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찬송이 가지는 위력은 대단하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요 삶의 표현이며, 영광의 선포가 된다. 특히 예배에서 찬송은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예배의 핵심인 찬송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최고의 고백이다.
문제의 탐색
예배가 언약 갱신의 현장이라면 여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부분과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부분으로 나뉜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역동적인 것 중 하나는 찬송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백성의 읊조림이요 높임이며 기도이고 고백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예배 찬송은 하나님을 찬미하기보다 인간의 음악적 기교를 나타내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찬송이 어떠해야 할까? 전문적 음악가가 아닌 일선 목회자와 성도들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성경적 찬송’을 실천하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사례의 탐구
날마다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일선 목회자의 소리를 듣는다. 광주 동산교회 이한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로 헌신하고 있으니 평생을 예배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김남식(이하 김): 목사로서 늘 예배를 인도하며 찬송의 중요성과 오늘의 문제점들을 느꼈을 것이다. 찬송의 성경적 배경이 무엇인가?
이한석(이하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다니 앞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늘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4:50-53). 여기 예수님의 축복과 제자들의 ‘찬송’은 같은 단어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베푸신 복을 기억하며 회상하여 올려드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그것을 제자들이 다시 시를 읊듯이 읊조리는 것이 찬송이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고 찬송했다. 이렇듯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림이다.
김: 성경은 바른 찬송을 교훈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볼까?
이: 그래서 성경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명령한다(엡 5:19, 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신약교회가 칠십인역 성경을 주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시편을 시, 찬미, 신령한 노래로 분류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모두 시편이 된다. 다른 견해는 시는 시편을, 찬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을, 신령한 노래는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찬송이라는 것이다. 어떤 해석을 선택하든지 공통적인 면은 시편을 찬송함이다.
김: ‘시편 찬송’은 개혁주의 교회들의 예배적 특성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시편 찬송을 부르기보다 ‘부흥성가’ ‘복음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한계가 무엇인가?
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 성도들은 시편이 주는 유익을 누리고 있다. 물론 시편만 예배용 찬송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편이 주는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 우리에게 시편이 얼마나 자주 불려 지는가?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이 부분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193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온 분들이다. 이 분들의 수고로 한국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러나 이 분들 대부분의 신학적 배경은 미국 부흥운동이었다. 그러니 대륙의 개혁주의 유산을 이어가는 데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신앙고백과 예배에서 더욱 그러하다.
김: 오늘의 예배 음악이 예배의 핵심에서 벗어난 듯하다. 가사나 곡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직접 찬송을 만들어 예배에 사용했다. 칼빈 선생은 제네바 시편 찬송을 만들어 성도들의 신앙을 도왔다. 실제 교회생활에서 시편이 찬송되는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세속 음악의 장르에 개혁주의 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가사를 붙인 노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눈을 감고 음률만 들으면 예배음악인지 세속음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곡들도 더러 있다.
김: 나의 경험으로 보면 몇 해전 예장합동총회의 ‘시편찬송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시편찬송가 만들기에 노력한 바 있다. 교회들의 무관심과 추진하는 사람들의 역량 부족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예배음악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이: 종교개혁은 교회의 예배를 바꿨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예배 음악이었다. 뛰어난 가창력과 예술성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진 찬송을 모든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으로 옮겨왔다. 종교개혁 전에는 전문 찬양대원을 양성하는 학교들이 있었고 심지어 이 학교에서 성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찬송은 이들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종교개혁은 비성경적인 찬송 문화를 완전히 개혁했다. 우리는 이 전통과 원리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김: 우리의 예배 음악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까?
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다시 읊조림이다(시 145:5). 이러한 예배 찬송은 반드시 성경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예배에서의 찬송은 보편성과 경건성(혹은 거룩성)이 담보돼야 한다. 보편성은 모든 성도가 공감하며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특정한 일부의 사람들만이 부르는 찬송은 예배 찬송으로 합당치 않다. 가사의 내용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라든지 음악적 기교가 젊은이들에게 적합해 어린이나 노인들이 따라 부를 수 없으면 안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나 미국의 그리스도인이나 국적을 초월해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나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등은 보편성이 결여된 찬송이다. 시편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에 곡을 붙인 찬송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보편성을 갖춘 찬송이다.
김: 교회에서의 음악이 세속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너무 많다. 세속음악과 장르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 리듬과 가락에서 찬송가와 세속음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특별히 복음송은 더욱 그렇다. 복음송과 예배용 찬송의 구별이 없으니 어느덧 우리 가운데 복음송이 예배 찬송을 대신하고 있다. 복음송에는 포크, 팝, 발라드, 트로트, 재즈, 랩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이 혼재돼 있다. 바로 이러한 복음송을 통해 온갖 장르의 음악이 예배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예배 음악과 복음송은 구분돼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된 예배 음악은 반드시 중생돼야 한다. 젊은이들과 초신자 또는 구도자들을 배려한다 할지라도 예배음악과 복음송의 균형이 필요하다.
김: 음악의 영향력은 누구나 인정한다. 우리의 교회음악은 어떠해야 할까?
이: 음악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지녔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정이라는 좋은 선물을 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흥분하기도 하며 차분하게 되며, 분노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감정은 불과 같아서 반드시 신중히 관리하며 제어해야 한다. 신앙의 깊이가 부족한 성도가 자칫 교회 음악을 감정에 치우쳐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도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예배 음악이 되지 않도록 감독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것이지 사람의 만족을 최고로 여기지 않는다. 리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구원 역사가 울려 퍼질 때 성도들의 감정은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기본에의 회귀
바른 찬송 즉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자.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편찬송’이 우리의 찬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합당한 찬송을 드리자.
(편집자 주)
문제의 탐색
예배가 언약 갱신의 현장이라면 여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부분과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부분으로 나뉜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역동적인 것 중 하나는 찬송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백성의 읊조림이요 높임이며 기도이고 고백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예배 찬송은 하나님을 찬미하기보다 인간의 음악적 기교를 나타내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찬송이 어떠해야 할까? 전문적 음악가가 아닌 일선 목회자와 성도들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성경적 찬송’을 실천하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사례의 탐구
날마다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일선 목회자의 소리를 듣는다. 광주 동산교회 이한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로 헌신하고 있으니 평생을 예배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김남식(이하 김): 목사로서 늘 예배를 인도하며 찬송의 중요성과 오늘의 문제점들을 느꼈을 것이다. 찬송의 성경적 배경이 무엇인가?
이한석(이하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다니 앞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늘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4:50-53). 여기 예수님의 축복과 제자들의 ‘찬송’은 같은 단어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베푸신 복을 기억하며 회상하여 올려드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그것을 제자들이 다시 시를 읊듯이 읊조리는 것이 찬송이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고 찬송했다. 이렇듯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림이다.
김: 성경은 바른 찬송을 교훈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볼까?
이: 그래서 성경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명령한다(엡 5:19, 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신약교회가 칠십인역 성경을 주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시편을 시, 찬미, 신령한 노래로 분류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모두 시편이 된다. 다른 견해는 시는 시편을, 찬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을, 신령한 노래는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찬송이라는 것이다. 어떤 해석을 선택하든지 공통적인 면은 시편을 찬송함이다.
김: ‘시편 찬송’은 개혁주의 교회들의 예배적 특성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시편 찬송을 부르기보다 ‘부흥성가’ ‘복음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한계가 무엇인가?
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 성도들은 시편이 주는 유익을 누리고 있다. 물론 시편만 예배용 찬송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편이 주는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 우리에게 시편이 얼마나 자주 불려 지는가?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이 부분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193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온 분들이다. 이 분들의 수고로 한국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러나 이 분들 대부분의 신학적 배경은 미국 부흥운동이었다. 그러니 대륙의 개혁주의 유산을 이어가는 데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신앙고백과 예배에서 더욱 그러하다.
김: 오늘의 예배 음악이 예배의 핵심에서 벗어난 듯하다. 가사나 곡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직접 찬송을 만들어 예배에 사용했다. 칼빈 선생은 제네바 시편 찬송을 만들어 성도들의 신앙을 도왔다. 실제 교회생활에서 시편이 찬송되는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세속 음악의 장르에 개혁주의 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가사를 붙인 노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눈을 감고 음률만 들으면 예배음악인지 세속음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곡들도 더러 있다.
김: 나의 경험으로 보면 몇 해전 예장합동총회의 ‘시편찬송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시편찬송가 만들기에 노력한 바 있다. 교회들의 무관심과 추진하는 사람들의 역량 부족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예배음악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이: 종교개혁은 교회의 예배를 바꿨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예배 음악이었다. 뛰어난 가창력과 예술성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진 찬송을 모든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으로 옮겨왔다. 종교개혁 전에는 전문 찬양대원을 양성하는 학교들이 있었고 심지어 이 학교에서 성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찬송은 이들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종교개혁은 비성경적인 찬송 문화를 완전히 개혁했다. 우리는 이 전통과 원리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김: 우리의 예배 음악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까?
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다시 읊조림이다(시 145:5). 이러한 예배 찬송은 반드시 성경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예배에서의 찬송은 보편성과 경건성(혹은 거룩성)이 담보돼야 한다. 보편성은 모든 성도가 공감하며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특정한 일부의 사람들만이 부르는 찬송은 예배 찬송으로 합당치 않다. 가사의 내용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라든지 음악적 기교가 젊은이들에게 적합해 어린이나 노인들이 따라 부를 수 없으면 안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나 미국의 그리스도인이나 국적을 초월해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나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등은 보편성이 결여된 찬송이다. 시편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에 곡을 붙인 찬송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보편성을 갖춘 찬송이다.
김: 교회에서의 음악이 세속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너무 많다. 세속음악과 장르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 리듬과 가락에서 찬송가와 세속음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특별히 복음송은 더욱 그렇다. 복음송과 예배용 찬송의 구별이 없으니 어느덧 우리 가운데 복음송이 예배 찬송을 대신하고 있다. 복음송에는 포크, 팝, 발라드, 트로트, 재즈, 랩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이 혼재돼 있다. 바로 이러한 복음송을 통해 온갖 장르의 음악이 예배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예배 음악과 복음송은 구분돼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된 예배 음악은 반드시 중생돼야 한다. 젊은이들과 초신자 또는 구도자들을 배려한다 할지라도 예배음악과 복음송의 균형이 필요하다.
김: 음악의 영향력은 누구나 인정한다. 우리의 교회음악은 어떠해야 할까?
이: 음악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지녔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정이라는 좋은 선물을 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흥분하기도 하며 차분하게 되며, 분노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감정은 불과 같아서 반드시 신중히 관리하며 제어해야 한다. 신앙의 깊이가 부족한 성도가 자칫 교회 음악을 감정에 치우쳐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도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예배 음악이 되지 않도록 감독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것이지 사람의 만족을 최고로 여기지 않는다. 리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구원 역사가 울려 퍼질 때 성도들의 감정은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기본에의 회귀
바른 찬송 즉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자.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편찬송’이 우리의 찬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합당한 찬송을 드리자.
ⓒ 교회연합신문 & 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