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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서로 가꾸는 삶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관계가 있다. 하나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이다. 수직적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상사와 부하 등을 말 한다. 여기에 수직적 관계로 말하면 감사와 존경을 의미 한다. 수평적 관계는 친구나 동료로 여겨 이웃 간에 화목하고 갈등이 없는 관계를 알게 한다. 수직관계는 영광이라는 감사와 존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평관계는 화목으로 용서가 필요하다. 서로가 용서하는 마음으로 삶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삶에 평안을 얻어 삶이 활성화 한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전반적 형편을 살펴보면 내일을 위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나와 다른 관계와 관계를 맺으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용서하며 사는 삶의 사회를 염원하게 된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관용은 그 의미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수용하는 용서의 아량으로 너그럽게 이해함에 있기에 서로의 사이의 관계에서 사람에게 마음이 등장하고 시대가 바뀌는 문명의 교차점에서는 필히 ‘용서하는 마음’이 삶의 태도로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게 한다. 예컨대 서로의 관계에 용서 없는 획일주의 문화는 배타의 거부와 수직적인 관계를 이루며 부정의 참신한 수용의 문화를 잃게 된다. 다양성과 자유가 통제된 사회는 다양성을 죽이고 창조성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옴으로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려면 이념의 자기주장과 생각과 견해가 동일한 사람들끼리 대화를 통하여 절대 선이나 진리의 독점을 권장해서는 아니 된다. 여기에 삶의 이치로 알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삶에 절실하게 알게 하는 것은 삶에 수직적인 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인 진리를 알게 한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교가 앞세운 십자가의 의미는 수직과 수평의 관계로 하늘의 마음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개선에서 그 의미를 새긴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관계는 수직적인 강요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필히 알게 하는 것은 민주국가와 민주사회발전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의지가 용서하며 수용하는 용서의 이해에 능력에 달려 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 아들이 친히 내려 오셔서 그 마음을 열어 삶으로 친히 보여 주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익히게 된다. 그러므로 국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 삶을 익혀가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국민이 주인 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의 중심적인 피조물의 공동체임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는 새로 거듭 난 새로운 인간의 삶의 형성을 요구하기에 삶의 정항을 이룬 그 자리가 중요함을 알게 한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보이셨던 종 됨, 자기의 비움, 봉사와 섬김을 삶에 사랑하는 마음의 가치로 삼는 인간성의 삶의 자리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삶의 자리는 온 우주 세계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의 자리로서 그 자리에 사는 인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지금에 와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창조 우주세계를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보게 하는 통찰력으로 그 신앙을 갖게 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는 신앙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깨닫게 하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제는 ‘시간과 공간 속에 사는 삶’으로서 우리는 우주와 만물을 단순히 물질의 세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보살펴서 함께 살아가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가치를 구원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심의 하늘의 뜻을 알게 한다. 이는 곧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를 “하나님의 시간에 붙들린 삶”이라 한다. 하나님은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피조물에 밀접하게 관계하고 계심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우주전체와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지음을 받은 몫이 있는 삶의 피조물임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 삶으로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에 붙들린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깨달아야 한다. 이는 곧 인간이 모두 영원한 시간 안에 생명의 삶을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한 시간 안에 잠입해 있는 시간과 역사에서 삶을 사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1-3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91
    한때 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금기시된 적이 있었다. 위정자는 성을 매춘이나 병과 연관지어 그것이 군중들로부터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도록 하였다. 특히 귀족들 사이에 스캔들이 생기는 것은 위정자로서는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정자는 궁중들로부터 사회가 안정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스캔들은 사회가 불안하다는 소문이 퍼지게 하여 위정자의 지위를 흔들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위정자는 성을 아예 금기시함으로써 귀족들의 스캔들에 관한 소문을 막았다. 심리학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어린 아이가 처음 세상에 나와서 본 여성이 엄마이다. 그래서 엄마를 매우 좋아하며 잘 따른다. 나아가 “나, 커서 엄마하고 살 거야.”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그러나 여덟 살 이후가 되면 엄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엄마와 더 가깝고 건장한 아빠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엄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효도로 승화하게 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이가 성년이 되어 상대를 고를 때 엄마를 닮은 여성을 아내로 선택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신혼 부부 집에 가 보면 부부가 서로 닮아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아들이 엄마를 닮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내가 시어머니를 닮았으므로 얼굴이 비슷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서로 닮은 여자끼리 한 남자를 두고 더 사랑받으려고 하다 보니까 고부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아는 여류 시인 H는 신혼 시절에 거의 평생을 과부로 산 시어머니가 부부 방에 와서 같이 잤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배필을 정하여 주셨다는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저희 부부도 결혼 후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세월이 흐르고나서 생각해 보아도 주님이 어쩜 이리도 섬세하게 배필을 정하여 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를 보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기> 12:10). <창세기> 38장에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나온다. 다말은 윤리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한 여자이다. 그녀는 유다의 며느리로 들어가 첫 번째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리하여 유대 민족의 관례에 따라 남편의 동생과 결혼하였으나, 그도 역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있었으나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하였다(<창세기> 38:11). 그리하여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에게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으나, 셀라는 장성하여도 결혼시키지 않았다(<창세기> 38:11). 그러자 다말은 창녀 복장으로 변장하고, 유다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간 곳(딤나)의 길목에 있다가 그와 관계를 맺어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이는 역사상 윤리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다말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를 정도로 귀한 사람이 되었다. 성경 기록자는 세상 윤리로 보면 문제가 있는 다말을 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렸을까? 그것은 죄인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성 문제는 소돔과 고모라성 사람들의 문란함은 말할 것도 없고, 초기 기독 교회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 문제를 바울은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자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얼마든지 성적 욕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곡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6-28)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므로, 신자가 구할 것은 성령이 우리 마음을 인도하셔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이기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적 욕망과 유혹으로 인하여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유혹이 신자의 믿음을 시험하고,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구할 것은 무엇보다 기도이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우리 마음을 주관하시도록 하면 유혹이 물러가고 성적 욕망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적 욕망을 개인의 의지로 다스리기보다는 성령이 욕망을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많은 선남선녀들이 직업상이나 지인 관계로 만난다. 이때 구할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11-30
  • 목회는 쉬운 것이다·78
    ◦아브라함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듣고 그 음성은 늘 그의 앞길을 인도했습니다.◦엘리야는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을 내렸습니다.◦다니엘은 기도하여 사자 굴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바울이 기도하였을 때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루터가 기도했을 때 로마의 문들이 요동했습니다.◦존 낙스가 기도했을 때 영국 메리 여왕이 떨었습니다.◦존 웨슬레가 기도했을 때 부흥운동이 영국을 구출했습니다.◦물러의 기도로 고아원이 세워졌습니다.이들의 기도의 공통점은 나타난 현상을 갈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이분들의 기도는 무엇일까요? 그 공통점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계획이었습니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것입니다.우리는 중보기도, 목적기도란 말을 버릇처럼 사용합니다. 심지어 대학입시를 위한 기도, 그리고 제목 있는 기도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중보기도는 로마천주교 사제가 사용하던 죽은 사람까지 기도하여 낙원으로 끌어올린다는데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덧붙은 기도의 가지 때문에 신자들은 무속적 이방 교회신자로 만드는 철야기도라는 어처구니없는 용어도 출처를 모르면서 신자를 들볶는 도구로 제사장 된 목사의 분주함이 되었습니다.우리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오직 성경은 바른 신앙이요, 오직 그리스도는 바른 신학이요, 오직 믿음으로 영적 운동이요,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임과 오직 영광으로 기도운동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이와 같은 5대 표제가 이루어지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성령운동이요, 나눔운동입니다. 남은 두 가지의 역사는 사람들의 방향과 제사나 준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건입니다.성령운동은 증인의 반응입니다.분명한 것은 인간 삶의 윤리적 도덕적 공동체의 삶의 방법으로 나눔이 아니라 그리고 부흥사가 부흥사로서 주 무기가 성령운동으로 인간의 신비적 역사를 실감 나게 하는 이단적 언어나 행동이 무속적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무당 넋풀이가 된 배뱅이굿의 모양으로 전락하고 있는 세상이란 틀 속에 예수쟁이들이 한 몫을 담당하는 모방에 능숙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예수님이 약속하신 삶이 보혜사 성령이 오신 사실의 현장에서 우리의 자의적 행동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성령운동과 나눔운동은 우리가 설명할 이야기가 아닙니다왜냐하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3장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예수님의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역사가 실제가 된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7절까지에 오순절 날의 역사에 대한 사건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성경에만 194번이나 기록되었다고 합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1-29
  • 평화! 새로운 시작
    남북분단은 현대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 최대 강대국들의 군사적 이념적 대결의 상호분쟁 속에서 우리 민족은 속죄양의 고난을 당하여 왔다. 민족의 분단이 가져 온 결과는 지금까지 장기화 되면서 남과 북은 안보와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인권은 유린되고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억압되어 왔다. 우리민족이 갈라서서 있는 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서로 비방하여 싸우며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죄인으로 서 있음을 알게 한다. 믿음은 장래 결과를 미리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서로의 마음에 약속들을 새겨 믿음을 낳으시고 다양한 일들을 일으켜 믿음을 도우신다. 여기까지 오게 하는 것은 기다림이다. 이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다리며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돕고 성취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기다림’만이 우리의 몫이다. 기다림이 없이는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기다려야 할 일들을 보아야 한다. 이는 “평화를 기다리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 인내, 기다림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기다림은 정지해 있는 시간도 낭비하는 시간도 아닌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시간임을 알아야 한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자는 어떤 핍박도 환난과 고난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자신에 의한 자각, 또는 집단에 의한 인식(민족의식)을 계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외부와의 몇 가지 연관관계를 통하여 민족 자신이 자기의 존재(또는 특수성)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족의식을 각성하게 될 때 가능해진다. 민족의 경계설정에 사용되는 지표는 사회생활 전반에 걸치는 것도 있고 사회생활의 특정 분야에 한정되는 것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의복, 언어, 가옥형태, 일반적 생활양식 등의 명시적인 것도 있고 추상적으로는 가치관·윤리관·행위기준 등 문화내용적인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민족 범주와의 사이에서 인원의 개별적인 이동·접촉·혼인·동화 등의 현상이 생겨 민족성의 지표가 되는 문화특징 자체가 변용된다는 것이다. 민족 범주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구성원과 비구성원 사이의 이분화 작용이 계속되는 것이다. 평화는 상대 개념으로 쓰이는 전쟁의 목적, 원인, 방법 등의 변화와 더불어 평화의 개념도 달라진다. 평화를 뜻하는 말로 유대교의 샬롬(salom), 그리스의 에이레네(eirene), 로마의 팍스(pax), 중국의 화평. 인도의 샹티(santi), 각각 정의, 질서, 친화와 평온, 편안한 마음을 평화의 주요소로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서양 문명권에서는 평화가 정의의 실현.(평화를 위한 전쟁),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질서유지(pax Romana)라는 정치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힌두교 영향권에 있던 인도에서는 마음의 평안함을 목표로 하는 내향적, 비정치적인 태도로 평화를 추구한다. 이는 경제가 공유되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고 범죄가 없는 사회라는 그러한 정의로만 알고 이해하고 있기에 전체의 의미를 알아 평화의 개념을 사회 정의에서 찾는 점을 감안하여 이를 실행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우리 민족이 과거 6·25전쟁을 생각해 본다. 이는 같은 민족끼리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 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오늘에 와서야 그 평화가 열리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1-16
  • 기독교인의 행복론 -90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주님이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들어 “화살통에 감추”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유신 체제하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하며 살아온 때가 그러하다. 유신 체제하에서 박정희 정부는 국가 위기 상황이란 명분으로1974년부터 1979년까지 9차례에 걸쳐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국민의 인권을 제한하고, 유신 반대운동을 탄압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남베트남이 공산화되자 국민의 안보 불안을 이용하여 반공 분위기를 강화하는 한편, 반유신 운동 세력을 탄압하고자 긴급 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긴급 조치 9호는 유신 헌법을 반대하거나 부정하고,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거나 이를 보도하면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민간인도 비상 군법 회의에서 처벌하도록 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심하게 제약하였다.1978년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 공화당보다 높은 득표율을 획득하고,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면서 정권의 위기가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박정희 정부는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야당과 크게 대립하였고,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였다.1979년 10월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격렬한 반독재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부·마 민주화 운동). 박정희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정권 내부에서 대립이 발생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됨으로써 유신 체제도 막을 내렸다(10·26 사태).유신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탄압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전경들이 여성들의 핸드백을 조사하는가 하면(거부하면 경찰서로 데려감), 학생들의 지갑을 검사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봉사 활동을 위하여 운영하려던 ‘1일 찻집’을 불허하였다. 여기서 오는 답답함을 학생들은 청바지와 통기타와 장발 등으로 표현된 낭만을 추구하려 하였지만, 이 또한 장발 단속 등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유신 철폐”를 주장하며 꾸준히 데모를 하여 유신 체제의 불합리함을 알렸다. 나도 이러한 데모에 몇 번 참여하여 위기를 맞은 적이 없지 않았다. 그 날 나는 사범대 강의실에서 <국어학> 강의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근데 그곳에 총학생회 간부가 운동장에 모여 데모에 참여해 달라는 전갈을 해 왔다. 나를 비롯한 과 동기들은 잠깐 고민을 하였다. 그동안 몇 차례 데모로 인하여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것이 매 년 반복되던 터였다. “이러다가 또 휴교령이 내려지는 거 아니여?”충청도 출신의 창수형이 근심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과 학생들은 벌써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근데 너무 일직 나섰는지 운동장에 나가자 제일 앞줄에 서게 되었다. 학생회 훈련부장이 4열 종대로 맞추어 달라고 해서 서로 어깨 동무를 하고 운동장을 돌다가 시계탑 앞에 서서 “유신 철폐” 구호를 외치는데, 갑자기 완장을 두른 신문 기자들이 나타나 손을 더 크게 들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손을 높이 들고 구호를 외쳤는데, 그게 그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후에 아는 교수로부터 학교 근처의 고층 빌딩에서 기관원이 우리들을 찍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데모가 끝난 지 며칠 안 되어서 사범대학 현관 게시판에 대문짝만한 공고문이 붙었는데, 그 날 데모대 옆에서 주전자에 담긴 물을 나누어 준 P 여학생은 자퇴, 데모대를 이끌었던 학생회 간부는 휴학 처리 되어 군대에 징집되어 갔다는 사실이 나붙었다. 그것은 더 이상 데모를 하면 우리도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압박이기도 하였다. 학과 교수들도 데모 광경을 찍은 동영상을 보이며, 우리 과 학생들도 경찰의 견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그래도 데모는 계속 되었고, 그로 인한 휴교령으로 대학 4년간 강의를 들은 날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한 데모의 힘이었는지 졸업 후 직장에 다닐 때에 10.26 사건이 일어나 유신 체제는 종식되었지만, 또다른 군부 세력이 나타나 민주화 투쟁은 후배들에 의해서 지속되었다. 오늘날의 민주화가 되기까지에는 학창 시절의 투쟁이 한 몫 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 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나는 요즘 오로지 집필 생활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는 내가 청년 시절부터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리고 집필을 통해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주님이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들어 “그의 화살통에 감추”어 오셨다는 사실로 느껴질 때가 많이 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11-16
  • 목회는 쉬운 것이다·77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요(요 14:1), 그리스도요(요 20:31), 하나님의 약속이요(롬 4:21), 복음(막 1:15)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영적 삶인 이유는, 죄 사함을 받고(행 10:43), 의로움이요(행 13:39), 구원이요(막 16:16), 심판의 면제요(요 3:18), 영생이요(요 3:15~16), 하나님의 자녀요(요 1:12), 하나님께 보호받음이요(요 16:26~29), 화평(롬 5:1)입니다.믿음이 곧 영성입니다. 믿는 자는 표적이요(막 16:17), 말과 행실, 사랑과 정절의 기본이요(딤전 4:12), 능치 못할 일이 없고(막 9:23), 영생을 얻고(요 3:15~16), 구원 받고(롬 1:16, 고전 1:21), 심판을 보지 못한다(요 3:18).예수를 믿는 삶이 영적 삶입니다. 영성 삶이란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리고 어떤 사건 속에서도 예수와 함께라는 사실을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가장 쉬운 본질을 버리고 이웃에게 눈독을 들여 유명한 학자가 무엇이라 했느냐는 말 모음에 열중하여 공통적인 결론을 가지고 자기주장이라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학문이기에 분명히 신학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십니다.◦인간의 타락 : 마귀의 유혹받음(창 3:1~5) ,여자가 미혹(고후 11:3), 아담의 불순종(롬 5:12~19).◦인간의 육적 타락 : 에덴에서 추방(창 3:24), 노동의 저주(창 3:16~19), 사망과 저주(고전 15:22).◦타락한 인간의 영적 결과 : 전적으로 타락(딛 1:15), 영적 눈이 어두움(엡 4:18), 범죄로 죽음(골 2:13), 죄 중의 잉태(시 51:5, 요 3:6), 마음이 약함(마 15:19, 롬 3:12~16), 죄와 마귀의 종노릇(롬 6:17~19). 인생은 자체가 나그네의 길(창 47:9), 마른 풀(벧전 1:24), 그림자(전 6:12), 안개(약 7:6), 베틀의 북과 같음(욥 7:6), 안개(약 4:14), 쇠해지는 꽃(욥 14:2), 잠깐 자는 것 같음(시 90:5).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하셨습니다.◦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창 1:27).◦인생의 짧음을 깨달음으로 지혜를 얻게 되었음(시 90:9~10)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본분임(전 12:1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됨(사 43:7).◦흙으로 빚음(창 2:7).◦정직하게 지으심(전 7:29).◦지성을 부여받았음(창 2:19~20, 욥 32:8).◦통치권을 부여받음(창 1:26, 창 1:28).◦동물보다 우월함(마 6:26, 마 10:31).◦영혼이 있음(창 2:7).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알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가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불법적 생각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대로 사는 사람들의 정반대적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사회구조나 세상의 흔들림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어떤 실수나 부족함이나 바보 같은 사람으로 지적을 받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존재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다윗이 어떤 형태이든 참회하며 반복된 회개 속에서 사는 이유는 자기의 허점을 아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기도운동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우리의 기도에 대한 정의가 한국적 무속종교에서 출발한 기복을 위한 금욕적 염불이나 극단적 삶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육체적 노동으로 하나님을 개체개념의 대상 곧 섬기는 대상, 나의 공력을 드려야 하는 대상으로 하는 이방 종교적 기도인 것입니다. 한갓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땀과 피를 흘리는 극단적 간절함에 대한 예수님 기도를 모방하려는 예수님과 같아지려는 뱀이 내어놓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에서의 출발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객관적인 신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멀리 떨어진 예수에게 다가가는 행위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구약에서는 제물로 신과 교통과 소통함이라면 신약에 와서는 금욕적인 인간의 끊임없는 몸부림이 결국 기도 응답의 목적인 자기욕구에 대한 갈증을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께 고하고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을 간구하여 죄를 자복하며 그의 자비하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이야기요, 영적 호흡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1-16
  • 구원의 감사
    사람은 일생 두 번 태어난다고 한다. 한 번은 사람으로 태어나 존재하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인간으로 태어난 삶으로 사람답게 생각하고 보람 있게 하고 참된 삶을 살기 위한 길을 찾아 사랑과 믿음으로 거듭남을 알게 한다. 인간은 높은 존엄과 품위를 간직하고 자아실현을 위하여 삶의 길을 가는 인간으로 그 삶을 알게 한다.또한 여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삶은 “구원의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익을 필요로 하며 살아간다. 이는 인간 본능에 의한 사람의 행동이다. 무엇이든지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된 사랑만은 언제 까지나 마음속에 오래 오래 깊이 간직되어 있다. 이 간직된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원에 감사”에 오래오래 간직되어야 한다. 모든 삶의 생활은 하느님에게서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하느님의 생명의 은인이기에 모든 생명들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삶을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이 간직된 사랑이 살아나는 것으로 필히 감사를 알게 한다. 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원본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감사는 삶의 희망이요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후손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유전되어 태어났기에 맑고 깨끗하고 순수하기에 배려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봉사와 희생을 자처(自處)하는 감사의 자초지종인 사랑받고 태어남을 믿고 알게 한다. 사랑의 마음은 곧 감사이다. 여기서 이를 “구원의 감사”로 ‘하느님 마음’ 을 알고자 한다. 이는 사랑 실현에 감사를 잘 살펴서 간직 하는 것으로 삶을 잘 챙기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하느님으로 부터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가 이를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곧 세상사는 삶의 이치이다. 즉 이는 하느님의 신묘막측한 구원의 계획과 창조는 창조질서를 행하여 생명은 서서히 사랑으로 감사 하고 살아야 한다. 이를 알고 감사하면 세상에서 삶은 불평이나 불만은 없어 질 것이다. 변하지 아니하는 세상살이에 이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날마다 새로운 감사를 알게 된다. 이 감사는 세상의 한낱 괴로움을 이기고 인내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이 세상에서의 감사의 조건들은 변할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 이 “구원의 감사”는 믿는 자 누구에게든지 공평한 것이며 살아가는 날 동안 드려도 한없이 부족한 은혜로운 감격이다.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는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한다. 이것은 진리로서 자연의 길이요 질서이요 생명이 된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터득하려면 먼저 심어야 나중에 거두게 하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보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감사함을 알게 한다. 그리고 씨를 뿌리기 전에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하기에 씨를 뿌리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감사의 씨를 뿌려 거두려면 반드시 때가 지나야 거둘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하지만 어떤 씨앗도 뿌린 후 곧 바로 거둘 수 없다는 것도 알게 한다. 또한 뿌린 씨가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알 것이며 모든 일에 이익을 얻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얻지 못해도 결국 뿌리는 것 보다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알게 한다. 농사의 법칙은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난다는 것이다. 종자대로 심으면 종자대로 난다. 소가 돼지를 낳을 수 없듯이 결국 소는 소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는다는 이치를 보고 심고 거둠의 여기서 심는 자는 반드시 종자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도 주의하여 본다. 이렇게 세상만사의 이치가 ‘심는 대로 거둔다’ 사실이 진리인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종을 치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구원의 감사”를 잘 챙기어 간수하는 비법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 으로 삶을 거두어 심는 것만큼 이루어 거두게 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감사로 하늘의 씨(복음)를 받는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잘 가꾸는 심는 자가 되어 하느님께 감사를 잘 챙기어 간직함으로 “구원의 감사”로 한 삶을 꾸려 나갑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1-08
  • 인터뷰/ 신사참배 회개대성회 반대성명서 낸 최흥호 목사(고신)
    한국교회는 현재의 우상 ‘단군상’ 척결운동에 힘 모아야 지난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신사참배 80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일천만기도대성회’가 열렸다. 3만 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인 이날 회개 기도는 뜨거웠으나, 이 기도회의 근본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교계인사들도 있었다. 그 중에 신사참배 80년 회개 기도대성회를 오히려 “회개하고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최흥호 목사를 만났다.△최 목사님은 왜 신사참배 80년 회개 기도를 반대하는가?△최흥호 목사: 첫째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교회가 국가위기를 바르게 보는 눈을 가지고 교회와 사회를 바로 이끌고 가야 하는데 이 위중한 시기에 국가위기를 위해 기도하기는커녕, 이미 역사가 되고만 신사참배 회개 기도를 또 다시 하는 것은 ‘물타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신앙의 선진들은 일사각오 신앙으로 그 서슬퍼런 일제와 싸웠다. 그런데 그 신앙정신을 이어 받으려고는 하지 않고, 같은 사안을 두고 두번 세번 회개 기도만 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뭐있나. 둘째는 이번 신사참배 회개기도을 추진한 인사들이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제의 악랄한 박해를 규탄하지 않고,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신앙을 지켜온 귀한 종들의 일을 외면하고, 한국교회를 싸잡아 “신사참배한 죄인이다”라는 주장은 용인하지 못한다.△신사참배 회개 기도를 ‘또 다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는데,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언제했는가.△최: 비록 강요에 위해 저지른 짓이라 할지라도 신사참배는 용납할 수 없는 우상숭배의 범죄이다. 공교회가 저지른 이 범죄에 대해 수 차례 회개 기도가 있었다. 1948년 남부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 결의를 무효화 하고, 1954년 제39회 총회는 전 총대들이 회개 기도를 했으며, 2008년 제주컨벤션센터에서 모인 예장 합동, 통합, 합신, 기장 연합총회에서는 대대적 회개 기도회를 하였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회개기도는 속죄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거듭된 회개를 한다면 이는 오히려 신앙의 선진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앞으로 90년, 100년에도 또 회개 기도를 계속 할 것인가.△기독교 신앙은 ‘회개’가 전제된다. 회개는 할 수록 좋은 것 아닌가.△최: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할 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진 것에 대해 자각이 없다. 한국교회는 역사의 우상보다 오늘의 우상과 싸워야 한다.△오늘의 우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최: 지금 전국의 학교, 공원, 공공장소 등지에 세워진 단군상이 360개가 넘는다. 한국교회는 이 단군상을 20년동안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교회가 힘을 모았으면 벌써 해결될 문제였는데, 이 ‘보이는 우상’과 또 ‘보이지 않는 우상’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우상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최: 보이지 않는 우상은 기복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이다. 한국교회는 이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교계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우상에 얽혀있으면서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회개하자’고만 한다. 회개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여야 하는데, 회개의 의미를 모른채 회개만 주장한다. 회개는 죄를 향해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다. 자신은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회개만능’만 부르짖는다.△최 목사님은 단군상과 싸우면서 감방도 가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나.△최: 지금이 한국교회에서 우상 척결운동이 필요한 때이다.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우상과 싸워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에 대해 교회가 기도하고 협력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단과의 싸움에 너무 매몰되어 더 중요한 우상과의 싸움은 외면되고 있다. 이 일이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다. 이단으로 인해 나라가 망한 일은 없어도, 우상으로 인해 나라가 망한 예는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지금 우리 앞에 있는 38선도 한국교회가 신사에 90도로 허리 꺾어 절한 범죄에 대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최: 한국장로교회가 공교회적으로 신사참배 결의를 한 것은 1938년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천조대신의 화신인 현인신(現人神) 소화 천황의 나이는 38세였고, 그 우상 앞에 허리를 90도로 꺾어 절한 결과 한반도의 허리인 38선이 생겼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 38선은 한국교회가 우상과 싸워 이기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터뷰/ 강춘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11-08
  • 인터뷰/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 제39회 신임 대표회장 박 서 원 정교
    평신도 정체성 확립, 동성애 반대, 나라 위한 기도 운동 등 추진 계획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평단협)는 지난 10월 25일 제39회 정기총회를 열고 신임 대표회장에 박서원 정교(77세, 구세군 강동교회 원로)를 선출했다. 구세군의 '정교'는 장로교의 '장로'에 해당하는 평신도 대표이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평단협의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서원 정교의 새로운 각오와 소신, 계획을 들어 보았다. -정체성 확립과 연합일치운동평단협은 1980년 10월 한국교회의 교단을 대표하는 평신도들이 모여 연합과 일치를 위해 창립한 단체입니다. 그 창립정신을 살려 함께 모이고 일하는 평신도의 열정을 보여주는 단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평신도운동의 정통성과 연합활동의 기본을 살려 나가는 모범이 되는 단체로 이끌고자 합니다. 각 교단 평신도 단체 역시 그 나름의 계획과 추진하는 일들이 많겠지만, 우리 평단협은 교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범교단적이며, 범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합을 위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지도자로서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우려 화합과 일치의 정신으로 일해 보려고 합니다. 저의 나이도 나이지만 이제 생애의 마지막 직책이라고 생각하고 일하겠습니다.-함께 이루어가는 개혁과 갱신의 길로우리 평단협의 회원들이 근래에 이르러 참여도가 많이 낮고, 협력하는데 미온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였으니 각자 교단의 명예를 걸고 참여하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착안하여 모이고 일하는 사명자의 모습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뜻을 같이하여 이름만 걸고 있는 회원이 아니라 정말 평단협의 목적에 함께 동참하여 연합단체의 면모를 바꾸는데 힘쓰겠습니다.개혁이라고 함은 제도나 기구를 뜯어 고치는 것을 말하고, 갱신이라고 함은 실정에 맞지 않는 낡은 것을 현재 상황이나 환경에 맞도록 바로 잡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자세와 기준으로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사회와 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 중심에서 작은 일부터 착실하게 추진하고 세워 나갈 것입니다.특히 우리 전임 회장님들의 관심과 지도가 필요하고, 해당 교단이 참여하는데 적극 나서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의 시대적인 사명을 일깨워 나가겠습니다.-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철저한 준수작금 우리 국가와 사회에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와 동성혼 문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섭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가장 큰 죄악이기 때문에 우리는 앞장서서 배격하고 반대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동성애 문제는 우리 교회가 절대적으로 막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앞으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처 방안을 연구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반대집회에 참가하는 등 노력을 할 것입니다.-국가를 위한 기도운동오늘까지 대한민국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는 원동력은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회, 경제, 안보 등에서 어려운 여건들을 극복하고 일어서게 하신 놀라운 은혜는 우리 교회가 눈물 흘려 기도한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오늘날의 어려운 국가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기도의 열기가 식어져 가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나서 나라와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평단협도 기도하는 단체로 변모하여 ‘기도 성회’ ‘기도 운동’을 펼쳐 가려고 합니다. 국가의 미래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살아있는 평단협의 목소리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평단협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활력 있는 모습으로 사회와 교회를 향해서 적극적으로 다가갈 것이며,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목소리를 외칠 것입니다. 평단협이 늙었고 침체된 감이 있는데 젊은 세대를 영입하고 이들로 하여금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필요합니다. 그 목소리는 특별 세미나와 집회, 기자회견, 성명서 발표 등으로 표출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교회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요.-박서원 정교가 살아온 여정저의 선친께서는 구세군 서산 음암교회의 특무정교(목회자인 사관의 부재 중에 목회를 담당할 수 있는 직책)로 계셨고, 모태신자인 저는 주일학교와 찬양대를 봉사하면서 어린 시절을 고향 충남서산에서 보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갑종 장교로 군에 입대하여 중령으로 제대하기까지 대대장으로서 복무했습니다. 25년간 군 참모경력을 마치고 이어서 국방군무원 3급(부이사관)으로 17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에 구세군 정교로서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저는 죽는 날까지 군인인 셈입니다. 저는 아내 조윤경 부교(권사)와의 사이에 2남을 두고 걱정할 일 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김형원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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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으로 초대
    2018-11-0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근으로 채찍을 만드사 야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요한복음> 2: 13-21)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어쫓으시던 일화가 담겨 있다. 어느 시대든지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의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 경제가 어려우면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어렵다. 경제력은 현대 사회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신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예수님은 그런 물신주의에 지배된 장사아치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으셨다. 이 사건은 후에 장사아치들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꼬드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는 데 한 몫 하게 된다. 이때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시는 우리 안에 물신주의가 판치는 것을 싫어하신다. 때론 물신주의가 사탄과 한 패가 되어 괴롭히는 때가 있다. 나도 젊었을 때에 가난으로 인하여 괴로울 때가 있었다. 그것은 사탄이 나에게 가해 온 시험이었다. 퇴직금을 사기꾼에게 고스란히 날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심한 구박을 받고 살았다. 어머니는 툭 하면 아버지에게 나가서 돈 벌어 오라는 말을 자주 하였고, 아버지는 어깨를 움츠리고 밖에 나갔다가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에 돌아왔다. 그동안에 아버지는 정씨 문중에도 다녀오고, 난 화원을 하는 친구 집에도 다녀왔다. 한 번은 문중 어른 C가 소개하여서 출판사에 다녀왔다며 서예 전집을 들고 들어왔다. 출판사 사장인 K는 예서체, 전서체 등 12권으로 된 서예 전집이 요즘 잘 팔린다며 당신더러 팔아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K는 아버지로부터 27만원을 받은 후 50만원자리 책이니 동창들에게 팔아 보라고 권하였다는 것이다. 27만원은 당시 대기업 회사원 봉급이었다. 어머니는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며 비아냥거렸지만, 아버지는 그걸 팔 자신이 있어 했다. 아마도 십여 년 간 어머니 몰래 모아 두었던 아버지의 비상금을 몽땅 털어 그 책을 산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그 후 여러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지만, 하루에 열 잔 이상의 차를 얻어 마신 후 배만 잔뜩 불려서 귀가하곤 하였다. 그 즈음에 서독에 가 있던 누나가 휴가를 얻어 집에 들렸다. 누나는 여행용 가죽 가방에 전자 계산기와 햄과 담배와 양주 등을 잔뜩 넣어 가지고 와서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대학생인 내가 외출할 대 옷이 별로 없어 와이셔츠와 바지한 벌만 줄창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청바지를 벗어서 입어 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독에선 젊은이들이 신사복 대신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며 서구에서 유행되는 옷차림도 곁들여 설명하여 주었다. 누나는 청조끼도 입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멋있어 보였고 한국에서도 곧 유행할 거라는 감이 왔다. 누나가 준 초록색 청바지를 입어 보니, 가랑이 부분이 너무 조여 거시까가 아프기가지 하였지만, 누나는 잘 맞는다고 계속 우기더니 자신이 입고 다니던 푸른 색 청바지 한 벌을 더 내놓았다. 그러나 바지 길이는 맞는데, 그 거시기 부분이 매우 아팠다. 곁에서 이를 지켜 보던 어머니도 “어쩜 저렇게 딱 맞느냐”며 거들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청바지 생활은 시작되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요즘 서구에서는 청바지가 유행이라며 여자용 청바지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그러면 친구들은 하기야 청바지는 남녀 구분 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고, 옷가게하는 형을 두고 있던 친구는 청바지도 남녀 구분이 있어 여성용은 남성용보다 가랑이가 2.5인치 더 올라간다는 귀띔을 해 주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6개월을 계속 청바지만 입고 다니자 거시기 부분이 아픈 것도 조금 가셔졌고, 대학 4년을 견딜 수가 있었다. 요즘도 그때 일을 생각하여 보면, 내 안에 있는 물신주의를 물리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조그만 개척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지휘를 하며 어려움을 극복하였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주님께 정성드려 예배드리는 생활을 지속할 때 물신주의가 끼어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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