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생명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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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생기있게 피어남이다. 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잿빛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생야전기현(生也全機現) 사야전기현(死也全機現)'이란 말이 있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하게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때는 죽음에 철저하게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 같은 걸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 한 죽음에 당해서는 조금도 삶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된다. 살 때에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에 으르러서도 죽지 못하는 것은 사람다움의 삶이 아니다. 사는 것도 내 자신의 일이고 죽음도 내 자신의 일이라면 살아 있는 동안은 전력을 기울여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미련없이 신속하게 물러나야 한다. 이는 생명을 다하는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때그때의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선의 특색은 이와같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으로 사는 데에 있다. '바로 지금'이 "존재는 생명이어야 한다"는 취지를 알게 한다.
철학에서 존재 개념은 매우 큰 역할을 했으며 그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하였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다수의 사물과 그들의 형태와 변화 및 운동이란 단 하나의 영원한 존재(실재實在)의 현상이라고 하며 존재는 유일하고 불변하며 영원하다는 것이다. 존재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살펴보면 존재는 모든 것이 가진 속성일 수도 있고 물리 세계 너머에 또는 그 위나 뒤에 있는 대상이나 영역일 수도 있다고 여유롭게 말한다.
우리는 삶에서 생존을 위한 존재로 사는가? 물음을 묻는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생존은 가치와 무관하고 존재의 가치를 알면 생존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를 향상시키기 위해 생존은 필요하다. 성서는 이 가치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 하리요" 삶의 의미를 알게 한다. '소유'와 '존재'가 삶의 일상생활에서 나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사람의 존재는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존재임을 알게 한다. 어떤 생명도 세상에 스스로 우연히 존재한 것은 없다. 생명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가 부모를 만나 부모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날을 기념하여 생일로 삼는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을까?” 어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이요 은혜인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못하여 본인에게는 슬픔이요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인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