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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호 칼럼] 28. 사랑 — 마음의 할례가 맺는 열매

  • 교회연합신문 기자
  • 입력 2026.10.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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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용호 목사(한국에흐예언약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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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는 광야 여정을 마치며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을 남겼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이 한 구절 안에 마음의 할례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담겨 있다. 하나님이 마음을 베시는 목적은 사랑이다.

 

예수님도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하셨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율법 전체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 계명 앞에서 실패의 역사였다. 명령은 분명했지만, 명령으로 사랑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마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사랑의 한계다. 자기중심의 마음도 사랑을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게 유익이 되는 관계를 사랑한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신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나의 신앙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바울은 이 가능성을 경고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몸을 불사르는 헌신조차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영생을 묻다가 사랑의 계명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성경은 그의 속마음을 함께 기록한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마음은 사랑의 범위부터 정하려 한다. 누구까지 사랑하면 충분한지, 어디서부터는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지 선을 긋고 싶어 한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를 끝까지 돌본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로 답하셨다. 그리고 질문을 뒤집으셨다. 누가 이웃이냐가 아니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6-37). 자기중심의 사랑은 대상을 고르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랑은 스스로 이웃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요한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사랑은 인간에게서 출발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먼저 쏟아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예수님은 한 여인을 통해 이 원리를 보여 주셨다. 죄인으로 손가락질받던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사랑의 깊이는 용서받은 깊이를 따라간다. 그리고 용서받은 깊이는 자기 죄를 본 깊이를 따라간다.

 

그래서 사랑이 메마른 신앙은 대개 죄를 깊이 보지 못한 신앙이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 마음이 베어지는 경험 없이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남을 판단할 수는 있어도 깊이 사랑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 안의 자기중심성을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 앞에서 정죄보다 먼저 긍휼을 품게 된다. 마음의 할례가 사랑의 뿌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드로의 이야기가 이를 보여 준다. 그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했지만, 그날 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에게 세 번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베드로는 더 이상 "누구보다 더"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는 근심하며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만 대답했다. 자기 사랑을 자랑하던 사람이 자기가 무너진 자리를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주님의 양을 먹이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

 

요한은 이 사랑을 신앙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요일 4:20).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실체가 다를 수 있음을, 사랑만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 주는 곳은 교회의 행사장이 아니라 가정의 식탁이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한 사람 앞이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의 사랑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랑은 방향이 다르다. 자기에게로 돌아오던 사랑이, 이제는 하나님께로 그리고 이웃에게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시작이며, 마음의 할례가 맺는 가장 분명한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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