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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태는 생명에 대한 부정행위
    이 세상 우주 공간에는 수많은 생명들의 삶이 있다. 여기서 살아가는 우주 공간의 생명체 중 인간들은 때를 따라 변화하면서 환희와 아픔을 나누며 가는 세월 따라 살아간다. 이 삶은 약속을 지키며 순리로 사는 삶도 있고 순리를 어기며 사는 자들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삶은 약속 아래에만 서로 이를 지키며 살기도 하며 순리를 어기며 사는 이 질서를 지키지 못한 자들로 삶을 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의 약속을 지키며 사는 자와 약속을 어기며 사는 자들도 있다. 사람이 삶을 살다보면 기쁨과 아픔이 공존하듯 그 삶이 인연임을 알기도 하고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기도 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이 세상에 생명으로 오신 주님은 오직 삶의 주인이시며 구세주는 우리 모든 생명의 주인이 되심을 믿는다. 그 약속들은 성서의 하늘의 말씀을 믿는다. 그리스도교의 성서의 말씀들은 모두가 약속으로 채워져 있다. 그 약속을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이를 믿는다. 이는 약속을 시련하는 자라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믿고 구원함을 이루는 진리를 믿게 하는 것이다. 믿음은 곧 약속이요 여기서 그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은 믿음에 있음을 알게 한다. 요즘 항간에 낙태에 대하여 존치론이 극성을 부리고 있음을 보게 한다. 산모가 미성년자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 아닌 바에야 ‘스스로의 의지로의 행한 성행위의 결과물로 임신이 됨을 안다. 그 예로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성행위의 결과물이다’라는 산모역시 알고 있으면서 태아를 살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로 인정하고 살아 왔다. 여기서 산모가 미성년자라고 해서 타당성을 주장해서는 아니됨도 알게 해야 한다. 또한 그 사실 자체를 어기고 핑개 삼아 한 생명의 태어남의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하늘의 약속 어김을 알게 해야 한다. 이는 곧 생명의 책임은 태어남의 약속을 어기는 잘못을 알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책임이 무거움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 우리 삶의 자리는 언제나 그러 하듯이 남아 선호사상이 극에 달해 왔으며 남녀 성 비율이 무너지고 불법적인 낙태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왔으며 80-90년대의 여아 낙태 문제를 알게 하는 습성이 생기기도 하였음을 알게 한다. 오늘에도 역시나 남아 선호 사상이 늘어나고 우선하여 낙태를 하는 사례가 생겨난다면 아니 이 법안을 성안허여 합법화 한다면 산모가 낙태로 죄 의식을 강요받은 삶을 누린다면 생명 살해의 큰 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와 생명에 대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흔히 우리 삶의 현장에서 보면 많은 장애아를 둔 부모들을 보게 된다. 사실로 오늘의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처지를 놓고 보면 상당 부분을 부모에게 장애아를 맡기는 것을 우리 삶의 현장의 현실로 보게 된다. 여기서 낙태를 결심할 경우 장애아의 그 인생의 상당한 부분을 부모에게 기대는 것 또한 우리 삶의 현장이요 현실이 되어 왔다. ‘그들은 행복한데 왜? 그들은 죽이려 하느냐?’ 오늘의 현실 삶에서 장애아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가족 중 ‘중증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가족 중 누군가? 혹은 가족 전체가 큰 고통을 받는 것은 어느 나라이든 간에 삶의 현실임을 알게 한다. 사실로 여기에 따르는 고통은 여간이 아니다. 이 요인은 개인 차원에서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수입 면에서도 불이익을 불러오는데 여기에 따르는 개인적인 용무나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경제적인 면, 병원 치료비. 등 많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이러한 형편에 실로. “이겨 낼 장사가 있겠는가?” 생각하게 한다. 세상에 생명으로 태어나 자기 생명 됨에 그 행동 가짐은 여러 가지를 여부 간에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낙태를 자유롭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여성해방 이라고 긍정적인 것 같으나 여성인권을 해치는 것임도 알아야 한다. 낙태수술을 받는 입장을 생각해 보면 낙태수술은 당사자인 여자가 수술을 받는다는 현실의 사실을 본다. 이는 곧 낙태허용이 여성인권을 위한 길인 것 같아도 아님을 알게 한다. 낙태허용론자의 주장은 미혼모의 경제, 사회적인 인식문제, 장애아동 문제, 강간문제 등은 전부가 사회적인 문제로 이를 피하려고 한다. 여기에 우리는 사회적인 근본문제임을 터득하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9-20
  •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접근
    한국 전쟁은 민족 간의 내전이면서 동시에 공산 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나누어진 국제 전쟁이 되었다. 6.25 전쟁을 지내 오면서 한국의 경제가 국제적인 관계로 미국에 의존하면서 자립적인 면이 봉쇄되고 종속적인 관계로 전락하면서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아 우파가 내세운 반공 이데올로기는 현재에 이르기 까지 반공 이념으로 지배되었고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경제가 의존적이 되어 자립적인 길이 봉쇄되고 종속적으로만 향하여 오던 중 종속적인 발전의 가능성만 오늘에 이르기 까지 잔여로 남기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도 흑백 논리에 근거하여 이분법적인 사회 심리를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한국 교회도 그 영향에 근거하여 공산주의를 인식하는데 유물론에 근거한 마귀의 세력으로 몰아가는 경향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계속되어 온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반공적 태도가 환히 드러나 버렸다. 여기에 한국 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당하거나 실종된 교회와 교회지도자를 많이 잃기도 하였음을 알게 한다. 이로 인한 반공 논리가 심각해 왔음을 알게도 한다. 이렇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피해는 일후 말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민족사에 반공이념으로 남북 간의 동족이 분열되고 반공의 이념이 남과 북을 이제는 다시 남과 북의 갈등과 분열로 먹고 이로 인한 하나의 민족의 정체성으로 분열을 막고 갈등을 해소하려 서로의 갈등과 분열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평화와 화해의 실현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있는 것 같아 더 기도해야 함을 알게 한다. 하나의 가정이 분열하는 그 가운데 한 가정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한 가정의 분란에 용서의 기도를 드려야 하듯이 같은 형제가 부모님 앞에서 서로가 용서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극히 타당한 서로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한 민족은 남과 북이라는 이념의 갈등으로 살아오면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질적인 두 사회 체계로 서로 나뉘어 냉전이라는 가혹한 대립으로 두 진영으로 갈라서서 살아왔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지우고 우리는 서로가 한 겨레의 배달의 민족으로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이제는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한 때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논 하여 오다가 자유세계의 지성인들과 제3세계의 지도자들이 조국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제3세계의 지도자들의 견해를 터득하게 되었다. 이는 여기에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조국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제3세계의 지성인들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외치어 왔다. 여기에 공산세계에서는 평화공존을 외치면서도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인정하지 않았음에 그 과거를 주목한다. 여기서 60년대 중엽부터 주의나 이념을 멀리하는 양 사회체제가 현대기술문명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통해서 서로가 접근해 가고 있음을 오늘의 모든 민족들이 사회 형편의 사실에서 이를 실감하게 한다. 60년대 중간에 나타난 양사회체계가 현대기술문명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보면서 여기에 모두가 접근해 가고 있을 때 서로의 양쪽 이데올로기의 대변인들과 학자들을 통해서 서로 비판하기도 하였으나 양쪽의 경제학자, 사회학자, 교육학자들은 접근설을 긍정적으로 시인하게 됨을 알게 한다. 여기서 지나온 7,4공동성명은 상호 준비가 서로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음도 알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체계와 공산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체계가 그 시대의 발전과 여기에 근접한 산업사회를 향해서 가야 함을 알게 한다. 2016년 1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 정보통신기술 기반의 새로운 산업시대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캄퓨터,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혁명 (3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혁명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함에 이르러 삶의 자세도 점차 발전해 가는 미래 지소적인 삶의 태도에 많은 변화를 안고 있음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처지를 현실로 받으면서 삶의 변화에 고착화한 삶에서 탈피하여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삶의 변화 갱신을 통해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느껴보게 한다. 근대 민족주의는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서 처음 발현됨에 오늘의 이 시대의 크리스천은 생각해 볼 일이 많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9-13
  •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
    근대 민족주의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처음 발현되었다. 17세기 영국의 민족주의는 후대에 나타난 세속적 민족주의보다 종교적인 성격이 짙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계층의 성장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존 로크는 영국 민족주의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했고 18세기 미국 및 프랑스 민족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을 기하여 만개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두 체제 간에 세계적인 양대 결의 결과로 세계는 이념을 세워 서로 싸워 왔다. 이러한 그 사회적인 성격의 차이로 그 과정과 그 경로가 얼마큼 달라져 왔는지를 알게 한다. 예컨대 세계는 그동안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으로 많은 변화 과정을 가져왔다. 이 과정은 삶의 존재 양식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농어민들의 삶의 양식이 산업구조 조정과 도시화 전략으로 삶의 터전이 바뀌어 왔음을 실제로 존재 양식이 많이 바뀌고 있음을 알게 한다.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민족감정의 발흥으로 인해 첫째, 절대군주가 등장하여 중세 봉건사회의 지방 분권주의를 타파하고 영토 확장과 함께 중앙집권적 국가를 탄생시켰으며, 둘째, 생활 및 교육의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국어가 유행하고 교회와 종단의 구속력이 약해졌으며, 셋째, 상업이 발전됨으로써 중산 시민계층과 자본주의적 기업형태를 창출해냈다. 정치적·경제적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영토적 통일국가에는 중세의 종교운동에 견줄 수 있는 열정이 스며들어 있었고 국가의 중심으로 자처하고 있던 군주는 국민주권 이론과 인권사상에 밀려났다. 군주는 더 이상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었고 국가는 국민의 국가, 민족적 국가, 조국이어야 했다. 국가는 민족과 동일시되었으며 문명은 민족적 문명을 의미했다. 한편 제국주의의 핍박을 받고 있던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혁명적 식민지로 있었다. 민족주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식민지 세계의 전역에 퍼져나갔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고전적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세력의 억압에 항거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민족주의였으므로 한결같이 반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식민지 민족주의의 경우는 보다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제국주의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에 제국주의의 압제로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므로 대개 식민지 민족주의에는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과거 일제하에서 일어났던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드 생 시몽은 빈민의 처지를 염두에 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여기에 종교적 윤리적 확신을 결합시키려는 운동으로 알기도 했다. 여하 간에 이러한 그 시대의 풍조와 그 시대의 유행의 시류를 알게 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 사회주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형편에 의해 1889년 ‘그리스도교사회주의자협회’가 조직되기도 하였으며 20세기 초 몇 년 동안 구원의 사회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회복음운동이 번창했음을 알게 한다. 여한 간에 제1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 사회주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편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를 포함한 또 다른 그룹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유사성 및 맹점을 발견하기 위해 19세기 그리스도교 사회윤리를 근대 산업사회에 적용하려는 교의와 그 운동을 알게 한다. 19세기에 일어난 이유는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전체의 이익을 위한 정치 경제 활동을 주장하는 연관되어 있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공동 소유나 생산, 교환수단의 통제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카톨릭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봉건적 협동조합 제도로서 통상의 사회주의와는 전혀 별개의 질서이다. 19세기에 그리스도교 사회윤리를 근대 산업사회에 적용하려는 교의와 그 운동을 알게 한다.한편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를 포함한 또 다른 그룹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유사성 및 맹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이제는 한국 분단의 역활에 대해서 용서를 선언하고 6.25전쟁의 와중에서 서로가 당했던 증오를 용서하고 남과 북이 “서로 화해”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한 민족의 신뢰성회복으로 여기에 서로 희망을 갖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8-30
  • 민중과 함께 한 교회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회적인 문제의 이념들을 앞에 두고 무엇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선교의 목적이 비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소외받으며 억압과 착취로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관심을 갖고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선교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세워 주신 권세 앞에서 군림하던 나쁜 권세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에 귀 기울이어야 한다. 한 민족이 둘로 나누어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동안 한국교회는 서로 사는 삶의 사랑의 선교를 하지 못했음을 통해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지금 우리는 단절된 분단의 시대를 거쳐서 민족통일과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서로가 군사력의 힘으로 과시하며 살아왔다. 우리의 모든 생활 영역들이 국방을 위한 군사력에 집중 되어 왔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한편 기술적, 경제적 발전은 노동력의 질적이고 양적인 개선에는 상관 않고 발전된 산업사회로만 지향하는데 몰두하여 삶의 질 향상과 발전에는 외면한 체 요즘 두드러지는 현상에서 정치활동의 리더들의 추태와 가치체계의 지배 논리가 땅에 떨어지는 현상들은 이 나라의 희망을 저하시키고 있음에 오늘의 교회는 눈을 뜨고 기도해야 하는 지를 묻고 싶다. 이렇게 사회적인 현실과 정치적인 문제들로 오늘의 우리 사회는 대립과 갈등의 분석을 통해서 사는 사회의 삶에 세상을 보는 교회가 어떤 처지에서 무엇했는지를 알게 한다. 지금까지 공존이니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니 등을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은 지난 “7.4 공동성명”은 상호가 서로 준비 없이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곧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동형화해 가는 과정을 의미하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 냉전이라는 가혹한 대립을 6.25 전쟁을 통하여 그 현실을 양쪽이 모두 비극을 이데올로기 투쟁을 맞게 되었음을 체험하게 됨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60년대 중엽에 이르러서는 이데올로기는 자유세계의 지식인들과 제3세대의 지도자들과 믿음의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외치어 왔음을 경험하게 한다. 또한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백성(민중)”과 지배층을 가리는 말로 쓰였으며 백성과 지식인, 백성과 계급, 백성과 대중, 백성과 시민으로 백성이라는 말은 옛말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로 지난 날 사대부가 아닌 일반 평민을 이르던 말이었다. 즉 지난 옛날 사대부가 아닌 일반 평민을 이르던 말로 쓰였다. 우리가 성서에서 예수님의 수난사를 보면 예수님의 수난사는 그대로 하나의 투쟁사임에는 틀림없으며 예수의 해방운동이 백성을 억압하는 지배층과 싸움을 의미함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원수로 치부하지 않고 백성 해방을 위한 비판의 대상으로 상대하여 이들을 구원함에 그 의미를 가진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구원의 그 의미가 {역사의 예수} 안에서 그에게서 구체적인 실상으로 그를 알게 한다. 예수의 수난사는 그대로가 투쟁사임에는 맞는 말이나 그것은 증오의 폭발이나 힘의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고 맨주먹이나 몸으로 힘의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고 악순환의 역사 속에서 죽음으로 증오와 복수의 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자기희생의 대가임을 “민중 신학”에서 알게 한다. 이와 같이 만시지탄이지만 국민의 정부로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의지가 사회 전반에 이루어져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는 기도해야 한다. 이는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서 살피면 역사적 정치적 구원을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보게 한다. 이렇게 남과 북의 삶의 현장에서 문화와 질서를 창조하는 교회는 그 주역이 되어 그리스도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새로운 문화와 질서를 창조하는 ‘하나님 선교’라는 입장으로 문화와 질서의 주역으로 교회가 되어야 함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8-27
  •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험되어지는 은총이다. 인간은 경험되어지는 은총으로 그 삶을 성서에서 배우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수난)으로 이끌어 가는 잠재적 그리스도로 구원의 자리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오늘의 본문 요지에 근거하여 잘 드러난다. 사람은 원래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하느님이 창조자이심으로 그 하느님은 사람의 궁극적인 실재이시기에 그 삶의 모두를 거두시는 생명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시며 그 삶의 존재가 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삶을 사는 과정에서 사람은 언제나 그 궁극적인 실재 앞에 서 계시는 하느님은 항상 임재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전 지구적 가난에 직면하여 있다. 특히 서민경제의 파탄소식이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민들의 삶도 생활자금을 대출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듣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실적 삶에 대하여 잠언의 지혜는 해결의 실마리를 말씀해 주고 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여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혔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인간은 스스로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를 하나님의 지혜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알게 한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거룩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는 (고전15:54-58) 말씀을 얻게 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이렇게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삶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과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진지하게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접근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뉴스와 신문을 통하여 전 지구적 가난과 전쟁과 분쟁과 갈등의 소식을 듣지만 남의 이야기로 들일 뿐이다. 누군가 해결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지나간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이란 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본연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1890년 말 대기근이 러시아를 덮쳤을 때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등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삶에서 실천한 작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문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톨스토이주의’가 잘 드러나는 그의 후기 작품이다. 동화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곳곳에 숨겨진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삶의 지혜는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이를 포함한 10편의 동화 같은 단편들은 간명한 이야기이기에 선명하게 보이는 선과 악으로 우리의 복잡한 현실을 더 쉽게 돌아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8-09
  • 존재의 의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삶을 사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그 삶은 생존을 위해 사는지? 존재를 위해 사는지를 물으며 살아간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생존자도 있고, 사색하며 삶에 존재의 가치에 의미를 두고 사는 자도 있음을 본다. 여기에 빌립은 그의 삶에 고백이 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대하여 말하기 보다는 사람으로 창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에 유의한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심에 유의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과 상응하게 피조자로 지으신 이유로 하나님과 상응하는 이유로 생명을 다스려 그 삶을 영유하도록 친히 아버지가 되시어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 날 수 있도록 관계된 창조임을 알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전에 신학적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여기에 특별한 관계를 지닌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이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은 스스로 아버지이심에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려 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인간의 관계를 의도함에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이 세상에서 삶을 살려 한다면 하나님의 아버지에게서 창조자의 뜻을 살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왜?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가? 함에 주시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삶의 생존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넌지시 알게 한다. 여기에 삶의 가치를 알고 “존재의 의미”로 그 관계된 의미와 이유를 알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과의 관계로 하나님 아버지 되심은 같은 형상으로 인간의 삶과 연계되어 있음을 믿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땅위에 있는 그의 형상과 영광이 되게 하는 삶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맺는다. 예컨대 인간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관계로 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필히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예컨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지 일어 날 수 있도록 관계된 창조임을 알게 한다. 곧 이는 창조함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에 앞서 신학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창조되는 인간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에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인간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관계로 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반드시 책임을 추궁한다는 현실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다” (고후15:31) 고 한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매일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의미한다. “개신교회”를 라틴어는 “ecclesia semper reformana”라고 하는데 이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라는 의미를 갖는다. 과거의 교회사를 보면 개신교회가 16세기의 개혁정신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과거지향적이 될 때 그 교회는 ‘개혁교회가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한다. 이는 삶이 주어진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계속적으로 미래가 오고 있는 삶으로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함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삶은 변화와 성숙의 과정으로 인간의 육체적 생리적 성장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성장관계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삶에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피건 데 믿음의 경험을 통해 거듭 나는 것(중생)도 마찬가지임을 알게 한다. 고후5: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라 함에 주목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7-25
  • 교회는 계속 개신(改新)한다
    종교개혁은 역사적 유물도 아니고 박물관의 전시물도 아니다. 그 개혁은 역사적으로 이어져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중세 교회가 그리스도교다운 자기 모습을 잃고 헤맬 때 개신(改新)을 외치며 개혁의 분신으로 자처하여 ‘개신교(改新敎Protestant)’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고침으로 개신(改新)한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 한다.‘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를 알기 위해서는 첫 번은 어디이고? 역사적으로 교회가 개혁된 때는 언제인가? 그리고 개혁된 내용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과 답변은 “16,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거짓된 신앙적 열심과 거짓된 신학, 그리고 성서의 증거로부터 심각하게 멀어진 거짓된 교회의 모습들로부터 성서가 말하는 참된 구원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성서의 증거를 따라 잘 드러내었던 시기였음을 알게 한다. 이 때가 ‘오직 성서로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알고 행함을 얻는 지혜를 새롭게 함이었다. 여기에 칼빈을 비롯한 활동이 역사상 돋보이던 시대였다. 바로 이를 교회가 역사상 개혁된 시기였다. 지금에 와서 ‘교회’가 이제는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는 제2의 신앙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듣는다. 여기에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서에 기록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고한 본문의 말씀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다’는 바울의 고백을 듣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함이 개신교의 이름으로 ‘개혁된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회와 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하여왔다. 이런 고속성장이 한국사회와 함께 1세기 반 동안 선교의 연혁(沿革)에서 한국교회는 성숙된 발전의 모습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외적인 급성장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사회의 급성장과 성장주의 신화는 성공주의와 실용주의에 편승해 가면서 교회도 그대로 답습하여 부정적인 현상들은 교회내의 심각한 부작용들과 영적인 질병들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위기상황은 한국교회에 대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으며 교회의 영적각성과 개혁이 시급하게 필요한 현실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내부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이해와 그 권위가 생활의 삶에서 말씀이 포기한 듯 한 믿음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개혁되는 때와 개혁의 주체로서 정체성을 망각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많은 문제점들을 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지적하는 데에 머무르면 아니 된다. 교회는 사회를 보는 배타성에서 벗어나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나라 구현을 이루어야 한다. 종교개혁은 성서를 제대로 알고(오직 성서로 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오직 믿음으로 만) 그것을 몸소 실행할 때 종교개혁이 가능하였음을 오늘에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성서말씀에는 힘이 생기고 개혁은 성서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행위를 포기하고 오직 성서를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서(말씀)를 기준으로 삼아 전통을 타파할 때 발생한다. 개혁된 교회는 이미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는 전체 역사 속에 있는 신실한 교회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이미 개혁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는 주의 나라가 다시 온전하게 임하실 때까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16,17세기의 교회와 그들의 신앙고백의 의미는 교회가 항상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신 개혁된 내용 안에서 개혁되어 가는 개신의 과정이었다. ‘오직 성서의 말씀만이’ , ‘오직 믿음으로 만’이 계속적인 개신(改新)하는 신앙이다. 그리하여 개혁의 주체와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내용의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이렇게 종교개혁과 같이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는 계속 개신한다”는 지표로 삼는 신앙으로 교회는 먼저 이를 실행해 알리어 주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7-12
  • 평화를 기다리는 믿음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때가 차서 그 약속이 성취 된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가 지나서야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 때 까지 삶은 결코 쉽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 약속들을 지키는 자들이 성서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인물들임을 알게 한다. 믿음은 약속들이 이루어진 사실을 믿고 따른 자들임을 믿게 한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사실임을 믿게 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이루신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24년의 기다림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알게 한다. 야곱이 베델에서 받은 하나님의 약속도, 요셉이 어린 나이에도 13년의 고통의 세월동안 13년의 어려움을 보냈지만 환상을 통해 약속을 지켰으며 다윗도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어려운 난관에도 믿음으로 약속을 지켜 냈음에 주목하게 된다.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신뢰를 구축하면 그 때를 이루신 분은 곧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이를 구축해 가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어려움도 약속에 신뢰를 구축하여 믿음으로 다 하면 이를 역사에서 갖는 시간에 ‘때’를 이루어 내신 새 역사를 알게 하신다. 이는 신앙생활이 가져 온 즉 주신 약속에 신뢰를 구축하면 약속들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임을 믿게 된다. ‘하나님의 때’는 간구만이 이니라 기다림이다. 금번에 세계가 주목하는 뉴스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북한의 비핵화가 궁극적인데 반하여 이를 경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로 넌지시 전하여 서로의 상통의 기회가 생겼다. 향후 정부의 대북 지원 방식에도 관심이 집중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미국 국내법상 대북 제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트럼프 행정부의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에서 한국, 일본. 중국의 정부도 함께 주도해서 ‘북한 재건 펀드도 만들어 북한 경제 개발을 돕는 방법을 제시하려 함에 이를 모두는 그 방법을 공유함에 이의가 없다고 자문하는 지혜를 비추기도 한 점에 이를 예의 주시한다. 미국 국내법상 미국 의회가 국내법상 대북 제재를 풀어 주기 힘들 것이라 이유를 말하기도 하면서 여기에 자상하게도 북한이 IMF회원국이 되지 못해도 소규모 지원은 받을 수 있고 세계은행 같은 일부 국제개발은행은 이사회 승인 등을 통해 지원을 할 수 있다고 귀띔도 알게 함에 예의 주의를 끌기도 한다. 한국 역시 2010년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걸치며 남북 간 교류 협력은 포괄적인 제한을 받고 있는 상태를 거치어서 한동안 “남북 간 교류협력은 “5’24 조치”를 해제하는 결단을 내려야 함에 이른 점을 유의하기도 하지만 여기에 남과 북은 동시에 서로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남과 북이 서로 약속해야 한다. 남북분단은 현대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 최대 강대국들의 군사적 이념적 대결의 상호분쟁 속에서 우리 민족은 속죄양의 고난을 당하여 왔다. 민족의 분단이 가져 온 결과는 지금까지 장기화 되면서 남과 북은 안보와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인권은 유린되고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억압되어 왔다. 우리민족이 갈라서서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서로 비방하여 싸우며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죄인으로 서 있음을 알게 한다. 지난 새천년이 되는 2000년이 되던 한 즈믄 해는 2000년 성령강림절 첫 주간에 분단 이후 남과 북의 두 정상이 성사되어 평양에서 만나 둘이 하나 됨의 포옹을 나누었고 환영하는 평양시민들의 미친 듯한 환영하는 모습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의 큰 성령의 역사이심을 보게 함이었다. 여기서 살피는 믿음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는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며 너의 형제와 화목하고 난 제물만 축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화해함’의 은총을 깨닫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6-28
  • 삶은 순종하는 말씀의 믿음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모든 실상을 믿음의 눈으로 배우고 깨우친다는 것이다. 성서의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예수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믿음은 다 가지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자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한다. 이 삶에 믿음은 크고 작음에는 차이는 있으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관계의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하는 믿음인 것이다. 여기서 믿음과 신념은 구별된다. 흔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내가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고 하는 자기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자기의 생각으로,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흔히 믿음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신념은 “내가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하여 기적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신념에는 보장이 없다. 과거에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면 예수의 말씀대로 믿는 그 시간부터는 신념을 초월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헌신하기에 자기 몸을 드려 순교까지 각오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신이고, 생각이며, 의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를 소유하여 지속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란 “계시에 순종하고 그 순종을 계속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믿음을 소유하고 이에 순종하기를 계속바라는 것이다. 이 믿음은 신념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성서는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자기 확신을 가지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를 통하여 이를 성사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자기 확신을 신앙인 줄 착각하고 있다. 즉 어떤 한 가지 문제를 놓고서도 “믿습니다”를 수십 번씩이나 강조하고 고백한다. 이것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같이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신앙 좋고 능력 있었던 종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같은 이들은 자기 확신을 구하지 않았다. 성서에 기록된 신앙의 영웅들, 능력을 행한 사람들은 “믿습니다.”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굉장한 능력을 역사했다. 인간관계의 신념에는 절대적인 약속과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념이란 어디까지나 자기의 믿음, 의지, 확신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인간의지는 사욕으로 인간중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신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것이 믿음이요 이를 소유하고 지속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이요, 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약속과 보장이 반드시 깃들인다. 신념은 결코 죄를 없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결단코 멸망하지 않는다. 멸망하지 않는 구원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약속이요 신, 구약성서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약속의 실현이 이루어지도록 몸과 마음을 다하여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믿음은 사람과의 관계의 신념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신앙이다. 말씀의 약속이 삶의 의지가 된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 하는 것은 사람의 삶은 자기가 요구하는 바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스스로의 마음에 끌리는 작용이 있다. 이는 사람이 갖는 의지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6-20
  • 혈연의 가족과 이웃공동체
    생물학적인 관계에 근거하여 ‘혈연의 가족’은 삭막한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며 다양한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으로 전제되어 가족구성간의 이익이나 그 이익의 분담은 공평하고 동일함으로 이해하려고 함을 본다. 그리하여 가족 구성원들은 밀접한 연대성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전제하고 산다. 오늘에 와서 전통적인 가족구조 안에서 실제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문제들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이상화 되어 여기에 따른 다른 양상들이 나타나 가족이라는 논의인 ‘갑질’의 논으로 오만 무례한 행동을 자아내고 있는 사정에 접하면서 “혈연의 가족과 이웃공동체”를 본다. 가정은 가족이 안주할 수 있는 삶을 가리키며 다만 물질적인 환경만을 의미하지 않고 가족구성원들이 건전하게 성장 성숙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존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안식과 사랑을 제공해 주는 보금자리의 안식처를 갖기 위해 가족구성원의 행복과 복지 향상을 갖도록 다양한 기능과 과업을 수행하여야 함을 알게 경험하게 한다. 여기에 가정이란 그 기능이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그 기능이 가정구성원들을 위한 그 가정의 기능은 성과 생식, 양육 및 교육, 보호, 휴식, 생산과 소비, 오락, 종교의 기능 등 그 영향을 좌우하고 대 사회적인 기능으로는 합법적인 성적통제, 생식을 통한 사회의 유지, 존속, 노동력 제공과 소비생활을 통한 경제적 기능, 자녀의 사회화를 통한 사회의 활동에 적합한 구성원 제공 등의 기능이 있다. 여기에 가정은 개개인이 생활하고 보호받는 터전인 동시에 한 사회를 유지, 존속시키는 최소의 단위로서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중간 고리라 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과거 우리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사회. 정치적 상호연관성을 보려고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유교문화가 강한 영향을 주었기에 1996년도에 한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의 7개국 민간여성단체(NGO)대표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언사와 행동을 받고 살아온 동아시아 지역이 심하다는 것을 가부장적 유교이념을 비판하고 가정은 외부 관여를 차단함에 이를 비판하게 되고 여자의 사회 참여를 높이게 됨에 이르렀음을 알게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전통적인 가족구조 안에서 현대를 흐르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양상들이 나타남으로 오늘에 와서는 이러한 양상들이 많이 나타나 있음을 보게 한다. 그 예로서 보면 서구사회에서 이혼율이 상당수를 넘어 한국도 그 이혼율이 상당수를 넘고 있는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 준하여 현대의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은 가족과 연관 된 변화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가정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가족구조 안에서 실제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문제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으며 가족에 대한 논의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들고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단절을 법적으로 제기하는 일이나 한국사회에서도 이를 모방하며 가는 모습을 쉽게 보고 있다. 이러한 서구사회에서만 보았던 문제를 눈앞에서 보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접하면서 한 때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교도 이상적인 기독인의 삶의 양태를 미혼, 독신, 무자녀로 안주하려는 추세도 있었고 어느 때에는 미혼, 독신을 선호 할 때도 있었다. 어느 때에는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핵가족’ 양태가 가장 전통적이고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가정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사회의 다수의 가정들을 비정상적이고 비성서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고 편견 된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았던 모습을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신앙관으로 살아왔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21세기에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와의 상호 연관된 믿음의 삶의 자세를 구성해야 할 것을 생각하게 한다.공동체주의의 이론으로 세계적인 학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의 하버드 대학의 강의와 책에서 '자유사회의 시민은 이웃에게 어떤 의무를 지니는가?'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인 때도 있는가?' '도덕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가?' 는 문제를 제시하며 이웃정의론을 부르짖고 있다. 그는 다양한 논쟁에서 극적이고 도전적인 발상을 선보이며 철학을 이해하면 정치와 도덕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알게 한다는 주장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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