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하순(5. 24)에 향년 80세의 백경자씨가 한(恨)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분의 존함을 미처 알지 못하는 이는 혹시 이분이 노령에 이른 어떤 일제(日帝)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중의 한 분이 아닌가 짐작해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분은 소위 그 위안부 여성의 삶 못지않은,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간 한국의 여성이기도 하였다.
이분은 1973년 10월 19일, 당시 중앙정보부의 강압적인 수사에 의해 이른바 고문치사 당한 고 최종길 서울대 법학과 교수의 부인이었다. 당시 42세의, 앞길이 구만리 같았던 젊은 엘리트 교수를 남편으로 두고 있었던 이분에게 남편인 최 교수의 죽음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사흘 전인 16일 중정의 수사협조 요청에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 들어갔던 남편이 그 사흘 뒤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버렸으니, 어찌 이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이 있었겠는가.몇 달 뒤 다가올 올해 10월 19일은 최 교수 서거 42주기의 날이다. 42세였던 남편이 사망한 뒤 그 곱빼기 햇수(42주)가 되는 그날을 차마 살아서(눈뜨고) 맞을 수는 없었든지 그분은 이 한 많은 세상을 표표히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통탄해 마지않았던 모든 이들이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소위 과거사 문제 해결에 힘을 쏟은 결과 과거 사건들이 많이 해결(해명)되기도 한 게 사실이다. 그 가장 큰 것이 아마도 인혁당 사건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의 해명 결과, 실로 8명의 목숨을 재판 직후 전격 처형해버리고 만 이 사건이 실은 날조된 것이었다는 공식 발표에 임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무슨 간첩 사건이니, 또는 무슨 간첩단 사건이니 하는 것들도 모두(거의?) 날조된 것이었다는 재판 결과 발표에 역시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음이 또한 사실이다.
최종길 교수 사건도 ‘그가 간첩이었음을 고백하고 자살했다’는 식으로 처음 발표되었던 내용이 그 후의 조사에 의해 그 사건 자체가 날조된 것이었다는 결과 발표에 우리는 분노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민사소송에 의해 몇 푼의 돈이나 쥐어주고 마는 배상 판결로 끝나버리고, 형사 재판은 시효가 끝났다는 것을 구실로 아예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국가의 공신력에 대하여 신뢰할 수 없는 국민들이 참으로 가련하기만 할 뿐이다.
이스라엘의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이 떠오른다.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미가… 등 그 이름만 들어도 위정자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들은 주저함 없이 제왕들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그들의 예언은 당연히 길예연(吉預言)이 아닌 흉예언(兇預言)이었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가 아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와 같은 직언 앞에서 속으로 떨지 않을 제왕들이 있었겠는가.
만일 그들이 오늘의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앞서 말한 그런 흉측한 일들이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당연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제왕과 그 측근 권부 인사들에게 질타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예언이 발(發)해진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흉예언일 수밖에 없으리라.
미국의 신학자 월터 부르지만은 그의 이름난 저서 <예언자적 상상력> 속에서 이스라엘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한 나라의 바람직한 정치와 경제를 이렇게 바라보았다. ‘억압의 정치 아닌 정의의 정치’, ‘풍요의 경제가 아닌 평등의 경제’, 이렇게 보았다. 정의(正義)의 정치가 이뤄지지 않고 백성들에게 억압의 정치가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의를 하수같이, 공의를 강물과 같이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그 단적인 예이다.
풍요의 경제가 백성들에게 일시적인 위안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의 경제라는 것이다. 이 평등의 경제를 지향하지 않고 풍요의 경제만을 추구할 때 모든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풍요의 경제는 결국 억압의 정치와 손잡게 되는 법이다. 불평등을 호소하는 백성들의 입을 봉쇄하고, 억압의 정치에 반기를 드는 국민들을 잠재우기 위해 인혁당 사건도 날조하고 무슨 간첩단 사건도 조작하고 또 긴급조치법도 만들고 하다가 결국은 무너져 내린 정권이 아니었던가. 흉예언을 발하는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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