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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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의 산상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집약시킨 것이다. 한국교회가 새해를 맞으면서, 교회의 필요(Needs)와 소원(Wants)을 먼저 구하기 십상이다. 이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우선시함에서 비롯됨일 것이다.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전에, 교회 지키기에 먼저 마음을 빼앗겨 왔다. 이는 교회론 적이고 교회주의에 중점을 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교회 바깥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이른지도 모른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야 새 집을 이루듯이,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남으로써 광야를 넘어서 약속한 곳에 들어갔듯이, 모세가 광야 저편 끝까지 나아갔듯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영문 바깥으로 나가서 십자가를 졌듯이, 우리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려면, 저마다 자신의 교회에서 떠나, 그리스도가 지시하시는 멀찍이 떨어진 그 곳을 바라봐야 할 시점인 듯하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교회 되려면, 교회를 떠나야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가 교회되도록,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인 교회의 부끄러움과 죄악을 씻기시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내어주심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결코 이래서는 자기 스스로를 정화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몸뚱이에서 흘러내리는 보혈로만이 거룩한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상당히 존재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모습을 외부가 알아차릴 만큼 성장하였을 시기에,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묶어서 세상에 내 놓았다. 저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집중된 나머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해야 하겠기에, 교회를 가르치고 교회의 나아갈 길을 가리킨 것이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오셔서 이르시기를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의를 이룬다.’하였다.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성령이 임하시어 그 위에 거하시며,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있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였다.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그의 공생에 사역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구원사역이다. 죄에서 인류를 십자가로 구속하셔서, 하나님나라와 제사장이 되게 하신 구속사역이다. 바빌론 음녀로 인해서 더럽혀진 나라를 제거하고, 그리스도가 친히 신도들의 중심에 등극하심으로서, 비로소 그가 구체적으로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우시는 사역이다. 그래서 이 같은 나라를 건설함에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법과 칙령이 있게 되고, 시민들은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노예 민에게서의 출애굽과, 저를 세우는 십계명이 있었듯이, 그리스도에게는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나라 건설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나라 건설과 그 의의 질서를 세워가려면, 그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의’에 관한 보편적 지식을 모두가 공감하도록 정의를 내리려면, 구약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떻게 역사적으로 일반화 하여 왔는가를 살펴보면, 명백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의’와 ‘하나님의 복음’은 갑작스레 상정된 것이 아니다. 아담과 아브라함 이후 바울에게 이르기 까지, 많은 선지자들과 시인들, 수많은 지혜 자들은 기나긴 세월의 통찰 속에서 자신들 만으로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지켜 갈 수 없음을 애통해하였다. 저들의 결말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가져왔고, 자신들의 지혜와 실천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질 못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더 크신 의로우심을 소망하고 기다려 온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다윗의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날이 오면 유다는 구원을 얻어서 평안에 들어갈 것이고, 그 이름은 야훼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렘 23:5-6; 단 9:15-18)’ ‘하나님의 의’란 곧, 죽을 수밖에 달리 방안이 없는 저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 되심의 크신 은총이었다.
우린 ‘의’에 관한 개념을 법정 개념에 한정시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입으면’ 죄 없음으로만 인식하고서는, 그 것만을 내세우며,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좁은 의미의 구원을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예수의 고귀한 희생이나 부르심에 대해서 응답을 한다거나, 책임을 지는데 까지는 나아가질 못하였다. 마태에서 ‘크리스천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못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선언 되었는데, 이는 ‘바리새인의 의’가 율법에 응답함을 말함이듯이,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복음’에 응답함을 이른다. 우리는 저마다 예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나라와 그 의’의 질서를 파악조차도 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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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교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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