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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대담] AI 전문가,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서기 박순형 목사(필리아교회)
    매년 그리 평안한 새해를 맞은 것 같지도 않지만, 올해 대한민국의 상황은 우려스러울 정도로 어두운게 사실이다. 이념과 가치, 법과 원칙이 완전히 무너진 우리 사회는 이제는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너무도 무의미해져 버린 혼돈 그 자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존재다. 언제나 짙은 어두움 속 등대를 자처했던 교회가 과연 이 혼란 속에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짙다. 신뢰를 잃은 교회,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된 교회는 국민들의 가슴에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더욱 답답한 것은 교회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변화의 속도가 그야말로 LTE급이 된 요즘 시대에 교회는 미래와 전통의 갈림길에서 여전히 선택을 고민하고 있다.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서기를 맡고 있는 박순형 목사(필리아교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는 요즘 시대를 바라보는 고민이 크다. 대학에서 IT를 전공한 과학자인 그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를 보며 이를 교회와 목회자들에 어떻게 설명할지를 연구하고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AI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과 혹시 모를 기대를 동시에 품는 목회자들에 미래의 변화는 결코 단순한 상상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본보에서는 박순형 목사와 함께 교회적 관점에서의 AI에 대한 이해와 활용, 그리고 AI가 할 수 없는 절대적 영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울러 여전히 계속되는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뵙는다. 먼저 소개를 부탁 드린다. : 사실 제가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인터뷰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 저는 국제독립교회 소속의 필리아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순형 목사다. 지난 2018년 설립한 교회인데, 이름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세상에 전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독연에서 2017년에 안수(7회)를 받고 여지껏 하나님의 사명을 붙들고 있는데, 너무도 과분하게도 국독연에서 제게 서기 직책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 AI에 남다른 이해를 하고 계시다고 들었다. 목회자로서 매우 이례적인데? : 대학에서 IT를 전공하고, 졸업 이후 대기업에서 전공을 살려 오랫동안 일했다. 대학시절부터 AI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사실 AI라는 단어가 마치 요즘 새롭게 나온 것처럼 아는 분들도 있는데,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사회에 수십년 전부터 있어왔다. 자동화, 패턴화를 통해 스스로 자신에 맡겨진 역할을 하는 것이 인공지능인데, 대학 때 해당 연구로 교육부 장관상까지 받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이제는 목사로서 새로운 소명을 받들고 있지만, 여전히 AI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전문가인 목사님과 달리 사실 한국교회 많은 목사님들이 AI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좀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나? : 우리 일상에서는 사실 수많은 AI, 즉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이 많다. 목사님들이 AI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관계없이 이미 AI를 이용하고, 활용하며 어울려 살고 계시다. 예를 들어 요즘 나오는 자동차에 자동주행이 탑재되어 있지 않나? 단순히 속도만 제어하는 수준을 넘어 장애물을 인지하고, 차를 스스로 운전한다. 이를 우리는 '약 인공지능'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입력한 명령 안에서 스스로 사고하는 AI인 셈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약 인공지능'의 시대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조만간 '강 인공지능'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는 AI의 지능이 인간과 같은 수준이 된다는 것인데, 사실상 이때부터는 AI가 더이상 인간의 제어 영역에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AI가 인간을 초월하는 '초 인공지능'의 시대다. 이때의 AI는 스스로 사고하고 연구하며, 자기 발전을 이뤄 나간다. 사실 '초 인공지능' 시대의 AI가 스스로 얼마나 발전할지 우리는 감을 잡기 어렵다. 말씀을 듣다보니, AI의 발전이 좀 두렵기도 한 것 같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AI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이를 거부 할 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 사실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무의미한 질문이기도 하다. AI에 대한 교회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한다. 시대의 변화에 다소 느릴 수 밖에 없는 교회 입장에서 AI가 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 당연한 고민일 것이다. Ai시대의 도래는 분명 교회의 문화마저 바꿀 것이 분명한 상황에, 미래를 염려하는 목사님들에게 이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이 사실 무의미한 질문인 것은 'AI'에 대한 선택권이 교회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AI는 이미 우리 일상에 깊이 들어왔고, 교회 역시 상당 부분에 걸쳐 AI를 이용 중이다. 더구나 '약 인공지능' 시대를 넘어 '강 인공지능' 혹은 '초 인공지능' 시대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일반적인 시장 원리 그 이상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이미 AI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AI시대가 고도화되는 것을 교회가 경계해야 하지 않나? 일각에서는 미래에는 AI가 목회자를 대신할 것이라고 추측키도 한다. : 분명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AI는 완벽할 수 없고 조작 가능한 영역이다. 예를 들어 AI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지식을 전달한다고 할 때, AI는 정통과 이단의 논리를 구분치 않고 정리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성도들이 순전히 AI에 성경 지식을 의존한다고 하면 분명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또한 AI는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 될 우려가 크다. AI가 미래의 고도화된 시대를 결국 이끈다고 볼 때 이를 조작하는 것은 결국 자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AI는 결코 목회자의 영역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구원을 다루는 성경에 있어 AI가 접근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하다. 단적인 예로 AI는 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정리해 '지식'을 전해줄 수는 있지만, '진리'를 알려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려주는 것은 목사님의 몫이다. AI에는 영혼이 없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영혼에 감동을 주는 것은 절대 AI가 충족하지 못한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AI가 고도화 될수록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갈증이 커질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AI시대에 오히려 교회의 역할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주제를 좀 바꿔보자. 최근 우리나라가 정말 혼란스럽다. 그야말로 풍전등화인데, 목회자 입장에서 이를 어떻게 보시나? :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또 안타깝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싶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미 예정된 결과였다. 사실 나라가 이 사태까지 온데에 있어 교회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라를 운영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정치인 아닌가? 그 정치인들 중에 상당수가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이 제대로 된 기독교의 정의를 정치에 실현했다면, 아마 오늘의 결과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국회의장도, 야당 당 대표도, 원내대표도, 법사위원장도 다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지금 국회에 법의 공정함과 공평함이 사라졌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오히려 법을 지키지 않는다. 물론 정치인들의 책임이 우선이다. 하지만 그들에 제대로 된 기독교의 가치를 심어주지 못한 교회의 탓도 크다. 기독교 정치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선택을 하며 국가와 국민을 혼란케 하는 상황에 교회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한국교회의 신뢰 부재가 심각하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 당장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종교개혁이 괜히 일어난 게 아니다. 중세시대 목회자(사제)의 부정부패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과학과 이성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며 교회 지도자들이 인본주의에 빠져 성경을 부정하기도 했다. 또한 인류의 발전 역사 중에 교회가 약자의 편에 서지 않은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은 그 근본에 큰 실망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떠한가? 목회자의 권위가 너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목회자는 목자가 아니다.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고, 목회자는 목자가 거느리는 양떼 중에 한 마리일 뿐이다. 스스로를 목자로 착각하면 안된다. 다만 목회자는 무리 중 가장 앞선 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무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 그 방향 제시를 해 주는 것이 바로 목회자다. 목회자가 잘못 가면 그 무리는 예수님께 가지 못한다. 한국교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하락은 곧 다음세대 부재로 연결된다. 요즘 젊은층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보나? : 요즘 젊은이들은 시대가 불공정하다고 본다.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정치권의 부정과 특혜는 젊은이들을 좌절시키고 있다. 특히 조국 사태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세상을 보며 '불공정'하다고 느꼈던 젊은이들이 '공정'을 찾아온 곳이 바로 교회인데, 막상 교회 역시 심각한 불공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목사의 권위가 너무 높고, 세상도 하지 않는 온갖 불필요한 관습을 보며, 교회를 향한 젊은층의 실망은 점차 분노의 수준에 이르렀다. 교회가 공정을 되찾아야 한다. 스스로의 갱신과 각성으로 공정을 찾아 세상의 불공정에 피해 입은 젊은이들을 보듬어야 한다. 국제독립교회연합회를 택한 이유가 있나? 그리고 현재 설립자인신 박조준 목사님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기대가 있나? : 국제독립교회연합회를 택한 이유가 여러 개가 있지만, 가장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선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선거제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로인해 많은 폐해가 일어나는 것도 봤다. 실제 막상 오니까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고 깔끔하다. 생각한 그 이상으로 너무도 좋다. 또한 박조준 목사님은 아마 한국교회 대부분 목사들의 롤모델이 아닌가 싶다. 한 평생 목회를 하면서도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기가 매우 어렵다. 수많은 유혹을 떨쳐내야 하고, 특히 권력욕을 버려야 하는데, 박 목사님은 이 모든 것을 이겨내신 분이다. 박조준 목사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많이 기뻐한 사람이 아마 나일 것이다. 나 역시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책을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아 목회자를 꿈꾼 사람인데, 내가 받은 감동을 다른 이들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다가오는 부활절에 맞춰 개봉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 한국교회 전체가 기대해도 좋을 듯 싶다. 올 한 해 개인적인 목표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개인적인 목표는 없다. 여지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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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4
  • 수기총 등 "헌재가 탄핵 청구 각하치 않으면 국민저항권 발동"
    수도권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김선규 목사, 사무총장 박종호 목사)와 세이브코리아준비위원회 등 1200여 시민단체들이 헌법재판소를 향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청구 '각하'를 요구했다. 현 탄핵 과정에 있어 불법과 탈법이 횡행하고 있다는 비판인데, 헌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국민 저항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엄포했다. 동 단체는 지난 24일 성명서에서 현 상황에 대한 불합리함을 매우 구체적으로 짚어냈다. 특히 야당의 이재명 대표와 비교해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은 너무 과도하게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헌재는 신속보다 신중, 빠른 판결보다 바른 판결을 내야 할 것"이라고 종용했다. 결정적인 모순도 지적했다. 먼저 당사자 의견을 무시한 채 변론기일을 일괄 지적하는 것은 불법이며, 헌재가 탄핵 심판 대상에서 '내란죄' 부분을 삭제하면서 내란죄 관련 수사기록을 증거로 채택하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수기총 등은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가 형식적인 청구요건 등 적법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심판 청구 자체가 부적법하므로 각하되는 것이 원칙"이라며 "야당이 탄핵소추 의결 당시 가장 중요한 사유로 꼽았던 '내란죄'가 헌재 탄핵심판에서 갑자기 철회한 것 역시 헌법질서를 농란한 것으로 각하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마지막으로 수기총 등은 "헌재가 최후 헌법수호기관 역할을 포기하고 거꾸로 헌법 파괴기관 노릇을 계속한다면 주권자인 자유 애국시민들도 마지막 저항권의 행사로 광화문에만 머물지 않고 헌재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며 "국민은 자기 권리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실력으로 저항하는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1) 헌재는 ‘신속(swiftness)’보다 ‘신중(carefulness)’하게! ‘빠른(speedy)’ 판결보다 ‘바른(correct)’ 판결을! 헌재는 겉으로는 대통령 탄핵심판 절차에 있어서 ‘공정하고 신속한 심리’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거대 야당 이재명 대표가 관련된 여러 가지 재판이 끝없이 지체되는 것과 비교하면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은 처음부터 무엇에 쫓기는지 속도에만 치우치고 있다. 헌재는 2회의 변론준비기일을 마친 후 앞으로는 매주 2회씩 기일을 압축해서 진행하겠다고 선언하고 바로 변론기일을 일괄 지정했다. 1월 14일부터 2월 4일까지 미리 지정된 5차의 변론기일에 다시 2월 13일까지 3회를 추가해서 한 달 사이 총 8차의 변론기일을 압축해서 일괄 지정하는 등 무리한 속도전에 나서고 있다. 또 헌재가 오전 10시부터 종일 변론기일을 진행하기로 해서 피청구인 측이 대통령의 인권을 침해하는 무리한 일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지만 결국 묵살되었다. 헌재는 앞으로 겨우 한 달 남짓해서 대통령 탄핵심판을 신속하게 끝낼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최근 국회가 정략적으로 청구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 사건은 선고할 때까지 5개월 이상이 걸렸다. 그밖에 거대 야당이 먼저 청구한 9건의 고위 공직자 탄핵 사건도 기한 없이 계류되어 있다. 최고의 헌법수호기관이라는 헌재가 윤 대통령 탄핵에서는 거대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의 눈치를 보면서 농락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통령의 탄핵 여부를 결정하는 헌재는 헌재는 ‘신속’보다는 ‘신중’을! ‘빠른 판결’보다는 ‘바른 판결’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2) 헌재는 ‘과정’도 공정(justice)하게, ‘결과’도 공정하게 윤 대통령 탄핵에 대한 헌재의 조급한 태도는 당연히 준용해야 할 형사소송규칙을 위반하여,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변론기일을 일괄 지정하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탄핵심판 절차에서는 수사가 진행 중인 다른 사건 기록에 대해서 송부 요구를 할 수 없음에도 헌재가 다른 기관의 수사기록을 송부받는 등 심판의 공정성을 해치고 있다. 더구나 헌재가 탄핵 심판 대상에서 ‘내란죄’ 부분을 삭제하면서 내란죄 관련 수사기록을 증거로 채택하겠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밖에 헌재가 이해충돌 논란이 있는 정계선 재판관에 대한 기피신청도 합리적 이유 없이 기각하고, 충실한 방어권 보장을 위한 피청구인 측 변론기일 연기신청도 즉시 기각했다. 헌재는 모든 심리 과정도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해야 할뿐만 아니라, 결과도 공정해야 할 것이다. 3) 탄핵이 각하 되어야 하는 이유 무엇보다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가 형식적인 청구요건 등 적법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심판청구 자체가 부적법하므로 각하되는 것이 원칙이다. 지난 1월 3일 대선 조급증에 빠진 거대 야당이 탄핵소추 의결 당시 가장 중요한 사유로 꼽았던 ‘내란죄’를 헌재의 탄핵심판에서 갑자기 철회했다. 대통령 탄핵 사건의 신속한 진행을 위해서 헌법위반에만 집중하고 형법상 내란죄의 법리 다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내란죄’ 혐의를 주된 사유로 해서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는 당연히 헌재의 탄핵심판 절차에서도 핵심 쟁점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재판부가 미리 쟁점을 정리하고 권유하여 ‘내란죄’를 철회한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탄핵 재판부가 거대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와 짜고 심판청구를 인용하기로 미리 결론 내리고 있다 해도 할 말이 없다. 탄핵심판 사유의 철회는 국회에서 의결된 탄핵소추 사유의 중대한 변경이므로 심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탄핵소추안에 대한 국회의 재의결이 필요하다. 국회의 재의결 없이 중요한 탄핵소추 사유인 ‘내란죄’를 철회하는 것은 기존의 소추 사유와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는 변경이므로 실체적 심리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각하되어야 한다. 탄핵심판 청구의 방식은 국회의 소추의결서 정본을 청구서로 갈음하므로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서가 바로 탄핵심판 청구서가 되고, 국회의 탄핵 의결서 내용인 탄핵소추 사유가 바로 탄핵심판 대상이 된다. 결국 탄핵소추 의결서의 탄핵소추 사유에서 내란죄를 철회하여 심판 대상이 서로 다르게 되면 청구 자체가 부적법하므로 헌재는 즉시 청구를 각하해야 한다. 탄핵심판 사건을 수행하는 소추인단은 국회가 의결한 탄핵소추안의 탄핵 사유, 특히 핵심적 사유를 자의적으로 추가하거나 철회할 권한이 없다. 헌재도 국회에서 의결한 탄핵 사유에 대하여만 판단할 수 있을 뿐 탄핵 사유를 임의로 추가하거나 철회할 권한은 없다. 그간 ‘내란수괴’에 대한 처단과 탄핵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뒤늦게 그 핵심사유인 ‘내란죄’를 철회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고 헌법질서를 농락하는 것이다. 헌재도 차제에 국회의 재의결 없이 탄핵 사유를 변경하면 탄핵 청구 자체가 부적법하여 각하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이제 헌재는 실체적 심리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내란죄’의 철회로 심판 대상의 동일성이 상실된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즉시 각하해야 한다. 4) '탄핵심리'보다 '권한쟁의 심판'을 먼저해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탄핵안은 모두 13건이다. 이상민 전 행안부 장관을 시작으로, 이진숙 방통위원장까지 4건 모두 헌재에서 기각됐고, 아직 9명은 탄핵심판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탄핵 남발 입법 독재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무리한 탄핵 소추를 한 민주당은 그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탄핵안들 보다 더 시급하고 선행적으로 처리해야할 심리는 다음 세 건의 권한쟁의 심판이다. 1) 공수처가 내란죄에 대한 수사권한이 없다며 대통령측이 제기한 권한쟁의심판 2) 한덕수 총리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국민의힘이 의결정족수( 151명이냐 200명이냐)를 문제 삼아 헌재에 권한쟁의심판과 탄핵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것 3)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겸 부총리가 국회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 중 2명만 임명한 것 에 대하여 국회의 선출권이 침해된 것이라며 제기된 권한쟁의심판 위의 순서대로 심리 판단 후 대통령 탄핵이 다루어 져야 일의 순서인 것이다. 5) 헌재가 제 역할을 못하면, 국민 저항권(抵抗權 Right of resistance) 행사할 것 헌재가 최후의 헌법수호기관 역할을 포기하고 거꾸로 헌법파괴기관 노릇을 계속한다면 주권자인 자유 애국시민들도 이제는 마지막 저항권((抵抗權, Right of resistance)의 행사로 광화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헌재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하여 헌법의 기본원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행하여지고 그 침해가 헌법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다른 합법적인 구제수단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마지막 헌법 보호 수단이자 기본권 보장의 최후의 수단으로서 국민은 자기의 권리,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실력으로 저항하는 저항권((抵抗權, Right of resistance)을 행사 할 수 있다. 최근 국가의 명운을 가르는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헌재 재판관들도 판단능력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다면 과감히 법복을 벗고 법조계를 떠날 것을 촉구한다. 수기총(서울/경기/인천교회) 외 세이브코리아준비위원회, 수도권기독교총연합회(서울/경기/인천), (사)한국교회연합, (사)한국기독교교단협의회, (사)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사)한국기독교단체연합, (사)한국기독교개혁교회협의회, (사)대한기독교총연합회, (사)전국17개광역시도 226개시군구 기독교총연합회, 한국기독인총연합회, 건강한경기도만들기도민연합,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부산시기독교총연합회, 전국청년연합, 자유역사포럼, GMW연합 등 1200개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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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4
  • 한교연 2025년 새해 ‘사랑의 쌀’ 3000kg 전달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김노아 목사)은 2025년 새해를 맞아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의 쌀 3000kg을 전달했다. 한교연의 ‘사랑의 쌀 나눔’은 연말연시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차원에서 매년 진행돼 왔다. 이번 ‘사랑의 쌀 나눔’은 지난 3일과 6일에 걸쳐 복지법인 밥상공동체 연탄은행과 불우청소년 보호시설인 선한사마리아공동체, 아동청소년희망재단, 수원 경원교회 독거노인들에게 각각 전달됐다. 한교연은 매년 12월 총회 때 회원교단과 단체, 외부 기관으로부터 축하 화환 대신 쌀을 기증받아 모은 쌀로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도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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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2
  • 한교연, 세광중앙교회서 신년하례회 가져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김노아 목사)이 지난 3일 오전 11시 세광중앙교회에서 2025 신년감사예배 및 신년축하 하례회를 갖고 한국교회 연합과 화합을 다짐했다. 한교연의 이날 신년하례 예배 및 하례예식은 42개 회원교단과 20개 단체 회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부 감사예배와 2부 하례식, 3부 친교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 신년감사예배는 상임회장 홍정자 목사의 사회로 묵도 후 찬송가 550장을 부르고 상임회장 양태화 목사가 대표 기도했다. 이어 부서기 신조화 목사가 성경을 봉독한 후 배기순 목사(공동회장)가 ‘나라와 민족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강영준 목사(공동회장)가 ‘민족복음화와 자유평화 통일을 위해’, 조영구 목사(공동회장)가 ‘세계복음화 및 선교사를 위해’, 강충구 목사(공동회장)가 ‘차별금지법과 악법 철폐를 위해’, 조명숙 목사(공동회장)가 한국교회 영적 성장과 예배 회복을 위해‘, 최애헌 목사(공동회장)가 ’한교연의 연합과 화합을 위해‘, 이성수 목사(부회장)가 세계 기독청 발전을 위해’ 각각 특별기도했다. 이어 유하은 자매의 특송에 이어 직전 대표회장 송태섭 목사가 말씀을 전했다. 송태섭 목사는 ‘우는자 이마에 표하라’(에스겔 9:3-6) 제목의 설교에서 “눈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준 소중한 선물이다. 나는 지금 울고 있는가”라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울어 여호와께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 “하나님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열방 가운데 우뚝 세우는 축복을 주셨으나 지금 나라와 사회는 정치 이념의 먹구름에 둘러싸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며 “영적 안일함에 빠진 한국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울며 기도할 때 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사무총장 최귀수 목사가 광고하고 송영 5장을 부른 후 명예회장 권정희 목사의 축도로 1부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2부 하례식은 상임회장 김바울 목사의 사회로 대표회장 김노아 목사의 신년인사가 이어졌다. 대표회장 김노아 목사는 신년 인사를 통해 “추울수록 봄이 가까이 오고 나라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있는 듯 보이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신다”며 올 한해가 믿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넘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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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2

연지골 검색결과

  • [기자수첩] 의병(義兵)
    정확한 수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학자들은 지난 시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 무려 1,000여회 이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은 외세의 공격에 의한 침략전쟁으로, 굳이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전쟁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이 땅은 지난 반만년동안 중국, 일본, 몽골 등의 주변국에 의해 지독하리만큼 당하고 당해왔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여몽전쟁 등 시대마다 바뀌는 동아시아의 패권국은 하나같이 바로 이 땅 한반도를 탐내왔다. 대부분은 이들의 침략을 이겨냈고, 무력의 한계 앞에서는 슬기롭게 타협해야 했다. 놀라운 것은 그 오랜 역사 속에 우리 땅은 일제시대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작지만 강한 땅, 하지만 그만큼 땅에 새겨진 처절한 울분이 참으로 서글픈 곳, 바로 한반도다. 의병(義兵)은 그 처절한 울분의 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민초들의 이름이다. 아무도 그들을 지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난 존재들, 자기희생의 상징이 바로 의병인 것이다. 문(文)을 숭상하는 대신 무(武)를 지독히도 천시했던 500년 역사의 조선은 국가방위에 언제나 취약했고, 그 피해는 오롯이 민초들의 몫이었다. 국가의 잘못된 정책과 의식으로 짓밟히고 또 짓밟혔던 그들, 하지만 그들은 원망 대신 스스로 의병이 되어 나라를 지키기를 택했다. 임진왜란 초기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들을 보며 관군들도 도망가기 바빴던 그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반전의 씨앗을 틔운 것은 바로 의병들이었다. 의령의 곽재우, 나주의 김천일, 영천의 권응수, 금산의 조헌, 묘향산의 서산대사, 금강산의 사명대사 등 누구하나 시킨 적 없지만, 스스로 군을 일으켜 왜군들을 막아냈다.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 등의 혁혁한 성과 역시 의병들의 희생이 바탕에 깔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반만년 역사의 한반도를 이제껏 지탱해 온 것은 바로 민초들의 애국이었다.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한 민초들의 발호는 의병이라는 매우 숭고한 결실로 나타나 이제껏 한반도를 지켜내 왔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한반도의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종전국이 아닌 휴전국으로, 언제든 우리를 집어삼킬 대적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 한반도다. 지금 우리에게 완전한 평화가 도래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혹자는 6.25전쟁 이후 북한의 도발이 무려 3,000회 이상 이어져 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아직 이 땅은 전쟁 중인 셈이다. 하지만 이 땅을 지켜왔던 그 의병들이 지금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이 땅에 전쟁은 남아있지만, 의병들은 사라진 현실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땅의 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 대한민국의 주류종교는 단연 기독교다. 1,000만 성도들이 함께하는 기독교는 모든 분야를 통틀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최대 집단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교회가 시대의 계속되는 전쟁 앞에 침묵을 택하고 있다. 그것이 종교의 사명인 듯, 기독교의 정의인 듯 얘기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민초들이 지켜낸 이 땅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매우 비겁한 합리화일지 모른다는 씁쓸함이 크다. 굳이 총칼을 들어야 애국이 아니다. 시대는 변했고, 애국의 방법도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다. 2025년 교회는 스스로 할 수 있고, 스스로 해야 하는 의병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한다. 침묵은 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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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1

칼럼 검색결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약속’(창 2:16~17)
    사람의 인생 안에는 알게 모르게 계약, 언약, 혹은 약속의 관계가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계약’이라고 하면, 부동산이나 각종 매매와 사업 관련 계약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 말고도 사람과 사람 간에, 사람과 국가 간에, 그리고 사람과 기업 간에 본의 아니게 각종 계약이나 약속의 관계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와 자녀 간에도 부모로서의 자격과 역할, 자녀로서의 자격과 역할이 주어지게 되어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책임이 생기게 되며, 자녀는 부모의 말씀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가정 내 질서를 따르는 의무가 주어지게 됩니다. 국가와 개인 간에도 이러한 역할이나 책임이 따라오게 되어 국가는 여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국민에 대해 국가로서의 의무와 구제 방안을 시행하는가 하면, 국민은 납세의 의무라든지, 국방의 의무라든지 이러한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인생을 사는 동안, 비록 서류상의 의식적인 결정의 과정이 생략된다 할찌라도 은연중에 각종 계약이나 약속의 관계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병원에서 수술을 할 때나,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는 경우에도 만약의 경우 본인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각서를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에도 분명한 계약과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는 약속과 함께 요구가 들어가게 됩니다.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언약으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 영생과 죽음이 선포된 ‘선악과 언약’이 있고(창 2:16-17), 다시는 물 심판으로 지상의 생물들이 멸망 당하지 않을 것을 선포하신 ‘무지개 언약’이 있으며(창 9:8-11),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시내산 언약’(출 19:5-6)이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각각 모여 목도하게 된 ‘모압 평지에서의 언약’(신 29-30장)이 있습니다. ‘선악과 언약’의 경우 인간의 행위에 의해 복과 저주가 결정되므로 이를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며, 나머지는 주로 ‘은혜언약’으로 부릅니다. 이런 의미 가운데, 본문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의 외출을 앞두고 치명적인 사고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미리 당부해주는, 위험에 대한 경고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과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부모의 선한 의지와 사랑이 담긴 경고나 메시지를 엄수하는 자녀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고 부모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 연속된 축복의 약속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부모의 사랑과 경고를 무시하며 살다가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도 이러한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불순종으로 행하다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까지 죄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만이 아니라 모든 후손들까지 죽음에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 사건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하나님과 그 자녀 된 우리와의 관계, 즉 언약의 관계는 지금도 똑같이 적용되며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을 귀히 여기며 충실히 따르고 적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은혜를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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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28: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항상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요 14장)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마 1:23) 본문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꿈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여호수아에게도(수 1:5), 다윗이 죽은 후 성전을 건축할 솔로몬에게도(대상 28:20), 이 땅 위에 남아 복음전파 사명을 완수해야 할 제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항상 함께 계시는 주님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 31:5)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임종할 때도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창 48: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것은 이미 족장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b)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쫓겨나 광야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주셨습니다.(창 21:2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사람들과도 함께해 주십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아무도 의지할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실 때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과 함께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사 4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역대하 13장을 보면, 아비야와 여로보암의 전쟁에서 유대 왕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12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은 그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사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한 개인에게 임하시면, 성령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도와주실 것을 이미 예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권세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탄의 권세가 지배하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26)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막 13:33)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엡 6:12)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악한 모든 세력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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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비참함에서 벗어남’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위의 말씀을 하셨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을 강조한 새로운 계명을 예고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과 매우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랑이 결핍된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모습입니다. ‘전가’(轉嫁)란, 잘못이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씌우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전가한 사람이 ‘가인’입니다. 가인은 평소에 선을 행하지 않고 사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자, 안색이 변하고, 하나님께 대들었으며,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의 도리를 선하게 잘 감당하고 있는 아벨이 미운 나머지, 동생을 쳐 죽인 인물로 유명합니다. 우리는 가인을 남 보듯 하지만, 그런 기질은 곧잘 따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 가부장 중심적인 사회였을 때, 남편으로부터 ‘쿠사리’, 즉 구박을 받은 아내가 우울한 나머지, 속이 안 풀려 자식들을 향해 훈계를 핑계로 화풀이성 매를 드는 경우가 이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성경에서는 교육적인 차원에서의 매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매를 치는 그 마음에 자기의 화를 담아서 치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매를 맞는 자녀는 어머니의 우울감과 화를 동시에 느끼게 되면서 덩달아 우울한 자녀가 되고 침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교회로 가져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도의 경우 본인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삶을 살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경우 시험에 들게 되는데, 그에 대한 분풀이를 교회에 나와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교회 생활을 하면서 매사에 꼬투리를 잡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니면서 누군가를 계속 비난하거나 누군가의 행동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 타인을 정죄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러한 모습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와 삶을 받지 않았던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도를 왜 받지 않으셨을까요? 왜 그 입술에서 기도와 찬양이 나오지 않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마음 밭이 길 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긴 하지만, 깨닫지 못하거나, 믿음의 뿌리가 부실하거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앞에 넘어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도 우리와 같이 주를 향한 열정과 믿음이 있으면서도 여전히 좌충우돌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음이 부족해 방황했던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온전한 믿음보다는 열정이 앞선 결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던 자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의심많은 도마는 “주님, 저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따져 묻기도 합니다. 그런 도마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미천하고 비참한 인생은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비참함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회가 있으며, 그 말씀을 통해 더욱 새롭게 될 수 있는 은혜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자신의 누추함과 비참함을 버리고, 온전히 예수님과 동행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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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나라를 사랑한다면’(사 32:15-20)
    지금 대한민국은 큰 위기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할 때 유대 나라는 약소국으로서 내외적인 침공으로 존망의 기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 안보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영이 백성에게 부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15절)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파멸과 불안의 시대를 평화와 정의의 시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은 ‘정의의 영’이며 ‘공의의 영’입니다.(16절) 여기서 말하는 정의와 공의는 사회의 약자를 배려하고 약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고 그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즉 정의와 공의의 삶이란 약자 돌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정의의 영과 공의의 영으로 약자들을 돌보면 화평과 평안과 안전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공의의 삶, 즉 약자 돌봄의 삶이 나라에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나라 안보는 공의의 열매이며, 그것은 가난한 자를 돌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주변의 약자를 돌보는 것이 나라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나라 위기의 탈출구는 세상의 권력과 무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굳건한 믿음을 갖는 것이 위기 극복의 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힘을 의지하는 것은 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거역하는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가 계획을 추진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사 30:1)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나라 안보는 강한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역을 행하실 때 성령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까지 공의를 이루실 분입니다. 주님은 약하고 힘들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자유를 되찾아주시며 힘을 북돋워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 정의는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정의를 이루실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다투지도 않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힘없고 연약한 자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마 12:18-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정의를 세우신 주님을 따라가며 우리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대하 7:1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 주님께서 다시 번영시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조용하였고 주님께서 그 나라와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아사 왕은 백성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평안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대하 14장) 우리 민족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성령께서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는 백성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출 32장) 모세야말로 백성을 사랑한 애국자이지요. 우리도 모세처럼 우리 민족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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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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