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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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황금빛 연애 시절이 있고, 결혼하여 가장으로서 대접받을 때가 있고, 장년에 전문가로 활동할 때가 있으며, 노년에 가정에 봉사할 때가 있다. 요즘 퇴직하여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남자들을 보면, 처량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남자가 젊은 시절에 가족을 위하여 직장에서 눈칫밥 먹으며 열심히 일했던 때를 아내는 생각 안 하는지, 집에서 삼식이 노릇 하지 말고 나가서 단돈 백 만원이라도 벌어 오란다. 이를 보면 이것이 남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다. 물론 아내가 폐경기를 지나게 되면 여성 호르몬이 줄어듦에 따라 자연히 남성 호르몬이 많아지게 되어 남자를 압도하는 야성적인 힘이 넘치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가끔 아내의 행동을 볼라치면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이 있다.
그 남자는 신혼 시절을 생각해 낸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아내가 예쁜 쟁반 위의 작은 접시에 사과를 내 온다. 예쁘게 벗긴 사과 껍질이 토끼 귀 모양 예쁘다.
“당신도 들지 그래요.”
“난 나중에 들테니 먼저 들어요.”
아내의 말이 매우 공손하다. 그 남자는 신문을 들여다 보면서 포크로 사과를 찍어서 입에 갖다 댄다. 아랫목에 앉은 그 남자의 모습은 제법 의젓하다. 신혼 시절 이후 삼십 년이 지났다. 저녁 식사 후 아내가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한다.
“여보. 사과 좀 깎아줘요.”
“음? 으응.” 그 남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껍질째 먹을 테니까 수세미로 박박 밀어 깨끗이 씻어요.”
그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해 본다.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그 남자는 어느 순간 바뀌어 버린 부부의 위상을 헤아려 본다. 그때가 아마 아내의 폐경기가 지났을 때부터인 것 같다. 그 남자에 대한 아내의 말투가 명령조로 바뀌어 있다.
“나도 당신 만큼 직장 생활 했으니까 우리 집안 일은 반반씩 나누어서 합시다.”
아내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이건 이제까지의 관습에 비하면 좀 심하다.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 아내가 가사(家事)를 책임지는 편이다. 대개 아내가 요리를 하고, 청소와 세탁과 설거지도 한다. 그것이 남편이 삼십 년 이상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가정을 책임진 데 대한 보상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은퇴를 하고 나니 아내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것도 많이 달라졌다. 은퇴 후, 아내가 그 남자에게 내민 것은 앞치마 두 벌이었다. 그것도 전철 안에서 산 비닐로 된 앞치마였다. 하나는 빨간색, 다른 하나는 군청색. 그 남자는 그걸 받아들고 뻘쭘하였다. 그리고 못내 섭섭하였다. 이건 아니다. 여기서 물러섰다간 앞으로 가정에서 아내의 노예가 될 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단호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대부 역할을 하는 형님인 S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 남자는 최근 그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구체적으로 알렸다. 그 남자의 말을 듣는 S의 태도가 자못 진지하였다. ‘아아, 형님이 내 편이 되어 주려는가 보다.’ S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듯 오랫동안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 남자가 S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형수씨는 형님한테 그러지 않지요?”
형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 보니까 남자가 바싹 아내 앞에 바싹 엎드려지내야겠더라. 아마 여성이 폐경기가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생겨 강해지나 봐.”
그 얘기를 듣고 그 남자는 묵묵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재에 들어가 아내의 구박을 제압할 만한 묘안을 모색하였다. 이제 와서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고, 아내를 황홀하게 해 줄 정력도 남아 있지 않다. 아내와 말다툼을 하자니 위아랫집에 소음 공해를 유발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남자는 집을 나왔다. ‘이대로 가출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잘 꾸며진 아파트 정원을 산책하고, 중랑천을 따라 죽 이어진 산책로를 걸어도 아내를 이길 방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천변에 있는 느티나무와 산수유 나무, 계수나무 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 산책하는 이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줄기도 제법 굵어져 사람 허벅지 넓이로 자란 나무도 있었다. 관리인이 따로 물을 주지 않는 데도 나무들은 어느새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 보니 제법 두터운 뭉게 구름이 파아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남자는 결혼하여 미국으로 간 딸아이를 생각하였다. 평소 말이 없는 그 남자에게 식사 때마다 말동무가 되어 준 아이였다. 이제는 가정 생활도 열심히 하여 얼마 후면 아이도 출산한단다. 그토록 취업이 안 되던 아들놈도 계약직으로나마 취업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집에는 부부만 있을 때가 많다. 집 안은 언제나 고요하다. 아내의 잔소리마저 없으면 공허감이 몰려 올지도 모른다. 주변의 친구 중에는 아내가 없어 외로워 하는 경우도 있다. 그 남자는 생각한다. 그래, 이제 가족을 사랑해 주자. 남자가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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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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