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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부활신앙’이다. 예수의 재림 때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가 모두 살아나 선악간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주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이는 죽은 자가 마지막 때에 새생명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그런데 기독교에는 사람이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해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죽으면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어 육신은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 로 가고, 영혼은 하나님의 영원한 입김에서 왔으므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설’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을 때 육신과 함께 그 영혼도 죽는다는 ‘영혼멸절설’이 그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기독교 신학은 오래동안 영혼불멸설을 정통으로 믿어왔다. 그래서 영혼멸절설을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영혼불멸설이 부활신앙과 공존할 수 없는 비성경적 관념이라고 주장한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출신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다. 그는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영혼불멸설의 허구성을 성경적, 철학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와 별개로 사후에 존재한다는 설명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성경의 부활신앙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오랜 전통을 가진 영혼불멸설 역시 성경에서 온 것이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1,8).◇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2장은 “인간의 육체는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된다. 그러나 그 영혼은 결코 죽거나 잠들지 않고 불멸의 실체로서 조물주이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죽는 순간 거룩하게 되어 완전해져서 지극히 높은 천상의 나라에 들어가 빛과 영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게 된다. 이미 죽은 모든 성도들은 전과 같이 여전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설 중에 하나는 이단인가. 그 또한 아니다. 두 설은 결국 부활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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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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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교회당’
- ◇“○○교회 매매.” 이 말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불쾌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용어이다. 흔히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한국기독교의 타락상을 말할 때 제일 먼저 꺼내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 이름 팔아서 사람 좀 모우고 땅도 늘려 돈을 챙기기 위해 교회를 부동산 시장에 내놓고 거래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과연 교회(ʼεκκλησι′α)를 사고 팔 수 있는 것인가? 이는 한국기독교가 제대로 ‘교회’(敎會)와 ‘교회당’(敎會堂) 혹은 ‘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하지 않은 채 그 용어를 혼용해 사용하는 데서 오는 오해스런 현상이다. 한국기독교도 전래 초기에는 ‘교회’와 ‘예배당’으로 구분해 사용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예배당’은 사라지고 모두가 ‘○○교회’라고 불린다. 기독교가 마땅한 용어를 제시하지 않으니 어떤 이들은 ‘교회’와 ‘건물교회’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한국천주교의 경우는 ‘교회’(敎會)와 ‘성당’(聖堂)을 명확하게 구분해 사용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이고, 성당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축성한 거룩한 건물, 신자 공동체가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다. 중국기독교도 역시 ‘교회’(敎會)와 ‘교당’(敎堂)이 명확히 구분한다. 이를 혼용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만이 ‘교회’와 ‘교회당’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교회’로 통칭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당 매매’라고 해야 할 것을, ‘교회 매매’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신자가 흔히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신자가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당에 가는 것이다. 교회당에서 모인 신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이다. 한국기독교에 교회론이 흔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가 신자 공동체인지,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달린 건물인지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신학교에서는 교회와 교회당을 구분해 가르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목회자가 섬기는 것은 교회이지, 교회당은 아니다. 그것이 곧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즉 교회가 교회당이고, 교회당이 곧 교회라고 해도 틀린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언어가 개념의 표현으로 사물의 가치를 나타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성경은 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딤전 3:15), “자기 피로 사신 것”(행 20:28),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고전 1:2),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비밀”(골 1:26)이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당을 지어 헌당하면서 디모데전서 3장 15절을 인용하여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이 ‘집’은 하우스를 뜻하는 ‘오이코스(‛οικοs)’를 사용하고 있으나,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의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것이 곧 교회이다. 한국기독교에는 아직 그 용어가 개발되지 않아 잘못 혼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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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교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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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안보
- ◇구약성경 열왕기하 20장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1년 앗수르에 망한 후, 남왕국 유대의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이 들었는데,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통고를 받자, 면벽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다. 그는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하며 심히 통곡했다. 사실 히스기야는 성경에서 보기 드문 선한 왕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우상을 철폐하는 등 여호와 신앙을 부흥시키는데 앞장 섰다. 그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았다. 그 때에 동쪽의 신흥 제국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진 특사를 보냈다. 이에 감격한 히스기야는 그 특사에게 “자기 보믈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며” 환대해 보냈다.◇이 소문을 들은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을 찾아가서 “저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라고 물었다. 왕은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이사야는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며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히스기야는 그런 날이 올지라도 “내가 사는 날 동안에는 태평과 진실이 있으면 된다”며 오히려 이사야를 속좁은 위인으로 무시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대 왕국은 오래지 않아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왕궁과 성전의 모든 금은보화는 늑탈되고, 왕족과 귀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그리고 70년의 세월을 보냈다. 국가 지도자의 순진한 안보정신이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평창올릭픽에 북한이 참여하자 청와대는 한반도에 ‘평화’가 이루어진다며 북한이 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원하지 않은 것까지도 다 해주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우리가 저들에게 이렇게 잘해 주면 저들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대화와 교류로 나울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순진한 히스기야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적장을 환대하고, 한미 연합훈련도 연기하고, 정상회담도 추진하면 과연 그들로부터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안보를 위협하는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저들은 적화통일의 야욕을 이제까지 한 번도 바꾼 일이 없는데,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민다고 저들도 진심에서 그 손을 잡으리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천암함과 연평도는 누구 짓인가. 솔직히 김대중도, 노무현도 저들에게 줄 것 다주고 결국 빰 맞았다.◇세계사에서 민족 간에 전면전을 치룬 나라가 대화와 교류로 평화통일을 이룬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남북은 이미 한 차례 비참한 민족전쟁을 치루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역사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제력이든, 군사력이든 힘이 강한 쪽이 살아남을 수 밖에 없다. 국가 지도자의 순진한 안보정신은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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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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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성례
- ◇성찬 성례전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려는 언약의 표로 세우신 성례이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다. 주님은 당시에 떡과 잔을 나누어주면서 떡은 주님의 몸이라 하셨고, 잔은 주님의 피라 하셨다. 그 떡과 잔은 예수의 찢긴 살과 그가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먹고 마시므로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며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성찬 성례전을 행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찢긴 주님의 살과 흘리신 주님의 피를 기념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행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성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세 가지로 온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는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찬은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성찬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는 증표이다. 성찬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믿음과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재림의 약속을 기억하고 ,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기쁨을 맛보는 예전(禮典)이다. 그러므로 성찬 성례전은 그리스도가 정하신 대로 정당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에게 떡만 주고 잔을 주지 않거나, 성찬의 떡과 포두주에 절을 하거나, 높이 들어올리거나, 어떤 신물(神物)처럼 동경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정하신 뜻에 모순되는 것이다.◇교회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可視的) 교회와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不可視的) 교회로 존재한다. 보이는 교회는 현재 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현실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온세계와 우주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무리들이다. 이 가운데는 하나님으로부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보이는 교회나 보이지 않는 교회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주님의 지체가 되고, 형제가 되는 비결이 곧 성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찬의 비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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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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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성례
-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두 가지 성례(聖禮)가 있다. 첫째는 세례이고, 둘째는 성찬이다. 이 두 가지 성례전은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것으로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공동체가 기념으로 지키라는 부탁의 말씀을 남긴 매우 의미있는 행사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전을 기념하고 있었으나, 개혁교회는 주님이 직접 기념하라고 가르친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을 성례로 본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성례 중의 세례는 중생과 죄씻음을 의미하며, 지상에 있는 가시적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성도로서 가입하는 필수적인 절차이다. 성도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개체 교회에 속할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체 보편적 교회에 속하게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언약의 그릇이다. 성도가 세례를 받아 그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생명의 은혜언약을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세례는 세상 끝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가운데서 항상 지속되어야 할 예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6:4).◇세례는 봉헌의 표시이다. 세례를 통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어 진정한 교회의 일원으로 영접 받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된다. 대부분의 교회는 세례 받음으로 교회의 직분을 받을 자격을 갖는다. 또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확연히 나타낼 수 있다. 세례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정결하게 된다는 징표이다. 세례를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확증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가진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도록 하는 인식의 표시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새로운 삶에 연합하는 징표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져야 한다. 따라서 세례는 진심과 성심으로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한 지만이 받을 수 있는 성례이다.◇그러나 세례가 구원에 있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8장 제5항은 세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를 멸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은 큰 죄악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세례가 절대불가결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고도 중생하여 구원받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세례를 받았음에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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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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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에 대한 논쟁
- ◇성례에 대한 견해는 각 교파의 전통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르다. 그로 인해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세례와 성찬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종교개혁자들 중에도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이 그 견해를 각기 달리했다. 그리고 또 이들의 견해와 전혀 다른 입장을 고수한 재세례 파도 있었다. 루터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든, 어른이든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역사로 보았다. “세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죄의 용서를 가져오며 죽음과 악마로부터 건져내주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준다”(루터 파 소교리문답). ◇그러나 칼빈은 세례를 교육적 의미에서의 은총의 수단으로 보았다. “세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그것을 보지도 기억하지도 우리에게 돌리지도 아니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해주는 율법적 방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주의 죽으심에 접붙임이 될뿐 아니라 그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에서 이러한 신생(新生)의 보증을 받는다”(기독교강요 제15장 세례의 예전에 관하여).◇세례에 관한 특이한 논쟁은 “믿는 자의 세례”를 주장한 재세례 파에서 제기됐다. 제세례 파는 영적 재생의 상징인 세례는 인격의 변화에 일치되어야 하므로, 신앙의 인격적 결단과 유리된 세례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신자가 된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책임아래 중생 및 신앙의 상징으로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믿는 자의 세례를 주장하는 침례 파들의 세례의식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집례자의 기도 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신앙은 초대 교부 다메섹의 요한 때부터 막연하게 내려온 설(說)이다. 그러다가 12세기에 이르러 ‘화체’(化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 찬반 논란이 많았으나 1215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의로 결정되었다. 이 때부터 성찬식에서 배찬자에게 떡만 주고 잔을 주지 않는 풍속이 생겼다. 그럼에도 가톨릭교회 안에서 논쟁이 계속되다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인정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행하고 있다. 15세기 체코 보헤미야의 후스 파의 칼릭스 파와 타보르 파 간의 ‘리판의 전투’는 성찬식의 떡과 잔(이종배찬)을 놓고 벌어진 전쟁이다. ◇그 후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도 가장 뜨거운 논쟁은 역시 성찬 문제였다. 루터는 축도 후에 성만찬 물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은 거부하였으나, 성찬식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와 함께 있다(실재설)고 했고, 쯔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은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상징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격적 임재를 주장하며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임재설)으로 보았다. 이 성례전 논쟁은 신학에서 ‘다른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라는 대표적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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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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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의 함정
- ◇미국 기독교의 저널리스트 필립 얀시는 그의 책 “A Skeptic's Guide to Faith”(한글번역 “수상한 소문”)에서 다음과 같은 간증 사기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저널리스트인 나는, 40여 가지의 가명을 쓰면서 미국 10여 개 주에서 수십 개의 교회를 속여 돈을 갈취한 여성을 만났다. 복음주의 교회의 행태와 언어를 연구한 그녀는 그것을 그럴듯하게 흉내내었다. 그녀는 갈보리채플, 침례교회, 하나님의성회 소속 교회들을 찾아가 여태까지 믿어온 모르몬교 신앙을 버리고 싶다고 간증했다. 매번 그 교회들은 그녀를 환영했고, 그녀를 뒤좇고 있다는 모르몬교 신도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했으며, 아낌없는 현금과 음식, 숙소와 치료를 제공했다. 그녀의 행동은 모든 면에서 그들에게 그녀가 신앙의 동지라고 확신을 심어주었다. 또 이 여성은 다음 도시에 가서 모르몬 교회를 찾아가 기독교 복음주의 신앙을 버리겠다고 고백했다. 50곳이 넘는 모르몬 교회와 수십 개의 복음주의 교회가 그녀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엘라배마 주 버밍햄으로, 거기서는 지금껏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아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필립 얀시는 그 책에서 또 다른 예도 소개한다. 네 살 때부터 복음전도자로 활동했다는 마조 고트너라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조는 어릴적부터 의자 위에 올라 서서 설교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유명한 복음전도자 빌리 선데이처럼 손짓을 하며 설교했다. 마조는 청소년기에 이르자 장막 복음전도자로 생계를 꾸리며 수천 명을 회심시키고 수백만 달러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방언도 하고, 눈물울 흘리며 죄인에 대한 형벌을 설교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스물여덟에 이르러 그동안 자신이 한 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음을 시인했고 모든 활동을 그만 두기로 결심했다. 그는 후에 자신이 예배 시간에 썼던 언어와 몸짓은 모두 ‘속임수’였다고 설명하는 영상을 남겼다고 한다.◇이런 간증 사기는 미국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도 수없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연탄깨스를 먹고 죽어 성심병원 영안실 냉동실에서 3일만에 살아났다며 전국의 유명한 교회마다 천국을 간증하고 다닌 ‘성경애 권사’ 사건, 영락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목탁과 함께 깨졌다며 간증을 하고 다니다가 ‘교회가 너무 짜다’면서 다시 절간으로 돌아간 조계종 승려 사건, 병원에서 심장이 멎어 죽었다가 몇 시간동안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간증 등등. 처음엔 그래도 순수했던 간증이 거짓과 과장으로 날이 갈 수록 부풀려졌다. 이는 모두 영적 세계를 사모하는 기독교인들의 심리를 이용해 어리숙한 교회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려는 종교 사기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건을 사기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은 종교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보편적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신비체험이나 은사주의는 그 체험을 하고 은사를 받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지, 전체 보편적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개인의 간증을 유의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희가 사람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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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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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평안을 주는 사람
- 얼마 전에 전국의 대학교수 1천명에게 2017년도를 대표할 수 있는 사자성어를 설문조사하여 채택한 것이 파사현정(破邪顯政)이다. 파사현정이란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인데, 현 정부의 적폐청산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사실 역대 정권이 정의사회구현, 부정부패청산, 사회악제거 등을 국정과제로 내세워 정책과 입법을 단행하였으나, 정의사회가 구현되거나 부정부패가 청산된 적은 없었다. 또한 국민들에게 박수받고 존경받은 지도자도 없었다.옛 말에 토끼를 잡을 때는 귀를 잡아야 하고, 소는 고삐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닭을 잡을 때는 양 날개를 잡아야 하고, 고양이를 잡을 때는 목덜미를 잡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하나? 멱살을 잡으면 싸움이 나고, 손을 잡으면 뿌리친다.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한다. 정치도 경제도 외교도 종교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그런데 지금 우리사회는 적패청산이란 미명하에 서로 잡지 않아야 될 것을 잡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내가 날카롭게 칼을 갈면 상대방은 철판으로 방어를 하고, 내 마음이 냉정하면 상대방의 마음도 싸늘하게 식는다. 내 마음이 화살 같으면 상대의 마음은 방패로 응수하게 되니 그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우면 상대방은 가슴을 열고 마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주고, 격려를 주고, 위로를 줄 때 그 마음을 잡을 수 있다. 작은 것이라도 인정으로 서로 나누고 부족한 것을 서로 채워주면 그 마음을 잡을 수 있다. 내가 먼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상대에게 헌신하며 조용한 미소로 다가갈 때 그 마음을 잡을 수 있다.지난 2009년 9월 11일 오후, 대만의 모든 언론들이 타이페이 법원 앞에서 ‘세기의 재판’이란 제목으로 전 세계를 향해 생중계한 일이 있었다. 타이페이 시민들은 대만 총통을 지낸 천수이벤의 재판을 두고 사형을 선고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한때의 지도자에게서 국민들의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다.판사가 선고했다. “천수이벤 전 총통에게는 무기징역에 추가 28년, 벌금 75억원, 부인 오숙진에게는 무기징역에 추가 56년, 벌금 115억원, 그 아들에게는 징역 3년에 벌금 38억원, 그 며느리에게는 징역 2년에 벌금 38억원.” 사실상 천수이벤 가족의 모든 재산의 몰수와 온 가족이 다시 회생할 수 없는 무거운 판결을 내렸다.판사는 판결문에서 그 이유를 말했다. “총통에 오른 천수이벤! 한 사람이 부패하면 한 나라가 어려워지고(一人貪戾 一國作亂),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이 윗사람의 행실은 아랫사람들이 따라한다(風行草偃 上行下敎)는 세상의 이치를 당연히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개혁의 깃발을 내걸고 뒤로는 몰래 부패한 짓을 일삼았다”고 준엄하게 꾸짖고 나서, 옛 선현의 말을 인용, 知足常足 終身不辱 知止常止 終身無恥(지족상족 종신불욕 지지상구 종신무치),이라며 재판을 종결했다. 이는 "만족할 줄 알아 만족하면 죽을 때까지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아 늘 그치면 죽을 때까지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사람이 사는 것이 숨을 쉰다고 사는 것이냐? 소시민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라도 사람답게 살고,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존경을 받으며 국민들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잘 사는 사람, 성공한 사람, 지체 높으신 사람도 많지만, 사람의 마음을 잡아 기쁨주고 평안주고 희망을 주어야 진정 잘 사는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인 것이다. 새해에는 이웃을 잡아 기쁨과 평안을 주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을 맛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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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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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평안을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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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낚는 어부
-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던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만나 제자로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본문의 바른 번역인지는 몰라도,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어부였던 베드로의 후계를 자처하는 교황의 공식도장도 ‘어부의 반지’이다. ◇그런데 성경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물로 ‘고기를 잡는 사람’이었지, 낚시로 ‘고기를 낚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기를 그물로 잡는 것은 낚시로 낚는 것과는 전혀 그 방법이 다르다. 낚시로 낚는 것은 고기가 한 마리 한 마리 힘 있게 바둥거리며 살아서 물위로 올라오지만, 그물로 잡는 것은 많은 경우 죽어서 물위로 올라온다. 특히 먼 바다에서 큰 그물로 고기떼를 싸서 잡는 방법은 한꺼번에 각종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물 안에서 고기끼리 서로 부딪쳐서 덩치가 작은 것들은 대부분 죽거나 상하게 된다. 반면에 수량은 적지만 낚시로 잡는 고기는 다 살아 있고, 활어의 품질도 좋다.◇이는 오늘날 교회의 목회현장과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하여 양육한 교인으로 구성된 교회는 목회자도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을 알고 케어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대형교회는 그 상황이 많이 다르다. 대형교회 안에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인물도 있고, 명성있는 인사들도 있어서 빛을 내고 주목을 끌지만, 목회자도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수 많은 교인들이 그 빛에 가려진 채 ‘아무개 교회 교인’이라는 허명(虛名)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큰 그물로 많은 고기를 잡는 선장의 눈에는 돈되는 큰 고기들만 보일뿐, 작은 고기들은 한꺼번에 쓸어서 바다에 도로 버리기도 한다. 대형교회 목회자의 눈에도 돈이 나올 만한 큰 인물들만 보일뿐, 돈 안되는 교인들은 눈에 들지 않는다.◇때때로 이름난 연예인들이 비명(非命)에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사람들도 더러있어 우리를 당혹케 한다. 이번에 자실한 샤이니 종현도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장례식도 기독교 장례로 치뤘다. 「연지골」자는 그가 어떤 유형의 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그가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괴뇌와 고통으로 ‘이 잔을 내가 마시지 않고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누군가를 찾아 상담하기를 원했을까. 그라나 안타깝게도 아무도 그를 도우지 못했다. 하나님은 너무 멀리 있고, 목사는 너무 높은데 있다고 여겨졌는지도 모를 일이다.◇이런 사례만 보아도 지금 한국교회는 뭔가 잘못가고 있다. 새해에는 이런 억울한 소식이 더이상 들리지 않도록 목회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목회에 새로운 각오로 임해야겠다. 최소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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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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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낚는 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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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메세지
-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 안에 독생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사건에서 시작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예언대로,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장). 요한복음은 이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 1:1~14)이라고 했고, 빌립보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 2:6-8)라고 했다.◇아브라함의 유일신앙을 이어받은 기독교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다른 것은 바로 이 성육신 교리에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유대교나 이슬람에도 ‘하나님’이 있고, ‘성령’도 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없는 것이 기독교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관이 곧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그것은 성육신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유일신 신앙 교리를 가졌다 하더라도 삼위일체 신관을 부정하면 기독교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성탄절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성모 마리아를 그 무엇보다 높이 공경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마리아 이전에도, 마리아 시대에도 수많은 여성이 이 세상에 있었는데, 어째서 하필 나사렛 처녀 마리에에게 예수가 태어났는가? 그것은 마리아의 신심(信心)에 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기독교에는 세 가지 이단이 있다. 첫째는 나사렛 예수 외에 ‘다른 예수’, 즉 다른 교주를 믿는 교주우상주의이고, 둘째는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 즉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교리적 이단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반드시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가 만나야 임신한다는 ‘마리아 월경잉태론’이나, 생물학적 접근은 모두 무서운 이단이다. 성경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수태를 알리는 천사에게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반문하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런데 왜 분명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마리아의 월경 없이는 예수가 태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만약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가톨릭 사제였다면 파면을 당해도 몇번은 당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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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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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메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