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 순교 이후,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초대교회 시절,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성령 충만한 빌립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그 성에서 유명한 마술쟁이 시몬도 세례(침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 다녔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전도에 합세하여 침례 받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본 초신자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 8:18,19) 라고 요청하였다. 시몬은 ‘성령’을 상업적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먼저 자신이 약간의 자금을 투자하여 그 ‘성령’이 임하게 하는 능력을 구매하면,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는 ‘성령’을 돈을 벌 수 있는 ‘상품’으로 착각한 것이다. 형태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오늘날 현대 교회가 ‘복음’을 고객(교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새로운 상품으로 계발하고 변형시켜 판매(설교)하는 일이 보편화 되고 있다. 그리하여 복음이 능력이 상실되고 고객들의 구미에 따라 다양한 상품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의 궁여지책(窮餘之策)인가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행 2:42)는 것이 초대교회 성장의 핵심 비결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늘 함께 거하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행 2:44~47)으면서 생활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그 당시 교회에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47절)므로 교회가 성장한 것이다. 교인들의 연합된 모습, 그리고 일반인들과는 구별된 성도들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구제와 봉사의 삶,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교회 성장의 동력이었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고 사람의 상태는 달라져도 복음이 퍼져나가는 원리는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초대교회의 정신과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채,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와 논리로 교회를 성장시켜 보려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하고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마케팅 정신이 교회 성장 원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교회 건물을 고객의 다양한 취향에 맞추어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도 현대인의 기호에 맞추어 세속적인 요소를 다분히 첨가시켜야 한다. 물론 설교도,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에 피곤하고 지친 상태로 교회를 찾아온 손님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고 편안하고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도록 구색을 잘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주일에 또 교회에 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말씀’이 기준인가 ‘사람’이 기준인가
성경의 내용은 대체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함께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 간의 투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뚜렷한 현상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타락’과 ‘회복’이다. 인간은 타고난 죄악성 때문에 계속 악으로 기울어져 넘어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일으켜서 세우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타락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율법’ ‘계명’ ‘교훈’ ‘말씀’ 등의 단어로 표현하며, 그것은 어느 시대나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바로 세우시는 말씀의 원칙은, 하나님이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처럼 불변이다. 그래서 그것을 불변의 진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에 따라 사람의 형편이나 환경에 따라 변형, 혹은 변질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세상의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성장과 교회의 이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양보해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죄인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거나 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는 ‘진리’의 말씀은 가려두고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들을 묘하게 모자이크 하여 원래의 뜻이 왜곡된 사랑과 은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공의’가 없는 사랑, ‘순종’이 무시된 은혜가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오도(誤導)하고 있다.
고객(교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교회의 노력은 교회 운영의 여러 측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설문으로 고객의 필요를 조사한 다음, 교회는 그 욕구를 채우는 일에 아무런 원칙 없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회 안에 까페를 설치하는 것은 이제 기본이고, 심지어는 흡연실까지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외국의 어느 교회는 대예배실을 레스토랑 분위기로 꾸며서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식사를 하면서 웨딩홀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러한 편의를 제공하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단 그러한 분위기나 편의시설에 이끌려 모여든 교인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성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은, 전하는 복음마저도 고객 중심으로 변질되어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력 있는 복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 지식인들의 시각은 매우 냉소적이다. 세상과 구별이 되지 않는 교회, 회사처럼 운영되는 교회, 사장처럼 보이는 목사를 보고 사람들은 무기력한 교회를 비웃거나 경멸한다. 결국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기초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터전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의 몸”(엡 1:23)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를 … 교회의 머리”(엡 1:22)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 용서와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도록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죄를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쳐주고, 그 믿음으로 죄인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역할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성경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경건의 연습’(딤전 4:7,8)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불신하고 불순종하면 심판과 멸망이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가르쳐 줄 책임이 교회에게 있다. 이러한 엄연한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엄숙하게 경고하였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이제 우리 교회를 책임진 지도자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양심적인 대답을 하여야 한다. “교인들이 만족할 때까지 교회가 변화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인들의 상태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질 때까지 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고 변화되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의 대답은 분명하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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