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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인의 가정
    오늘의 이 사회는 세속화 속에서 공업화, 도시화, 핵가족, 세대 문제로 가정부재현상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가정부재 현상은 가정이 비인격적 집단으로 변하고 있으며, 교육을 가정 외의 기관에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음에 그 문제가 있음도 알게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기독교교육의 차원에서 예일대학의 신학부의 '랜돌프 크럼프 밀러'는 기독교교육의 난제를 풀어 줄 단서를 말하는 가운데 기독교적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삶의 가정을 교육의 장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며 신학의 재발견을 강조한다. 즉 화해의 목회차원에서 가정을 구속적 세포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가정은 기독교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 가정의 부모들은 가정을 신앙생활화를 위하여 신앙의 삶의 대화의 장으로 만들어야 하고, 신앙의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때에 그 대화의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물음과 삶의 목적과 삶에서 참을 추구하는 대화와 만남의 공동체로 삶의 가치와 삶의 생활에서 삶의 자리를 심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함에 주목한다. 진정한 가정은 진정한 부부 사랑의 결실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최상의 선물인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고 성숙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도록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는 가정을 말한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준비는 혼인하기 전부터 이루어진다. 가정은 자녀 출산이 부부 사랑의 절정이라면, 자녀 교육은 부모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요 의무이다. 교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의무는 인간 생명의 전달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본질적인 것도 알게 한다. 부모의 자녀 교육 권리와 의무는 부모와 자녀의 특유한 사랑의 관계 때문에 타인들의 교육 역할과 비교해 볼 때 본래적이고 일차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체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것이므로 타인이 완전히 위임받거나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정은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한 학교이며 처한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덕행을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이므로, 자녀들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덕행, 친절, 책임감, 정직, 예의범절, 감사하는 마음, 협동심, 이타심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가정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전인 교육을 촉진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진심으로 가득 찬 가정환경을 신앙으로 조성해 주어야 하며, 부모는 자녀의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가정은 성장기의 자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며 체험하고 배운다. 그래서 부모는 사랑에 대한 일차적 교사이며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행동과 언어로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부부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가 가장 좋은 가르침이 되는 것이고, 이를 체험한 자녀들은 자신들이 성장하며 느끼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랑과의 관계의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엮어 나가는 것이다. 오늘의 현대 문명이 물질적 세속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조차 신앙에서 유리된 생활을 하기 쉽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에게 풍성한 삶의 바탕에 신앙적인 가치들을 우선적으로 깔고 그러한 삶의 본보기로 사는 삶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기에 여기서 충분한 믿음을 일러주어야 한다. 개인주의와 이기심의 극심한 충돌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으로 흔들리고 갈라진 오늘의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녀들에게 각 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끌어 가는 참된 정의감으로 무장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 특히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염려와 공평한 봉사와 섬기는 참된 사랑의 마음으로 삶이 자라가야 한다. 부모들 자신이 솔선수범하고 가정에서 기도 생활을 실천할 때 자녀들이 인격의 완성과 믿음으로 구원과 성화의 길을 더욱 쉽게 갈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의 체험을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그 삶을 배워가야 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교회의 삶을 공동으로 책임 있게 연대(連帶)하며 살아야 한다. 부모는 말과 모범으로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최초의 신앙 선포자가 되어야 하며, 각자의 고유한 신앙적 사명을 특별한 배려로 육성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가정은 교회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교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6-07
  • 한 민족의 하나 된 통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사랑’이라는 말은 ‘아가페’라는 희랍의 단어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에서 반드시 귀결되는 인간 서로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데 이 낱말을 사용한다. 교부(敎父)들은 빵과 포도주를 모두 사용하는 의식과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사귐의 식사를 모두 가리키는 ‘애찬’(愛餐 love feast)이라는 뜻으로 아가페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아가페, 주의 만찬(Lord’s Supper), 성찬식(Eucharist)이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는 나타난 증거들로 알게 한다. 그리하여 어떤 학자들은 아가페가 주의 만찬의 한 형태였고, 성찬식은 이 의식의 성사(聖事)적인 면이었다고 믿는다. 또 다른 학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자주 가진 모임을 본떠 만든 사귐의 식사로 아가페를 해석하고,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는 성찬식은 후대에 이 식사와 연결되기는 했으나 결국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믿는다. 예수가 당시의 유대교 의식(儀式) 모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식탁을 같이하는 그 예식은 서로 함께 식탁을 통하여 음식을 나누는데 함께한 자리에 같이 하기에 이를 식구(밥=식사)같이한다)는 의미가 하나의 공동체를 말하기도 함을 알게 한다. 같은 민족 간의 갈등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음을 현실을 실제로 잘 파악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을 지내면서 양극이 이념 갈등이 소멸되지 않고 탈냉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의 정치 상황을 보면 예전 그대로 머물러있음을 알게 한다. 그 어떤 개혁과 개방의 시도도 그 민족 자결권의 시도도 용납이 되지 않고 있음을 보면서 1945년 12월 15일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들이 포스담회담으로 우리민족을 일본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즉 일본의 제국주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보장에도 그들 자국의 이해타산에 묶여 있을 때 처음에는 민족주의 진영이나 좌익에서 이를 한동안 반대하고 나섰지만 조금 있다가 즉시 이를 좌익. 계열에서 태도를 바꾸어 이를 지지하게 됨을 기억하게 한다. 이때부터 같은 하나의 민족이 하나 되어 주변의 나라 협력이 없이도 한 민족의 슬기로움을 가지는 역사를 우리 민족에게 요즘 와서 더욱 느끼게 한다. 이는 선진국 제국주의의 신탁통치의 끝자락을 오늘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는 과거 역사인 이 경험은 선진국 제국주의의 도전에 대한 후진국 민족주의의 응전임을 알게 한다. 지금 우리 민족의 조국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된 민족으로 우리 조국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삼천리금수강산을 가지는 단일민족으로 한 공동체임을 자부해야 한다. 이 세상의 세계와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이 우리 백성인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의 땅임을 자부심 갖고 기도하며 화해의 공동체로 하나님의 동산을 일구어 내야 한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 친히 보여 주신 사랑은 대가성이 없는 무조건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그 의미를 담고 있다. 한 민족이 같은 형제끼리 사랑(통일)한다는 것은 이유가 없는 참 사랑이다.‘통일’은. 우선적으로 가장 중대한 우리 민족의 숙원이요 삶의 길이다. 민족공동체는 민족정기에 따라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향해 만인의 삶의 길에 그 근본을 보여 주며 열어야 한다. 여기에 온전한 삶의 길이 열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시아의 중심으로 21세기는 기계 기술과 전자기술이 복합되어 컴퓨터 기술과 전자기수리 일체화된 정보산업이 주요 산업이 등장하고 생명공학 자원기술과 우주 해양개발기술 , 신소재 기술 등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기술혁명이 예상되고 있는 형편을 갖게 함에 자부심도 갖게 한다. 흔히들 21세기는 기계기술과 전자기술,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기술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겨냥되기 때문이다. 이미 “서해안 시대”를 예고하며 기대하고 있는 민족의 서원이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정황을 살피면서 우리 민족은 단합하여 믿음으로 구원과 서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기에 하나 된 민족의 구원을 위해 남과 북이 “하나 된 민족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오늘의 한국인의 민족관은 남과 북이 통일이라는 숙원이 당위적인 삶의 길을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한 형제 민족끼리 삶을 사는 지름길임을 남과 북이 사는 길이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원수 까지도 사랑하는 마음가짐을 한 민족의 통일 염원을 위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통일기도 청원에 염원을 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5-24
  •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일과 그의 수난과 죽음이 가져다 준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나타나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은 축복 받아야 사는 양, 십자가는 단순한 저주 행위로 인지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십자가 지는 고난에 대한 바른 인식의 차원을 교회가 예배로 의식을 집행 할 때 십자가를 상징하며 신앙고백을 하며 기도. 봉헌. 축복을 위한 행사에 십자가를 기리며 행사를 주관함에 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바르게 믿음의 생활을 가져야 함에 이른다. ‘십자가 지는 신앙’에 대한 고난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수세기동안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신앙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에 믿음의 강조를 나타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실제적인 면들을 십자가로 강조하는 그 의미로 신앙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사용해 오다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십자가를 장식용과 의식용으로 계속해서 사용해 왔고 영국 교회는 세례식 때 십자가의 성호를 긋는 관습을 계속해 오고 있음을 보며 또한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교회는 모두 교회 상징으로 교회 지붕위해 십자가를 세워 교회의 일면을 보게 함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볼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오늘날의 교회는 십자가를 상징으로 두고 있지만 옛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자리에 십자가를 지고 그 삶으로 믿음의 생활을 함에 주목한다. 여기서 바울 선생은 당시 그의 신앙 고백하는 십자가 (고전1:22-24)신앙에 대한 그의 믿음의 고백에 주목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지혜이니라”는 바울 선생의 신앙고백에 순결하게 따라가는 살의 이 믿음에 오늘의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지는 삶의 자리로 돌아온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몸으로 오셔서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하늘을 향한 구원의 삶을 위한 스스로의 길을 열어 만인에게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 삶을 넌지시 보여 주심에 감동한 바울선생의 신앙의 삶의 고백을 오늘에 우리는 터득해야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자기희생을 보여 주심에 대한 큰 사랑이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대 사건이다. 하느님의 속성에는 공의와 사랑이 있는데 하느님은 언제나 공의와 사랑을 같이 취급하시고 동시에 공의와 사랑을 함께 나타내 보이신다. 예컨대 인간은 자기가 죄 지은 대가를 치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죄를 치를 분은 오직 한분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뿐이시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모든 사람의 아버지 하느님만이 죄 지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신 자이심을 아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랑의 대 사건은 공의와 사랑이 있는 사람의 아버지 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이 친히 사람의 죄를 담당하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버지로서 사랑을 보여 주심에 그 사랑을 나타내 친히 십자가를 지심에 모든 죄 지은 자녀 된 인류는 그 아버지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엿보이게 하심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을 십자가로 열어 보이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고개 숙이고 ‘십자가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5-10
  • 예수 부활의 의미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며, 이렇게 그가 죽음을 정복함으로써 모든 신자들이 '죄·죽음·악마'를 물리친 그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을 부활절 또는 부활제라고 하는데, 이 날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요축일이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여자 제자 몇몇이 예수의 무덤으로 갔는데, 이 무덤은 산헤드린(유대인의 최고 종교법정)의 일원이며, 예수의 은밀한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에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없음을 알렸다. 나중에 여러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보았고, 심지어 그가 문이 잠긴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보았다. 또한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도 그를 보았다(예수가 나타난 장소와 시간에 관해서는 복음서마다 다름). 복음서 외에 부활한 주(主)가 40일 동안 지상에서 활동하다가 승천한 것을 언급한 기록은 〈사도행전〉에만 있다. 이슬람교에서도 심판 전에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신앙은 누구도 실제로 보지 못했고, 이후 직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던 이도 고작 스무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예수의 육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사실과 그 후에 예수가 자신들을 방문했다는 사도들의 확신은 가히 세계를 바꿔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 명백하게 불가능한 사건이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라는 점에 대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을 품었으며, 이는 그들의 도덕, 문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에 극적인 영향을 끼쳤다. 로마의 속주인 유대에서 카리스마 있는 치유자이자, 떠도는 계시적 설교가였던 예수는, 전통적인 많은 관습을 고의로 조롱하고 유대주의의 기반인 모세의 율법 대신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여 유대인의 종교적 제도를 전복시켰다. 그가 유월절 축제를 위해(날짜는 확실하지 않지만 서기 30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은 자신의 운명과 대면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고 해석해 왔다. 산헤드린(고대 예루살렘의 유대인 최고 의회이자 법원)과 대제사장이 선고를 내리고, 로마 총독의 도움을 빌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한 신도가 그를 개인 무덤에 묻었고 로마 군인들이 경비를 섰는데, 사흘 후 그의 유해는 사라졌다. 그 날, 그리고 이후 몇 달간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친구들은 살아 있는 모습의 예수를 목격했다고 확신했다. 첫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였고, 이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예루살렘과 다른 곳에서 예수를 보았다. 그 결과,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의 가르침과 죽음을 재평가했고, 그 안에서 비길 데 없이 강력하고 긍정적이며 변화를 낳는, 하나님이 내린 메시지를 보았다. 오늘날까지 그 메시지는 온 세계의 사람들을 강하게 이끌고 있다.예수 부활에 관한 기록은 신약성서 4복음서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초대교회의 보편적 확신과 합의를 표현하는 다양한 신학적 표현들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발견해서 알 수 있음을 믿음으로 신앙인들은 믿음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그래서 그 이후 예수 승천하심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믿고 사랑으로 이를 감수하는 것이다. “예수 부활의 의미”는 죽음 이상의 생명으로 사랑을 강조함에 그 의미를 두고 있음에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따라서 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부활한 예수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대로,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4-26
  • 사순절에 새기는 거듭남
    바울 선생의 믿음의 전 생활은 그의 믿음의 고백에서 ‘자신이 고백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말함에 주목한다(고전2:1-2) 예수님의 지상의 삶 전부와 그 사역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환히 밝혀 주심을 알게 한다. 하느님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심은 사람이 영적 생명을 부여 받아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하기에 (요한복음1:13 )하느님께로서 난 자녀의 권세를 받음은 ‘거듭남’의 삶을 알게 한다. 그래서 위로부터 난 영적인 자들은 새 생명으로 다시 나게 하심은 사람은 비로소 영적 생명을 부여 받는 것이다. 여기서 아는 것은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느님의 능력으로 난자 즉 거듭난 자라야 “십자가 지는 복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을 지키며 부활절의 생명 된 희망을 찬양하며 찬송한다. 그리하여 오늘의 교회는 사순절의 교회력에 따른 행사를 갖게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스스로 고난을 당하신 십자가를 생각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하심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하신다. 인간은 그 죄의 대가를 스스로 해결 할 능력이 없다. 그럼으로 십자가 사건을 용서함을 받은 믿음의 행세를 하며 그리스도인이라 믿음의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맞아 여러 가지 믿음의 감회를 가지고 있다. 서방교회에서는 사순절을 지키는 믿음에 골몰하는 반면에 삶의 거듭남을 강조함에 주목한다. 재의 수요일에 시작해 부활절 전까지 6주간 반 계속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금식한 것을 본떠서 일요일을 제외한 40일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부활절 8주 전부터 시작하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금식 일에서 제외한다. 부활절 축제 전에 준비와 금식의 기간을 지킨 것은 사도시대부터였다. 이 기간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준비하는 시기였고, 죄인들에게는 참회의 기간이었다. 초기의 수세기 동안 금식규율은 엄격했으며,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그렇다. 서방에서는 이 규율이 점차 완화되어 엄격한 금식 규정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면제되어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만이 사순절 금식일로 지켜졌으나, 참회예절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영국성공회의 〈성공회 기도서〉는 사순절을 금식으로 지킬 것을 규정하고 있다. 루터교를 비롯한 개신교 교회에서 사순절은 다양한 예배와 전례로 지켜지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자기희생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이다.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곧 공의와 사랑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항상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나 시행함을 믿게 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를 잘 나타난 하느님이 행하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친히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스스로 고난을 당하시고 삶에서 친히 그 아픔을 보여 주시는 놀라운 한 사건임을 친히 당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삶으로 보여 주신 공의와 사랑의 사건임을 삶으로 보여 주신 관계를 믿게 한다. 바로 이러한 삶의 자리에 화목(Propitiation), 구속(Redempition), 칭의(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로 해석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것은 그 의미가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어 인간과 그 모든 생명을 살려 구원했다는 지대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서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은 구속의 의미로 오심을 믿게 하심을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곧 생명 안에 본체이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함을 깨닫게 함이다. 베드로 전서1장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 할 씨로 된 것이니 하느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심을 거듭나게 하신다.거듭남의 그 의미는 단순한 외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면의 개조와 영적 재창조를 말함에 있음을 주목하게 한다. 결국 거듭남이란 생명의 본체요 근본인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새롭게 영적으로 태어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4-17
  • 십자가를 지는 믿음
    2019년 예배력에 따른 성서일과에 따른 신앙생활을 통해 살피어야 하는 성경의 일과를 따르면 이번 주간은 3월31일 주일, 넷째 주일로 사순절 기간에 넷째주일이다. 이는 순교자들을 기르는 주일이기도하다. 이를 기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기에 예수의 삶을 사는 이유로 그 삶을 사는 그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하게 한다. 구약에서는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에 대해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 까지 주라는 예수님의 삶은 무슨 믿음인지를 알게 한다. 특히 예수님이 산상에서 가르치신 삶의 교훈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이해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게 한다. 예수께서 남기신 교훈은 마태복음5장에서는 삶을 구체적으로 말씀 하시기를 ‘살인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돌려 대며,’속 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 ‘고 하신다.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리까지 동행하라 하시며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심을 깨우치게 하신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너희가 먼저 대접하라 하신다’ 하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의 대속으로 믿음의 삶을 가르치신다. 여기에 예수님의 근본 간절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든 바울 선생은 “내게는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신 신앙고백을 배우며 삶의 영위에 그 사심을 깨우치게 한다. (갈6:14) 이는 바울선생의 뒤를 따라 우리의 삶이 이 믿음으로 삶을 영위해 살아야 함을 믿음으로 감당케 한다. 말하자면 성령으로 거듭나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삶을 사는 자는 이러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십자가의 믿음”을 삶의 현장에서 이를 구현해 살아야 한다. 이는 곧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나의 생명을 구원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지니고 살아야 함을 이번 사순절기간을 맞이하여 마음다짐이 믿음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삶의 고백을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나에게는 예수 십자가를 지는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심에 주목한다. 오늘을 살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내 삶을 드러내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는 믿음” 외는 없다”고 하는 고백하는 행함을 고백 한다. “종교개혁은 당시 사회에 만연한 사회의 병폐에 대한 도전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좋은 공로나 인정으로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함을 받는다”는 캐치프레이즈로 일어나는 혁명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이는 믿음이 삶에서 나타난 행함임을 알게 한다. 믿음과 행함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나올 수 있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 또한 나올 수 없다.오늘날의 교회는 삶에 대하여 너무 안일함과 평안함에 안주하는 삶이 깃들어 있어 나태하고 안일함에 감사하는 믿음임을 스스로의 삶에서 이를 기원하고 이를 축복인 냥 착각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스스로 “십자가 지는 믿음”이 없음을 오늘의 우리 삶에서 살피게 된다. 한 생명을 귀중하게 받아 이 세상에 태어 나 마냥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생명을 부여받아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영적으로 그 삶을 영유해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의 교훈은 언제나 주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역사를 전제로 함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의 믿음과 행함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십자가의 삶은 그 점을 이 사순절 잘 알게 현실로 보여주는 구원의 사실이다. 그리스도 교회가 부활절을 준비하는 참회 기간으로 정하여진 사순절(Lent)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온 정성으로 마음을 다 하여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4-05
  • 사순절을 맞으며
    서방교회에서는 “재의 수요일”에 3월 6일(수) 시작해 부활절 전까지 6주간 반 계속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금식한 것을 본떠서 일요일을 제외한 40일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부활절 8주 전부터 시작하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금식 일에서 제외한다. 부활절 축제 전에 준비와 금식의 기간을 지킨 것은 사도시대부터였다. 이 기간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준비하는 시기였고, 죄인들에게는 참회의 기간이었다. 초기의 수세기 동안 금식규율은 엄격했으며,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그렇다. 서방에서는 이 규율이 점차 완화되어 엄격한 금식 규정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면제되어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만이 사순절 금식일로 지켜졌으나, 참회예절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영국성공회의 〈성공회 기도서〉는 사순절을 금식으로 지킬 것을 규정하고 있다. 루터교를 비롯한 개신교 교회에서는 이렇게 “사순절”이 다양한 예배와 전례로 지켜지고 있다.그리스도교인들이 성주간과 성금요일로 이어지는 여러 예배의식의 절정으로 지키고 있는 부활절 의식에서 많은 민족적 풍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중에는 유럽인의 고대예식과 상징적 표현에서 전래된 것이 많으며, 부활이라는 주제와 관련 있는 중동 이교도들의 봄의 축제들로부터 유래된 것도 있다. 이 풍습들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예를 들어 사순절 기간 동안 먹지 못하게 되어 있던 달걀이 이 의식에선 새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풍요의 상징이었고 후에 유럽에서도 역시 같은 상징으로 쓰였던 큰 산토끼가 북아메리카에 서식하지 않으므로, 그보다 작지만 인간의 풍요와 달의 주기(週期)를 상징하는 부활절 산토끼로 대체하여 준비한 달걀과 함께 둥지에 넣거나, 달걀을 멀리 감추어 아이들이 찾도록 하는 놀이가 부활절 풍습으로 이용된다.가톨릭교회에선 '예수 부활대축일'이라 하여 전례서가 정한 대로 예식을 행한다.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절은 성(聖)3일로 끝나게 된다. 성목요일에는 성사집행에 사용되는 성유(聖油)의 축성미사를 교구별로 주교좌성당에서 드리며, 저녁에는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성만찬미사를 드린다. 그 후 그리스도의 부재(不在)를 나타내기 위해 보라색 천으로 십자가상 등을 가린다. 성금요일에는 망부활미사(부활 전야예배)를 드리며 가능한 한 단식을 한다. 개신교에서는 1947년 교파에 관계없이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나, 1960년대에는 분열과 대립으로 별도의 행사를 가졌다. 1978년 다시 통합되어 대도시별로 부활절 새벽에 연합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달걀에 채색하고 장식하여 선사하기도 한다. 내 삶 속에서도, 다시 살아남의 기쁨이 있길 소망하다보니, 먼저 죽어야한다. 죽지 않으면 어찌 다시 살아남의 경이로움을 체험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믿음의 경험을 맞이해야 한다. 아주 조그마한 내 자심의 몸의 움직임, 마음의 동요, 힘 듦 속에서도 부활의 기쁨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우린 만남 속에서도, 부대낌의 힘 듦 속에서도, 마른땅에서 움트는 새싹의 경이로움을 기대하며 때를 따라 오는 자연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음도, 그분의 부활이 있었음임을 고백하면서 긴 육신의 아픔 속에서 봄은 대지를 이기고 일어나 향긋한 봄의 생명을 내듯이 이제 땅에서 일어나듯이 믿음을 가지는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준비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 10:23 “주님,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조종하지 못한다는 것도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경험을 가지는 기간임을 그리스도인은 준비하고 부활절을 지켜가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3-21
  • 화해하는 민족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초기 한국교회는 민족의 설음과 아픔에 허덕이면서 세계 YMCA와 한국교회 선교활동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갖고 다양한 시민 단체를 주도해 나가기 위해서 그 당시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시대와 사회 현실을 감안하여 교회가 처한 현실의 문제 앞에서 개혁과 갱신을 하기 위해 YMCA 운동에 주도권을 행사하여 여기에 교회는 선교의 자리를 터득하여 기독교시민운동 단체로서 교회가 설 자리를 찾아 당시 민족 운동이나 문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장래를 책임질 수많은 학생들의 그룹운동을 일으켜 당시 한국교회의 선교일환으로 YMCA운동하였음을 알게 한다. 특히 YMCA가 다원주의 현대사회 속에서 청소년의 활동 공간으로 장소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정체성 확립이나 그 방향 진로에 까지 영향이 사실로 그 성과는 대단했다. 특히 사회적으로는 그 운동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YMCA가 단순한 시민단체만이 아니라 교회가 또한 경영, 유지에 따른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그 정체성 확립과 교회 선교의 장을 넓혀 활동 공간을 서울 전역에 넓혀 나중에는 한국사회에 많은 역할을 감당해 왔음을 안다. 민족주의와 정체성확립, 시민의식 계도, 청소년 문화 활동, 공정선거 캠페인, 향락문화 추방 캠페인, 환경 보전운동 캠페인, 시민정신, 문화질서 캠페인, 이러한 YMCA 운동은 기독시민운동의 역할로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막대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이미 실천하고 있었음을 한국교회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선교의 자리에서 살펴보면 지금 한국교회의 선교 자리와 그 의미를 알도록 깨우쳐야 한다. 한편 근대 민족주의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처음 발현되었다. 17세기 영국의 민족주의는 후대에 나타난 세속적 민족주의보다 종교적인 성격이 짙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계층의 성장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존 로크는 영국 민족주의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했고 18세기 미국 및 프랑스 민족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에서는 교육 및 공공생활의 민족주의화 경향은 정치적 충성의 범위를 넘어 민족적 차원으로 나아갔다.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민족감정의 발흥으로 인해 첫째, 절대군주가 등장하여 중세 봉건사회의 지방 분권주의를 타파하고 영토 확장과 함께 중앙집권적 국가를 탄생시켰으며, 둘째, 생활 및 교육의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국어가 유행하고 교회와 종단의 구속력이 약해졌으며, 셋째, 상업이 발전됨으로써 중산 시민계층과 자본주의적 기업형태를 창출해냈다. 정치적·경제적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영토적 통일국가에는 중세의 종교운동에 견줄 수 있는 열정이 스며들어 있었고 국가의 중심으로 자처하고 있던 군주는 국민주권 이론과 인권사상에 밀려났다. 군주는 더 이상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었고 국가는 국민의 국가, 민족적 국가, 조국이어야 했다. 국가는 민족과 동일시되었으며 문명은 민족적 문명을 의미했다. 한편 제국주의의 핍박을 받고 있던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혁명적 정신의 기수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식민지 세계의 전역에 퍼져나갔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고전적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세력의 억압에 항거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민족주의였으므로 한결같이 반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식민지 민족주의의 경우는 보다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제국주의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에 제국주의의 압제로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므로 대개 식민지 민족주의에는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과거 일제하에서 일어났던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 우리민족은 통일에 앞서 하느님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분열시켜 노예로 만든 악의 근본이 조국과 민족의 분단에 있음을 한국 교회는 확인하고 통회자복하며 회개 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생각하며 이제는 한국 교회가 민족 분단과 동족상잔의 고착화에 대하여 서로의 사이를 통감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서서 먼저 하느님께 회개하고 이제는 서로 용서의 기도로 “화해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3-07
  • 백년 맞는 민족
    1919년 3.1절의 의미는 전 민족적 항일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운동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 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 운동을 처음 준비했던 33인이 일본·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가 독립을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타협적 의존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어가지 못했던 점은 지금에서 생각하면 운동과정에서 이러한 민족해방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이것은 오늘에도 타에 의존한 민족의 단결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3·1운동의 과정에서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 민족의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민족이 해방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도 촉진되었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는 오늘의 3.1절의 회상은 우리 민족이 다 함께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민족이 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의식을 고취해야 할 지도할 민족공동체적 통일의식이 필요함을 가지게 한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3.1절에 민족운동에 앞장서고 많은 교회가 핍박을 당했다면 오늘의 우리민족 앞에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진리는 인간 이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에서도 하늘의 뜻 아래서 십자가의 길을 터득하게 한다. 여기서 곧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서 태어나 살면서 삶을 친히 보여 주셨다. 마구간에 태어나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다니시면서 목수의 아들로 집안의 가난을 목수의 일을 돌보며 또한 공동체의 공생애 3년간 시험을 겪으시며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심은 먼저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극복하는 삶의 정황(형편)을 알게 하심에서 깨닫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삶을 보시며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우선인 냥 그렇게 알고 사려고 하는 이들에게 이것만이 우선이 아님을 예수께서는 삶의 ‘십자가의 길’을 친히 보이시는 삶으로 보여 이를 깨닫게 한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사시면서 하늘아버지 하나님을 찾음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심을 복음서는 우리에게 이를 알게 함에 주목한다. 예수께서는 땅의 사람들에게 삶에서 나타난 삶의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는 의지의 결단의 힘은 타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세상살이에 보이시면서 자기 스스로가 친히 해결하며 그 태도로 십자가를 지신다. 이 ‘십자가 삶을 예수께서는 친히 일으켜 주심에 주목하게 한다. “모든 생명은 고난”을 통해서 태어나고 또한 때를 따라 고난을 통하여 한 생명의 씨를 머금고 나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터득하게 한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은 그 생명의 힘으로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약동을 본다. 생명과 역경(고난)은 필히 하나이다. 흔히 생명의 약동은 자라며 성장하고 깊고 어려운 역경의 삶을 보며 성장하고 성숙함을 알게 한다. 이제 한 민족이 두 민족으로 살아가면 두 민족은 한 생명이기에 둘이 될 수 없듯이 [통일] 하여야 한 생명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3.1 절 기념주일”을 맞아 한국교회는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100년의 3.1절을 맞아 보다 성숙된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3.1절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같은 민족의 하나 되는 민족의 통일과 생명 의식을 가지고 어려운 삶을 극복하는 의미가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2-22
  • 기본적인 인사문화
    2019년 2월 5일은 “기해년”으로 한 해를 맞는 설날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서로 인사를 한다. 흔히 새해를 기원하는 인사말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말로 감당하지 못할 인사를 매년 되풀이 하고 있다. ‘복’이라는 말이 습관처럼 기원 인사를 드린다. 이러한 인사 의도에는 물질의 풍요를 담고 있음에 주의를 살피게 된다.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각자 직업에 따라 물질의 풍요에만 그 의미가 담겨 있음을 목격하게 한다. ‘복’이란 물질의 풍요적인 의미가 설날을 맞아 기원의 수단이 된다는 사실의 의미쯤은 알고 인사해야 한다. 옛날에는 복을 얻기 위해 그 행위로, 악귀를 쫓는 축귀 행위로 부적이나 또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빗자루로 창살을 두드려 잡귀를 문 밖으로 내쫓는 민간신앙으로서 성공제, 기은제, 고사, 굿 등으로 표현되어 왔음에 기인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기복행위는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복을 비는 행위는 가신(家神 집의 신)이나 비는 대상에 따라 비는 무속의 일종으로 실행되어 왔기에 복을 기원하는 행위에 따른 잘못된 인사문화로 기복신앙에 기인됨을 알게 한다. 우리 조선 후기에 와서 이러한 기복행위는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 복에 대한 갈망은 각종 신종교 발생의 배경이 되어 외래 종교가 유입되더라도 민간에서는 이를 기복적인 성격으로 변형시켜 흡수한 현상으로 필히 전래 내려 온 복에 치중함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사리게 된 것은 경제난의 근원을 살피게 되면 경제는 성장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국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소유에 대한 세 가지를 알게 한다. 첫째는 모든 것은 다 창조자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신앙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창조자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을 따르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은 물건보다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어 이용가치로 사용해서는 아니 됨을 알게 한다. 셋째는 재물은 종속적인 선이지 최상의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돈을 자기 사욕을 위해 쓸 때 나쁜 것이요 남의 어려움을 위해 쓸 때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가진 자는 책임이 크다. 자기 뜻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여야 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성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다. 한해를 보내고 또 한해를 맞으며 송구영신의 인사를 나눌 때 성서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면 “무슨 복을 많이 받으라”는지, 가치 없는 삶의 인사로 한 해의 삶을 기원하는지 부끄럽게 생각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은 물론 인간이 행복하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지는 알아야 한다. 다만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하다. 그러한 삶의 의지와 정열은 인간 삶의 역사와 문명과 산업사회 발전을 일구어 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생명으로 존재의 가치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 왔다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피게 된 것은 구약성서에 드러난 창세기의 고대인들이 삶을 살아가는 양식대로 자기 삶의 자리에 바벨탑으로 쌓아가며 자기 소유물을 쌓아 가는 것으로 자기 삶의 자리를 두려고 한 점을 알게 함에 주의를 가진다. 이는 곧 인간은 한 생명으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사실은 인간은 한 생명으로 한 세상을 산다는 전제를 알게 함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한 생명으로 한 삶을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라.”우리 그리스도교는 물질을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물질 사이에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라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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