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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순절을 맞으며
    그리스도인은 “사순절을 맞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부활절을 앞두고 자신의 신앙을 보다 깊이 생각하며 지나온 삶의 태도를 회개하는 심정으로 결단하는 신앙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신약성서에서 교회가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부활절 전까지의 6번 주일인 40일 간의 수난 기간 절기로 지키는 사순절을 알게 한다. 이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시험 받으신 일과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신 일을 기념하는데 그 의미를 가진다. 흔히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교회력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을 두는 때 이다. 신앙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이기에 사순절은 인생의 광야를 살아왔던 삶을 체험하며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 그러므로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에 자연이 자연 순환의 법칙을 따르듯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 갈 것을 생각(창3:19)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며 세례 받을 때의 그 결단을 생각하며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되찾는 사순절의 의미를 안기는 것이다. 예컨대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며 준비함을 알게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삶을 같이 하심을 알게 한다. 또한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처음 세상을 지으신 후 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하시기 위해 40일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심을 알게 한다거나 또한 에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의 민족이 노예 생활을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까지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계명을 받기 위해 40주야를 지켜야 함을 알게 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기 위하여 40일간을 밤낮으로 걸어야 함에서 ‘40’이라는 숫자'를 알게 한다. 40이라는 기간은 속죄함을 받은 은혜로 우리의 생활을 바꾸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함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회개의 속죄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준비의 마음으로 신앙해야 함을 알게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새롭게 깨닫게 한다. 이렇게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사순 시기를 이 ‘재(災)의 수요일’로 부터 시작하여 재의 수요일 후에 첫 번째 주일을 시작하여 사순6주일과 재의 수요일로 주님의 성지 주일로 지키게 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사순절을 맞아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메시지에서 나타난 삶의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예수님의 죽음의 복음은 그 사실(Fact(事實)이 무엇인지를 알게 것이다. ‘고난은 고통을 받는다는 일만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고난과 고통은 다르다.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실이 아니 된다. 사실인즉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과 복음’은 이를 위해 괴로움과 어려움을 맞는 ‘고난’을 겪은 것이다. 예수님의 길은 죄인의 고통이 아니라 삶의 의미로 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이 길은 복음과 영광을 위한 고난의 길임을 알게 한다. 이 고난은 하나님의 의를 위한 영광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고통으로 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고 고난으로 가는 영광과 복음을 위한 삶의 길이 곧 승리의 길임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 복음이 착함과 선함의 기준이 되는 복음이라는 그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재(Ash)재의 수요일은 나를 불태우고 나의 삶과 나의 정욕을 불태운다는 의미가 더 여기에 그 내용이나 깊은 뜻이 함축(含蓄)들어 있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순절은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가 생동하는 삶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한 기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사순절은 세상.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 구속성으로 삶의 진가를 보여주는 절기인 것이다. 이는 생명이 살아나는 이 “사순절을 맞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사는 방법으로 그 고난으로 의미와 생활을 신앙생활로 깊이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3-03
  • 인간으로 사람은 사랑
    인간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의 피조적 삶으로 그 유한성, 개체성, 그리고 시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을 확증하는 근거를 알게 한다. 또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태어나고 죽으며 여기에 따른 삶은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고 창세기는 증언한다. 여기에 바울은 이러한 견해를 로마서에서 말한다. 성서의 육체적 죽음은 피조적 삶에 부여된 하나님의 질서에 따른 죄이지만 여기에 따르는 인간 구성으로 3요소인 육체, 영혼, 정신으로 살아야 하기에 선함이라는 창조자의 의도적인 사랑의 의지의 결과임을 믿음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여기에 ‘선함’이라는 창조자의 의도적인 사랑의 의지가 그 결과임을 뜻한다. 성서적 인간관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의 행위나 이를 지배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인간이라는 선언, 그리고 하나님과 계약을 약속받는 당사자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응성으로 여기에 인간의 자유는 계획하고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 인격적인 성품으로 삶을 두어야 함을 성서는 알게 한다. 이를 실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의 전형으로 그려짐을 믿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에 준하는 인간의 존재 형성, 본래적인 존재에로 회복되는 인간임을 믿음으로 이를 깨닫게 한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그의 부모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알게 된 것과 같이 구원이라는 이해는 은총을 통해서 자녀로 입양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분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엡5:1-2)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실체”는 ‘사랑’임을 알게 한다. 예컨대 만물이 그 실체가 없음에도 삶에서 생명으로 보이듯이 나타난다.폴 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은 ‘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신앙은 삶의 궁극적 의미에 관한 문제로 삶에서 궁극적 관심이 경험될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 관심을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실존적인 존재 또는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의 한정된 것에만 머물러 좋은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인 데, 그것은 인간을 비존재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러면 신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폴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앙은 어떤 진리 또는 교리에 의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 인 행동 속에서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경험되고 있다. 이 궁극적인 관심이 바로 유한하고도 실존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사는가? 존재를 위해 사는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생존은 가치와 무관하고, 존재의 가치를 알면 생존에만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를 향상시키기 위해 생존은 필요하다. 그 삶에서 생명은 창조자에 의해 삶 속에서 사랑으로 삶을 유지한다. 성서는 이 가치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설파하고 있다. 결국 ‘생존’과 ‘존재’는 사람의 실존을 위한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사랑의 관계임을 알게 한다. 생명은 관계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관해 말하기 보다는 인간창조에 관해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생명은 창조의 주관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자신의 형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기로 결심하신 창조 주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다시 말하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도록 관계를 맺게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신(神)학적인 개념이다. 먼저 그것은 창조되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하여 그 다음에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정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창조자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2-23
  • 삶의 양심의 비밀
    인간의 삶에서 존재의 의미는 항상 도덕적 가치에 준한다. 인간에게 양심이 없으면 도덕가치와 삶이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삶의 조건에 양심은 필수가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아 그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삶을 주관하시며 실제로 삶을 영위(營(爲)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그 주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 주신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 삶으로 영묘한 힘을 가졌기에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한다. 사람을 영장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인간에게만 속한 말로서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인간에게만 속한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을 알게 한다. 동물은 거의 본능이라는 감정으로 삶을 영위하지만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하나님과 영통하는 힘을 알게 한다. 이를 생각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곧 사람의 생명과 그 삶에 축복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이 된다. 그러므로 수많은 동물은 있지만 그 동물에게는 혼은 있으나 영(靈)은 없다. 사람은 생명으로 영을 받아 태어나게 된다. 창조에서 모든 만물을 이루어 내는 근본체 그 몸이 한편으로 사람이며 생명으로 영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영의 존재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 했듯이 영의 한편인 인간은 생명을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과 육과 혼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위대한 생명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믿는 것은 사람은 영으로 하늘을 생각하며 영원한 삶을 살고 멸하지 않는 존재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믿음으로 받는다. 사람은 하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대신하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존재이다. 이 존재가 영의 존재를 알게 되면 사람은 욕심과 부정과 나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죄 짓는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친히 찾아 오셔서 그 삶을 친히 십자가로 보여 주심을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믿음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창세기 본문은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하신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은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이 안에 영과 몸이 합하여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 혼(魂)이 하나님의 안위하심을 받게 되어 영, 혼, 몸이 전구와 같이 빛을 내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본문은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라 함을 알게 한다. 우리가 부활한 주님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주님을 의지하고 영으로 우리 온 존재를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알려진 우리들의 삶에서 알려진 말가운데 사람의 천성은 ‘정직’이라는 말에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이라 사람의 천성은 정직한 것이니라는 말이 있다. 사람 안에는 ‘양심’이라는 매우 비밀한 존재가 있다. 이것이 인격과 같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사사건건 개입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사도 바울은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롬2:15).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비밀한 존재가 있다. 이것은 인격과 같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사사건건 개입한다. ‘양심’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얻는 말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있는 양심은 그 모양이 네모가 되 있기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모서리가 닳게 되어 결국 나중에는 옳지 않는 행동을 하여도 아무런 것도 못 느끼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스토리가 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양심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각계 각층에 널려 있어 사회의 많은 핀잔을 받고 있음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에 흐트러진 모습의 행동을 하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작태를 보면서 사람의 삶에서 그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에게는 모두 그 본성안에 양심이 있다. 사람의 삶에는 항상 양심의 소리가 있다. 이 양심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며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2-09
  • 세상살이
    한 해가 가고 또 한해가 왔다. 한 시기를 모아 세월을 보내고 새 시간에 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그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물음으로 “세상살이”를 다짐해 본다. ‘온갖 모든 삶에는 때가 있다’고 성서의 전도서에서는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고 한다. 만사가 인과(因果)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무슨 결과든지 그 원인에 정비례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나는 것이며 주는 것만큼 받고 거두는 이치가 이 세상 우주의 원칙이 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는 모든 것이 심는 것의 여하에 따라 결과를 가져 온다는 이치를 이렇게 터득하게 한다. 이러한 결과는 모든 것이 심는 것의 여하에 결과를 가져 온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한다. 이는 인과응보의 길로 교훈을 알게한다. 이를 우리가 인과응보의 원칙을 한번 실험해 본다면 사실로 맑은 거울에 대면해서 지금 내가 울고 있는 표정을 쓰면 거울에 내 모습은 울고 있는 모습으로 대면하게 된다. 반면에 웃으면서 거울에 대면하면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은 웃는 얼굴의 표정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인과응보의 교훈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두 내가 하는 것 그대로 내가 받는 것을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을 엿보게 된다. 이는 천하만사가 모두 인과의 법칙을 따라 살아간다는 도리(道理)를 알게한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을 강조 하시면서 다만 ‘사랑’만은 다른 면을 알게 한다.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믿음의 은혜를 알게 하여 사랑의 진수를 갖게 한다. 여기에 내가 조건 없이 주고 싶어 하는 하는 마음에서 믿음의 은혜에 참된 사랑이 나옴을 깨닫는다. 이는 믿음이 조건이 아닌 사랑이라는 무조건 사랑을 알게한다. 사랑은 서로가 이해해 주고 이해하여 용서하고 용서로 진정한 참 사랑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과 믿음은 조건이 없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진실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진실한 삶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파악하게 한다. 이것을 믿고 행하는 것은 사랑의 신앙이다. 그리하여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는 사람의 도덕성을 말하면서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다”고 했다. 이는 성서가 풀이한대로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다음에 참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곧 하나님의 율법에 그 말씀을 새겨두신 것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이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심을 믿게 한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으로 이를 판단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양심의 방향으로 자유를 옳게 사용할 줄을 알아야 한다. 이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다.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양심은 다 새겨져 있기에 이 행위에는 반드시 믿음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말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은 인과응보의 삶을 영위하려고 하지만 천지 창조는 이유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믿음으로 생명의 길을 가게 함을 알게한다. 이를 위해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스스로 게시며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창조함을 받아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기 위해 창조의 능력을 갖추시고 용서의 사랑을 하신다. 그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조건적인 삶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적인 삶을 통해 사랑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조건적인 삶이 아니라 서로의 용서의 삶으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는 말씀에 한해 1년 동안 삶을 사는 이 믿음은 사람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 스스로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진리를 삶에서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2-03
  • 믿음의 자리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자기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또한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자신의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람은 잠시 잠간 살다가 소유했던 것 놔두고 혈혈단신으로 삶을 하직하기 마련이다. 성서의 진리는 이 전제된 사실에서 믿음을 갖게 한다. ' 누가 나를 이 세상에 보냈을까?오늘의 사회 현상에서 삶의 자리는 착한 마음씨보다 차디찬 인정, 씩씩한 생활 보다는 눈치 빠른 언동, 실력 보다는 돈, 능력보다는 학벌과 문벌, 창의력 보다는 순종과 반응, 비판력보다는 해석력, 친구보다는 권력, 공동체의식보다는 조직, 의리보다는 실리를 우선하는 한국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물질주의 가치관이 믿음의 자리를 훼손하는 것이다. 자기 삶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단 이기주의로 사회구조 악을 만들고 허영과 인기의 상승으로 참보다는 거짓이, 내용보다는 겉이, 의미보다는 실리가 판을 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으로 올라간 후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믿음의 자리를 잃고 있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산을 내려가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이 부패하였다....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리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힘과 경제(재물)만으로 위대하게 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위대한 인간이 되었다고 성서는 약속한다. 이는 흔히 세상이 말하는 믿음과 성서가 말하는 믿음을 알게 한다.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상대방으로 인간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먼저 성서를 알고 여기에 따른 믿음이 있어야 함을 깨우친다. 예수 그리스가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친히 그 삶을 보여 주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고 믿는 영접이 있어야 하며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자긍심적 믿음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긍지를 가지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행적의 나타남을 믿고 그 분을 나의 주인으로 알고 늘 삶 속에서 나의 주인이 되는 삶으로 사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성령에 대한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삶을 영위하고 성령에 대한 믿음으로 친히 나의 삶에 오신다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약속이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보증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의 성서 속에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 구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다는 약속이시다. 신약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과 똑 같은 신격 존재이지만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심을 믿는다. 그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밖혀 죽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믿음을 가지는 신앙이 "믿음의 자리"임을 알고 믿게 한다. 곧 '믿음의 자리'는 삶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이 를 위해 성서는 사람을 만드신 분으로 창조주를 알게하기 위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사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이렇게 사람은 하늘로 부터 삶을 부여받았다. 그 삶은 살아있는 삶이다. 살아 있기에 생명의 삶이다. 참으로 그 삶은 위대하다. 이 삶으로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삶은 위대한 일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그리하여 사람은 하늘로 부터 삶을 부여 받았다. 이 삶이 오늘 '지금' 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수많은 과거를 사는 사람 중에 '지금'이라는 시간에서 자기 삶을 찾는 것은 자기를 발견하는 일로 출발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한 번의 삶으로 영원의 삶을 찾는 것이다. 이 삶은 사는 관계에서 많은 공감을 주며 그 삶의 철학은 삶을 전환시켜 참 삶을 가꾸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1-23
  •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완벽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따라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창조하신 뜻대로 역사하시기에 창조함을 받은 생명은 그 모든 삶이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개인과 국가와 일류를 통치하시며 섭리하신 “하나님의 시간”안에서 그 삶이 영위(營爲)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공익성(公益性), 독립성, 영원성, 통일성, 불변성을 알게 함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섭리하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모든 생명은 그 앞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그리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들은 과거, 현재, 미래로 크게 볼 때 동일하다. 이는 모든 생명들의 삶이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인간들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변함없으시기에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에 따라 종말을 향해서 진행하고 있음을 믿음으로 감당하며 “하나님의 시간”으로 삶을 산다. 시편 본문에서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 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는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통치하심과 섭리하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범사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끊임이 없으시기에 믿음으로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세상에 잠시 왔다가 가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에 따라 종말을 향해 진행되고 심판을 깨닫고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심판과 종말을 대비하면서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삶을 믿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본문12절의 말씀인 여기서 우리는 우선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이다. 여기에 성서가 가르쳐 준 말씀에는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예컨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또한 여기에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 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고 함에 주의를 가진다. 여기서 “때”라는 의미는 ① 시간의 어떤 점이나 부분을 말하고, ② 좋은 기회나 운수, 알맞은 시기, ③ 끼니 또는 끼니를 먹는 시간, ④ 어떤 경우, ⑤ 시대, 연대, 그 당시 등을 말하며 시간의 세 얼굴로 ‘시간’ ‘때’ ‘시제’를 말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삶에서 갖는 유일하게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정한 일정한 길이의 그 동안을 시간이라 한다. 또 철학에서 시간이해는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져 머무름이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옮아간다고 생각 되는 것, 공간과 더불어 인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을 말한다. 하루의 24분의 1을 한 시간으로 하는 ‘동안’의 단위를 알게 한다. “시간”의 개념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세상에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고대인들은 이미 시간이 상대적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시간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시간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을 표현하며 ‘카이로스’ 시간은 일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 시간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을 크로노스 시간이라 한다면 카이로스시간은 일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 시간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진다.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 시간은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주관적 시간을 말한다. 이 시간은 비록 '찰라'일지라도 구체적 사건 속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시간을 가리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의 의미로 카이로스 시간인 “하나님의 시간”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된다. 바울 사도도 여기에 그 의미를 두고 고후 6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헤어 보면서 ‘카이로스’ 시간으로 이런 삶을 고백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1-12
  • ‘처음과 나중’ 신앙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은 오로지 직선으로 전진만 할 뿐이다. 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잠시 멈추거나 잠깐 뒤로 물려주지를 않는다. 시간의 개념은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행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현대 물리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시공간 연속체라고 하는 단일한 양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한순간도 쉬지 않는 우주의 순환 운동은 작게는 초 단위부터 시작해서 분 단위, 시간 단위, 한 달, 1년, 10년, 100년.. 점점 분열하면서 영원한 시간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생명을 키워간다. 여기에 인생의 삶은 단한번의 삶을 산다. 그리하여 한 번의 삶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러므로 처음과 나중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은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힘을 다하여서 한 철(계절)과 ‘때’를 맞는다. 그러기에 만물에는 ‘철’을 따라 그 삶을 영위에 간다. 그리하여 만사에는 반드시 ‘때’가 있다. 여기서 전도서3:1-3에 보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고 하시고 그 다음 말씀 11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성서에서 보면 우주 만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준하여 만물은 시작만이 아니라 끝이며 목표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물을 보는 종말론적 주장들을 통해 우리는 만물을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스도를 곧 만물의 끝이며 목표이며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마지막 아담으로”(요한계시록1:17, 고전 15:45) 보게 된다. 이렇게 종말론적인 믿음은 미래에 대한 언급을 배제하는 실존론적인 해석과 개인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와 우주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견해와 신전통주의적 재해석 간의 문제점도 알게 한다. 예컨대 신정통주의 신학은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종말론’을 심각한 것으로 그리고 비축자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여 종말론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려하고 역사와 우주가 미래에 완성되리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여기에 실존주의적 신학의 장점은 미래에 대해 전혀 언급 하지 않음으로 이 점에서 과학적 견해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효과적인 점에서 보면 인간 양심의 측면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긴급성은 시간적인 급박성으로 표현되기도 하여 시간의 ‘카이로스’적인 단호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종말론의 근본적인 주장은 창조자이며 주님이시고 예수를 통해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드러낸 하나님의 실제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며 성취가 목표임을 알게 한다. 이것이 파루시아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게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는 삶은 인간 서로간의 의사소통, 따라서 공통적인 삶과 역사적 삶의 필수적인 기본이 됨을 알게 한다. 따라서 육체의 부활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삶이 그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생과 그 역사의 의미와 그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대결하는 자기의지로 만 삶을 살려고 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성이기도 함을 믿음으로 알게 한다. 여기에 따라서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과 용맹한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게 된다. “이사야서 9장6절”에서 보듯이 성경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다가올 메시아, 하나님에 대한 이름은 여러 개가 있다. 야훼, 임마누엘, 등등 백성들이 기다리는 그 속성을 뜻하는 이름들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은 실제 불리는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강생하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시어 성체의 모습으로 아니면 우리들 삶 가운데 늘 함께 계시는 구원자 (예수)로서 계신다. 아브라함이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예언자도 그 시대적 열망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였고 그 이름은 불리기보다 실현되었다. 예수님은 육적인 진짜 성적 교재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고 예수님은 육신을 통해 나셨으나 육신으로 난 것이 아니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1-05
  •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은 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이며 출발점과 시작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며 곧 성육신의 사건임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확신한다. 그러므로 오시는 분의 기다림에서 맞이하는 것은 삶의 역사적 사건이기에 삶의 현장에 말씀으로 영으로 새롭게 임재 하여 주실 것은 믿는 믿음은 아주 귀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주 귀한 "구주 탄생"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육신의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이루어 가시는 사건이라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오늘의 우리 삶의 현장인 비인간의 역사에 오시는 주님을 맞는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이루어 가시는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구약의 약속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그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그들을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기다림이었다. 또한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기다렸던 120명의 제자들을 통하여 오순절의 역사가 나타나고 교회가 태어났음을 우리는 믿고 있다. 성서에서 믿음에 대하여 잘 표현한 말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란 인간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6:1)로서 그 기다림의 약속이 서로 소통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구주가 세상에 오심의 구주탄생일이 대림절을 지나 곧 탄생의 날을 맞게 된다. 그는 누구신가? 나와 약속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 절기이다. 우리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씨앗이 싹을 내고 성장하고 때를 따라 열매를 내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열매를 거둘 때까지 기다린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분의 현존을 실감하며 그의 품에 안겨 그 사랑에 한없이 감격스러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다림의 그리움으로 나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부디 바라는 마음으로 마라나타(Maran atha, 아람어 maravna qa)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두 가지 의미로 현재적인 외침으로 '주님이 오신다'는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로 '어서 오십시오'로 그 의미를 가지고 초대 교회의 인사말을 따라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마라나타 주 !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기다림의 간절한 간구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물 속에 투영시키고 생명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하신다. 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면 생명은 모채를 통해 잉태하고 낳는 과정이 사랑으로 이어지며 생명의 기능을 알게 한다. 이렇게 땅은 생명의 생성과정에서 하늘의 창조질서를 따라 생명을 지속하고 유지한다.성서의 창조론에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영적 존재로 부터 찾고자 할 때 인간의 신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이버 문화에서 인간의 신체성이 단지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온전한 실재 경험을 위한 필수사항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일로 신학적으로 여기에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학에서는 이미 가현설적 예수 이해의 오류와 기만을 파악하고 예수의 신체성을 강조해 오고 있다. 여기에 예수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 나셨고 몸의 아픔을 경험했고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 그리고 다시 몸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도의 부활도 역시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 상에 존재하는 진리 가운데 만고불변의 법칙은 "생명만이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작용이 가능하다는 것과 생명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 하신 중에 중요한 것은 창조 안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었고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생명의 경외(敬畏)가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원래 선했으나 인간들이 그 위에 군림하고 억압하는 타락과 그 죄과로 심판을 받는 점을 알게 한다. 여기에 인간은 모든 생명관계 안에 일하고 섬기며 책임지는 청지기적 존재로서 삶을 영위하며 서로 존중하는 상호적인 관계를 갖게 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2-22
  • 만사에는 하늘의 때가 있다 2
    삶으로 쌓여진 흘러가 버린 시간들 속에 있었던 인류, 사회, 문화 등의 일들을 ‘히스토리에(Historie)’라 한다. 그런데 ‘히스토리에’는 물처럼 흘러가 버린 지나간 시간들 속에 있었던 일들로 역사(歷史)이고, 또 대부분 ‘나’ 와는 시간적으로 ‘나’ 공간적으로 상관없이 발생된 것들이기 때문에 실존적으로 ‘나’와 특별한 상관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오래 전에 있었던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 사건이 의미 있는 시간 속에서 특별한 뜻을 가지고 일어난 일이라면 또 그 사건의 의미가 올바로 풀이되어 전해졌다면, 그 사건은 나와 특별한 상관관계를 갖게 된다. 또 그 사건은 나의 시간 곧 '나'와 관련된 시간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성서는 대부분 신앙인들의 삶의 역사이다. 픽션(fiction)이나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기록된 진솔한 역사이다. 고난과 역경과 시련 속에서 살아간 수난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희망의 역사이다. 꿈의 역사이다. 그들이 그 엄청난 시련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변함없는 양심과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꿈과 양심이 있는 자만이 역사를 의미 있게 만들 수 있고, 더구나 신앙인에게는 “구원의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며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시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흘러가는 시간도 있고, 그리고 의미 있는 시간이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헬라어로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한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인 시간을 말한다. 그래서 연대기를 말할 때 영어로 ‘크라너클’(chronicle) 또는 ‘크러날러지’(chronology)라고 한다. 이는 천문학적으로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이며,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하면서 결정되는 시간이다. 매일 한 번씩 어김없이 낮과 밤이 찾아오고, 매년 한 번씩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동식물이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시간이다. 철새들이 철 따라 이동하고,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와 알을 낳고 죽어 가는 시간이다. 이 속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이 웃고 울며, 분내고 기뻐하며, 번민하고 수고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여기에 시간의 의미를 살리는 ‘카이로스’는 특정한 시간 또는 정한 시간을 알아야 한다. 시간은 비록 흘러가는 것이지만,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에 이 의미 있는 이 시간을 ‘카이로스’라 부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어떤 일이 수행되기 위한 시간 또는 특정한 시간을 가리킨다. 계획이 세워지고 그 계획이 실행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특히 하나님의 활동이 전개되고 그 분의 계획이 실현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시간을 '구원의 시간(카이로스)이라 한다. 역사(History)에도 두 가지가 있다. 조사나 탐구에 의한 순수 “역사”가 있고, 해석이나 뜻으로 본 풀이한 “역사”가 있다. 순수역사를 독일어로 ‘히스토리에’(Historie)라 하고, 풀이역사를 ‘게쉬크테’(Geschichte)라 한다. 역사는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에 속한다. 흘러간 시간 속에서 발생했던 일들을 한 곳에 모아 적으면 역사가 된다. 개인의 역사를 모아 적으면 전기나 자서전이 되고, 신앙체험을 모아 적으면 간증집이 된다. 간증집은 ‘게쉬크테’로, 전기는 ‘히스토리에’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전기라고 해서 반드시 ‘히스토리에’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신약의 4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적은 글이지만 ‘히스토리에’이기보다는 ‘게쉬크테’이다. 그래서 4복음서를 ‘예수의 생애’라 하지 않고 ‘복음서’라는 이유를 알게 한다. 이는 복음서의 기록 목적이 단순히 예수가 역사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서를 읽는 이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려 했기 때문에 복음서라 한다. 그리하여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보다는 천국복음을 전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를 조사 탐구해서 있는 그대로 적은 글이라면 ‘히스토리에’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의 대부분을 생략한 채 죽기 전 일 년 또는 삼 년 동안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말씀들과 베푸셨던 행적들 가운데서 일부만 골라서 전하고 있고, 그렇게 한 가장 큰 목적이 그것을 읽고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려 함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2-15
  • 만사에는 하늘의 때가 있다 1
    성서의 전도서에 보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하심은 준엄하게 몸 사리는 때의 삶을 살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몸를 사려서 생각을 제대로 하고 시간을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진리는 영원하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데는 삶에 사실(fact)이 있고 또한 사실(事實)이 있는 곳에 헛되지 아니한 진실(眞實)이 있다. 이는 세상의 삶에서 나타나는 시간 속에서 삶에 도리나 이치에서 사실과 진실이 밝혀짐을 보게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때’를 알지 못하면 진실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안다. 진실은 지혜를 수용하고 사실은 지식을 수용한다. 지혜와 지식은 성(性)은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 이것은 지혜와 지식의 차이이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움으로 틀에 박히지만 지혜(슬기)는 ‘하늘의 때’를 따라 나타낸다. 사람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지식 있는 삶 보다는 지혜로운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도 많이 사용할 줄 알지만 지식은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지혜가 없으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식의 문을 여는 것도 지혜이며 지식의 문을 닫는 것도 지혜인 것을 알아야 한다. 지혜 없는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이요 시체이다. 어떤 일이 자신 앞에 벌어졌을 때 우리는 먼저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감정을 유발시키고 그 감정에 의해서 행동하게 된다. 이미 행동이 진행되었을 때는 우리의 머릿속엔 진실을 판단할만한 시간이 없다. 행동은 결론을 내리고 사실을 진실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와 정황 논리를 만들게 한다. 그러기에 여기서 사실과 진실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사실 앞에서 진실을 볼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진실을 보았을 때 사실 속에서 진실을 볼 수 있는 양심을 가진 자만이 진리를 말할 수 있다. 사실과 진실은 ‘하늘의 때’ 안에 있다. 오늘의 주제는 “만사에는 하늘의 때가 있다”를 증언하려 한다. 그래서 민심은 천심이다. 지금 우리는 “사실과 진실의 혼란”에 빠져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의 국정농간에 휘둘려 국민들 모두가 ‘대통령 하야’를 위해 부르짖고 있다. 참담한 현실에 국민들은 온통 촛불 시위로 이를 항의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정황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차제에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을 생각해 본다. 사실은 실제로 있거나 실제로 있었던 일을 말한다. 진실은 거짓이 없고 바르고 참 됨을 말한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점은 시간의 흐름 위의 어느 한 순간인 시점의 유무(有無)인 것이다. 여기에 시간이란 삶을 동반한 그 행적은 사실과 진실을 안고 있는 시간의 껍질을 알게 한다. 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실로 진실이 아닐 때도 많다.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사실은 실제와 꼭 같이 여실(如實)하게 드러남을 보게 한다. 사람과 인간은 다르다. 사람은 개체적 의미를 알게 하고 인간은 통전적인 의미를 알게 한다. ‘사람’을 일컬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은 태어난 것을 말하고 그 사람은 생각과 말을 하고 기구를 만들어 쓰며 사회를 이루어 사는 삶을 인간이라 말한다. 흔히 “이 사람아! 인간이 되어라”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인간이 갖는 이성은 주변과의 관계로서 삶을 생명으로 함께 영위함에 있기에 양심으로 나타난다. 생각해 보면 한국사회는 그 동안 근대화, 산업화로 추진 과정의 부작용으로 인해 사회전반에 걸쳐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모든 갈등과 모순 등이 표출되고 있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해결해야 할 정치권과 사회지도층은 오히려 스스로의 비리와 부도덕성으로 인해 국민의 불신만을 사고 있어 사회전체가 정체상태에 빠져 있다. 이러한 사회문제로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의 시장경제체제라는 자본주의에 기인하여, 부를 축적하게 된 사회는 배금주의에 빠지게 되고 도덕적 가치가 삶의 목표를 잃고 오직 부와 명예만을 추구하는 등의 목적을 위한 전치(前置)현상이 우리 사회에 나타남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일탈현상을 겪게 된다. 이것은 인지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의적인 가치적 문제로 번져 서로의 양극적인 대립현상이 나타나 갈등으로 혼란을 이루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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