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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위 감사의 갈무리 2
    여기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깊이 통찰하고 알게 해준 이가 현대신학의 과정신학자로 화이트헤드(A.N. Whitehead)를 알게 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이 세상 만물과 직접 관련이 없는 초월성 혹은 '원초적 본성'이라고 말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이 우주만물과 직접 관계된 제2 의 본성으로써 '파생적 본성' 혹은 '물리적 본성'이라 한다. 그는 이 세계 운주 만물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해 낸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리적 본성으로서 자신의 본성의 일환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우주는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이다. 유비적으로 말하면 사람에게 몸과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마음 곧 영적 측면과 몸에 해당하는 물리적 측면이 있는데 이 세상 우주 만물 곧 자연은 그 만큼 하나님과 직접적인 혹은 근원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이 그의 지으신 만물에 보여졌다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행복은 감사의 나무에 피는 꽃이요, 불행은 불평불만의 나무에 돋는 독버섯이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신앙은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역설한다. 감사하는 마음의 훈련은 인생의 중요한 훈련의 하나이다.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면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무슨 일이나 쉽게 이루어지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가 힘들다. 고생 끝에 목적을 달성해야 감사하는 마음을 느낀다. 추위에 떨어본 사람이 태양의 감사함을 느낀다.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이 밥 한 그릇의 감사함을 갖는다. 갈증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시원한 물 한 그릇의 감사를 갖는다. 인정에 굶주린 사람이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라는 감정을 심어 주셨다. 우리는 이 감정을 키우고 확대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빛깔을 바로 분간 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색맹이라고 한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는 마음을 못 갖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색맹환자이다. 자기 인생에 대하여 아무 것도 감사할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옅은 생각 이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 감사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병원 환자를 볼 때 자신의 건강함을 감사하자. 앞 못 보는 장애인을 볼 때 나의 두 눈 을 감사하자. 인생은 결코 외로운 것도 아니요, 불행한 것도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마음속에 지닌다면 인생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요,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것이다.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그렇게 허무 한 것도 아니요, 괴롭기만 한 것도 아니다. 人間到處有靑山이라고 했다. 감사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라. 인생은 기쁨의 샘터요, 행복의 화원이 될 수 있다. 인생은 성실하게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요, 열심히 노력하고 생활한 만큼 보람 이 있는 것이다. 비록 어두움과 절망의 골짜기로 지날 때에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감사의 밝은 태양을 가슴속에 지니고 기쁨의 인생을 기도로써 살아가자.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다. 진정한 감사는 영혼에 더 큰 감사의 햇살이 비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를 아는 것은 감사의 덕이다. 감사는 인간의 본성이다. 새가 노래함같이 인간은 감사한다. 감사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대한 인간 의 본능적 반응이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씨가 햇빛과 비를 받아 자람같이 우리의 감사도 경험 속에서 자란다. 역대 사도들은 고난 중에도 감사 했다. 독일에서 많이 부르는 노래는 "이제 우리는 다 하나님께 감사하자"이다.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갖게 한다. 인간의 존재도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 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연과 인간이 생존하는 것을 알게 한다. 존재하는 것은 때에 따라 변화하기에 천하만사가 기한이 있어 가을에는 철을 따라 산과 들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제 자리를 지키면서 철을 따라 처한 환경에서 묵묵히 한 생명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라면서 변화하여 세월을 따른다. 그 모습은 다양한 형태와 아름다운 빛깔을 자아내면서 꽃과 나무들로 계곡에 처하여도 기다림과 외로움을 감당하며 생명은 그 무엇이라도 이미 그 자체로서 더 이상 아름다움의 자태를 들어내고 자연에게서 수확한 많은 영글어 가는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0-26
  • 한가위 감사의 갈무리 1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한다. 이것은 진리로서 자연의 길이요 질서요 생명이 된다. 이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터득 하려면 먼저 심어야 나중에 거두게 하는 것을 알게 한다. 또한 여기에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함도 알게 한다. 그리고 씨를 뿌리기 전에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하기에 씨를 뿌리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씨를 뿌려 거두려면 반드시 때가 지나야 거둘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하지만 이는 어떤 씨앗도 뿌린 후 곧 바로 거둘 수 없다는 것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뿌린 씨가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하며 모든 일에 이익을 얻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도 알게 한다. 그러나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 모든 씨앗 에서 수확을 얻지 못해도 결국 뿌리는 것 보다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이치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농사의 법칙은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난다는 이치도 알게 한다. 종자대로 심으면 종자대로 난다. 이것은 소가 돼지를 낳을 수 없듯이 결국 소는 소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는다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또한 심는 자는 반드시 그 종자를 다음 기회를 갖기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도 주의 하여 알게 한다. 이는 다음 수확을 위해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한다. 이렇게 세상만사의 이치가 '심는 대로 거둔다' 사실로 진리인 된다. 이는 반드시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종을 치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알게 한다. "감사의 갈무리"는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무리하는 것이요 심는 것만큼 이루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갈무리하여야 함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감사로 하늘의 씨(복음)를 받는 하나님의 몸으로 사람의 인내로 잘 심는 자가 되어 하늘의 감사를 잘 챙기어 간직함으로 "감사의 갈무리"를 알게 한다. 때가 이르면,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갈무리'의 의미는 모든 것을 잘 거두어 돌보는 것이다. 이는 창조질서 순응에 대한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4계절, 우주 천체의 지속적인 운행은 창조질서의 순응에 대한 이치로 되어진다. 원래 창조질서에 순응 하는 관계를 알게 한다. 이 회복은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계교회들의 추수감사절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감사절에 연유하면서 자기민족의 역사전통과 문화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접목하여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전하는 것은 풍요로운 재물에 대한 현혹됨이 아니고 이렇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늘 기억하게 하는 창조보전을 위한 감사인 것이다. 이렇게 창조질서를 지키고 생명의 감사를 아는 것은 우리나라의 한가위 명절이다. 그리하여 한가위는 우리의 삶과 마음을 나누고 넉넉하고 여유롭게 한다. 느긋하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는 스스로 의 감사를 알게 한다. 이는 "한가위가 감사를 아는 명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한국의 한가위와 구약성서의 초막절은 너무나 공통점이 같다. 초막절은 유대 달력으로 티쉬리월로 7월15일 보름날인데 한국의 한가위도 음력으로 8월 15일이다. 달만 다르지 날짜는 보름으로 항상 같은 것이다. 달밤을 즐기는 행사도 서로 같다. 그리고 조상을 찾아 경배하며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것도 같다. 초막절에는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조국 땅에 있는 성전을 향해 누구나 순례를 하며 조국과 조상을 기억하는 전통도 같다. 유대인들의 쑤카와 한국의 한가위가 추수한 곡식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도 같은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 전통문화는 지배문화가 아니고 백성의 문화였다. 이 문화는 하늘과 땅, 신령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생명과 문화를 창조하는 원초적인 신앙적인 풍습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성서는 우리에게 자연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깊이 묵상하고 사색하고 영적 직관과 기도와 체험으로 알아 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을 풍부하게 해준 자연에서 영감 받은 자들임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영성이 성서 전반에 자연 속에서 흐르고 있음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0-13
  • 감사는 이유가 없다
    자연은 인간에게 이용 가능한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영이 자연 속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 알게 한다. 자연 과학자들이 ‘창발적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우리 신앙으로 보면 하나님의 ‘내재성’의 입장을 알게 하여 ‘내재적 초월’을 자연으로 하여금 이를 보게 한다. 흔히 가을을 단풍계절의 풍경만을 보는 관광객도 있지만 열매를 거두는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의미도 있다. 가을은 살아 익은 열매를 보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기능적, 기계적 가치를 우선하는 세상이 되어 가면서 이러한 가치로 우대받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테크놀로지의 이데올로기가 보편화되어 이러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음을 알게 한다. 예컨대 사람을 양육하는 인간교육도 학교교육에서 배제된 채 그 교육은 기능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로 변신해 가고 있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가 인간미가 풍성한 사람보다는 공부 잘하는 지식기능사를 요구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한다. 이러한 기업은 기능적 인간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출세와 승진을 위해서는 수단방법도 개의(介意)치 않게 된다. 이러한 현상인 자본주의 사회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에 치열한 생존경쟁을 정당화로 인식하고 살고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모든 것을 부(富)의 창출과 증식이라는 돈벌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제주의적 가치관이 되고 말았다. 이 돈벌이는 경쟁력, 효율성, 생산성 등을 적극 지지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본래의 경제이념을 상실하고 자유경쟁을 유도하여 삭막한 삶으로 생활을 이끄는 현상이 되고 만다. 사실로 본래의 경제관 이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 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으로 이를 성사 시키는 것으로 경제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감사’라는 본래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은혜의 고마움에 비롯된다. 그리하여 ’감사의 마음’은 ”이유가 없음”을 알게 한다. 감사는 감사해야 할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의 보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천하 만물을 공간과 시간의 전체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그리고 생명의 아버지이심의 그 까닭을 아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는 아무 이유나 조건이 아닌 사랑의 관계이듯이. 그럼으로 그 관계의 나타남은 감사와 은혜뿐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조건반사적인 태도이다. 그렇다고 동물처럼 동물이 그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후천적으로 가진 반사작용과 같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그런 조건반사가 아니라 정녕코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나타내는 인사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 사함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 은혜가 바로 그것 이치를 알게 한다. 이는 곧 ’은혜’라는 그 깊은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즉 회개할 때 모든 죄를 덮으시는 죄 사함의 은혜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은혜이다. 여기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의 태도로 사랑의 교제 속에서 범사에 대한 믿음의 인사(人事)가 있다. 인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할 마땅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사는 사람끼리 관계를 갖는 생활에서 기본적인 인사가 된다. 이런 일을 감안하여 보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가 없는 무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우리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인간, 자연과의 생명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인간 사이에 불신과 반목이 생기고 인간 사이의 관계가 상실이 되면 자연을 황폐케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땅이 인간에게 엉겅퀴와 들풀들로 서로 엉키듯이 인간이 하는 노동이 저주받는 노동이 되게 하고 반면에 인간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을 보전하며 인간의 신뢰도가 창조질서를 회복해 가면 여기에 땅에서 강물이 흐르고 온갖 들판에서 과실이 맺는다는 것으로 창조의 증언으로 실증이 되어 이것이 성서의 증언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맥추절 감사 절기를 지키는 것은 땅이 자연적으로 소출을 낸 것에 대한 감사이고 이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징표로 믿었던 그 믿음을 여기서 보게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9-29
  • 평화 통일은 화해
    우리는 1950년 6.25전쟁으로 한 민족이 둘로 갈라진 남북관계를 정상화 하여 한반도 통일시대를 개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 동질성 회복과 실질적 협력으로 여기에 임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정부는 인도적 지원이나 협력에 민간단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남과 북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민생협력을 추진하고 사업의 범위와 그 폭을 넓히고 사회문화 교류 및 인도적인 사업을 확대하고, 민간 교류의 참여도를 넓혀 남북관계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이산가족의 만남을 숙원해야 한다. 남과 북은 한 조상 때부터 살던 한 나라의 조국이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모여 살아 온 한 자손의 배달민족이기에 실로 하나의 민족으로 그 문화와 삶의 역사가 같기에 철부지한 북한의 힘의 논리에 대응할 수 있는 태도에 선으로 악을 이기는 동질성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해방 이후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열강의 손으로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은 한 민족의 갈등의 사실을 남기게 됨에 이제는 더 이상 이를 연장해서는 아니된다. 그동안 민족의 분열과 갈등을 회복하기 위해서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한 민족의 공동의 통일의지를 확인했고,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 등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해 왔다. 지금의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기회를 놓치지 말고 통일의 의지와 평화를 정말로 기대하고 노력함을 나타내야 한다. 지금 우리는 ‘하나인 민족의 회복’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72년간의 비정상적인 강점기, 분단장벽, 계급장벽, 빈부격차, 상대적 박탈감, 정치적 갈등 등 부당한 구조적 장벽 에 시달려 왔음을 경험하고 있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생명, 평화, 공의의 가치를 조직적으로 훼손하는 벽들을 허무는 복음적 선교에 나서서 갈등의 구조를 허무는 일에 앞장서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아가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한국교회와 그 성육신 신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갖추어져야 함을 깨닫게 한다. 성육신 신앙은 사랑의 내림을 알게 한다. 만물의 모든 생명은 숨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 아래로 내린 생명은 숨겨져 있다. 보이는 것을 허물고 아래로 내려가 그 생명을 찾아 아래로 내려 흘러 생명을 일어나게 한다. 그러나 이 생명은 보이지 않게 쉬지 않아도 한 생명을 키우는데 흐르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생명은 하늘이 드러내고 보여 준다. 위로부터 호흡하게 하고 위로부터 내리는 생명의 은혜가 되게 하신다. 내리는 은혜는 생명을 키우고 깨끗하게 하고 만물을 새롭고 신선하게 한다. 넘치면 흐른다. 그리하여 위로부터 내려 주심은 은혜가 된다. 마냥 낮은 곳을 찾아 넘치게 하고 그리고 넘쳐흘러 흘러 아래로 아래로 스스로 흐른다. ‘내림’은 사랑으로 부모의 사랑을 알게 하고 하늘의 은혜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사랑이나 감사는 은혜의 내림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래로 부터 더욱 충만하여 흐르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한국교회의’의 믿음이 되기를 두 손 모은다.이제 한국교회는 이 땅위에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그동안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인권, 사회정의, 민주화를 위해 기도해 왔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은 하나님으로 부터 창조함을 받은 공동체로서 이 사회에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분열시키고 노예로 만든 악의 근본이 조국과 민족의 분단에 있음을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며 이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회개하지 않고는 통일은 오지 않는다. 민족의 평화 통일은 국민 모두의 회개와 화해하는 도리밖에 없다. 화해는 남과 북이 그대로를 인정하고 이를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희망도 하나였습니다”(엡4:3-4) 이 믿음의 가능만이 평화 통일의 지름길이다.“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부러 뜨리고 창을 꺽고 방패를 불사르신다”(시46:9).“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 하셨다. 네 칼을 칼 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26:52).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9-21
  • 사실과 진실한 진리
    진리는 영원하다. 진리 안에 사실이 있고 사실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 이는 인간사회에서 삶을 통하여 사실과 진실이 진리 안에서 드러난다. 진리란 참된 도리나 바른 이치를 말한다. 그리하여 진리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으로 참을 알게 하기에 거짓이 없고 바르고 참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진리는 영원하다. 이 진리 안에는 사실이 있고 사실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 그러므로 참된 삶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므로 영원하다. 영원하다는 것은 진리의 정의이다. 그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고소로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그는 주님으로 지상의 생애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진리를 증언하는 삶의 목적임을 사실로 증언하기 위해 "진리가 무엇"임을 보여주며 '만 왕의 왕'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무엇인가를 친히 보여주시는 것이다. 성서적으로 '진리'란 참되는 사실을 진리 혹은 진실이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들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과 의의 교리도 진리가 된다. (갈2:5,14). 또한 마태복음 24:35에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 함을 알게 된다. 오는 5월9일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일이다. 여기에 대통령 선거를 두고 많은 대통령 후보자들이 서슴지 않게 말을 함부로, 사실이 아닌 권모술수로 함부로 말놀이로 사실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함을 본다. 여기에는 사실과 진실이 숨겨 저 있음을 본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 동안 근대화 추진 과정의 부작용으로 인해 사회 전반이 갈등과 모순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의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에 기인하여 물질 지상주의와 실용주의로 부를 축적한 사회는 배금주의에 빠지고 도덕적 가치가 목표를 잃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는 이런 현상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일탈 현상을 보게 된다. 이는 인지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의적인 가치의 문제로 번져 서로 양극적인 대립현상으로 혼란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다 최근 대통령 선거에서 비방과 인신공격 등 언어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사회는 사실이 은폐하고 진실이 외면당한 채 말의 공방은 상호 비방과 인신공격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선거에서 익명성으로 대변하는 사이버 공간의 중요성이 '아니면 말고'식의 명예훼손과 흠집 내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다. 여기에 사실과 진실을 교묘히 호도하여 개인과 집단과 조직을 무너뜨리기도 하며 여기에 정치권은 법과 언론을 장악하여 상대의 정적을 무력화 시키면서 자기들의 이론을 합리화 하여 사실과 진실을 분리시켜 법과 언론을 교묘히 활용하고 있다. 이는 진실 화 되지 않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표하고 정보를 흘림으로 진실의 여부에 상관없이 여론 재판에 의해 무너지는 효과를 노리는 작태를 보게 한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 과거 선거 역사가 이릉 증명하는 진실의 자리였으며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살아왔다. 진실이란 거짓이 드러나는 것을 말하고 사실은 거짓이 없이 고스란히 드러남을 알게 한다. 이렇게 진실은 지혜를 수용하고 사실은 지식을 수용함을 알게 한다. 지혜와 지식은 성(性)은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지혜와 지식의 차이이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움으로 틀에 박히지만 지혜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며 사람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지식 있는 삶보다는 지혜로운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도 많이 사용할 줄 알지만 지식은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지혜가 없으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요 시체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은 생명의 명령을 받아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은 삶에 명령하는 것으로 생명(生命)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라 할 때 사람, 인간으로 살아있음의 생명이 태어나고 기르며 살면서 성장, 성숙하며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이는 사실과 진실이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삶은 사실이어야 할 의무로 계획과 하늘의 말씀들의 심판으로 법과 예언들의 약속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들은 인간의 영적인 생명을 지탱하고 그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강하고 살아 약동하는 하나님의 호흡이 그 순간순간에 말씀으로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9-11
  •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심으로 그 하나님이 사람의 궁극적인 실재이시다. 그러므로 삶을 거두는 생명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시며 존재의 근거가 된다. 사람이 삶을 사는 과정에서 언제나 그의 궁극적인 실재 앞에서 존재의 근거로서 하나님은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그 이유를 알게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이며 이를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그 믿음은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해답하는 길이 된다. 이는 곧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이며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이 세계의 창조를 사실로서 실증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뗄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와 그 안에 담겨 있는 믿음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성서는 과학의 교과서가 아니며, 믿음은 과학적 사실의 보증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창조설화에서 과학적 진리가 아닌 신앙적 진리를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한 자기 이해를 밝히어 내야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밝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진술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물학적 기원을 말하려는 과학적인 보고에 그 목적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란 창조자의 관계와 관계의 사이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관계에 사랑의 약속을 말하려는데 있으며 이에 준엄한 사실은 인간이 유한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예컨대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사실'은 인간은 유한함으로 비존재의 유산을 지니고 있음을 믿게 하려함에 있다. 인간만이 유한성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존재로서 그 삶에는 공포와는 다른 그늘진 불안을 알게 한다. 여기서 아는 것은 공포는 일정한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이것은 현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성에 자의식을 가지고 늘 불안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끊임없이 비존재의 위협으로 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점을 알게 한다. 여기에 신학자 폴 틸리히의 “궁극적 실제(ultimate reality)” 는 ‘있음’과 ‘아니 있음’, 인간의 ‘삶과 죽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 하여’는 온 몸으로 긍정 할 수 있는 것, 정말 목숨을 걸고 자기 자신을 내 놓을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궁극적인 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닌 아직도 실현해야 할 미래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이를 알게 한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본문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사도 바울의 이 신앙고백 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왜? 지으셨음을 알게하며 창조자가 그 의도를 따라 삶을 영위(營爲)하며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앙이란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상태이다. 신앙이란 이처럼 하나님에게 삶의 뿌리를 밖고 생명의 젖줄이 이어질 때 우리는 죽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살아 있는 것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알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다 이 신앙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겠기에 창조주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또한 바로 여기에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은 창조의 인간학적 중요성과 그 의미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창조는 사람에게 있어서 존재와 본질사이에 틈이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로서 “자기실현”이라는 창조의 역학적 근거가 되기에 존재와 본질의 분리는 없어질 수 없는 운명적 사실인 것의 의미도 깨우치게 한다. 이는 사람의 자기창조의 원리가 되며 이것이 사람의 창조성의 배경이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8-24
  • 예수 승천과 파루시아
    5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날로서 부활한 지 40일이 되는 날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갖게 한다. 신약 성서에서 보면 사도행전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뒤 40일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가 그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려갔다고 기록 되어 졌고 요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서도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승천의 의미는 예수의 죽음과 그가 부활한 뒤 승천했고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그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승천 축제는 4세기 이래로 동서양이 모두 부활절 후 40일이 되는 날에 베풀어진다. 승천의 신학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모든 이들에게 내려지는 최종적인 구속의 행위, 즉 그리스도가 “하늘로 오름으로 그가 우리를 하느님과 고난과 기쁨을 함께하는 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승천’은 초대 교회에서 세례때 사용하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도 언급되어 있다. 승천 축제는 그리스도교도 사이에서 크리스마스. 부활절. 오순절과 같은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 왔으나 4세기 이래로 동서양이 모두 부활절 후 40일 되는 날에 베풀어 행사 되어 왔다. 그러다가 중세기에 와서는 승천 축제는 보다 적극적이고 시각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 행사 진행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와 함께 감람산에 올라갔던 것을 흉내 낸 행렬, 십자가를 세우는 것, 교회 지붕을 통해 부활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올리는 것 등이 포함되어 진행되었다. 서양에서는 승천을 다룬 최초의 작품은 예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구름으로 부터 나타난 하느님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리스도를 옆면에서 그림 그리는 것으로 11세기 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예수의 승천”은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에 미술의 주요한 주제였고 두 시대 미술 모두 그리스도가 그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는 성상화를 담고 있음을 보고 오늘의 교회의 행사에 “예수 승천”의 의미부연에 관심을 잃어가고 있음에 본래 신앙의 특색을 드러내지 못함에 무색할 뿐이다. 여기에 오늘의 교회가 예배갱신으로 세 가지 의미가 따른다. 교회의 예배는 교회의 전통 예배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는 예배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전통은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바탕에서 그 의미를 갖게 하기 때문이며 예배의 질은 세계교회의 공동의 예배 유산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폐쇄적인 교파주의 예배전통을 지양하고 전통의 유산을 확인해 가야하며 이 세계 지구촌에서 개교회가 직면한 상황문화를 창조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할 교회의 교회력에 따라서 진행해야 할 당위적인 교회의 현실에서 찾아 진행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과 승천을 달리해 왔다. 이는 승천절을 부활절과 성령강림절 중간에 위치하게 하면서 현존 하시는 그리스도를 지시하기도 하고 성령 강림이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사건임을 시사해 오기도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아는 것은 영원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신학적 인식을 알게한다. 사실 승천이 현대 신학에서 무시 받았던 것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신앙의 실천에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성찬 및 예전의 의미를 현존 하시는 그리스도의 빛에서 조명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행위를 일상의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 행위를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신앙”만이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임을 알게 한다. 여기에 주지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예배는 짜여진 공간에서 길들여져 있고 예배의 본말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하심은 주님 예수님의 영광스런 강림과 연계에 있음을 믿음으로 감당하기 때문에 승천예배도 지켜져야 한다. 승천 없는 ‘강림’은 없다. 가셔서 오시는 분은 선과 후의 약속이다. ‘강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루시아’는 “가까이 하다, 옆에 있다, 도착했다, 참석하다, 준비되다”의 뜻을 가진 의미는 ‘가까운, 곁으로 부터, 근처에, 근사하게, 존재하다. 발생하다, 현존하다’의합성어에서 유래된 ‘파루시아’그리스도의 강림은 이미 이루어져 함께 있는 ‘현존의 의미’ 승천의 기약을 알게 한다. 즉 하느님의 구원의 열심으로 인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갈2:20)에게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의 강림이 이루어진 ‘파루시아’를 알게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8-11
  • 믿음은 약속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기본이 있다. 이 기본에 우리는 등한이 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믿음에는 열심도 있고 기도의 열정도 있고 많은 은사도 받았지만 만사의 때를 아는 ‘기다림의 영성’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구주가 세상에 오심의 구주탄생의 의미를 갖기 위해 대림절을 지나 곧 탄생의 날을 맞아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된다. 여기에서 믿는 자가 챙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하는 점이다. 나와 관계는 어떤 관계가 되는가? 그러면 어떻게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 절기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커다란 의미는 그를 믿고 따르는 믿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이시요 세상의 빛이며 영원한 말씀이신 분이며 그의 삶은 철저한 사랑의 화신으로 ‘믿음의 삶’을 사셨기에 여기에 믿는 자로 하여금 우리에게 이 사랑의 믿음으로 약속을 지키게 함을 알아야 한다. 여인의 컴컴한 몸속에서 보내고 탄생 후에는 이름 없는 목수로서 30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은 싸늘한 냉대뿐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예수 오심의 대접은 말구유에 누우심의 푸대접을 보게 하는 것은 눈여겨 살피지 않는 까닭으로 생긴 잘못으로 우리의 불찰(不察)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일을 아무리 후회해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어 후회막급하다.예수의 삶의 교훈은 약속을 이루라는 것이다. 이는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알아야 한다. 흔히 교우들은 믿음에는 열심도 있고 기도의 열정도 있고 많은 은사도 받았지만 만사의 때를 아는 ‘참고 기다림의 믿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구주가 세상에 오심의 구주탄생일에 반드시 대림절을 지나 곧 탄생의 날을 맞게 된다는 믿음의 과정을 알아야 한다. 이는 믿음이 어떠해야 함을 알게 한다. “믿음은 약속이다.”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에서 살아 온 결과로 살아 온 만큼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믿음은 약속”이다.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정밀한 심판에 서게 된다는 믿음을 알게 한다. 비록 죄된 인간의 삶이 성화되면 죄를 지었을지라도,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기에 그 삶은 구원함을 받는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 믿음으로만 그 약속이 지켜지기에 가능함을 믿게 된다. 이는 자기의 수행과 노력만으로는 아니되고 예수님의 살과 피의 공로를 받지 않고는 생명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과 우주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창조함을 받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한 바 지음을 받은 그 의도(약속)대로 따르는 것이 이 모든 이치의 뜻이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사는 삶은 그 이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정성스런 창조의 일터에서 사는 삶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삶의 길을 제시하여 약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음의 십자가 지신 것은 만인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하나님의 정성스런 창조의 일터에서 사는 창조자의 뜻을 사랑으로 깨우치려 함임을 알게한다.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삶의 예술가이다. 여기에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타고난 재질이나 복의 근본으로 성심껏 자기인생의 행로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재물의 탐욕에 만연한 삶으로 황금만능주의로 배금주의에 따라 돈이면 최고의 가치로 여겨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세상의 삶에서 말세를 보고 있다. 성서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함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는 한 생명의 기본 명제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갈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관해 생각을 가지는 존재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7-27
  • 오늘의 시대를 보며 인간의 삶의 자리를 살핀다 2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힘든 유혹(뇌물)과 함께 요청이 오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할 때 무엇이 그 잣대 노릇을 할까? "모래위에 집을 짓는다던가?" "밑이 빠져 새는 물통"처럼 헛수고는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 제일주의와 권력이라는 등식관계를 절대적으로 인정되는 사회 제도 속에서 권력 남용이라는 인식의 현실에 시달려 왔다. 가치가 혼돈된 시대에 방황하는 국민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정치인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개혁의 방향은 제도 개혁도 중요하지만 정치인의 의식 개혁이 먼저 더 중요한 정치 현실임을 주지한다. 오늘의 정치의 위기는 잘못된 가치의식과 그 규범에서 유래된다고 본다. 양심의 빈곤, 윤리의 타락, 질서의 굴절이라는 정신적 질환은 '정의 보다는 불의, 신뢰 보다는 불신, 질서 보다는 무질서가 속출하는 처절한 사회현실'을 보게 한다. 삶의 가치는 반드시 정로(正路)를 걸어가야 얻어진다. 정치가 진실과 정의와 인권과 박애를 중심하지 아니하고 자기이권을 중심으로 음모를 일삼는다든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의 기회로 국민을 기만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결과는 허무와 몰락 일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자기의 양심과 신념, 신조를 속이지 않고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생활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성실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범한 아량을 보여주며 진실을 말해 주는 자세는 존경받는 생활 자세이며 영향력을 가진 몸가짐이라 할 수 있다. 인사권을 가진 사람이 무엇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합리적 판단과 소신에 따라 결정을 행하려고 하는데 이에 다른 결정을 내려 주도록 자기와 친한 동기 동창생이 혹은 친척이 혹은 고향 친지가 부탁해 오는 경우에 갈림길에 서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힘든 유혹(뇌물)과 함께 요청이 오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할 때 무엇이 그 잣대 노릇을 할까? "모래위에 집을 짓는다던가?" "밑이 빠져 새는 물통"처럼 헛수고는 말아야 한다. 화이트헤드(A.N.Whitehead,1861-1947)는 "과정신학"을 신학에 적용하여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공간과 시간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살아가는 것을 제시함을 알게 한다. 이는 인간과 공간의 삶의 관계가 내면적이기 때문이라 한다. 인간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행동하는 것으로 공간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인간의 생활 속에서 사실과 의미를 갖게 되고 사물에 있어서는 사실공간, 자연공간, 인간적 공간으로 그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도 공간에 있어 인간은 신체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마음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지금에 와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창조 우주세계를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보게 하는 통찰력으로 그 신앙을 갖게 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는 신앙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깨닫게 하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제는 '시간과 공간 속에 사는 삶'으로서 우리는 우주와 만물을 단순히 물질의 세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보살펴서 함께 살아가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가치를 구원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심의 하늘의 뜻을 알게 한다. 이를 "하나님의 시간에 붇둘린 삶"이라 한다. 하나님은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피조물에 밀접하게 관계하고 계심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우주전체와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지음을 받은 몫이 있는 삶의 피조물임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 삶으로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에 붙들린 삶"을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 붙들린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깨달아야 한다. 이는 곧 인간이 모두 영원한 시간 안에 생명의 삶을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한 시간 안에 잠입해 있는 시간과 역사에서 삶을 사는 것이다. 항상 그 삶은 종말을 보고 산다. 시대의 변화는 새로운 문화로 옷을 바꾸어 입고 시절에 따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시간에 붙들린 삶"으로 시간과 공간에서 사는 삶임을 명심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7-14
  • 오늘의 시대를 보며 인간의 삶의 자리를 살핀다 1
    어느 시대든지 세월을 따라 시간은 가고 시대는 변화한다. 우리의 신앙의 형태도 그 시대의 상황 따라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창조질서를 따르려면 본래의 약속이 지켜져야 하고 이를 회복하여야 한다. 오늘날처럼 이 시대가 속도에 따라 사회적 정황은 너무 빨리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시대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삶의 정황))에 본래의 창조함을 받은 가치관이 요청된다. 우리에게는 만고불변의 하늘의 가치를 지니고 태어났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신앙의 삶의 가치관으로 우리에게 열어 보이신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성육신(incarnation) 하심으로 세상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시며 이를 실현하시기 위해 '길'과 '진리'와 '생명'을 몸의 이치(生理)로 삶의 말씀과 행동으로 이를 실현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늘의 뜻(理致reason; logic)을 다했고 이로서 세상에서 하늘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삶을 말씀으로 이를 행하며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물에는 일정한 원리원칙이 있고 여기에 따르는 질서와 누구나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규범들이 있다. 여기에 그 까닭이나 이치로 뜻을 나타내려고 동양 사상에서는 리(理)를 일컬어 뜻을 알게 한다. 이를 서양 사상에서는 로고스(Logos 理性)라 하여 하늘의 이치(理致)로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로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맞고 체계가 서는 것으로 이를 알게 한다. 이 로고스를 신학적으로 풀이하면 이 로고스 이해는 우주의 법칙으로 이성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요한복음(1:1-14)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하늘에는 천리(天理)가 있고 땅에는 지리(地理) 있고, 수(數)에는 수리(數理) 있고 사물에는 사리(事理)가 있고, 약(藥)에는 약리(藥理) 있으며, 법에는 법리(法理)가 있고, 몸에는 생리(生理)가 있고, 마음에는 심리(心理)가 있고, 학문에는 학리(學理)가 있으며, 도덕에는 도리(道理)가 있다. 이렇게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로서 이치(理致)가 있다. 우리는 이 이치를 깨닫는 본성을 이성(理性)이라고 한다. 이렇게 모든 사물에는 리(理)가 있다. 사람이 삶을 영위하며 살아 가는 데는 사리(事理)가 있어 사리에 맞게 행동하고 사리에 맞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인 생활이요, 합리적 정신이요, 합리적 태도가 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서 이성과 양심을 없애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만물의 이치와 판단이 사람에게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물에는 일정한 원리원칙이 있고 불변의 질서와 법칙이 있다. 예를 들면 물이 높은 데서 아래로 흐르고 섭씨 100도가 되면 물이 끓고 0도가 되면 물이 얼어 얼음이 된다. 이는 만고불변의 이치로서 예컨대 이는 물의 불변의 속성이요 법칙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 제일주의와 권력이라는 등식관계를 절대적으로 인정되는 사회 제도 속에서 권력 남용이라는 인식의 현실에 시달려 왔다. 가치가 혼돈된 시대에 방황하는 국민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정치인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개혁의 방향은 제도 개혁도 중요하지만 정치인의 의식 개혁이 먼저 더 중요한 정치 현실임을 주지한다. 오늘의 정치의 위기는 잘못된 가치의식과 그 규범에서 유래된다고 본다. 양심의 빈곤, 윤리의 타락, 질서의 굴절이라는 정신적 질환은 '정의 보다는 불의, 신뢰 보다는 불신, 질서 보다는 무질서가 속출하는 처절한 사회현실'을 보게 한다. 삶의 자리는 반드시 정로(正路)를 걸어가야 얻어진다. 정치가 진실과 정의와 인권과 박애를 중심하지 아니하고 자기이권을 중심으로 음모를 일삼는다든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의 기회로 국민을 기만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결과는 허무와 몰락 일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자기의 양심과 신념, 신조를 속이지 않고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생활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성실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범한 아량을 보여주며 진실을 말해 주는 자세는 존경받는 생활 자세이며 영향력을 가진 몸가짐이라 할 수 있다. 인사권을 가진 사람이 무엇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합리적 판단과 소신에 따라 결정을 행하려고 하는데 이에 다른 결정을 내려 주도록 자기와 친한 동기 동창생이 혹은 친척이 혹은 고향 친지가 부탁해 오는 경우에 갈림길에 서게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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