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려면 의식주란 범주로 아름다운 생활공간을 이루며 살아가는 접근한 생활방편이 있고 사람들이 삶의 본질인 살림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생활시간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살아가는데 3가지 중요한 ‘금’ 이 있다. ‘황금’ ‘소금’ ‘지금’ 이 그것이다. 절박한 관심으로 ‘지금’이라는 시간을 절선(折線 at hand)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그 중간에 있음을 안다. 그리하여 사람은 시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삶에 맞게 시간을 나누어 놓고 하루가 24시간 일년이 365일 등으로 태양을 중심으로 혹은 달을 중심으로 우리가 시간을 정하고 산다. 여기에 시간의 흐름은 불연속성이 아니라 연속성이다. 그 속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한 순간일 뿐 그런 시간 속에서 매일 매일 주어진 삶에서 살아간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론에서 시간에 대해서는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영원과 시간의 질적 차이를 극복하고 상호매개하기 위하여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으로 화육하여 중보, 속량, 화해를 일으키면서 무(無 영원)의 위협 아래 있는 인간을 안정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함으로 하늘나라를 바라는데 순례자의 삶을 살도록 하려는데 있고 여기에 화이트헤드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는 자연이란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통전(統全)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현재성은 인간의 영혼이라 일컫는 마음 속에서 종합된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재론자인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는 자연이란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통전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그 삶은 모든 것을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삶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삶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내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경이로운 나의 삶을 찾는 것은 당연하게 본 모양의 내 모습 그대로를 찾아내는 것이다. 흔히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존재가 역사적 실존이라는 것이고 ‘성령 안에서’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상황이 항상 종말론적인 상황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서는 막연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삶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찾는 것이다. 이 삶의 문제의 답은 다른데 있지 않고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모든 일을 어제 했으니 오늘은 됐다가 아니고 다음에 하면 되는 것도 아니어서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이 순간에 지금 내가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 건강, 사랑, 성공...... 등 이 모든 것은 ‘지금’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좌우된다.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이 순간이 오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의 한 가운데 있다. 예컨대 그 연속의 한 가운데서 내 삶의 과거가 잘못된 기억에 얽매이면 피해망상증에 빠져 자기의 삶을 망쳐버리게 된다. 과거의 잘 못은 곧 현재의 삶에 반영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런 잘 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 알게 한다. 우리는 흔히 내일 내일 하지만 이 내일이라는 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므로 오늘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닥치지 않았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고로 톨스토이는 현재 안에서만 인간의 영혼에 자유로운 신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우리는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거울을 본다. 거울 앞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은 사실 실상이 아니고 내가 꾸민 허상이다.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 나의 참 모습이 있다. 그런데 나의 참 모습은 어디로 가고 숨기고 꾸며진 가상의 총체들로 나를 사로 잡아 총체적 비진실이 얼룩거린다. 이 어두운 면이 나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렇게 삶의 과정에서 나의 상실을 잃고 방황하는 나를 추하게 보는 것이다. 이는 내게 나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거짓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나의 적나라한 모습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의 선상에서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울 사도처럼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멍에에서 나를 구원하랴!’는 독백한 그 시점이 회개로 점철된 나의 모습임을 알게 한다. 고로 절박하다. 이는 바로 곧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 임을 알게 한다. 은혜와 구원은 각각 다르게 쓰이지 않는다. 은혜와 구원은 하나로 연결되는 통로이다. 이 구원의 길이 여기, 바로 ‘지금’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은 정해진 때가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때가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전도자는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는 날에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했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라’라고 고백함에 '바로 지금'의 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론에서 시간에 대해서는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영원과 시간의 질적 차이를 극복하고 상호매개하기 위하여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으로 화육하여 중보, 속량, 화해를 일으키면서 무(無 영원)의 위협 아래 있는 인간을 안정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함으로 하늘나라를 바라는데 순례자의 삶을 살도록 하려는데 있고 여기에 화이트헤드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는 자연이란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통전(統全)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현재성은 인간의 영혼이라 일컫는 마음 속에서 종합된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재론자인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는 자연이란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통전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그 삶은 모든 것을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삶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삶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내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경이로운 나의 삶을 찾는 것은 당연하게 본 모양의 내 모습 그대로를 찾아내는 것이다. 흔히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존재가 역사적 실존이라는 것이고 ‘성령 안에서’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상황이 항상 종말론적인 상황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서는 막연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삶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찾는 것이다. 이 삶의 문제의 답은 다른데 있지 않고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모든 일을 어제 했으니 오늘은 됐다가 아니고 다음에 하면 되는 것도 아니어서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이 순간에 지금 내가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 건강, 사랑, 성공...... 등 이 모든 것은 ‘지금’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좌우된다.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이 순간이 오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의 한 가운데 있다. 예컨대 그 연속의 한 가운데서 내 삶의 과거가 잘못된 기억에 얽매이면 피해망상증에 빠져 자기의 삶을 망쳐버리게 된다. 과거의 잘 못은 곧 현재의 삶에 반영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런 잘 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 알게 한다. 우리는 흔히 내일 내일 하지만 이 내일이라는 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므로 오늘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닥치지 않았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고로 톨스토이는 현재 안에서만 인간의 영혼에 자유로운 신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우리는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거울을 본다. 거울 앞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은 사실 실상이 아니고 내가 꾸민 허상이다.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 나의 참 모습이 있다. 그런데 나의 참 모습은 어디로 가고 숨기고 꾸며진 가상의 총체들로 나를 사로 잡아 총체적 비진실이 얼룩거린다. 이 어두운 면이 나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렇게 삶의 과정에서 나의 상실을 잃고 방황하는 나를 추하게 보는 것이다. 이는 내게 나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거짓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나의 적나라한 모습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의 선상에서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울 사도처럼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멍에에서 나를 구원하랴!’는 독백한 그 시점이 회개로 점철된 나의 모습임을 알게 한다. 고로 절박하다. 이는 바로 곧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 임을 알게 한다. 은혜와 구원은 각각 다르게 쓰이지 않는다. 은혜와 구원은 하나로 연결되는 통로이다. 이 구원의 길이 여기, 바로 ‘지금’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은 정해진 때가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때가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전도자는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는 날에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했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라’라고 고백함에 '바로 지금'의 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