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명신익, 2대 돈의, 3대 치호·치성 목사
복음을 받고 헌신하다
평안남도 평원군이 고향인 명신익 목사는 누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형님인 명신홍 목사는 훗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총회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목회자요 신학자이다.
1916년에 태어난 명신익은 청년시절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였고, 조만식 장로 등 기라성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명신익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이다. 그것도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평양형무소에서의 만남이다.
명신익은 어떤 사건으로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거기서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된 주기철 목사를 만난다. 목사와 성도의 만남치고는 참으로 어색하지만 주기철의 가르침을 통해 명신익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은혜를 입게 된다.
목사는 순교의 면류관을 쓰고, 성도는 석방되어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형님인 명신홍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미국에 유학하며 세 개의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졸업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비롯한 신학교들은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대표적 학교였다. 그러나 동생 명신익은 이 땅에서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월남과 교회 설립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청년 명신익은 민족지도자 조만식 장로의 활동을 돕는 일을 하면서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다. 그는 조만식 장로의 업무와 경호 등의 모든 일을 담당하였는데 조만식 장로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자 명신익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명신익은 공산당의 체포를 피하여 몰래 월남하게 되었다. 아내와 가족을 둔 채 고생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싶으나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 평양에 있던 아내가 큰 아들의 손을 잡고 둘째 아들은 없었고, 셋째는 임신한 상태로 남편을 찾아 서울로 왔다. 글자 그대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 수많은 월남자들이 겪는 삶의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살아갔다.
1950년 한국전쟁은 비극의 극치였다. 공산당의 만행을 겪은바 있는 명신익은 가족을 데리고 월남하였다. 아내는 그에게 신학을 하고 전적으로 헌신하라고 권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설립한 고려신학교가 있었다. 서울의 조선신학교의 좌경화를 막고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을 파수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와 교단의 관계는 순조롭지 못하였다. 경남노회와의 갈등, 총회의 단절 등으로 새로운 총회로 분립(分立)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명신익은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교수진으로는 박윤선 목사를 중심한 한국인 목사들과 한부선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다.
명신익은 다대포교회 조사(전도사)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다. 그러다가 밀양 삼문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명신익 목사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고신 교단은 영남 지방을 중심한 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총회 지도자들은 수도권 특히 서울에 고신교회를 세우려 하였다.
총회는 서울에 교회 설립을 위해 명신익 목사를 전도목사로 파송했다. 1953년 명 목사는 회현동 전기홍 장로댁 마당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설립했으니 이것이 흥천교회이다(지금은 성원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마포로 이전해 있다).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고 하고 남대문에서 시청으로 가는 뒷길인 북창동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여 1953년 5월 25일에 헌당식을 하였다.
1960년대에 와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문제는 건축비 상환이었다. 남대문 시장의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들이 주일마다 와서 헌금을 가지고 갔다. 당시 이 교회에 출석하던 김경래 집사(경향신문 편집국장, 장로가 됨)가 자기 집을 팔아 교회 빚을 갚았다. 이 이야기는 김경래 장로의 구술회고록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서울: 홍성사, 2013) 230면 이하에 상세히 나와 있다.
명신익 목사는 1960년대 기독교반공운동에 힘을 쏟았고, 1960년대 한일협정반대운동에도 참여했다. 당시 고신 측 목사로서는 특이한 활동이었다. 그는 1968년 5월, 5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2대들의 신앙
명신익 목사의 슬하에 4남 2녀가 있다. 모두들 신앙의 전수자로 열심을 다하고 있다. 장남 명돈의 목사는 장로로 봉사하다가 늦게사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 미국 볼티모어 예루살렘장로교회를 섬겨왔다.
2남 명돈암 집사, 3남 명돈승 장로, 4남 명돈영 장로, 장녀 명돈향 권사, 차녀 명돈혜 권사가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자녀 중 우리가 주목할 것은 3남 명돈승 장로이다. 모친이 남편찾아 월남할 때 엄마 뱃속에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개척한 교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섬겼다. 한평생 흥천교회(오늘의 서울성원교회)에서 섬김의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믿음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무역업을 하며 교회를 위해 재정적으로도 큰 섬김의 사역을 하고 있다.
3대들의 헌신
명 목사 가문이 3대 목사가정이 되었다. 명돈의 목사의 장남 명치호 목사는 달라스 영락교회에 시무하고, 차남 명치성 목사는 샌디아고 그레이스교회를 섬기고 있다. 3남 명치암은 장로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명돈암 집사의 가정에는 치은 집사, 치영 성도가 있고, 명돈승 장로의 가정은 두 딸 치애 집사(이조원 집사), 치현 집사(조요한 집사)가 있다. 명돈영 장로의 가정에는 치원, 치선 집사가 있다.
명돈향 권사의 가정은 장녀가 선교사로 양곤에 있는 미얀마 성원교회를 섬기는 이자모 선교사(남편 김인 목사)이다. 또 이준모, 이예모 집사가 신앙을 이어간다. 명돈혜 권사는 김혜자, 김명규 두 자녀를 두고 있다.
그 밑으로 4대, 5대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이 자라고 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리라(시편 128:3).
신앙의 계승은 하나님의 복으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가계를 형성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종들을 통해 믿음의 향기를 발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묵묵히 섬긴 명신익 목사의 3대를 찾아본다.복음을 받고 헌신하다
평안남도 평원군이 고향인 명신익 목사는 누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형님인 명신홍 목사는 훗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총회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목회자요 신학자이다.
1916년에 태어난 명신익은 청년시절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였고, 조만식 장로 등 기라성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명신익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이다. 그것도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평양형무소에서의 만남이다.
명신익은 어떤 사건으로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거기서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된 주기철 목사를 만난다. 목사와 성도의 만남치고는 참으로 어색하지만 주기철의 가르침을 통해 명신익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은혜를 입게 된다.
목사는 순교의 면류관을 쓰고, 성도는 석방되어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형님인 명신홍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미국에 유학하며 세 개의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졸업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비롯한 신학교들은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대표적 학교였다. 그러나 동생 명신익은 이 땅에서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월남과 교회 설립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청년 명신익은 민족지도자 조만식 장로의 활동을 돕는 일을 하면서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다. 그는 조만식 장로의 업무와 경호 등의 모든 일을 담당하였는데 조만식 장로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자 명신익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명신익은 공산당의 체포를 피하여 몰래 월남하게 되었다. 아내와 가족을 둔 채 고생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싶으나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 평양에 있던 아내가 큰 아들의 손을 잡고 둘째 아들은 없었고, 셋째는 임신한 상태로 남편을 찾아 서울로 왔다. 글자 그대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 수많은 월남자들이 겪는 삶의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살아갔다.
1950년 한국전쟁은 비극의 극치였다. 공산당의 만행을 겪은바 있는 명신익은 가족을 데리고 월남하였다. 아내는 그에게 신학을 하고 전적으로 헌신하라고 권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설립한 고려신학교가 있었다. 서울의 조선신학교의 좌경화를 막고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을 파수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와 교단의 관계는 순조롭지 못하였다. 경남노회와의 갈등, 총회의 단절 등으로 새로운 총회로 분립(分立)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명신익은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교수진으로는 박윤선 목사를 중심한 한국인 목사들과 한부선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다.
명신익은 다대포교회 조사(전도사)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다. 그러다가 밀양 삼문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명신익 목사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고신 교단은 영남 지방을 중심한 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총회 지도자들은 수도권 특히 서울에 고신교회를 세우려 하였다.
총회는 서울에 교회 설립을 위해 명신익 목사를 전도목사로 파송했다. 1953년 명 목사는 회현동 전기홍 장로댁 마당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설립했으니 이것이 흥천교회이다(지금은 성원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마포로 이전해 있다).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고 하고 남대문에서 시청으로 가는 뒷길인 북창동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여 1953년 5월 25일에 헌당식을 하였다.
1960년대에 와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문제는 건축비 상환이었다. 남대문 시장의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들이 주일마다 와서 헌금을 가지고 갔다. 당시 이 교회에 출석하던 김경래 집사(경향신문 편집국장, 장로가 됨)가 자기 집을 팔아 교회 빚을 갚았다. 이 이야기는 김경래 장로의 구술회고록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서울: 홍성사, 2013) 230면 이하에 상세히 나와 있다.
명신익 목사는 1960년대 기독교반공운동에 힘을 쏟았고, 1960년대 한일협정반대운동에도 참여했다. 당시 고신 측 목사로서는 특이한 활동이었다. 그는 1968년 5월, 5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2대들의 신앙
명신익 목사의 슬하에 4남 2녀가 있다. 모두들 신앙의 전수자로 열심을 다하고 있다. 장남 명돈의 목사는 장로로 봉사하다가 늦게사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 미국 볼티모어 예루살렘장로교회를 섬겨왔다.
2남 명돈암 집사, 3남 명돈승 장로, 4남 명돈영 장로, 장녀 명돈향 권사, 차녀 명돈혜 권사가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자녀 중 우리가 주목할 것은 3남 명돈승 장로이다. 모친이 남편찾아 월남할 때 엄마 뱃속에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개척한 교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섬겼다. 한평생 흥천교회(오늘의 서울성원교회)에서 섬김의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믿음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무역업을 하며 교회를 위해 재정적으로도 큰 섬김의 사역을 하고 있다.
3대들의 헌신
명 목사 가문이 3대 목사가정이 되었다. 명돈의 목사의 장남 명치호 목사는 달라스 영락교회에 시무하고, 차남 명치성 목사는 샌디아고 그레이스교회를 섬기고 있다. 3남 명치암은 장로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명돈암 집사의 가정에는 치은 집사, 치영 성도가 있고, 명돈승 장로의 가정은 두 딸 치애 집사(이조원 집사), 치현 집사(조요한 집사)가 있다. 명돈영 장로의 가정에는 치원, 치선 집사가 있다.
명돈향 권사의 가정은 장녀가 선교사로 양곤에 있는 미얀마 성원교회를 섬기는 이자모 선교사(남편 김인 목사)이다. 또 이준모, 이예모 집사가 신앙을 이어간다. 명돈혜 권사는 김혜자, 김명규 두 자녀를 두고 있다.
그 밑으로 4대, 5대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이 자라고 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리라(시편 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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