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만 받으면 모든 게 쉽게 풀릴 줄 알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결과였던가. 4년 동안 밤잠을 설쳐 가면서 수백 편의 논문을 읽고 수천 장의 독서 카드와 원고지 앞에서 씨름했었다.
네 살 난 아들이 문을 두드린다.“왜?”
“아빠. 이거 가지고 놀아도 돼?”
조금 전에 가격이 싼 편이어서 사 온 조그만 참외들을 아들이 발로 차면서 논다.
“그래라.”
나는 싱크대로 가서 아들 주먹만한 참외를 씻어서 행주로 닦은 후 거실 바닥에 놓았다.
아들은 그걸 손과 발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재미있게 논다. 하도 재미있어 하길래 물놀이 할 때 사용하던 공을 장롱에서 꺼내어 주었더니, 아이는 그걸 가지고 거실을 뛰어다니며 좋아한다. 그러다가 나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박스에 가득 담긴 논문을을 꺼내어 홅어 보았다.
벌써 이력서를 보낸 지가 두 달이 지났지만, K대학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나와 동갑내기인 안교수가 이번에는 어려울 거라는 말이 귓가를 스쳐갔다.
“이번에는 모 처에서 추천한 인물이 들어와서 어려울 것 같네요.”
이 말을 듣고 문단 선배인 이교수를 찾아갔더니, 걱정하지 말고 이력서를 내 보라고 해서 자료를 제출했었다. 커다란 박스에 그동안 발표하였던 저서와 논문들을 가득 채워 제출하였을 때, 이번에는 꼭 될 것만 같았다. 이교수에게 농담 삼아 이번에 선배님 덕분으로 되기만 하면 수원에 있는 정자동으로 이사 오겠다는 농담을 건네 보았지만, 이교수는 씩 웃기만 할 뿐이었다. 벌써 열 번째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의외로 순조로와 보였다. 지방에 있는 J대학 총장 앞에서 면접을 볼 때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었다. 그러나 매 번 최종심에서 탈락되었다. 직장의 선배들은 실력만 가지고는 안 되는 일도 있다며 불의한 방법을 써 보라고 하였지만, 그건 내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일을 했다가는 평생을 두고 앙금을 남길 수도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아내가 반색을 하며 들어왔다. 손에는 수박 한 통과 우편물이 들려 있다. 아들이 공을 차고 노는 것을 보며 아내가 다가가 안아 준다.
“여보, 이 참외들 마트에서 얼마 주고 샀어요?”
“삼천원.”
“나도 삼천원 주고 샀는데, 어쩜 우리 부부는 이렇게 호흡이 잘 맞수?”
하면서 부엌으로 가서 참외를 깎아온다. 한 조각 맛을 본다.
“역시 맛은 별로네. 그래서 과일은 좀 비싸더라도 좋은 것을 사야 한다니까. 여보. K대학에서 자기한테 우편물 왔데?”
나는 아내에게서 K대학 로고가 새겨진 봉투를 받아 서재로 들어가 펴 보았다. 가슴 조이며 펴 보았으나, 이번에도 실패다. 그동안 얼마나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던가.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수요 예배와 금요 철야 예배는 물론 새벽 예배까지 꾸준히 참여했었다. 새벽 예배는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찬바람이 불어 나뭇가지 끝에 고드름이 달릴 때에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드렸었다. 주님은 먼 별나라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계시다고 믿으면서 기도했었다.
‘주님.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자녀임을 지인들이 확실히 알게 하소서.’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패의 쓴 잔이 다가왔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도 ‘주님. 제 짐을 같이 져 주십시오.’라며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었다. 그러나 결과는 낙망으로 돌아왔다. 욕실에 가서 샤워를 간단히 끝낸 후 다시 서재로 돌아와 원탁 테이블 앞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제가 교수가 되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제가 욕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아직도 죄의 늪에 있는 겁니까?’
나는 한참 동안 혼자서 고민하다가 『사도행전』마지막 장을 펴들었다. 거기에는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다가 멜리데 섬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섬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화가 나와 있었다. 나는 잠시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뿌염한 빛이 사각형으로 된 창을 통하여 들어왔다. ‘나에게 멜리데 섬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다운 멋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나는 그 인간미를 가진 존재가 주님의 뜻이라고 스스로 일러 보았다. 나는 서재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기에는 아내가 아들과 함께 정답게 앉아 있었다.
“당신, 웬일이야? 늘 서재에만 들어박혀 있던 사람이.”
“응. 오늘부터 책의 감옥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놀기로 했어.”
“쥐구멍에도 별 뜰날 있수. 호호호.”
빛은 여전히 거실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빛이었다.
ⓒ 교회연합신문 & 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