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6-18(목)
 
  • 차진태 기자(편집국장)

여의도1.jpg

 

법의 존재 이유는 상식의 수호에 있다.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무고함을 증명해 주는 고루한 원칙이 바로 법치주의다. 그러나 최근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를 둘러싼 일련의 사법적 판단과 이를 다룬 언론의 행태를 바라보면, 과연 우리 사회의 사법과 언론이 그 최소한의 상식을 작동시키고 있는지 깊은 회의가 든다.

 

사건의 본질은 이미 수년 전 정리된 사안이었다. 의혹의 시발점이었던 당사자는 진술이 거짓이었음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고, 그 거짓을 확대 재생산하며 악의적인 유포를 일삼던 이들은 사법부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고령의 유포자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기까지, 수차례 이어진 재판부의 결론은 하나였다. 의혹은 '명백한 허위'라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 피고인 B씨를 향한 재판에서 나온 일부 판결은 법의 오랜 격언인 '입증책임'의 원칙을 무색하게 만든다. 법은 본래 문제를 제기한 자에게 증명의 의무를 지운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라는 요구는, 행하지 않은 자에게 불가능을 강요하는 모순과 같다. 다른 재판부들이 일관되게 인정한 당사자의 자백과 정황 증거를 배척한 채, 피해자에게 '완벽한 부존재'를 증명하라는 식의 논리는 사법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번 재판의 본질은 의혹의 유무가 아니라, 허위임을 알면서도 이를 유포한 행위의 정당성 여부였어야 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이 불완전한 판결을 기화(奇貨)로 삼은 언론의 선택적 침묵과 폭로다. 그간 유포자들이 구속되고 해당 내용이 거짓임이 밝혀진 10여 차례의 판결에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던 모 일간지는, 교회의 주장이 일부 배척된 단 한 번의 판결문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지면을 할애했다. 이를 마주한 독자는 앞선 열 번의 법적 판단을 읽어낼 재간이 없으며, 당사자인 교회 입장에서는 공익을 빙자한 또 다른 형태의 핍박만 받을 뿐이다.  

 

만약 이 사안의 주체가 거대 종교 기관이 아닌 일반 개인이거나, 반대로 사회적 약자였다면 사법부와 언론이 이토록 가혹하고 편향된 잣대를 들이댔을지 의문이다. 거대 교회와 영향력 있는 지도자라는 명성은, 때로 악의적인 공격을 방어할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면죄부로 작동하곤 한다. 의혹을 해명하는 과정 자체로 이미 막대한 영적,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교회 입장에서, 이러한 '진흙탕 핑퐁게임'은 잔인한 소모전이다.

 

진실이 눈을 감고 편견이 펜을 잡을 때 사회는 병든다. 사법부는 흔들리지 않는 상식의 법리로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며, 언론은 단편적인 판결문 뒤에 숨은 거대한 진실의 맥락을 짚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양심의 역할이다.

태그

BEST 뉴스

전체댓글 0

  • 89721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자수첩] 상식의 저울은 왜 교회의 문 앞에서 흔들리는가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