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기고
Home >  기고  >  특별기고

실시간뉴스

실시간 특별기고 기사

  • 법에 의한 통치에 관한 소고-1
    법을 어긴 처결(판결), 만장일치라도 불법무효당회가 결의했으면 「떡사」·「꿈사」도 세울수 있나? 1. 《법에 의한 통치》치리회 회의정치체제인 장로회정치는 치리권을 행정권과 권징권으로 나누고, 행정회로 회집하여 행정권을 행사하고, 재판회로 회집하여 권징권을 행사하게 되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양권일체 체제(兩權一體 體制)인 것은, 행정회 회원이나 재판회 회원이 다 동일한 그 치리회 회원 그대로이니 말이다. 그리고 치리권을 행사하는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의 구성요원은 어느 치리회든지 목사와 장로이니, 치리회의 결의란 결국 목사와 장로의 합의를 가리키는 말이다.그렇다면 치리회의 결의, 즉 목사와 장로가 합의하면 이렇게 다스리거나, 저렇게 다스리거나 아무 상관이 없겠는가?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정당한 사리와 성경교훈과 사도시대 교회의 행사에 의한즉 교회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같은 치리회에 있다(행 15:6), (정 제8장 제1조)”고 교회를 다스리는 치리권이 목사와 장로의 회인 치리회에 있게 할 뿐 아니라, (정 제8장 제1조) 교회를 다스리는 통치규범으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헌법을 제정하여 헌법대로 다스리고, 헌법대로 다스림을 받게 하였으니, 헌법대로 다스리고 헌법대로 다스림 받는 일을 정당하다고 서약하지 않고서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 교회직원으로 임직할 수 없게 하고 있은즉(정 제13장 제3조, 동 제15장 제10조, 헌규 제2조 6), 설혹 목사, 장로로 구성되는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가 합의(결의)했을지라도 헌법을 어기면 불법인 것은, 예컨대 어느 교인이 걸핏하면 떡을 만들어 이웃에게 나누는 일을 잘한다고 그 교인에게 목사, 장로의 회인 당회가 결의하여 「떡사」직을 맡겼는데, 또 어떤 교인은 걸핏하면 꿈 꾼 이야기를 하며 “꿈은 이루어진다”고 떠들어대기를 잘해, 당회가 결의하여 「꿈사」직을 맡겼다고 하면, 당회가 결의했으니 합법인 것 같다. 그런데 교회헌법이 규정한 교회직원은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서리집사, 전도사, 전도인, 강도사, 목사후보생이니, 이 직분들은 세울 수가 있어도, 다른 직분은 세울 수가 없으니, 「떡사」, 「꿈사」는 목사, 장로의 회가 결의해서 세웠어도 불법이란 말이다.그런즉 교회재판관들이여! 헌법이 규정한 벌은 권계, 견책, 정직, 면직, 수찬정지, 제명출교인데(권 제5장 제35조, 동 제6장 제41조), 이 벌 외에 「공직정지」니, 「총대권정지」니 하는 일은, 치리회가 결의했다고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 외에 「떡사」도 세우고 「꿈사」도 세우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법은 재판국원 된 목사와 장로도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시인하느냐?(정 제13장 제3조 3, 동 제15장 제10조 1의③)는 물음에 예! 라고 서약하고 목사도 되고, 장로도 되었는데, 재판자리에 앉기만 하면, 그런 서약 정도는 외면해도 무방한 것처럼 여기는가?권 제9장 제99조는 “…하회 판결이 적합한 줄로 인정 할 것이요(즉 상소기각)”, 하회판결을 취소(즉 원심판결의 취소)하든지, 변경하든지(즉 권계, 견책, 정직, 면직, 수찬정지, 제명출교 된 벌 중에서 다른 벌로 변경하든지), 하회로 (환송하여) 갱심(다시 재판하게) 하든지 편의대로 작정할 것이요…”대로 할 것이요, 재판국 마음대로 벌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그리고 소원은 “…행정사건에 대하여 하회가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아니하거나, 위법한 행동이나 결정에 대하여 변경을 구한 것…” (권 제9장 제 84조)인데, 소원장을 받아가지고 총회재판국이 “…면직, 제명, 출교, 무기정직, 권계로 시벌 처리하는 것도 불법이므로 이를 무효화하고…”(2010, 제95회 총회결의 및 요람 p.86) “…대한 행정소원건은…제명출교한 ○○○외 99명의 결의(제명출교가 결의인가? 판결인가?)는 무효로 하며, …불응시 목사면직 제명에 처한다”(2014, 제99회 총회결의 및 요람 p.85)“…소원건은 소원인들에게 ○○노회 판결을 무효로 한다”대로 채용하다(2017, 제102회 총회결의 및 요람 p.124)고 하였으니, 이게 행정사건의 시정 혹은 변경인가? 언제까지 소원장을 받아 시벌하거나 시벌취소를 하겠는가? 재판사건과 행정사건의 분별도 못할 리가 없겠는데, 그런데도 꾸준히 하회 판결을 변경하거나 시벌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이라도 있다고 보아야 하겠는가?2005년 제90회 총회 이후 소원에 의해 시벌하거나 시벌을 취소한 건은 대게 아래와 같다.“북○○노회 이○○ 씨가 소원한 건은 김○○, 송○○, 송○○, 정○○, 권○○, 이○○, 김○○, 문○○ 목사를 원소속 노회로 복귀하고 목사직은 회복 조치하라” (2005년 제90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P.75)“동○○노회 충○교회 김○○ 씨의 동○○노회 노○○ 씨에 대한 소원건은 …15일까지 타교회로 이명하고 이를 불응시 제명출교를 확정하다…”(2013년 제98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P.89)“충○○노회 임○○ 씨 외 1인의 충○노회 ○○순 씨에 대한 소원건은 ”충○노회 서기 이○○ 씨는 강도권 외 공직정지 2년을… 박○○ 씨는 강도권 외 공직정지 1년을… 이○○씨는 강도권 외 공직정지 6개월을 노회로 하여금 처하게 한다…”(2014년 제99회 총회결의 및 요람 P.96)“서○○노회 이○○씨 외 50인의 서○○노회 김○○ 씨에 대한 소원은 서○○노회 분립과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의 처리(권징)을 무효로 하고 서○○노회는 분립한다.” “충○노회 ○○순 씨에 대한 소원은 충○노회 서기 이○○ 씨는 강도권 외에 공직정지 2년에 처한다. 충○노회 박○○ 씨는 강도권 외에 공직정지 1년에 처한다. 충○노회 이○○ 씨는 강도권 외에 공직정지 6개월에 처한다…” (2015년 제102회 총회결의 및 요람 P.120)“경○노회 교회 영○○○교회 윤○○ 씨 외 21인의 경○노회 김○○씨에 대한 소원건은 소원인들에 대한 경○노회 재판국의 판결은 무효로 한다”(2017년 제102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P.127) (계속)
    • 기고
    • 특별기고
    2019-05-10
  • 헌법규정의 상충과 모순 규정 소고
    ‘시무목사 청빙’ 3분의 2 가표 기준 출석수냐, 투표수냐?공포 후 서약을 마쳤다니, 그러고도 헌법규정인가? 교회를 시무하는 목사는 위임목사, 임시목사(2009년 판 헌법까지 이어 온 이 칭호가 2014년 판 헌법부터 「시무목사」로 칭호를 바꾸었는데, 노회의 청빙 허락이나 결의에 따라 직무를 담당한 목사<즉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전도목사, 교단 기관목사, 종군목사, 교육목사, 선교사>)는 다 시무목사요, 노회의 허락이나 결의로 직무를 맡지 못한 목사는 다 무임목사였다.그런데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바꾸면서도 정 제10장(노회) 제3조 「회원자격」은 그냥 두어 “지교회 시무목사(즉 칭호 변경에 따라 지금은 임시목사)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와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시무를 위임한 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그 밖의 목사는 언권회원이 되며 총대권은 없다”고 하였으니, 조문대로면 2009년 판 헌법 시대까지는 「시무목사」란 위에서 본 대로 임시목사 만이 아니고 위임목사도 함께 포함해서 총칭하는 칭호였는데, 2014년 판 이후에는 「시무목사」는 「구 임시목사」만을 가리키는 칭호로 바꾸었으니, 위임목사는 「그 밖의 목사」일 수밖에 없고, “그 밖의 목사는 언권회원이 되며, 총대권은 없다”가 되었는데, 과연 이런 뜻으로 헌법을 바꾸었는가? 아니면 헌법 조문 한군데만 보고 연관된 다른 조문은 살필 줄을 몰라서 이렇게 되었는가? 시무목사 (구 임시목사) 관계 오류규정은 그것만이 아니다. 정 제4장 제4조 (목사의 칭호) 「2. 시무목사」 조직교회 시무목사는 공동의회에서 출석교인 3분의 2 이상의 가결로 청빙을 받으나, 그 시무기간은 1년이요, 조직교회에서는 위임목사를 청함이 원칙이나, 부득이한 형편이면 다시 공동의회에서 3분의 2의 가결로 계속 시무를 청원하면 1년간 더 하락할 수 있다. 단 미조직교회에서 시무목사 시무기간은 3년이요, 연기를 청원할 때에는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같은 헌법 정 제21장 제1조(공동의회) 「5. 회의」에서 “연말 정기 공동의회에서는 당회의 경과상황을 들으며… 그밖에 법대로 제출하는 사건을 의결하나니, 일반의견은 과반수로 하되, 목사청빙투표는 투표수 3분의 2의 가와, 입교인 과반수의 승낙을 요하며, 장로, 집사, 및 권사 선거에는 투표수 3분의 2의 가로 선정한다” 하였으니, 제4장 제4조 2항과, 동 제21장 제1 조 5항이 목사청빙은 공동의회에서 투표로 선정된다는 점은 같으나 전자(정 제4장 제 4조 2항을 가리킨다)는 “출석교인 3분의 2 이상의 가결로…”라고 규정되었고, 후자는 “목사청빙 투표에는 투표수 3분의 2의 가표와 입교인 과반수의 승낙을 요하며…”라고 규정되었으니, 도대체 어느 규정을 따라야 하는가? 전자를 따르면 후자에 따라 불법이 되고, 후자를 따르면 전자에 따라 불법이 되지 않겠는가? 또 2014년 판에서 정 제4장 제4조 2.「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칭호를 바꾸었는데, 바로 그 밑에 「3. 부목사」항은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목사…”라 하였으니, 칭호변경 후에도 임시목사가 남았으니 웬일인가? 미처 보지 못해서인가? 안 바꾸었는가?한 군데를 더 보자. 정 제15장(목사, 선교사 선거 및 임직) 「제 11조 위임예식」 1. 목사서약 2. 교인의 서약 ① ② ③ ④ ⑤공포 내가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노회의 권위로 목사 ○○ 씨를 본교회 목사로 위임됨을 공포하노라. 이같이 서약을 마친 후에 회장이나 다른 목사가 신임목사와 교회에게 정중이 권면한 후에 축도록 폐식한다“고 하였는데, 우선 항목의 구분부터 바로잡는다면, 「1. 목사서약」은 「1. 목사 위임 서약」으로, 「2. 교인서약」은 바로 되었으나, ① ② ③ ④ 항까지는 교인서약 항목이지만 ⑤공포는 교인서약 항목이 아닌데 교인서약 항목 ④에 이어 ⑤로 한 것은 잘못이고, 1. 목사위임서약, 2. 교인서약에 이어 「3. 공포」가 되었어야 옳지 않겠는가?이제 내용을 보자. 비록 공포를 교인서약의 한 항목처럼 「⑤ 공포」로 되었을지라도 내역은 “내가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목사 ○○ 씨를 본 교회 목사로 위임됨을 공포하노라”고 분명히 공포하였는데, 이어서 “이같이 서약을 마친 후에 회장이나 다른 목사가 신임목사와 교회에게 정중히 권면한 후에 축도로 폐식한다”고 하였으니 「공포」가 서약인가? 서약도 공포 같고, 공포도 서약 같은가? 그리고 「목사 ○○ 씨를…」라고 한 것도, 기왕이면 「목사 ○○○ 씨」라고 ○ 하나를 더 붙이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는 것은 외자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두 자 이름이니 하는 말이다.그리고 표현의 아쉬움은 그것만이 아니다. 정 제14장(목사후보생과 강도사) 「제5조 인허서약」노회는 강도사 인허할 자에게 아래와 같이 서약한다 1.~4고 하였는데, “인허 받을 자인가?” “인허할 자인가?” “인허할 자”라고 하였으니 노회를 가리키는 것처럼 되지 않았는가?정 제3장(교회직원) 제3조(교회의 임시직원) 「4. 남녀 서리집사」 “교회 혹은 목사나 당회가 신실한 남녀로 선정하여 집사직무를 하게 하는 자니, 그 임기는 1개년이다” 하였는데, 선정된 자는 신실한 남녀라고 하는 뜻인가? 신실한 남녀 중에서 선정하는가? 그리고 “집사직무를 하게 하는 자”는 그를 선임한 “교회 혹은 목사나 당회”가 분명한데, 선정된 서리집사가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하는 자”라니 주체의 혼동은 아니겠는가?또 권 제7장(즉결처단의 규례) 제50조 3항에서 “책벌인 명부에는 시벌한 자를 기입하고, 별명부에는 전 1, 2항에 해당한 자를 기입하고, 노회에 제출하는 통계표에는 이를 완전한 교인으로 셈하지 말 것이다”고 하였는데, “책벌인 명부에는 시벌한 자를 기입하고…”라고 되었는데, 시벌한 자는 당회, 노회, 대회, 총회 등 치리회인데 책벌인 명부에 누가 시벌했는지를 기록하는가? 「시벌 당한 자를 기입」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1930년 판 헌법 이래로「책벌 및 해벌 명부 (책벌 및 해벌 연월일 기입)」로 되어 내려왔는데, 고려측과 합동 후 첫 판인 1964년 판에서 「책벌 및 해벌인 명부」로 인(人)자가 잘못 들어갔는데,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잘못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위임목사를 노회의 언권회원인 것처럼 만들고, 청빙투표에서 3분의 2 가표 기준을 출석수라고 하면서 또 투표수라고 되었으니, 이게 과연 헌법규정인가? 헌법개정이 오히려 헌법을 망가뜨림이 되는 것은 아닌가? <끝>
    • 기고
    • 특별기고
    2019-04-26
  • 치리회 재판회 규정 등에 관한 소고
    치리회란 당회, 노회, 대회, 총회 행정회의 총칭장로회 정치는 행정권, 권징권 양권 1체 체제 국가는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司法)으로 나누는 3권분립 체제이지만, 장로회정치를 따르는 교회들은 교회를 다스리는 치리권을 행정권과 권징권으로 나누는 양권일체 체제이다. 즉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가 행정회로 회집하면 행정관계 직무와 직권을 행사하고, 재판회(국)로 회집하면 재판관계 직무와 직권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물론 어느 회로 소집 되든지 회집되는 회원은 바로 그 치리회 회원 그대로이지만(즉 동일인들이지만), 행정회에서는 재판관계 직무와 직권을 행사하지 못하며, 재판회에서는 행정관계 직무와 직권을 행사하지 못한다.그리고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 소집은 일반적으로 행정회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당회도, 노회도, 대회, 총회도 굳이 행정회라고 덧붙이지 않지만, 재판회는 행정회가 재판회로 소집하기로 가결해야 재판회로 소집된다. 그리고 당회 외의 각 치리회는 재판사건을 각기 재판회에서 직할 심리할 뿐 아니라, 재판국을 구성하여 재판하게 하고, 또 그 결과보고를 본회가 채택하는 방법으로도 행하도록 규정한다(권 제13장 제117조, 동 제124조 2, 동 제134조 2). 결국 재판사건을 다룰 수 있는 교회재판기관은 각 치리회가 직할심리하는 재판회와 또 재판국이라고 하는 말이다.그러므로 권 제4장(각항 재판에 관한 보통규례) 제20조가 “치리회가 재판회로(”를“로 된 것은 1960년 판 헌법의 오류이다)회집하면…”이라고 옳게 규정되었고, 동 제27조~제29조, 제32조, 동 제8장 제67조, 제69조도 바로되었으나, 권 제4장 제21조~제26조, 제32조~제33조 뿐 아니라 동 제8장 제55조~제56조, 제58조, 제61조 등은 재판기관을 그냥 “치리회”라고 잘못 규정된채 그대로 넘겨오고 있다.《치리회 석상이냐 재판회 석상이냐》그런데 재판기관을 그냥 치리회라고 규정된 잘못은 그냥 보아 넘길 수도 있으려니와, 제7장 (즉결처단의 규례) 제48조에서 “누구든지 치리회 석상해서 범죄하거나, 다른 곳에서 범죄한 것을 자복할 때는 치리회가 먼저 그 사실을 청취한 후 즉시 차결할 수 있다. 1. 치리회석상에서 범죄한 자는 그 재판에 대하여 2일 이상의 연기를 청구할 권이 있다…”고 한 “치리회석상”은 “…그 재판에 대하여…”라고 하였으니, 「치리회 (당회, 노회, 대회, 총회) 재판회 석상이 분명한데도, 규정은 그냥「치리회석상」이니 치리회 재판회 석상이 아니고, 행정회 석상의 범죄에 대해서도 즉결처단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지 아니하는가?즉결처단이란 본래 「증거조사 없이 처단하는 규칙」(1922년 판 헌법 P.272)이다. 왜 증거조사 없이 처단하느냐? 범행 여부를 판단할 재판관된 치리회 재판회(국)원들이 그 범행을 직접 목도하였는데, 범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 증거를 조사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서 치리회 재판회석상에서 행한 범행은 즉결처단의 대상이 되나, 「재판회」가 아닌 「치리회(행정회)」석상의 범행은 증거를 조사해서 판단하는 정식재판의 대상인 것은, 「치리회 재판회」나 「치리회(행정회)」가 비록 그 구성요원은 동일하다고 해도 재판사건을 심리판단할 자격은「치리회 재판회」에만 있고, 「치리회(행정회)」에는 없기 때문이다.《서로 다른 조직과 성수 규정》권 제13장 제124조에는 “대회는 상설재판국을 두고 목사 5인 장로 4인을 국운으로 하되, 상비국원제로 3조에 나누어 매년 3인 씩 개선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정 제11장 제4조(대회 권한과 직무) 11. 에서는 “대회는 재판국을 두어 (국원은 목사, 장로 9인 이상) 권징조례대로 재판한다…”고 규정되었으니, 권징조례의 재판국원은 “목사 5인 장로 4인”인데, 정치에서는 목사 수 장로 수를 각각 구별하지도 아니하고 그냥 「9인 이상」이라고 하였으니 국원의 수만은 같아 보이지만 「9인 이상」이란 9인은 물론 11인도 13인도 15인도 다 무방하다는 뜻이 되니, 역시 권징조례와는 서로 다르다.그리고 성수규정에서 권 제13장 제126조는 “대회재판국의 성수는 4분의 3 출석으로 하되, 그 중 목사가 반수 이상이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정 제11장 제4조 (대회권한과 직무) 11.에서는 “…재판국 개회성수는 4분의 3 이상이 출석하여야 개심하여…”라고 하여 역시 서로 다르다. 권징조례는 “4분의 3”으로 되었는데, 정치는 “4분의 3 이상”이라고 이상을 붙였으니 다르고, 권징조례는 “그 중(즉 출석국원 중 필자 주:) 목사가 반수 이상이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교회정치에는 이 일에도 아무런 규정이 없으니 웬일인가?9인의 4분의 3은 6.75인, 즉 7인인데, 권징조례의 규정대로는 이 7인 중 반수는 목사라야 한다고 하였으니, 장로 5인 출석에 목사 2인 출석이면 수는 되나 목사 반수가 아니니 성수가 아니고, 장로 4인 목사 3인 출석의 경우도 역시 수는 되나 목사 반수가 아니니 성수가 아니고, 장로 3인 목사 4인이면 수도 되고 목사 반수 이상 규정에도 부합하니 성수가 된다. 그런데 장로 4인 출석에 목사 4인 출석 도합 8인 출석이면 권징조례는 4분의 3 출석 즉 7인 출석을 성수로 하고 있으니, 규정대로 4분의 3을 초과하였으니 성수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정치 규정으로는 「4분의 3 이상」이라고 하였으니, 4분의 3인 7인은 물론, 8인, 9인도 성수가 된다는 것이다.이제 필자 나름대로 본다면 권징조례의 대회재판국 조직규정은 흠잡을 데가 없는 적정(適正)한 규정이지만, 성수규정에서 “…목사 반수라야 한다”는 규정은 “목사 과반수여야 한다”로 되었어야 옳았으리라고 본다.목사와 장로의 권한이 동등하지만, 목사는 가르치는 직무 한가지를 더해야 하는 입장과, 회의 정치 체제에서 짝수 동수이면 아무런 결정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 등에서, 목사에게는 장로와 동등 범위 안에서는 「목사 우선주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니 말이다.그리고 대회제는 고려측과 합동 후 교회정치 첫 판인 1964년 판에서 신설되었으나, 권징조례의 대회제는 10여년 후인 1976년 판에서 신설하면서 이미 잘못 규정된 교회정치의 대회관계 규정을 그냥 두고 넘긴 잘못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이다.그리고 권징조례에서 「치리회재판회 석상」이 그냥 「치리회석상」이 된 것도 어서 바로 잡혀야 한다. <끝>
    • 기고
    • 특별기고
    2019-04-18
  • 교회 항존직무와 종신직 규정에 관한 소고
    기름부어 세우는 안수임직 종신인가, 한시인가?장로가 사직은 해도 사면은 못하게 된 헌법규정 1922년 판 헌법 (대한예수교 장로회총회의 사실상의 원헌법이다) 제3장 교회직임(敎會職任) 『二.(당시에는 조(條)를 쓰지 않았다) 「교회에 영존(永存)할 직임」교회에 영 존 불폐(不廢)할 직임은 여좌(如左)하니, 장로(감독) (행 20:17, 28, 딤전 3:1)와 집사 라, 장로는 2. 가 유(有)하니, ①강도함과 치리함을 겸한 자를 목사라 예칭(例稱)하고, ②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칭하니, 이는 회원의 대표자라, 이 2직은 성찬 참례하는 남자 라야 피택되나니라』. 1930년 판에서는 「교회에 영존할 직임」(Perpetual officers)이 「교회에 항존할 직임」으로 바뀌고 “…이 2직은 성찬참례하는 남자라야 피택되느니라”를 삭제하여 목사, 장로, 집사의 성차별을 철폐하는 것처럼 되었으나 “교회에 항존할 직원은 여좌하니 장로(감독)(행 20:17, 28 딤전 3:1~13)와 집사니라”고 규정하면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성경구절을 넣었으니, 성차별 철폐로 볼 일이 아니다.그리고 같은 헌법 정 제13장 장로, 집사 선거 및 임직 「五.<제 5조> 임기」 “치리장로 급(及) 집사의 직은 종신항직(終身恒職)인즉, 본인이 임의로 사면하지 못할 것이요, 면직할 사(事) 외에는 교회도 임의로 해제하지 못할 것이니라.” 「六. <제6조> 자유사직」장로 혹 집사가 노혼(老昏)하거나, 신병으로 시무하기 불능 하든지, 이단이나 악행은 없을지라도 교회원 태반이 그 시무를 불열(不悅 좋아하지 않음)하게 되면, 당회의 하락으로 직무를 사면하고 휴직장로가 될 수 있고, 본직까지도 사면할 수 있느니라.”위 제5조가 1930년 판은 “4조 임기: 치리장로 급 집사의 직은 종신직이니라. 단 3년 1차 씩 시무를 투표할 수 있고 그 표결 수는 과반을 요하느니라”로 바뀌어 1986년 판 헌법에 이르렀는데, 그 후 1993년 판에서 “치리장로, 집사의 임기는 만 70세까지 다…”로 개정하면서 엉뚱하게 “치리장로, 집사의 직은 종신직이다”를 삭제하였으니, 치리장로, 집사가 시무를 그치면 동시에 직분도 그치는(즉 없어지는) 직분이 되었으니 이는 시무기간 동안만 직분자인 임시직과 사실상 동일하여 시무종결과 함께 이제는 치리장로도 아니고 집사도 아닌 성직 없는 순수 평신도가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는 것이 옳다는 뜻에서 이렇게 바꿨는가? 아니면 종신직 규정을 삭제하면서도 치리장로, 집사 가 시무를 그쳐도(종신직 규정이 있을 때처럼) 장로, 집사 그대로이겠거니 하는 착각 때문은 아니었는가?성막 제도가 시행될 당시 기름부어 세우는 직분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다. 그리고 이 세 직분의 하는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었다. 그리고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선지자의 직무와 제사장의 직무와 왕의 직무 즉, 구원사역을 홀로 담당하사 십자가로 대속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주께서 불러 세우신 사도들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골 1:18>)를 세우시고 몸된 교회에 그 직무가 그대로 이어졌으나, 선지자가 계시를 받아 증거하던 일은 신구약 성경의 완성으로 더 할 일이 없어 폐직되고, 이제는 계시된 말씀인 성경대로 전파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직무가 되었으며, 제사장의 직무도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 없느니라“(히 10:14, 18)고 하신 바대로 제사장의 직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완성하셨으니, 역시 더 할 일이 없어 폐직되었으나, 이제는 긍휼을 베푸는 직무로 이어졌으며, 왕의 직분도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의 통일왕국시대가 르호보암왕 여로보암왕의 남북 분립왕국시대를 거쳐 유다왕국 시대에 패망하고, 바벨론 포로시대가 되면서 다스릴 나라가 없어 왕의 직분도 폐지되었으나, 이제는 몸된 교회를 다스리는 직무로 이어지고 있다. 이 구원사역은 결국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본분이요, 교회가 항상 행하여야 할 항존직무가 되었으며, 이 항존직를 맡아 수행할 직원이 기름부어 세우던 선지자의 직분은 안수임직하는 목사직분이요, 왕의 직분은 안수임직하는 치리장로 직분이요, 제사장의 직분은 안수임직하는 집사의 직분이니, 그래서 항존직원이요, 기름부음에는 시한적인 것이 없고 온전히 종신에 이르게 하셨으니, 안수임직하는 목사, 장로, 집사 등 모든 항존직은 모두 시무여하에 불구하고 그 직분이 종신까지 계속되는 종신직이라고 하는 말이다.그러므로 1993년 판 헌법에서 “치리장로, 집사의 직은 종신직이다”를 삭제한 일은 성경의 교훈대로 종신까지 이르게 해 온 기름부음(안수 임직)의 효능을 마치 시한적인 것처럼 되게 하였으니, 성경교훈에 대한 에누리가 아니겠는가?그리고 위에서 본 바대로 원헌법 제13장 제6조는 “…당회의 허락으로 직무를 사면하고 휴직장로가 될 수 있고,(즉 사면해도 장로이며…필자 주:), 본직까지도 (시무사면이 아니고 직분 사직도 할 수 있으며… 필자 주:)사면할 수 있느니라”고 규정하여 시무사면도 있고 직분 자체를 그만두는 사직도 있다고 하였는데, 같은 항존직이요 종신직인 목사에게는 자유사면, 권고사면, 자유사직, 권고사직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면서도(정 제17장 제1조~제4조), 치리장로와 집사에게 대해서는 (목사와 동일한 항존직이요 종신직임에도 불구하고), 1930년 판 헌법 (제13장 제5조~6조) 이래로 자유휴직과 사직, 권고휴직과 사직만 있고 자유사면과 권고사면을 빠뜨리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장로 자유사면과 권고사면을 시행해 오고 있으니 왜 이렇게 되어야 하겠는가? 헌법개정을 주도하는 인사들의 잘못과 부주의가 이런 상황을 만들게 되었고, 일단 개정되고 나면 그런 점을 찾아내어 바로잡아야 하겠는데도, 그대로 시행하는 타성이 지금은 없겠는가? 다른 말이기는 하지만 부전지를 붙이면 총회까지 상소할 수 있다는 신설 규정으로 이제는 부전 붙여 올라간 평신도 관계 송사를 총회에서 직접 다룰 수도 있게 하였으니,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한다…”(권 제4장 제19조)는 규정은 사문화(死文化) 되는가? 판결의 변경이 상소인데 부전지로 상소한다니 부전지가 판결인가? (끝)
    • 기고
    • 특별기고
    2019-04-05
  • 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이 글은 지난 3월 21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최한 ‘한국기독교와 3.1운동 기념세미나’에서 김남식 박사가 발제한 “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주3.1운동과 최재화독립운동가 최재화는 1892년 12월 18일 경북 선산군 해평면 산양리에서 아버지 최도원과 어머니 우서원 사이에서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서울 경신학교를 1914년에 졸업하고, 동경 일본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2년만에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모교인 경신학교에 교사로 들어갔다.어느날 최재화는 경신학교의 선배인 세브란스 의전의 이갑성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종로2가의 YMCA에서 만난 이들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곧 있을 3.1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갑성은 최재화에게 경신학교 졸업생으로 영남출신이니 대구지방의 독립운동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의기투합한 최재화와 이갑성은 대구 남성정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세브란스 학생인 이용상과 함께 독립선언서 400매를 가지고 대구로 갔다. 이렇게 하여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8일에 일어났다. 제1,2차 ‘최재화 사건’대구와 선산의 독립운동 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최재화는 다시 대구에 잠입하여 계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관공리들의 사직을 촉구하는 경고장을 살포하는 일과 일본에 항거하는 의미로 각종 상점들이 폐점하기를 촉구하는 경고장을 작성하여 살포하는 일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최재화 사건’이라고 명명하였다.최재화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러한 와중에도 제2차 최재화 사건으로 불리는 ‘무관학교 생도모집 사건’을 또다시 주도하였다. 당시 만주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무력을 기르는 신흥무관학교가 있어서 독립군 양성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6년 6월 중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변장을 하고 다니던 최재화에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보낸 사람이 찾아와 대구 달성공원 벤치에서 그들은 비밀리에 접선을 하였다. 그의 요구는 독립운동을 위해 무관학교 생도를 모집하여 만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최재화는 이 사건으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추적을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상주 역에서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상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최재화는 탈출할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꾀병을 부려 유치장을 나와 형사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을 쳐 중국으로 망명했다.중국에서의 사역최재화가 중국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모색할 때에 일본 총독부는 이른바 제1차, 제2차 최재화 사건의 궐석재판을 실시하여 도합 징역 9년을 언도했다. 상해에 도착한 최재화는 경신학교 시절의 은사인 김규식 박사를 만났다. 또 안창호, 여운형 등 민족지도자들과도 교유할 수 있었다. 최재화는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얻으려는 계파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워 무력독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김원봉, 양건호 등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담하여 ‘힘은 힘으로’라는 행동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후 최재화는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어 무력투쟁을 주도하였다.이 시기에 최재화는 많은 심적 갈등을 겪었다. 그리하여 최재화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경에 있는 금릉신학교를 찾아가 입학하였다. 그러나 생활비와 학비가 없는 상황에서 신학공부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앗다. 근근이 주변의 도움으로 공부하던 중 최재화는 좋은 조건으로 화북신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화북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경영하는 학교로서 보수적인 신학사상을 가르치고 있었다. 교수진은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학생들도 가족과 같은 분위기였다. 화북신학교의 한국인 학생은 최재화와 두 사람뿐이었다. 둘 다 남경의 금릉신학교를 다니다가 전학 온 학생들로서 나이도 동갑이어 그들은 형제같이 지냈다.1924년 산동성의 화북신학교를 졸업한 최재화는 새로운 사역의 길을 찾아야 했다. 형제처럼 지내던 김경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최재화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김경하는 3.1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은 바 있다. 이러한 형편이라 그는 어쩔 수 없이 중국에서 사역해야만 했다. 최재화는 산동성 둬이장교회의 청빙을 받아 산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산동지방에서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대구에서의 사역중국과 만주에서 10여년을 살아왔던 최재화에게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청빙이 들어왔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 헌신자의 새로운 영역을 넓혀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931년 봄, 최재화는 만주를 떠나 고국행 기차를 탔다. 중국에서 사용하던 이름인 최묵을 버리고 최재화로 다시 돌아왔다.최재화가 부임하기 전 대구제일교회의 문제가 생긴 것은 1923년에 이만집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자치파 파동’이렀다. 대구제일교회의 이 사건은 경북 지방 교회들의 사건으로 확산되었고, 선교사들과 함께 한 노회파와 이만집 목사의 자치파의 갈등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대구제일교회 예배당 쟁탈전으로 확대되었고, 10년동안 법정 소송을 함으로써 1천여 명의 교인들은 사분오열되었다. 1931년 4월에 노회파가 3심에서 승리하고, 뒤이어 1931년 11월에 교회당 명도 소송에도 승소하였다.기나긴 재판이 끝난 교회는 새 목사를 모시고 잘 믿어보자는 열의로 가득하였다. 흩어진 교인들이 조금씩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자 새로운 예배당의 건축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계속 늘어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자는 열정이 교인들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1932년 2월 26일부터 일주일 동안 김익두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당 건축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추진되었다. 최재화는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벽돌 한장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붉은 벽돌 한장에 1원을 하엿다. 최재화는 자전거를 타고 경북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며 경북지방 모교회의 건축에 동참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기도와 눈물로 지은 교회당은 1933년 9월 말에 붉은 벽돌 2층 건물, 연건평 448평의 웅장한 모습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였다. 이렇게 지은 예배당은 경북지방의 문화재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적 가치를 더하였고,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제일교회의 위상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최재화는 대구제일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꿈꾸었다. 그 중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인재양성이었다.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는 제일교회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최재화는 그 학교에서 설교할 때가 많았고, 학생들도 교회에 많이 출석하였다.그는 계성학교 출신자들 가운데 소명 받은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켰고, 그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신앙지도를 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생이 훗날 한신대학 학장을 한 이여진과 부산대학교 총장을 지낸 조민하이다. 최재화는 젊은이들을 육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이들이 내일의 한국과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사랑으로 돌보았다.부산에서의 사역1930년대가 저물어 갈 때에 일본의 군국주의 통치는 신사참배를 통해 한국민족을 통제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여기에 대구제일교회나 최재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공교회가 수난을 당하였고, 신사참배에 항거하여 순교하는 성도들이 생기기도 하였다.이런 상황 속에서 최재화는 새로운 사역지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1943년 1월 초 부산진교회로 부임한 최재화는 여기서도 교회당 신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일본의 강압적 통치가 강화되어 교회당 통폐합을 강행하는 형편이어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란 불가능하였다. 특히 최재화는 독립운동으로 전과가 있는 요시찰 인물이기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었다.1945년 8.15해방을 맞아 그는 부산진교회 목사로서 또 부산지방 교계 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최재화는 특히 교회당 신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부산에 진주한 미군들로부터 시멘트 등 건축 자재를 도움받아 부산진교회당을 건축하였다.총회장으로서의 최재화최재화는 부산진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대구서남교회로 부임하였다. 대구에 다시 온 최재화의 사역 영역은 매우 넓었다.그는 1949년 4월9일,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제35회 총회는 고려신학교 문제, 조선신학교 개혁안 등으로 교단 분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총회의 회무 진행도 어려움이 연속이었다.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6회 총회는 끝내 회무를 진행하지 못하고 비상정회 하고 말았다.최재화는 1954년 4월 ‘사설학술강연회 계명기독학관’을 개설해 오늘날의 ‘계명대학교’를 세웠고, 대구장로회신학교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최재화는 1959년 서남교회를 사임하고 구미 안동교회를 1961년까지 시무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1962년 9월17일, 향년 70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기고
    • 특별기고
    2019-04-05
  • 고소·재판과 권징권 행사에 관한 소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실 선포 오늘의 불법한 재판관들에게는 예외라 하겠는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마 18:15~17). 주님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는 일이 생겨났다고 즉시 교회에 말할 것이 아니고, 먼저 너와 그 사람과만 만나서 권고해야 하고(형제의 범행을 남이 알게 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그 권고를 받아 돌이키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니 거기서 사건은 그치게 된다(즉 교회에 말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이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물론 여기서 그가 그 권고를 받아 돌이키면 역시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니 사건은 여기서 종결된다. 그러나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라고 하셨으니, 이제서야 비로소 교회법에 의해 고소할 수가 있게 된다. 이와같이 교회송사는 권고 전치주의 송사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권고과정을 이행하지 아니한 송사는 불법송사이니 심리 판결은 커녕 치리회가 접수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권 제2장 제9조에서 “누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하였다 하여 소송할 때에 치리회는 그 원고로 하여금 마 18:15~17에 있는 주님의 교훈에 의하여 먼저 피고와 화목하여 볼 동안에는 재판을 열지 말 것이라…”한 규정은 마치 고소장은 접수해 놓고, 화목하여 볼 동안까지는 재판을 시작하지 말라는 뜻처럼 되었으니, 이는 1차 단독권고와 2차 증참권고까지 불응할 경우에만 “교회에 말하고…”라고 하신 주님의 교훈과는 상반된다고 할 것이므로 “…화목하여 볼 동안에는 고소장도 접수하지 못한다”로 바꿔야 한다고 본다.그리고 이어지는 주님의 교훈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사, 매고 푸는 일, 즉 시벌과 해벌이 지상교회에서 행해어지지만, 그것이 그대로 하늘에서까지 매이고 풀림이 된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겠는가?시벌과 해벌은 치리회가 행하는 것이고, 그 치리회의 구성요원은 사람인 목사와 장로인데, 사람인 목사와 장로의 회의 뜻(시벌과 해벌을 가리킨다)이 하늘에까지 미친다는 뜻인가? 아니면 사람인 목사와 장로의 회에서의 결의가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통치하시는 주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만일 전자가 옳다고 하면 하늘나라도 사람(목사와 장로를 가리킨다)이 지배하는 것이 되겠으니 그럴 수는 없고, 마땅히 후자 때문이라고 하겠으니, 여기서 목사와 장로의 회인 치리회 회의는 결국 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회요, 혹은 이렇게 다스리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수령하는 자리요, 나아가서는 주님의 명령대로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집행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런데 실제로는 “모든 대회와 회의가 인간의 약점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치리권 행사에 과오를 범하기 쉽다. …그럴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이 권한을 과오를 범하기 쉬운 인간에게 위탁할 수 밖에 없다(정문:14문답). 즉 주님의 뜻이 아닌데도 주님의 뜻으로 잘못 판단하거나, 사람(치리권을 행사하는 목사, 장로를 가리킨다)의 뜻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이라고 우기기도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3심제도를 두었어도, 2심, 3심의 구성요원도 역시 사람(목사와 장로를 가리킨다)이니, 혹시 오실(誤失)이 줄어들런지는 알 수 없거니와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즉 고소하는 자들아! 너와 그 사람과의 권고에 이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날마다 증참케 하는 권고과정을 거치지 아니한 고소가 주님의 명령(마 18:15~17) 거역인 줄을 알지 못하는가? 하늘에까지 미치는 매고 푸는 권세를 행사하는 치리회 구성요원된 목사와 장로들아! 너희 판단이 과연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통치하시는 주님의 뜻 그대로인가? 옳게 판단하면서도 오실(誤失)을 범하는 약점이 네게도 있는데, 실은 매고 푸는 일을 네 뜻대로 하면서도,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죄가 과연 네게는 없다 하겠는가?그런데 근간 어느 교단 기관지에 단골로 게재되는 벌은 면직과 제명출교이다. 제명 출교란 교회의 최고 극형이니, 기독교 밖으로 내어 쫓는 시벌이요, 성경은 이를 “…내가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고전 5:5), 또는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딤전 1:19~20)이라고, 출교가 사단에게 내어주는 벌이라고 교훈한다. 그런즉 「제명출교」판결을 내린 재판기관의 목사, 장로들아! 목사와 장로를 사단에게 내어 준 그 판결이 과연 주님의 뜻 그대로인가? 아니면 주님의 뜻을 빙자한 재판관된 목사, 장로 너희 뜻에 의한 시벌권 행사는 아니었는가?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이 세상 법관들도 1심의 잘못은 2심에서 바로 잡고, 2심에서의 잘못은 3심에서 바로잡도록 하는 것은 교회재판의 경우와 같거니와 어느 심급에서든지 재판을 잘못했다고 법관을 벌하는 일이 없는데, 교회재판에서도 재판을 잘못했다고 재판회장이나 재판회원 혹은 재판국장이나 재판국원이 벌 받는 일을 보지 못했는데, 과연 마지막날 까지도 그러하겠는가? 마 7:21 이하를 보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의 선포가 너와는 과연 무관하겠는가? 무관하겠는가? 선지자이었어도, 많은 권능을 주의 이름으로 행한 자이었어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하신다 하셨는데 노회, 총회에서도 알아주는 일꾼, 지도층된 너와는 무관하겠는가?(끝)
    • 기고
    • 특별기고
    2019-03-22
  • 김노아 목사 /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 이만희의 비성경적인 교리의 정체를 밝힌다-1
    1. 이만희의 출생과 신비한 체험 이만희는 1931년 9월 15일, 경북 청도군 풍각면 현리 702번지에서 이재문 씨와 고상금 씨 사이에서 열 두 아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유아 시절에는 고향에서 평범한 시골아이로 자라났으며, 17세 때 서울 성동구 금호동 형님 집에 기거하면서 건축공사장에서 일하던 중 어느날 한 전도사에게 이끌리어 창경원 앞 천막 교회에서 침례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그 후 이만희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풍각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57년도에 집에서 “박군의 심령”과 “학생문장독본”이라는 전도지를 탐독한 후 어느 날 저녁 무렵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처음에 기도하는 방법을 몰랐던 이만희는 집뒤 들판에서 하늘을 향해 눈을 뜨고 기도하던 중에 갑자기 별이 머리 위만큼 내려와 헬리콥터마냥 돌고 있어서 깜짝 놀라 취침 중인 부친을 황급히 깨워 “아버지! 별 구경하세요”라고 외쳤다고 한다.2. 이만희의 신앙 노정 이만희는 고향에서 23세까지 지내다가, 깊은 병이 들어 감람나무로 나온 박태선이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치료를 받기 위하여 한동안 경기도 소사읍 범박리 박태선 교주가 세운 신앙촌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968년 말경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현재 남서울어린이대공원 자리)에서 18세의 ‘어린양’ 유재열과 일곱 천사가 계 15:5을 근거로 출현했다는 증거장막성전에 입교하였다. 당시 유재열은 부친 유인구와 함께 ‘두 증인 두 감람나무’로 출현하여, 거대한 언약궤를 만들어 장막성전 교회 단상에 두었고, 언약궤 안에는 “1970년 12월 30일 안으로 천국이 온다”는 내용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서가 들어있다고 선언하였다. 이 소식이 퍼지자 별안간에 과천 저수지 앞 유재열 증거장막성전은 1970년에 이루어질 예수 재림 지상천국을 앞두고 수천명이 모여들면서 저수지 앞 산자락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때에 이만희는 미장이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고 한다.그런데 1970년도 지상천국이 실패하자, 이창호와 당시 유재열 증거장막성전의 전도사 송동원과 이만희가 결탁하여 장막성전을 탈퇴하는 과정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고, 송동원과 대령 출신 신○○이 또 다른 ‘두 증인 두 감람나무’로 자칭하여 출현하였다. 성경에 능통한 송동원이 유재열의 장막성전을 탈퇴하여 교권을 형성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때에 “목영득”이라는 자가 일어나 창세기 49:10에 예언된 “실로” 하나님으로 출현하여 유재열 장막성전 교인들을 모아서 많은 사람들이 ‘목씨’를 따르게 되었다. 이때에 이만희는 목영득 재림주의 12사도 중에 6번째 사도가 되었다. 목영득은 성경뿐만 아니라 남사고 예언을 들고 일어났는데, 이후 이만희는 목영득과 헤어져서 신천지 교회를 세우고 나서도 남사고 예언을 성경과 섞어서 증거하기도 했다.이에 목영득으로부터 탈퇴한 이만희는 다시 “백만봉”이라는 재림주의 11번째 제자가 되었다. 백만봉은 유재열 증거장막성전에서 일곱 천사로 출현한 미가엘 천사라고 부르던 자로서 교주 유재열 다음에 인기가 많은 설교자였다.백만봉은 1980년 3월 13일 공중휴거 날짜를 선포하고 들림받는 장소가 과천 물원리 뒷산이라고 하였다. 3월 13일은 유재열이 예수 성탄일로 정한 날짜다. 이 날에 백만봉 재림주를 따르는 자들 수백명이 들림받기 위하여 도시락을 싸들고 물원리 뒷산으로 모였으나 백만봉 재림주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박태선, 유재열, 목영득, 백만봉으로 이어지는 네명의 교주로부터 천국을 사기당한 이만희는 물원리 뒷산에서 내려와 과천 인덕원 사거리 이만희 집에 모여서 이만희를 중심으로 홍종효, 김종택, 이만춘과 함께 가정교회를 세웠고, 교회 이름을 무너져가는 유재열 증거장막성전을 다시 세운다는 명분으로 신천지 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라고 하였다.
    • 기고
    • 특별기고
    2019-03-22
  • 고소와 부전(附箋)상소 개헌안 소고 (하)
    당회, 시찰의 경유는 노회가 원심인 고소에 국한상소건은 이미 경유과정 거쳐 판결받은 구 사건 (승전) 따라서 “…후 10일”이 지나면 본 하회의 처결이나 판결이 확정되었는데, 확정 후에 소원(상소)통지서나 이유서를 접수할 어리석은 본 하회의 서기가 있겠는가? 《경유, 부전지 미비가 무엇인가?》이와같이 소원건이나 상소건은 소원인이나 상소인이 “후 10일 이내”에 소원(혹은 상소)통지서와 이유서를 하회서기(서기 유고시에는 회장)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성립되는데(권 제9장 제85조, 동 제96조), 경유는 무엇이고 부전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회를 1심으로 하는 목사관계 고소에서 원고가 고소장과 죄증설명서, 마 18:15절 이하의 교훈대로 너와 그 사람과의 권고, 그 다음에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하는 권고도 듣지 않았다는 진술서, 이 세가지 문서를 작성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소속 목사의 재판관할권을 가진 노회서기에게 그 문서를 접수시켜야 하는데, 원고가 어느 교회의 평신도일 경우, 그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총찰하는 직무(정 제9장 제5조 1.)와 권한이 당회에 있으니, 당회의 협의와 선도과정을 거치게 해야 옳고, 노회는 노회의 치리를 방조하며, 지교회를 순찰하며, 지교회의 모든 일을 협의하도록 시찰위원회를 두었으니(정 제10장 제5조 9~11), 시찰위원회의 협의와 선도과정을 거치게(경유)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경유하기에 합당치 않은 문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회나 시찰위원회에서는 「노회장 귀하」로 된 문서이니 접수거부니, 기각이니 할 권한은 없고, 다만 경유하기에 부적당하다는 뜻을 기록한 쪽지를 붙여 반려하면, 노회서기는 경유과정을 거친 사실이 확실하니 문서를 접수하게 된다. 그런데 간혹 당회도 시찰회도 쪽지를 붙이지 아니하고 그냥 반려하면, 본인이 언제 어디서 경유요청이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적은 작은 쪽지를 붙여 노회서기에게 접수시킨다. 경유기관이나 본인이 작은 쪽지를 붙인다고 해서 부전(附箋), 혹은 부전지(附箋紙)이다. 결론적으로 교인이 교인을 걸어 고소하는 경우는 바로 당회에 내면 된다. 경유니 부전지와는 무관하다. 교인이 목사를 피고로 하는 고소에는 당회와 시찰위원회를 경유해야 하고, 경유가 거부되면 본인이 거부당한 내용을 적은 작은 쪽지(부전지)를 붙여 노회에 내면 된다.그리고 경유니 부전지니 하는 규정은 노회를 1심으로 하는 고소사건의 경우에만 해당하고 상소사건과는 무관하다. 상소사건은 새사건이 아니고 이미 경유기관을 거쳐 올라온 사건이요, 이제는 협의니 선도니 하는(<경유>) 차원을 넘어 판결까지 받았는데, 그 노회에 다시 협의니 선도니 하는 과정을 취할 이유가 있겠는가? 헌법이 규정한 상소절차대로 “후 10일 이내”에 상소통지서와 이유서를 하회서기에게 제출하면 족하다는 말이다(권 제9장 제96조).《부전 상소규정 신설 옳은가?》 그런데 과거에는 별로 들어 본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노회서기들이 상소통지서와 상소이유설명서를 접수하지 아니하고 되돌려 보내는 경우가 빈번해서인가? 제102회 총회 (2017년)의 결의로 전국교회에 수의한 헌법개정안에 의하면 권 제9장 제94조 1~2에 이어 “3. 상소인이 소속된 하회가 상소인의 상소통지서 접수를 거부하면 부전(附箋)하여 상회에 상소할 수 있다.”고 신설한다는데 이것이 웬 일인가? 우편을 이용하면「등기 배달증명」도 있고, 「내용증명」우편도 있는데, “…후 10일 이내”에 우체국 소인이 찍혔으면 상소사건은 이미 성립되었고, “…후 10일 이내”에 하회서기에게 통지한 여부도 역시 총회에서 판단할 것인데 웬 부전상소인가?가령 어느 교회의 회계집사(담임목사의 조카)가 100원짜리 물건을 사고 장부에는 1,000원짜리 물건을 샀다고 기장하고 900원을 떼어 먹었다고, 물건을 살 때에 함께 갔던 집사가 당회에 고소하였더니, 무혐의 처결로 끝내자, 화가 난 집사가 노회에 상소하려고 상소통지서와 상소이유 설명서를 당회서기에게 제출하였더니, 접수를 거부하여 부전을 붙여 노회에 올렸는데, 노회서기도 접수를 거부하여 총회에 부전 상소하였으니, 총회가 평신도(서리집사) 사건을 직접 다루는 상황이 되겠는데 이것이 옳겠는가?밀어 붙이려고만 하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 보자. 상소란 판결의 취소나 변경을 구하는 것인데(권 제9장 제94조) “접수거부”가 판결인가? 판결이 아닌데도 상소할 수 있다면, 접수거부가 아닌 “판결의 변경”을 구하는 것이 상소라고 규정된 권 제9장 제94조는 죽은 법이 되는가?“접수 거부”는 행정처결이요, 행정처결이 잘못되었으면 “…하회가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아니하거나, 위법한 행동이나 결정에 대하여 변경을 구하는 소원”의 대상이 분명한데(권 제9장 제84조), 부전을 붙이면 상소할 수 있다니 왜 헌법을 망가뜨리는가? 상소규정도, 소원규정도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한다”(권 제4장 제19조)는 재판관할 규정까지 뒤범벅을 만드는가?결론컨대 교인이 교인을 피고로 고소하려고 하면 고소장과 죄증설설명서, 마 18:15~의 주님의 교훈대로 너와 그 사람과의 권고, 한 두사람을 데리고 가서 말마다 증참케 하는 권고과정을 거쳤다는 진술서를 작성하여 당회서기에게 제출하면 되고, 경유니, 부전지니가 필요치 아니하다. 그러나 목사를 피고로 하는 고소에는 위에서 본 세 가지 문서를 작성한 후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총찰하는 직무와 직권을 가진(정 제9장 제5조 1) 당회를 거쳐(경유하여), 노회의 치리를 방조하며 지교회를 순찰하며 지교회의 모든 일을 협의하는(정 제10장 제6조 9) 시찰위원회와의 협의와 선도 과정(경유)을 거쳐 노회서기에게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경유하기에 부적당한 문서로 여겨지면 부전 반려하고,그냥 반려하면 본인이 그 사유를 기록한 쪽지를 붙여 노회서기에게 제출한다.그리고 상소는 새 사건이 아니고 이미 경유과정을 거쳐 판결까지 받은 그 사건이니 그 회를 다시 경유할 이유가 없고 다만 상소기일 안에 상소를 못하게 방해하는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는데, 이를 금해야 할 총회가 개헌해서도 합법화하겠다니, 총회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 (끝)
    • 기고
    • 특별기고
    2019-03-08
  • 고소와 부전(附箋)상소 개헌안 소고 (상)
    총회직무에 고소접수처리 규정은 64년판 오류신도와 목사의 원심재판권이 없는 대회와 총회 《고소 받아 재판하는 총회의 불법》권 제4장 제19조에 의하면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즉 목사를 피고로 하는 고소를 받아 재판하는 권한과 직무는 당회에도 없고, 대회나 총회에도 없고 노회에 있는데, 온갖 노회들 중에서도 오직 그 목사가 소속한 노회에만 있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하나 (즉 교회에서 아무런 직분도 받은 적이 없는 일반 신도들은 물론, 직분을 받은 신도 <서리집사, 집사, 권사, 장로, 노회총대가 된 장로나, 노회임원 등, 노회관계 직분을 받은 장로와, 총회총대가 된 장로나, 총회임원 등 총회 관계 직분을 받은 장로>의 고소를 받아 재판하는 권한과 직무는 노회에도 없고, 대회나 총회에도 없고, 당회에 있는데, 온갖 당회들 중에서도 오직 그 일반신도<교회에서 아무런 직분도 받은 적이 없는 신도와 서리집사, 집사, 권사, 장로>가 소속한 당회에만 있고),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즉 노회가 당회에 명령하거나, 총회가 노회에 명령하여 <임원회도 아니고 상비부도 아니고 상회라 하였으니, 당회의 상회는 노회요, 노회의 상회는 총회이니, 하회에 명령하려고 하면 반드시 상회의 결의가 있어야 할 수 있다>) 처리하라는 (2000년 판 헌법이 “라”자를 빠뜨려 “처리하는”이 된 것은 오류이다) 사건을 하회가 순종하지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결국 고소를 받아 재판할 수 있는 치리회란 당회(일반신도 관계 재판)와 노회(목사 관계 재판)이니, 정문: 405 문답에서 “대회와 하급치리회는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르냐?” “대회와 하급치리회가 서로 다른 것은 대회는 상소 혹은 상고를 수리하는 회이다. 목사의 원치리권이 노회에 있는 것처럼, 치리장로나 교인의 원치리권(직접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가리킨다 …필자 주:)은 당회에 있은 즉(Presbyterian Digest. PP.191~192) 대회는 이런 원치리권(직접 다스리는 권한… 필자 주:)이 없고, 오직 노회로부터 위탁 판결이나 고소, 혹은 상소나 상고가 있어야 이를 심리할 수 있다” 동 430문답 “총회에 어떤 원치리권이 있느냐?” “상고를 받지 아니한 이상 교회와 목사에 대한 원치리권이 없다(Presbyterian Digest. PP.127, 277, 본서 438~440문답 참조)고 풀이한다. 즉 총회는 상소나 소원, 위탁판결 청원은 받을 수 있어도 고소는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그런데 2008년 제93회 총회에서 2018년 제102회까지 헌의부와 재판국 보고에 나타난 고소건은 제93회 총회에서 4건, 제94회에서 5건, 제95회에서 4건, 제96회에서 3건, 제97회에서 2건, 제98회에서 6건, 제99회에서 1건, 제100회에서 18건, 제101회에서 3건, 제102회에서 1건이니 도합 47건이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 제12장 (총회) 제4조 총회의 직무」에 의하면 “총회는 소속교회 및 치리회의 모든 사무와 그 연합관계를 총찰하며, 하회에서 합법적으로 제출하는 헌의와 청원과 상고와 소원과 「고소」와(1964년 판에서부터 「고소」가 들어간 오류인데 벌써 54년이나 방치될 뿐 아니라, 지금은 정당한 규정처럼 인용되고 있다). 문의와 위탁판결을 접수 처리하고…”라고 하였으니, 이 규정대로면 총회가 고소를 받아 심결하는 일이 합법이요, 위에서 본 바대로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일반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하나…”란 권 제4장 제19조의 재판관할 규정에 의하면 대회, 총회가 상소, 소원, 위탁판결청원은 받을 수 있어도 고소는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명백한 불법이다. 정치규정(제12장 제4조 총회의 직무)를 따르자니 권징조례(권 제4장 제19조)가 불법이라고 소리 지르고, 권징조례(권 제4장 제19조)를 따르자니 교회정치(정 제12장 제4조 총회의 직무)가 불법이라고 하니, 이것이 그 교단의 헌정 실상인가? 1964년 판 헌법에서 잘못 들어간 오류(고소)를 어서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다.《상소 절차를 곡해하는 총회의 불법》2008년 제93회 총회로부터 2018년 제102회 총회까지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에 나타난 상소 혹은 소원 등에 경유 미비, 부전지 미비, 절차 미비 등 사유로 불이익 처분을 당한 건수가 2010년 제95회 총회에서 2건, 제96회 총회에서 3건, 제97회 총회에서 3건, 제98회 총회에서 7건, 제99회 총회에서 6건, 제100회 총회에서 26건, 제101회 총회에서 10건, 제102회 총회(2018년)에서 6건, 도합 67건인데, 「절차 미비」란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만으로는 어떤 절차가 미비인지 알 수가 없으나, 헌법이 정한 소원인의 소원절차는 “소원에 대한 통지서와 이유서는 하회 결정 후 10일 내로 작성하여 그 회 서기에게 제출할 것이요(서기가 별세하였거나, 있지 않거나 혹 시무하기 불능한 때에는 회장에게 제출한다), 그 회 서기는 상회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그 소원통지서와 이유서와 그 안건에 관한 기록과 일체 서류를 상회서기에게 교부한다”(권 제9장 제85조)고 규정하였고, 이어서 제87조는 “소원하기로 성명한 자는 상회 그 다음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소원통지서와 이유서를 상회서기에게 제출한다”고 한 것이 전부이다.그리고 상소절차도 소원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 제9장 제96조에 의하면 “…하회 판결 후 10일 이내에 상소통지서와 상소이유 설명서를 본회 서기(서기가 별세하였거나, 부재 혹 시무하기 불능한 때에는 회장에게 제출한다)에게 제출할 것이요…” 이어서 제97조는 “상소인 자기가 대리할 변호인은 상회 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상회에 출석하여 상소장과 상소이유 설명서를 상회서기에게 교부한다. 상소인이 전기 기일에 출석하지 못한 때에는 불가항력의 고장을 인하여 위의 기간 안에 출석하지 못한 믿을만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그 상소는 취하한 것으로 인정하고 본 하회의 판결은 확정된다”고 하였으니, 결국 소원이나 상소는 하회가 처결(혹은 판결)한 후 10일 이내에 하회서기에게 상소 또는 소원통지서와 이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성립되고, 상회 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상회에 출석하여 상회서기에게 같은 문제를 다시 제출하지 아니하면 상소 취하로 보고 본 하회의 판결이 확정된다 하였으니, 이는 “후 10일” 이내에 제출한 상소(소원)통지서와 이유서로 이미 성립된 상소에 대한 취하 여부를 판단하는 자료가 된다는 말이다. (계속)
    • 기고
    • 특별기고
    2019-02-22
  • 두 반으로 조직되는 당회결의 소고
    장로반, 동의·재청을 할 권리와 하지 않을 권리목사, 가부를 물을 권리와·묻지 아니할 권리 1959년 제 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당에서 회집되었을 때에, 표면적으로는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요, 내부적으로는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찬반으로 서로 충돌 하다가 총회임원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총회장소(대전)를 떠나, 언제 교섭해 놓았었는지 야간특별열차(버스가 아니다)를 타고 상경하여 서울 연동교회당으로 옮겨 별개집단을 형성하였다가, 그 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온 인사들과 함께 모였다며 총회가 통합으로 갈리는 아픔을 겪었으나, 1960년 12월 13일 제45회 속회총회에서 고신측과 합동하여 세칭 합동측 총회가 되었고, 그 합동총회에서 헌법과 총회규칙을 개정하기로 하고 개정위원으로 양측의 저명한 인사 17인(고성모, 김세영, 김윤찬, 노진현, 명신홍, 민상기, 박병훈, 박손혁, 서완선, 송상석, 양성봉, 윤봉기, 이인식, 전성도, 정규오, 한상동, 황철도, 가나다 순임)에게 위탁하였단 바, 1961년 제46회 총회에서 각 노회에 수의하여 가결되었으므로 1962년 제47회 총회에서 공포 시행하였는데, 책 (「신조, 정치 및 헌법적 규칙」이 발행된 것은 1964년이었다.그 1964년 판 헌법에서 「교회정치 총론」이 신설된 셈인데, 교황정치, 감독정치, 자유정치, 조합정치에 이어 장로회정치 체제에 대하여,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지교회를 주관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당회는 치리장로와 목사인 강도장로(講道長老)의 두반(班)으로 조직되어 지교회를 주관하고, 그 상회로서 노회, 대회, 총회, 이같이 3심제의 치리회가 있다.이런 정책은 “모세(출 3:16, 18:25~26, 민 11:16)와 사도(행 14:23, 16:4, 딛 1:5, 벧전 5:1, 약 5:14)때에 일찍 있었던 성경적 제도요, 교회역사로 보더라도 가장 오랜 역사와 우위를 자랑하는 교회는 이 장로회정치를 채용한 교인들이며, 또한 이 장로회 정치는 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기본으로 한 것인 바, … 본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회헌법도 1912년에 총회가 조직되고, 1917년 제6회 총회 때 본 총회의 헌법을 제정할 때에 이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기초로 해서 수정 편성한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그리고 정 제3장 제2조에서도 “장로는 두 반(班)이 있으니, 1.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일컫고, 2.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일컫나니, 이는 교인의 대표자이다”라고 규정한다. 즉 지교회를 주관하는 당회의 조직은 통상적인 회의체들처럼 수(數)를 단위(單位)로 하는 수의 결합체가 아니고 반(班)(즉 목사반, 또는 장로반 등)을 단위로 하는 회의체라고 하는 말이다. 지교회의 담임목사는 항상 1인이지만 장로는 (물론 한 분도 없는 미조직교회도 있지만) 오히려 다수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회조직이 수를 단위로 하는 의결체라고 하면, 장로들의 생각이 서로 갈리지 아니하는 한, 소 수(목사 1인)는 다수(장로들)에게 복종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하겠는데, 이것이 과연 장로회정치인가?두반의 조직, 즉 당회는 목사반과 장로반의 조직이요, 그런즉 당회의 결의란 목사반과 장로반의 합의를 가리킴이니, 목사반을 배제한 장로반만의 결의도 있을 수 없고, 장로반을 배제한 목사반 만의 결의도 있을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이다.그리고 반의 조직은 당회의 성수 규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당회에 장로 2인이 있으면 장로 1인과 목사 1인 출석으로 성수가 되고,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와 목사 1인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 장로 1인만 있는 경우에도 모든 당회 일을 행하되, 그 장로 치리문제나, 다른 사건에서 장로가 반대할 때에는 노회에 보고해서 처리한다”(정 제9장 제2조) 목사반은 전원출석이 목사 1인의 출석이요, 장로반은 전원출석이 옳으나 과반수이면 전운출석으로 간주하고 성수의 한 요건이 되게 한다. 그리고 장로 2인의 과반수는 불가능하니 반(半)인 1인 출석으로 전원출석으로 간주하고 성수요건이 되게 하였으며 “…장로 1인인 경우, 목사 1인 장로 1인 출석으로 모든 당회 일을 행하되, 그 장로 치리(권징)문제나, 다른 사건에서 장로가 반대할 때에는 노회에 보고하여 처리 한다”고 하였는데, 장로반과 목사반이 동등이니, 두 반의 합의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노회에 보고해서 처리하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게 하고 있다.그러나 당회의 성수를 “…당회장을 포함한 회원 과반수 출석으로 개회성수가 된다”(기장: 정 제9장 제46조, 통합 정 제10장 제65조)는 교단 중 기장측은 목사반과 장로 반 즉 두 반(班)의 조직이라는 전통적인 관계 규정을 삭제했고, 통합측은 ‘두 반(班)’을 ‘두 가지’라고 바꾸기는 하면서도 당회성수 규정에서는 1971년 판과 1972년 판과 1981년 판까지 “…당회장과 당회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한다”(정 제9장 제54조)고 하여 두 반(班) (즉 목사반의 출석과, 장로 과반수이면 장로반 전원출석으로 간주한)의 조직이란 원규정대로의 조직 같았으나, 1984년 판 헌법(정 제10장 제65조)에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회의 성수는 당회장을 포함한 당회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한다…“고 하여 당회조직이 반단위(班單位) 조직에서 수단위(數單位) 조직으로 되었으니, 두 교단은 당 회원인 장로들의 의견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똘똘 뭉쳐 있는 한 어떤 사건에서든지 소수인 목사(1인)는 다수인 장로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다.그러나 당회를 목사반과 장로반 즉 반단위로 조직하는 교단(합동측, 합동보수측, 합신측, 개혁측 등)의 경우, 목사반과 장로반은 동등한 권한이니, 수에 있어서 다수인 장로반도, 소수인 목사반도 서로를 이기지 못하니, 결국 당회는 양권(두반)의 합의로 가결 하느냐 합의에 실패하여 부결하느냐는 두 길이 있을 뿐이다. 회의법으로는 회원 중에서 동의와 재청이 있으면 회장은 가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두 반으로 조직되는 당회의 경우, 장로반과 목사반이 동등하다는 사실은, 동의와 재청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권리가 장로반에게 있음과 같이, 가부를 물을 수도 있고, 안 물을 수도 있는 권리가 목사반에게 있게 된다. 교회를 통치하시는 주님의 뜻으로 확실할 때에는 동의 재청을 할 수 있거니와, 그렇지 않다고 여겨질 때는 동의 재청을 안할 수가 있음 같이, 장로반의 동의 재청이 주님의 뜻으로 여겨질 때에는 가부를 물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여겨질 때에는 가부를 묻지 않을 권리가 목사반에 있다는 말이다.(끝)
    • 기고
    • 특별기고
    2019-02-1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