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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채택 9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 한국기독교의 사회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양심 앞에 주어진 시대의 요구 이 글은 지난 1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공동개최한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제4차 학술심포지엄에서 강혁 박사가 발제한 "<사회신조>를 통해 본 197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 사회운동-그 의미와 과제" 중 주요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본고는 1932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朝鮮耶蘇敎聯合共議會) 제9차 총회가 가결한 '사회신조(社會信條)'의 맥락 안에서 197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노정을 성찰하고자 한다. 1. 1970년대 개신교 사회운동 1)도시산업선교 산업선교는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가 공장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산업전도' 착수를 결의하여 서울 영등포지역에서 활동한데서 시작한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5개 개신교 교단을 중심으로 계몽·홍보활동, 선교기구의 설립, 공장목회, 평신도 조직 육성, 실무자 양성, 근로현장에 대한 조사·연구활동 등을 주도했다. 초기 산업전도는 순수 복음전도에 그 초점이 맞춰졌다. 산업전도 실무자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고 노동윤리를 내면화 하여 열심히 일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1960년대 접어들면서 기존의 산업전도 방식은 한계에 달했고, 산업전도 실무자들은 고용주 편에 서 있는 세력으로 인식되어 노동자들에게 외면 당했다. 이후 1968년에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4차 총회에서 정리된 ‘하나님 선교(Missio Dei)’신학의 영향 아래 산업 전도는 '도시산업선교'로 전환 되어 복음화와 사회정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선교정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도시산업선교가 노동자와 빈민 등 근대화에서 소외된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게 되자 저임금 정책 아래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추진하던 기업이나 정치권력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통한 직접적인 탄압과 함께 여론 및 교회지도자들을 동원하여 도시산업선교의 활동을 방해했다. 산업선교에 대한 정부의 공격과 용공활동으로의 매도에 대응하여 1978년 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산업선교 신학선언”을 발표하여 산업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밝히고,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선한 사마리인의 정신을 따라 시정하려는 선교활동임을 천명했다. 도시산업선교 활동은 자연스레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특히 1979년 8월 YH무역사건은 박정희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정부는 도시산업선교를 YH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산업선교의 실무목사들이 근로자들을 선동하였다고 매도하였다. 2)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함께 1970/80년대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의 노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이다. 도시빈민선교는 1969년 8월 미국 연합장로회 선교사 화이트(H.White)가 내한하여 연세대학교 내에‘도시문제연구소’를 만들고, 노정현 박사가 소장이 되어 도시문제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실무자 훈련에 주력함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경제호황으로 이루어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 노동자들은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었다. 1967년 당시 서울에 무허가 건물은 23만3천 가구였고, 이 건물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은 127만 명에 달했다. 1970년 초가 되자 당시 서울 인구 600만 명 가운데 대략 30%가 무허가 판자촌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는 제대로 된 행정계획도 없이 대규모의 판자촌을 철거했고, 약 10만 명의 철거민들이 급조된 위성도시인 경기도 성남 등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과는 달리 그 어떤 주변시설도 없이 산 중턱에 천막만 들어찬 이주단지의 열약함에 분노한 이들은 1971년 8월 10일 소위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71년 9월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서울의 빈민지역이었던 답십리에 센터가 설립되는 등 도시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는 빈민지역에 가서 일할 실무자를 파송하여 청계천 철거민 이주, 통일상가 세금문제, 지역사회조직과 훈련들을 실시했으며(1971년), 이듬해에는 광주(성남)단지, 인천동구지역, 뚝방지역(송정동), 남대문 시장지구에 실무자를 각각 선정하여 본격적인 도시선교를 시작했다. 노동력의 도시 집중화와 더불어 수출품의 단가를 낮추기 위해 정부가 시행한 저곡가 정책은 자연스레 농촌 경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에 먼저 관심을 가진 곳은 천주교였다. 천주교는 1966년 가톨릭농민회를 조직하여 지역별 활동을 개시하였고, 1972년에는 전국단위의 활동을 시작했다. 개신교는 1974년부터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농민교육을 실시하여 농민운동가들의 이론적 기반을 튼튼하게 했다. 1982년 3월에는 전국적 조직을 갖춘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이 창설되어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나갔다. 3) 인권 및 민주화 운동 김상근은 한국개신교가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유신개헌 반대 투쟁에 나섬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한 반헌법적 권력남용이었다. 서릿발 치는 유신체제에 맨 처음 저항한 것은 개신교 내의 젊은 진보적 저항세력들이었다. 4월 22일 남산부활절연합예배 당시 수도권 도시선교위원장 박형규목사, 실무자 권호경, 김동완 전도사 등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학생 나상기, 황인성, 정명기, 이상윤, 서창석 등이 민주회복과 언론자유, 현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며,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했다. 5월 20일에는 <한국그리스도인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기독교 민주화·인권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선언에서 “유신은 국민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국민의 요청임과 동시에 교회의 역사적 전통이라고 천명한다. 이후 6월 말이 되자 남산부활절연합예배 관련자 전원이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물론 가맹 교단들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구속자들의 조기석방을 위해 조사 및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기도회 등을 통해 민주화의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각 신학대학 교수·학생 및 각 교회 청년들이 앞장서 구속자 석방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정부에 항의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인권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이에 대한 교회차원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3년 11월 23일과 24일 신앙과 인권협의회를 열어‘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인권탄압의 해결에 기독교인들이 나설 것을 촉구한 이 선언은, 인권 확립을 위해 교회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이 무렵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정권은 1974년 1월 새해 벽두에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에 의하면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모든 행위를 금하였다. 같은 해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중·민족·민주선언”등을 발표하고 연합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을 가졌는데 이것이 사전에 당국에 알려져 관련자 1,024명이 점거되었고, 이중 8명이사형언도를 받고, 수십 명이 무기징역부터 15-20년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정부의 인권 탄압이 심해지고 기독교인 구속자가 늘어나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 5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성서적 신앙”에 의거하여 “인권의 유린을 방지 또는 제거하는 책임”을 수행할 인권위원회를 창설하였다. 구속자 석방과 유신정권에 대한 교회저항이 들불처럼 타오르자 각 교단들도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74년 9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9회 총회가 선언서를 발표한 것을 비롯해서 장로교(통합) 제59회 총회가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2회 총회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1974년 12월엔 대한예수교장로교(통합) 총회장의 이름으로 시국과 관련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는 4개 항목의 요구사항이 담겨 있었다. 첫째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인사들에 대한 조속한 사면, 둘째는 강제 추방된 미국 감리회 선교동역자 죠지 오글 목사에 대한 추방령을 해제하고 그의 재입국 선교활동을 허용할 것, 셋째는 국론의 분열을 방지하고 국민의 능동적인 총화를 성취하기 위해 음성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정보기관의 종교사찰 행위와 공포분위기 조성 등을 즉각 중지할 것, 넷째는 창조적이고 양심적이며 건설적인 비판이 탄압 받지 않는 자유민주사회가 회복되어야 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교회의 인권운동 세력이 서릿발 날리는 독재정권의 탄압을 견딜 수 있었던 지원은 WCC와 독일교회 그리고 기타 해외교회들과 재외 한인동포 기독인들로부터의 지지였다. 2. 한국교회의 통일·화해운동 1980년대 후반은 국내외적으로 큰 변혁의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는 1985년부터 본격화된 소련의 개혁노선이 대내적 페레스트로이카와 대외적 평화 전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주의권의 해체와 탈냉전을 촉발했다. 내부적으로는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직선제 개헌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에 자신감이 넘치고, 통일운동이 활성화된 시기였다.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1980년 이전까지 통일운동은 오직 정부의 몫이었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를 것 없이 국가안보라는 미명하에 통일에 대한 모든 정보는 국가가 독점했고, 독점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는 상대를 악마화 하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유지했다. 한국교회 역시 빈약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의 통일정책을 따라 갈 수밖에 없었고, 과거 전쟁의 기억 안에서 반공적인 성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그간 진행되었던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관점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반공의 첨병으로 그 역할을 감당했던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통해 북한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국내에 소개했고, 통일에 대한 제한된 정보를 당국이 아닌 세계교회를 통해서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8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독일개신교회연합회(EKD)가 제4차 에큐메니컬협의회을 개최하여 한반도 통일 문제를 화두로 삼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1981년과 1982년 양국 정부의 통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해외동포 기독교인들 간에 만남이 주선되었다. 1차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2차는 헬싱키에서 만나 남북 화해와 통일 그리고 통일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자세에 대해서 나눔을 가졌다. 그러나 아직 국내의 사회 정치 상황에서 통일을 언급하기엔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세계교회는 계속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꾸준히 언급했다. 1984년 10월 세계교회협의회는 ‘동북아시아 정의·평화 협의회’를 개최하여 한국기독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남북 양 정부 역시 이에 호응하여 남북 이산가족찾기와 고향 방문 등을 추진했다. 1986년 9월 2일에서 5일까지 세계교회협의회는 스위스 글리온(Glion)에서 ‘제1차 남북기독자협의회’를 주관했다. 남북의 교회 대표단은 글리온에서 함께 만나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다. 제1차 글리온 회의’는 서로에 대해 어떤 특정 입장을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남을 통한 교류를 넓혀 가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 남북 교회의 대표들이 함께 성만찬을 나누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고,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보듬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약 2년의 시간을 준비하여 1988년 11월 23일에서 25일까지 남북교회는 ‘제2차 글리온회의’를 가졌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약 2년 동안 준비 기간을 가져 1988년 2월 29일 제37차 총회에서 소위 '88선언'으로 명명되는‘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을 발표하여 채택했다. 이 선언서는 먼저 정의와 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전통을 밝히고, 이후 민족분단의 현실에 대해서 논한다. 또한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 이후 민족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원칙을 선언하며, 남북한 정부에 대한 한국교회의 건의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민족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원칙에서 선언문은 그 원칙을 1972년 남북 간에 최초로 합의된 7·4공동성명에 나타나는 1)자주 2)평화 3)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의 3대 정신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밝힌다.‘제2차 글리온회의’는 1차와는 달리 서로에 대한 친밀도가 있는 상황에 있었고, 나눔 역시 화기애애했다‘제2차 글리온회의’를 통해 남북교회는 서로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글리온 선언을 발표했다. 서로의 주장과 의견이 팽팽히 맞서 선언문의 도출까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선언을 통하여 남북교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선언이었다. 본 선언문은 서론에서 1986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채택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와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 및 동년 4월 인천의 “한(조선)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교 세계대회”의 메시지 등에 나타난 정신과 합의사항 등에 대한 지지를 표한다. 이후 신앙의 결단으로 한(조선)민족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연대할 것을 다짐한다. 이후 8가지 건의를 통해 남북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꾸준히 노력 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한국기독교회협의회가“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을 발표하자 다수의 개신교 교단과 단체가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개중에는 남북교회의 대표들이 만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만남을 무산시키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가 되자 한국 개신교의 보수성향의 교단들이 하나·둘 북한 선교를 시작했다. 짧은 기간 안에서 고도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뤘지만,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출렁인다. 1932년에 그랬듯, 1970년대 이후와 21세기의 사반세기가 다가오는 현재까지 그 출렁임이 변함없다. 늘 인권의 사각자리에 놓인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억압되고, 절망한다. 1932년 9월에 채택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는 채택 이후 오늘날까지 무효화되지 않았다. 즉,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신조로서 그 법적 유효성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는 한국교회에 있어 근대 인권과 노동에 있어서 기본규범이 될 뿐 아니라, 시대의 요구 안에서 재해석되어 지며, 그 정신을 발전시킬 한국교회의 거대한 실천적 믿음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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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채택 9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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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 한국전쟁의 발발과 독일 개신교회의 재무장 논쟁
- 재무장 지지측 가톨릭과 반대측 개신교 사이에 심한 분열 드러내 EKD “기독교가 적대감을 조장하고 전쟁 준비에 선전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명확한 반대” 본고는 강혁 박사의 독일 튀빙엔대학 교회사 박사학위 논문으로, 지난 11일 서울 소망교회에서 개최된 제150차 한국교회사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제1회 소망교회 후원 '연구지원 공모전'에서 우수논문으로 수상한 논문이다. <편집자 주>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현실 안에서, ‘교회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필요하다. 이 동일한 질문이 1950년 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독일개신교회’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KD)에서 제기되었다. 이 질문은 곧바로 발발한 한국전쟁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을 놓고, ‘평화를 위한 교회의 사회적 책무’와 ‘정치적 여론’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들을 일으켰다. 이 논쟁들이 1950년 가을 EKD의 ‘서독 재무장’ 논쟁에서 구체화 되었다. 본 연구는 1950년 서독 사회 안에서 한국전쟁 발발의 영향을 추적하고, 특히 서독 개신교가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정당하게 수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검토한다. 한국전쟁발발과 서독의 여론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전 세계를 크게 뒤흔들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한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서독 언론을 통해 빠르게 퍼졌고, 서독 국민들 사이에 큰 공포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냉전 시기 한국전쟁과 서독의 안보정책을 연구한 마이(Gunther Mai)는 여론을 빌어 당시의 충격에 대해 “한국전쟁은 서방을 마치 ‘번개’처럼 강타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근간’을 뒤흔들었다”고 증언했다. 서독의 많은 신문들이 1945년 이후 분단국가인 한국과 독일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동독과 서독에서 한국전쟁 발발 후 첫 몇 주 동안 생필품 사재기가 극성을 부렸다. 또한 베를린의 아이들은 “한국, 한국, 전쟁이 다가오네.(Korea, Korea, der Krieg kommt immer nher.)”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공포를 담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독의 안보 정책 독일연방정부의 첫 반응 역시 서독의 안보에 대한 우려였다. 당시 아데나워 총리는 소련이 한국에서처럼 분단된 독일에서도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공공연히 언급했다. 1950년 8월 11일, 윈스턴 처칠은 유럽 평의회자문회의에서 유럽국방장관을 사령관으로 독일군이 참여하는 유럽군대의 구성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세계대전 이후 해체되었던 독일군의 재건과 무장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서독 총리 아데나워는 한국전쟁 발발을 기회로 독일군을 재건하여 자국의 안보를 자신들의 손으로 지키고, 이로서 서독이 패전국의 굴레를 벗고 서유럽 공동체의 일원으로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길 원했다. 그는 9월 초, 뉴욕에서 열린 미국, 영국, 프랑스 외무장관 회의에, 자신의 서독 재무장정책을 담은 ‘서독의 안보에 관한 건의서’를 비밀리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내각 안에 큰 논란이 일어났다. 총리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대하여 내무장관 하이네만은 공개적으로 사임을 선언했다. 총리 아데나워와 내무장관 하이네만의 갈등은 개신교 교회 내부의 재무장 논쟁의 여론에도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나치에 대항한 고백교회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하이네만은 당시 EKD총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고, 내각 안에서 개신교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독일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는 총리 아데나워와 독일 개신교를 대표하는 하이네만의 갈등은 단순히 정치적 갈등을 넘어 사회적, 종교적 갈등으로 발화될 가능성도 안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서독의 재무장을 둘러싼 EKD 안에서의 반응과 논쟁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로 인한 서독의 안보논쟁은 EKD에 있어서 1948년 창설 이후 꾸준히 강조되었던 교회의 평화의지에 대한 실질적인 시험과 같았다. EKD 내부에도 두 가지 반대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한쪽은 안보상의 이유로 서독이 재무장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이었다. 서독의 재무장이 안보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한 개신교 주요 인사로는 EKD의 회장이자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교회의 감독이었던 오토 디벨리우스 (Otto Dibelius) 목사가 있다. 그는 BBC라디오 연설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독일의 안보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독일은 강대국들의 계획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유럽에서의 새로운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단 디벨리우스 감독뿐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특수성 아래서 EKD의 다수의 회원들이 서독의 재무장을 통한 안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EKD의 주요 인사들의 상당수는 니뮐러 목사의 주장을 지지했다. 헬무트 골비쳐(Helmut Gollwitzer)는 “강대국들이 독일을 대표 하지도 않고, 독일이 그들과 무조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고 주장하며, 서구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논리에 서독이 휩쓸리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와 함께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의미가 없으므로, 기독교인들은 ‘화해의 사람들’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많은 이들이 EKD위원회가 이와 같은 교회 내의 분쟁에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에센의 교회의 날 행사에 모인 EKD위원회는 한국전쟁에 직접 관여한 UN에 평화를 호소하고, 독일의 재무장 문제에 대해 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먼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으며,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연대하고 계심을 선포했다. 또한 두려움은 불신앙이며, 전쟁의 위험을 더 가까이 가져 올 뿐이므로 극동의 전쟁 소식에 흔들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둘째로 한국전쟁을 언급하며 한 나라에 강대국들이 임의로 경계를 긋는 것만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없다고 언급했다. 독일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 전쟁과 폭력 그리고 분열을 종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는 정치세력들 간의 평화 약속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지켜질 수 있는 지에 달려 있으며, 각 나라들은 질서와 평화를 훼손하려는 자들에게 맞서 적절한 경찰 보호가 필요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표현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UN의 경찰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계속해서 EKD는 독일의 재무장과 관련하여 서방의 입장도, 동구권의 입장도 지지할 수 없으며, 절망적인 군비 경쟁을 끝내고, 정치적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강대국들에게 계속해서 호소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해치지 않을 자유가 주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끝으로 이 성명은 다음의 단락으로 EKD의 모든 회원 교회들와 신자들에게 권면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평화를 상징하며, 교회는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도울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세계의 어떤 강대국도 자국민의 단호한 내부 방어에 부딪친다면 감히 평화를 가볍게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짓 선전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증오의 영으로 몰아넣는 모든 시도에 단호히 맞서고, 전쟁 선동이나 두려움에 의한 정신 불안에 빠지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특히 심하게 분열된 민족들에게 해당됩니다. 독일 형제자매 여러분, 철의 장막 너머에 대해서도 서로에 대해 좋은 말을 하십시오! 서로를 신뢰하고 교제를 유지하십시오! 독일인이 독일인을 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게 평화를 구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축복을 보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에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손을 높이 들어 올립니다. 주 하나님, 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 이 모든 고통 받는 세상에 평화를 주소서!” 1950년 10월 초가 되자 EKD 내부의 재무장 반대운동은 더욱 강력해졌다. 니뮐러목사와 고백교회 대표자들은 1950년 10월 4일, 서독의 재무장을 옹호하는 아데나워 총리의 정치적 행보에 반대하는 두 개의 공개서한과 성명을 공포했다. 아데나워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니뮐러는 개신교 교인들은 어떤 재무장 정책에도 실질적으로 반대하며, 서독의 기본법이 그들에게 이 권리를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재무장이 전쟁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에 이 정책은 연방 영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이 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기본법의 규정으로 인해 이러한 설문조사가 국민투표로 실시될 수 없다면, 내각에 대한 새로운 신임투표를 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개신교 안팎에서 니뮐러의 입장에 대한 지지와 비판이 터져 나왔고, EKD와 주교회들의 여러 위원회와 기관들이 이 문제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서독의 언론들도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뤘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EKD가 동서독 독일인들에게 공통으로 호소하는 내용이 있었다. 첫째는 안보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가 같은 민족 안에서 증오와 적개심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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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 한국전쟁의 발발과 독일 개신교회의 재무장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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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이덕주 교수의 ‘전쟁의 과거에서 평화를 내다보기
- 본고는 한복협 6월 월례회 중 이덕주 교수가 발제한 ‘전쟁의 과거에서 평화를 내다보기-철원 기독교 유적지 답사를 통하여’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이덕주 교수(전 감신대 교수)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부탁받은 강연제목은 ‘6·25전쟁의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 가운데 ‘전망’ 부분이었다. 과거를 공부하는 역사학도에 ‘전망’은 수용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내가 예언자라면 모를까? 그렇게 고민하던 중 미국 워싱턴 웨슬리신학대학에서 예언서를 강의했던 구약학자 부르스 버치(Bruce Birch)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기억과 전망 사이가 예언자의 자리다.” 이사야도 그렇게 예레미야도 그러했다. 망국의 위기시대를 살았던 구약의 예언자들은 과거의 기억, 특히 오늘 당하고 있는 불행한 현실의 원인이 된 과거의 잘못된 행실을 들춰내 고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내용의 반 이상을 채운 후 “다가올 하나님의 날을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끝맺었다. 긴 회고와 짧은 예언, 그것이 예언자 메시지의 특징이었다. ‘기억(memory)과 전망(vision) 사이’. 그것은 예언자의 자리만 아니었다. 역사학자의 자리이기도 했다.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탐구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과거에서 지혜를 얻어 오늘을 창조적으로 살고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함이다. “바른 기억이 바른 미래를 연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학에서 기억과 전망은 떼어놓을 수 없는 가치이며 목적이다. 전망하기 위해 기억하고 기억을 바탕으로 전망한다. 그런 맥락에서 ‘6·25전쟁과 관련한 기억과 전망’을 구하기 위해 70년이 지났어도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 폐허와 상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철원을 찾았다.철원은 정말 볼 것이 많다. 철원과 한탄강 주변으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 우리 조상들의 살림터와 고인돌 유적이 널려 있고 비록 전쟁으로 인해 많이 파괴되고 자유롭게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후삼국시대 이 곳에 태봉국 수도를 건설한 궁예의 흔적과 고려와 조선시대 유적들을 만날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민족 수난, 특히 해방 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 갈등과 고난의 역사를 그 어느 곳보다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철원이다. 그런 민족 수난과 전쟁으로 인한 현장에서 이루어진 복음 선교의 역사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이 철원 여행의 목적이다. 더욱이 철원 여행에서 우리의 옷깃을 여며야 하는 것은 일제말기와 분단, 전쟁을 거치는 동안 이 지역에서 목회하던 목회자와 교인들 가운데 ‘순교자’ 12명이 나온 곳이기 때문이다. 백마고지와 노동당사, 그리고 무너진 예배당서울에서 철원 가는 길은 보통 의정부로 해서 포천과 운천을 통해 가는데 공휴일엔 교통체증으로 의정부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서울 서부에 사는 사람은 아예 자유로를 타고 문산까지 가서 적성과 전곡, 연천을 거쳐 가는 길이 편하다. 조금 돌지만 비교적 막히지 않고 또 3년 전부터 신탄역 북쪽으로 철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개방되어 지뢰밭 한가운데로 북한 땅을 지척으로 보면서 갈 수 있어 처음부터 철원 답사의 맛을 볼 수 있다. 이 길로 가다가 철원에 들어가기 직전, 6ㆍ25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중 하나였던 백마고지를 보고 갈 수 있는데 거기서 보면 전쟁으로 철원평야를 잃은 김일성이 너무 분해서 사흘간 먹지도 않고 그 평야를 내려다보며 울분을 토하고 갔다는 김일성고지가 멀리 보인다. 백마고지에서 나와 5분 정도 달리면 옛 철원읍 도심지에 도착한다. 거기서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데 왼쪽 길은 군인들의 통제하여 비무장지대에서 농사짓는 지역 사람들이나 사전에 출입 허락을 받은 관광객이나 성묘객들만 들어갈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부서진 기차가 서 있는 온정리역과 비무장지대 안 궁예 성터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해방 전 온정리에도 교회가 있었지만 그 터는 철조망으로 바뀌었다. 검문소에서 신철원 동송으로 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바로 유명한 철원 노동당사 건물이 보인다. 38선 이북이었던 철원은 해방 후 당연히 북한 영토로 들어갔고, 노동당에서 ‘한 동리에 쌀 2백 가마씩’ 공출하고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여 한 달 만에 지었다 한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많은 우익 인사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취조를 받기도 했는데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내부는 완전히 파괴되고 뼈대만 남았다. 철근을 쓰지 않고 벽돌과 시멘트로만 지었는데도 골격은 그대로 남아 있다. 노동당사에서 남쪽으로 바로 보이는 곳에 철원제일교회 유적이 남아 있다. 본래 철원읍에는 1899년 경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와 교회를 세웠는데 1909년 감리교와 선교지역 분할협정을 맺으면서 이 지역을 남감리회 선교부에 이양하는 바람에 철원은 감리교회 선교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예배당 주변으로 남감리회 선교부 사택과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병원과 학교, 여자관 건물이 있어 이곳이 김화 평강 포천 연천을 포함하는 철원 선교의 중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1937년 지은 철원제일교회 예배당 설계는 일본의 유명한 건축 선교사 보리스(W.M. Voris)가 맡았는데 그의 작품으로 아직 남아 있는 서울의 이화여대 대강당과 석조 교사 및 신세계백화점 등에서 볼 수 있듯 고전적인 낭만파 성향의 웅장미가 물씬 풍겨나는 석조 고딕 건물이었다. 1,200평 대지에 3층 건물로 지었는데 벽재를 화강암과 화산석으로 처리하여 견고성과 건축미를 더했다. 그러나 이 예배당 건물 역시 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동쪽 벽면과 남서쪽 모서리 기둥만 남고 모두 무너졌다. 주차장으로 변한 교회 앞마당에서 예배당까지 돌계단이 남아 있는데 중간 쉼터를 경계로 양쪽에 12단씩, 모두 24단으로 되어 있다.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한 것이겠지요.” 철원 답사를 안내하는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의 설명이 그럴 듯 했다. 옛날 우리 선배들은 계단을 쌓을 때도 성서적 의미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비록 지붕은 없어졌지만 예배당 입구, 현관에 들어서니 바닥의 색타일이며 2층 대예배실로 오르던 계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제말기 경기 북부에서 제일 아름다웠다는 예배당 건물의 위용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주일학교 교실로 사용했다는 1층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기초석만 남고 무너져 내린 벽면 흔적을 통해 2백 평에 달하는 예배당 규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폐허 한 가운데 서 있어 보라. 백 년 전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인들의 찬송과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조금 더 숨을 죽이고 들으면 삼일운동 때 지역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벌인 후 ‘철원애국단’을 결성해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다가 체포된 이 교회 박연서 목사와 청년 교인들의 속삭임이 들리고, 일제말기 여기서 목회하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교한 강종근 목사의 사자후(獅子吼),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하는 일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는 하지 말라!”는 외침도 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터지고 예배당이기에 안전하리라 싶어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미군 폭격으로 몰사한 철원 주민들의 아우성도 들린다. 그렇게 무너져 내린 철원제일교회 담벼락은 오늘 우리에게 예루살렘 ‘통곡의 벽’과도 같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은 기초를 쌓았던 벽만 남았고 오늘날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에게 자기 죄를 회개하며 애통하는 성스런 장소로 남았다. 이방민족에게 공격을 당하고 성전이 무너진 것이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인 것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장소가 되었다. 철원제일교회 무너진 담벼락도 마찬가지다. 일제말기 신앙 양심과 지조를 저버리고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전쟁 폭력에 동참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훼절, 분단시대와 전쟁 시기에 군인들의 전쟁과 별개로 민간인들마저 이념과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편을 가르고,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되고, 다시 피해가자 가해자가 되어 서로 죽이는 일에 몰두하다가 그 후손 대까지 증오와 불신의 유산을 남겨 준 ‘전쟁세대’의 과오를 반성하고 회개할 일이다. 통곡의 벽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함으로 예루살렘이 이름 그대로 ‘평화의 도성’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순례자들처럼, 아직도 분단된 한반도 휴전선 북방 한계선에 전쟁 폭격으로 무너진 채 남아 있는 철원제일교회 담벼락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이기적이고 당파적이며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편 가르고 살았던 왜곡된 신앙을 회개하고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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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이덕주 교수의 ‘전쟁의 과거에서 평화를 내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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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기독교학술원 83회 월례포럼 ‘진화적 창조론은 왜 잘못되었나?’
-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명예교수)본고는 지난 5월 25일 기독교학술원 제83회 월례포럼에서 나온 김영한 박사의 원고를 발췌 편집한 글이다. <편집자 주>머리말세계관은 신념으로서 오늘날 현대인과 학자들이 갖는 기본적 세계 이해의 관점이다. 개혁신앙을 가진 신자는 성경적 창조론(biblical creationism)을 믿는다. 그러면서 오늘날 과학적 이론과 대화하고자 한다. 창조론과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세계에 대한 입증되지 않은 세계관이다.점진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 내지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은 창조론을 오늘날 진화론과 타협하는 이론으로 생겨난 것이다. 오늘 학술원 세미나는 이에 관해 학자들의 견해를 듣고 진지하게 토론하고자 한다. 1. 생명의 자연발생론은 진화론 기본 가정으로서 과학적이지 않다.진화론자들은 ‘생명의 자연발생’을 주장한다. 즉, 생명이 없는 무기원소에서부터 화학적 진화를 통해서 원시세포가 우연하게 만들어졌고, 원시세포 생명체가 수십억 년 동안 자연적 진화과정을 거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파스퇴르에 의해 실험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어떤 생명체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과학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하는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틀릴 수밖에 없다. 우주에 ‘최고 수준의 정밀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최고 수준의 정밀도’가 유지되도록 장치(자연의 법칙)를 해놓았음을 뜻하며, 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의 결과’임을 뜻한다. 자연에 나타나는 질서와 아름다움이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하나님이 자연계에 적용되도록 만드신 과학법칙들이다. 2. ‘지질시대표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실제 지구 역사’가 아니다. 지구 나이 46억년과 우주 나이 138억 년은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 진화론자들의 추정치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운 「지질시대표」(1872년, 찰스 라이엘)는 지구지층을 진화된 순서대로 총 12개로 구분하고 각 지층에 나오는 표준화석을 정해놓은 것이다. 이는 실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진화론에 대한 믿음’에 따라 지층과 화석들을 껴 맞춰 넣은 것이다. 오늘날 발견되는 화석들은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진화순서대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뒤죽박죽 뒤섞여서 발견된다.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간 형태의 화석이 없다’는 사실은 화석기록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진화론 주장에 어긋나는 증거다. “사람들은 화석 기록에서 아주 많은 간격이 있다는 것과 이런 모든 간격들이 연결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석 기록은 어떤 종류의 동식물에서 아주 다른 형태로 전이되는 어떤 연속적인 기록도 보여주지 않는다.” 빈틈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빈틈의 진화론'이 더 타당한 표현이다.3.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은 성경적 창조론에 배치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혼합한 다양한 타협이론들이 있다. ‘진화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는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지만, 생물들을 종류대로 직접 창조하시지 않고 진화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생물 진화론은 ‘변이의 축적과 자연선택’에 의하여 원숭이와 공통 조상에서부터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진화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는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지만, 생물들을 종류대로 직접 창조하시지 않고 자연적인 진화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다는 이론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진화론과 배치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자연적 과정을 통해 일하시는 것처럼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으로서 다음같이 주장한다: “창조주가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생물을 창조했다고 본다.” “신이 자연선택이나 유전자 변이 등과 같이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진화의 방식을 사용해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읽고 해석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유신진화론은 창세기 내용을 ‘과학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진화론’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껴 맞추고, 조화시켜려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4. 진화론을 수용하는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은 성경적 창조론에 배치된다.유신진화론은 컴퓨터 및 유전학 등 인접 학문의 진보 덕분에 눈부시게 진화된 정교한 진화론으로서 “장기간에 걸친 변화”와 “모든 생물의 공통조상” 등을 기본 원칙으로 수용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약 5만 내지 10만 년 이전에 약 만 개체 정도의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되었다 한다. 이 경우 모든 인류가 아담 부부의 후손이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을 일으킨다.유신진화론자인 롱맨은 제임스 던이나 피터 엔즈를 인용하면서 아담이 실존 인물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문학적 인물과 역사적 인물을 관련짓는 유비는 이미 바울 시대에도 익숙한 것이었다”고 본다. 이에 반해서 개혁신학의 일관된 입장은 창세기 1-3장은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기록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와 개혁주의자는 아담이 반드시 실존 인물일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유일한 조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마서 본문이 강조하는 핵심은 아담의 대표성과 그 대표성과 통하는 그리스도의 대표성이다. 유신진화론과 맞서는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는 로마서 5:12-21 본문에 대해 아담의 역사성과 온 인류의 조상이라는 대표성을 성경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5. 유신진화론은 타협이론으로 개혁신학의 창조론과 조화되지 않는다. 1) “방법론적 자연주의”로서 진화론 자체와의 조화를 꾀하는 유신진화론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로 이어진다.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물리적 원리로만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다. 진화론의 기본 역학이 “우연적이고 인도받지 않은” 과정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 과정을 인도하셨다 한다면 유신진화론은 “인도받지 않고 지도되지 않은 과정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지도하셨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유신진화론은 이러한 지적 설계이론을 ‘간격의 하나님’으로 비판하나, 오히려 유신진화론이야 말로 ‘간격의 자연주의’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2) 유신진화론은 창세기 1-3장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보도하는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담의 역사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인 원죄교리가 무너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이해에 흠이 있다. 그루뎀이 제시하고 있는 유신진화론을 거부하게 되는 11가지 기독교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진실성. 2.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에 의한 직접적인 창조. 3. 자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 4. 자연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책임성에 대한 증거. 5. 하나님의 지혜. 6. 하나님의 선하심. 7. 하나님의 도덕적 공의. 8. 인류의 평등성. 9. 속죄. 10. 부활. 11 자연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가치. 창세기 1-3장에 있는 이 사건들 가운데 몇 개의 역사성이 부인된다면, 이 사건에 근거하는 많은 결정적인 기독교 교리들이 침해당하거나 상실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특별한 창조는 유신진화론을 인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6.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은 타협의 선상에 있다. 밀라드 에릭슨(Millard Erickson, 1932- )는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를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랜 기간을 거치는 일련의 행동 속에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각 “종류”의 최초 일원을 창조하셨다. 그런 다음 그 집단의 첫 번째 일원으로부터, 진화에 의하여 다른 것들이 발전한다. 다양한 종류들 사이에는 진화론적인 발전에 의하여 메워지지 않는 틈이 있다. 소(小)진화 (혹은 “종류내의” 발전)는 있었지만, 대(大)진화(혹은 “종류 간의” 발전)는 없었다라고 에릭슨은 결론짓고 있다.하지만 그루뎀은 『유신진화론 비판』(2017)이라는 책에서 오래된 지구론이 제시하고 있는 창 1장에 대한 해석은 “본문을 볼 때 가능하기는 하지만 자연스럽지가 못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루뎀이 보기에 홍수지질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지질학자들까지 포함해서 전문적인 지질학자들을 거의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젊은 지구 창조론의 선봉에 서 있는 켄 햄은 자신의 글에서 데릭 에이저 (Derek Ager)의 글을 하나 인용한다. 지질학계에서 찰스 라이엘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인용문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를 다시 기록하듯 지질학자들도 지구의 역사를 다시 쓴다. 지난 150년 어간에 지질학계는 찰스 라이엘의 점진적 균일론에 의해 압도되었다. 세뇌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격변적’ 사건들에 대한 제안은 전부 구시대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심지어 우스갯거리로 거부되었다.” 7. 죽음은 아담 이전에도 이미 있었는가?아담의 타락 이전에도 육체의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신학적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유신진화론은 물론 점진적 창조론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 개혁신학자들 가운데 아담 이전에 죽음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전의 동물의 죽음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보고 구절 하나를 확대 해석하여 특정한 과학 이론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타락 이전에 동산에서 동물들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식물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동물의 죽음이 전제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29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아담에게 육식은 노아 홍수 이후에야 주어진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타락 이전에 인간과 동물들은 채식을 하고 있었다. 식물은 죽지 않고서도 자기증식과 무진장 열매를 맺음으로 얼마든지 양식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식물의 용도이다. 다시 낙원이 회복되면 호랑이나 사자도 인간도 채식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사 11:7). 맺음말창조자 하나님의 계시는 불변하나 과학적 지식은 단편이다. 과학은 탐구하면서 단편적 맥락성이 점차 드러날 것이다. 현재 나오는 과학지식을 가지고 성경의 계시 지식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성경적 계시 신앙에 더 깊은 근거를 줄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타협할 필요 없다. 그렇다고 독선적인 신앙의 태도에 머무를 필요 없다. 그리고 나와 다르다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개혁신학은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대화할 자세를 지니고 성경적 창조론을 심화시키면서 이 우주를 하나님의 창조로서 아는 신앙적 지식을 천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은 보다 성경적 창조론에 대한 학문적으로 설득력있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새로운 연구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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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기독교학술원 83회 월례포럼 ‘진화적 창조론은 왜 잘못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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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5월 월례회 ‘해체되어가는 가정체계, 한국교회의 대책은?
- ’ 고명진 목사(수원중앙침례교회)본고는 지난 5월 8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충무성결교회에서 개최한 5월 월례회 중 고명진 목사가 발제한 ‘건강한 가정 회복 방안’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가정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가정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 2018년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전국 미혼 남녀(22~44세) 2,464명을 대상으로 한 통계 결과에 의하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2015년에는 남성의 경우 65%였는데, 2017년에는 50%까지 감소했다. 여성의 경우에는 2015년 40%에서 2018년에는 29%까지 감소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결혼 필요성/의향이 비교적 큰 폭으로 하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현재 우리나라 미혼 남녀들은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그다지 높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2018년에 있었던 보건사회연구원의 통계 조사에 의하면(50~69세, 2022명) 일명 신중년이라 불리는 50~60대에서 황혼이혼에 대해 41%가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5명 중 2명이 황혼 이혼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결혼을 유지하면서 별거 생활을 하는 이른바 ‘졸혼’에 대한 입장도 42%가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가정의 문제와 해결방안위에서 이야기한 내용 외에도 현대 가정을 위협하는 요인은 너무도 많다. 가정의 문제는 반드시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가족학의 권위자인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 박사는 그의 저서 <사람 만들기>에서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자동차는 자동차 공장에서 만들고, TV는 TV 공장에서 만든다. 자동차 공장에서 불량 자동차를 만들면 불량 자동차가 시가지를 달리게 되고, TV공장에서 불량 TV를 만들면 가정으로 불량 TV가 배달된다. 그렇다면 불량 청소년, 불량 남편, 불량 아내는 어디서 만들어 지는가? 바로 가정이다. 사람은 가정에서 만들어지기에 가정이 건강하면 그 가정의 가족들이 건강케 되고, 가정이 건전치 못하면 그 가정에 속한 가족들의 정신세계가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일이다.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사람을 만들어 사회에 배출하게 되면 이 사회와 겨레는 건강하게 될 것이다.”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UN에서도 변화하는 현 세계에서 가정의 역할과 책임의 중요성에 대해 정부와 민간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5월 15일 세계가정의 날’을 제정 했다. 가정이 기초이며,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는 절대 불변의 기준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가정을 만드신 하나님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정하신 가장 기초적인 사회적 공동체이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목적은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기 위함이고(창 1:28), 둘째는 독처하지 않고 서로 돕게 하시기 위함이며(창 2:18), 셋째는 희생적 사랑으로 상호 헌신하게 하시기 위함이다(창 2:24). 그런데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다는 말은 단순하게 자녀를 생산해 낸다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태어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분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태도 등을 배우고 훈련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것은 그 안에서 가족구성원들이 서로 교제하고 돕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유혹과 시험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 가정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격려와 위안을 얻게 하셨다.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희생적 사랑과 헌신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가정을 만드셨다.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가족구성원들은 서로를 향한 희생적 사랑과 헌신을 배움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역기능 가정과 역기능 세대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절실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잘 계승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의 가문처럼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에 실패하게 되면, 그 가정은 신앙적 역기능 가정이 된다. 더 큰 문제는 역기능 가정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 세대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사사기의 말씀이 그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 아주 중요한 표현이 나온다. ‘그 세대와 다른 세대’이다. ‘그 세대’는 하나님을 섬겼던 세대이다. 그 세대의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애굽에 임한 10가지 재앙, 출애굽, 홍해 도하, 마라와 엘림, 르비딤, 만나와 메추라기, 아말렉 전투, 시내산의 십계명 사건 등을 전혀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가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했기 때문이다.반면에 ‘다른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세대이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하여, 하나님 없이 살아온 세대를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교육, 신앙교육에 실패하였다. 신앙교육의 실패는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를 만들어 냈다.건강한 가정 회복 방안건강한 세대는 건강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오늘 날 사회문제의 대부분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무너진 사회는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는 3가지로 건강한 가정 회복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성경을 통한 가정의 중요성 교육서론의 통계를 통해 오늘 날 젊은 세대의 대부분이 가정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대학생들에게서도 보여 진다. 2017년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대학생의 결혼 의향에 대한 조사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대학생의 결혼 의향이 2012년 56%에서 2017년에는 37%로 19% 가량 감소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의향은 4%에서 14%로 증가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개신교 학생과 비 개신교 학생 간에 결혼 의향에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설문에 응답한 학생들 중 개신교 종교를 가진 학생들은 결혼 의향률이 54%에 이르렀고, 비 개신교 학생들의 결혼 의향률은 34%에 불과했다. 이는 개신교가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성경은 가정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십계명 중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내용이다. 그 중 가장 먼저 나오는 내용이 바로 가정에 관한 계명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시편 기자는 자식이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말하며(시 127:3),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시 128:3). 바울도 에베소서 5, 6장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를 이야기하며 가정에 대해 강조한다.건강한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아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가정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을 세워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수 있을 것이다.성경을 통한 가족 구성원의 역할 교육가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부분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바른 역할과 모습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발생한다. 건강한 가정이 되려면 무엇보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 각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남편은 남편다움을, 아내는 아내다움을, 자녀는 자녀다움을, 부모는 부모다움을 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마더와이즈’라는 사역이 있다. 이 사역의 가장 큰 유익은 엄마(아내)들이 말씀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발견하고, 엄마(아내)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말씀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마더와이즈’ 사역을 통해, 가족의 구성원들이 말씀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바로 알고 행할 때 가정이 바로 서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말씀교육의 장소로서의 가정 이해 건강한 가정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가정을 말씀교육의 장소로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자녀의 신앙교육을 교회에 의존한다. 물론 교회는 다음세대에 신앙을 전수해줘야 하는 중요한 책임이 있지만, 필자는 자녀의 신앙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다고 주장한다.신명기 6:4-9은 ‘쉐마’의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쉐마’는 ‘너희는 들으라’라는 뜻으로써, 히브리인들의 신앙고백이요 교육지침이 된 말이다. 모세는 신명기 6:4-5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근거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그것을 대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한다. 이 때 가르침의 주체는 부모가 된다. 신앙교육의 장소는 우선적으로 가정이 되어야 하며, 주체는 부모가 되어야 하고,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방법은 반복적으로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교육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부모는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말씀을 들려주며, 말씀으로 교감을 나눠야 한다. 어린 시절 가장 좋은 성경교육은 암송이다. 어렸을 때 외운 말씀은 평생 잊혀 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기 때문이다. 필자의 교회는 성경 500구절을 암송하는 ‘바이블 러버스’라는 사역이 있다. 500구절을 암송한 아이들에게는 대학 입학 시 장학금(500만원)이 수여되는데, 벌써 4명의 아이들이 성공했고 30여명의 아이들이 도전을 진행 중에 있다. 놀라운 사실은 아직 말도 서툰 3살짜리 아이가 수십 구절의 말씀을 암송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암송을 도전함에 따라 부모도 자연스럽게 말씀과 가까이 할 수밖에 없고,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신앙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가정들로부터 아름다운 간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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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5월 월례회 ‘해체되어가는 가정체계, 한국교회의 대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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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사태와 교회의 공(주일)예배- 샬롬나비 논평서
- 본고는 코로나19 사태에 있어 교회의 주일예배를 제재하고 나선 정부에 대해 샬롬을 꿈꾸는나비행동이 발표한 논평서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정부가 교회의 주일예배를 금지하거나 규제하려는 것은 헌법상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한국교회는 영상 예배 및 의료적 처방의 공적 예배드리고 코로나 종식 위해 기도운동 전개해야 한다.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 성 우한 시에서 처음 발생자가 나온 신종 감염병인 코로나19는 지금은 최대의 감염자를 낸 중국을 넘어 이탈리아와 이란 일본을 위시하여 미국과 유럽 중남미와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불과 수개월 사이에 전 세계 186개국(2020.3.22.기준)에서 감염자가 나올 만큼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가고 있으며, 사실상 전 지구적 감염병 유행의 단계 곧 판데믹 상태로 치닫고 있다.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WHO)는 드디어 코로나19 대감염(Pandemic)을 선언했다. 코로나19가 지구촌을 커다란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이 감염병이 가지는 놀랍고도 무서운 전염력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3월 20일 현재 기준으로 코로나19 감염 누적 확진자 수가 8652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탈리아가 중국, 이란을 넘어섰고 스페인, 독일, 미국, 프랑스에서 확진자가 1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2월 18일 대구신천지종교집단의 신자인 31번 확진자 이전과 이후가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 때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감염자는 대구 경북지역이 전체 확진자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신천지 신자가 전체 확진자의 62.7%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이 감염병이 급속도로 확산하게 된 것은 신천지집단을 통한 집단감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대구 경북지역이나 신천지 내의 집단감염은 확연히 줄어들고 있으나 대구 경북 외의 다른 지역들에서 병원이나 요양원 스포츠센터 콜센터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전파되는 집단감염이 전체 감염자의 17.5%를 차지하고 있다. 신천지를 포함 이러한 집단감염을 모두 합하면 전체 감염자 가운데 82.5%가 집단감염의 경우에 해당한다. 대규모 집단감염을 촉발한 대구 신천지종교집단을 언론에서 신천지교회로 보도함으로 신천지 외에 또 다른 종교집회 특별히 개신교회의 주일예배가 다시 한 번 지역사회감염의 주요 집단감염원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 염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편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개신교 내에서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전통적인 방식의 주일예배를 잠정 중지하고 온라인이나 가정예배 등의 대체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중소형 교회는 전통적인 방식의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일각에서는 주일예배를 고수하는 교회들에 대해 교회가 마치 이 전염병 확산의 중심에 있거나 책임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며 적개심마저 부추기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마침내 대한민국 국회마저도 3월7일 ‘코로나19 확산방지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가결하기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비롯한 일부 도지사와 시장 및 공권력은 교회의 예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겠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이에 샬롬나비는 코로나19사태와 교회 주일예배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1. 교회의 주일예배는 집단감염의 통로가 아닌데, 마치 교회에 집단감염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리한 처사이다.코로나19 감염의 교회 관련 사례들을 보도하는 언론보도와 교회의 예배지속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조사 결과들을 근거로 교회의 예배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국회의 결의나 이재명 도지사의 언급들은 코로나19 사태의 책임을 일정부분 교회로 돌리고 코로나19로 야기된 사회적 분노의 감정을 교회를 향해 표출하도록 유도하는 측면이 있다, 교회의 주일예배를 집단감염의 중요 통로로 지목하면서 주일예배를 지속하는 교회에 집단감염의 책임을 돌리려 하는 것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교회관련 감염 사례들을 보면 종로구 M교회의 경우는 코로나19 발생 초기 사례로 마스크 착용 등 안전조치가 일반화 되지 않았던 시기에 발생한 것이며, 강동구 M교회 부목사 및 교회 접촉자 등은 2회의 재검사에서 모두 음성이었을 뿐 아니라 M교회 교인 전원이 음성 판정을 받았다. 부산 Y교회는 주일예배 참석이 아닌 청년수련회였고 그마저도 신천지 이중등록자와 관련이 있다. 대구 S교회와 수원 S교회 확진자 역시 신천지 이중등록자 감염 사례이며, 거창 K교회는 기독교의 이단인 구원파의 분파이고, 광주 Y교회 예배 접촉자 역시 모두 음성이었다. 이상의 사례들로 볼 때 현재까지 직접적인 교회의 예배참석으로 인한 집단감염의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고, 현재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철저한 방역과 함께 마스크를 착용하고 밀집하지 않은 상태로 드리는 예배는 감염의 위험이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신천지를 통한 집단감염과 신천지 외의 병원이나 요양원 스포츠센터 콜센터 등에서 발생한 기타 집단감염을 합치면 전체 확진자의 82.5%가 집단감염의 경우로 집단감염이 전염병 확산의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중 개신교회와 관련한 것은 0.7% 정도로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직접적으로 교회의 예배참석을 통한 감염이 아니고 신천지 위장교인과 관련되었거나 수련회에서의 감염이다. 마스크 착용, 손소독제 사용, 거리두기 등 방역의 기본을 지키고 있는 한 교회의 예배는 오히려 청소년들의 PC방이나 학원을 통한 감염, 노래방 나이트클럽 같은 집단무도회장이나 유흥업소, 극장 마트 커피숍 등과 같은 다중이용시설, 직장인들의 집단적 사무실 환경이나 대중교통 등을 통한 집단감염의 가능성보다 더 낮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과 더 부합하다.2. 정부가 의료협회의 권고를 따랐더라면 대구지역 감염사태는 이만큼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2월 7일 중국 전역 입국금지를 내린 싱가포르, 대만, 홍콩은 방역에 성공했다.코로나19 전염병은 초기에는 중국으로부터의 외부 감염원 유입을 통한 개인전파 단계로부터 시작되어 지역사회전파 단계로 나아갔다. 특별히 2월 18일 신천지 31번 확진자 이후로는 집단감염이 주를 이루면서 급속한 지역사회 확산의 단계로 나아갔고, 이런 가운데 신천지는 국내 코로나19의 최대 감염원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천지가 방역의 권한과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며 이 또한 원천적으로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가 질병관리본부나 의협 등 전문가 집단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전염병 방역의 기본인 “초기 감염원 외부유입의 차단”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구 신천지 코로나 집단감염은 2월 9일과 16일 예배를 통해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구 신천지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그 이전까지 방역의 권한과 책임이 있는 정부는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안심하고 일상생활을 할 것을 당부한 바 있다. 그즈음 대통령은 “조기 종식” 발언을 내어 놓았고, 복지부 차관은 “집단행사를 취소,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신천지 신자들은 이러한 정부의 권고를 따라 일상적인 신앙행위를 했을 뿐이다. 만일 정부가 사회적 확산과 집단감염의 가능성을 경고했더라면, 그리고 사회적 확산과 집단감염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종교적 집회에서의 기본적인 방역 수칙을 알려주거나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종교시설 등에 대한 예방적 방역을 했더라면 신천지 신자들이 자신들이 감염된 것을 알았더라면 현재와 같은 사태로 발전하지 않았을 수 있다. 대만은 3월 16일 현재 확진자가 67명(사망 1명), 싱가포르는 243명(사망없음)이다. 홍콩도 중국에 가장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국경 폐쇄로 바이러스 확진자 수치를 낮게 유지했다. 이 세 나라는 2월 7일 중국발 전역 입국 금지 조치를 취하여 초기 봉쇄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3. 방역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정부에 있고, 예배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교회에 있다.기본적으로 교회는 방역에 관한한 권한이나 책임이 없고, 마찬가지로 국가나 정부는 교회의 예배에 관한한 권한이나 책임이 없다. 방역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있고, 예배와 관한 권한과 책임은 교회에 있다. 이것이 카이퍼가 말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ity) 사상이다. 그러므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교회의 예배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선제적으로 집단감염의 위험에 대해 종교단체들에 적절한 방역대책을 수립하여 지원하여야 한다. 설령 부득이 하다고 판단될 경우라도 종교단체들에 이를 알리고 이해와 협조를 구하여야 하지 이를 강제로 규제하거나 협박하거나 금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4. 일상생활(관공서 및 지하철, 대중교통, 커피숍, 시장, 영화관, 대형식당 등 사회 문화활동 등)이 지속되는 한 교회의 공예배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단 공예배는 질병관리본부의 의료적 지침을 따라 제한적으로 드려야 한다.신약성경에 ‘교회’라고 번역되고 있는 성경 원어는 ‘에클레시아’이고 이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의 용어는 ‘회중’으로 번역되고 있는 ‘카할’이다. 이러한 성경 원어에 입각한 교회의 정의는 “구원 얻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정한 날, 정한 장소에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적 부르심을 받아 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 교회이다. 이런 점에서 지교회의 당회가 하나님의 이름의 권위를 가지고 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배하도록 부르는 공예배로서 주일예배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요 이유이다. 공예배가 교회이고 공예배로 모여 예배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일 수 없다. 비록 공예배로 모인 모임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지역 내의 신자들이나 또는 신자들의 가정을 교회라 부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예배로 모이는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교회로 불릴 수 있다. 십계명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하고 있으며 주일에 가장 중요하게 행해져야 하는 것이 예배이다. 십계명은 시대를 따라 불변하는 도덕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십계명의 제4계명인 안식일 규례는 오늘날 주일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주일성수를 온전하게 지킬 것과 주일 공예배 참석은 신자의 의무로 말하고 있으며 이를 잠정적으로라도 중지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성경은 말세의 징조로 여러 가지 재난들을 언급하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모임을 폐하지 말고 도리어 모임을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다(히 10:23-25). 대 재난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기 때문에 공교회는 공적 의료기관의 의료적 지침을 최대한 수용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관공서, 대형백화점, 마트, 지하철, 대중 교통, 커피 숍, 식당 등 공공생활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도 이에 준해서 집단 감염 방지의 의료적 지침을 준수하면서 모임을 제한적으로 가져야 한다. 그 방식은 정부가 명령할 일이 아니라 각 교회에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경기도와 시·군 공무원 3,095명이 지난 3월 15일 도내 교회 예배방식을 전수 조사한 결과, 6,578개 교회 가운데 60%인 3,943개 교회가 영상예배로 전환했고, 집회예배를 실시한 2,635개 교회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감염예방조치를 준수하는 등 감염병 확산방지를 위해 협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5. 정부나 지자체가 교회의 주일예배를 금지하거나 규제하려 하는 것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에 대통령까지 나서 이를 지지하는 것은 국가주의적 발상이다.지역사회감염의 단계로 발전한 코로나19 사태가 더 확산되지 않도록 사회적 거리두기가 권장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가운데 주일예배를 지속하는 교회들에 대해 일부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들이 주일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에 대해 이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거나 법적 제제를 가하고 있다. 경기도 행정1부지사는 3월 17일 브리핑을 갖고 ‘코로나19 감염예방수칙 미준수 종교시설 밀접집회 제한명령’(기독교계에 영상예배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부득이 영상예배 전환이 어려운 소규모 교회에 대해서는 규칙을 제시했다. ①교회 입장 전 발열 기침인후염 등 증상 유무 체크 ②교회 입장 시 마스크 착용 ③교회 내 손소독제 비치 활용 ④예배 시 신도 간 2m 거리 유지 ⑤예배 전후 교회 소독 실시 ⑥예배 시 식사 제공 금지 ⑦예배 참석자의 명단 및 연락처 작성의 7가지 집회제한 조치를 발표하고, 만일 7가지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제한명령을 위반해 종교집회를 개최했을 때 확진자가 발생하는 경우, 감염원에 대한 방역비와 감염자 치료비 등 제반 비용에 대한 구상권이 청구될 수 있다고 밝혔다.그러나 이는 헌법 제10조에 명백히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정부의 권한과 책임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강행”이라는 말을 통해 이들은 마치 주일예배를 지속하는 교회가 무슨 범법행위를 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그러나 주일예배는 강행이 아니라 교회의 마땅한 종교적 행위를 지속하는 것으로 이는 범법행위가 아니다. 이들은 교회의 주일예배를 규제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는 종교선택의 자유를 말하는 것임으로 주일예배를 제재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는 종교행위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만약 직업 선택의 자유를 말하면서 그 직업에 관한 필수적인 행위를 제재한다면 직업선택의 자유란 명목상의 허울 좋은 말일 뿐인 것이 될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선택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그 종교가 마땅히 규정하고 있는 종교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교회의 종교활동으로서의 예배는 교회의 필수적인 종교행위이며 이에 대한 관장은 전적으로 교회가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시행한다. 정치인이나 관료가 이를 관장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만한 발상이며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헌법적 행위이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3월 20일 “여전히 예배를 열겠다는 교회들이 적지 않아 걱정”이라며 “종교집회에 대해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지사가 취하고 있는 조치를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이는 교회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주일예배를 유지하는 교회와 신자들은 누구보다 선한 시민들이며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코로나19 사태가 지금의 형편에 이르게 한 근본 원인인 국가방역의 초기 실패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공적사과는 기피하고 주일예배를 유지하는 교회들에 대한 비난이나 위협을 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하며 주일예배를 유지하려는 교회들을 코로나19 사태의 속죄양으로 삼으려는 듯한 여론몰이를 중지해야 한다. 정교분리 원리는 이럴 때 적용되어야 한다. 국가는 예배에 관련하여 교회의 자율적 조치와 결정을 존중하고 일임해야 한다. 간섭해서는 안 된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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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사태와 교회의 공(주일)예배- 샬롬나비 논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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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②
- 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월 10일 종교교회에서 개최한 1월 월례회 중 박종화 박사가 발표한 ‘사회통합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사회통합은 사회의 심포니 내지 오케스트라 연주이다 다양한 악기가 자기만의 독특한 음을 자유롭게 낼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려면 모든 악기의 음은 화음을 이루게 내야한다. 화음이 아니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소음은 다름 아닌 바로 갈등이다. 사회의 현상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여 보면 소음으로 뒤범벅이 된 오케스트라는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이고,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는 다양성 속에 하나로 통합된 사회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아닌 아름다운 화음을 추구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리는 불안하고 시끄러운 갈등을 딛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사회적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야 한다.사회적 심포니 내지 사회적 오케스트라의 원형은 그리스도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라고 자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몸통”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통에 붙어 사는 “지체”인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공동체 만큼 다양한 인간집단이 어울려 사는 사회공동체는 없다. 출신성분도, 고향출신도, 학력이나 지위나 역할도, 성별 세대별 차이도, 타고난 은사도, 실로 다양한 구성원이 “그리스도 신앙”을 공동의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신앙의 화음 공동체이다. 이런 화음을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또는 반대로 “일치를 이루는 다양성”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의 심포니요 신앙의 오케스트라이다. 문제는 오늘날 일반 사회가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교회가 사회의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아름다운 심포니가 아닌 시끄러운 소음의 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시 화음을 배우고 실행해야 한다. 모든 지체가 다시 붙어 있어야 할 몸통으로 돌아와야 한다. 몸통에 붙어 있는 한 각 지체의 기능을 아름다운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신앙의 심포니를 연주하면 된다. 사회통합의 틀도 바로 이러한 일치와 다양성의 조화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 사회통합은 개인의 자유가 배제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아니다. 다양성을 배제한 전제적 획일주의 사회도 아니다. 몸통인 헌법에 보장된 “자유, 인권, 정의, 복지, 평화”라는 기본 가치가 우리 사회 심포니의 대본이다. 그것은 다행이도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샬롬”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먼저 갈등하는 당사자나 집단이 이런 헌법적 가치를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명실 공히 기본으로 삼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예언자적” 비판적 통찰과 비판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다양성은 기본 내지 기본을 공유한 전제하에서의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집단이 정당한 바탕위에서 나름의 심포니나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고 판단되면, 연주의 질과 뉴앙스와 표출방식 등에 다양성이 있는 것은 한국사회를 보다 넓고 높고 깊은 민주적 선진사회의 모습으로 보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화해와 상생을 이루는 “제사장적” 사명인 것이다. 통합의 방식은 사랑이고 최고치는 원수 사랑이다사회통합의 기초로 삼는 기본가치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유하고 실천에 옮기는 힘과 동기는 “사랑”이라 믿는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여 갈등의 극복과 통합에 나서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1 4:8,16). 그리스도를 보내심도 그의 사랑 때문이고(요 3:16),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의 계명(마 22:34-40)이다. 더 심도 있는 사랑의 계명은 “원수사랑”의 계명(마 5:43-48)이다. 어쨌든 사랑의 부재가 갈등이요 사랑의 회복이 통합이다. 개인도 사회도 그렇다.앞서서 헌법의 기본가치 또는 샬롬의 기본가치를 설명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 사랑의 척도가 이웃사랑에 있고 이웃 사랑의 목표가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산이고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들어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웃 사랑이 없는 자유는노예사회의 경우처럼 주인의 독재적 자유와 부림 받는 노예의 무자비한 속박을 낳는다. 정치적 권력의 체제에서 사랑 없는 자유는 우리 인류의 역사상 권력자의 극우적 파쇼주의 지배를 낳곤 했다. 자유는 항상 상대방 앞에서의 자유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인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항상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의”의 함정에 빠져서 적대관계의 괴물을 낳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극좌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함께 적대적 냉전의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 내었다.사실 우리시대의 사회적 갈등 현상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갈등이 상호 표용할 수 있는 생산적 내지 상호 교정의 상태가 아니라 적대화되고 진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념갈등이 온갖 사회갈등의 블랙홀처럼 역기능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의 길로 들어서려면 하나의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사랑”의 계명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먹는 소위 남남 갈등 및 남북 갈등의 정상이 마로 이것이다. 속칭 “예수 믿고 천당!”의 구호대로 한다면 “원수 사랑해야 천당!!”이라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웃사랑을 자기사랑처럼 실천하기도 힘든데, 원수 사랑을 형식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 사랑처럼 베풀 수 있나? 여기서 두 가지 처방을 살펴보겠다. 하나는 적대관계에 있는 당사자나 당사국 사이에서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는 “지성적 원수사랑”(intelligente Feindesliebe)이 필요하다는 서구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의 제안이 있다. 요지는 대충 이러하다. 원수관계의 핵심은 증오인데 원수관계의 현실을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수를 우리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듯이 원수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면서, 두려움과 증오의 현실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면밀히 알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간의 두려움과 증오가 증폭되면 전쟁의 위협으로 기승하기 때문에, 우리 편이 먼저 두려움과 증오의 강도를 줄이면서 전쟁가능성을 막고 오히려 평화를 향한 선제적 조치 곧 단계적인 원수 사랑의 발걸음을 떼자는 전략적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남남 갈등의 현장에서 적용됨으로 폭력과 파멸을 단계적으로나마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남북 갈등에 있어서 이 방식을 적용함으로 전쟁발발로 인한 참혹한 비극을 차단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평화적 선제조치일 것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갈등의 당사자 가운데서 앞서 말한 삶의 기본가치에 내공이 상대적으로 크게 쌓인 측이 우선권을 쥐고 실행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과는 가치관 경쟁에서 비교도 못할 정도로 성공한 남한이 선제적 평화공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남북 간에 평화공존이 이루어 질 경우,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공존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서 기본가치관을 중심으로 남북 간에 선의의 경쟁과 생산적인 갈등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여기서 승리하는 쪽으로 통일의 길이 수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또 한 가지 원수 사랑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러하다. 상대방을 원수로 설정하고 사는 한 자기 자신의 뇌리와 가슴 속에 항상 원수가 꼿꼿이 서있으며, 자기 자신의 판단과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 자신이 종이고, 원수가 원치 않는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자유가 아닌 속박의 틀이다. 여기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사랑과 자기의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원수관계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인이 되고, 나아가 원수에게 지지 말고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로마서의 해법을 인용해본다(롬 12:17-21). 요지는 이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적대관계라는 갈등은 처참하다. 파멸의 블랙홀이다. 적대관계에 편승하면 적대관계의 노예가 된다. 이념적 적대관계는 이념의 노예를 만든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적대관계는 증오의 노예를 만든다. 신과의 관계가 적대관계이면 스스로 우상이 되어 파멸로 간다. 교리적으로 적대관계를 만들면 이단사설로 파멸의 길로 간다. 자기 스스로와의 적대관계는 자살을 낳는다. 이웃과 적대관계를 맺고 살면 살인과 사형으로 치달린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나, 갈등이 악종이 아니라 선종일 경우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사회에서 상보적 생산성으로 승화시켜 오히려 사회의 폭과 깊이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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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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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①
- 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월 10일 종교교회에서 개최한 1월 월례회 중 박종화 목사가 발표한 ‘사회통합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 창조주와 여러 피조물 사회통합의 시급성 배후에는 사회갈등과 분열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혹자는 현재의 상황을 전례가 없는 “초 갈등 사회”로 진단하기도 한다.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안은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상황과 갈등의 성격과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전문적이고 공감되는 처방을 내어 놓고, 나아가 이를 구체적으로 사회의 통합으로 이끌어 가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기독교적 역할을 묻고 답하려면 신학적, 신앙 고백적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갈등과 통합의 현장은 인간사회이며, 그 주인공은 인간이며, 사회와 인간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세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하나는 창조주는 창조된 인간과 세계를 보시고 “참 좋다”고 하셨고, 이 참 좋은 인간세계의 모습을 “샬롬”(Shalom)이라고 성서는 증언한다. 샬롬은 “인간세계의 평화와 정의 및 자연세계의 보전, 이 둘이 합쳐진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뜻한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갈등은 샬롬을 깨뜨리는 잘못이거나 심지어 파괴시키는 죄악일 수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저주를 몰고 온다. 동시에 기독교가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작업에 나서고 동참하는 것은 창조주가 선물로 주신 샬롬을 회복하라는 사명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축복을 동반한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 앞에서 “책임지는” 결단의 행동이 기독교적 사명이다.둘째로는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의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으며, 인간사회는 이 형상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피조물끼리의 갈등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요 통합은 그 형상의 회복이다. 셋째로는 갈등과 통합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십계명 제1계명이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마라.”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려는 파괴적 갈등은 거개가 갈등의 당사자 개개인이나 집단이 상대방을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보고 매도하거나 적대화로 몰고 가는 과정에서 생긴다.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의 획일성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절대화요, 나아가 자신의 신격화이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어느 이념이나 체제나 제도도 신일 수 없고 신격화될 수도 없다. 절대적인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신의 형상을 지닌 다양한 인격체이다. 십계명 제1계명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위한 인권선언이고, 진정한 민주사회의 성서적 근간이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마라 “중심”이 되라기독교 세계가 갈등을 극복하며 통합을 추구하면서 내세우는 원칙이 있다 (잠언 2:27):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라”(개혁판),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라”(표준 새 번역판). 상식적이지만 몇 가지 주석이 필요할 것이다. 가는 방향은 좌나 우가 아니다. 방향은 앞이다. 역사의 방향은 뒤도 좌도 우도 아닌 “앞”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앞”에 계시다. 좌와 우는 방향이 아니라 앞으로 가기위한 두 날개이다. 인간의 몸은 좌우의 두 팔, 두 다리, 두 눈, 두 귀로 움직인다. 둘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 건강한 몸으로 산다. 어느 한 쪽이라도 실족하면 장애자가 된다. 중풍환자가 된다. 그러면 미래의 진로를 막는다. 갈등을 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대안은 좌우를 통합하되 “앞으로”, “미래로”를 공동의 방향으로 수용케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방안이다. 예컨대 “선진 자유 민주사회, 선진 공정 복지사회, 선진 문화예술시대, 민족 통일과 평화시대”라는 우리 사회 미래의 비전을 공유케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래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보다 더 깊고 넓고 높게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이라고 확신하며 실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하나 현재 우리사회의 “초 갈등” 현상은 건강한 몸을 지탱하는 건강한 두 팔과 다리의 경쟁이나 생산적 갈등이 아니라, 극좌와 극우의 극단주의가 대결하는 파괴적 갈등이다. 그것은 잠언이 경고하는 “빗나감”과 “치우침”의 전형이다. 두 팔과 다리 중 한쪽으로 빗나거나 치우치면 중풍환자가 된다. 그런 사회는 장애사회요 중풍환자 사회이다. 극단주의는 그것이 극좌이든 극우이든 사회를 경직시킨다. 좀먹는다. 파괴한다. 빈부 간에 극단으로 치닫는 격차가 그러하고, 노사 간의 처절한 극단적 갈등이 그러하고, 힘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가 갑과 을의 관계로 극단화되어 가는 모습이 그러하고, 잠정적으로 수그러진 모습이나 여전히 극단적 폭발성을 지닌 지역차별과 갈등이 그러하고, 때 늦고 낡은 구시대적 이념갈등이 그러하다. 특히 이념갈등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경우 신앙화로 치달아 신의 이미지도 이념화 시키는 과오를 즐겨 범하고 있기도 하다. 극단주의로 치닫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자기편이 아니면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적 진영논리를 생성해 낸다. 편 가르기에 몰두하고 증오를 신념화 한다. 또 하나 극단주의는 절대적 “자기 의”에 빠지고 나아가서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우를 범한다. 그것은 십계명이 경고하는 정치적 우상화 내지는 우상체제로의 일탈을 몰고 온다. 기독교 신앙의 공헌은 종교적 우상화만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우상화, 특정 이념이나 체제의 우상화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십계명 정신에 따라 모든 피조물의 “평등한 자유 민주체제”를 강조하며 그 모범적 실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셋째로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공동의 바탕은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주는 일이다. 통합은 좌우갈등의 적당한 미봉책도 아니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무색무취한 “중립”도 아니다. 쌍방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현장에서의 중립이란 결과적으로는 패자를 버리고 승자에 기생하는 편파적 태도일 뿐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무관심으로 거부하거나 비겁함으로 도피하는 것은 “무작위 범죄”에 속하는 잘못이다. 중심에 서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고 정당한 자의 편을 들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예언자적 사명”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에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꾀를 부려 갈등에 개입도 안하고 무감각한 구경꾼이 취하는 “중간”도 아니다. 중간은 빈 공간이 아니라 갈등의 쌍방이 너 죽고 나죽는 공멸이 아니라 너 살고 나 사는 상생의 광장으로 이끌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생의 광장을 제공하고 화해로 이끄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제사장적 사명”이다. 편의상 진보적인 예언자적 사명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제사장적 사명은 갈등을 정당하게 해소하거나 또는 상생의 통합으로 이끌어 주는 상호보완적 사명이다. 건강한 몸의 양 팔 내지 양 다리의 상보적 역할과 같다. 이 상보적 사명과 역할의 핵심은 몸이라는 중심이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중심은 국민이 채택하고 의지하는 “헌법”이다. 헌법은 국민의 삶의 기본가치를 담은 중심이요 규범이다. 이 사실을 갈등의 현장에서 분명히 진실과 상생의 잣대로 밝혀주어야 한다. 헌법의 규범을 두고 해석과 적용에 갈등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빛에서” 이를 밝혀줌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은 한 손에 헌법규범을 다른 한 손에 성서를 들고 사회 갈등 해소와 통합노력을 경주하되, 헌법을 성서의 눈으로 해석하고 갈 길을 제시함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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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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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 한국교회 개교회주의 극복과 교회 공동체성 함양 방안
- 본고는 지난 1월 14일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가 주최한 제1회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가 발제한 ‘한국교회 개교회주의 극복과 교회 공동체성 함양 방안’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교파주의의 역사적 유래 1) 신학적 요인교파주의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교파 분열이 없었던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선교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교파 분열이 있었던 미국 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은 데서 기인한다.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선교를 받은 한국장로교는 보수적인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평양 신학교는 주로 미국의 청교도 신앙을 가진 선교사 사무엘 마펫, 윌리엄 베어드, 언더우드 등을 중심으로 보수교회를 형성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를 받은 함경도는 보다 자유로운 신학의 영향을 받았고 김재준, 강원룡 등은 보다 자유스러운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 「신학지남」을 중심으로 하여 박형룡과 김재준의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해방 이후에 1948년 신사참배 반대파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 중심의 고려측이 갈라져 나가고, 1953년에 예장과 기장이 갈려지게 되었다. 1959년 에큐메니칼 운동 참여 이슈로 인하여 예장 안에서 합동과 통합이 갈라지게 되었다. 1979년에 합동측에서는 교단의 비리문제로 주류에 대항하여 비주류가 갈라져 나가게 되었다. 다시 지방색으로 인하여 호남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개혁측이 갈라져 나갔다, 개혁측은 지도자 정 목사의 소천 전 유언에 따라 다시 합동으로 되돌아 왔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3천만환 사건 이전에 이미 신학적 이슈가 있었다. 박용규의 주장에 의하면 “3천만환 사건이 이전부터 총회 안에 일고 있는 에큐메니칼측(WCC)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대립으로 인한 총회 갈등을 가속화시킨 요인이기는 했지만, 분열의 1차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당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시대적 배경과 사료들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분석한다면 주된 요인은 WCC 문제로 압축된다.”2) 파당적 요인1912년 하나의 장로교단으로 시작된 한국장로교는 딱 1백년 만에 300개 교단으로 나뉘었다. 고신, 기장, 통합, 합동, 합동과 개혁, 대신, 백석. 고신 안에서도 고소측과 반고소측 외 장로교 이름을 가진 각종 군소교단이 3백개 이상이나 된다. 이는 군소 보스(boss)를 중심으로 수십 교회 내지 수백 교회가 이합집산함에 따라 큰 교단의 노회 정도의 군소교단이 생긴 것이다. 연합운동에서도 자유로운 신학을 표방하는 KNCC운동에 반대하는 보수교회가 1989년 한기총이란 연합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는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북한에 사랑의 쌀 보내기운동 등 지난 23년 동안 보수교단들의 연합중심으로 사회봉사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1989년 한경직 박맹술 임옥 이성택 한명수 정진경 이봉성 김경래 등에 의해 창립된 한기총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 진보교단의 대표성을 가진 교회협(KNCC)이 빈민운동과 인권운동 및 남북통일운동 등을 추진하며 당시의 군사정부와 부딪치자 교계의 새로운 연합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보수를 지향하는 원로들이 만든 단체이다. 처음엔 각 교단 원로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곧 교단의 대표성을 가진 연합체가 되었다.정부가 교계의 대표성을 한기총에 힘을 실어 주자 대표회장 자리를 놓고 욕심을 부리는 교단 정치인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돈선거’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한기총이 흔들리고, 한국교회에 연합과 일치가 깨어진 배경에는 일부 인사들의 ‘돈질’에 그 원인이 있다. 교계 주변에서 활동하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생존 전략에 소위 지도자들이 말려 들었다. 교계에서 매달 상당한 액수의 ‘이단대책비’를 거두고 이를 나누어 먹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은 자신들이 둥지를 틀고 있던 한기총으로부터 위치가 흔들리자 곧바로 이단 문제를 제기하며 두 세력을 이간질 시켰다. 이와같이 하여 한기총은 지난 2012년부터 금권선거 ‘10당 5락’과 각종 부패와 권력다툼, 이단문제(다락방, 박윤식 등)의 분열 등으로 인해 비리에 반대하던 자들을 중심으로 한교연, 한교총으로 분열되어 나갔다. 한국교회 개교단주의1) 한 교파 안에서도 예수교단과 기독교교단으로 갈라져 있다.한국교회 안에서는 같은 교파 안에서도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라져 있다. 장로교에서 예장과 기장, 감리교 안에서 예감과 기감, 성결교 안에서도 예성과 기성, 침례교 안에서도 예침과 기침, 하나님의 성회 안에서는 여의도측과 비여의도측이 갈라져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의 고집, 교권, 명예욕 때문에 예수(보수측)와 그리스도(진보측)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 2) 합동측 장로교회의 분열은 소종파 의식에 근거한 것이다.1980년대 보수 장로교 합동측은 합신측, 개혁측이 갈라져 나갔다. 이들 가운데서도 다시 수많은 소종파 장로회들이 예장 간판을 달고 군소 교파를 세우고 미인가신학교를 우후죽순격으로 세웠다. 문공부에 등록된 예장 교단만 하더라도 3백 여개에 이르렀다. 종교관계를 다루는 공무원들에게 개신교는 윤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종교로 낙인찍혔다. 이성적으로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동일교파(예수교장로회) 이름을 가진 수백 개의 교단 등록을 실무자가 취급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개신교란 연합도 할 줄 모르고 서로 헐뜯는 이상한 소종파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3) 보수교회일 수록 교단이 다르면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도 전혀 교류가 없다.보수교회일수록 친구 성직자라고 할지라도 교단이 다르면 큰 장벽이 둘 사이에 끼어 있어 인간적인 교제도 쉽지 않다. 특히 ‘강단교류를 금지하라’는 교단 지시는 이러한 목회자 친구 사이를 갈라놓기도 한다. 그 예가 외국에서 신학공부 하러 가서 유학시절에는 좋은 친구였는데 한국에 돌아오면 교단의 장벽에 막혀서 그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교역자들이 이러하니 평신도들도 교단이 다르면 교회문제나 신학문제에 있어서 소통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심지어 인간 관계에도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파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고백의 기초 위에서 신앙표현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신앙적 교제가 개방되어야 한다.4) 성직자 중심, 남성 위주, 종파적 교회다.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성직자가 모든 일을 주도하고, 여성은 봉사만 하도록 하고 남성들이 교회를 운영한다. 그리고 보수주의를 지향할 수록, 신앙고백보다는 파벌적 이익에 따라 운영되어 사회적 공공성(공정성과 윤리성)이 많이 결여된 교회가 적지 않다.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아 세상에서 소외되고 실패하는 것이 좋은 신앙을 갖는 것으로 왜곡된다. 교회 헌금이 교회 자체 교역자 인건비와 교회 교육관 건립 및 기타 교회 재산 확장을 위하여 대다수 사용되며 빈민구제, 제3세계의 의료 교육 지원 등 사회봉사를 위한 사용은 지극히 미비하다. 교회 운영에 있어서는 성경보다는 가부장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5) 한국교회 안에 깊이 들어온 기복신앙은 세상성공이 신앙성공으로 오도하게 한다.교회 안에서 뿌리 내린 기복신앙은 하나님 신앙과 받는 복을 바로 세상 성공(사업, 출세, 자녀교육, 건강 등 성공)으로 평가한다. 번영과 성공이 바로 기도의 응답으로 보고, 실패와 낙방과 어려운 처지에 들어감 등이 불신앙과 예배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왜곡한다.십자가 신앙이란 이 세상의 어려움 가운데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있으며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십자가 신앙은 세상사에 있어서 불의와 부정직과 비윤리와의 타협의 거절과 자기 비움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십자가 신앙이 생활신앙으로 설교되고 가르쳐야 한다.6) 목회자들의 언어가 너무 종파적이고 보편성이 없다. 교회는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회를 위해서 존재한다. 이 불신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언어와 행동이 종파적이 아니라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자를 구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보편성을 지닌다. 오늘날 그리스도교회는 신앙고백은 분명히 하되 우리의 행동과 언어는 세상 불신 사람들에게 소통될 수 있도록 공공적인 언어와 윤리성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전도 자체를 위한 구제나 사회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솔히 보여주는 구제나 사회봉사가 결국에는 이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연변지역의 동포들이나 이슬람 지역의 주민들에게 전도 이전에 지속적으로 보내어 주는 사랑의 구호물은 말 없는 전도로 나타나는 사실을 선교사들은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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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기획
- 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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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 한국교회 개교회주의 극복과 교회 공동체성 함양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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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교회 위기극복: 새로운 교회연합방안 모색
- 본고는 지난 1월 14일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가 주최한 제1회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 총장)가 발제한 ‘한국교회의 위기극복: 새로운 교회연합방안 모색’을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의 연합과 교회분열의 역사에 관한 성찰 1) 초기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연합운동 초기 한국교회는 장·감·성을 중심으로 교단의 전통과 역사는 달랐지만,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연합하고 협력하여 복음전파를 힘썼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 당시 지역 분할 등으로, 복음전파(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립되었고, 다시 그 연합기관은 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와 더불어 조선기독교는 탄압을 받게 되었고, 모든 조선 땅에서의 기독교 활동들이 정지된다. 이러한 일제 식민통치의 핍박 가운데서,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는 연합하고 있었다고 본다. 심지어 국가의 위기와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타종교와도 연합하여 독립선언문발표와 독일운동에 동참하였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문 발표는 전체 33인 중 16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여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8.15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교회의 재건 기에 벌써 1946년 9월 ‘한국기독교총회’가 시작되었고, 그 총회의 대표들이 1948년 8월에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WCC 세계총회에 참석하여 세계적인 개신교 연합운동에 참여하는 열성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남북분단과 함께 6.25 전란을 겪으면서, 북한 공산당이 종교자유를 보장하지 않았고, 기독교를 핍박함으로써 북한에 있던 대부분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종교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대거 이주해왔었다. 그것이 대한민국(남한)에서의 복음전파를 더욱 왕성하게 하였고,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크게 부흥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해방 후, 한국교회의 재건운동과 함께 먼저 신사참배에 굴복한 자들의 회개가 촉구되면서, 동시에 이전에 잠재해 있던 신학 사상에 관한 논쟁이 발생되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는 벌써 초기에 진보와 보수의 뼈아픈 교회분열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2) 1950년대의 한국교회 보수와 진보의 분열역사1950년대에 이르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성경관의 차이로 인한 신학 논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교단이 분열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것이 한국기독교장로회(1953)의 분리사건이다. 물론 그보다 더 일찍 1946년 부산/경남지역의 장로교회들이 신사참배(참회)문제를 제기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 독립된 교단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WCC 회원가입 문제가 논쟁되면서, 또다시 통합과 합동으로 분리된다. 그 당시 WCC가 공산화된 소련에 러시아정교회를 회원으로 받으면서, WCC가 용공주의적인 입장을 가졌다는 소문이 퍼졌고, 특히 공산주의 사의 대립으로 남북이 전쟁을 치르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 사이에 이미 1946년에 분리독립 했던 고신교단과 예장합동교단은 1960년에 서로 합동하게 된다. 그러나 1963년 9월 다시 예장 고신교단이 환원함으로써 원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들 두 교단은 신학 사상적으로는 분리해야 할 명분이 없다. 60년대에 불어닥친 보수와 진보 사이의 신학적인 갈등은 결국 성결교회와 감리교회에도 영향이 미치게 되어, 성결교회는 기독교 성결교단과 예수교 성결교단으로 분리되었고, 또한 감리교회도 분리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 다시 합동하게 된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크게 진보교회와 보수교회로 나누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이후 진보교회는 초기부터 8개 교단(기장, 감리회, 통합, 기성, 복음교회, 구세군, 성공회, 정교회, 순복음회연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물론 1997년 여의도순복음 교단은 한기교협(KNCC)에 회원으로 뒤늦게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보수교회는 이렇다 할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물론 세계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분리되는, 특히 미국교회의 흐름에 따라 한국의 보수교회, 즉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미국의 극단적인 근본주의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연합운동(ICCC)과 연결하여 진보교회의 연합운동과 대결하였지만, 역시 열세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한국교회 내에서의 보수교회들은 연합운동을 포기한 채, 개별적인, 그리고 개 교회적으로 복음전도운동을 전개하면서, 개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집중하였다. 3) 진보와 보수로 분열된 각각의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실상에 관한 성찰 현재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교회로 분리되어 각각의 교회연합기관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먼저 진보교회 연합운동 역사는 1946년에 출발한 한국기독교연합회의 발족에서 시작된다. ”한국기독교협의회”란 이름으로 활동해 오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아마도 교회의 존재와 중요성이 인식되었는지, 협의회의 명칭에다 ”교회“를 삽입하여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로 불리게 된다. 특이하게도 이 연합기관은 주로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 즉 복음전파의 사명실천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교회의 외적인 일, 즉 사회적이며, 국가 정치적인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치단체와 같은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다. 지난 70~80년대로 오면서도 NCCK는 한국의 산업화와 현대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특히 그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였고, 정권이 저지른 인권침해문제를 비판하며,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으며, 1987년 정치적인 민주화가 선언된 이후 그 연합기관은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보수교회들은 오히려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 세우며, 이때까지도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활동의 연합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 국민을 향한 그리스도복음의 전도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수적으로 크게 성장된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생각하면 이것이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가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진보교회는 매우 정치비판적인 성향을 드러내면서 사회개혁을 전제하여 인간을 섬기는 사회운동의 방향으로 질주하였으며, 보수교회는 개인의 영혼구원을 중히 여기고, 오직 개 교회로 모이게 하는 복음전도운동의 방향으로 질주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한국교회의 다수인 보수교회와도 마땅히 나누어야 할 성도의 교제는 전적으로 외면한 채, 독자적인 행보를 지속하고 있는데, 오히려 타 종교와 더 어울리며,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를 보일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기독교신앙의 정체성이 매우 진보적이어서, 한국보수교회 신학자들의 비판적인 논쟁을 유발시키고 있으며, 진보와 보수사이는 오늘날 그 틈새는 더욱 벌어진 모습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날 정말 진보교회연합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간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인권문제를 그토록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비판하며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북한의 3대 독재정치 체제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탄압문제에 대해서는 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그간 한국 보수교회들의 연합기관으로 역할 해 온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오늘에 이르러 한계에 직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원래 한기총의 태동역사는 KNCC가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 선언문”을 발표한 것에서 동기를 부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선언문은 분단된 남북한의 통일문제를 신학적인 주제로 삼아 한국교회에 통일의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로 평가되지만, KNCC가 이렇게도 중대한 남북통일선언문을 한국 보수교회지도자들과는 한마디 상의 없이 저 북한기독교대표(조선기독교연맹)들과 수년 전부터 해외에서 서로 만나 협의하고 논의하여, 1995년을 남북통일의 해로 못 박아 선언한 일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태도가 분명하며, 이미 지나치게 저 북한 통치이념에 동조한 것 같은 의구심을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 통일선언문의 요지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희년개념을 끌어와서 1995년을 남북통일의 해로 목표하여 해석 적용한 모습은 마치 지난 1992년 12월말, 시한부종말론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해로 정하고 그것을 기다렸던 모습과도 흡사함을 피할 수가 없다고 본다. 결국 진보연합체의 행위는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남북통일과 북한선교의 과제를 기독교적인 과제로 인식하는 통일의식을 일깨워 주었으며, 또한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결속하여 한기총(CCK)이란 연합체가 태동하는 게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90년대에 이르면서, 한기총은 극심한 기근으로 굶주림에 처한 북한동포를 돕는 중요한 섬김의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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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교회 위기극복: 새로운 교회연합방안 모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