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본분(本分)을 회복하라
한국의 교통문화 대중교통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세계최고의 자랑거리였는데 이것이 박살나고 있습니다.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서로 경쟁하는 것만 가르쳤지 봉사와 희생의 교육이 실천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유주의가 극대화 되어 있다는 미국사회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나 장애자, 또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완전히 매장을 당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엘리트축에 들지 못합니다. 이기주의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학교에서 봉사와 희생을 가르치는데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봉사를 실천할 나이인 청소년 때에 봉사와 희생을 가르치지 않고 서로서로 치열한 적자생존의 경쟁만 가르쳤습니다. 인격이 살아나는 교육이 아니라 짐승 같은, 아니 짐승보다 못한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선생님이 망가졌고 학교교육이 망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를 위해 희생해 주신 부모님까지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어 양로원으로 현대판 고려장을 하고 있는 시대로 변해 버렸습니다.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하고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 학교의 문제만 아닙니다. 사회의 책임은 철저하게도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땅히 교회가 이것을 실천해야 하는데 교회가 희생과 봉사에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희생과 봉사에 앞장을 서야 하는데 자기 이기주의에 빠져서 교회가 교회다운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학교의 교육에 따라 가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의 덕목(德目)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는 봉사를 잘하고 희생을 했지만, 사회를 향해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정도로 교회 이기주의에 빠졌습니다.
사회와 학교는 교회를 닮아갑니다. 아무리 사회가 썩어도 교회만은 그 힘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들은 사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희생을 한 것보다 오히려 자라나는 교회의 청소년들에게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희생과 봉사를 가르치지도 않았고 실천도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마다 자기 성 쌓기에만 몰두하다 보니 교회의 덩치는 커졌지만 봉사와 희생에는 인색한 결과 사회가 교회를 보고 따라갔습니다. 오히려 순진하고 착한 교회의 무궁무진한 청소년들의 자원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치열한 생존경쟁의 교육에 내몬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으려면 봉사와 희생에 활짝 문을 열어놓고 한국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청년 때의 봉사와 희생은 기본입니다.
인생에서 청년 때의 봉사와 희생을 놓치면 언제합니까? 나이 많고 힘이 없으면 봉사하려고 해도 어렵습니다. 희생과 봉사는 해본 사람만이 그 기쁨을 압니다. 청소년들이 희생과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을 보면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들에게 장래를 걸어도 좋습니다.
희생과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지도자도 되고 한 시대를 바뀌어 놓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잘 먹고 잘 입어서 힘이 넘쳐나 힘을 주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힙합 브레이크댄스 등과 같은 과격한 춤을 배우고 무슨 클럽이나 이상한 조직에 빠지기도 하며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힘을 주체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봉사와 희생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회를 위한 봉사와 힘없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봉사와 희생을 유도해주면 이 나라의 교육과 이 나라의 골치 아픈 청소년 문제도 차츰차츰 해결이 되리라고 봅니다.
사랑은 진정한 희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인간성회복의 교육으로 교회에서 이 부분을 개발해주고 도입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수성(純粹性)을 회복하라
어린아이는 이유 없이 그냥 좋습니다.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싶습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나 대장이 되려고 합니다. 최고의 일인자(一人者)가 되기 위하여 몸부림칩니다.
학문에서도 이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의 소리를 들으려고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하고 노력합니다. 어느 분야에 있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한국의 교통문화 대중교통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세계최고의 자랑거리였는데 이것이 박살나고 있습니다.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서로 경쟁하는 것만 가르쳤지 봉사와 희생의 교육이 실천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유주의가 극대화 되어 있다는 미국사회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나 장애자, 또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완전히 매장을 당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엘리트축에 들지 못합니다. 이기주의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학교에서 봉사와 희생을 가르치는데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봉사를 실천할 나이인 청소년 때에 봉사와 희생을 가르치지 않고 서로서로 치열한 적자생존의 경쟁만 가르쳤습니다. 인격이 살아나는 교육이 아니라 짐승 같은, 아니 짐승보다 못한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선생님이 망가졌고 학교교육이 망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를 위해 희생해 주신 부모님까지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어 양로원으로 현대판 고려장을 하고 있는 시대로 변해 버렸습니다.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하고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 학교의 문제만 아닙니다. 사회의 책임은 철저하게도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땅히 교회가 이것을 실천해야 하는데 교회가 희생과 봉사에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희생과 봉사에 앞장을 서야 하는데 자기 이기주의에 빠져서 교회가 교회다운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학교의 교육에 따라 가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의 덕목(德目)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는 봉사를 잘하고 희생을 했지만, 사회를 향해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정도로 교회 이기주의에 빠졌습니다.
사회와 학교는 교회를 닮아갑니다. 아무리 사회가 썩어도 교회만은 그 힘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들은 사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희생을 한 것보다 오히려 자라나는 교회의 청소년들에게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희생과 봉사를 가르치지도 않았고 실천도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마다 자기 성 쌓기에만 몰두하다 보니 교회의 덩치는 커졌지만 봉사와 희생에는 인색한 결과 사회가 교회를 보고 따라갔습니다. 오히려 순진하고 착한 교회의 무궁무진한 청소년들의 자원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치열한 생존경쟁의 교육에 내몬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으려면 봉사와 희생에 활짝 문을 열어놓고 한국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청년 때의 봉사와 희생은 기본입니다.
인생에서 청년 때의 봉사와 희생을 놓치면 언제합니까? 나이 많고 힘이 없으면 봉사하려고 해도 어렵습니다. 희생과 봉사는 해본 사람만이 그 기쁨을 압니다. 청소년들이 희생과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을 보면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들에게 장래를 걸어도 좋습니다.
희생과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지도자도 되고 한 시대를 바뀌어 놓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잘 먹고 잘 입어서 힘이 넘쳐나 힘을 주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힙합 브레이크댄스 등과 같은 과격한 춤을 배우고 무슨 클럽이나 이상한 조직에 빠지기도 하며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힘을 주체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봉사와 희생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회를 위한 봉사와 힘없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봉사와 희생을 유도해주면 이 나라의 교육과 이 나라의 골치 아픈 청소년 문제도 차츰차츰 해결이 되리라고 봅니다.
사랑은 진정한 희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인간성회복의 교육으로 교회에서 이 부분을 개발해주고 도입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수성(純粹性)을 회복하라
어린아이는 이유 없이 그냥 좋습니다.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싶습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나 대장이 되려고 합니다. 최고의 일인자(一人者)가 되기 위하여 몸부림칩니다.
학문에서도 이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의 소리를 들으려고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하고 노력합니다. 어느 분야에 있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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