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세가 어느 정도되는 소위 1%의 대형교회 담임 목사급이면 스타성 기질이 다분하다. 그래서 언론사와 기자들을 각자 줄 세우기도 하고 특별 관리도 한다. 자신의 홍보나 일간 신문사의 기자들에게는 엄청난 재정을 쏟아 붇는다. 그리고 사진 찍고 인터뷰하는 일과 광고로 도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대사회적 영향력 차원에서 언론정책을 가지고 그 기능을 활성화하겠다면 그 필요성에 누가 반대하랴.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렇게 지도자들이 다 언론스타가 되면 ‘소는 누가 키우나?’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다들 밥 먹고 사진 찍고 스타만 되려한다면... 주인공만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재미가 없다. 엑스트라의 감칠 연기가 있어야 제 맛이다. 한국교회도 너무 똑똑한 주인공들만 있으면 인간미가 없다. 조금 부족하고 조금 허술해도 사람 냄새가 조연이 그래도 나는 좋게 여겨진다.
농촌의 농부들이 늙어가고 은퇴하고 있다. 과수원 과일은 누가 따나? 배추농사는? 논밭일은 누가하나? 양어장 고기는 누가 키우나? 바다의 물고기는 누가 잡나? 소는 누가 키우나? 8월의 가마솥 찜통 더위에 정말 묻고 싶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을 때, 사진찍고, 밥먹고, 차 마시고 친목회하다 골든타임은 지나고 몇 년 후 은퇴들 한다면, 이렇게 ‘소’키우는 일에 별 관심없다면 ‘소’와 ‘양’은 주님이 알아서 다 키운다는 것인가?
조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실제하는 일은 없이 이벤트로 시간만 때우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과, 반대로 실제로 일을 하는데 차마 민망스러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랑을 그리 하지 않는 사람, 두 부류다. 조직에 꼭 필요한 인재는 후자이다. 그들이 없으면 조직은 결국 쇠퇴하고 망하는 길을 걷게 된다. 고로 지도자는 제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어느 조직이든지 여러 사람이 한사람을 바보 만들기는 쉽다. 자신보다 앞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을 ‘이류’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본인들이 ‘일류’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삼류’같으면서 말이다. 좋은 지도자나 일꾼이 나와도 자신의 맘에 안든다면 바로 비토세력이 된다. 비토(veto)는 거부권이라는 단어로 복음적인 용어가 아니라 상당히 정치적 용어이다. 이런 비토세력이 멀쩡한 사람에게 중상을 입히고 지도자가 되지 못하게 실족하게 만든다.
지도자의 한계가 있다면 상대가 나와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소위 ‘개척파’보다는 ‘일류파’라는 의식은 해외파 출신 목회자들에게서 그런 점은 더 강하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하여는 무관심과 무지하다. 자신들이 쳐놓은 담과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 한국교회를 섬기며 대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는 등 건강한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기에 목회생태계를 회복하려고 앞장서면 자기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죄목(?)으로 뒷담화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인재를 비토시킨다.
지난해 일본 여행중 소학교 운동회에서 박 터트리기 경기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같으면 오자미를 던져서 박을 터트리면 “내가 던져서 저 박이 터졌다”고 좋아한다. 그런데 일본식 경기는 박을 바구니로 만들어 그 박안에 오자미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내 것도 저 박안에 들어가 그 박의 승리에 동참하는 일원이 되었다”는 것에 감동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상당히 닮으면서도 깊이와 감동이 틀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관점과 감정이 전혀 다르다. 박을 꼭 터트려야 속이 후련하고 직정이 풀리는 것인가?
‘한국교회’라는 조직에 좋은 지도자 나오기가 쉽지 않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최소 10년 아니 2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지도자로 만들기 어렵다.
앞으로 교회와 역사와 미래를 읽는 지도자의 필수조건은 ‘연합할 줄 아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도 좋은 지도자가 많다. 그런데도 다들 개인기에 능해서인지 ‘연합’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힘들다. 그래도 가끔은 ‘연합’하기도 한다. 개인기 말고 동역자의식이나 형제애를 가지고 팀워크가 되는 자만이 미래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이들이 동력이다.
한국교회는 정치행위로서의 교회 연합은 있었지만 구체성을 띤 아젠다 설정에는 후진성을 보여 왔다. 한국교회 골든타임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상황이기에 ‘소는 누가 키우나?’ 요즘 필자는 그런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내일을 위해서 오늘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발전에 기여할 일들을 차분히 챙기는 일들은 누구의 몫인가? 한국교회 1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전략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를 실천할 브레인이 있기는 한 것인가? 오늘 한국교회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비바람과 태풍 속에서도 10년 20년을 이상을 묵묵히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감당해온 실무자들이 여럿 있다.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건 그들이 한국교회의 유무형의 자산이다. 그들의 열정과 시선이 더 높은 곳을 향하고 희망을 그릴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