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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18
    무너지는 공교육의 현실개방교육(開放敎育)이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나라는 미국의 교육현장에서 입니다. 미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진보적인 교육의 선두주자입니다. 이 진보적인 교육이 미국의 공교육을 무참히 망가지게 했습니다. 기독교교육이 바탕이 아닌 개인주의(個人主義) 교육에 바탕을 두다보니 모든 학습을 자기 개인에게 맡기는 꼴이 되고 반사회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오히려 더 난폭해지기 시작합니다. 학습효과는 현저히 떨어집니다.미국의 경우 19세 이상의 성인의 문맹(文盲)율은 13%에 달하고, 미성년자 40%가 기능성 문맹자(文盲者)입니다. 이들은 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교육기관에서 60년대부터 매년 실시하는 수학능력 검사시험(SAT)에 따르면 학생들의 학습 성취도는 매년 떨어지고 있습니다. 1992년의 통계에서 언어능력(言語能力) 수학능력(修學能力) 평균점수가 각각50~30점 정도 떨어졌습니다.청소년 범죄율도 갈수록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이 중 두드러진 변화가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폭력이 통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관대한 미성년자(未成年者) 보호법은 학생들이 교사에게 욕을 퍼붓고 잘못된 행동을 해도 체벌(體罰)을 할 수 없도록 법제화 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17세 이하 아동의 살인이 유행처럼 행해지고 있으며 학교 안에서 총기난사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에 지친 미국 공립학교 교사들 중 50%가 교직발령 5년 이내에 학교를 떠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최고의 지성으로 존 듀이가 가르친 진보교육이 최고의 개인주의 교육의 현실이 미국의 공교육을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미국의 공교육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청교도 정신인 기독교 신앙교육이 무너진 결과입니다. 현재 미국의 학교에서는 어떤 신앙교육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화론적 사고방식이 과학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의 청교도 신앙은 흔적조차도 없습니다. 각종 뉴에이지 사상, 명상, 마술, 동양종교 사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의 붕괴가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똑같이 이미 발생하고 현실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의 현실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맞는 것은 예사가 되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생이 잘못해서 체벌해도 선생님이 학생을 때린다고 신문방송에서 대서특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니 어찌 교육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한국교육의 현주소1. 가정교육의 황폐화 현상우리의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와 정보화 사회를 겪으면서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급변의 사회적 변화를 거칩니다.이로 인해서 가족구성원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세대가 많아졌습니다. 그 결과 가족공동체가 깨어지고 급격한 개인주의가 파고들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가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아버지의 권위적인 존재가 없어지고 단순히 돈 벌어다주는 기계로 전락해 버리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가족이 붕괴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최근 방송과 신문보도 등 언론에서는 다양한 문제들로 붕괴되는 가정들이 너무 많아서 보도하지 않는 것이 10년이 넘었습니다. 성폭력, 청소년비행, 끔찍한 불륜사건들, 처참한 연쇄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인 사건으로 얼룩질 때마다 사람의 올바른 인격형성을 위해 신앙교육이 절실히 요구되며 가정의 회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심각하게 가슴으로 다가옵니다.가정은 인격형성의 출발점이요, 사랑의 바탕이요, 인성교육의 바탕입니다. 사람의 인성교육은 가정에서 가족과 가족 안에서 사랑과 믿음과 신뢰 속에서 형성되는 중요한 환경입니다. 가정을 통해서 가문의 전통이 생겨나고, 가족공동체 생활이 사회생활을 배우는 실습의 장소로 사회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곧 이상적인 사회는 가정을 통해서 출발되어지기 때문에 가정의 온전함이 없는 곳에는 결코 인간성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인격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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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17
    한국의 대학교육(大學敎育)신앙교육의 필요에 의해 세워진 대학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계최고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기에 목회자가 필요해 목사양성학교로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버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등 모든 대학들이 신학대학(神學大學)을 최고로 여깁니다. 세계 일류대학이 되려면 신학과목(神學科目)을 최고로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교육의 흐름을 시대적으로 구별하여 우리에게도 좋은 본이 되었으면 합니다.·1620년대의 미국 대학교육학교에서의 성경교육(聖經敎育)을 의무화 했습니다. 모든 삶의 지식의 근본(根本)을 성경에 두었기 때문에 유럽 각지에서 오는 불량스런 사람들이 모두 순화되는 기본을 이루었습니다. 철저한 청교도적인 신앙교육을 바탕에 두고 가르쳤습니다. 지도자가 필요한 교회가 많이 세워지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한 목회자를 양성하는 학교로 세워졌습니다. ·1837년대의 미국 대학교육미국 전체의 공교육(公敎育)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교육이 의무화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 신앙을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쳤습니다.·1905년대의 미국 대학교육미국 교육의 거목 프린스턴 대학 등장입니다. 자연주의교육(自然主義敎育), 성선설에 입각한 경험주의 교육을 확대시켰습니다. 인본주의교육(人本主義敎育), 반 기독교적인 철학교육을 도입하였습니다.·1930년대 미국 대학교육존 듀이를 비롯한 33명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인본주의교육 선언문을 발표하고, 찰스 다윈의 학설과 헬라적인 학문의 도입으로 경험주의교육이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본주의(神本主義) 교육이 퇴색되고, 급격한 신앙교육이 붕괴되는 혼란이 오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미국의 모든 학교는 철학적인 사고로 경험 학문적인 구조로 급변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1963년대 미국 대학교육모든 교육학자와 교육기관에서 조차 종교교육(宗敎敎育)이 필요없다는 배교교육(背敎敎育)이 최고의 인기 있는 교과목이 되어버려 전 미국인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편하고 좋다는 교육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모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과목인 성경교육을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을 합니다. 드디어 죤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오전 9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기도하던 체플 타임을 헌법에 위배된다고 모두 없애버리는 만행을 단행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케네디 대통령을 버렸습니다.·1983년대 미국 대학교육국가 교육, 공교육이 진보교육, 자연주의 교육, 경험주의 교육, 존 듀이의 교육에 의하여 맹폭을 당하고 국가공교육이 허물어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신본주의가 허물어진 현재의 적자생존의 교육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필요없는 철학적 사고와 경험주의, 학문적 경쟁주의와 과학기술로 포장된 생산이 최고의 산물이라는 이성적인 구조의 학문의 학교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청교도들이 자기 집을 짓는 것보다 교회를 세우는 신앙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했던 미국이 이성과 철학과 경험주의 교육으로 무너져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한 결과 학교 안에서도 총기사고가 난사하고 사회가 불안하고 교육을 받으면 받을 수록 사람이 되기보다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질되어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철학적인 학문 이상향(理想鄕)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필요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어지면 인간은 서로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 기본으로 되어 있어서 혼란과 혼란을 거듭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이와 같은 것을 볼 때에 믿음의 교육, 신앙의 교육으로 밑바탕을 다져 놓은 후에 이 세상의 인문(人文)과 자연교육(自然敎育)을 세우면 진실한 인간성 회복의 길이 여기에 있기에 기독교학교 조차 무너진 이 세대를 보면서 다시 기독교교육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교육을 회복하고 공교육을 살리는 길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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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16
    인간성 회복의 사랑의 참여교육유대인이 600만의 인구 가지고 2억이나 되는 아랍을 상대하여 이기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국가적인 전쟁에도 청소년들이 빠짐없이 총을 메고 전장(戰場)으로 나가는 것은 헌신과 봉사의 생활이 일상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생과 봉사와 헌신의 교육은 억지로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인격형성의 단계에서부터 가르치면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우리 민족도 이와 같은 미풍양속이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자랑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노인이나 임산부들을 위하여 대중교통에서의 자리 양보 같은 것들입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일생 중에서 가장 힘이 솟아나는 시기입니다.오늘날 학생들은 돈을 벌어 가면서 공부하는 학생은 많지 않습니다. 학생여건이 공부만 하려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공부 외에 다른 것 하고 싶어서 공부 안하는 것이지 공부를 하지 못할 환경 때문에 공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런데 공부하는데 피곤하니 내 앞에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 연약한 노인,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아픈 병자가 있더라도 양보하지 말고 눈을 감고 앉아 버티라고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힘이 있을 때에 힘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누어 쓰는 힘을 어디에 소비해야 할까요?사회의 그늘진 곳이나 어두운 곳이나 돌봄이 있어야 하는 곳으로 헌신과 봉사와 희생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지나친 이기주의는 사회를 멍들게 하고 청소년들의 심성을 비툴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이 헌신의 인간성 회복 교육을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기술교육, 대학교육, 전문교육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시켜야 합니다. 이 교육이 살아있는 교육으로 나라를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한 개인의 인격도 살리는 교육입니다.기독교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죄인 된 우리들에게 친히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물이 되어 주신 희생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 헌신이 없는 사랑, 이것은 허울뿐인 사랑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원리가 목숨까지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 있습니다.한국의 대학교육(大學敎育)한국의 대학교육은 미국의 교육방침을 그대로 모방했습니다. 처음 대학이 세워질 때의 순수하고 순박한 청교도 신앙(淸敎徒 信仰)이 밑바탕이 된 선교사와 목사님들이 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미국의 초기 기독교사상과 커리큘럼이 살아있어서 국가를 세우는 밑받침이 되고 사회의 리더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대학들도 초기에 세워졌던 기독교대학들이 모두 세속화(世俗化) 되어서 처음 설립의 목적과 정신에서 많이 이탈되어 있는 실정입니다.이에 미국교육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받은 우리의 대학교육을 보면서 무엇이 미국대학들의 잘못된 부분들을 고쳐야 될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1. 미국 대학들의 교육의 흐름 1) 미국 대학교육의 역사미국은 청교도 정신과 믿음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초창기 미국에 건너온 이민자들은 본국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대체로 초기에 이민 온 사람들은 성정(性情)이 좋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과격분자나, 폭력주의자, 그 외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도 2%정도밖에 되지 않은 청교도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엘리트들이 미국의 토양(土壤)이 되었고 바탕이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도착하자마자 자기 집을 짓는 것보다 하나님의 교회(敎會)를 먼저 세웠습니다.이러한 사상은 미국 이민자들에게 정통(正統)이 되었고 미국의 정신(精神)이 되었습니다. 이 청교도 믿음의 정신이 광폭(狂暴)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악한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돌려놓아 미국의 개척자(開拓者)로 동화되는 시민정신(市民精神)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이 정신을 이어가고 후손들에게도 이 정신을 이어주고자 학교(學校)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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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9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15
    한국의 초등교육의 현실(現實)유교교육도 조선 500년 동안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대학(大學),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통한 인격의 형성으로 가정에서는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보았고, 국가에는 충성을 최고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유교교육은 양반들만 가르치는 한계를 가졌습니다.그러므로 기독교교육 만큼 이 나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없습니다. 이 나라의 교육의 바탕은 전 국민의 교육입니다. 전 국민을 가르치는 것을 담당한 것이 기독교교육이었습니다. 전 국민의 교육의 밑바탕에는 성경(聖經)을 통한 인격 교육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이 알면 뭐합니까? 인격이 따라주지 아니한 지식은 오히려 사회혼란만 가중시키고 인간성이 결여된 지도자는 국가와 사회에 혼란만 가중합니다.이제 우리의 공교육에도, 초등교육에도 인간성 회복 교육을 도입해야 합니다. 지독한 경쟁교육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남의 의견을 들어주고, 다른 사람의 의사를 들어주며, 많은 토론을 통한 의견의 통일성을 통하여 결정된 사항을 지켜내는 교육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성경을 통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인성교육의 중심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경쟁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치고 나보다 남을 귀하게 여기는 인간성 회복 질서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인격의 완성을 차츰차츰 가르쳐야 합니다.이런 인성교육은 모든 교육에서 연령의 제한을 두지 않고 교사와 부모들에게도 평생동안 교육해야 합니다. 인간성 교육은 고등학교 이후에 가르치면 비용도 많이 들고 효과도 훨씬 떨어집니다. 그리고 사람은 영악해 빠져서 손해 보는 것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성 교육, 즉 하나님의 말씀 교육은 유아기부터 시작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수준까지 꾸준히 가르칠 때에 인격의 바탕에 완전히 서 있게 됩니다.이렇게 인격이 완성되고 난 후에 가르치는 인간의 경험교육인 인문과 자연은 그 흡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고 세계를 흔들 수 있는 지도자가 배출되게 됩니다.인간성 회복의 사랑의 참여교육인간성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성(人性)의 근본(根本)을 이루는 것은 개인보다도 공동체중심(共同體中心)이라는 교육입니다.한국은 하나님의 말씀교육에서도 실패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알기만하고 실천이 부족한 것입니다. 실천이 따라주지 아니하는 지식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나만 잘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에 빠져서 한 집안에서 장남에게는 부모가 모든 것을 투자하여 가르치고 비싼 교육비를 감당하면서 가르치면서 형이 잘되면 밑에 동생은 저절로 잘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는 형제들 간에 의가 깨지고 형제가 아니라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기독교적인 교육 방침은 인간은 어느 누구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토라 공부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형제들에게 가정에서 아버지가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자기가 맡은 일에 자기가 책임을 지는 교육입니다.기독교 교육에서 본 받아야 할 덕목(德目)은 실천이 따라주는 교육입니다.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남이 모르는 것을 먼저 알고 있다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알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을 우선합니다.인격의 내적성숙은 12세까지 완성하고 하나님의 말씀교육으로 다져서 선(善)이 무엇이고 악(惡)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하면서, 선을 행하고 악에는 빠지지 않도록 하고, 참여공부를 통해서 공동체의 성격을 강하게 해주는 실천교육을 직접 본인이 솔선하도록 교육합니다.일본은 공동체 의식이 강합니다. 지위를 막론하고 똑같이 행사 같은 데를 참여합니다. 한국은 개인주의가 강합니다. 그래서 1:1은 무척 강하지만 1:3 하면 무너집니다.중국은 뛰어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봉사와 헌신 시간을 따로 가지고 봉사와 실천을 행해야만 학점을 줍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가정에서의 토라공부와 학교에서의 공부 속에 자연스럽게 모든 행사에 참여하게 하여 이웃을 돕습니다. 어려운 이들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헌신과 봉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교통정리를 하거나 할머니들을 돌보면 점수를 더 주고 하는 생색내기의 억지교육이 아니라, 가까이는 내 이웃과 지역사회와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의 헌신에 이르기까지 헌신과 봉사가 생활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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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 기고 / 2016년 한국교회의 사회선교 모델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지역사회 안에서 재현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바로 예수처럼 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초대교회는 예수처럼 살려고 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예수처럼 십자가를 지고 순교했고, 예수께서 생명을 바쳐 섬겼던 것처럼 교회는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다 바쳐서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며 제자의 길을 갔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래서 ‘예수의 교회’였다. 초대교회의 헌신과 나눔 그리고 섬김의 실천이 교회를 ‘예수의 교회’되게 만들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떻게 예수의 삶을 살고 있고,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섬김과 나눔의 실천은 참으로 미약하다. 한국교회의 사회봉사비 지출은 대략 5%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고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은 교회들이 교회 건물을 크고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 그리고 각종 내부 시설을 화려하게 리모델링하는데 엄청난 헌금을 사용하는데 비해 이웃을 섬기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데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이제 다시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여 어려운 이웃을 봉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회봉사는 교회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 과제가 아니고 교회의 사명이다. 우리는 교회의 사회봉사를 선교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교회론적인 측면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가 바로 사회봉사라고 하는 신학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일이고 또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했던 일로 이는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교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교회 일각에서는 교회가 사회봉사 기관이 아닌데 사회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래적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회봉사의 사명을 갖고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초대교회가 이를 잘 보여주었다. 또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이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사회봉사(diakonia)라는 교회의 본질적 과제에 충실하지 못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대부분의 교회가 자신의 가르침과는 달리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기 몸 불리기에 정신이 없는 현실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예수님의 제일 큰 가르침을 외면하고 살면서도 교회만 나오면 무조건 구원받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사회봉사를 교회의 기본적 과제로 인식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회봉사만이 교회의 과제는 아니다. 그러나, 균형 잡힌 교회가 필요하다. 선교, 봉사, 친교, 교육 등 모든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에 충실한 교회가 균형 잡힌 교회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가장 빈약한 부분이 바로 사회봉사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교회의 사회복지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교회의 반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교회 내에서 사회복지 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다가가는 방법으로 사회복지 선교라는 접근을 하는 것이다. 아직은 사회복지 선교에 대한 명확한 개념규정이 되어 있지 않지만 교회의 사회봉사가 선교적 목적을 갖고 수행될 때 이를 사회복지선교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사회봉사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갖게 될 때 순수성을 잃어버린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회의 사회봉사가 일차적으로는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는 목적을 갖고 수행되지만 부수적으로 선교적 효과가 나타나게 될 때 이를 교회가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회봉사를 선교의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가 사회봉사에 뛰어들게 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재정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은 돈이 없어서 사회봉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돈만으로 사회봉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자원 말고도 대단히 중요한 인적자원과 조직적 자원 등 사회복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바로 교회의 사회복지 시설 수탁을 통한 선교의 가능성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재정은 정부의 지원이나 사회의 지원에 의존하고 교회는 잘 훈련되고 헌신적인 풍부한 인적 자원과 체계화되어 있는 조직체계를 사회봉사에 기꺼이 내놓게 된다면 그것으로 사회봉사에 크게 참여하는 것이 된다. 물론 교회가 물적자원인 돈까지 내놓는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은 사람이 한다. 그런데 일하기 위해 사람을 찾으면 사람이 없다. 우리 교회에 많은 사회복지 일꾼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지 않다. 한마디로 우리가 사람을 키우는 일에 소홀했다. 사람이 없다는 말은 종사자가 적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신앙정신에 투철한 사회복지 일꾼 곧 자신을 희생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울 열정과 믿음을 가진 실천가를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사회복지를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몸을 던져 지역사회와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실천가는 매우 적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 교회가 키워내야 한다. 아직 우리 교회는 헌신된 일꾼을 길러낼 교육체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전문성을 갖춘 교육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디아코니아가 활성화 되어 있는 독일교회는 교회 안에 수많은 복지 일꾼들이 있다. 우리도 그러한 인력풀을 만드는 일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교회가 사랑의 눈으로 이웃과 지역사회를 바라보면 수없이 많은 할 일이 보인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말이다. 문제가 있는 곳에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지역사회의 문제 어려운 이웃의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않고 우리 문제로 끌어안으면 할 일은 수없이 많이 보인다. 갈수록 심각해져 가는 노인문제, 청년들의 실업과 일자리문제, 청소년들의 일탈행동과 보호문제,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문제, 해체되는 가정들의 문제, 장애인들의 사회적응과 자활 그리고 보호체계 문제, 빈곤가정과 다문화 가정들의 문제, 탈북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보호 문제 등 수없이 많은 사회적 과제들을 교회가 외면하지 말고 애정을 갖고 접근해 가야 한다. 교회가 사회봉사를 할 재원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교회가 가진 재원을 우선순위를 바로 정해서 쓴다면 지금 우리가 가진 것으로도 많은 사회봉사를 할 수 있다. 또 일을 하다가 보면 수없이 많은 자원들이 연결될 수 있다. 사실은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 문제이다. 현재 교회의 위상이 한없이 추락해가는 오늘 우리 사회 안에서 섬김과 봉사로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 어려운 이웃들과 지역사회 안에서 실천함으로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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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 특별기고/ 시인 윤동주론(1)
    시를 통해 자신의 허물을 고백함과 동시에 민족의 아픔 위로본고는 오는 2017년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크리스천 문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윤동주 시인을 다시금 조명하고, 그의 작품을 기리기 위한 기고문이다. 윤동주의 짧은 생애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명동소학교 교사였으며 용정 중앙장로교회의 장로였다. 1925년에 명동(明東)소학교에 입학하여 송몽규, 문익환 등과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한 후 1932년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일제에 의해 폐쇄당하자 다시 용정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뒤 2년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남다른 친교를 맺었다.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립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가을에 다시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태평양 전쟁의 말기로 흉흉하던 시절,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도중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는 복역하는 중에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야 했는데, 그것이 그의 사인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되며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그와 함께 복역 중이던 친구 송몽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사망하게 된다.윤동주 시의 부활윤동주는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공상〉을 발표했다.〈공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 된 것이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으며, 1937년 옌지[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에 윤동주(尹童柱)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윤동주의 시는 1943년 유학생들과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는 죄목으로 사상범으로 붙잡혀 1945년 2월 형무소에서 죽음 이후인 1948년 1월, 유고시집「하늘과 별과 시」가 나옴으로써 알려졌다.1945년 2월 윤동주는 세상을 떠났지만 3년이 지나 그가 남긴 31편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유고시집으로 정음사에서 10부를 추모식용으로 제작하여 처음으로 발간하게 된다. 그는 생전에 시집의 원고를 가장 친한 친구였던 정병욱과 연희전문학교 이양하 선생에게 한 부씩 나눠주었는데, 정병욱이 보관하였던 원고만이 남아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의 초판 서문에 그가 늘 동경하던 시인이자 동지사 대학의 선배였던 정지용이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라는 추모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195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보급판으로 2종을 재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8년 11월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다. 정부는 시인 윤동주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십자가를 흠모한 사나이 윤동주시인 윤동주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은 그의 시를 형성하고 있는 토대이자 세계관이다. 그의 시에서 고백은 기독교 성경에서 비롯된 언어로부터 형성되고 있다. 고백은 기독교 성경과의 알레고리에 의해 형성된 희생 제물의 제의적 상징들과 참회자가 토설하는 속죄 고백의 언어적 특성들을 나타내고 있다.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그의 안으로 들어왔을까?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기독교에 입문했던 그의 친가와 외가의 영향을 받았다. 태어나서 자랐던 기독교 마을 명동촌, 그가 다녔던 기독교계 학교에서 그와 기독교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기독교와 민족정신의 만남은 윤동주가 식민지 청년 지식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증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서 살아온 실향민 후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고 자라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신앙인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이 그가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를 이룬 고백의 시학을 구축할 수 있었던 근본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윤동주는 왜 시를 썼을까? 시 쓰기를 통해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고백함과 동시에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민족과 자기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하고자 했다.또한 그가 민족 시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자선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고 했을 만큼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치유와 위로의 심정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일제의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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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14
    한국의 초등교육(初等敎育)의 현실(現實)그러다보니 교육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생산에만 가치를 부여하다가 보니 그동안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도덕성이나 윤리 같은 것은 기술과 생산성에 거치적거리는 폐기물 같이 보였습니다. 참다운 인간성을 가르치는 것은 시간의 낭비요 생산의 낭비로 보는 극단적인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교육은 상급학교를 입학하기 위한 교육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공교육에서조차 윤리와 도덕 질서교육 인간성 교육은 시간만 낭비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내가 살기 위하여 남을 죽이는 극단적인 이기적인 교육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기술과 능력만이 최고의 가치로 교육시킨 결과 과정보다 결과가 좋으면 법도 무시되고 질서도 무시되는 기존의 질서가 모두 무너지는 교육을 30년 동안 해왔습니다.그 결과 공교육은 난도질을 당했고 정서는 매마를 대로 메말라 뭐든지 일등만 하면 되고 튀면 된다는 교육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교육은 사랑과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경제논리로 보면 항상 손해 보는 사업입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들도 사명으로 이 일을 해야지, 최고의 기술과 생산의 결과로 보면 항상 밑지는 장사와 같습니다.참교육이라고 도입한 죤두이의 개인에게 최고의 가치관을 내세우는 교육은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한 후에 인격의 바탕 위에 기술과 생산을 갖추는 교육이라야 진정한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내가 우선 최고가 되고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주의 교육으로 변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온 부모들이 자기의 자식들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도입하다 보니 내 자식은 다른 아이보다 공부도 더 잘해야 되고 다른 아이보다 내 자식은 더 똑똑해야 하고 다른 아이보다 예체능도 더 잘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공교육보다 더 잘 가르치는 곳이 있으면 모든 것을 투자하여 자식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지 않고 기술자로 생산자로만 가르치는 돈벌이의 기계로만 만드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이러한 혼란 속에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학원이다, 특수학원이다, 교습소다, 학원도 몇 군대나 다니다 보니 정작 공교육 시간이 되어 학교에서는 선생님말도 듣지 않고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까지 생겨나는 공교육 황폐화의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거기에 비하여 학부모는 자기의 아이만은 어떻게든지 다른 아이보다 출세시켜 보겠다는 이기심이 발동하여 초등학교 3~4학년만 되면 초등학교 과정은 이미 다 배워 버리고 상급학교에서 배우는 중학교 과정을 미리미리 방학 때를 이용하여 과외선생이나 학원에서 모두 가르치다보니 학교생활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지겨워지고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정신병까지 얻는 기현상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존경해야 할 선생님들은 돈 받고 지식을 가르쳐주는 기능인으로 전락해 버렸고 선생님들조차 자기 밥그릇 챙기는 단체로까지 변질되어 버렸습니다.미국을 보세요. 죤두이가 그렇게 이상향(理想鄕) 같이 내세워 교육한 현장에 학교에서 조차 총기가 난사하는 인간성 말살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세계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학은 하버드목사님이 세운 대학으로 기초는 신학을 중심으로 인격형성이 중심을 이루고 그 위에 인문과 자연을 가르쳐서 완전한 인격체로 세워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보세요. 하버드뿐만 아니라 프린스톤, 예일, 스텐포드, 콜럼비아 등 모든 대학이 신학교육보다 인문대학, 자연대학이 판을 치고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생산만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되다보니 국가와 사회가 혼란 속에 있지 않습니까?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초등교육부터, 아니 유아교육부터 인간성회복 교육을 도입하여 진실된 인성교육을 회복하는 교육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한국의 초창기의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교육을 시작한 기독교교육을 제시합니다.우리나라는 불교교육도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경장(更張), 율장(律藏), 논장(論藏)을 통한 인격회복과 화랑오계와 같은 국가와 민족에게 그 길을 인도하는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왕족만 가르치고 귀족들만 가르치다 보니 교육의 폭이 좁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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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1
  • 기고 / 한반도 평화·통일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
    새해를 맞이하며 남북관계 개선의 희망을 기대했었다. 지난 1월 6일 북한의 수소탄실험은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 또한 큰 법이다. 남과 북의 관계는 한 치를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미국의 동북아 질서 전략에 한,미,일 동맹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가운데 생각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통해 어순선한 가운데 이번 북한의 핵실험은 한반도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정부는 즉각적으로 휴전선에서 대북선전방송을 재개했다. 북한 역시 대남 삐라를 뿌리고 여기에 대응하고 있다. 이미 지난 목함 지뢰에서 보았듯이 휴전선에서 심리전이나 자극적인 행동은 어떤 상황으로 위기가 전개될지 모른다. 전쟁 직전까지 가다가 가까스로 협상을 통해 불을 끄게 되었다.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진정한 프로쎄스가 없을까? 항상 반복되는 위기와 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우리는 작년에 분단 70년을 한반도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성서적으로 하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철저한 신학적인 반성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웠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민족문제에 철저하지 못했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의 선택이 아닌 강대국들의 결정과 강요에 의해 그어진 분단체제에 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하지 못했다. 분단 70년에 거의 전쟁 직전까지 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에도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고 말았다.위기는 위험과 기회, 둘 다 포함하고 있다.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면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렇지 못하면 위기는 더욱 가중되는 법이다.지금 우리는 분단 70년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분단체제에 대한 철저한 신학적인 성찰이 없이 지금 위기 한 가운데 놓여 있다.새해가 시작되면서 북한의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감정적인 대응밖에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것을 빌미로 미국의 B52 폭격기와 핵 잠수함등을 한반도에 파견하면서 한반도 상황은 매우 엄중한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왜 북한은 새해 벽두부터 이런 무리한 강수를 두었을까?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가 아니라 저들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핵실험을 통해 그들이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를 살필 필요가 있다.북한은 지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에 처해 있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목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위 강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1955년부터 3대 자립을 시도해왔다. 사상에 대해서는 주체사상으로 확립됐다고 보고 있고, 선군정치에부터 시작해서 현재 경제, 핵 무력병진노선을 채택함으로 국방에서 강국을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남은 한 가지가 경제문제이다. 왜 북한이 경제건설과 핵 병진노선을 주장하고 나섰을까? 이번 4차 핵실험에서 보듯이 핵실험이후에 대북제제는 강화되고 고립의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는데 왜 그런 무리수를 두었을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핵 억지력을 통해 국방비를 걱정하지 않고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 집중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북제제에 맞서 내부 결집과 경제에 매진하여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북한의 내부 인프라나 경제적인 능력을 볼 때 독자적으로 경제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데는 한계가 있다. 북한은 우리나라의 도움이 없이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기가 매우 힘들다. 북한이 계속해서 관계개선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북한은 무리수를 두면서 체제유지를 위해 강경한 입장을 택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여기에 그들의 딜레마가 있다.북한의 가장 큰 관심은 체제유지에 있다. 체제유지를 위해 관계개선을 희망하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과도 관계개선을 통해 자신들의 체제보장을 받고 싶어 한다.왜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나? 그것은 동북아 지형의 국제정세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국가들이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히려 한반도 정세의 적당한 긴장을 원하고 그 긴장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동북아 전략에 이용하고 있다.북한이 계속해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자고 주장하면서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도 이런 긴장상태를 돌파해 자신들의 체제를 확고히 하고자하는 전략 때문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단순히 우리 자신들만의 결정으로 한반도 문제가 결정되는 범위를 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인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이 있다.남과 북의 갈등이 고조되고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적당한 갈등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과 패권을 유지하려는 상황에서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교회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성서는 철저하게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교회가 갈등상황을 만들어내고 오히려 부추기다면 그것은 진정한 교회일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를 기초로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먼저 교회는 주님의 정신에 철저해야 한다.주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교회는 자리는 바로 그 자리여야 한다. 교회가 십자가의 자리를 회피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도 아니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다.남, 북한이나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들은 한반도상황에서 서로의 이익을 생각하며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해서는 않된다. 교회는 언제나 사랑과,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접근해야 한다.한반도의 상황에 감정으로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이 기도가 되게 해야 한다. 반드시 질문은 답을 가져온다. 바른 질문은 바른 답을 가져온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대답이 없다. 지금 한국교회는 분단체제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분단 70년을 넘긴 오늘, 우리가 처한 분단체제가 옳은 것인가?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것일까? 교회가 여기에 침묵을 지킨다면 하나님도 여기에 침묵을 지키실 것이다. 분단의 땅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여기에 우리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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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1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13
    노벨상을 타는 지혜 초등학교 교육우리나라나 일본, 미국같이 뛰어난 소질이 있어도 돈이 없어 예능교육을 못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학부모들과 학교와의 관련은 유대인처럼 밀접하게 이루어져 있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첫째, 모든 교육기관에서 정기적으로 학부모 회의를 개최합니다. 특히 유아교육기관과 초등교육기관에서는 매월1회 이상 학부모 회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학부모 회의는 저녁시간에 반별로 모이게 되는데 95%이상의 학부모들이 참석합니다. 놀라운 일은 아버지들이 25%이상 참석합니다. 이때 각 반 담임선생들은 학부모들에게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도를 설명하고 특히 가정에서의 신앙과 교육의 협조사항을 당부하여 학교와 가정에서 일체교육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학급운영에 대한 학부모들의 의견이 발표되고 토론과정을 가집니다.그런 다음 문제아의 학부모들을 따로 불러서 협조사항을 협의합니다. 또한 2~3개월에 한 번씩 학부모 한 사람 한 사람씩 상담하여 학생의 성격, 학습태도, 성격의 변화 등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아이의 부족한 과목을 위해서 가정에서 해야 될 지도사항 등도 구체적으로 지도해 줍니다. 이때 교사의 권위는 대단하여 대학교수가 학부모의 자격으로 찾아올지라도 당당하게 가정에서의 지도사항을 협의하는 것입니다. 담당하고 있는 자기분야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학부형을 대하는 데에는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어린이의 지도에 있어서는 거리낌 없이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여 아이의 교육을 담당하는 것입니다.둘째, 학부모 교실의 운영입니다. 매 월 1회 정도는 학교에서 학부모들을 위한 공개강좌를 마련하는데 공개강좌는 당연히 어린이교육과 관계되는 것으로 가정과 교육, 유대인의 정체성교육, 이스라엘 국가관, 아동심리학 그리고 학교 밖에서 아이들의 활동에 대한 교육 강좌입니다. 이때의 강사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초빙됩니다.이와 같이 아이들의 교육에서 부모의 언행이나 가구의 색상, 벽이나 천장의 색깔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의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설명 듣고 집안의 색깔까지 바꿈으로 아이들 교육에 환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뿌리를 둔 유대인의 교육은 철저하게도 교육은 어머니가 어린 아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가정교육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인격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비춰 봅니다.우리의 초등학교에서는 성적표의 등수를 알려주는 교육으로 일관할 뿐만 아니라 경쟁위주의 치열한 성적제일주의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인간성 회복 우선순위 교육으로 기독교교육을 접목하여 교육하는 방법을 제시해 봅니다.한국의 초등교육(初等敎育)의 현실(現實)지나친 이기주의 교육으로 물든 우리의 공교육 현실은 인간성 회복교육이 아닙니다. 지나친 개인주의 교육을 그대로 도입하여 성과만 나타내는 미국의 교육자인 죤두이(1859~1952)의 진보적인 교육을 그대로 도입하였습니다. 인성교육보다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고로 살려내어 능력을 개발해 주는 교육을 최고의 가치로 보고 여기는 교육을 해왔습니다.한국의 교육은 초등교육뿐만 아니라 중등교육, 고등교육,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부모들이 선생님들이 자녀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한 사람 한사람 특성(特性)에 맞게 교육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학교의 선생님들은 학생을 가르치기보다 학생들의 학업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그 아이의 공부는 학원이나 사교육에서 담당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학생들의 옷 모양도 천차만별이고 튀어야만 살아남는다는 특별한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렸습니다.가족끼리 식당을 가도 음식의 주문이 아버지가 주문하는 것이 아니고 자녀들이 각자 먹고 싶은 대로 주문을 합니다.아버지는 나중에 계산만 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식당을 가는 것 선택권조차도 자녀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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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2
  •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목회적 적용 -5
    (2) 임상목회교육의 시작교회 안에서의 상담 사역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을 교육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안톤 보이슨(Anton T, Boisen)이다. 그는 메사츄세츠주의 워체스터 주립병원(Worcester Stats Hospital) 원목으로서 소수의 신학생들을 위한 임상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임상목회교육’(Clinical Pastoral Education)은 오늘날에 와서 조직화된 운동이 되었다. 임상목회 교육의 장점에 대하여 게리 콜린스(Gary R. Collins)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첫째, 목회 상담 훈련을 위한 표본을 제시해 준다. 둘째, 병원 관계자로 하여금 심리적, 정신적 질환의 치료에 대하여 목사가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셋째, 신학과 심리학과의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넷째, 신학생을 위한 상담훈련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준다. 다섯째, 신학도들에게 그들의 장래 목회사역에 있어서 신학적, 지적 훈련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격적, 영적 성숙도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 준다.이러한 임상목회교육 (C. P. E.)은 바람직한 출발을 했으나 성경 보다는 무비판적으로 심리학적으로 기울어지고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게 됨으로 많은 자유주의 신학대학원들에서 환영을 받으면서 커리큘럼에 첨가되었으나 보수주의 신학대학원에서는 신학적 자유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수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가 같다고 할 수 있다.3. 상담목회의 현실적 전략그러면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실제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상담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상담’과 ‘목회’라는 두 영역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우리 현실을 직시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1) 목회 패러다임의 변화상담목회를 위해서는 목회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목회의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이것을 토대로 하는 신학이어야 하고, 여기서 목회사역의 목적이 제시되어야 한다.목회사역의 목적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 양을 먹이고, 양을 치고, 양을 먹이라”는 것이며(요 21:15-17), “성령을 받아 권능을 얻어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라”(행 1:8)는 말씀을 수행하는 데 있다. 바울 사도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교회)를 세우려 함에 있다”(엡 4:12)고 했다.칼빈은 목회사역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즉, 목회사역의 구체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성도의 자아상을 올바르게 형성시키는 데 있다. 이 사실을 대해서 칼빈은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자신을 바로 보게 하는 것” 즉 “인간을 짐승보다 우위에 있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한 것은 홀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며, 영원히 유일신이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을 열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청교도였던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 목사는 그의 저서 「참 목자상」(Reformed Pastor)에서 목회사역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주장했다. 첫째, 미성숙한 이들을 성숙케 하는 것, 즉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고, 둘째, 심령의 고통이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은혜 아래서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셋째, 죄에 빠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권하여 회개케 하는 것이고, 넷째,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강력하게 권장하는 것 등이다.이러한 목회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의 발굴과 치유를 통해 새로운 목회 모델을 형성하여야 한다. 목회자의 사명을 가진 사람은 상담사역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목회자는 목회사역을 하면서 반드시 상담을 해야 하며,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하여 다른 이들을 상담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교회들이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성경적인 가치관을 확산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2) 현실적 전략상담목회를 위해서는 목회자들을 상담자로 훈련해야 한다. 상담목회를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는 훈련과 실천이라는 두 영역을 살펴 볼 수 있다.(1) 훈련상담자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을 거쳐 만들어진다. 목회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상담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바른 훈련을 받아야 한다.심리학자들이나 정신의학자들은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다. 상담자로서의 목회자도 여기에 못지않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기독교 교육학적 훈련이나 신학적 훈련은 받지만 상담학에 대한 훈련을 받지 못하고 상담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훈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담을 실시할 때, 성경의 원리에서 이탈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아니면 시행방법에서 여러 거지 문제들이 파생될 수 있다.목회자는 상담자로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선용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연마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성장과 직결되는데, 상담의 기술을 배우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연마시키는 자세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상담자로서의 상담 훈련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 성숙과 함께 상담학뿐만 아니라 상담에 관련된 신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기독교교육학, 의학, 약학, 정신위생학, 영양학, 음악, 미술등의 여러 주변학문들을 공부하여야 하고 인턴십과 전문가의 수퍼비젼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상담자들은 자기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영위하도록 해야 한다. 상담자로 훈련하기 위해서는 전문적 훈련기관이 필요하다. 개혁주의 신학과 상담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전문가에 의해 훈련되어야 한다.(2) 실천실천의 구체적 방안은 교회의 실정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① 설교를 통한 상담 : 목회자의 설교는 집단상담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예비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성도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적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예를 들어 가면서 구체적인 문제 상황을 제시하고 성경적 근거를 통해 해결방안을 시도해야 한다.② 교육을 통한 상담 : 목회자들은 지교회에서 각급 주일학교나 결혼예비학교, 부모학교(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와 시어머니학교), 부부학교와 부부수련회, 자녀교육 세미나, 가족 수양회와 가족캠프, 노인학교와 독신자학교 등의 교육프로그램을 통해서 가르치고 성도들을 상담을 해야 하며 또한 상담학교를 통해서 유능한 상담자를 양성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부부가 먼저 상담교육을 받아서 상담전문가가 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③ 심방을 통한 상담 : 상담목회의 가장 쉬운 방안으로서 심방을 통해 문제발굴과 성경적 해결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심방상담을 제대로 하려면 심방자를 상담자로 훈련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④ 상담실(혹은 상담센터)을 통한 상담 : 교회에 상담실을 설치하고 훈련받은 전문 상담자를 두어 성도들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와서 상담하게 한다.⑤ 기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상담 : 교회가 경영하는 방과 후 학교나 기독교학교 및 다른 프로그램들이 단순이 교육이나 전도로 끝나지 않고 상담목회의 일환이 되게 해야 한다.결론한국교회에서 목회의 중요영역으로서 상담목회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신학대학원들과 대형교회에서 이러한 노력을 해 왔으나 상담학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없었고, 또 있었다고 하여도 비성경적 상담이론을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여 이것을 ‘기독교 상담’ 혹은 ‘성경적 상담’으로 포장하여 가르치고,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다.상담목회를 하려면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적 상담’(Biblical Counseling)(=개혁주의적 상담 혹은 실천적 칼빈주의 상담)이 실시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성경적인 상담 훈련을 받아야 한다. “상담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만용에 가까운 생각과 행동들이 만연할 때 상담사역은 많은 장애와 함께 인간중심으로 흘러갈 것이다.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교육을 통한 상담목회와 상담을 통한 교육목회가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조직이나 제도 이전에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며, 소명 받은 목회자들의 특별한 임무이다.상담목회는 교육목회와 짝을 이루어 우리 시대의 목회적 대안으로서 활발하게 실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적 신앙의 정립이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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