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시를 통해 자신의 허물을 고백함과 동시에 민족의 아픔 위로

본고는 오는 2017년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크리스천 문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윤동주 시인을 다시금 조명하고, 그의 작품을 기리기 위한 기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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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짧은 생애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명동소학교 교사였으며 용정 중앙장로교회의 장로였다.
1925년에 명동(明東)소학교에 입학하여 송몽규, 문익환 등과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한 후 1932년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일제에 의해 폐쇄당하자 다시 용정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뒤 2년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남다른 친교를 맺었다.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립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가을에 다시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태평양 전쟁의 말기로 흉흉하던 시절,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도중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는 복역하는 중에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야 했는데, 그것이 그의 사인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되며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그와 함께 복역 중이던 친구 송몽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사망하게 된다.

윤동주 시의 부활
윤동주는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공상〉을 발표했다.〈공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 된 것이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으며, 1937년 옌지[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에 윤동주(尹童柱)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윤동주의 시는 1943년 유학생들과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는 죄목으로 사상범으로 붙잡혀 1945년 2월 형무소에서 죽음 이후인 1948년 1월, 유고시집「하늘과 별과 시」가 나옴으로써 알려졌다.
1945년 2월 윤동주는 세상을 떠났지만 3년이 지나 그가 남긴 31편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유고시집으로 정음사에서 10부를 추모식용으로 제작하여 처음으로 발간하게 된다. 그는 생전에 시집의 원고를 가장 친한 친구였던 정병욱과 연희전문학교 이양하 선생에게 한 부씩 나눠주었는데, 정병욱이 보관하였던 원고만이 남아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의 초판 서문에 그가 늘 동경하던 시인이자 동지사 대학의 선배였던 정지용이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라는 추모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195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보급판으로 2종을 재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8년 11월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다. 정부는 시인 윤동주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십자가를 흠모한 사나이 윤동주
시인 윤동주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은 그의 시를 형성하고 있는 토대이자 세계관이다. 그의 시에서 고백은 기독교 성경에서 비롯된 언어로부터 형성되고 있다. 고백은 기독교 성경과의 알레고리에 의해 형성된 희생 제물의 제의적 상징들과 참회자가 토설하는 속죄 고백의 언어적 특성들을 나타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그의 안으로 들어왔을까?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기독교에 입문했던 그의 친가와 외가의 영향을 받았다. 태어나서 자랐던 기독교 마을 명동촌, 그가 다녔던 기독교계 학교에서 그와 기독교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
기독교와 민족정신의 만남은 윤동주가 식민지 청년 지식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증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서 살아온 실향민 후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고 자라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신앙인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이 그가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를 이룬 고백의 시학을 구축할 수 있었던 근본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왜 시를 썼을까? 시 쓰기를 통해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고백함과 동시에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민족과 자기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하고자 했다.
또한 그가 민족 시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자선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고 했을 만큼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치유와 위로의 심정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일제의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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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시인 윤동주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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