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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인터콥의 목숨 건 ‘이슬람 선교’, “비판은 틀렸다”
- "이슬람 선교 쉽지 않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걸고 해야 한다. 이를 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한기총 정서영 대표회장이 인터콥의 이슬람 선교를 문제삼는 일부 교계와 교단을 향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목숨을 내걸고 이슬람 국가에 뛰어든 선교사들에 지원은 해주지 못할망정 이를 뒤에서 팔짱끼고 비난만 하는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지난 28일 한기총 이슬람대책세미나에서 나온 정서영 대표회장의 강단있는 발언은 현재 이슬람 선교를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모순과 편견을 정면으로 저격한다. 이슬람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위험한 이슬람 선교를 굳이 왜 해야 하느냐는 모순뿐인 발상은 결국 한국교회 세계 선교의 극단적 쏠림 현상을 만들어냈다. 세계 선교 2위라는 자랑스런 숫자 뒤에 가려진 한국교회 선교의 현실은 세계 지도의 일부분에 다수 한정되어 있다. 물론 모든 선교지는 언제나 인력과 재정이 부족하며,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매우 힘든 것이 현실이나, 대부분의 교단과 단체들이 이슬람 국가를 외면하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세계 최대 이슬람선교단체로 꼽히는 인터콥선교회(본부장 최바울 선교사)의 존재는 '위험'을 외면하는 일부 한국교회 선교의 모순을 상충한다. 한국교회가 선교대국으로 세계 선교에 앞장서는 기독교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은 '이슬람 선교'를 빼놓고서는 결코 거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선교는 없지만 이슬람 선교의 위험은 그 차원을 달리한다. 특히 기독교, 혹은 기독교 국가를 테러의 목표로 삼은 이슬람의 '지하드'는 이슬람 선교사에 있어 단순한 위협을 넘어 목숨 자체를 담보로 하게끔 한다. 그렇기에 일부 교회가 위험한 이슬람 선교를 금하는 것 역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선교'라는 단어는 언제나 '순교'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이 그랬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던지며, 선교를 행했다. 20억에 이르는 무슬림은 전 세계 80억 인구 중 무려 1/4을 차지한다. 이슬람을 포기한 세계 선교는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 세계 종교지형에 있어 기독교의 침체와 대비되어 무슬림의 증가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현실은 이슬람 선교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슬람 선교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지금도 한국교회를 대표해 목숨을 내걸고 이슬람의 선교 현장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교회 전체가 합심해서 이를 지원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허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현실은 '외면'을 넘어 '비판'의 지경에 이르렀다. 정서영 대표회장의 말처럼 그야말로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이슬람 선교를 하지도 않으면서 비판만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인 것이다. 오히려 심히 방어적으로, 무슬림의 테러가 전 세계 어디로 향하든 우리나라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분위기다. 말 그대로 한국만 ‘이슬람 청정지역’으로 방어하면 된다는 것인데,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슬람 세력을 단순히 모스크 사원 앞에서 돼지고기를 굽는다고 해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슬림에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총칼로 무장한 그들의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더 강한 무기가 아니다. 이슬람을 무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역사가 증명했고, 오히려 자극할수록 그들을 더욱 강하게 뭉치게 했다. 무슬림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복음 뿐이다. 테러를 멈추는 것 역시 복음밖에 없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무슬림을 살리고, 전 세계를 살리는 것이다. 이슬람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다원주의자들은 대부분의 무슬림은 '평화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허나 세계 종교학자들은 전 세계 20억의 무슬림 중 약 20%를 극단 과격주의 세력으로 분류한다. 총 4억명, 미국 전체 인구조차 훨씬 상회하는 이들이 과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이슬람 현지에서 활동해야 하는 이슬람 선교를 결코 일반적 선교의 기준에서 이해하면 곤란하다. 군인에 있어 평시와 전쟁시의 대응요령이 전혀 다르듯이 이슬람 선교 역시 선교의 방법과 정도, 대응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보며 단순히 ‘과격하다’라고 단정 짓는 것은 ‘이슬람’이라는 전제를 간과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세계 최대 이슬람 선교단체인 ‘인터콥’은 한국교회를 넘어 세계교회의 분명한 자산이다. 무엇보다 하루가 다르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슬람을 무력이 아닌 복음으로 억제할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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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인터콥의 목숨 건 ‘이슬람 선교’, “비판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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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기독교 VS 퀴어’ 7월 1일 NCCK는 어디로 향했나?
- ◆ "NCCK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한 적이 없다. 이는 모두 가짜뉴스다" -2022년 10월 감리교 총회 중- 지난해 10월 기독교대한감리회(이하 감리교) 총회에서는 NCCK WCC 탈퇴를 두고 치열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당시 탈퇴를 요구하는 이들은 NCCK WCC가 신학적으로 심각하게 변질 됐으며, 특히 NCCK가 전 교회가 반대하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하고 있다며, 당장 NCCK와 단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탈퇴 반대자들은 NCCK의 포괄적차별금지법 지지는 모두 가짜뉴스라며, NCCK는 단 한 번도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 NCCK인권센터는 지난 7월 1일, 성소수자들의 퀴어축제를 지지하는 '평등 세상을 바라는 축복기도회'를 함께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주관한 본 기도회는 '그래도 무지개는 뜬다'는 구호로 '퀴어축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NCCK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한 적이 없다"는 감리교 친NCCK 세력의 주장이 무색하게도 NCCK는 여전히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하고 있다. 엄밀히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한 적도 없으며, 오히려 NCCK인권센터는 동성애자와 동성애 단체에 인권상을 수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퀴어활동에 앞장서 왔다. 이뿐 아니라 NCCK 정의평화위원회 역시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었다. ◆ 7월 1일은 올바른 성혁명을 정착시키고자 기독교계와 시민단체가 함께 '거룩한 방파제'라는 이름으로 서울시의회 앞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집회를 개최한 날이다. NCCK인권센터가 퀴어축제를 지지하며, '거룩한 방파제'를 비판하는 기자회견과 기도회에 동참하고 있을 때, '거룩한 방파제' 집회에는 중부연회 김찬호 감독이 연사로 올랐다. 김 감독이 이끄는 중부연회는 최근 NCCK 탈퇴안을 압도적으로 통과시키며, 감리교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중부연회의 탈퇴 결의 당시 김찬호 감독과 연회원의 입장은 간단했다. NCCK가 성경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변화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NCCK인권센터가 무지개 축복기도회를 하던 그 시각, 김찬호 감독은 동성애와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한 절대 반대를 외쳤다. 김 감독은 "각 분야로 침투한 성혁명과 동성애의 타락을 막고 거룩한 운동을 펼쳐야 한다. 차별금지법을 허용한 나라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성적 가치관이 없는 다음세대가 무너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 NCCK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한다. 그것도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그것이 팩트다. 감리교의 NCCK 탈퇴는 오는 10월 총회에서 총회원에 의해 최종 결정될 일이지만, 그 바탕에 거짓이 깔려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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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기독교 VS 퀴어’ 7월 1일 NCCK는 어디로 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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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감리교의 WCC·NCCK 탈퇴 논의에 등장한 저열한 ‘물타기’
- “메시지에 반박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기독교대한감리회의 WCC·NCCK 탈퇴 여부가 올 한 해 한국교회 최대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10월 총회가 다가올수록 이를 둘러싼 내부 논쟁이 더욱 치열해 지고 있다. 문제는 이슈의 중심인 WCC나 NCCK에 대한 담백한 논쟁이 아닌 주제와 하등 관련 없는 별건들을 자극적으로 포장해 관심을 돌리는 소위 '물타기'가 횡행한다는 것인데, 한국교회 역사의 새로운 변곡점이 될지 모를 중대한 논의에 저열한 이들이 더러운 흙탕물을 튕기고 있다. 기감은 지난해 10월 총회에서 WCC·NCCK 탈퇴를 놓고, 갑론을박 끝에 1년 간 이를 연구한 후, 23년 총회에서 이를 다시 다루기로 했다. 그렇게 생긴 1년의 유예 기간에 대해 현재 감리교는 물론이고 한국교회 전체가 관심을 갖고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 중에 기감 중부연회(감독 김찬호 목사)가 지난 4월 정기연회에서 감리교 탈퇴를 결의하며 이슈에 불을 당겼다. 당시 중부연회는 대의원 475명이 참석한 가운데, 436명의 압도적 찬성(반대 37명, 기권 2명)으로 안건이 가결됐다. 중부연회의 탈퇴 결의는 실제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기감을 한국교회 대표 진보교단으로 인식하던 한국교회에 충격을 주기는 충분했다. 더욱이 중부연회는 기감 내 최대 연회로 사실상 10월 총회의 전초전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중부연회의 탈퇴 결의는 WCC와 NCCK의 변질을 주장하는 보수 교계의 큰 환영을 받았고, 반대로 WCC와 NCCK에 잔류코자 하는 교단 내부 세력에는 큰 반발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WCC와 NCCK 자체에 대한 핵심적인 연구와 결론이다. 용공주의, 다원주의에 대한 기존의 논란은 물론이고, 이번 사태의 원인이 된 '포괄적차별금지법 지지' 여부에 대한 확실한 결론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최근 모양새를 보면 WCC와 NCCK에 대한 본질적 논의는 배제한 채, 특정인이나 특정단체를 단두대에 올려 이슈를 호도하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중부연회의 수장인 김찬호 감독이 '물타기'의 대표적 희생양이 되었는데, 이들은 WCC NCCK 반대를 주도하는 김 감독의 개인 이력까지 끄집어내어, 무자비하게 헐뜯고 있다. 김 감독 스스로 WCC·NCCK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피력한 터라, 그의 주장에 대해 진실공방을 벌이든, 반박을 하든 매우 건설적인 논의가 될 수 있지만, 문제는 해당 비판에 이번 사태의 본질인 WCC·NCCK는 전혀 존재치 않다는데 있다. 뜬금없이 김 감독이 인터콥선교회에서 활동했다는 이력을 앞세워, 이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며, 본질을 흐리고 있다. “메시지에 반박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말싸움의 격언을 아주 충실히도 따르는 모양새다. 허나 이들의 메신저 공격조차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것은 기감은 인터콥에 대해 어떠한 문제를 삼은 적도 결의를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터콥은 기감이 속한 KWMA가 “한국교회의 한 형제로서 품어달라”는 호소까지 했던 단체다. 굳이 이들의 주장대로 기감이 타 장로교단의 입장까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면, 아직 장로교단의 징계에서 완전히 풀리지 않은 감신대 변선환 박사에 대해서도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김 감독이나 인터콥이 아니다. 바로 WCC와 NCCK다. 기감의 목회자들은 지금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 두 단체는 과연 용공주의, 다원주의,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지를 밝히는 게 먼저다. WCC와 NCCK 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저열한 정치 선동을 할 시간에, WCC 제7차 캔버라 총회에서 행한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나 2008년 한국교회를 발칵 뒤집어 놨던 NCCK의 '나무아미타불아멘' 사건을 한 번 더 되짚어 봤어야 한다. NCCK가 그간 냈던 수많은 포괄적차별금지법 지지 성명서와 동성애자 및 동성애 단체에 수여한 인권상을 놓고도 과연 NCCK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이게 바로 지난해 기감이 10월 총회에서 결의한 핵심 메시지다. WCC와 NCCK가 오늘날 한국교회 분열의 매개라는 사실에 이견은 없다. WCC로 합동과 통합이 분열했고, 기감과 예감이 갈라졌다. NCCK로 인해서는 기성과 예성이 갈라졌다. 보수교계에서는 WCC와 NCCK를 절대 함께할 수 없는 반기독교 단체라고 인지하고 있다. 기감이 올 10월 총회에서 WCC와 NCCK를 탈퇴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 결정이 정치적 계략이나 입김 없이, 두 단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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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감리교의 WCC·NCCK 탈퇴 논의에 등장한 저열한 ‘물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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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부활’의 거룩한 가치를 훼손한 ‘꾼’들의 저급한 정치질
- 140년 역사에서 처음 시도된 '부활절 퍼레이드'가 막을 내렸다. 화려한 볼거리와 놀거리, 그리고 성경 속 아이템을 활용한 부활절 홍보 등 다양한 준비가 돋보인 이번 퍼레이드는 답보상태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이벤트로서의 분명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나름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생각보다 저조한 인파와 맥락없는 퍼레이드, 애매하기만 행사장 구성은 보는 시각에 따라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특히 행사의 핵심인 부활절 퍼레이드는 마땅한 기준 없이 그저 흥미위주의 나열식 볼거리에 집중한 듯한 느낌이 강했다. 차라리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스토리 위주의 퍼레이드를 구상했다면, 부활의 의미도 살리고, 시민들의 관심도 높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폐해는 부활절에도 계속되는 내부의 총질이었다. 일부 기독교 정치꾼들이 특정 정치이념에 사로잡혀, 건전한 부활절 행사를 '종전협정 퍼레이드'라는 근거 없는 거짓으로 포장해, 140년만의 부활절 축제에 시작 전부터 찬물을 끼얹었다. 아무리 정치이념에 눈 먼 이들의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부활’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를 아는 정상적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절대로 시도조차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그리스도 부활의 거룩한 축제마저 저급한 정치질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기독교인의 이름부터 내던졌어야 했다. 더구나 이번 퍼레이드는 일체의 인원 동원 없이 일반인 관람객이 주를 이뤘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는 비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외국인도 상당했다. 스스로의 애국에 함몰된 '꾼'들은 적어도 그들에게 세계교회의 선두라고 자부하는 한국교회의 추한 이면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한국교회의 첫 번째 부활절퍼레이드가 불교의 청계천 연등축제처럼 정례화 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맺을지, 내년에도 우리가 퍼레이드를 다시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결정이 적어도 내부의 총질로 좌우되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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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부활’의 거룩한 가치를 훼손한 ‘꾼’들의 저급한 정치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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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교총, 국가 미래를 위한 공존과 상생을 말하다
- 대립과 갈등, 분열과 정쟁으로 치달은 우리 사회의 총제적 위기에 한국교회가 부활의 노래로 화해와 상생의 매개가 될 것을 선언했다. 코로나를 지나며 더욱 심해진 극단적 진영 대립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국민들을 위해 시대의 중재자로서 이제라도 제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은 부활절을 앞두고, 최근 발표한 목회서신을 통해 시대의 위기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국민적 결단, 그리고 교회의 책임을 언급했다. 특히 더욱 거세지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대립을 염려하며,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이제는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는 현실적이고도 대승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극단적 대립 속에 상실된 우리 사회의 이성과 상식에 대한 전위적 회복을 촉구하고 나섰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맹목적인 진영 논리와 무분별한 정치적 해석에 기반한 비난과 비판은 결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 고민이 될 수 없음을 확실히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 목회서신에서 한교총은 부활절 퍼레이드, 이단사이비 문제 등의 교회의 이슈 외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튀르키예 및 시리아 지진 피해, 국내 대형 재난 등 다양한 국내외 주요 사건들을 언급했다. 특히 최근 가장 큰 국민적 논란으로 떠오른 한일관계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과거를 잊어서도 안되지만, 결코 과거가 미래의 방해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매우 현실적 조언으로, 평화를 통한 상생과 협력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본 자세임을 확실히 했다. 사실상 한일관계에 대한 양 진영의 찬반 의견을 모두 수용한 본 서신에서 한교총은 '일제'와 '일본' 두 단어의 사용을 철저히 구분했다. '일제'는 과거침략과 억압에 단호히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으로, '일본'은 대한민국과 동북아의 미래를 위한 공존의 상대임을 명시한 것이다. 한교총은 먼저 "일제의 강제징용 문제는 대한민국과 미래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로, 이를위해 우리 정부가 일본과 대화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 평가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과거 일제의 폭압과 수탈로 상처받은 국민감정을 제대로 녹여내지 못했다는 점에 다소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동북아의 지정학적 파고를 맞닥뜨려야 하는 우리 대한민국은 중심을 잡고 주변국을 상대해야 한다. 과거 침략자였던 주변국이지만 대화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한다"며 미래지향적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에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정신으로 더욱 견고해야져야 한다"며 "분노와 복수만으로 주변국을 이겨낼 수 없고, 대화를 통해 평화를 이루고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현실적 조언을 잊지 않았다. 특히 일본과의 공존과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과거를 덮거나,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최근 국민적 충격을 줬던, '3.1절 일장기' 사건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번 목회서신은 근래 보기드문 매우 중립적인 메시지라는 점이 눈에 띈다. 사회는 물론 교회내부도 극단적 정치 대립에 신음하는 상황에, 상당히 이성적이고도 현실적인 분석이 주를 이뤘다는 평가다. 이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으로서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할 뿐 특정 진영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정체성이 반영된 노력으로 최근 정치 대립의 일선에서 선 교회들에 국민들의 지탄이 쏟아지는 상황에 이미지 변화를 위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교총이 목회서신을 통해 말한 한국교회의 스탠스와 사회를 위한 조언은 분명했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공존과 상생을 통해 밝은 미래를 열어가자는 긍정의 메시지다. 좌우로 나뉘어 서로를 노려보는 지금의 이념 구도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미래는 없다. 우리가 가야 할 미래는 서로가 함께 바라보는 바로 그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 시대를 위한 역사적 변화에 한국교회가 앞장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교총 목회서신 전문: http://www.ecumenicalpress.co.kr/news/view.php?no=5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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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교총, 국가 미래를 위한 공존과 상생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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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엔데믹 시대 속 ‘원 리더십’의 붕괴, 한국교회의 진짜 위기는 무엇인가?
- 한때 9부 능선을 넘기도 했던 보수 연합기관 통합 작업이 올 들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 한국교회의 오랜 숙원이었던 ‘대통합’을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놓치는 상황을 자초한 것인데, 기대가 워낙 컸던 만큼 아쉬움이 쉽사리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무너진 대통합’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그 결과에 대한 누군가의 잘잘못이나 책임을 분명히 따져야겠지만, 그 전에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한국교회가 처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먼저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년 여 한국교회가 통합을 그토록 외쳤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원 리더십’의 재건에 있었다.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으로 이어지는 보수 연합기관의 3단 분열 이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원 리더십’이 붕괴됐고,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권위는 삽시간에 무너졌었다. 무너진 권위와 사라진 신뢰, 여기에 추가된 목회자들의 도덕적 추락 앞에 한국교회가 쌓아왔던 100년의 공든탑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나마 분열의 화를 피했던 NCCK 등의 진보세력은 건재했지만, 동성애·포괄적차별금지법 등 기독교 본래적 가치마저 이념의 구호로 가리는 반기독교적 행태를 반복하며,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고 말았다. 결국 한국교회 회복의 관건은 보수 연합운동의 재건에 있었고, 그 핵심 작업이 바로 ‘연합기관 대통합’이었던 것이다. 애초 ‘원 리더십’의 붕괴에서 출발했던 한국교회의 위기는 그 유일한 해법으로 꼽힌 ‘연합기관 대통합’이 사실상 좌절되며, 위기 그 자체의 원점으로 돌아왔다. 허나 분명히 깨달아야하는 것은 지금의 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또 위험하다는데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열의 고착화다. 워낙 목표에 근접하며, 교계 대내외적인 기대를 모았던 만큼, 실패에 따른 후유증 역시 그에 비례하고 있다. 여기에 이러한 과도한 실망은 앞으로도 통합은 절대 불가하다는 좌절로 이어지며, 사실상 통합을 단념케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통합 과정에서 드러난 당사자들의 행태는 한국교회 구성원들의 실망을 배가시키고 있다. 연합기관 대통합이라는 궁극의 염원을 무시한 채, 온갖 이권과 정치적 계산으로 9부능선 앞에 선 통합을 주저앉힌 그들의 행태는 사실상 “교권이 통합을 원치 않는다”는 씁쓸한 결론을 확인시켰다. 한국교회 내부에서 교권에 대한 신뢰가 다시 한 번 무너졌다면, 외부적으로는 ‘원 리더십’이라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더욱 모호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에는 그나마 주요교단들이 참여하는 ‘한교총’이 부족하나마 대사회적 대표 역할을 감당해 왔지만, 올 들어 한기총이 정상화를 이뤄내며, 규모에서 얻어냈던 그 대표성마저 분산되고 있다. 규모에서는 한교총이 압도적일지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한기총의 ‘네임밸류’가 정상화의 기류에 맞춰 최근 급부상하며, 다시 한교총과의 교계 대표 자리를 두고 무한 대립마저 예고하게 된 것이다. 냉정히 이는 오히려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가장 위기에 처해있던 2년 전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그때는 한교총 대표회장이었던 소강석 목사가 분명한 리더십을 갖고, 정부 및 대국민과의 소통을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정부를 상대하는 소 목사의 방식에 대한 반대 여론도 일부 있었지만, 그 반대조차 소 목사를 한국교회 대표로 인정했기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한국교회의 리더십은 하나로 모여 있었던 것이다. 더 큰 부분은 연합기관에 대한 무관심이다. 엔데믹 시대로 접어들며, 한국교회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어느새 국민들은 한국교회의 대표가 누구인지?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곧 대사회적 영향력의 감소로 이어지며, 한국교회의 사회적 존재감이 추락된 상태로 고착하게 만들었다. 한국교회가 가장 우려했던 그 것, 바로 기독교 울타리 안에 갇힌 ‘교회’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직 불씨가 살아있는 대통합 프로젝트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원탁 테이블’ ‘공동성명서’ 등 지난 2년 전 분열 이후 처음으로 이뤄낸 의미있는 성과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 등 사회적 악법의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에, 3개 기관이 함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공동 성명’조차 내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분명한 위기를 느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아직 대통합의 꿈은 끝나지 않았기에 누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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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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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엔데믹 시대 속 ‘원 리더십’의 붕괴, 한국교회의 진짜 위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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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4차산업혁명시대 속 러다이트 운동과 기독교
- ◆ 근대 인류 발전의 가장 결정적 사건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으니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변화를 통해 전 세계 사회, 경제, 정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산업혁명'은 인류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는 단초가 된다. '산업혁명'은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힐만한 일이지만, 당시 모든 이의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18~19세기 영국의 가장 보편화된 산업 중 하나가 바로 섬유를 가공하는 '방직업'이었는데,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방직기가 숙련공의 역할을 대신하며, 엄청난 실업자가 발생한 것이다. 모든 공장은 인건비도 들지 않고, 대량생산마저 가능한 방직기를 들여놨고, 그 결과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고,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아침에 삶이 파괴된 노동자들의 분노가 향한 종착지는 바로 '방직기'였다. 방직기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일자리를 잃을 이유도 없고, 또 월급을 받지 못해 굶을 일도 없을테니 말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방직기'를 직접 파괴하기 시작한다. 발전을 거부함으로, 자신들의 잃어버린 위치를 되찾고자 했던 것, 변화와 발전을 거부하는 '러다이트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19세기에 일어났던 '러다이트 운동'은 이후 시대가 한 번씩 크게 도약 발전할 때마다 종종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20세기 후반 컴퓨터의 보급과 맞물린 과학기술시대의 도래는 네오러다이트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러다이트 운동'이 제4차산업혁명시대의 시작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AI가 모든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며, 결국 인간의 존재가치가 없어질 것이라는 본질적이 우려다. 과거 영국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처지와 매우 닮아있는 이 우려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찾기 위한 새로운 '러다이트 운동'을 꿈꾸고 있다. ◆ 제4차산업혁명시대의 '러다이트 운동'은 의외로 기독교계에도 널리 뻗쳐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절대적이라 여겼던 목회자의 영역마저 AI가 침범할 것이라는 우려로, 특히 코로나를 지나며, 새롭게 자리잡은 '온라인 예배' 문화가 'AI 설교'도 마냥 판타지가 아닐 수 있음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 분위기에 일부 목회자들은 제4차산업혁명시대에 보내는 기대의 한 켠에 자신의 존재적 가치마저 혹여 위협받을 수 있다는 걱정과 우려를 토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변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로 이어지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폐쇄적 교회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 역사에서 반복됐던 '러다이트 운동'이 주는 교훈은 하나다. '공의' '공익'을 전제한 시대의 발전과 흐름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이 방직기계를 파괴해 자기 자리를 되찾고자 했지만,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결국 또다른 방직기계였다. 하지만 새롭게 변화한 시대는 인간이 해야 할 또 다른 역할을 선사한다. 네오러다이트운동가들이 컴퓨터의 보급·발전에 반기를 들었지만, 결국 컴퓨터의 발전은 새로운 산업 환경 속에 수많은 직업을 양산해 냈다. 파도가 클수록 이를 넘고자 하는 서퍼들은 결코 파도에 맞서지 않으며, 파도의 흐름에 순응하는 원리와 같다. ◆ 그렇다면, 좀 더 직접으로 기독교 목회자의 영역을 AI가 대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대전 유성에 위치한 국립중앙과학관에는 향후 AI로 인해 사라질 직업군이 나열되어 있다. 그 곳에는 텔레마케터, 계산원, 청소부 등의 서비스업은 물론이고, 촬영기사, 측량기사, 건설 노동자 등의 기술집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판사, 기자, 학자 등 일에 있어 사고와 판단이 고도로 요하는 직업들도 AI가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이 중에 '종교인'은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기술 뿐 아니라 작가의 감정이 요구되는 화가조차 사라지는 직업군에 들어가 있지만, 종교인은 없다. 이 간단한 그림은 목회자의 영역을 결코 과학의 기술로 대체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AI가 대신 전할 수 없는 것은 그 분의 뜻에 대한 근본적 이해도 불가능할 뿐더러, 결정적인 사명이 없기 때문이다. AI는 과학적 기술과 기존에 입력된 통계로 자기 역할에 대한 판단을 한다. 하지만 설교는 단순히 지식과 통계, 정보로 이뤄지는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주권적 관계와 성경에 대한 의미적 해석, 그리고 무엇보다 AI는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목회자의 '감성'이 바로 설교에 녹아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영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희생’이라는 감성은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더욱 빛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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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4차산업혁명시대 속 러다이트 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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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히틀러의 ‘더 큰 거짓말’과 한기총의 '이단 음모론'
- 조작된 논리에 ‘애국’을 가미한 저급한 선동 이대위에 오른 문제적 발언들, 정작 아무도 해명 안해 ◆ 세계 근현대사에 있어 최악의 지도자이자, 그릇된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지목받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유일무이한 당대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연설이었다. 민족 우월주의에 바탕한 그의 탁월한 연설은 그를 희대의 선동가로 만들었다. 대중들을 어떻게 하면 흥분시킬 수 있고, 또 흡수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 그가 바로 히틀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 600만 대학살 등 전 세계가 경악할 엄청난 범죄를 자행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에게 선동당한 대중들의 투쟁적 지지가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완전한 선동을 위해서는 필히 거짓이 동반된다. 그것도 소소한 거짓이 아닌 판 자체를 뒤엎을 어마어마한 거짓을 말이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거짓에 선동된 대중들에 '일말의 의심'은 찾아볼 수 없다. 근거와 이유, 상황과 명분 등 모든 것에 반하는 어처구니없는 거짓일지라도 그들은 그 결론에만 집중하고 흥분할 뿐이다. '음모론'을 즐기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확인을 받기 때문이다. ◆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 관련 이단성 이슈가 연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가 “모세오경만 성경이고, 나머지는 해설서다” “나는 메시아 나라의 왕”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성령의 본체” 등의 발언과 특히 아들 전OO을 '독생자'로 지명한 사실을 문제 삼으며, 이를 "명백한 이단사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연히 전 목사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전 목사는 이단이 결코 아니라는 것인데, 문제는 아무도 왜 전 목사가 이단이 아닌지를 설명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전 목사가 아닌 주변 이슈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모습이다. “메시지에 반박할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공격하라”고 했던가? 한기총의 운영과 임시체제, 이대위 조직 등 별건의 문제를 끄집어 내어, 한기총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거짓이다. 이번 사태에서 이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새로운 주제를 등장시켰다. 바로 소강석 목사, 이들은 전광훈이라는 커다란 이슈를 소강석이라는 더 큰 이슈로 덮으려 했다. 히틀러가 말한 '더 큰 거짓말'을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소강석 목사인 셈이다. 자연스레 소 목사라는 이슈는 음모론으로 조작된다. 북한과 전 정권이 배후에서 소강석을 통해 전광훈을 제거하려 한다는 ‘더 큰 거짓말’은 이슈의 물타기를 위한 철저한 선동이었다. ◆ '애국'이라는 미끼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전체주의적 음모론, "나의 상상이 곧 너희의 세계다"라는 히틀러의 말이 한국교회에서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슈와 선동, 거짓과 음모로 뒤덮인 이번 사태를 한국교회는 다시 담백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 사태의 출발점은 과연 어디인가? 우리의 궁금증은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현재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에 또다시 소명의 기회를 부여했다. 우리는 이제라도 이번 이슈에서 ‘메신저’가 아닌 본래의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자신의 아들을 독생자로 지칭한 전 목사의 발언이 한기총에서 어떻게 소명될 수 있을지? 그게 이번 이슈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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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히틀러의 ‘더 큰 거짓말’과 한기총의 '이단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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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선 넘은 ‘인포데믹’ 이제 한국교회가 나서야
- 기독교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한 끔직한 루머들 한국교회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악성루머 근원지 발본색원해야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자신을 겨냥한 연이은 가짜뉴스에 결국 발끈하고 나섰다. 이번에는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 이단 규정 관련, 그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억측인데, 밑도끝도 없는 가짜뉴스에 소 목사는 "이제 그런 왜곡된 주장은 그만하라"는 정중한 경고를 날렸다. 한기총은 지난 12월 7일 임원회에서 전광훈 목사를 '명백한 이단'이라고 결론내린 이대위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 이를 실행위로 넘긴 바 있다. '독생자' '메시아 나라의 왕' '성령의 본체' 등 전광훈 목사의 여러 발언에 심각한 이단성이 있다는 것으로, 현재 해당 이슈는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다. 문제는 일부 극렬주의자들이 또다시 이번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소강석 목사를 소환해,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강석 목사는 자타공인 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 상당한 유명세와 영향력을 지닌만큼, '소강석' 이라는 '키워드'를 등장시키기만 해도 관심은 폭발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소 목사를 자기 진영의 '주적'으로 설정함으로, 반대로 자신들은 그 영향력의 '피해자'로 만드는 단순하지만 매우 야비한 방법을 차용한다. 지난 수년 간 일부 진영의 정치 집회를 이끌었던 '동력'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마냥 '유명세'라고 하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목회자로서는 차마 상상치 못할 루머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퍼져 나가고 있다. 사실 소 목사는 교단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 등 한국교회 지도자로 올라선 후 줄곧 가짜뉴스에 시달려 왔다. 초기에는 "교계를 편가르기 한다"거나 "정부에 사과했다"는 등 왜곡적 해석을 이용한 교묘한 가짜뉴스가 주를 이뤘다면 나중에는 추측을 넘어 아예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미자립교회 격려금 지원이었다. 코로나로 힘겨워하는 작은교회 목회자들에 100만원의 격려금을 전달한 것을 두고, 소 목사가 목회자들을 정권 규탄 집회에 참여토록 한 것이라는 끔찍한 루머를 퍼뜨린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악성 '인포데믹'에는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양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준과 원칙이 무너진 신앙,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저급한 정치의 하수인을 자처한 종교적 신념은 우리가 같은 신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마저 품게 한다. 이들의 타겟은 비단 소강석 목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한때 교계를 떠돌았던 또다른 가짜뉴스에는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원로), 장종현 목사(백석대 총장),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이재훈 목사(온누리교회), 류영모 목사(한소망교회) 등 대형교회를 담임하거나 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을 친북인사로 명시했었다. 근거나 이유는 중요치 않다. 애초에 대상이 있고 목적이 있는 ‘거짓’에 굳이 공 들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나서 악성루머의 근원지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더 이상 이런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사회 정치에서 방출된 더러운 부산물이 교계를 오염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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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선 넘은 ‘인포데믹’ 이제 한국교회가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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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교총의 무너진 ‘순번제’, 결코 가볍지 않다
- 기존 연합단체의 과도한 정치질과 금권을 비판하며 등장한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류영모 목사)이 출범 6년여 만에 정치의 늪에 빠져 또다시 삐걱거릴 태세다. 한교총은 지난 18일 인선위원회를 통해 차기 대표회장에 이영훈 목사(기하성 총회장)와 공동대표회장에 권순웅 목사(합동 총회장), 송홍도 목사(대신 총회장) 그리고 장종현 목사(백석 총회장)를 선임했는데, 이를 두고 애초에 짜여진 판이었다는 나름 근거있는 의심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룰의 파괴를 통한 '새판 짜기' 한교총의 임원 인선은 '선거'가 아닌 '순번제'를 통해 이뤄진다. 교세에 따라 가, 나, 다, 라 군으로 나뉘는데, 각 군에서 순번에 따라 한 명의 대표회장 후보를 추천하고, 이들이 대표회장 혹은 공동대표회장으로 인선받게 된다. 한교총이 5회째 회기가 이어지는 동안 순번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각 군에 속한 교단들은 자기 차례에 대한 인지가 분명했고, 별다른 분란없이 항상 한 명의 군별 대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올해 가군에서 돌연 군별 대표 선출을 놓고 '경선'까지 등장하며, 애초 순번제라는 룰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그리고 순번제에 따라 대다수가 예상했던 장종현 목사(백석 총회장)가 이 경선으로 탈락하게 된다. 룰의 파괴를 통한 '새판 짜기', 하지만 번듯하기만 한 이 새판이 결코 달갑지만 않은 것은 연합운동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신뢰'에 심각한 금을 남겼기 때문이다. ‘순번제’는 한교총의 정체성, 무너진 분열의 명분 한교총은 본래 '분열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한기총에서 한교연으로 그리고 한교연에서 다시 한교총으로... 한국교회 역사의 가장 심각한 오점을 남긴 삼단분열의 결과물이 바로 한교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분열체'임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한교총은 자신들의 창립 명분을 기존 연합단체의 과열된 선거제도에서 찾았다. 금권과 비리로 가득한 대표회장 선거로 인해 연합운동의 본질이 깨지고, 또 지도자의 자리는 심히 권력화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교총이 대표회장 선출에 있어 '선거'가 아닌 '순번제'를 택하고, 1인체제가 아닌 3인의 공동 대표회장 체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분열'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신들의 명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번제'는 안으로는 한교총의 정체성이자, 밖으로는 정의와 신뢰로 새롭게 탄생한 새 연합단체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그렇기에 이번 대표회장 인선 과정에서 '순번제'가 깨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교총의 정체성이 깨어진 것, 분열의 명분이 무너진 것, 이번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는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더욱이 과도한 정치질을 방지코자 택했던 '순번제'가 무너진 것은 앞으로 한교총에 본격적인 정치 다툼이 이뤄질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케 된다. 무엇보다 '경선'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임원회와 인선위가 과도한 권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차라리 모든 총대가 동등히 참여하는 한기총이나 한교연의 선거보다 훨씬 폐쇄적이기까지 하다. 애초에 순번제가 가지는 단점은 분명했다. '인물'에 대한 선택이 불가하다는 것, 얼마 전까지 합동측이 총회장 선거의 과열을 막고자 치렀던 '맛디아식' 선거의 부정적 요소와 일맥상통한다. 이런 리스크를 감안하면서까지 순번제를 택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선거 자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부작용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번 대표회장 인선 과정은 ‘순번제’에 정치가 대놓고 개입한 형국이다. 이도저도 아닌 부작용의 결정체, 이를 일각에서 ‘정치력’이라는 단어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심히 불편한 것은 정치의 개입은 한국교회의 수많은 분열의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 간 한국교회의 가장 큰 이슈였던 ‘연합운동 통합’에 대한 관심은 어느새 한교총의 재분열에 대한 우려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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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교총의 무너진 ‘순번제’, 결코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