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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억지 같은 일’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마27:32) 신앙인들이 때때로 자기의 원대로 무슨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자기 뜻대로 될 때는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일 수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참된 은혜는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문의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는 곳에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시몬이 대신 지도록 하였습니다. 시몬은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로마라는 절대 권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적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억지로 졌지만, 그가 그것을 짊어졌을 때는 ‘짊어지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짐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좀 더 편안히 오르실 수 있다는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시에 느꼈던 소감을 그의 아내와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에게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온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억지 같은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아버지 품에서 계속 사랑을 독차지 하며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였던 형님들이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창37:27-28). 그는 형님들에게 팔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하였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려가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서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또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서 2년 동안 있었지만, 최후에는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당시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일대에 7년 흉년이 들었지만, 애굽은 물론 가나안에 사는 아버지와 형제 가족 모두를 구원하게 됩니다(창세기43장-47장). 억지 같은 일들이 그야말로 큰 은혜가 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은 그러한 많은 일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집에 나귀가 도망을 갔습니다. 참 좋지 않은 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게 되어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삼상9:1-10:27). 그랬던 사울도 나중에는 타락하여 그의 충성된 신하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블레셋의 시글락에 머물렀습니다.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는 그가 이스라엘과 싸우러 갈 때에 다윗도 함께 하도록 명하였습니다(삼상28:1). 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방백들 때문에 싸우러 가지 못하고 시글락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곳은 아말렉의 침투를 받아서 그의 처자식은 물론 부하들의 처자식과 재물까지도 약탈 당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다시 가서 모두 회복했습니다. 그가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를 받아 이스라엘과 싸우러 가지 않게 된 것이 블레셋 방백들의 억지였지만 그 일로 인하여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처자식과 재산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삼상 27장~30장).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하셨습니다(막1:12). 예수님께서 자원하셔서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몰아내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이긴 후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아시아 지방으로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허락지 아니하므로 방향을 마케도냐로 돌렸고 그곳에서 루디아 같은 신앙인들을 만나서 빌립보 교회를 세웠습니다(행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 모든 일에서 유익만 되게 해주시지만, 특별히 억지 같은 일들이 은혜로 임할 때가 있습니다. 생활 가운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원하지 않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잠3:6) 그 이름을 찬송하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욥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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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약 2:14-18)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앞뒤 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행위는 같이 가야 하는 것이기에 믿음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활 속에 행위로 나타나야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믿음과 행함 사이에서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많은데,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말들이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행위로 증거 되는 믿음인 것입니다. 행위가 동반되어야 참 되고 올바른 믿음이므로 믿는 우리는 오직 행하는 믿음으로만 살아야 하겠습니다. 26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행위가 따라가야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믿음이 원인이라면 행위는 결과입니다. 믿음이 나무라고 한다면 행위는 열매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생명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롬 1:17)는 말씀은 말씀의 생활화를 말합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실천하는 삶은 믿음을 활성화시켜주고, 더 큰 믿음을 낳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데서 만족이 있고, 감사가 있고, 헌신이 있고 기쁨이 더 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율법을 잘 지켜 의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고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기에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 행동을 다스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믿음을 생활화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게 있는 믿음이 비록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행동으로 옮길 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에 행동이 있을 때에 영력이 생겨나고,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위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입술만의 신앙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행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입술의 신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신앙도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행위가 없으면 이 역시 죽은 신앙입니다. 사변적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믿음은 바르지만 그것이 단지 지식에 멈춘다면 그러한 믿음은 헛되고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실천이고, 그것이 실행이고, 그것이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행함은 눈에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행동으로 자신을 나타내게 됨으로 그 사람의 발자취를 통해 믿음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하는 믿음으로 살아서 믿음이 온전케 되고 믿음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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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이 붙여주신 것을 누리라’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왕하3:27). 열왕기하 3장에는 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들 여호람 시대에, 모압 왕 메사가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조공하였는데, 아합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자 여호람 왕이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과 함께 모압 왕을 치러 갔습니다. 그들이 길을 둘러 행한지 칠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생축에게 먹일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불러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그곳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면 물이 가득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일은 ‘하나님께서 모압 사람도 그들의 손에 붙이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짜기 주변에 개천을 많이 팠습니다. 그러자 아침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물이 에돔 편에서부터 흘러와서 그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식수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모압 사람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모압 왕은 그들이 이스라엘 연합국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맏아들을 취하여 그들의 우상에게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여 고국으로 철군하였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압 왕이 항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 이스라엘을 섬겼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연합국은 그들이 그곳에 왔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군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오히려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붙이시리니”(왕하3:18). 길을 행하다가 물이 가득하게 된 것은 큰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과정 중에 일어난 은혜였습니다. 더 큰 일은 모압 왕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엘리사를 통하여 모압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과 군사들은 모압 왕과 군대의 항복을 받기 전에는 철군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돌아서고 말았을까요? 본문에 대하여 쉬운 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모압 왕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붙잡아 성벽 위에서 불로 태워 자기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이를 본 모압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분노심이 끓어올라 죽기 살기로 싸울 태세를 취하자, 이스라엘 연합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후퇴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모압 왕이 그의 맏아들을 불에 태워 바치자 모압 군인들에게 분노심이 폭발한 것입니다. 그 분노심에 그들은 죽기살기로 싸울 태세였습니다. 그것을 본 연합국이 겁에 질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모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모압 사람들의 결사적인 항전 태도를 보고 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왕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차려놓으신 밥상을 두려움으로 인하여 먹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열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아낙 자손들의 강대함을 보고 마음이 녹아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 당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구속 사역을 이루셨고,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며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는 구원받은 자답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의 의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방팔방에서 공격하는 사탄 또한 예수님의 승리하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이 울부짖는 것은 단지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의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붙인 것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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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빛의 열매를 맺는 삶’(엡 5:8-9)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본래 어두움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에 하나님의 빛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빛이 있을 때 사람의 생명이 값지고 귀합니다. 이 빛을 저버리고 살 때 죄와 타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싶어서 이 빛을 싫어합니다(요 3:19-20). 참 빛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빛을 비춰주셨어도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 진리를 받지 않았습니다(요 1:9-11).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면 합당치 못한 일 즉 빛이 아닌 어두움의 행실에 빠집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생각과 정욕을 좇아가는 사람에게는 참 평안이 없고, 괴로움에 빠지며 죄책감, 부끄러움만 있을 뿐입니다(롬 8:5-8). 이런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저주와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어두움 속에 헤매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 빛의 열매들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절). 하나님께서는 빛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이 성품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빛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열매를 맺게 됩니다. 빛의 자녀들이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행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셔야 실족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면 육신의 삶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빛의 자녀들은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릴 때 빛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 변화시키고 그 사람 안에서 이 빛의 인격이 이루어져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롬 13:11-14). 마귀 지배하에 살면 어두움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겠습니다(롬 8:12-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빛을 받아 이 세상에 착하고, 의로우며, 진실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개인의 인격이 진실해야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과의 삶에서 진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존의 원줄기이신 하나님의 본성이 진실하심으로 그 줄기에 붙어있는 가지는 진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예수님의 인격도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인격은 선하고 의롭고 진실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하며, 의롭고, 착하다는 소문이 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마 5:16). 빛이 결코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모든 일이 분명하고 숨김없이 적나라하고 공명정대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내 삶을 통해서, 인격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타나는 영광을 사모하며, 주님의 도구로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실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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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마르다의 기도’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10:40). 본문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내용 가운데 발췌한 부분입니다. 자매는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석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나사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마르다는 꽤 분주하고 바쁩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형편을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것입니다. 집안이나 직장이나 군에서 대소사가 있을 때, 나는 이 일 저 일에 매우 분주한데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나 혹은 하급자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다른 사람하고 담소하거나, 어린 자녀들에게 손뼉을 치며 장단을 맞출 때 그것을 먼발치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으로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입니다. 담대한 사람은 직접 가서 한마디 하지만, 소심한 사람은 말은 못 하고 연이어 속앓이만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대처하는 방법을 우리는 마르다에게 배워야 합니다. 마르다는 직접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오늘날로 말하면 마르다는 마리아를 불러 따끔하게 말하지 아니하고 마리아에 대하여 예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주지 아니하고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님, 동서로 하여금 이 바쁜 나를 도와주라 명하소서.” 마리아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마리아가 요구한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1-42). 이처럼 기도에 대한 응답은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더 이상 주님께 불평도 원망도 늘어놓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르다가 원하는 방법으로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았지만 마르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복잡한 것보다 일을 단순화 시켜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얼마 후에 두 자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만에 살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요11:1-44). 그 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요12:1-8). 마르다와 마리아의 위치는 여전히 똑같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잔치의 목적과, 참석한 인원이었습니다. 이 전에는 세 명이었는데 지금은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 그 집의 주인 시몬과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모두 열 여섯 명이었습니다. 이 때도 마르다는 혼자 일을 봅니다. 그런데 지난 번 상황과 다르게 한 마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석 인원이 다섯 배 이상 늘었는데도 잔치상 준비하는 일을 무난히 해 나갑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 대하여 기도한 마르다에게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그가 원하고 바라는 것 이상의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상대방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섭섭한 마음을 곧 잘 품습니다. 그러다가 홍수를 퍼붓듯 쏟아버리거나 끝내 속 병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 여러분의 심정을 다 말씀드리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고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응답해주시고 또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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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하나님의 사람의 삶’(딤전 6:11-12)
    오늘날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호칭에 걸맞게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피해야 할 것이 있고, 따라야 할 것이 있습니다. 피해야 할 것들은 다른 교훈(3절), 교만과 변론과 언쟁(4절),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4절), 그리고 돈을 사랑함(10절) 등입니다. 교만하여 사람들과 말다툼하거나 싸워서는 안 되고 남을 욕하고 비판하지 말며 특히 금전욕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신앙의 정진과 성장을 가로막거나 믿음을 주저앉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같은 덕목들입니다”(11절). 이것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덕과 실행해야 할 생활 원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진리에 부합하는 올바른 삶을 의미하며, 경건은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참된 경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대인관계에서의 신실함과 정직성을 말하며, 이 믿음은 밖으로는 사랑을 낳으며 안으로는 인내와 온유를 낳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사랑은 생명이 없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내란 신앙의 인내인데 어떠한 역경과 환경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굴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을 지키며 신앙이 도리를 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살후 1:4 ; 히 12:1 ; 약 1:3). 온유란 그리스도의 성품 가운데 하나로서 여기서는 성도들이 그것을 본받아 항상 사람들을 대하되 그들을 이해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4:21). 이어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라고 권면합니다(12절). 우리가 부패했고, 세상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싸움의 대부분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데 육신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과 서로 부딪치기 때문이며, 때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마귀와 격전을 벌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며, 마귀이며,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자신과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우리의 믿음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씀대로 순종해 나아갈 때, 그 승리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훈련과는 다르게 실제로 희생이 있고 승리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딤후 4:7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씀이 우리의 말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선한 싸움을 싸우는 목적은 영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은 재산이나 건강이 아니라 내세에 대한 확실한 보증인 영생인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주시는 선물이지 결코 인간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영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은 영생을 보장받은 자로서 마땅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히 10:29).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피할 것은 피하고, 따를 것을 따름으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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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결박하는 사람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마27:1-2) 새벽이란 ‘아주 일찍’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일찍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침에 일찌기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서 떠났습니다(창22:3). 또 다윗도 가드왕 아기스가 블레셋 장관들이 다윗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함께 가지 못한다고 하였을 때, 다음 날 일찍 시글락으로 갔습니다(삼상29:11). 그는 가드왕이 막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찍은 중요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은 일찍 가장 중요한 첫 시간을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일찍 나서게 됩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님을 없애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어가면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일찍 나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일 앞장서서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행23:1). 성령은 우리의 양심과 더불어 말씀하시는데(롬9:1), 대제사장은 전혀 양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를 판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은 삼십을 가져다 주었을 때의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 예수가 무죄한 자라고? 우리가 너무 빨리 사형 판결을 하였구나. 빨리 다시 돌리자.”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마27:3). 그들이 사실상 예수님을 죽게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기면서 가룟 유다의 마지막 말에 대하여 자신들은 책임 없다고 시치미를 뗀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욕심이 양심을 눌러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양심을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합당한 양심을 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행23:1).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가 양심을 쓰지 않고 욕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다른 사람들의 죄가 생각난다면 거울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티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대제사장처럼 예수님을 결박하는 행위들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결박하는 행위는 이론입니다. 말씀을 결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이레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으로 결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13:11-12). 이처럼 부득이하게 느껴지는 이론이 예수님을 꽁꽁 묶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유, 변명, 이론, 까닭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깨뜨려야 합니다(고후10:3-6). 그것이 복종입니다. 이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이라면 복종은 그 진을 깨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처럼, 여러가지 믿지 아니하는 이론으로 예수님을 결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주님의 말씀에 더욱 복종하여, 말씀을 대적하는 모든 이론을 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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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여(롬 14:6-9)’
    신앙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에서 이루어져야지 자기 체면이나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8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요 방식인 것입니다. 고후 5:15에서도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성령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삶의 원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8절). 6-12절을 보면 ‘위하여’라는 말이 8번 나옵니다. 이것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삶의 목적이요, 내용이며 중심임을 깨달아 우리의 인생을 보람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목표가 오직 예수님일 때, 오직 믿음으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대표되는 구속사역은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9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권이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그 효력을 미치게 되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어떻게 시작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사느냐’하는 문제 역시 중요합니다. 목적의식, 방향의식이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그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를 위해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우리가 후회 없이 사는 길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주님께 헌신한 사람입니다. 주님께 헌신한 사람이란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 생명까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일을 하느라 좌로 뛰고 우로 뛰다보면, 때로는 실망과 낙심이 찾아오기도 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으나, 주님을 위해 일하다 보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성도란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주님 중심으로, 말씀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나는 보잘것없어도 말씀이 내 길을 지도해주십니다. 갈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반드시 복된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떠나면 고통스런 일들이 생깁니다. 말씀을 떠나면 사탄이 들어오고 역사합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다짐하며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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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강성률 목사의 ‘셈하자’(눅 16:1-13)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허비한다는 것은 조금만 소비해도 되는데, 많이 소비하거나 소비해서는 안 될 곳에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것같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금횡령이 됩니다. 그러자 평소에 청지기를 믿고 일을 맡겼던 주인은 그러한 청지기가 의심스러워서 장부를 정리해서 넘겨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썼는지 감사가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두 받은 것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우리는 모두 받았습니다. 우리의 몸도, 두뇌도 받았습니다. 재물도 받았습니다. 직업도 받았습니다.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만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연장되는 것 역시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허비하고 있습니다. 허비란 무엇일까요? 주님을 위하여 쓰지 않는 것은 모두가 허비입니다. “셈하자.” 하는 것은 주인의 소유가 허비되니 그것이 사실인지 조사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소문대로 허비하였다면 허비했던 것들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쓰셨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하여 쓰셨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허비되는 삶이었습니다. 허비하고 사는 사람과 주인의 것을 합당하게 쓰는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자신 스스로 잘 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는 대신, 사울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오직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신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고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15:11).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사울이 세움 받은 왕으로서 합당하게 하지 않고 제 뜻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파면당하고 다윗을 세운 것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헛된 삶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은 “셈하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많은 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자신을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하나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셨으면 돌이 떡이 되게 하실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도 아프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군대를 불러 올 수도 있었습니다(마26:53).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구름 위로 가실 수도 있었습니다(요4:3,4).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도 자신을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들을 당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고 임의대로 살아가는 삶은 모두 헛된 삶입니다. 반면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그 영광은 세상이 주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영광의 힘입니다. 새해에는 자신에게서 나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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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사 40:31)
    인생의 어두움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어두운 문제를 만날 때 누구나 불안과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현실 앞에 무능한 모습이 아니라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나의 현실의 장벽 앞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에 기대를 걸고 새 힘을 얻으려고 하는지에 대해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시선은 하나님께 고정이 되어 있어야 시험에 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주바라기’가 되십시다. 고통의 절벽만 바라보지 말고, 그 고통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때에 어둡고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앙망하다’란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혹은 ‘위를 쳐다보면서 대망하다’는 뜻입니다.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며 큰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위기, 원수, 한계를 만날 때 낙심하고 불안에 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하여 영광을 나타내십시다. 고통 중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시험이 오더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자가 신앙인인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잃고 미친 듯이 방향을 잃고 목표를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며, 그들이 참된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도록 기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미래를 바꾸는 그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영안과 영의 귀를 가지고 있는 한 어떤 위기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앙의 힘은 이처럼 위대한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힘은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힘입니다. 그 힘은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떤 박해가 와도, 어떤 환경에 접어들어도 독수리처럼 올라가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깨닫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납니다(고전 10:10), 또한 인생이 답답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지고 살맛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주저앉지 마시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셔서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받으면 원망도 불평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과 시련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즐거움과 원동력은 바로 여호와를 기다리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힘든 문제가 산처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에게 새 길을 주시고 새 방법을 주십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해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새 힘을 주셔서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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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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