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 서거 77주년이다. 2월 16일, 오늘은 시인 윤동주가 옥중에서 서거한 지 77주년이다. 몇 년전 민족저항 시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며 윤동주 시인탄생 100주년 행사를 다산문화예술진흥원(구, 근대문화진흥원)은 두 주간 동안 인사동 갤러리에서 행사를 가진바 있다. 일반인들 특히 시인, 주부, 교수, 수녀, 승려,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수 천여명이 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전시회는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만주 북간도를 중심으로 시작해서 그의 사후 출판된 유고 시집과 육필원고 그리고 추모 기념 작품들까지 300여점의 작품을 통해 처절했던 시인의 삶의 궤적을 소개하였다. 이 전시회에서 참석자들은 1948년 유고시집과 1955년 발행된 초판시집, ‘별헤는 밤’, ‘십자가’ 등 캘리그라피로 쓴 시 작품 등을 주목하였고, 공연, 기념강연과 시낭송 시음회 등을 통하여 시인의 정신을 되새긴 적이 있다.
모두들 왜 그렇게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사람들은 묻는다.“왜 윤동주 시인인가?”라고 말이다.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반도의 주변 인물이기에 우리가 무관심해왔던 탓인지 중국이 자기네 시인이라고 도용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사실 자유 대한민국의 보배이자, 자랑이다. 가슴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하겠다. 그의 조명해 보면, 짧은 인생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시인 윤동주의 삶을 주목하면 배우게 되는 7가지 인생교훈이 있다.
첫째, 시인 윤동주에겐 삶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있다. 송몽규와 문익환이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일본 유학까지 같이 간 강처중도 있었다.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함께 자란 친구들과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바로 친구 문익환이 진학하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옥중에까지 송몽규와 함께 저항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둘 다 같은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평생을 같이하며 죽음에 까지 함께하는 이런 친구를 가졌는가.
둘째, 시인 윤동주에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명동학교를 거쳐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광명학교, 연희전문학교를 넘어 일본 릿교대와 동지사대에 까지 유학하며 공부하였다. 그의 삶의 여정은 배움의 길이었다. 배움을 위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해외까지 가서 생활한 것이다.
셋째, 시인 윤동주에겐 남다른 한글사랑이 있다. 시인 윤동주의 한글 작품중 눈에 띄는 것은 「문우(文友)」에 발표한 작품인데, 그리고 이는 최소한 1941년 6월「문우(文友)」는 5호를 마지막으로 한글사용 금지라는 시대의 압박으로 종간되는데, 그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티며 작품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사실과 문학을 사랑했던 그들이었기에 숱한 고생 속에 겨우 모았던 원고 대부분이 검열에 걸려서 게재 불가능이 되었던 사실과, 식민지 공간 속에서 총력전의 군국주의 체제 강화로 인해 교우회 발행의 「문우」는 해산되는 마지막호 전체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일문(日文)으로 쓰여져 있을 정도였지만, 윤동주와 송몽규, 강처중 세친구의 시만은 끝까지 한글 작품으로 남아 있다.
넷째, 시인 윤동주에겐 좋은 멘토가 있다. 일제강점기하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으로 기독교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한 곳, 북간도! 김약연 목사님을 비롯하여 아리랑의 춘사 나윤규, 조두남, 윤극영, 이동휘 등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손에 쥐고 시대적 소명을 받고 북간도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고, 독립을 위해 헌신했는지, 그들의 희생과 눈물과 기도가 그에겐 좋은 멘토였다. 문학의 길에서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서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어갔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양하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그렇게 해서 조선일보에 시「아우의 인상」와 1939년 2월 조선일보에 수필 「달을쏘다」를 발표하게 된다.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다섯째, 시인 윤동주에겐 불의에 도전하는 저항정신이 있었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와서 그가 처음 부딪힌 것은 뜻밖에 일제의‘신사참배’강요였다. 일제는 한민족의 회유와 탄압, 말살이라는 정책을 가지고 그 일환으로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심지어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인신사참배 정책에 동료 학생들과 저항하면서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휴교에 처하게 되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가 침묵하며 불의에 동조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겐 도전을 준다.
여섯째, 시인 윤동주에겐 자기희생을 감당하는 자기성찰이 있다. ‘참회’와 ‘십자가정신“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기 위해 한 ‘창씨개명’을 평생 후회하며 참회하는 자기성찰이 있었다. 시대의 아픔을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기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하고, 잘못한 것에 대한 진실한 참회는 맑은 양심의 기초가 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반드시 해방의 날은 오리라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있다. 그래서 더욱 빚진 심정으로 민족의 고난과 역사에 자기를 헌신하게 된다. ‘십자가’시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겠다고 다짐하고 순례자의 삶을 묵묵히 살아간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더 깊어져야 할 것 같다.
일곱째, 시인 윤동주에겐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시(詩)로 다시 부활한 ‘시 세계’가 있다. 시인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으로 마땅히 감당해야할 고뇌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맑은 영혼과 깨끗한 시심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죽음을 맞았다. 윤동주 시인은 옥중에서 무명한 자로 남긴, 그의 정신세계의 표현이자 삶의 고백서인 두 권의 자필 시집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를 아는 지인과 가족들이 1947년 2월에 가진 추도회에서 유작 시집이 처음 출판되어 소개된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시인, 그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인《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시집이 나온 이후 잠시 죽은 것 같았던 그 죽음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았고 다시 시(詩)로 부활하여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살아나며, 전 세계인이 기억하는 한류시인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 그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시인 윤동주는 우리들에게 참 아름다운 시어를 남겼다. 육신은 비록 처참하게 산화되었지만 어려웠던 시대를 별빛처럼 빛낸 시인을 다시 기억하고 짧은 삶이지만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 시대의 아픔을 안고 밤하늘에 별빛같은 삶을 산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다시 추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