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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힘이 작용한다. 하나는 큰 느티나무의 뒤흔드는 힘이요 다른 하나는 이 뒤흔드는 힘에 대해서 느티나무 스스로가 견디어 내는 힘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힘이고 하나는 피동적인 인간의 믿음의 힘이다. 만일 이 느티나무에 기력이 없고 생명이 없다면 이 자연의 힘에 대항 없이 그저 넘어지고 말 것이다. 이 능동적인 힘에 수동적인 힘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아무리 센바람일지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가끔 이 능동적인 힘은 이 느티나무가 얼마나 견고한지 시험 삼아 불어온다. 어떤 때는 폭풍우를 동반한다. 시련을 통해서 인생은 여문다. 시련은 인생의 삶을 힘 있게 해준다. 시련은 인생에 맛을 내게 한다. 시련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시련의 축복으로 우리에게 보람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생애를 생각해 본다. 예수의 인생의 생애는 시련의 드라마였다. 지금까지 태어난 78억 인구 중에 외양간 탄생은 일찍이 예수 외에는 없다. 태어나자마자 잔인한 헤롯왕의 칼날을 피하여 피난 당하고, 비극적인 탄생과 시골나사렛사람으로서 목수의 가정과 아버지의 일을 도와 살았고, 머리 둘 곳도 없는 무주택자요, 결혼 한번 못해본 짧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살았고, 자기의 제자에 은 30냥에 팔리고 수제자 베드로의 배신과 인간최고의 극형을 당하신 처형 등,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점철된 시련의 스토리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날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지 않고는 성서를 이해할 수 없으며, 성서 속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성숙한 믿음의 삶”을 양성한 책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과 시련을 불행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환란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예견할 줄 알아야 하며, 이러한 징계는 하나님이 인간을 관리하시기 위해 세우신 가장 위대한 법칙들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도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난을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믿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는 개인이기의 축복, 물질의 축복에만 사로잡히는 이기적 종교가 아니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서 예수가 허기진 배를 채워줄 때, 예수가 잔칫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줄 때 예수가 병을 고쳐줄 때, 기적을 행할 때, 예수가 메시아 왕이 될 소망으로 가슴이 부풀 때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를 때 그 많은 군중은 어디 갔는가? 갈보리의 처절한 광경을 눈에 담으면서 예수는 탄생에서부터 말구유를 택하시고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분 얼마나 시장하셨는지 무화과나무의 곁으로가 열매를 헤아리신 분, 제자들의 배신, 죄 없이 십자가의 죽음 앞에 예수는 너무나 외로이 고독해야 했다.
시련을 통해서 인생은 여문다. 시련은 인생의 삶을 힘 있게 해준다. 시련은 인생에 맛을 내게 한다. 시련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고 오대양을 누비며 항해해야할 항해사도 훈련이 필요하고 군인이 되기 위해서도 어려운 훈련이 필요하듯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련의 훈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