한국의 부모님이 각각 별세했을 때 돈만 얼마 붙이고 들어오지를 못했습니다. 신학교 동기생인 내가 그것을 찾아서 전달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부모세대입니다.6.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경제적 기적을 압니까?나는 4.19, 5.16날 때만 해도 한국이 과연 자력으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을지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원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경제계획이 1차, 2차, 3차 5개년 계획들을 통해 차곡차곡 진행되고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 해보자’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잘 살아보자’란 구호가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란 새마을 노래가 국민운동가였습니다. 정말 총력동원체제를 통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경제 토대를 마련했고 언제부터인가 춘궁기도 없어졌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도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부모님 세대는 땀 흘린 세대입니다.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월남에 군인으로, 민간 기술자로, 중동에 산업인력으로 나가 열심히 일했고 나라 안에서도 모두 새마을운동 및 산업인력으로 마을과 공장에서, 농촌 및 건설현장에서 열심히들 일했습니다. 기능올림픽에 우승한 자들이 영웅으로 대접받았고 공학도들이 인재로 대우받았습니다.이렇게 땀의 댓가로 여기까지 견인한 게 부모세대입니다.7.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격동적 세월을 압니까?부모들이 살아온 세대는 일제와 해방, 건국과 동란, 혼란과 정변의 연속이었습니다. 4.19 학생의거, 5.16 군사정변, 10.27 유신선포, 10.26 대통령 시해, 12.12 군권찬탈, 5.18 광주항쟁, 6.10 부마항쟁, 6.29 직선선언, 최근의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등 잠시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격변의 연속이었습니다.이 와중에서도 부모세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고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민주주의 토대를 구축하여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산업전사도 있고 민주투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는 거창하지도, 생색내지도 않는 생계형 소시민들입니다. 단지 살기위하여, 가족을 돌보고자 한눈 팔 겨를도 없이 열심히 살아온 그들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후세대는 과실을 공짜로 따먹으면서 그것을 심고 가꾼 부모 세대를 깡그리 무시하고 연령적으로 구분하여 부모세대를 죄인시 해 버립니다.나는 생각컨대 부모세대야말로 아픔과 설움을 지닌 세대이면서도 잡초처럼 그 상황을 뚫고 생존과 번식을 해왔으며 피땀 흘려 일하므로 오늘의 이 나라를 이룩한 자랑스런 분들이라고 여깁니다. 누구보다도 이 땅의 후예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선대인 것입니다.자녀들에게 부모세대는 안정된 사회에서 몇 세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단기간에, 한꺼번에 경험한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오늘날 느낄 소외감과 허탈감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하고 자긍심을 갖겠금 훌륭한 선배로 모실 수 있어야 하고 부모세대는 우리가 흘린 눈물과 땀과 피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여기며 후손들을 기쁨으로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통일한국, 선교한국, 복음한국도 확실하고 분명하며 틀림없이 앞당겨 성취될 것입니다.2018년 3월 13일100주년기념관 소강당대한민국 건국70주년기념예배 및 특별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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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2
  • 한국교회, 도산(島山)선생을 기억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말 일제하에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밤낮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위대한 애국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요 큰 스승이다.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선생의 순국 80주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통일조국을 이룩하는 데에 힘써야 할 때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도산 선생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고 혼탁한 한국사회에서 도산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도산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코우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그날 오후 프랑스 관헌에 체포되어 일경에 인도됐다. 도산은 같은 해 6월초 인천을 거쳐 호송되어 4년형을 받고 서대문과 대전의 감옥에서 복역하게 된다. 또한 도산은 1937년 6월에 소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수양동우회란 흥사단계열의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 26년 1월에 서울에서 조직됐다. 이 사건으로 마침내 도산은 60세의 일기로 영원히 잠들게 된다. 그리고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순국 80주기를 맞이하고 있다.도산 선생과 기독교의 만남은 평생의 축복이었다. 18세가 되는 1894년까지 고향에서 서당 수업을 받으며 지내다가 청일전쟁이 끝나갈 1895년경 서울에 가서 공부할 욕심으로 상경하여 언더우드선교사가 설립한 예수교학당에서 3년간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와 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예수교학당을 통해서다. 신학문을 공부하는 동안, 도산은 그 학교의 접장으로 있던 송순명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뒷날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되거니와 성경을 기초로 하여 근대학문까지 가르치는 이 학교에서 도산은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며 자기성장에 큰 계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독교학교의 기독교교육이 도산의 인격과 사상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도산이 기독교에 들어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늦어도 1895년으로 보인다. 복음을 받은 이후 도산은 곧 기독교의 진리를 전도하고 교회를 건립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기에 열심히 전도한 도산의 영향력은 강서군 일대에 여러 교회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강서군 탄포리(灘浦里)교회는 도산이 평양에서 이곳으로 와서 전도하여 믿게 된 이들이 설립한 것으로 그들이 안창호의 집에 모여 교회를 성립시켰다, 강서군 청산리교회도 안창호의 전도를 받은 이들이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이로도교회는 도산의 전도를 받아 세운 탄포리교회와 송호리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이로도교회와 송호리교회도 또한 도산 선생의 영향력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무렵에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자신을 구하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는 1897년에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그 후 5년간 경향각지를 유세하며 청년웅변가로, 애국운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점진(漸進)학교를 세워 경영하다 1902년 미국 유학에 오르게 되었다. 도산은 미주본토에 상륙한 한인들이 상부상조와 자신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되고 교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 비난받던 한인사회가 몰라볼 정도로 정화되고 미국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1904년 로스앤젤레스 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기독교가 운영하는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수업하게 되었다. 이어서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되었으며, 그 해 퍼시픽 가에 공립협회 회관을 건립함과 동시에 11월 20일에는 『공립신보』를 창간하게 된다. 1907년, 29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귀국한 도산은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마산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을 일으키는 등 국내민족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대성학교 학생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자신의 젊은 학창 시절 기독교 교육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도산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면서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의 길에 오른다. 4월 중순 중국 청도에 이르러 '청도회담'을 개최하고 다시 러시아 행 비자를 받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상해·연태·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니콜리스크의 최관흘 목사를 방문, 그와 함께 국민회 확장과 기독교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3·1운동이 발발했을 적에 도산은 1919년 3월 13일 북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3·1운동을 계승>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한 것으로 전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휘명령 아래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종교계(기독교계)가 한국 기독교도의 참상을 널리 고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비인도적인 일본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해야 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에 있다가 다시 귀국하여 중국과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또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흥사단)을 조직하고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 상해, 그리고 멕시코에까지 그 지부를 두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그 당시 도산은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을 종횡으로 수차 뛰어 다녔으니 이런 활동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역만리에서 고초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도산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외쳤는가 하면, 민족의 희망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선각자이며 기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하고 회개하면서 희망을 가졌다. 그는 기독교에서 민족의 희망을 보았다. 그러기에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정교분리의 신앙이나 민족이 빠진 신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신앙은 당시의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고, 민족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 앞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했던 신앙이다. 그는 민족문제를 추구하는 신앙인인 한편 의와 사랑의 보편적인 가치를 갈구했던 기독교인이었다.도산 선생이 가진 사상의 근원은 기독교의 성경과 체험적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서 선교사들을 통해 구세학당에서 처음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을 이렇게 이끌었던 것이다.특히 도산의 독립운동은 다른 어떤 독립운동 지도자들보다 큰 틀과 구체적 계획을 갖춘 뛰어난 경륜이 담겨 있었다. 그는 좌우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통일단결을 일관되게 추진했다.순국 80주기를 맞아 도산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본보기이자 국가 지도자의 귀감으로 선생의 신앙인격과 교훈은 시대성을 초월해 우리 속에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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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1
  • 학대를 받을수록(출 1:1-14)/ 이 선 규 목사
    출애굽기라는 책은 그 이름이 그 성격을 나타내 주고 있다. 엑소더스는 “떠남” 곧 탈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그 백성의 탈출에서부터 시작한다. 탈출이 없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역사는 성립되지 않는다 .제1의 탈출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 간지 430년 만에 모세를 통한 역사적 탈출을 말하고, 제2의 탈출 복음적 탈출,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12사도들의 유대 종교에서부터 시작하여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을 탈출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복음적 탈출 이라고 할 수 있다.제3의 탈출, 이것은 마지막 때 두 증인을 통하여 창녀 바밸론 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계 8:4).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40년 연단을 받은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신약교회가 물과 성령으로 중생한 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많은 시련과 연단을 거치는 경험을 이룬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땅에 이루어질 가나안에 들어가는 모형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당한 모든 일들이 본보기가 되고 또 세상의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에게 훈계로 기록 되었다고 하였다(고전9:11).신앙은 끊임없는 탈출의 과정이다. 이제 우리는 출애굽기의 제1장에서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약교회 마지막 시대의 7가지 동질성을 알아보고 제3의 탈출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는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아들들의 명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6절).이름들은 이러하니 이것은 창세기의 연속 편으로 본서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여러 이름들을 나열하거나 어떤 독특한 족보를 제시하는 경우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일단락 짓고 그 이름에 근거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시사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야곱의 후손들에 의한 출애굽이라는 새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나열된 명칭들은 나이나 출생 순서에 따라서 기록되지 않고 모계를 따라 정실 레아와 라헬의 아들들로부터 시작되어 그 여종 빌하 등의 이름이 차례대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문은 야곱의 후손들에 의한 출애굽이라는 새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각자 자기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속담을 뒤 바꾸어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당신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시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무척이나 화를 낼 것이다.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가죽을 남기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전도서 7:1은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 보다 낫다고 했다. 여기서 기름이라는 것은 향유로서 곧 값진 재산을 가리킨다.사람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 자기 이름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남긴 이름 가운데는 정말 흐뭇한 이름, 두고두고 기억하고 픈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그런가하면 반대로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이름을 남기는 자도 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바울은 우리가 남길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의 내용들을 고린도후서 6장에서 이렇게 알려 주고 있다.“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거짓 없는 사랑,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 이 남겨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이에 대해 출애굽기 특강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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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2
  • 2017 성탄절 메시지
    크리스천에게 있어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맞이한 성도들의 얼굴을 보면 왜 그렇게 어둡고 우울해 보이는지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쁜 날 우리의 얼굴과 마음도 활짝 펴져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되새겨 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1. 우리 주님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1) 성경의 예언대로 탄생하셨습니다.“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5). 2) 성경의 예언대로 죽으셨습니다.“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3-12).“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마 27:35).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 15:24~25).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눅 23:33).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 19:18).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요 19:23). 2. 성경의 예언대로 부활하셨습니다.“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마 28:5~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 24:5~6).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3~18). 3. 성경의 예언대로 승천하셨습니다.“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 16:19).“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눅 24:51). 4. 성경의 예언대로 심판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그리 할 때에 숲 속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이로다”(대상 16:33).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모든 것이 성경에 예언 되어 있고, 승천하심까지 이루어졌으며, 마지막 다시 오시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낮고 천한 신분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 2:12).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처녀의 몸을 빌러 성령으로 나셨다믿는 자의 죄를 사하고 은혜로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Ⅱ.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일까요?1. 대속물이 되어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악 때문에 온갖 고난과 수치를 참으신 것입니다. 성도 된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닮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1)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①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② 남을 위해 희생하고 먼저 섬기는 자세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모든 언행이 아름답게 나타나 덕을 끼치는 법입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2)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예수님이 대속물이 되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①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난을 잘 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직장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경우, 또한 가정에서도 교회에 나간다고 핍박을 당하는 등... 이러한 여러 고통들을 잘 참으면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② 남을 섬기는 자세로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붙들고 기쁜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죽어야만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명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죽도록 충성하는 것의 완성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충성하는 참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2. 죄인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1)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우리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2) 삭개오처럼 탐관오리 같은 인생을 살아온 우리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7). 3) 아버지 품을 떠나 모든 것을 탕진해 버린 탕자 같은 우리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 왜 죄인들을 불러 죄 사함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영생이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복 중 최고의 복이 영생인 것입니다. 영생이 없는 자들이 소유한 것들은 천국 가는데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우리의 인생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죽어주심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을 때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3.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눅 4:43).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인데 이 뜻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1)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2)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3)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구원의 복이 나타납니다.“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복음이 심령 속에 들어오면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구원의 확신이 생기기 때문에 죽음과 환란의 고통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심령은 완전히 달라져 거듭나는 변화가 오게 되고 삶의 현장에 또한 물질, 명예, 권세, 자손, 건강, 직장 등등의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영육간이 강건해 지는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이론으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말씀을 믿고 확신을 가지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4. 원수마귀를 추방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크리스천의 가장 큰 원수는 사탄 즉, 마귀입니다. 가난마귀, 질병마귀, 낙심마귀, 실패마귀, 불평마귀, 이간질마귀(성도와 주의 종, 부부, 형제지간, 성도와 성도사이를 이간질시킴), 불평마귀, 수근수근마귀 등등..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모든 영과 육의 삶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성도는 이런 마귀의 간악한 계략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교회 안에도 Trouble Maker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일에든 부정적이고 불평불만을 일삼으며, 여론을 조작하여 주의 종을 대적하여 목회를 훼방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대부분은 자신이 잘 못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마귀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Peace Maker는 어떤 일이든 살리는 역사, 되는 역사를 이룹니다. Peace Maker가 되어야 기도가 상달되고 만사에 형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주의 종의 목회에 도움을 주는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내 안에 성령님과 마귀 중 어떤 힘이 존재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며 반성하여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마귀를 때려 부숴야 합니다.예수님은 말씀으로 원수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11). 그까짓 하찮은 물질 때문에, 권세와 명예 때문에 주님께 향한 소중한 믿음을 팔아 버리시겠습니까? 마귀를 때려부수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오.Ⅲ.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1. 예수님의 나심을 만방에 알려야 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아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찬송가 115장(통 115장)처럼 찬양하며 외쳐야 합니다. 주님의 탄생하심은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해야 되는 날이기에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Merry Christmas를 외치며 주님이 탄생하신 날임을 많은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2. 동방 박사들처럼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그 당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왕에게 바쳐지는 선물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 왕의 왕으로 인정했고 때문에 경배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박사들은 먼 거리를 찾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400km(3500리)나 되는 먼 거리이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대면하기까지는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경배(예배)하기 위해 그들은 그 먼 거리를 찾아온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도 주님을 위해, 주님께 경배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온 정성을 다해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을 공경하여, 드려지는 모든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경배의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정성으로 준비된 예물을 예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결론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대 제사상과 대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감격스러운 탄생의 날이 우리들만의 축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가정뿐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한 불쌍한 이웃들에게도 Merry Christmas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곳 누구일지라도 그리스도의 탄생하심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다 알게 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 인류가 주님께서 탄생하신 이 날에 기뻐 뛰며 축제를 벌일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이 일에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동참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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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2
  • 교회세습과 교회의 정의/이 은 재 목사
    jtbc는 1980년 군사 독제시절 언론 통폐합정책으로 국가 권력에 의하여 통폐합된 TBC동양방송의 정통성을 대주주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에서 이어받아 2011년 설립한 민영방송이다. 그래서 jtbc는 민주와 자유를 침해하는 권력의 독재와 국가의 폭력에 강력하게 항거하며 민영방송의 보도가 국영방송 KBS를 압도하는 시청률로 국민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방송사가 되었다. jtbc는 과거에 군사독제와 국가폭력에 의하여 처참하게 짓밟힌 TBC 동양방송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방송사이기에 민주주의와 자유가치를 어느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명성교회와 관련한 보도에서 교회세습이라는 단어를 표현함으로서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는 자유와 정의를 판단함에 있어서 혼란함과 동시에 교회의 주체가 되는 교인의 결정과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보도에 의하여 자신들의 담임목사를 선택한 교회의 구성원 당사자들은 가슴아파하고 있다. 정신적인 가치를 지닌 교회가 세속에서 존재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본질은 세속의 물질에 있지 않고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교회를 세속의 관점에서만 평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에는 사유기업과 같이 가족이 기업의 경영권을 이어받는 세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이끌어가는 임무는 레위지파가 감당했으며, 최고의 권위를 지닌 대제사장과 성전봉사의 직무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는 이것을 세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유대교나 기독교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며, 종교는 세속에서 말하는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아닌 단체나 방송사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세습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본인 스스로가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정신을 크게 폄하하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은 구성원의 결정을 최고의 가치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명성교회의 공동회의 의결을 거친 구성원의 결정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어떠한 강제나 억압이 존재하고 그들의 선택을 비난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정신과 자유를 침해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회의 법이 명성교회의 구성원들의 결정을 강제하거나 억압한다면,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사리판단이 가능한 명성교회 구성원들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다수의 선택으로 결정한 후임자가 비록 선임자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구성원이 원하는 선택에 상회인 총회가 반발하는 것도, 그 것을 세습이라고 말하는 것도, 총회의 헌법이 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교권의 권위로 억압하고 지배하며 군림한다면 그것은 민주와 자유를 억압하는 중세시대 종교재판의 태도를 답습하려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담임목사를 교인 다수에 의하여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정신이 기초적이며 합리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정신적인 공유 집단인 기독교를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나, 북한 정권에서나 사용하는 세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기독교를 마치 기업처럼 평가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이 혈통에 의해 세습을 한다. 하지만, 사회는 이들의 기업세습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업의 세습경영이 합리적이며 정당을 가지고 있지만, 기업의 운영에 있어서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에 다수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외국과 다르게 기업의 세습이 혈통으로 이어지는 행위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못하면서 교회의 혈통승계를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명성교회는 민주적이며 구성원들의 양심의 자유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이것은 노회나 총회가 간섭할 수 없는 교회의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총회의 구성원들 스스로가 대형교회를 권력을 지닌 이익집단과 기업처럼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인 것이다. 총회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담임목사로 선출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혈통은 안 된다는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은 성경으로도, 보편적 민주주의와 자유의 원칙을 총회가 스스로 위법한 것이다. 명성교회는 자신들의 지도자 선택함에 있어서 타인의 억압이나 간섭 없이 자신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만든 교회의 법에 의하여 담임목사를 선택한 것이다. 교회 구성원들에 의한 공동회의 결정은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가 존중받은 교회의 정의(正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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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8
  • 힌두권 지역의 반 개종법에 대한 신중한 대처 필요성 대두 /김 한 성 교수
    최근 서남 아세아에서 기독교 선교는 새로운 도전을 직면하고 있다. 서남아세아에서 타종교를 비방하거나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형법으로 금하는 조치들이 잇달아 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치는 최근에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고 역사가 오래되었고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 더욱 우려스럽다. 따라서 네팔, 인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서 사역하는 한국인 타문화권 사역자들과 한국교회는 이전 보다 더욱 신중한 사역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기독교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네팔에서, 타종교 비방과 개종을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형법이 지난 8월 국회의 의결을 거쳐 지난 10월 16일 대통령이 서명하였고 서명일로부터 90일 뒤에 발효된다. 지난 10월 9일부터 12일까지, 70개국의 회원을 두고 있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위한 국회의원 국제 연합의 대표들이 네팔을 방문하여 대통령을 만나 이 법의 서명을 보류할 것과 네팔 헌법 26장 3절의 개종을 처벌하는 내용을 삭제할 것을 요청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 그 충격은 더욱 크다. 현재, 인도의 29개 주 중에서 구자라트, 마디아 프라데시, 아루나찰 프라데시, 오릿사, 차티스가르, 히마찰 프라데시 등 6개 주가 &#56194;&#56404;종교의 자유법&#56194;&#56405;이라고 부르는 반 개종법을 시행하고 있다. 불교 국가인 스리랑카도 2004년에 이른바 반 개종법을 제정하였으나, 대법원이 법안의 일부 내용이 반 헌법적이라고 결정한 뒤에 지금까지 보류 중이다. 부탄과 미얀마도 개종과 관련하여 유사한 법령을 가지고 있다. 무슬림 인구가 절대 다수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그 규모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신성모독을 처벌하는 법안이 있다. 힌두교인들의 개종을 법률로 막으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1930년대부터 일부 왕국들은 개종을 막기 위한 법령을 시행했다. 독립 이후에, 인도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개종과 관련된 법률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구체적으로 두 번 있었으나, 이것들이 하원의 반대와 법무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네팔도 과거에 절대 힌두 왕정 시절에 개종을 처벌하는 법안을 시행했었다. 각 나라와 주 정부의 반 개종법들은 세부 사항과 형량에서 약간의 차이들이 있을 뿐, 종교적 정서를 거스리는 것에 대한 처벌과 강제적 혹은 기만적 방법을 통한 개종을 처벌하는 내용은 대부분 유사하다. 파키스탄에서는 신성 모독죄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처벌을 받았다. 한편, 인도에서 반 개종법을 통해 처벌받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네팔에서는 이 법령이 최근에 발효되었기에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법령들은 기독교인들의 심리를 충분히 위축시킬 수 있으며, 과격한 힌두교인들이나 불교인들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실제로 반 개종법들이 시행되는 인도의 주들에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공격이 늘었다는 보고가 있다. 반 개종법의 배경에는 서남 아세아인들의 변화에 대한 반감, 외세에 대한 경계심 뿐 아니라 교회의 가시적 전도 활동, 기독교인의 증가, 개종 후 친인척과 이웃 사이의 관계 변화에 대한 불만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의 개선을 위해 연구하는 것이 요청된다. 한국 선교계는 이전보다 더 현지 문화를 이해하고 현지화된 신앙생활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법적 시비에 걸리지 않도록 기독 학생을 위한 장학금 혹은 기독교인을 위한 생활 개선 사업들을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하고, 상대 종교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기보다는 기독교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전도 방법을 더욱 개발해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예배당 건축이나 물질 지원과 같은 가시적 선교를 지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재정 지원은 선교사들의 좋은 의도와 달리, 현지인들을 돈으로 사서 개종시킨다는 누명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반 개종법에 보다 적극적인 대처 방법도 개발해야 한다. 선교사들은 공동으로 사법 소위원회를 구성해서 미리 변호비용을 마련하고 현지인 자문 변호사를 위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소에 종교와 상관없이 지역사회 봉사를 하고 지역사회 유지와 교류하는 것이 예방적 차원에서 유익할 수 있다. 한편, 한국교회는 한국 주재 서남아세아 국가들의 대사들에게 반 개종법의 반 인권성을 강조하며 철폐를 요청하는 운동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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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1-25
  • 한글을 알린 자랑스런 크리스천 주시경 선생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글자임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언문’, ‘암클’, ‘아랫글’이라 불리며 무시당한 훈민정음은 갑오개혁 때 비로소 공식적인 나라 글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15세기에 만들어진 글자이기 때문에 19세기 근대에 사용하기에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을 오늘날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글자의 모습으로 만들고,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른 이가 바로 학자 주시경 선생이다. 주시경(1876~1914) 선생은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평생을 글공부에 바친 가난한 선비 주학원(周鶴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살 때 큰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온 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근대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그는 예배에 참석하며 기독교를 접하였다. 한편 한글로 된 기독교문서 보급과 학생들의 자립정신을 키우기 위해 배재학당 내에 마련된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에서 시간제 직공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인쇄된 각종 기독교서적 및 교회정기간행물과 신문들은 그의 교열ㆍ수정 작업을 거치며, 기독교신앙에 보다 가까이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교회는 한글로 된 성경과 교과서 등 여러 한글책자의 출판을 통하여 민족을 계몽하고 근대화에 기여하고 있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서재필ㆍ윤치호 등이 주도하던 독립협회 회원 겸 기관지인 독립신문 회계 겸 교보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신문의 제작에 참여하면서부터 국문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국문 표기의 통일을 해결하기 위해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고 국문 연구에 진력하여 쉬운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만들게 된다. 이때 주시경은 "자국(自國)을 보존하며 자국을 흥성케 하는 도(道)는 국성(國性)을 장려함에 있고, 국성을 장려하는 도는 국어와 국문을 숭용(崇用)함이 최요(最要)하다"고 주장하면서 국어 국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00년 그는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면서 세례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선교사 어학선생으로 생활하면서, 1889년 설립된 최초의 여성병원인 정동 보구여관에 간호원 양성학교 교사 겸 사무원으로 근무하였고, 정동교회에 출석하면서 1902년에는 정동교회 월은청년회 인제국장 등 임원으로 활약하는 등 기독교 선교사업에 깊이 참여하였다. 1904년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부임하면서 그는 한글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당시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회에는 전덕기를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결집해 있었고, "경천애인"(敬天愛人)을 교육이념으로 상동청년학원(설립자 전덕기, 초대교장 이승만)을 설립되었다. 그는 이 청년학원 설립 당시부터 교사로 봉직하였고, 이후 전덕기 목사와 시작된 교분은 그의 별세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무렵 소외계층인 민중과 민족에 대한 관심이 한글계몽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심화되었다. 1907년 학부(學府) 안에 세워진 국문연구소의 주임위원으로서 국어에 대한 연구 활동과 함께 개인적으로 국어 강습소를 열어 대중 계몽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한문 폐지와 함께 국문 글쓰기를 대중적으로 확대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열정과 관심은 뒤에 최현배(崔鉉培)·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정렬모(鄭烈模)·장지영(張志暎)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식민지 시대 '조선어학회'의 국어국문 연구에 기초가 되었고,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에 반대해 1921년에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조선어 학회’가 만들어진다. 장지영, 김윤재,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잡지인《한글》을 만들고《조선어 사전》편찬을 시작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극렬한 탄압으로 인해 해체될 위기를 맞기도 했으며, 8·15 광복 후에는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시경 선생은 1906년 '대한국어문법', 1908년 '국어문전음학', 1909년 '국문연구' 등을 펴내며 국어의 문법체계를 근대 언어학의 방법과 관점에서 확립한 '1910년 ‘국어문법(國語文法)'을 발간하게 된다. 중국의 한문이나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한자어를 배격하고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실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국어'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 못하고 표제가 '조선어(朝鮮語)문법'(1911)으로 바뀌게 된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도록 강요하고 우리 국어를 '조선어'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한글 연구는 후학들에게 이어져 민족정신을 지키고 독립의지를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주시경 선생의 1910년 박문서관에서 발간한 ‘국어문법(國語文法)'이나 1914년 신문관에서 간행된 ‘말의소리’는 국어 문장의 성분을 알기 쉽게 제시하기 위해 최초로 구문도해(構文圖解)의 방법을 활용하였으며, 특히 근대 언어학의 용어를 순 우리말로 고안하여 이를 체계화해 놓았다는 것은 매우 한글보급에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별세할 때까지 상동청년학원, 배재학교, 이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 학교 교사로 꾸준히 활동하였으며, 그의 장례식 또한 상동교회에서 거행되었다. 198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런 주시경 선생의 선구자적인 한글사랑과 사회 계몽운동의 밑바탕에는 신앙심과 더불어 실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그에게 있어 한글은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였고 나라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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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27
  • 컬럼/이 주 태 장로
    먼 길을 단숨에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인생은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사명은 삶에서의 순종입니다. 영적 쉼에 대한 조용한 준비는 힘을 더하는 또 하나의 사역입니다. 어느새 찾아온 100세의 삶, 그것은 얼마나 쉼이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가끔은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의 오만함이 쉼을 부끄럽게 합니다. 평생목회를 꿈꾸며 원로목사님들을 만납니다. 오직 주님의 복음 하나로 일생을 바친 위대한 전도자의 주름진 손을 잡아봅니다. 아직도 따뜻한 열정이 가슴으로 흐릅니다. 말도 느리고 발음도 꼬이지만 하나님의 숨결 같은 호흡입니다. 서로 함께하는 친구들과의 조용한 만남도 믿음과 동행하는 자리입니다. 비오는 날의 우산처럼 모두가 필요한 동역자들 입니다. 아내도 아프고 누가 누구를 보살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늘을 보고 살았던 존엄처럼 거룩한 자리를 펴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은퇴하신 교계의 원로목회자를 존경과 명예로 예우해야 합니다. 그 분들이 다시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해 드려야 합니다. 흔히 “목회는 은퇴해도 사역에는 은퇴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회에서도 직장을 은퇴하면 자신의 전공과 경험을 살려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원로라는 단어는 호칭의 문제를 떠나 더 큰 명예의 의미가 있습니다. 근대 문명의 황혼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의 ‘문명 비판적 세계관’ 만큼이나 내 아픔에 대한 정리는 바로 쉼이 아닌가 쉽습니다. 흘러간 과거 속에도 손을 잡고 함께 웃고 울었던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고 하나님을 향한 죽음의 순종도 떠오릅니다. 원로목사님들의 현재는 그렇게 이루어진 쉼입니다. 이제 당당한 걸음을 걸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소명과 사명을 평생목회로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역사는 현재를 지배합니다. 몰락한 제국의 역사가 오늘의 현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볼테르의 독설이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에 이르면 패륜이 됩니다. 그에게 따뜻한 손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영성깊은 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겸손과 절제는 사라지고 과도한 확신이 남은 상처입니다. 이제 원로목회자님들의 쉼을 마련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황혼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다시 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상상하는 거룩한 의자를 놓았으면 합니다.‘종로에 나오면 목자카페가 있어 참 좋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 분들의 더 큰 쉼을 위해 우리는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내일을 꿈꾸고 준비하는 노병의 미소는 내일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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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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