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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해하는 민족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초기 한국교회는 민족의 설음과 아픔에 허덕이면서 세계 YMCA와 한국교회 선교활동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갖고 다양한 시민 단체를 주도해 나가기 위해서 그 당시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시대와 사회 현실을 감안하여 교회가 처한 현실의 문제 앞에서 개혁과 갱신을 하기 위해 YMCA 운동에 주도권을 행사하여 여기에 교회는 선교의 자리를 터득하여 기독교시민운동 단체로서 교회가 설 자리를 찾아 당시 민족 운동이나 문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장래를 책임질 수많은 학생들의 그룹운동을 일으켜 당시 한국교회의 선교일환으로 YMCA운동하였음을 알게 한다. 특히 YMCA가 다원주의 현대사회 속에서 청소년의 활동 공간으로 장소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정체성 확립이나 그 방향 진로에 까지 영향이 사실로 그 성과는 대단했다. 특히 사회적으로는 그 운동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YMCA가 단순한 시민단체만이 아니라 교회가 또한 경영, 유지에 따른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그 정체성 확립과 교회 선교의 장을 넓혀 활동 공간을 서울 전역에 넓혀 나중에는 한국사회에 많은 역할을 감당해 왔음을 안다. 민족주의와 정체성확립, 시민의식 계도, 청소년 문화 활동, 공정선거 캠페인, 향락문화 추방 캠페인, 환경 보전운동 캠페인, 시민정신, 문화질서 캠페인, 이러한 YMCA 운동은 기독시민운동의 역할로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막대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이미 실천하고 있었음을 한국교회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선교의 자리에서 살펴보면 지금 한국교회의 선교 자리와 그 의미를 알도록 깨우쳐야 한다. 한편 근대 민족주의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처음 발현되었다. 17세기 영국의 민족주의는 후대에 나타난 세속적 민족주의보다 종교적인 성격이 짙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계층의 성장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존 로크는 영국 민족주의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했고 18세기 미국 및 프랑스 민족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에서는 교육 및 공공생활의 민족주의화 경향은 정치적 충성의 범위를 넘어 민족적 차원으로 나아갔다.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민족감정의 발흥으로 인해 첫째, 절대군주가 등장하여 중세 봉건사회의 지방 분권주의를 타파하고 영토 확장과 함께 중앙집권적 국가를 탄생시켰으며, 둘째, 생활 및 교육의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국어가 유행하고 교회와 종단의 구속력이 약해졌으며, 셋째, 상업이 발전됨으로써 중산 시민계층과 자본주의적 기업형태를 창출해냈다. 정치적·경제적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영토적 통일국가에는 중세의 종교운동에 견줄 수 있는 열정이 스며들어 있었고 국가의 중심으로 자처하고 있던 군주는 국민주권 이론과 인권사상에 밀려났다. 군주는 더 이상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었고 국가는 국민의 국가, 민족적 국가, 조국이어야 했다. 국가는 민족과 동일시되었으며 문명은 민족적 문명을 의미했다. 한편 제국주의의 핍박을 받고 있던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혁명적 정신의 기수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식민지 세계의 전역에 퍼져나갔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고전적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세력의 억압에 항거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민족주의였으므로 한결같이 반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식민지 민족주의의 경우는 보다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제국주의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에 제국주의의 압제로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므로 대개 식민지 민족주의에는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과거 일제하에서 일어났던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 우리민족은 통일에 앞서 하느님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분열시켜 노예로 만든 악의 근본이 조국과 민족의 분단에 있음을 한국 교회는 확인하고 통회자복하며 회개 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생각하며 이제는 한국 교회가 민족 분단과 동족상잔의 고착화에 대하여 서로의 사이를 통감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서서 먼저 하느님께 회개하고 이제는 서로 용서의 기도로 “화해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3-07
  • 기독교인의 행복론 - 99
    중국을 개방 경제로 이끈 등소평은 모택동과 달리 실용주의자였다. 그의 사상을 잘 표현하는 말이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이른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이와 같은 정책은 사마리아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 방향을 생각나게 한다. 사마리아인은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남북왕조시대에 존재했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후손들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경에 앗시리아에 멸망당했다. 이후 남왕국 유다에서 정체성을 계승한 유대인들은 정체성 상실을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을 차별화하고 무시하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사마리아 문자를 사용한 아람어를 썼는데, 이는 초기 히브리 문자로부터 이어져 온 문자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로부터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복음 사역을 해 나가셨는데, 특히 사마리아 지역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경우가 많았다. 강도를 만난 유대인을 도운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그렇고, 다섯 남편을 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비유를 말씀하신 경우가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면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리하셨던 것 같다. 이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언어만을 사용하신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인생을 특별하게 산 여인들을 올린 것도 ‘흑묘백묘(黑猫白猫)’를 생각나게 한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어 베레스와 세라로 이어지게 하였으며, 라합은 여리고성 사람이면서도 그들 편에 서지 않아 보아스를 낳았으며, 룻은 이방 여자였지만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았고, 우리야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을 죽인 다윗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았다(<마태복음> 1:3-6). 이는 유대인의 관습을 어긴 죄 많은 여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를 수 있다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죄인일지라도 하나님과 화목해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새신자를 전도할 때에는 새신자가 믿음이 부족하다며 경계를 하기보다는,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할 것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만일 야고보와 요한이 기독교인을 한때 핍박하였었다는 이유로 바울을 차별을 하였다면, 기독교 교리가 정립되고 세계 선교가 이루어지는 쾌거를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사도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시켜야 할 것인가, 이방인과 식사를 같이 할 것인가, 이방인과 결혼해도 되는가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리하여 A.D. 49년에 예루살렘에 모여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 율법을 적용시킬 것인지를 논의하였다(사도 15:1-35 참조). 여기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않는 등 몇 가지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의함으로써 그들이 모세 율법에 구속되지 않음을 명백히 하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의 주요 결정에 성령께서 도우신다는 점과 이방계·유대계 양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를 도모하자는 등의 의견을 도출하였는데, 이는 이방인들에게 사역하던 바울의 의견이 많이 수용된 것이었다. 이 회의 이후 이방인이나 여자나 노예들도 공동체 식사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갔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오심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등이 공관 복음과 바울 서신 등을 통해 정립되어 갔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날 새신자들을 전도할 때에 너무 온실 속에서 착하고 온유함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된다.‘순진한 강아지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이 있다. 성직자들이 교인들에게 진실과 선함만을 가르친다면, 신자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따로 행동하는 이중성을 가지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은 교인들에게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만 선데이 교인으로 머무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교회 안에서만 볼 수 있다는 편협한 기독교 세계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언행을 하게 하는 것은 AI 시대에 매우 필수적인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9-03-07
  • 백년 맞는 민족
    1919년 3.1절의 의미는 전 민족적 항일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운동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 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 운동을 처음 준비했던 33인이 일본·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가 독립을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타협적 의존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어가지 못했던 점은 지금에서 생각하면 운동과정에서 이러한 민족해방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이것은 오늘에도 타에 의존한 민족의 단결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3·1운동의 과정에서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 민족의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민족이 해방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도 촉진되었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는 오늘의 3.1절의 회상은 우리 민족이 다 함께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민족이 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의식을 고취해야 할 지도할 민족공동체적 통일의식이 필요함을 가지게 한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3.1절에 민족운동에 앞장서고 많은 교회가 핍박을 당했다면 오늘의 우리민족 앞에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진리는 인간 이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에서도 하늘의 뜻 아래서 십자가의 길을 터득하게 한다. 여기서 곧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서 태어나 살면서 삶을 친히 보여 주셨다. 마구간에 태어나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다니시면서 목수의 아들로 집안의 가난을 목수의 일을 돌보며 또한 공동체의 공생애 3년간 시험을 겪으시며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심은 먼저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극복하는 삶의 정황(형편)을 알게 하심에서 깨닫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삶을 보시며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우선인 냥 그렇게 알고 사려고 하는 이들에게 이것만이 우선이 아님을 예수께서는 삶의 ‘십자가의 길’을 친히 보이시는 삶으로 보여 이를 깨닫게 한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사시면서 하늘아버지 하나님을 찾음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심을 복음서는 우리에게 이를 알게 함에 주목한다. 예수께서는 땅의 사람들에게 삶에서 나타난 삶의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는 의지의 결단의 힘은 타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세상살이에 보이시면서 자기 스스로가 친히 해결하며 그 태도로 십자가를 지신다. 이 ‘십자가 삶을 예수께서는 친히 일으켜 주심에 주목하게 한다. “모든 생명은 고난”을 통해서 태어나고 또한 때를 따라 고난을 통하여 한 생명의 씨를 머금고 나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터득하게 한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은 그 생명의 힘으로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약동을 본다. 생명과 역경(고난)은 필히 하나이다. 흔히 생명의 약동은 자라며 성장하고 깊고 어려운 역경의 삶을 보며 성장하고 성숙함을 알게 한다. 이제 한 민족이 두 민족으로 살아가면 두 민족은 한 생명이기에 둘이 될 수 없듯이 [통일] 하여야 한 생명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3.1 절 기념주일”을 맞아 한국교회는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100년의 3.1절을 맞아 보다 성숙된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3.1절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같은 민족의 하나 되는 민족의 통일과 생명 의식을 가지고 어려운 삶을 극복하는 의미가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2-22
  • 기독교인의 행복론 - 98
    바야흐로 4차 산업 혁명 시기가 도래하였다. 이에 따라 성경 속의 인물도 4차 산업 혁명 시기에 걸맞는 인물들이 네티즌들의 호응을 많이 얻을 것 같다. 대홍수 속에서 방주 속의 삶을 통해서 건재한 노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아브라함, 장자의 직분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간 야곱, 고난을 이기고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된 요셉,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가자고 한 모세 등은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네티즌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시기에는 단연 바울의 급진적인 사고가 네티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제시한 급진적인 담론은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을 이루신 후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는 율법 중심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바리새파 교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믿되 할례나 유대인들과의 공동체적 식사 문화, 유대인끼리의 혼인 관습을 이어가자는 것이 바리새파 출신 교인들이 주장하는 교리였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도 임재하심을 받아들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부정하지는 않았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으로 오신 것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오시므로 할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상관 없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식사하는 것이 문제 될 리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도와 장로들은 A.D 49년에 예루살렘에 모여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누가는 그 회의에서 율법 문제로 격심한 논의가 있었음을 행15장에 기록하여 놓았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자, 베드로와 야고보가 각각 결론을 내리게 된다. 먼저 베드로의 답변은 이러하다.“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행15: 7-12).이는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가 있으며,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라는 멍에를 씌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에 야고보는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 15: 19-21).야고보는 이방인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으며, 모세의 율법 중 식사 문화나 결혼 문화에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은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다. 이를 정리하여 보면 베드로는 이방인을 받아들이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믿는 것이 중요하고 모세의 율법이라는 멍에를 제자들에게 씌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데 비하여, 야고보는 식사 예법과 결혼 예법은 전통을 따르는 것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 유효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식사 예법도 유대 문화 것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모세 율법보다 상위에 있음을 기독교 교리로 정립하는 급진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유효하였고, 제자들의 공동체 식사 문화를 활용하여 이방인이나 여자나 노예 들도 다 식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전통으로 세워 놓았다. 이는 후에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곧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귀족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가 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다는 평등 사상을 가지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까지 갔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성직자나 장로들을 통해서만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도 얼마든지 성령이 임하셔서 축복받을 수 있음을 교인들이 인지하는 평등사상으로 나타난다. 이제 4차 산업혁명 시기가 도래하였다. 선진국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사물 인터넷이나 인공 지능의 혜택을 누리는데, 아직도 북한 사회는 왕조 체제의 고립된 섬에 갇혀 있다. 그들에게도 인터넷과 SNS를 통하여 4차 산업혁명 시기에 걸맞는 문화가 전해지고, 자유로운 인권이 보장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9-02-22
  • 기본적인 인사문화
    2019년 2월 5일은 “기해년”으로 한 해를 맞는 설날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서로 인사를 한다. 흔히 새해를 기원하는 인사말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말로 감당하지 못할 인사를 매년 되풀이 하고 있다. ‘복’이라는 말이 습관처럼 기원 인사를 드린다. 이러한 인사 의도에는 물질의 풍요를 담고 있음에 주의를 살피게 된다.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각자 직업에 따라 물질의 풍요에만 그 의미가 담겨 있음을 목격하게 한다. ‘복’이란 물질의 풍요적인 의미가 설날을 맞아 기원의 수단이 된다는 사실의 의미쯤은 알고 인사해야 한다. 옛날에는 복을 얻기 위해 그 행위로, 악귀를 쫓는 축귀 행위로 부적이나 또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빗자루로 창살을 두드려 잡귀를 문 밖으로 내쫓는 민간신앙으로서 성공제, 기은제, 고사, 굿 등으로 표현되어 왔음에 기인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기복행위는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복을 비는 행위는 가신(家神 집의 신)이나 비는 대상에 따라 비는 무속의 일종으로 실행되어 왔기에 복을 기원하는 행위에 따른 잘못된 인사문화로 기복신앙에 기인됨을 알게 한다. 우리 조선 후기에 와서 이러한 기복행위는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 복에 대한 갈망은 각종 신종교 발생의 배경이 되어 외래 종교가 유입되더라도 민간에서는 이를 기복적인 성격으로 변형시켜 흡수한 현상으로 필히 전래 내려 온 복에 치중함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사리게 된 것은 경제난의 근원을 살피게 되면 경제는 성장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국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소유에 대한 세 가지를 알게 한다. 첫째는 모든 것은 다 창조자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신앙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창조자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을 따르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은 물건보다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어 이용가치로 사용해서는 아니 됨을 알게 한다. 셋째는 재물은 종속적인 선이지 최상의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돈을 자기 사욕을 위해 쓸 때 나쁜 것이요 남의 어려움을 위해 쓸 때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가진 자는 책임이 크다. 자기 뜻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여야 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성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다. 한해를 보내고 또 한해를 맞으며 송구영신의 인사를 나눌 때 성서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면 “무슨 복을 많이 받으라”는지, 가치 없는 삶의 인사로 한 해의 삶을 기원하는지 부끄럽게 생각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은 물론 인간이 행복하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지는 알아야 한다. 다만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하다. 그러한 삶의 의지와 정열은 인간 삶의 역사와 문명과 산업사회 발전을 일구어 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생명으로 존재의 가치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 왔다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피게 된 것은 구약성서에 드러난 창세기의 고대인들이 삶을 살아가는 양식대로 자기 삶의 자리에 바벨탑으로 쌓아가며 자기 소유물을 쌓아 가는 것으로 자기 삶의 자리를 두려고 한 점을 알게 함에 주의를 가진다. 이는 곧 인간은 한 생명으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사실은 인간은 한 생명으로 한 세상을 산다는 전제를 알게 함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한 생명으로 한 삶을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라.”우리 그리스도교는 물질을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물질 사이에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라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2-1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97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구약 시대의 율법에 젖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알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비유가 많은 것은 아마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한 문장 안에 놓는 표현 방식이다. 가령 ‘A는 B다.’,‘A는 B와 같다.’와 같은 방식이다.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교사들은 전자를 은유라 하고, 후자를 직유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해당하는 원관념을 그대로 표현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해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조 관념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일화를 예로 들어 하나님 나라를 이해시키셨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나온다. 그 중에 사마리아 땅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이 천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여관에 데려가 치료하고 그의 숙박비까지 내 주고 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시키기 위한 비유다. 하나님의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이 원관념에 해당한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보조 관념이다. 율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에서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에게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역사나 율법이 굳어진 언어를 사용하면, 그들이 이해를 못하거나 식상해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같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과 그 자녀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희생양 역할을 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에 바탕한다는 말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말해 봐야 설득력이 없다고 보신 것 같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의 일상에서 흔히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에 대한 원대하신 계획을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키겠는가.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왔듯이,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몸소 행하는 것임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기다. 이와 같은 시기에는 사람과 사물과 세계가 초연결 네트워킹으로 이어지고, 융합형 메이커(maker)가 혁신적 파괴를 통하여 세계를 바꾸어 나간다. 3차 산업혁명이 정보화를 통해 개인이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자유자재로 이용하였다면, 4차 산업 혁명 시기에는 인간과 로봇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멋과 놀이가 있는 공간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앞으로 20년 후 AI 등을 활용한 기술적 특이점이 지나면 영구 에너지나 친환경 에너지가 생산되고, 융합 과학의 발달로 바이오 특이점이 지나면 뇌와 췌장을 제외한 신체의 장기들이 개인의 신체에 들어와 생명을 더 길게 연장시킬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융합형 인재들을 교회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기독교는 초기 교회 이후 2천 년 이상을 발전하여 왔다. 이와 같은 발전은 각 시대마다 그 시기의 상황을 혁신하여 가는 인재가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구약 시대에는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모세·여호수아·다윗·솔로몬 등의 수많은 인재가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증명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베드로·바울·어거스틴·마틴 루터·장 칼뱅·존 웨슬리 등 수많은 인재들이 교회 부흥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한때 로마 카톨릭은 마틴 루터라는 인재로 인하여 그 강성함이 쇠하여졌고, 세계 강국이었던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신교도 탄압 정책으로 인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네델란드로 건너가는 바람에 패망하게 되었다.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율법의 틀에 사로잡혀 인재를 제대로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새신자부에서는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적용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정해 놓은 율법의 틀 안에 새신자들이 합류하기를 기대한다.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할례와 유대 교인끼리의 결혼과 유대 교인들만의 식사 문화를 강조하기보다는 성령이 기존의 율법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을 제시할 것임을 믿었다. 그리하여 유대 교인만의 공동체 문화를 넘어서 이방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와 같은 인재는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1세기에는 새로운 세기에 걸맞는 인재가 있다. 사람들이 IT 혁명으로 인하여 현실과 가상 공간,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어도, 기독교는 새로운 상황에 걸맞는 진리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는 이 천지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표적들과 함께 부활의 실체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9-02-14
  • 설을 잘 쇠다
    양력설을 보내고 나면 음력설을 맞게 된다. 수십 년을 이중 과세로 설을 쇠게 된다. 우리 민족 대부분이 구정을 설로 쇠어 온다. 설을 지내는 것을 ‘설을 쇠다’고 한다. 한문으로는 ‘과세’(過歲) 라고도 한다. 이 말들은 설날에는 조상의 은혜를 기리며 조상에게 감사하여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며 부부간 형제간에도 서로 세배를 한다. 이것은 새해를 맞아 경하하며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인사가 된다. ‘설’의 의미는 새해 새날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설날에는 몸가짐에 그릇됨이 없이 ‘조심하는 날’이라는 의미가 되며 이를 위해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설날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대가 변하고 사회가 디지털화 되어감에 따라 설날이 주는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옛날에는 설날의 세시(歲時) 풍속으로 설빔, 차례, 세배, 세찬, 덕담, 문안비, 설 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 귀쫓기,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많은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게 전래되었다. 그 중에서 주목해 보는 것은 차례이다. 이는 명절날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등의 낮에 지내는 간략한 제사를 지내는 차례를 설날에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성묘를 한다. 이를 지키기 위해 교통혼잡을 무릅쓰고 원근거리 상관없이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가는 미풍양속이 되었다. 이렇게 쇠는 ‘설을 잘 쇠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정을 중히 여기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하여 못난이로 취급하는 풍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가정이 안정되어야 모든 것이 안정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정은 나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린다는 곳으로 수신제가를 알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의미이기도 하며, 성서적 가르침임을 알게 한다.가정이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남녀부부를 사람으로 세우시고, 한 가정 안에서 자녀를 만들어 가게 했다. 이 세상의 어떤 제도보다 먼저 존재한 가장 기초적인 사회체계가 가정이다. 그리하여 이 가정 속에서 국가와 사회와 교회의 원형이 나타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며 ‘설을 잘 쇠다’의 의미는 가정을 살피고 ‘설을 잘 쇠어야 함’을 알게 한다. 금년 설날은 주일날이요 설이 함께하는 날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과 설날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함께하는 날임을 지혜롭게 믿음으로 지내어야 한다. 가정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전래 전통적으로 설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 옷을 입고 마음 단장도하며 설빔을 갖춘다. 설날 차례를 마친 후에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 방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조부모, 부모님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어른들의 덕담이 따르게 되어 있다.인생을 논하고 삶의 의미를 알게 하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한 인간의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세찬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올린 후에는 가족과 일가친척들과 인사를 한다. ‘과세 안녕 하셨습니까?’ ‘새해 돈 많이 버세요!’ 로 새해를 기원하고, 서로 한살 더 먹음에 축하를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설날에 가정예배로 세시풍속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우리 사회는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게 가정이 망가짐으로 교회도 그렇게 가고 있기에 잃어버린 가족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가정과 사회를 보면서 설을 맞이할 때마다 '설을 잘 쇠다' 에 해당되는 의미를 알게 한다. 365일 설 한번으로 가족공동체가 이루어지는 현상 속에서 무너지는 공동체의 사회를 위해 우리의 시선과 이를 극복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가정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태어나서 접하게 되는 최초의 사회이며 삶의 장이고 최초로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원초적인 생활공동체의 장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끝을 맺게 되는 인간의 전 삶을 통해서 이어가는 삶의 구심체이다. 이 가정에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살아가면서 언어와 생활 습관, 문화를 배우고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의 완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삶의 모태가 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1-3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96
    종교나 학문은 진실과 선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데아를 상정하였고, 공자는 중용과 덕을 강조하였다. 4차 산업 사회에서 사람들은 편리와 편안을 공유하면서 행복을 추구한다. 그만큼 행복은 다양한 곳에 숨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리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사조를 훑어가며 진실과 선과 행복을 찾아나선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양식으로 전파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기독교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항상 복음으로 다가섰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맞서 승리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면이 있다. 1세기 이후 유대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하심을 인정하지 않고 선민 의식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여 오신 역사를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과 그 자녀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고, 주님이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심을 선포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환상을 통하여 성령의 계시를 받아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됨을 알렸으며,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사도행전> 6:10)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하나님이 인도하신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설교하다가 순교를 당한다. 이어 바나바가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내놓으며(<사도행전> 4:37) 나아가 기독교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였으며,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주님을 만나(<사도행전> 9:5) 회심하게 된다. 이를 보면 성령이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하였을 뿐만 아니라(<사도행전> 2:4), 4차 산업 사회에 사는 신자들에게도 임하심을 알 수가 있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취급하려는 이단들을 물리치면서 삼위일체론을 정립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사도행전> 19:21)며 기독교 교리를 정림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면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박해를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사도행전> 20:23). 그러면서도 그가 가야만 했던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방인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할례를 받지 않았다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못 되는 것은 아님을 유대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며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심은 기독교의 핵심이었고, 이를 제대로 전파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여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당당하게 변론하였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면서 그는 <로마서>에 나오는 기독교 교리를 정립하게 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과 그 자녀들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십자가 보혈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며, 율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함으로써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써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전하였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하나님의 자녀는 주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려는데 왜 이렇게 고난이 심하냐고. 이에 대해 바울은 말하였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3-5). 주님은 우리가 고난중에도 함께 하신다. 그리하여 인내하게 하시고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하신다. 필자가 미국 앤아버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수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이나 건물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목사 부부는 습기가 많은 지하에서 세들어 살다 보니 사모의 팔에 곰팡이로 인해 생긴 피부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아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허름한 예배당을 대출받아 인수한 경우에도 수리해야 할 데가 많아 교인들이 직접 에어컨 공사나 난방 공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9-01-31
  • 성육신 신앙
    구주 오심의 달을 맞으며 하나님이 친히 사람으로 오시어 그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그 비유로 성육하심에 그 의미로 그 참된 삶을 요한복음서에 의해서 알게 하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속성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위일체의 제2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에서 말한 절기를 맞게 한다. 예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은 예수 오심의 의미는 기다리며 맞는 교회력의 절기이며 이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로도 부른다. 그 뜻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음을 부언한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빈 구유 바닥에 눕혀 지내심을 안다. 마구간의 식구들로 상징되는 온 생물은 물론 구유로 상징되는 마구간 식구들에게 말없이 밑바닥이 되어 준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까지 하나님이 오시는 그 까닭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들에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인생들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맨바닥, 땅 바닥에 누워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이 나눔의 완성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셔서 삶을 공유하신다. 생명은 생물로 만물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특성은 땅이 무질서하게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 생명은 정돈되고 조직화 되려는 경향이 있고 생명은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 성장과 자기 유지에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생명은 자신의 유전 암호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여 이로운 방향으로 가려한다. 그리고 항상성이라는 안정된 정상상태를 유지하려하고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러한 생명의 특성을 고찰하면 인간 사회의 삶에서 삶의 구도자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알게 한다. 이는 생명으로 오셔서 구원의 생명의 모습을 친히 견디어 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엔 인간의 본질, 곧 그의 근원과 성질과 운명으로 한 생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그 생명을 이어 받은 것이요 스스로 존재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로 보면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생명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하는 자”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 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 (창 2:9). 즉 에너지 ( Energy) 공급원을 두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나님의 뜻과 아름답게 이 땅에서도 성육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인성이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으로 위격의 일치라고 언급되어 온 삶에서 인격적 일치로 구주 예수 안에서 연합되었음을 믿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삼위의 일치라고 언급 되어 온 인격적 일치(하나)로 예수 안에서 결합되어 두 본성이 인격적 일치로 그 정체로 이어오고 있음을 믿게 한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성부와 인격적으로 긴밀하게 연합해 왔으며 그가 복음을 선언 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함에 유의하게 한다. 여기서 ‘성육신’은 본질상 하나님이고 하나님 (성부) 과 동등 하지만 조의 신분으로 나중에 하나님과의 그 관계는 하나님과의 자녀의 입장으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이를 관계하게 함에 유의한다. 여기서 이를 깨달아야 함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여러 경향들이 있어 왔지만 이후의 신학에서 이를 바로 잡아 신학을 세우게 된 것은 칼케돈 공의회의에서 그 정의를 반영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가 그의 인성에 중요한 영향의 역할을 알아야 함을 정의하게 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1-17
  • 기독교인의 행복론 - 95
    이제 4차 산업 시대가 도래하였다. 공장에서는 사무직과 노동직이 유기적으로 융합되고, 시장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맞춤형으로 연결되며 ICT에 의하여 다품종 소량 상품이 빠르게 유통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도 그 역할이 다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인터넷을 통하여 다수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가 빠르게 유포되고 있으며, 개교회에서도 만사(서로 만나고 사랑하는 모임)를 통하여 맞춤형 전도 방식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ICT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재정이 든든해야 한다. 재정이 든든해야 복음이 제대로 전파될 수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실천하신 방식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의 흐름을 살펴보자. <누가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한 삭개오에게 주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감격한 삭개오가 말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성인 남자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음식을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는 등으로 물질면에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야말로 풍족한 나눔의 모습의 보여 주셨다. 삭개오를 통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길을 열어 보이심도 그러하다. 이와 같은 넉넉함은 주님의 베푸시는 이미지를 확고히 하여 급기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을 정도로 당당한 권위를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재정의 넉넉함은 제자와 사도 들의 전도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한 후 재정적인 면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춘”(<사도행전> 5:1-2) 행위로 인해 죽게 된 것도, 성령이 제자들의 재정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바울과 전도 여행을 갔던 바나바도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4:36). 그의 조카 마가는 그 다락방에 120명의 기독교인이 모여 기도할 정도로 큰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제자들의 지원을 받아 전도 여행을 하던 중 의견 차이로 인하여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섰을 때에도, 바울은 천막 일을 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도 여행지에서 구제 헌금을 거두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헌금할 정도였다. 바울의 재정은 바울을 심문하던 벨릭스 총독도 그것을 탐낼 정도로 풍성하였다.“동시에 또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사도행전> 24:26). 또한 그가 죄수의 몸으로 이달리야로 가는 배를 탔을 때에도 죄수들을 호송하던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가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기를 허락하더니”(<사도행전> 27:3).필자가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와 사도들(베드로, 바나바, 바울, 마가 등)의 재정이 튼튼하였음을 정리한 것은, 4차 산업 시대에 재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0세기 말까지만 하여도 한국의 성직자들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주심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가난을 면한 교인들은 배고픔을 면한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였다. 이제 재정은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21세기의 4차 산업 시대에 신자들은 재정을 어떻게 운용하여야 할까. 맞춤형 재정 운용이 필요한데, 바울이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사도행전> 18:1-4). 바울은 생업의 현장이 복음 전파의 생생한 교회였다. 이는 오늘날 신자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도를 해야 하는가를 잘 알려 준다. 곧 주일날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직장이나 생업 현장도 복음 전파의 터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사 운동’(만나서 사랑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운동)은 그 일환이 될 것이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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