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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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감사절의 유래는 구약시대 맥추절부터이다. 맥추절(the Feast of Harvest)은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 밀(wheat)추수가 끝날 무렵, 우량품들로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 감사제이다(출 23:16, 34:22). 그러나 그 근대적 유래는 북미 대륙을 개척한 청교도들(Pilgrims)로부터 유래한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북미 대륙으로 온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다(청교도란 영어로 Puritan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purify; 정화하다, 깨끗하게 하다, 순결하게 하다에서 비롯됐다).

헨리 8세의 박해
헨리 8세(Henry 8, 1491-1547, 재위 1509-1547)는 자기 아내 캐터린(Catherine)과 이혼하고(1527), 앤 보레인(Anne Boleyn)과 재혼했다(1533). 청교도들은 정당하지 못한 이혼과 재혼을 반대했다. 헨리 8세는 그 일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파문(성찬참여 정지 등)은 당했으나, 생애 동안 천주교 교리를 신봉했다. 그는 또 1534년 자신(영국의 왕인 동시에 수장(首長)이 된다)을 영국 교회의 머리(the head of the Church of England)라 주장하면서, 로마가톨릭의 교황청과 행정적 관계를 단절해버렸다. 동시에 영국교회는 캔터베리(Canterbury)와 요크(York) 회의에서 헨리 8세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모실 것을 결의하고, 교황은 영적 문제에 권리가 없음을 선언했다.
메리 여왕(Queen Merry, 재위 1553-1558)은 헨리 8세와 그의 첫 아내 캐터린(Catherine) 사이에 태어난 딸로, 고집불통의 잔인한 여왕이었다. 그녀는 폴(Pole) 추기경을 앞세워 천주교 회복을 도모했다. 그때 개신교 지도자들인 토마스 크램머(Thomas Crammer), 라티머(Latimer), 리들리(Ridley) 등 약 200명의 감독들, 학자들 그리고 남녀 성도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화형(火刑)시켰다. 그때 청교도들은 제네바,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망명하게 됐다.
엘리자베스(Elizabeth 1, 1533-1603)는 메리 여왕에 이어 1558년 11월 17일 왕위에 즉위한 후, 1559년 4월 29일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공포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둘째 부인 앤 볼레인(Anne Boleyn)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수장령이란 왕이 종교와 정치에 유일한 통치자임을 공포한 법령이다. 그리하여 왕이 국가의 머리도 되고 동시에 (영국)교회의 머리도 됐다.
영국교회(Anglican church)는 왕이 교회의 머리요, 교회의 감독들은 왕을 대신하여 교회를 다스리기 때문에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라고도 부른다.
영국 정부와 영국 교회는 상호 결탁하여 정교분리 원칙을 반대하는 청교도들을 반대·탄압·투옥·고문 등 심한 핍박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헨리 8세, 제임스 1세(1600-1649), 찰스 1세(1625-1649) 때 청교도들은 북아메리카로 많이 떠났는데, 1620-1640년대까지 북미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약 22,000-50,000명에 달한다.
그들은 영국을 떠나기 전, “나라는 있어도 왕이 없는 곳, 교회는 있어도 교황이 없는 곳,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곳, 기름진 땅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도록” 기도했고, 그러기 위해 북미 대륙으로 건너갔다.
102명의 청교도들과 메이플라워호북미 대륙을 발견한 것은 스페인의 콜럼버스(Columbus, A.D. 1446-1506)였고, 북미로 처음 이주한 사람들은 영국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을 가리켜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s Fathers)이라 부른다. 이들은 1600년대 초기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Atlantic Ocean)을 건너 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102명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 대륙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청교도들은 영국 남해안 플리머스(Plymouth) 항구에서 1620년 8월 5일(지금 달력으로 8월 15일) 스피드웰(Speedwell)과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미 대륙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초반에 배가 고장나 물이 새 다시 귀항했다. 한달 후인 1620년 9월 6일, 결국 메이플라워호만 25명의 선원과 102명의 청교도들이 승선하여 미국 동해(대서양) 중부지방 버지니아(Virginia)를 목적지로 삼고 재차 출발했다. 남자 78명과 여자 24명 등 전체 102명이 출발했으나, 항해 도중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탄생했다.
그들은 그해 11월 11일 버지니아 대신 미국 동북부 메사츄세츠 케이퍼 카드(Cape Cod) 해안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5일간 주위를 답사한 후 11월 16일 현재의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했다. 63일간 3400마일(5,440km)의 멀고도 긴, 그리고 위험한 항해 끝에 돛을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을 떠날 때 항구 이름을 따라, 그곳을 플리머스라 명명했다.
미국 동해안은 항상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남쪽 버지니아로 가려던 배는 북쪽 메사추세츠에 도달했다. 그들은 토요일에 도착했지만, 주일을 지키기 위해 길고도 지루하고도 위험한 항해를 거쳤음에도 주일을 배 안에서 보냈다.
그들은 항해 동안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가? 그들은 찬송을 많이 불렀다. “우리는 대부분 시편을 찬송으로 불렀다. 주일은 모두가 찬송만을 불렀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청교도 개척자들)은 도착한 후 형언할 수 없이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다. 11월 중순에 도착한 그들은 강풍과 눈보라 치는 혹독한 추위, 질병과 식량 부족, 원주민들의 냉대, 들짐승들의 위험, 거할 집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그해(1620-1621) 겨울, 2-3개월 이내에 102명 중 절반 이상이 운명을 달리했다.
특히 1-2월의 혹독한 겨울에는 하루에 2-3명씩 죽어나갔다. 생존자는 50명 뿐이었고, 그들 중 다수도 지치고 건강이 쇠약해지고 질병으로 신음했다. 그러나 6-7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땔감을 마련하고, 침실을 만들고, 병자들을 간호하며, 병자들과 노약자들의 옷을 빨아입히고, 칠면조와 사슴 등을 사냥하여 고기를 조달하는 등 자발적으로 헌신했다. 이들 경건한 청교도는 굳건한 믿음 위에 마음을 하나로 통일한 불굴의 의지를 지녔다. 엄동설한도 지나고 따스한 봄날이 찾아오자, 생존한 청교도들은 땅을 개간하고 싸를 뿌리고 가꾸어 여름과 가을 기대 이상에 넘치는 추수를 하게 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감사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6)”. 엄동설한에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것,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주신 것, 미 대륙 개척자들로 삼아주신 것 등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렸다.
청교도들은 북아메리카로 건너 온 다음 해인 1661년 가을,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추수한 첫 곡식들과 채소들 중 최고 우량품들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들은 기도 중에 “우리는 대서양을 건너와 여러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나이다” 라고 기도했다.
청교도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첫 추수 감사예배를 드렸다.
첫날인 주일에는 온종일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찬송부르고, 말씀 받아 묵상했다. 둘째날에는 칠면조 요리, 감자, 옥수수 요리 등을 만들어 서로 나눠먹고, 셋째날에는 인디언 추장 마싸소이트 등을 초대해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친교했다. 90명의 원주민 인디언들은 칠면조 구운 요리와 호박파이(pumpkin pie)를 가져와 같이 친교를 나눴다. 그것이 유래가 되어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 고기와 호박 파이를 먹게 됐다.
청교도들은 통나무들을 잘라 먼저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지은 다음에야 자기들의 집을 지었다. 그들이야말로 북아메리카의 개척자들이요, 믿음의 선조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주일 성수, 십일조, 경건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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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추수감사절의 근대적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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