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 강춘오 목사(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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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기독교는 초기 로마 시대를 지나 곧 게르만족이 이끌었다. 게르만족의 복음화에 공헌한 인물이 있으니 그가 주후 4세기 사람 울필라스(Ulfilas 또는 풀필라, 313-383) 주교이다. 그는 3세기에 고트족에게 포로로 잡혀가 도나우 강 북쪽에 정착한 카파토키아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30세 때, 게르만계의 일파인 고트족 왕 알라틱이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낼 때, 그 사절단을 따라 갔다가 콘스탄티노플에 10년간 머물면서 거기서 신학과 철학 등 다양한 공부를 하고, 341년 아리우스주의자인 콘스탄티노플 주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로부터 고트족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고트족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343년부터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고트족 문자를 창안하고 그 문자로 고트족 성경을 번역해 고트족 선교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하여 그의 전도로 서고트족(Visigoths) 전체가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다. 그는 이처럼 유럽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게르만족 개종에 역할을 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성자의 '유사본질론'(homoiousios)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따랐다. 그를 가르친 사람들이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는 유사본질파였기 때문이다. 유사본질론이란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지는 않고 유사(類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의 니케아 정통신앙은 성자는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는 '동일본질론'(homoousios)이다. 325년 니케아공의회 이후 유사본질론은 이단으로 규정되어 배척되었다.

 

그가 창안한 고트족 문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개조하여 만들어졌는데, 그는 381년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제외하고 성경 전체를 고트어로 번역했다. 그 가운데 복음서와 바울서신들은 지금도 상당부분이 현존하며, 구약의 일부도 남아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번역하지 않은 이유가 그 책에 전쟁 이야기가 많아 전쟁을 좋아하는 고트족에게 전쟁을 부추길까 봐 번역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울필라스의 이 고트어 성경번역으로 게르만계 대부분이 그를 따라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울필라스의 영향으로 서방은 오래동안 이단 아리우스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이다.

대부분의 교회사는 울필라스의 이 업적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정통 보편적 가톨릭 신앙이 아니고, 아리우스주의자였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고트족은 니케아의 보편적 가톨릭(catholic) 정통주의로 돌아왔다. 그가 교회사에 남긴 업적이 결국 게르만계 복음화의 밑바탕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주후 800년 칼 대제의 신성 로마제국은 바로 이 게르만족의 나라이고, 이들에 의해 유럽 기독교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오늘날 세계교회를 이끌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울필라스의 고트족 선교는 기독교의 역사뿐 아니라, 지금도 높이 평가해야 마땅한 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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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고트족 주교 울필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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