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성택 교수(전 강서대 총장)
중국의 진나라 환관이요 간신이었던 조고가 어린 황제 호해 앞에서, 자신을 위해하거나 따르지 않는 지를 가려내기 위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말하고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말이 틀린 지 바른 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살 것이요 아니라 하거나 대답을 안하면 죽을 것인데, 결국 조고는 ‘지록위마’에 동의한 신하들만 남고 모두 죽이고 말았다.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 말한 신하들이 모두 죽어나간다는 명백한 현실, 그 현실을 넘어서서 용감하게 그것은 말(馬)을 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바른 말을 했던 신하들은 조고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황제보다 자신이 더 권력이 세다는 것을 세상에 확인시킴으로 절대 권력자임을 보여주었다는 고사성어, 지록위마. 지금 필자가 이 세상에 보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그 동안 거대 야당의 입법폭주와 탄핵 남발 정국을 보면서, 그것도 그것이지만 참 그곳에도 ‘지록위마라고 합창하는 못난 선량들과 많구나’ 했더니, 계엄 선포의 배경에는 참으로 딱한 지록위마 소인배들이 무능한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어쩌다 이나라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바른 말하는 정치인을 볼 수가 없는가? 왜 이렇게 ‘지록위록(指鹿爲鹿)’ ‘지마위마(指馬爲馬)’라고 쉽고 명백한 언사를 사용하는 정치인이 없는가? 선동자들의 주창에 따라 합창하는 패거리 천박한 스크럼이 횡횡하는 이 불쌍한 나라를 누가 바로 잡을까? ‘지록위마’하는 인사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죽기 싫어서, 조고의 눈 밖에 나면 정치적인 생명은 물론 육체적인 생명까지도 보장받을 수 없으니, 나부터 살고 보자는 비루한 이기주의가 이 지록위마의 근본이다.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비루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다.
지난 20일 고양시 의회에서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바꾸는 조례안이 17:17로 끝내 부결되었다. 당론으로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시의원들이 정말 베일에 쌓인 것같은 ‘성평등’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함정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요, 알았다면 그는 정말 지록위마의 비루한 정치인이다. 또 이것을 당론으로 밀어부친 민주당 역시 소수의 지지자들을 의식한 지록위마의 비겁한 정당이다. 어제 민주당 지지자의 토론을 보면서 무식하다기보다는 마치 초등학생 수준의 토론을 보는 것 같은 무능한 전형적인 지록위마의 현대판 정치인이었다. 그것이 두려워 무턱대로 자기 표를 헌상하는 의원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정치인들이 비겁하고, 이기적이 되면 그것이 망국의 징조이다. 조선이 그렇게 망했고, 광복 조국이 그렇게 분열되었다. 자신의 소신을 펴지 못하고 굴신함으로 생존하는 정치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을 살려줄 줄기를 찾아다니고, 그의 하수인이 되어 지록위마의 삶을 산다. 불쌍하고 딱하지만, 더 분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결정한 것에 우리가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록위마의 무리 속에 갇혀 사는 현대인의 아픔이다.
어제 고양시 의사당을 떠나오면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소리치기로 했다. 지록위마의 정치인을 몰아내자. 한 사람 힘있는 사람을 위해 참과 거짓도 상관없고, 국익도 국격도 자존심도 상관없이 오직 내 것만을 챙기는 비루한 정치인을 이제는 더 이상 의정 단상에 세워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다윗을 향한 나단의 절규는 생명을 담보한 것이었다. 오늘 이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교회가 나단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는 정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정권이 지록위마의 길을 가지 않도록 붙잡고 세우고 함께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다시 한번 깊은 성찰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 역시 지록위마의 누를 범하면 안될 것이다. 탄핵 정국에서 이를 다시 다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