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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당한 예배 드리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 이유 상실”
    이 글은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가 11월 30일 백주년기념관에서 행한 한국기독언론협회 제18회 기독언론포럼에서 기조강연으로 발제할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긴급성' 가운데 '예배의 회복' 원고를 발췌해 실은 원고이다. -편집자 주 예배의 회복 한국교회는 지난 아홉 달 넘게 제대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다. 이 일로 코로나19 방역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교회는 안팎으로 큰 타격을 받아 고통과 침체 가운데로 빠져들고 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예배를 생명으로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의 의식도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예장통합 총회가 5월 말에 교단 소속 담임목사 1,135명을 대상으로 한 포스터 코로나19 설문조사에서 설문 당시 교회의 가장 어려운 점을 39%가 ‘교인들의 주일성수 인식과 소속감이 약해졌다’를 꼽고, 재정 문제(20.8%), 다음 세대 교육(15.3%) 등을 꼽았다. 그리고 코로나19의 긍정적인 면은 44.2%가 현장예배의 소중함을 경험하게 됐다고 하였다.지난 6월 말에 리얼미터에 교역자와 교인 2,56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교회의 가장 큰 숙제는 ‘예배에 모이는 교인 수의 감소와 주일성수 약화’를 37.7%가 꼽았고, 예배의 중요성 하락과 신앙 기본 의식 해이, 교회 재정자립 위험 등을 꼽았다. 통계가 없어서 그렇지 코로나 방역 2.5단계 아래 실시했으면 결과는 훨씬 더 부정적일 것이다. 참으로 기막힐 일이 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다. 모이는 예배, 온라인 예배로 교회끼리 성도끼리 갈등하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코로나 사태 이후의 우리 교회의 미래가 특히 예배 생활이 어둡다.1. 예배의 간절한 회복 그동안 우리는 한국교회의 자랑은 성도들의 헌신과 열심,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부흥으로 인한 교인 수와 교회 수 증가,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과 교육하고 훈련할 수 있는 시설들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코로나19 방역이라는 이유로 그 많은 성도가 모여 예배하던 자랑스러운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과 교육관들은 텅 비어 있고, 교회의 모임과 예배당이 사회적으로 비방 거리가 되고 혐오 대상이 되어 버렸다.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는다. 특별히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한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케 하신 하나님은 자랑하지 않고, 교인 수를 자랑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과 시설을 자랑하고, 복음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겉모양에 열심을 내었던 결과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음을 책망하시어 교회당에서 쫓겨난 것은 아닌가? 강제적으로 모이지 못하도록 함은 예배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회복시키시기 위함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두 번이나 하나님이 떠난 성전에 모인 자들을 책망하며 쫓아내신 이유도 건물과 숫자가 아니라 참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2. 교회의 본질인 예배회복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의 소망으로 이 땅에 세우셨고, 그 소망은 합당한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가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상실된다. 교회는 예배공동체다. 예배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교회마다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교회는 모여야 하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교회의 용어가 아닌 정부가 만들어준 ‘비대면예배’라는 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요, 생명인 합당한 예배 회복을 위하여 진력해야 할 것이다.이제는 속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자랑은 교인 수가 아니요, 건물과 프로그램이 아니라,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인 것이다. 합당한 예배는 아벨의 예배이다.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다. 코로나 사태를 이겨내고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합당한 예배 회복이다. 합당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과 복음이 아닌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음을 회개함으로 시작된다. 코로나 사태의 기간이 바로 회개의 은혜를 누릴 시간이다. 버리지 않으면 회복될 수 없다.예배에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예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3. 바른 예배의 회복 개체교회의 공적예배를 관장하는 권세는 개체교회의 당회가 가지고 있다. ‘장로들의 회’는 말씀과 교리, 성례와 치리를 관장할 사명을 짊어진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 창설 직원인 사도들에게 위임한 것이며, 이제는 교회 항존 직원인 장로들에게 위임되어 있다(마 28:18-20; 막 16:15; 행 20:28-3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장). 세상 정부와 공직자는 공적예배 개최와 폐쇄를 주도하고 명령할 그 어떤 권세도 가지고 있지 않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3). 당회는 이를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동시에 세상 정부와 공직자를 공경할 것도 가르쳐야 한다. 특히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분파주의, 검증되지 않은 뉴스나 루머 전달 등을 엄금해야 한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함께 모이는 것이 공적예배임을 가르쳐야 한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인해 영상으로, 각 가정별로 경건회를 할 수밖에 없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예배당에서 공적예배로 모이면서, 영상을 함께 송출하는 교회도 많다. 그러나 당회는 영상 경건회, 가정 경건회, 개인 경건의 시간을 공적예배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키거나 대체 수단인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이는 공적예배로 모이기 힘든 상황에서의 피치 못한 차선책일 뿐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온 교회가 결핍을 깨닫고 애통해야 한다. 그럴 때, 공적예배 시행과 참석이 값없는 은혜이며, 얼마나 고귀한 가치가 있는지 알고 사모하게 된다.한국교회 약화의 가장 큰 원인은 핍박이 아니라 목사의 설교이다. 목사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겔 33:32) 구원과 심판의 나팔을 부는 파수꾼이다(겔 33:1-7). 책망과 교정의 설교(딤후 3:15-16)는 영혼을 구원하지만, 협박하는 설교는 상처를 준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보다 윤리적으로 더 타락했다고 손가락질한다. 이 때문에 목사들은 윤리적인 설교에 대한 압박감이 심하다. 그러나 윤리적인 설교가 난무할 때, 교회는 언제나 윤리적으로 타락해 왔다. 목사는 도덕?윤리 대신 성도들이 세상에서 도무지 들을 수 없는 것,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윤리성을 회복한다. 심방은 목사의 아내와 여전도사가 아니라 장로들의 사명이다(약 5:14-20).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알아야 돌봄과 치리가 가능하다. 지금이야말로 장로들의 심방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이다. 걱정 대신 심방해야 한다. 직접 방문이 힘들면, 전화로라도 부지런히 성도들을 돌봐야 한다. 영상 경건회에 참여했다고 신앙이 유지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집사들의 사역과 활동이 두드러져야 정상이다. 교회 안에 재정적으로 어려운 이가 얼마나 많이 발생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은 사재기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지만, 집사들은 나눔과 베품을 통해 교회를 보호한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 장로의 심방, 집사의 위로를 통해 COVID-19 가운데서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참 교회의 보존과 성장을 세상 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직분자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결론 개혁교회 예배는 그 낱말이 뜻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경배하며, 그를 섬기는 봉사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예배는 앞서 예배의 개념적인 이해에서 밝혔던 것처럼, 예배를 섬김과 봉사의 의미로 이해할 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섬김(봉사)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인류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일을 전제로 하여 한 말이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계시에 근거해서 한 말이기도 하다. 어쨌든 예배는 봉사의 의미를 전제하여 이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봉사는 곧 공적인 예배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전 삶의 봉사로서 신앙적인 삶을 뜻한다(롬 12:1). 그 때문에 예배신학자 프리드리히 칼브(F. Kalb)는 기독교의 예배를 가리켜서 신앙적인 삶의 총체적 표현이라고 했다. 그것은 신앙적인 삶의 근원이 바로 예배에 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기독교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 준 것이다.그렇지만 예배의 근본적인 출발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에게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계시 의존적 관계에 있으며, 그 중심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배신학자 아담(Adam)의 정의에서도 확인된다. “기독교의 예배와 예전은 먼저 인간 편의 노력에 의한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계속적인 선포와 작용으로써 인간을 섬겨 주시는 하나님의 봉사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취 행위에 대한 응답과 감사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적인 행위가 수반된다. 이것은 예배의 주도권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며,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는 역시 인간의 참여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열정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한 섬김은 예배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귀결된다. 그 만남은 역시 대화의 과정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 대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대한 인간 응답으로써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교회의 봉사로 전개되는 영적인 대화의 사건인 것이다. 역시 신약신학자인 로마이어(E. Lohmeyer)도 예배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모든 예전적인 행위는 다만 하나님이 행하신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반응이다.”그리고 현대 신학자들도 예배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이러한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바르트는 신적인 행위로써 교회의 예배와 인간적인 행위로써 교회의 예배를 강조하였고, 동시에 예배를 하나님이 먼저 주도하신 구원의 계시적인 사건에 따라 행해지는 인간의 반응과의 양면적인 관계의 활동이라 하였다. 실천신학자 브루너(P. Brunner)도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일로서의 예배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교회의 봉사로써 예배를 말하였다. 신약신학자 한(W. Hahn)도 예배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섬김과 예배 가운데서 인간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다. 바이차(V. Vajta) 역시 일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일로서의 예배와 믿음의 일로서의 예배로 설명한다. 스위스의 개혁주의 예배신학자 폰 알멘(J.J. von Allmen)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은 기독교 예배의 주체이면서 대상이시고 그는 섬기면서 경배의 대상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예배를 요구하시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말씀하시면서 말씀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탄원하며, 우리의 간청을 들으시는 분이시다”라고 하여 예배의 성격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그리스 정교회의 신학자 니시오티스(N. A. Nissiotis)도 예배란 먼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임재행위로 정의하였다. 즉, 예배는 인간의 주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그 바탕이라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개혁교회예배의 중심으로서 감사의 제물(그리스도의 십자가)은 인간의 대답과 인정에 비하여 절대적인 하나님의 우선권과 행위를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이로써 예배의 중심에는 예수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의 복음이 선포됨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섬기며, 예배에 참여한 회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의 드림은 자신을 드리는 헌신으로 표현된다. 그 때문에 바르트는 개혁교회의 예배야말로 이 땅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영광스런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바른 예배의 실종과 함께 성도의 수가 줄어든 현실에 직면했다. 여기에 대한 바른 대응이 절실히 요청된다.2019년 한 해 주요 장로 교단들의 목사 수는 2018년 대비 증가했으나, 성도 수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이하 예장) 합동 통합 고신 합신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가 올해 총회 보고한 교세 통계를 살펴보면, 5개 교단 모두 목사 수가 소폭 증가했으나 예장고신을 제외하고는 총 교인 수가 하락했다(예장고신은 세례교인 수로 집계). 교회 수는 예장합동 외 4개 교단이 증가했다.예장합동은 목사 수가 2만4395명에서 2만4855명으로 460명 증가했다. 교회 수는 1만1885개에서 1만1758개로 소폭 하락했으며, 총 교인 수는 265만6766명에서 255만6182명으로 무려 10만 명이 감소했다. 예장통합은 목사와 교회가 모두 늘었다. 목사는 2만506명에서 2만775명으로 269명 증가했고, 교회는 9190개에서 9288개로 98개 많아졌다. 총 교인 수는 250만6985명으로 전년 대비 4만7242명 줄었다.예장고신은 목사 수가 7명, 교회 수가 19개 증가해 각각 3876명과 2110개다. 세례교인 수도 늘어 889명이 늘어나 27만8441명을 기록했다. 예장합신은 목사 수가 72명 증가한 2485명, 교회 수는 11개 증가한 972개며 총 교인 수는 13만8968명으로 전년에 비해 4753명 줄어들었다. 기장의 경우 1년간 목사 28명, 교회 2개가 증가하면서 각각 3221명과 1636개였다. 총 교인 수는 1만 2877명 감소한 21만9086명으로 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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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4
  • 시련을 이기는 힘
    시련(試鍊)이란 ‘겪어 내기 힘든 어려움’을 말한다.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시련과 역경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성경에서는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기 위해서 훈련시키는 하나의 도구이며 과정이라고 했다.누구든지 시련과 역경을 겪어 보지 않고는 참다운 인간의 삶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시련이야 말로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온전한 인간을 만드는 기회가 되는 것이며,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좋은 재료가 된다. 쇠는 달구어져 굳어지는 것과 같이 시련을 통해서 굳게 단련된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련의 고통은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아픔과 같고, 새싹이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생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 존 번연은 얼음장 같은 감옥 속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고, 프랭크린 루즈벨트는 지체장애인이었으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시련의 기간을 거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뛰어난 선수가 배출되었으며, 유명작가는 시련이란 재료로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피어난 결정체이기 때문에 어쩌면 시련은 인생이라는 책갈피 속에 항상 끼워져 있는지도 모른다.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을 지금 괴롭히고 슬프게 하고 있는 일들은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라. 당신도 지금의 시련을 통해서 더 굳은 마음을 얻게 되리라”고 말했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시련이란 진리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다.”라고 했다. 성공한 인물과 위인들은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진리의 단계로 도약하고 탈바꿈하는 황금같은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성경 말씀에서도 다윗과 욥 등 많은 인물들이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한 것을 잘 알 수 있고, 우리 사회에서도 시련과 역경 가운데 성공한 인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시련이 인간을 단련시키고 훌륭한 인격자로 만드는 기회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시련의 절정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개인이나 공동체에 있어서 시련의 때를 잘 극복하는 지혜와 노력을 통해 값진 결실을 얻게 된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시련이 한 인간을 성숙되고 변화되게 하는 계기라고 한다면, 국가와 어떤 공동체에 있어서도 보다 나은 변화와 발전을 위한 진통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련의 절정에서 보다 값진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한다.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은 너무 어려운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한 심각한 경제 위축과 국민 모두의 닫혀 버린 행동반경은 그칠 줄 모르는 답답함과 피로감에 빠져 들게 하고 있다.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내세운‘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실패로 인한 경제파탄, 저급하고 무능한 외교, 불안한 안보정책이 그렇고, 보수와 진보, 진영 간의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 등은 국정을 점점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무역과 수출을 다잡아야 할 글로벌상황은 심각하게 추락하고 있기 때문에 숨막히는 시련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너무나 큰 시련은 유수(有數)한 기업들과 자영업자까지 홍수처럼 엄습하고 있어 우리 국민은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지쳐있다.우리는 수준 높은 헌법정신과 정치발전 가치를 자유민주주의의 확고한 기반 위에 세우고, 자유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세심하고 힘 있는 정책추진이 계속돼야 한다. 그리고 국민에게 희생과 봉사로 다가가는 진실과 화해로 감싸주는 위로와 용기를 안겨주어야 한다. 아직도 일부 정치인이 과거사 법에 얽매인 진상조사, 적폐청산을 21대 국회에서도 정책의 중심에 두고 고집한다면 미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우리 앞에 닥친 이 시련의 질곡에서 시대를 가슴에 품고 폭넓은 안목과 지혜로 용기백배하여 대처해 나간다면 더욱 강하고 밝은 내일이 열릴 것이다.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신앙을 지킨’ 한국교회는 세계가 놀랍게 바라보는 발전과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도 온갖 핍박과 순교의 시련을 이겨낸 결실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성경말씀은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다. 더 큰 시련이 닥쳐온다고 해도 인내를 기르고 소망을 키우는 굳은 의지로 살아간다면 시련을 이기는 힘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시련은 가장(假裝)된 축복이다”라고 한 존 웨슬레의 말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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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2
  • 47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목사의 이야기
    박 병 현 목사 <전 총회신학연구원 교수> 1. 법원에서 걸려온 전화2019년 4월 초였다.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에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내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물었다. 1972년에 계엄 군사재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그렇소. 그 형을 선고했던 포고령이 2018년 12월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이 내린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알지 못하고 있소. 그럼 재심을 청구하시겠습니까? 물론 재심을 청구하겟소. 이렇게 해서 재심을 받게 되었다. 2. 47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다. 2019년 6월 19일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에 출석하여 재심을 받았다. 참으로 간략한 재판이었다. 재판장이 사건을 개요하고 군사재판의 요체였던 포고령이 위헌이므로 원천무효가 되었다고 판시하고 검사에게 구형을 요청하였다. 검사는 무죄를 구형하였고, 관선 변호사는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재판장은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비록 늙어 지팡이를 짚고 왔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아직도 살아 있다. 법관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한다. 다시는 불법한 집단에게 무릎 꿇치 말고 이 땅에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무리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추상같은 법집행을 하여 민주헌정을 지켜 내는 용사가 되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고 하였다. 재판장은 곧 무죄를 선고하였다. 실로 47년민에 받은 무죄 판결이었다. 3. 47년 전에 받았던 군사재판 ①1972년 10월 17일 평온하던 세상에 갑짜기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중앙청을 점령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이튼날 전국대학에 긴급 휴교령을 내렸다. 10월 18일 마지막 수업을 하고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다. 기숙사까지도 폐쇄되었다. 당시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2년에 재학중 이었다. ②해남에서 체포되다. 서울에 있지 못하고 고향 해남으로 11월 초에 귀향하였고 11월 8일 수요저녁 해남군 삼산면 화내교회에서 설교하고 다음날 마을회관 앞에 부착된 대통령 담화문을 읽어 보고 모여있는 마을 사람 앞에서 7년제 대의원 투표의 대통령제가 연임에 관한 조항이 없으니 이게 바로 총통제 개헌이라고 설명하였는데, 누군가가 신고하여 이를 저지하는 여자 집사님(71세)도 함께 연행되었다. 해남경찰서에서 1박하고 다음 날에 손에 수갑을 채우고 칼빈소총을 내 등에 겨눈체 짚차에 실려 광주 전남북 계엄사무소로 인계되여 군사재판을 받게되었다. ③군사재판의 내용 재판장은 대령이었고 군 법무사(판사)와 감찰관(검사) 감찰장교 등이 배석하여 하는 재판이었다. 전날 군 검사와 5시간 여의 심문과 나의 까다로운 이의 신청으로 실랑이를 벌리다가 간단한 몇 가지로 기소하여 법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누가 재판관이고 누가 피고인일지 모르는 공방이 벌어졌다. 나는 성경과 신앙에 입각한 애국론을 거론하였고 선지자들의 민권사상을 주장하였다. 판사와 검사에게 당신들은 민주대학 교육을 받고 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가 된 지성인들로서 불법계엄령과 헌정중단과 유신헌법이 양심 앞에 합당한가를 질문하였다. 4. 최후 진술과 선고 나는 재판장을 향하여 가볍게 인사하고 나 자신의 국가관을 간략히 피력한 후 한가지 부탁을 드렸다. 나를 연행하는 경찰관과 다투다가 함께 붙잡혀온 연로한 윤감동 집사님은 애국자이다. 두 아들이 6·25사변 때 군대에 입대하여 전사한 아픔을 가진 어머니며 진짜 죄가 없는 분이므로 석방하여 주실 것을 요청하였다. 그 때 법무사가 내게 질문하였다. 윤 집사님은 진짜 죄가 없다고 했는데 그럼 당신은 죄가 있소? 이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가 난처하여졌다. 지금까지 무죄라고 싸워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싱긋 웃어보이고 대답하였다. 나는 죄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였더니 갑작히 재판장이 크게 웃고 법무사, 검찰관 배심 장교들이 화기가 돌았다. 말 한 마디에 분위기가 확 바꿔져버렸다. 그리고 선고하였다. 윤감동 피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나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나머지 7명에게는 징역 3년형이 선고되었고 나는 그 날로 풀려나게 되었다. 수감된지 50일 만이었다. 법무사는 내게 당부하였다. 당신은 나가면 또 잡혀올 사람이다. 제발 입조심하고 신학공부에 열심하라는 충고였다. 5. 문교부 장관의 퇴학명령서와 중앙정보부 요원의 감시 1973년 3월 학교문이 열리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계엄 중 있었던 일들은 김의환 교수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11월 중순쯤 권오병 문교부 장관이 전국 대학총·학장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된 명단을 낭독시켰다. 연세대 ○○○, 총신대 박현 등 13명을 호명하고 총·학장에게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한다. 그후 학교로 나를 퇴학처분하라는 장관의 명령서가 왔고, 교수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한다. 일부 교수들은 장관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하였고, 또 다른 교수들은 강력히 반대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용기가 없고 겁이 많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학생은 용기가 있어 말하였고 선지자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선지자 학생을 어떻게 짜른단 말인가? 최의원 교수, 김의환 교수, 김득룡 교수님들께 감사말씀 드린다(이제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고마운 스승님들이었다. 나는 이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남은 1년 말썽 피우지 않고 조용히 보냈다. 3월 개강 이후 중앙정보부 요원 1명이 매일 학교로 출근하였다. 노량진경찰서 형사도 매일 출근하였다. 현관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학생들을 감시하였다. 즉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강의 끝나면 녹색 운동복 입고 대학부 학생들과 축구를 하였다. 감시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작한 축구를 60세가 넘도록 계속하였다. 졸업 후 결혼하고 목회지로 떠났다. 그러나 그때 부터 본격적인 감시가 시작되었다. 박정희가 죽고 나서도 전두환 시대가 끝날 때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시를 받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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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2
  • 국민에게 신뢰받는 21대 국회를 기대한다
    21대 총선 투표율이 66.2%로 1992년 14대 총선(71.9%)이후 28년 만에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 했습니다. 총선 투표율이 60%를 넘어선 것은 2004년에 치러진 17대 총선(60.6%)이후 16년 만입니다.코로나19사태 가운데 치러진 21대 국회의원선거는 20대 국회에서 보여준 당리당략에 매여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식물국회에 대한 준엄한 국민의 심판이자 정의롭고 안전한나라,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경제민주화를 이루라는 국민의 명령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총체적 위기에 서있으며 무엇보다 코로나19 극복과 경제회복이라는 우선된 국가위기 극복이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2025년 초고령사회로 진입을 앞두고 저 출산 고령화문제, 최고의 자살률, n방사건과 같은 성적타락의 극치와 함께 강력범죄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쟁만능주의로 협력과 배려를 모르는 학교교육과 가정해체는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모든 영역에서의 신뢰의 부재는 우리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번 총선 결과에 나타난 것처럼 우리사회의 지역과 이념, 계층 간 갈등과 빈부격차의 확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경쟁력의 약화문제입니다. 이 산적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정치지도자들이 국민들과 소통하고 함께하는 신뢰받는 국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21대 국회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고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국민에게 약속한 공약과 정책을 지켜 국민에게 신뢰받고 사랑받는 국회가 되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제언합니다.첫째, 정치인에게 가장 지고한 가치인 정직성과 청렴성 그리고 도덕성을 갖춘 기본이 바로선 국회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지도자가 부정직(당선자 90명 선거법 위반)하고 청렴하지 못하면, 국민이 위임해준 대의정치가 실종되고 정치혐오 현상을 가속시켜 국민들에게 큰 고통을 주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품위를 갖추고 언행에 신중하도록 우리 모두 관심 갖고 주시해야 합니다. 둘째, 대화와 설득으로 협의와 토론이 활성화되어 상식이 통하는 국민에게 신뢰받는 소통의 품격 있는 국회가 되길 바랍니다. 지난 수년 동안 국회가 보여준 날치기와 폭력, 저질 발언 등 구태연 한 후진정치로 합리적인 설득과 협의가 실종되어 국민에게 추한 국회활동을 보였던 것을 반성하고 더 이상 국민이 국회를 염려하는 그런 일은 없도록 국가와 국민을 위해 진정으로 섬기고 헌신하며 성숙하고 진실된 국회의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합니다. 셋째, 코로나19사태 극복과 시급히 경제회복을 통해 국민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상생의 국회가 되길 바랍니다.이제 더 이상 지나친 정쟁과 대립을 피하고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겸허히 듣고 이를 수렴하여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통합의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기업들의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특히 청년일자리를 창출하여 사회양극화를 해소하고 서민경제를 활성화하여 시장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는 생산성 있는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넷째, 그 어느 때보다 급변하는 국제사회의 다양한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정책적 대안과 국제외교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여 코로나19와는 비교 할 수 없는 심각한 국제적 재앙의 위기 앞에서 기후변화와 함께 생태적 전환정책 등 국제사회에 선한 영향력으로 협력해 가는 외교 역량강화에 여야가 협력하는 수준 높은 국회가 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위해 예측 불가한 남북문제, 일본과의 분쟁, 중국의 패권과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와의 복잡 미묘한 다양한 국제관계 등 수 많은 국제외교문제가 산재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초당적인 협력과 지원 그리고 외교 역량 강화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다섯째, 이번에 당선된 기독국회의원들은 섬김과 헌신의 리더십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인권과 복지, 환경 등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천하려는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서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국회 상 정립을 위해 소금과 빛의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기독국회의원들을 의회선교사로서 국회에 파송하였음을 인식하고 이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하고 격려하며 바르고 정직한 정치를 위해 끊임없는 관심과 지원을 다해야합니다. 정치영역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강력하게 미치는 선교영역임을 깨닫고 우리에게 위임된 위대한 선교와 문화명령을 잘 수행 할 수 있도록 기도와 협력이 필요합니다.한국교회가 거룩성과 공공성,공교회성을 회복하고 우리 성도들도 신앙과 삶의 일치를 위해 실천하려는 노력과 함께 진정한 삶의 현장에서의 예배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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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4
  • 아버지 다윗 / 암논의 강간 사건(삼하13장) ②
    이제 다윗은 많이 늙었다. 마음이 약해지고 감정적으로 너무 약해 있어서 아들의 잘못을 책망할 힘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다윗이 아버지 역할을 못한 아버지 부재(不在)의 모습은 다말사건에서도 나타난다. 다말은 이복 오라버니 암논에게 강간 당하여 버림받았을 때, 그 슬픔과 좌절을 안고 아버지에게로 가서 어떤 하소연이나 아픔을 털어 놓지 않았다. 다말은 동복 오라버니 압살롬에게로 가서 위로를 받고 지낸다.다말에게는 아버지 다윗보다 오라버니 압살롬이 더 가까웠고 친밀하였다. 자신의 수치와 슬픔, 마음의 상처를 내어놓을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고 오라버니였다. 이는 평소에 아버지 다윗이 자녀들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에서도 다윗의 아버지 부재 역할은 계속 반복된다. 그는 자녀들의 문제에 대해서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아비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이키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가정은 저주가 임하고 가정의 몰락은 정치의 몰락을 가져오는 비극을 맞이한다.아버지 부재(不在)는 어느 시대이든지 그 시대의 가장 파괴적인 흐름이다. 아버지 부재 현상으로 인해 끔찍한 사건들이 가정과 사회 안에서 발생한다. 사회과학자들은 마약중독, 실업, 자살, 폭력, 정신병, 아동학대 등이 아버지 부재와 매우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죄의 뿌리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죄 문제는 곧 아버지의 문제다. 인류의 죄는 첫 아담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근원이자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아버지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믿는 순간 전 인류가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말았다.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된 아담은 스스로 고아가 되고 그의 자녀들도 고아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만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아버지와 단절된 아담에게 아버지의 생명이 공급되지 않기에 죽음이 오게 되었다. 아담은 아버지를 거부함으로 후세대에게 죄와 사망, 즉 ‘아버지 없음’ 이라는 유산을 물려줄 것 밖에 없었다. 아담이 자진해서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하여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고아가 되었다. “구원은 마지막 아담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구원은 한 남자, 즉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고아가 된 인류에게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심으로 얻게 된 결과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고아가 된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그 가족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골 2:11~22).말라기는 세례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예언할 때 이런 일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않으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 4:6).인류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해줄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없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사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아담의 자손들은 그 어느 세대도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아버지 부재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지상의 남자들이 책임 있는 아버지가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치유 받을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없는 인류에게 아버지가 되사 자신을 통하여 인도하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성부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성숙해 가라 그러면 진짜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가 된다. 자녀는 아버지의 정체성을 이어받는다. 남자에게 아버지의 역할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남자가 아버지가 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자의 존재 목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를 창조하실 때부터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 그래서 모든 남자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될 잠재력이 심겨져 있다. 하나님은 모든 남자 아이가 성장하면 아버지가 되도록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 아이가 소년의 모습을 벗고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인생의 진정한 만족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란 남자의 운명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남자가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하나님과 같은 아버지가 되라는 소명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다면 실패자이다. 호화로운 저택과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명예와 권위가 있어도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한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없다. 한 남자의 성공여부는 그가 얼마나 경건한 아버지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남자다움’의 표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자는 어떤 존재인가, 곧 그리스도를 닮음(Christlikeness)이다. 그리스도를 닮음과 남자다움이란 단어는 동의어이다. 그리스도를 닮음과 여자다움(Womanhood)이란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으면 그들은 아주 높게 끌어올려진다. 그들의 인격과 성품이 충만히 성숙된다. 모든 개인의 최고선(最高善)은 예수님 같아지는 것이다.교회, 가정, 국가의 강성함은 남자의 강성함과 일치한다. 책임을 지고 이끌어가는 지도력은 남자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면에서 모든 남자들이 남자답기를 위하신다. 가정에서의 모든 문제는 아버지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영적 미성숙 때문에 죄와 부도덕, 비윤리적 행실, 그리고 여자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을 뿐더러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을 하며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지 또 어떤 양심의 기초를 가져야 할 지 판단하게 해 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다움은 그리스도를 닮음의 동의어이다. 그리스도 닮음이란, 요셉이 보디발 장군 부인의 유혹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까?(창 39:9)” 하면서 과감히 거절하였다.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이 그의 인생의 잣대였다. 이것이 남자다움(Manliness)이다. 인생에는 생명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용기, 책임, 사랑, 진실, 품위, 하나님의 영광 등이다. 이것이 남자다움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제일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가정의 머리이다. 지도자요 교사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는 사랑의 왕이요 대제사장이다. 그래서 변화의 시작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어야 가족들도 변화된다. 아버지는 변화의 기준이다. 가족들의 경건한 삶의 모델이다. 요나단 에드워즈의 가정 1703년에 태어난 조나단 에드워드는 가정을 경건하게 이끈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마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지성이었을 것이다. 목사이자 저술가이며 나중에는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을 지낸 그와 아내는 열한 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의 남자 후손들 가운데 알려진 바로는 다음과 같은 아들이 있다. •300명이 넘는 목사와 선교사, 신학 교수가 있었고, •120명은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했고, •110명은 변호사가 되었고, •60명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30명은 법관이 되었으며,•14명은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3명은 미국 상원 의원이 되었고, •1명은 미국의 부통령이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아들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각기 자신의 아들을 구했고, 이들은 또 자라나서 자기 아들을 구한 것이다. 대대로 소년들이 구출되었다.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죽은 뒤에도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후손에게 감화를 준 것이다. 에드워즈는 날마다 열세 시간씩 규칙적으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가르침과 저술, 목회로 인해 바쁜 일정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한 시간씩은 꼭 집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에드워즈는 역사상 위대한 지성인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계적인 학자는 일의 우선순위를 바로 알았다. 그는 단지 저녁 식사를 하러 집에 온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온 것이다. 에드워즈가 대대로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역할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세대 간에 경건한 남자들이 계속해서 더욱 경건한 남자들을 낳는 고리가 있을까? 아니면 뚜렷한 역할 모델을 갖지 못한 남자들로부터 혼란스러운 리더십만이 대대로 이어질까? 그와 같은 미래 세대의 운명이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 오늘 아버지가 내리는 선택이 앞으로 가계를 이을 세대들의 삶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을 구출한다면 이는 아버지 삶에서 가장 위대하고 만족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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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2
  • ■아버지 다윗 암논의 강간 사건 / (삼하13장) ①
    최근에 어느 인기 방송 연예인이 불안 장애로 모든 방송활동을 중단한다고 했다. 그의 소속사는 보도 자료를 통해 “그가 오래 전부터 앓아 왔던 불안 장애가 최근 심각해지면서 방송을 진행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며 제작진과 소속사 및 방송 동료들과 상의 끝에 휴식을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병적인 긴장감을 얘기하며 “매주 이런 느낌이 있지 않나. 협심증이 올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무섭다. 시청자분들은 아버지 같은 느낌이다. 평소에는 인자하시지만 가끔 때로는 무섭고, 그래서 긴장을 한다.”고 말했다.방송활동에서 시청자를 아버지같이 느끼며 아버지 같이 무섭게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긴장을 느끼는 그 뿌리에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해 주고 품어 주며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주는 아버지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렇게 아버지는 아들의 생업인 방송 활동을 중단할 만큼 정서적으로 중대한 영향력을 주는 존재이다. 그래서 C.S 루이스(Lewis)는 ‘남성의 포기’에서 “아버지 노릇이 우주의 핵심”이라고 언급했다.아버지와의 관계는 이 세상 모든 지혜의 근원이다. 존재의 가장 근본은 아버지노릇을 잘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는 힘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본 글에서는 사무엘하 13장에서 18장에 걸쳐 등장하는 아버지 다윗 왕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다윗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거론된 하나님의 종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된 모습은 오늘 우리의 아버지 모습처럼 미숙한 부분을 조금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윗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예표이지만 다윗은 많은 약점을 지녔고 흠이 많고 문제가 많은 인물이다. 암논의 다말 강간 사건 (삼하 13장)다윗의 딸 다말은 많은 남자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배다른 오라버니인 암논이 있었다. 암논은 왕위 계승 서열 첫 번째인 다윗의 장자이다. 다윗의 장자인 암논은 언젠가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다윗은 암논이 맏아들이기에 무척 사랑하였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암논이 아픈 척하면서 누워있을 때 아버지 다윗이 병문안을 갔다. 그때 암논이 “아버지여!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에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다. 다윗은 즉시 사람을 다말에게 보내어 암논을 시중들게 했다(삼하 13:6). 이에 다말도 아버지의 지시에 순종하여 즉시 배다른 오라버니 암논에게 가서 시중을 들었다. 이렇게 아버지 다윗은 아들 암논의 병문안 요청을 즉시 실행하는 데서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다. 암논의 병은 배다른 여동생 다말에 대한 상사병이었다(삼하13:2). 전후 문맥을 보면 암논이 다말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단순한 성적 욕망이었다. 욕망에 시달린 암논은 급기야 식욕을 잃고 여위고 창백해져 갔다. 암논의 창백한 낯빛과 줄어든 체중, 우울한 분위기는 곧 사촌이요 친구였던 요나답의 눈에 뛰었다. 요나답이 암논에게 물었다.“형님, 나날이 안색이 수척해지는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나의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내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오.”요나답은 아주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는 암논이 다말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사악한 계략을 제안한다. 요나납의 제안에 따라 암논은 병든 체 하다가 아버지의 문병을 받는다. 아버지 다윗의 명을 받은 다말은 암논이 병상에 누워 그가 보는 앞에서 음식을 만들어 그릇에 담아 오빠에게 갖다 준다. 그때 암논은 주위 사람들을 물러치고 다말에게 “내가 몸이 불편하니 가까이 와서 손수 나에게 먹여 다오!” 라고 말한다. 그녀가 침대 가까이 왔을 때 소리 내어 말했다.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삼 하 13:11). 그러나 배다른 오라버니에게 성적인 쾌락에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암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열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며 필사적으로 그 순간을 모면하려 했다. 그러나 암논은 그녀를 쓰러뜨려 억지로 욕망을 충족시켰다. 욕망을 채운 암논은 심경의 변화를 가져왔다. “암논이 다말을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여졌다”(삼하 13:15). 다말은 자기의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에 얹고 크게 울부짖으며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압살롬은 동복 남매였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심히 노한다(삼하 13:21).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암논의 행위에 대해 책망을 하거나 수치를 당한 다말을 불러 위로한다든지 하여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성경은 이렇게 묵인된 상태에서 2년을 보내었다고 언급한다(삼하 13:23).다윗은 왜 암논의 강간 사건을 외면했는가?암논이 다말을 강간하고 내버린 사건에 대해 아버지 다윗은 아무런 수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다윗의 자식들은 어릴 적에는 공공연한 악에 물들어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제어하시는 손길이 떠나간 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사악한 죄를 지은 후였다. 부모가 의의 길을 저버린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과 같은 악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징계하시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린 자녀들은 자기 부모들의 악한 행실을 구실삼아 자기들의 악행을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밧세바를 간음한 다윗에게 나단을 통해 주셨던 무서운 경고를 행하시는 방식은 훈계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 주었다. 그 경고는 다윗의 왕궁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전소되거나 큰 폭풍으로 철저히 파괴되는 식으로 이행되지 않았다. 또 그것은 그의 아들들 중 하나가 번개에 맞아 죽거나, 다른 아들은 지진에 의해 땅속으로 삼켜지는 식의 천벌이 실행되지도 않았다.아버지의 역할에서 가르치고 훈계하는 역할은 중요한 책임이다.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을 적절하게 훈육할 것을 요구하신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다윗의 자녀에 대한 훈계를 간과한 모습은 마치 엘리 제사장이 실수한 모습과도 같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다(삼상 3:13). “응석받이로 자란 자녀들이 그들의 경건한 부모에게 시련거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부모들은 어리석은 애정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무시한다.”아버지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자신의 씨를 통해 나온 이 들이 성장하며 발전할 수 있도록 영양분과 자원을 제공해 주는 존재이다. 자녀를 가르치는 일은 남자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이다. 남자는 가르치는 일에 적합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남성들은 본성적으로 가르치고 지시하기를 좋아한다. 아버지는 가르치는 본능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남자는 누구나 가르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아버지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 남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지식과 명철을 얻을 때 정직과 성실로 가정을 이끌 수 있다.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치는 모습은 성경에서도 보여 준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언 2:6).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잠언 4:5).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잠언 3:1~13).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잠언 4:1).”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잠언 5:1).“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언 13:1). 다윗이 책임 있는 아버지의 역할을 잘했다면 암논을 불러서 책망과 훈계 그리고 적절한 징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말에게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잘못 키운 것에 대한 책임으로 딸에게 사과를 하고 위로가 될 만한 특별한 보상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버지 다윗은 그 사건을 조금도 다스리지 못하고 2년을 침묵으로 일관햇을까? 침묵이라기보다 방임, 무책임으로 보냈다고 볼 수도 있다.그렇다면 아버지 다윗의 숨겨져 있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밧세바의 임신, 그 임신을 숨기기 위해 남편 우리야를 불러 들이고 밧세바와 동침을 유도하나 실패하자, 요압 장군에게 비밀서신을 보내 우리야를 최전방에서 죽게 하고,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다. 은밀하게 진행된 일에 철퇴를 가한 사람은 나단 선지자였다. 나단의 지적과 책망을 듣고 다윗은 침상을 적시며 회개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사건은 잊혀졌다. 그런데 다윗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내버린 사실을 듣는다. 마치 자신의 범죄 현장을 보는 둣했다.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 아들이 그 아버지를 쏙 빼 닮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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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7
  • 성경을 들고 유사이래 탄생사를 중론함
    여러분! 세상에 한 아이가 태어날 때 하나님(성령)이 현현하시고 천사들이 총동원되고 수천 수백년 전 예언해 온 예언자들의 예언이 응답된 이런 탄생사는 유사이래 어느 때에 있었든가? 확신컨데 예수 그리스도 탄생밖에는 없다. 아니, 있는가? 있으면 말해보시라? 여러분의 출생, 공자 선생, 석가모니 선생, 소크라테스 선생들이 태어날 때 하나님(성령)이 나타나시고, 천사의 교시와 천군들의 평화의 찬송과 예언자들의 예언의 응답으로 탄생했든가? 단언하건데 아니다. 모든 인간(현인)은 무엇하다 가려고 출생했는가? 밥이나 먹고 놀다가 잠이나 자다 가려고 태어났을까? 조각가의 부친과 조산부 모친 밑에 헬라 아덴에서 출생한 소크라테스 선생은 헬라와 철학을 대표하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출하고 “철학의 지혜”를 가르치다 70~80 노령에 옥중에서 사약을 받아 눈을 감았고, 중국과 유교를 대표한 공자님은 자당 “안”씨가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데 성은 “공”씨요, 이름은 “구”요, 자호는 “중니”로 주역과 사서삼경을 교훈하다 62세에 가셨다. 인도와 불교를 대표한 석가모니 선생은(석존) 성은 “가오타마”, 이름은 “싯타르타”로 인도 카필라 바스투 성주 “정반왕”과 “마야” 모친 밑에 럼비니 동산 무우스나무 밑에서 태어나 도를 깨달아 석가족의 성자인 “석가모니(부타)”란 이름(의성, 옳은 것의 성취의 뜻)으로 49년간 자비를 설법하다가 80노년에 등에 등창 또는 이질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것이 현인들이 오셔서 행한 일들이다. 여러분! 귀하께서 출생 목적은 알고 사시는지? 성경의 주 하나님 가라사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고전 9:31), “하나님 위해 살고 하나님 위해 죽고”(롬 14:8~8), “선한 일을 행하라”(엡 2:10), 그것이 출생 목적이니라! 에수의 탄생사는 어떠한가? 저 이스라엘 유대 베들레헴 말구유에 “말씀이 육신 도성인신 되어”(요 1:4, 14), 탄생한 예수님은 “예수”라는 개인적인 이름과 “그리스도”란 직책상의 이름으로 ① 죄인 구원의 만민 구주 사역(마 1:18~21), ② 대선지자 대제사장 왕의 왕으로 기름 부음받은 그리스도의 퉁치수행 사역(마 1:16, 눅 2:11), (그리스도란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인데 선지자, 제사장, 왕을 임명할 때 머리에다 기름을 부어 임명한 것을 이러므로 예수는 삼대 직분을 받아 탄생한 것이다.) ③ 우리와 영원히 동거 목적인 ‘임마누엘’ 사역(마 1:23, 28:20), ④ 마귀를 멸하는 사역(요일 3:8), ⑤ 평화의 사역(눅 2:14) 등등을 위해서 탄생하였다. 다시 거론컨데 이 분은 누구신가?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 성 삼위일체자로 천지만물 창조자, 만물을 붙드시고 운행하는 자(해와 달과 별과 모든 만물 등 주 예수계서 손 놔버리시면 온 우주 삼라만상은 곧장 혼비백산 박살나고 말 것, 히 1:3), 우리구원(죄에서) 위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자, 세상 종말을 긋고 재림하실자, 백보좌의 심판자, 신천신지 성취자! 자! 여러분! 유사이래 이러한 사명자로 탄생하신 대 탄생사건을 듣고 본 일이 있는가? 우리의 출생은 가정 가문적 사건, 현인들의 탄생은 지역적 국가적인 사건,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세계적 대우주적 사건으로 유사이래 찾아볼 수 없는 천상천하의 사건, 인간의 구주 도성인신의 사건이다. 그 증명은 성령 하나님이, 천군천사들이, 예언한 자들이, 성경이, Calandar의 “서기”를 온 세계가 사용함이 이를 증명 증거한다. 이러한 대탄생사를 쥐꼬리만한 인간 두뇌 지식으로 푼다고?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 여러분! 보시라! 최초 여자는 어떻게 출생했는가?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에서 출생시키지 않았는가? 또한 최초의 남자는 흙에서 하나님의 생기로 창조 출생시키지 않았는가? 죽음이 임박한 백세 노인도 아들을 출생케 한 일, 해와 달과 삼라만상은 누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처녀잉태 그 탄생을 왜 못할건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작은 지식으로 풀려다가 헛소리 많이 했고, 또한 벌거벗은 미친짓 많이 했느니라. 여러분! 미국 제일의 정통프린스턴 신학교가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하고 왜 분립된지 아시는가?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 중의 하나가 예수 동정녀 탄생 문제였다. 정통프린스턴 신학교 스티븐슨 교장은 동정탄생을 인정하든 부정하든 덮어두자는 것이고, 메쳔박사는 동정탄생 인정치 않는 자는 신자도 못된다고 주장하는 싸움에 신학교도 분립되고 교단도 분립된 것 아닌가? 우주적 사건인 예수 탄생은 연구로 푸는 것이 아니고 무릎꿇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으로 풀려하지 말라. 왜? 불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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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3
  • ■다윗과 미갈의 부부싸움과 내면 치유/ 사무엘하 6:16~23
    다윗의 내면에도 분노의 뿌리가 있었다 다윗은 왜 아내의 분노에 대해 자신도 분노로 맞섰나? ① 그는 여전히 남자로서 존재하고, 남편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다윗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려해 주고 공감해 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남자로 살더라도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으로 아버지로 변신해야 되는데 다윗은 그러지를 못했다. 아내는 집에 들어온 남편을 남편으로 대하는데 남편은 계속해서 밖에서 하던 남자 역할을 집에서도 요구를 하니 아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내에게 명령하고 지시 통제하니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픔을 느낀다. 아내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편을 원하고 있고 자녀들은 인정해 주고 칭찬해주는 아버지를 요구하고 있다. 다윗은 아내의 비난을 자신을 무시하는 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여자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불안해 한다면, 남자는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 남편들은 아내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관계가 행복을 결정짓는다. 관계개선 없이는 행복할 수 없으니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변화를 위해 도와주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② 다윗은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정서적으로 공감받고 존중받는 경험이 부족한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제일 막내였다. 일곱 형들은 집에서 점심시간에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는 혼자 들판에 남겨져서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형들이 전쟁터에 있을 때도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갔을 때 큰형 엘리압이 분노하여 한 말은 책망하고 배척하는 말이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 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17:28). 두 사람은 제일 큰형과 제일 막내관계이다. 막내를 귀여워해 줄 수 있었고 염려해 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관계인데도 다윗을 아껴주지 않는 형제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그만큼 다윗은 형제들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자연히 다윗의 내면에는 내면아이(inner child)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내면아이가 미갈과의 충돌을 풀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다윗의 자녀들 사이에 근친상간, 살인, 반란을 겪는데도 다윗은 문제를 풀지 못해 침묵하거나 도피로 일관했다. ③ 다윗이 사울 왕의 사위가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윗이 대답한 말이다.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다”(삼상 18:23). 다윗이 대답한 말은 평소에 그가 간직하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가난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고 목동출신이라는 열등감, 이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무명의 시골 출신이라는 열등감이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가난하고 천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무시하는 습관이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모습이 자신에 대해 무시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내면아이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역기능적인 가정환경에 많이 노출된 다윗은 낮은 자존감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자연히 다윗은 이성관계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자기 이미지가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미갈이 다윗에 대해 비난했을 때 다윗은 자신을 무시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자 역시 미갈에 대해 비난과 부부관계를 완전히 단절해 버린 것이다. 심각하게 무시를 당한 다윗은 한 번의 아픔을 풀어보려는 시도를 하거나 그가 그렇게 익숙했던 하나님과의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려는 시도도 없었다. 그만큼 다윗은 미갈을 통한 무시당함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 : 다윗에게도 내면세계의 탐색과 치유가 필요했다 다윗이 가족관계에서 자주 사용되어지는 방어기제는 회피(avoidance)인데, 어쩌면 자신을 무시하는 미갈과의 관계가 힘드니까 아예 그녀를 보지 않기 위해 회피를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나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다윗이 아내 미갈과의 갈등을 풀지 못해서 틈이 생길 때 나타난 여자가 밧세바였다. 다윗이 밧세바와 정을 통하게 된다. 그리고 밧세바와의 불륜을 덮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든다.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은 자신의 내면세계의 탐색과 치유가 필요했다. 다윗이 뛰어난 영성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성취지향적인 성향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사람은 자신의 만족이 채워지면 자만하게 되고 자신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다. 가장 잘 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그때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할 때 아내의 권면이 있었으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집안에 있는 여자가 무엇을 알겠나 싶었을 것이다. 그때 아내의 권면을 진진하게 듣고 고민하면서 아내와 더 깊이 대화를 했더라면 위기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아내 미갈과의 갈등을 풀지 못한 후에 전쟁에서 여러 번의 승리가 있었으나 다윗의 내면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있었다. 그 틈을 타고 들어온 여자가 밧세바였다. 밧세바와의 만남 이후로부터 집안에는 계속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때도 다윗은 회피(avoidance)라는 방법으로 문제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① 장자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연모하여 강간한다. ② 그러나 다말은 암논에게 버림을 받는다. 이런 소식을 다윗이 들었을 때 심히 노하였다. 그렇지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침묵하고 있었다. ③ 다말이 아버지에게로 가지 않고 동복(同腹) 오빠 압살롬의 집으로 피신한다. 다말이 아버지 다윗에게로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평소에 다윗이 다말을 사랑하고 친밀했더라면 다말은 아버지에게 찾아 갔을 것이다. 압살롬은 자신에게 찾아온 다말을 위로하면서 아버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까 주시하며 아버지의 동정을 살핀다. ④ 계속되는 아버지의 무관심한 방관에 압살롬은 2년 뒤에 양털 깎는 축제 때, 여동생을 강간한 암논을 죽인다. 다말이 당한 아픔에 복수한 것이다. 그리고 외갓집이 있는 그술 땅으로 도망 간다. 이런 형제 살인소식을 들은 다윗은 옷을 찢고 드러누워 상심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전과 같이 침묵하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자녀들이 이런 아버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⑤ 압살롬이 그술에서 3년을 지내는데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고 군대 장관 요압이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을 주선한다. 압살롬이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다윗은 아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이 어쩐 일인가? 당연히 보고 싶은 아들이 왔으면 그간의 사정을 알아보고 위로하든지, 책망을 하든지 사건을 수습하고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⑥ 압살롬은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준 것에 대해 반가웠으나 자신의 얼굴을 보지도 않는 아버지에 대해 꽁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많은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침묵에 대해 분노가 쌓인다. 결국 아버지와의 전면전을 벌이기 위해 은밀히 준비한다. ⑦ 4년 후에 압살롬은 그동안 준비한 대군을 이끌고 아버지 다윗의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여 아버지를 내쫓아버린다. 아버지의 왕권을 탈취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동침한다. 이때도 다윗은 아들을 만나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든지, 타협을 하든지 압살롬의 분노를 파악하고 적절한 조율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다윗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볼 때 그의 문제에 대한 방어는 회피(avoidance)로 나타난다. ⑧ 나중에 압살롬은 다윗의 군대와 싸우다가 도망하던 중 머리가 나무에 매달려 요압 장군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다. 아들의 죽음을 듣고 다윗은 통곡한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때 지난 울음은 아무리 울어도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 올 리가 없다. 가족 간에 위기를 겪을 때마다 이상하게 다윗은 정면 돌파를 못한다. 전쟁 때, 국가의 위기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잘 풀어 가는데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유독 침묵하거나 회피를 통해 숨어버린다. 부부관계, 자녀와의 관계를 건강하게 잘 풀어가기 위해서는 성장과정에서 지지와 돌봄, 정서적인 공감과 배려가 중요한 양육의 요소가 되어야 함을 다윗과 미갈 부부관계를 통해서 보게 된다. 건강한 인성과 관계훈련의 모판은 가정이다. 모판에서 잘 자란 모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 풍성하게 열매를 맺듯이 가정에서 인성과 사회성을 잘 배우고 경험하며 자란 자녀가 가족, 학교, 교회, 사회 관계에서 잘 적응하고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된다. 결혼생활의 행복과 불행은 갈등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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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3
  • 다윗과 미갈의 부부싸움과 내면 치유/ 사무엘하 6:16~23
    부부갈등의 해결책은 공감이다공감은 상대방의 영혼을 안아주는 것이며 ‘당신은 나 자신과 똑같이 소중한 나, 나보다 더 귀한 존재’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자를 살맛나게 만드는 묘약이다. 아내가 “힘들다”했을 때 “무슨 일 있었어?”하고 물어 주고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그리고 따뜻하게 안아 주며 “여보 당신 정말 힘들었구나”하는 것이 공감이다. 이를 다윗과 미갈의 충돌에 적용해 본다. 다윗이 집에 들어갔을 때 미갈이 비난으로 대했는데, 그때 다윗이 아내에 대한 공감 능력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다독이면서 접근했을 것이다.“여보! 당신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무슨 힘든 일이 있었어요? 당신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프네요. 우리 차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해 봐요.” 아내를 안아주면서 아내의 마음을 풀어 주려는 의도로 물어 볼 수 있었더라면 미갈이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까?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성으로 돌아오면서 거룩한 얼굴 기쁨어린 모습을 미갈이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멸시한 것에 대해 주석가들은 미갈의 행동이 저주를 자초했다고만 설명하고 끝낸다.“그녀는 다윗의 신앙을 부당하게 비난했고 하나님은 그녀가 자식을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녀를 질타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들을 높이시고 자신과 자신의 종들과 자신을 섬기는 일을 조롱하는 자들을 가볍게 여기신다.”“미갈이 교만하게 비신앙적으로 다윗을 무시한 벌을 받아 다윗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고 미갈은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의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 아내에 대해서 무력한 것으로 보인다. 거룩한 기쁨이 아내의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거나 공감해 주려는 여유가 없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 거룩한 기쁨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원수도 품고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자신을 무시했다고 저주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면 거룩한 기쁨은 지독한 이기주의로 보여진다. 잘못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징계라는 도식에서 보면 ‘하나님은 징계자’란 이미지만 남는다. 정말 하나님은 그런 분이신가?우리가 잘못하면 우리를 징계만 하시는 심판자 하나님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징계를 야기시킨 우리 자신의 잘못을 먼저 살펴 볼 때 지혜를 얻고 그 지혜로 부부갈등을 잘 풀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담의 원죄를 출생 때부터 품고 태어난다. 그럼에도 성경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한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못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거룩한 다윗이 아내의 비난과 업신여김에 대해서 아내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아내의 응어리진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으로 품어주고 그녀의 상처가 회복되기를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남편의 모습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Ⅱ. 다윗과 미갈의 내면 세계 탐색미갈의 내면에는 분노의 뿌리가 있었다그녀는 왜 남편 다윗의 여호와로 인한 기쁨을 수용하고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깊어 있다.① 아버지 사울이 자신의 사위이며 미갈의 남편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자신의 남편을 죽이려한 행위는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버지가 결혼을 승낙했고 다윗을 정식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런 자신의 남편을 죽이려 했으니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내면에 쌓였을 것이다.②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이 도망갔다. 그때 미갈은 친정집에서 홀로 남아 있었다. 남편과 함께 도망을 갔어야 했는데 미갈은 아버지를 떠나지 못했다. 여전히 그녀는 아버지의 딸로 남아 있었으니 아버지에 의해 남편과 별거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 주도 된 삶은 미갈의 내면에 분노의 뿌리로 형성되었을 것이다.③ 미갈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에 의해 새로운 남편 발디엘의 아내로 살게 되었다.사울 왕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는 중요한 이슈는 두려움이었다. 그런 두려움은 자녀들도 두려움으로 양육했고 자녀들에게도 두려움이 흘러갔다. 미갈은 아버지로부터 정서적인 지지와 공감을 받아본 경험이 전무하였다. 아버지 사울은 무서운 아버지였다. 그에게는 분노가 많았고 자녀들의 정서를 이해하거나 자녀들의 아픔을 경청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사울왕도 마지막에는 극도의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무당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았다.사울 왕이 자녀들을 양육할 때 내재되어 있는 두려움이 자녀들의 내면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쟁 중에 금한 꿀을 먹었을 때 아버지 사울은 아들을 칼로 죽이려 했다. 이때 신하들이 극구 말려서 요나단이 목숨은 부지했지만 아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두려워 했을까? 인정도 눈물도 없는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이런 상황을 지켜 본 미갈 역시 아버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을까?다윗이 사울 왕의 칼을 피해 도망을 갈 때 아내 미갈이 왜 동행하지 않았을까? 아버지 사울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했을 것이다. 사울의 허락이나 동의를 얻지 못한데서 무슨 개인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아내라면 남편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당연한데 남편을 따르기 보다 아버지 곁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사울은 딸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 주었다고 성경은 말한다(삼상 25:44). 사울의 이런 모습은 그가 사위 다윗과의 관계가 완전히 청산되고 단절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였다.그런데 미갈은 아버지를 통해 새로운 남편을 만났지만, 실은 무서운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이혼당한 것이다. 이렇게 미갈은 부모를 떠난 아내가 아니라 결혼했어도 여전히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딸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 자연히 아버지로부터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해 내재된 분노가 남편 다윗에게 투사가 되어 쏟아졌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딸은 남편에게도 축복된 존재이다이러한 미갈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남편 다윗의 정서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며 남편을 존중해 주며 지지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란 딸들은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다. 딸과 아버지 사이에서 형성된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앞으로 딸은 남편과의 만남 속에서도 남편을 따뜻하고 편하고 자유로운 관계 가운데 내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아내는 자신이 남편에게 축복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딸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요 아버지가 딸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또한 아버지가 딸 속에서 발견되고 자라나고 있는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도록 튼튼한 방패막이 되고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순수하고 딸을 향한 아버지의 관심이 진정 믿을 만한 것이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딸을 향한 아버지의 순수한 관심이 진정 믿을 만한 것이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아버지(혹은 남성 친척들)가 딸을 보호하기 위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신뢰를 위반했을 때 딸은 끔찍한 배신을 경험한다.이미 미갈은 아버지로부터의 배신감과 거절감이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로인해 남편 다윗에 대한 상처도 똑같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 내면에서 다윗에게 자신이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은 심경을 호소하기보다는 쉽게 분노가 표출되었을 것이다. ④ 20여년이 지난 후 다윗이 왕이 되자 미갈은 남편 발디엘과 강제로 해어짐을 당하고 다윗의 왕궁으로 불려온다. 이 때 역시 미갈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남자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끌려 다니는 아픔을 겪게 된다. 아버지 상처로 인한 남자에 대한 상처가 계속 악화된다.⑤ 미갈이 다윗에게 돌아와 보니 이미 그에게는 6명의 아내가 있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미갈이 공감할 수 있도록 과거지사를 해명하며 미갈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여 주지 못했다. 다윗은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많았다. 미갈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는 나라의 일에 전력을 다하는 일 중심의 왕으로 살았다. 미갈과 따뜻한 부부의 정을 나눌 만한 정서적인 배려를 보여 주지 못했다. ⑥ 미갈이 다윗과의 영적인 연합을 방해했던 부분에는 미갈의 우상숭배(수호신)도 한 몫을 했다(삼상 19:11). 다윗의 하나님과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한 것도 그녀의 우상숭배가 작용을 했다. 그녀의 관심은 남편의 정치적이며 왕적인 지도자로서의 품위에 앞서 있었다. 그녀에게는 백성들이 왕을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항상 있었다. 이런 모습은 아버지 사울 왕의 모습이기도 했다. 다윗이 힘을 다해 춤을 추니 에봇이 펄럭였고 그 사이에 속살이(성기가) 보여질 정도였다.이런 다윗의 모습을 우상숭배에 사로잡혔던 미갈은 남편의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자신에게로 향하지 못한 모습에 일종의 질투심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깊은 기쁨을 지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을 불신앙으로 일관했던 사울 왕가(王家) 출신인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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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다윗과 미갈의 부부싸움과 내면 치유/ 사무엘하 6:16~23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의미 있게 행한 사건이 언약궤를 다윗성에 옮겨 놓은 일이었다. 그는 이름 없는 시골 목동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깊은 감격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이스라엘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자 언약궤를 수도 예루살렘에 두려고 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게 하면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해 했을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다윗의 기쁨은 이루 말로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의 생애에서 그 누구로부터도 그런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하였다. 그야말로 최고로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잃어버린 영광의 법궤를 이동하는 오벳에돔에서 다윗성까지는 무려 24km에 이른다.법궤를 옮기려는 다윗의 열정은 과히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은혜의식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언약궤를 운반하는 다윗은 너무나 기쁘고 즐거워서 왕복을 벗고 예배자로 베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겁게 환호하고 나팔을 불며 궤를 메어왔다.Ⅰ. 다윗과 미갈 부부의 충돌 정신없이 춤을 추던 다윗의 옷이 흘러내리고 속살이 드러났다.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 올 때 그 광경을 아내 미갈이 왕궁의 창에서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그런 다윗을 보면서 마음으로 업신(despised, 경멸,멸시)여겼다(삼하 6:16).이런 미갈의 업신여김이 집에 들어온 다윗과 무서운 싸움을 일으키고 부부는 결별하게 된다. 이러한 미갈과 다윗의 부부 싸움을 보여주는 의도가 무엇일까? 다윗이 집에 돌아 와서는 자신이 찬양받는 왕이 아니라 아내와 심각한 문제가 있는 평범한 남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데 있다.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름을 받을 정도로 경건한 왕인데도 부부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부부사이에는 인간세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갈등과 충돌에 대해 예외가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다윗은 언약궤를 장막에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떡과 고기 건포도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자기 가족에게 축복하러 집으로 돌아왔다. 들어오는 남편 다윗을 보고 미갈이 경멸하는 말을 한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the vain fellow, 천박하고 상스러운)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쉬운 번역을 참고한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표준 새번역).인생 최고의 충만한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다윗은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아픔을 겪는다. 아내 미갈의 비난과 질책이었다. 다윗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채 출입구에서 미갈의 비난을 듣자 다윗은 매우 불쾌하였다. 언약궤를 메고 온 기쁨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도 역시 아내 미갈에게 심히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원래 다윗이 미갈에게 가졌던 애정은 이랬다. “미갈이 내 아내의 자리에 없다면 왕관도 없다”(삼하 3:13)3)3).그리고 다윗은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하고 동거하여 부부관계로 살고 있었던 미갈에 대해 비난하거나 문제를 삼지 않았다. 낯선 자의 품에 안기는 부정한 짓에 대해(렘3:1) 이미 용서했었다.그런데 성경은 미갈에 대한 묘사를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사울의 딸 미갈’(삼하6:16, 20, 23)이라고 세 차례나 언급한다. 이를 주석가들은 미갈이 다윗의 아내로서 행동하지 않고 다윗의 대적으로서, 참으로 사울 집안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이미 미갈은 다윗의 첫 번째 아내였다. 그런데 사울왕의 살해 위협을 느낀 다윗은 혼자 도피하였고, 미갈은 아버지 사울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에 의해서 발디엘이란 남자에게 재혼해서 살았다(삼하3:14-16). 그러나 다윗이 전(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곧 바로 다윗 성으로 불려 왔다.그 동안 다윗은 여러 여자들과 이미 혼인한 상태였는데 다시 미갈과의 부부관계를 회복하려 한 것은 어떤 의도였을까? 단순히 미갈을 사랑하는데 있었을까? 다윗은 미갈과 헤어진 이래로 여러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시 여자의 사랑이 필요했을까?여기에는 다윗이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아직도 세력이 만만찮은 사울 왕가에 대해서 사울왕의 딸이 자신의 왕비로 존재한다면 자신의 왕권에 대해 사울 왕가와의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다분히 정치적인 생각이 엿보인다다윗은 미갈의 비난을 받자 화가 났다. 조금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도 미갈에게 비난으로 응사하였다. 감정 대 감정의 충돌은 큰 화를 자초한다. 여기서는 평소에 다윗의 경건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 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 받으리라”(삼하 6:21~22).그 후 다윗은 미갈과 함께 하지 않았고 미갈은 또한 평생 다윗의 후손을 얻지 못했다. 다윗이 사울집안과의 단절을 의도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주석가 메튜헨리(Matthew Henry)는 하나님을 영예롭게 한 다윗을 대적하고 비난한 미갈에 대해 하나님이 벌하셨고 그 후로 자식이 없게 하셨다고 설명한다.이상으로 다윗과 미갈의 부부싸움에 대한 성경본문을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부부싸움을 단순히 경건한 다윗과 대적한 미갈의 잘못으로 결론짓기는 아쉽다. 두 사람의 내면 속에 숨겨져 있는 상처라든지 쓴 뿌리가 작용한 부분은 없을까?부부갈등은 두 사람이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다부부갈등은 한사람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다윗에게도 미갈에게도 내면의 상처와 성장과정에서의 아픔이 있었다. 그런 내면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윗과 미갈의 부부갈등을 단순히 경건한 사람, 그를 대적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만 설명한다면 우리 인간의 성숙함에 이르는 노력은 아무 쓸모없는 일이 된다.부부갈등은 두 사람이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면서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함께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보완해 주면서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삶으로 완성해 가야 한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뭔가 얻고자 애쓰는 일로 되돌아가려는 성취지향적 경향이 있다. 잘한 일로 칭찬해주고 사랑한다고 하면 더 잘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에 우리는 완전히 속는다. 잘한다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하나로 덧입혀 버린다. 성취와 하나님의 사랑은 별개이다. 성취하는 만큼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서 멀어진다.우리는 일을 잘하고 사람들에게 행동을 인정받을 때 용납 받는다고 생각한다. 귀중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해 주신다. 어떤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으로사랑해 주시고 용납해 주신다. 다윗과 미갈 부부가 서로의 충돌을 풀어가지 못한 부분은 각자의 상처와 내면의 성숙되지 못한 원인을 찾아보는 기회로 삼았더라면 두 부부는 서로 치유되고 변화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의 부부 갈등을 풀어 보자.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① 다윗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데도 왜 아내 미갈의 비난을 포용하지 못했을까?② 여호와의 사람이었던 다윗이 아내의 쓴 소리에 감춰진 여성의 본심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지혜는 왜 발휘하지 못했을까? 하늘의 기쁨이 그렇게 충만했는데도 아내의 핀잔, 아내의 무시를 수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 충만이 부부갈등에 대해서는 전혀 힘을 발휘 못하는가?③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의 기쁨과 행복은 그렇게 충만하다고 증거했는데 왜 아내의 내면에 있는 응어리진 상처는 돌보아 줄 여지가 없었을까? 그렇게 하나님께 잘 여쭈어 보던 사람이 정작 아내에 대해서는 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어 보려고 하지 못했을까?④ 미갈은 왜 남편에게 화를 내고 분노했을까? 그녀의 분노의 뿌리는 과연 다윗을 향한 것이었을까? 그녀의 분노의 뿌리는 무엇일까?여기에 내면 치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내면치유(Inner Healing)란 무엇인가? 변화와 성숙을 위한(엡4:15) 기도와 상담사역이다. 이때 내담자의 시야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게 한다. 왜(why, 내가 왜 이럴까?)를 하나님의 관점(who,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에게로 향하게 한다.부부갈등에서 서로에게 정답을 주려고만 하면 영원한 평행성이 된다. 부부갈등의 정답은 해결책이 아니라 공감 (empath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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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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