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6(일)

칼럼
Home >  칼럼  >  이효상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이효상 칼럼 기사

  • [이효상 칼럼] 어찌할꼬! 신사참배결의 80주년
    2018년 9월, 장로교단 총회를 맞으며 ‘신사참배결의’ 80주년이 되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제2일째 회의가 열렸다. 이 총회에는 27개 노회 대표 171명(목사 86명 장로 85명)과 선교사 22명, 합 193명의 총대가 참석했다. 일제 수뇌부는 미리 친일파 목사 이승길, 평북노회장 김일선 등과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합의 했으므로, 석전 평남지사, 경찰부장, 고등과장, 경무과장, 평양서장, 고등계 주임 등이 동석했다. 일반 방청은 금지시켰다. 문밖에는 30여명의 정복 경관이 경계를 섰고, 총대들 사이에 경찰관이 앉아서 반대표 이탈을 막았다. 이미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채정민 등 신사참배 반대 지도자들은 예비검속 상태였고. 친일에 앞장서는 국민 총동원을 목표로 예수교장로파 정동연맹을 결성(매일신보 1939. 9. 13)하고 ‘신사참배 결의’를 계획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총회개회 후 안건 심의에 들어가자마자 계획대로 평양노회의 박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요 국가의식”이라고 결의하고 성명서를 채택하자는 안을 발의했다.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가 동의하고, 안주노회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표결에 들어갔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동의안에 대해 “가(可)하시면 예라고 답하시오.”라고 했으나, 소수의 몇몇 사람만 “예”라고 답했다. 다수가 침묵하자 당황한 홍택기는 경찰들이 일어나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否)는 묻지 않고 안이 통과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이런 불법의결 선포에 대해 방위량(Blair), 한부선(Hunt) 선교사 등은 "불법이오!"를 외치며 항의했으나 오히려 경찰에 의해 밖으로 끌어냈다. 항의가 인정되지 않자 선교사 일동은 퇴장했다.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신사참배’ 가결은 이렇게 사전 각본과 불법과 강요로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 강요에 의해 결정한 ‘신사참배’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격을 신격화한 우상화 행위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영적 암흑기’를 맞으며, 교단적으로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1938년 10월에는 평양신학교가 폐교(동아일보 1938. 10. 2)되고, 감리교는 제3회 총회 후 7천성도 무운장구 기원, 신궁참배와 총독부 방문(동아일보 1938. 10. 8)을 하기도 했다. 1920년부터 일제는 건국신과 메이지신을 모시는 경성 남산에 신사 신궁을 건립,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한 기부자 명부로 돌계단을 만들어 ‘친일’과 ‘신사참배’를 합리화 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의 역사는 식민통치와 궤를 같이 한다. 그 후 28회 총회 때는 ‘동방요배’가 예배를 대신하고, 찬송가 대신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고, 그리고 1942년 31회 총회 때는 창씨개명과 ‘조선장로교’ 이름을 단 전투기 헌납을 결의하였다. 그런가하면 일제가 강압으로 예배에 사용하는 찬송가 44곡을 흠집 내고 기미가요와 우미유카바, 황금신민서사 등을 수록한 신정 찬송가를 발행케 하여 예배 시 일본 천왕을 찬양토록 탄압하였다. 더 나아가 쇠붙이, 금모으기를 위해 금속회수부 설치, 장로교회중 1540개 감리교회 교회종과 철문을 헌납(매일신문 1943. 10. 6)케 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저항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해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했지만, 이들을 대부분 일제의 회유와 핍박에 굴복한 교회의 협공까지 받아 이중적 박해와 수난으로 순교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당시로써 ‘신사참배’는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불의한 세속권력의 강요에 굴복하여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존을 포기한 변절행위이자 마치 베드로처럼 우리 죄를 대신하여 가야바의 법정에 서신 예수그리스도를 부인케 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때문에 이것은 아무리 시대상황과 말씀과 교리로 합리화를 꾀하여도 자신의 신앙양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해방직후 이에 대한 철저한 참회로 이 상처를 치유하고 더욱 겸손하게 민족을 섬기며 봉사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해방되자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가시적인 참회를 요구하는 주장과 자신의 합리화와 은폐로 교권을 유지하려는 측이 대립하여 교권다툼과 교파분열로 이어져 상처는 더 깊어만 갔다. 사실 교계는 이 때 ‘참회기도회’를 통하여 민족적 죄를 통회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대부분 부끄러운 상처이기에 침묵하고 심지어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호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1945년 12월 북한 5도연합노회에서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과오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 할 것”을 결의하였고, 6.25 전쟁이 끝난 1954년 4월 제 39회 장로교총회에서 다시 신사참배 경의를 취소하는 성명서와 신사참배로 제명이나 처벌한 것에 대한 취소를 의결하였지만 이에 상응하는 통절한 참회운동과 정화운동이 뒤따르지 못했다. 어떻든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라는 죄책과 상흔을 치유하려면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선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 시대가 본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적인 참회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들은 분명 거짓과 불의한 사회와 변절한 교회에 대하여 온 몸으로 경고한 예언자적인 신앙의 용장들이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신앙인으로 고난을 무릅쓰고 거짓에 맞서 싸웠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감당했던 신앙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순교신앙’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일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 가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후세는 그들을 평가하기를 ‘보수신앙의 희생자’라고 하지만, 그들이 어떤 수준의 신앙과 사상을 가졌건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비추어 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 그렇게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이에 항거하다 목숨을 버리고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것이 낫다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 그들의 존재의의는 역사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해방직후 자체의 회개와 정화에 실패한 교회는 그런 일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아니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신사참배결의’ 80주년을 보내고 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 행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뼈아픈 상흔으로 기억될 것이다. 민족적 죄를 안고 “이것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요, 내 죄”라고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찌할꼬!” 가슴 치며 통회 자복함으로 재부흥의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 회개운동을 넘어 순교신앙을 계승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신사참배’에 대한 민족적 참회운동은 현재적 사건으로 오늘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9-18
  • [이효상 칼럼] 늘어가는 꼰대스타일, 어쩔꺼나?
    ‘꼰대’ 뜻이 뭐길래 아이들이 꼰대! 꼰대! 할까? 옛날 학창시절에 쓰던 말인데 그 때의 ‘꼰대’ 뜻은 '선생님'을 이르는 은어로 쓰던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 쓰이는 것 같다. 커피숍에서 어느 학생이 핸드폰으로 꼰대가 어쩌구하며 친구와 통화를 하는데 자세히 들으니 그 꼰대 뜻이 자기 아버지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 얘기 같기도 하고 그냥 목사님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해서 너무 궁금해 하마터면 물어 볼 뻔 했다. 진짜 꼰대가 될뻔 한 것이다. 그러면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꼰대’는 어떤 사람일까? 국민일보 기사(2018,7.21)에서는 9가지 유형을 꼽았다. 한 번 꼭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꼰대가 아니니 해볼 필요가 없다구!’ 착각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이미 꼰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먼저 ‘골목대장형’으로 “까라면 까”(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는 식의 상명하복을 강요하는 스타일이다. 꼰대는 나이나 직위 같은 서열을 강조하며 상하관계를 중시한다. 자신이 윗사람이니 상대가 자기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나이나 지위라는 힘으로 남을 찍어 누르면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모욕 막말 욕설 같은 언어폭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자칭 멘토형’이다. 자기의 경험이 전부인양 서툰 충고와 지적을 즐기며 가르치려 드는 스타일이다. 꼰대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꼰대인지 모르며, 되레 스스로 ‘멘토’라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특별한 성공경험이 보편적이고 전부인 것처럼 사사건건 가르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유형은 조언을 구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충고와 지적을 하사하듯 하며 자신의 견해와 사고방식대로 해야 성공한다고 강요한다. 이들은 ‘나는 꽤 괜찮은 선배’라는 식의 자기만족을 느끼기도 하지만 정작 듣는 이들은 먼나라 이야기로 그 견해에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동네반장형’이 있다. 이는 가족사를 비롯한 호구 조사하듯 사생활을 꼬치고치 캐묻거나 모든 일에 참견하려는 유형이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동네반장형’만큼이나 피곤한 부류가 있다면 ‘사감선생형’이다. 상대방의 인사나 표정 등 외모와 자세를 지적하며 고치려는 유형이다. 인사와 예절부터 말투·표정을 비롯한 태도, 옷차림·화장·헤어스타일 같은 외모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걸고 넘어지는 경우다. 그런가하면 ‘독불장군형’도 있다. 사회변화나 세대별 차이를 무시한 채 후배가 틀렸다는 식으로 밟고 올라가 자신의 아성(牙城)을 구축하고 올드보이들만의 세계를 연장하려 한다. 이런 꼰대는 후배에게 ‘네가 틀렸다’는 것을 주입하며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가 대표적인 말투다. 이들은 의견이 맞서면 자기 견해를 우선시 고집한다. 이 스타일은 자기보다 나이가 적거나 연차가 낮은 직장 후배가 반론을 제기하는 걸 견디지 못한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불편해 한다. 이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인정하거나 바구려 하지 않는다. ‘참전용사형’이다. “예전에는” “우리 때에는”같은 말투로 자신의 무용담을 전설처럼 즐기는 스타일이다. 자신이 한때 대단했다는 투로 과거를 미화하는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시간이나 기회가 생길 때마다 무용담 늘어놓기를 즐긴다. 무용담의 사실 여부를 떠나 과거의 성과로 인정받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꼰대’성이다. ‘나르시스형’이다. 자신의 현재 지위, 인맥, 학벌, 재산, 지식 등을 부각하면 잘난 체하는 맛으로 사는 스타일인데, 동료나 후배, 타인에 대한 배려나 관심, 헌신은 전혀 없이 ‘자기자랑’을 위해 사람을 상대한다. ‘밥’을 먹거나 ‘차’를 마셔도 ‘강남’이나 ‘호텔’에서 마셔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또 ‘독립투사형’이다. 개인사보다 일을 우선시하도록 강요하며 사생활을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는 스타일이다. 꼰대 중에서도 가장 무지막지한 부류이다. 이들은 일과 단체생활을 최우선으로 강제하며 남의 사생활을 희생시키려 든다. 시도 때도 없이 ‘수당없는 야근’을 시키면서 휴가를 막고 퇴근 후나 주말에도 업무 메시지를 보내 일하도록 만든다.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이 ‘갑질오너형’이다. 본업과 무관한 잔무를 시키는 공사구분이 없이 행동하는 스타일이다. 언행에 공사 구분이 희박하다는 점도 ‘꼰대’의 특징이다. ‘아랫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전세 낸 것처럼 본업과 무관한 개인적 심부름을 시키며, 상대를 ‘심부름꾼’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꼰대의 발견』이라는 책에서는 내가 누군지 알아?(who), 뭘 안다고?(what), 어딜 감히(where), 내가 왕년에는(when), 어떻게 감히(how), 내가 그걸 왜?(why)이런 말로 꼰대는 꼰대질(?)을 한다고 했다. 혹시 이런 말이 입에 익숙하지는 않은가? 이런 꼰대의 특징은 '3척'이 있는데. 아는 척, 위해주는 척, 있는 척 하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상사, 교회직분자 중에 이런 꼰대가 많다. 기사에 따르면 ‘꼰대’란 그 중에서도 '나(자신)'를 중심에 두려는 이기주의와 나이, 지위, 경험에서 오는 오랜 '우월의식'이 결합된 사람을 가르킨다’고 한다. 아마 그런 의식이 교회에서도 중직자로 오래있다 보면 ‘갑질’로 드러나게 되고 갈등을 야기시켜 ‘교회분쟁’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교회안에도 꼰대가 늘어나고 있다. 고령화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에도 이런 ‘꼰대’가 더러 수두룩하지 않겠나하는 우려가 든다. 고령화되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음세대와 소통하며 젊은교회로 나가기위해, 꼰대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말조심, 공감, 꾸준한 자기성찰, 지나친 참견 및 관심 배제, 철저한 공사 구분, 가능한 침묵, 측은지심을 지닌 겸손 등의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꼰대'든 소위 '요즘 젊은 것들'이든 서로 손가락질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이해하려는 그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라면, 아니 직분자라면 혹시 이런 생각을 한번 쯤 해보면 어떨까?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 ‘내가 먼저 말하기보다 들어보자. 내가 답을 말하기보다 상대에게 물어보자’. 굳어지고 고장난 사고(思考)의 틀, 고정관념을 한번 바꿔보면 어떨까?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8-28
  • [이효상 칼럼] 소는 누가 키우나?
    ‘소는 누가 키우나?’ 한 때 이런 말이 유행어였다. 어떤 조직이든 티 안내고 묵묵히 긏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세가 어느 정도되는 소위 1%의 대형교회 담임 목사급이면 스타성 기질이 다분하다. 그래서 언론사와 기자들을 각자 줄 세우기도 하고 특별 관리도 한다. 자신의 홍보나 일간 신문사의 기자들에게는 엄청난 재정을 쏟아 붇는다. 그리고 사진 찍고 인터뷰하는 일과 광고로 도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대사회적 영향력 차원에서 언론정책을 가지고 그 기능을 활성화하겠다면 그 필요성에 누가 반대하랴.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렇게 지도자들이 다 언론스타가 되면 ‘소는 누가 키우나?’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다들 밥 먹고 사진 찍고 스타만 되려한다면... 주인공만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재미가 없다. 엑스트라의 감칠 연기가 있어야 제 맛이다. 한국교회도 너무 똑똑한 주인공들만 있으면 인간미가 없다. 조금 부족하고 조금 허술해도 사람 냄새가 조연이 그래도 나는 좋게 여겨진다. 농촌의 농부들이 늙어가고 은퇴하고 있다. 과수원 과일은 누가 따나? 배추농사는? 논밭일은 누가하나? 양어장 고기는 누가 키우나? 바다의 물고기는 누가 잡나? 소는 누가 키우나? 8월의 가마솥 찜통 더위에 정말 묻고 싶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을 때, 사진찍고, 밥먹고, 차 마시고 친목회하다 골든타임은 지나고 몇 년 후 은퇴들 한다면, 이렇게 ‘소’키우는 일에 별 관심없다면 ‘소’와 ‘양’은 주님이 알아서 다 키운다는 것인가? 조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실제하는 일은 없이 이벤트로 시간만 때우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과, 반대로 실제로 일을 하는데 차마 민망스러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랑을 그리 하지 않는 사람, 두 부류다. 조직에 꼭 필요한 인재는 후자이다. 그들이 없으면 조직은 결국 쇠퇴하고 망하는 길을 걷게 된다. 고로 지도자는 제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어느 조직이든지 여러 사람이 한사람을 바보 만들기는 쉽다. 자신보다 앞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을 ‘이류’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본인들이 ‘일류’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삼류’같으면서 말이다. 좋은 지도자나 일꾼이 나와도 자신의 맘에 안든다면 바로 비토세력이 된다. 비토(veto)는 거부권이라는 단어로 복음적인 용어가 아니라 상당히 정치적 용어이다. 이런 비토세력이 멀쩡한 사람에게 중상을 입히고 지도자가 되지 못하게 실족하게 만든다. 지도자의 한계가 있다면 상대가 나와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소위 ‘개척파’보다는 ‘일류파’라는 의식은 해외파 출신 목회자들에게서 그런 점은 더 강하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하여는 무관심과 무지하다. 자신들이 쳐놓은 담과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 한국교회를 섬기며 대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는 등 건강한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기에 목회생태계를 회복하려고 앞장서면 자기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죄목(?)으로 뒷담화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인재를 비토시킨다. 지난해 일본 여행중 소학교 운동회에서 박 터트리기 경기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같으면 오자미를 던져서 박을 터트리면 “내가 던져서 저 박이 터졌다”고 좋아한다. 그런데 일본식 경기는 박을 바구니로 만들어 그 박안에 오자미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내 것도 저 박안에 들어가 그 박의 승리에 동참하는 일원이 되었다”는 것에 감동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상당히 닮으면서도 깊이와 감동이 틀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관점과 감정이 전혀 다르다. 박을 꼭 터트려야 속이 후련하고 직정이 풀리는 것인가? ‘한국교회’라는 조직에 좋은 지도자 나오기가 쉽지 않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최소 10년 아니 2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지도자로 만들기 어렵다. 앞으로 교회와 역사와 미래를 읽는 지도자의 필수조건은 ‘연합할 줄 아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도 좋은 지도자가 많다. 그런데도 다들 개인기에 능해서인지 ‘연합’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힘들다. 그래도 가끔은 ‘연합’하기도 한다. 개인기 말고 동역자의식이나 형제애를 가지고 팀워크가 되는 자만이 미래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이들이 동력이다. 한국교회는 정치행위로서의 교회 연합은 있었지만 구체성을 띤 아젠다 설정에는 후진성을 보여 왔다. 한국교회 골든타임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상황이기에 ‘소는 누가 키우나?’ 요즘 필자는 그런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내일을 위해서 오늘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발전에 기여할 일들을 차분히 챙기는 일들은 누구의 몫인가? 한국교회 1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전략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를 실천할 브레인이 있기는 한 것인가? 오늘 한국교회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비바람과 태풍 속에서도 10년 20년을 이상을 묵묵히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감당해온 실무자들이 여럿 있다.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건 그들이 한국교회의 유무형의 자산이다. 그들의 열정과 시선이 더 높은 곳을 향하고 희망을 그릴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8-21
  • [이효상 칼럼] 다음세대를 향한 고민
    우리는 우리의 심각한 현실을 알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미 고령화되고 노화되었다. 간혹 시간이 되면 이런 질문을 한번 해 보자.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평균연령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을 일일이 붙잡고 나이를 물어볼 수는 없지만, 그런 예배에 비교적 자주 보이는 평신도의 평균 연령을 짐작해 보면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 50대 중반을 넘어선 것 같다. 한때 ‘한국교회를 깨운다’던 평신도들이 주축을 이루던 30대 40대들이 차지했던 80년대의 이야기가 이미 전설이 됐다. 젊은 인구가 대량으로 유입되지 않으니 평균 연령은 지속적으로 치솟는다. 젊은 층의 유입은 간헐적이고 단기적이고, 이슈나 의미 등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고 있다. 이런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다. 대한민국 다음세대 청년의 현주소를 먼저 짚어봐야 한다. ‘왜 교회에서 청년들이 사라지는지, 현실 속에서 청년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교회는 청년들에게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그 고민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하여 청년들이 장년이 될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수많은 변곡점을 지나왔다. 수차례 정권이 바뀌었고 IMF, 세계금융위기 등을 지나오면서 생활양식, 노동 환경 등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시대에 따라 그 속에 살아가는 청년들의 관심사와 고민도 변했다. 교회 역시 시대의 징표에 따라 그 기능과 역할을 바꿔오면서 청년들과 함께 했다. 2018년 오늘, 이 시대 교회의 ‘청년’ 키워드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한국교회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다음세대 청년의 현주소를 먼저 짚어봐야 한다. ‘왜 교회에서 청년들이 사라지는지, 현실 속에서 청년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교회는 청년들에게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그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2018년 신한은행의 ‘보통사람 금융생활보고서’에 따르면, 취업문이 좁아진 탓에 청년들은 평균 1.4년 동안 준비 기간을 가지고 26.2세에 첫 취업을 한다. 취업 준비 기간에는 생활비와 스펙쌓기 비용 등으로 평균 468만원을 쓰는데 아르바이트를 하거나(60.2%) 가족에게 손을 벌린다.(66.3%, 복수응답) 그나마도 2006년 이전에는 10명 중 8명 이상이 첫 취업에서 정규직 자리로 갈 수 있었지만 최근 정규직 비중은 60.5%에 불과하다. 그래서 학업 기간이 늘어나고 취업이 늦어지면서 결혼과 출산도 늦어지고 있다. 통계청에서 밝힌 ‘2017 혼인과 이혼통계’를 보면 평균 초혼연령은 남자 32.9세, 여자 30.2세로 지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1988년 평균 초혼연령이 남자 27세, 여자 24세였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6세 가까이 높아졌다. 나이별 혼인 추이를 보면 남녀 모두 20대 이하의 혼인은 감소하지만 30대 이상 혼인 건수는 지속해서 증가해 30대 초반(37.1%), 20대 후반(21.6%), 30대 후반(18.2%) 순으로 나타난다. 치열한 경쟁과 생존으로 내모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에게 신앙생활은 마치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울연구원 ‘2017 서울사회학’ 조사에 따르면 젊은층(20~39세)의 유종교율 추이는 2007년 47.3%에서 2017년 42.8%로 10년간 4.5%포인트 줄었다. 보고서는 경제적 영향을 받아 종교 활동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경제·시간적 빈곤층’이 종교 활동에 진입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현장에서 젊은이들을 만나보면 현재 자신의 신앙생활 유지에 가장 큰 어려움’에 대해 대부분 학교나 직장 등에서 일로 인한 ‘시간과 여유 부족’을 꼽는다. 젊은이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면, 학업, 가족, 취업, 건강을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종교는 소수에 불과했다. ‘피곤한 일요일, 교회에 가면 밥 먹여주나요?’라고 묻는 청년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 각박한 사회생활 속에서 정신적, 심리적 위안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교회로 불러오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보수는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진보도 이미 전통의 일부가 되었으며 기성세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 어느새 진보적인 사람들에게서도 신선한 시도, 과감한 도전, 날선 비판 등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과거에 쌓은 투쟁경력, 의식화된 이념, 촛불정신으로 이어지는 시민정신 등이 중요시된다. 이런 가치들이 중요해지는 현상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또 다시 ‘보수화’ 또는 ‘기득권화’되는 과정이라는 단어가 잘 맞지 않을까? 이 사회의 진보도 이미 정치화, 보수화되었다. 얼마전 올해 국제도서전이 코엑스에서 열렸다. 책을 사랑하는 수많은 인파와 강연속에 많은 출판사, 서점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기독교 부스쪽은 한산하다 못해 썰렁한 편이었다.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서적이 관심도 없고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팔리지 않는 현상은 미래를 보는 젊은 논객이나 젊은 글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마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고 새로운 방식의 효과는 무엇보다 교회가 계속해서 젊음을 유지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움을 주지 못한다. 그 새로움을 담지 못하고 있다. 교회에 새로운 시각, 새로운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시대를 가르는 논객이 없다. 한국교회를 대변할 논객을 길러야 한다. 더 나아가 그중의 하나가 바로 다음 세대를 위한 평신도 전문사역자 양성이다. 평신도들 사이에는 미래의 전문가를 준비하는 20대와 30대 젊은이들은 상당히 많다. 또한 전국의 신대원생 가운데 상당수가 여기 해당할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힘들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신앙을 키우며 묵묵히 공부하는 미래의 일꾼들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전문 지식이 교회를 위해서도 사용되었으면 하는 아름다운 꿈을 품고 있다. 더욱 전문화된 사회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주류 종교로서 복음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미래교회는 이들의 전문성과 열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교회와 어떤 ‘전문적 연결고리’를 원한다. 청소년들이 교회로 유입되지 않는 현실에서 교회안의 청소년들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나가야 한다. 그곳이 학교이자, 캠퍼스이다. 가령 예를 들어 학교와 교회를 이어줄 수 있는 청소년 적성, 진로상담사를 교회의 중고등학교 교사 중에서 키워내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또한 실제 인격적으로도 다.준.사(다음세대를 준비하는 사역자들)과 청.멘.넷(청소년들의 멘토링과 네트워크)을 전국적으로 유지하고 인격적으로 교류하게 하므로 다음세대 부흥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세대를 위한 설동주 목사(과천교회)의 ‘쉐마교육’과 서길원 목사(상계교회)의 청소년 연합사역은 다음세대의 대안으로 한국교회를 주목하게 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미래와 교회에서 가능한 역할을 고민하고 나눌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미래 교회의 주역들, 미래의 다양한 평신도 사역자들의 발굴은 무더운 여름 이렇게 사역현장에서 시작된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7-23
  • [이효상 칼럼] 러시아 월드컵을 보며 한국교회를 생각하다
    지난 한 달간 러시아 월드컵으로 잠 못드는 밤을 보냈다. 우승은 프랑스가 감동은 크로아티아가 가져가며 마쳤다. 전 세계에서 축구 좀 한다는 나라들이 예선을 치루고 지난 6월부터 러시아 월드컵의 우승 트로피를 향해 32개국이 발진(發進)했다. 다들 대망의 결승 진출국은 과연 어디일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맞붙을 것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빅매치는 성사될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 파란과 이변으로 기록될 것인가 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시작과 함께 32개국 중 FIFA(국제축구연맹)랭킹 1위 독일과 5위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여 짐을 싸고 돌아갔다. 이어 2위 브라질은 기존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다섯 차례 우승을 맛본 ‘만년 우승후보’ 브라질이였다. 그러나 이름도 흘러간 전설이 되어버리고 브라질도 짐을 싸고 돌아가야만 했다. 우리나라 축구도 독일을 이기기는 하였지만 그리 썩 만족할 만한 성적은 아니어서 전략과 전술의 부재라는 오명과 함께 손흥민과 조현우 콜키퍼 라는 우수한 선수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4년전축구’, ‘동네축구’라는 국민들의 비난은 축구협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축구의 종가’ 잉글랜드도 1966년 자국에서 개최할 때 우승을 경험한 이후 이름값만큼 ‘옛날얘기’가 되었다. 축구공이 둥글어서 그런지 러시아의 약진처럼 예상밖의 결과들이 많이 나왔다. 인공지능(AI)의 예측도 번번히 틀려 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했다. 1998년 ‘아트샤커’로 전 세계를 호령한 프랑스는 20년만에 팀을 다시 우승후보로 올랐다. 세계적인 스타들이 즐비한 프랑스의 팀웤이 결국 우승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주목했다. 프랑스는 선수 개개인의 뛰어난 능력을 하나로 모을 조직력이 완전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경기를 계속할 수록 안정되어가며 평균 24.9세의 연령으로 ‘새로운 황금세대의 출현’이라는 이름에 맞게 크로아티아를 4대 2로 이기고 우승하였다. 프랑스의 유능한 감독과 공격수 음바페가 있고, 세트피스에 능하다는 장점과 더불어 디데에 데샹감독의 전략과 전술로 인하여 프랑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인구 416만의 크로아티아는 선수들이 축구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투쟙을 뛰는 선수들이다. 감독도 의사였다. 다들 계속된 연장전과 경기로 루가 모드리치 등 노장주전 선수의 피땀어린 수고와 투혼이 결승까지 올라가는 결실을 만들어 냈다. 결과적으로 FIFA(국제축구연맹)랭킹이나 이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설의 호날두와 메시가 다시 2022년 월드컵을 밟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월드컵 축구만이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 개인적으로 실력이 있는 선수가 있어야하고 거기에 맞게 시스템을 확보해야 한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축구 경기를 보면서 개인기를 넘어 조직력이 가장 중요한 것은 축구만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제 위치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주는 선수,도는 실무자가 조직을 승리로 이끈다. 축구나 조직이나 사실 감독자는 자기 말을 듣고 자신에 충성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에 거슬리거나 다른 의견을 가지고 말하면 싫어하고 멀리한다. 말로 약장수처럼 말로 파는 말꾼이나 구경하다 잇속만 챙기며 조직의 미래와 상관없는 구경꾼을 좋아하면 조직이 끝난다. 축구협회나 감독이 실력있는 선수들을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동료의식이 없이 자신의 맘대로 하고 싶으면 그때에는 본인이 선수로 뛸 할 각오로 해야 한다. 그래서 아마추어 감독이 실력있는 선수를 못 챙기는 것이다. 자기 수준이하의 선수를 데리고 무슨 경기가 되겠는가. 그런 점에서 16강이 목표였지만 결승까지 올라오도록 독려하며 노장들의 투혼에 불을 지른 크로아티아 즐랏코 달리치 감독의 리더십은 탁월함을 드러낸다. 감독자는 선수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인정하고 북돋워 지치지 않게 해줘야 한다. 말만 번지르하게 하는 잡초를 솎아내 소중한 곡식을 영글게 하는 일, 이런 환경을 만드는 일이 바로 감독자의 임무이다. 축구협회나 어느 조직이든 다양한 의견의 허심탄회하게 수렴되는 과정이 생략되기에 그래서 발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조직의 발전은 치열한 의식화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결의를 집행할 때 강력해진다. 치열한 토론과 헌신 등을 통하여 다듬어 지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국교회라는 ‘정체성’과 ‘공동체성’을 몸으로 체감하므로 구성원 모두가 건강한 미래를 만든다. 어느 조직이나 우려스러운 것은 발전을 위한 치열한 논의구조를 건너뛰고 외면하는 것이다. 현재의 모든 의사결정 구조, 교회가 접하는 이슈에 대한 논의구조가 전근대 방식이다. 교회말로 하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70년대 개척교회당회식 운영’이다. 조직이나 기관이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며 몇 몇 임원들의 이야기 몇 마디로 ‘배는 산으로’ 간다. 사실 감독자나 실무자는 이런 유혹을 뚝심있게 이겨내고 논의와 설득, 조정 작업을 거쳐 조직을 유연하게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 정상의 자리로 올려놓는 사람이다. 러시아 월드컵이 전 세계와 인류에게 전한 메시지는 대단했다. 개인기가 뭉쳐 팀웤이 될 때,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월드컵 16강을 다시 밟으려면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건강한 시스템을 만들고 우수한 인재들을 영입하고 키우며, 다시 팀웤을 맞추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영광을 재현하려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7-23
  • [이효상 칼럼] 돌아온 탕자 그린 렘브란트와 김기창 화백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이야기는 구속사의 중요한 장면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아들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인간의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한다. 아들이 저 멀리 나타났을 때부터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달려와 반겨주었다. 자식의 나약함을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그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매일 마중 나왔던 것이다. 그들이 포옹했을 때, 아들은 후회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말렸다. 아들을 꼭 껴안은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좋은 옷을 마련하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고 했다. 이렇게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준다. 이 명장면을 화폭에 담아 전한 화백이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한국의 김기창 화백이다.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는 바로크 시대 네덜란드의 대표적 화가로 17세기 최대의 화가로 손꼽히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유럽 회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교 신자였다. 반면에 렘브란트의 외가는 가톨릭 신자로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적 배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자랐다.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은 1667년경,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그림이다.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 1766년 러시아로 팔려 오늘날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은 두터운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들로, 특히 종교화에 있어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유화·수채화·동판화·데생 등을 포함하여 2천여 점이나 된다. 렘브란트의 작품 ‘돌아온 탕자’는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조용한 친밀감을 보여준다. 아들의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는데, 낡고 보잘 것 없는 신발, 굳은 살이 박힌 발. 누더기 같은 옷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입고 있는 풍성한 옷은 마치 어머니의 뱃속처럼 아들을 보호해주면서, 두 사람간의 일대일 관계를 감싸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관계는 당사자들끼리의 관계로. 제 삼자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옆에 저 있는 나이 많은 형은 마치 재판관 같은 자세로, 현재의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뻣뻣하게 서 있다. 그는 포옹을 원하지도 않으며,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하인들까지 포함하는 일가족으로부터도 한 걸음 물러서 있다. ‘돌아온 탕자’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에 있다. 이 손에 모든 빛이 모여 있고 이 그림의 다른 두 목격자들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쏠려 있다. 그 안에서 자비와 화해. 용서와 치유가 함께 담겨 있다. 아들 뿐 아니라 아버지도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거의 소경에 가까운 노인이 흐느끼면서 아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상처받은 아들을 축복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화가 렘브란트는 티투스라는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자식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으며 . 티투스도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런 렘브란트에게 이 작품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서양화로만 보던 성화를 한국화로 완성시킨 화백이 있다. 그는 ‘돌아온 탕자’의 또 다른 그림의 운보 김기창 화백이다. 6.25전쟁의 비극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작가가 1년여에 걸쳐 제작한 판화작품 '예수의 생애' 시리즈중 하나이다. 6.25전란 당시 1.4후퇴로 처가가 있는 군산으로 피난가서 처가의 창고 하나를 방으로 개조 해 3년간 피난살이를 했다. 그때 군산비행장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 곤궁한 시절 운보는 ‘예수의 일생’이란 대업을 완성했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예수와 당시 등장인물, 배경을 모두 한국인과 한국 복식, 배경으로 바꾸어서 성경의 내용에 따라 29점을 그렸다. 운보는 서울로 올라와 1954년 4월 임시로 꾸민 종로 화신백화점 5층 화랑에서 성화전(聖畵展) 을 열어 이 작품들을 처음 선보였는데 그 독특한 ‘한국화’ 작업이 신선한 화제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모든 연작의 배경은 조선시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 초가, 기와집이 세필의 한국화적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기독교의 토착화, 한국적인 정서,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서 그만의 운필과 구성 등에 있어서 특별한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운보의 ‘탕자 돌아오다’에서도 아들을 받아주는 아버지 외에 뒤에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들을 맞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 작품들은 예수의 일대기가 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과 비슷하다고 인식한 작가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2천년전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국내로 설정해 한국화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운보는 8세 때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청각장애를 일으켜 정상적으로 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한글과 일어, 한문 등을 익혔고, 그림에 대한 재능이 일찍 발견되었다. 운보의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개성의 정화여학교 교사를 지낸 바 있는 신여성이었다. 김은호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한 것도 어머니의 배려 덕택이었다. 결국 이 그림들은 그의 어머니와 스승, 그리고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빚어진 결과물이다. 그래서인지 1952년 1년여에 걸쳐 그려진 이 그림 이후로 운보의 작품세계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돌아온 탕자’처럼 하나의 문화권에서 다른 종교를 받아들일 때 그 토착화는 불가피하게 이루어진다. 기독교의 경우 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선교 방법으로서 토착화를 다양하게 시도한 바도 많이 있고, 특히 남미에서는 유럽과는 많이 차이나는 기독교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토착화된 기독교 예술의 모습 중에서 기존의 문화 속에 기독교가 얼마나 파고들었는지, 아니면 그 지역의 문화가 얼마나 많이 반영되어 스며들었는지를 주목해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럴 때 기독교 문화는 점차 확산 발전되어 간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7-10
  • [특별칼럼] 올드보이 전성시대, 언제까지인가?
    몇 해 전 교계단체가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기자들이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상에 대해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교회가 뼈아프게 들어야 할 대목이다. 응답자의 90%가 한국교회 분열의 가장 큰 이유를 지도자들의 명예와 욕심, 공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시도 때문이라 지적한 것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기자들은 한국교회의 연합이 잘 안 되는 이유에 대해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 때문이라 지적했고, 한국교회 연합의 가장 큰 걸림돌을 교권과 명예에 대한 ‘지도자들의 욕심’이라 답해 한국교회 지도자의 문제가 심각함을 엿보게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을 겪는 가장 큰 이유가 지도자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지도자들 때문에 개신교가 하나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노화되고 고령화되어 6.13지방선거에서 보듯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특정정당과 같은 이미지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고민은 젊은 다음세대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올드보이’(Old Boy)는 박찬욱 감독이 2003년에 찍은 영화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을 갇혀 지낸 남자가 자신이 감금된 이유를 알아내는 과정을 그렸다. 이처럼 기존세대에서 10년 이상 차이가 나며 소통이 되지않고 단절되는 세대를 가리켜 일명 ‘올드보이’라고 부른다. 한국교회의 문제중에 일부를 제외하고 후유증도 따지고 보면 일선 교회나 목회자, 교인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결국 연합기관의 사분오열 사태도 ‘지도자들의 문제’라 말할 수 밖에 없다. 교계에서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만들어지면 역할의 성격과 상관없이 정치적 수완이나 전직 경력이 화려한 정치꾼들과 노인들이 제일 앞줄의 감투를 차지한다. 나이와 교단 순에 의해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은퇴한 70대 노인이 지시하고 50, 60대는 애 취급받으며 움직이는 시스템이 된다. 몇 년 동안 그렇게 회의하고 밥먹고 모여서 한 일이 생산적이고 영향력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나 감투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고 패거리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렇게 지도자들이 문제를 만들었고, 지도자들이 문제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교계 기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가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는 말이다. 지도자는 연예인이 아니고, 지도력은 장식물이 아니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 자체가 목적이지만, 지도자는 현실을 타개하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지도력을 사용한다. 이런 지도력은 평상시에 단련돼 실전(實戰)에서 빛나고 결과로 평가받는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보듯 지도력이 장식물이 되면, 평상시 의전(儀典)에는 강해도 실전에서는 오합지졸 약한 군대가 되기 십상이다. 실전에 강한 군대의 의전은 소박하다. 겉치레가 아무리 화려해도 지도자로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하는 지도력은 허상(虛像)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마음은 ‘연합기관’을 떠나 있는 듯하다. 분열과 갈등, 허송세월 10년이다. 이쯤되면 부부싸움에 집나간 자식 돌아오게 하듯 지도자들이 ‘연합’에 진정성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연합하지 못하면 연합기관 간판내리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한목협의 성명처럼 ‘더 이상은 안된다’는 절박한 외침이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애써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겸허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머리를 맞대고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살길이 있다. ‘교단 연합기관’들의 통합논의가 몇 년째 매주 기사화 된다. 교계 연합기관들을 언론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비중 있게 보도해 준다. 지리멸렬한 연합기관이 한국교회의 구심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분열의 연장이었다. 이런 관심밖의 잊혀진 연합기관의 행사를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다. 살아온 경험에서 비롯된 이들의 교회와 시대를 향한 고민과 걱정이 왜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다. 왜 이들은 자신들끼리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 '한국교회를 대표하겠다'는 이런 여러 연합기관들을 보면 20명 가까운 공동회장들이 60대 중반에서 70대다. 총회장을 역임하고 물러났거나 아니면 은퇴한 분들이 모여 이런 역할을 하기에는 이미 올드하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이런 인적 구성의 기구는 '연합운동은 늙은 정치꾼 올드보이들의 전유물인가'라는 인상을 또 한 번 주게 된다. 이런 기구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얼마나 할지 모르나 이미 굳어버린 이런 경로당 이미지와 사고로 인해 그 폭(幅)을 좁히는 손실이 더 크다. 차라리 저분들이 나서서 아끼는 후배나 제자들을 설득해 이런 기구를 운영하게 한다면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기업이나 어떤 조직도 젊은 세대를 공급받지 못하거나 길러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지난 시절 어떤 기관의 대표회장은 소위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열심이었다. 교단을 만들기도 하고 10년 이상을 총회장과 대표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자리가 '벼슬'처럼 되고 ‘총회장’이 직업이 되었다. 그 단체 구성원들도 그와 함께 덩달아 늙었고 수는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세상 흐름과 감각을 따라잡는 게 어려워진다. 아무리 명분이 뛰어나고 인품, 신망이 뛰어나도 조직이 망하면 그는 최악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조금 젊다고 하는 60대도 마찬가지이다. 호랑이 사라진 골목에 토끼가 왕노릇한다고 막상 본인들이 60대에 들어서면 매스컴에 소개되는 조직을 만들어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 주력한다. 정책이나 경륜과 상관없이 인물위주의 이벤트라는 이미 선배 ‘올드보이’들이 했던 그 코스를 그대로 답습한다. 그래서 또 다시 ‘올드보이’의 시대를 만든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는 언제까지 장기적 정책 대안은 없이 1년직 자리나 인물중심의 ‘올드보이들’의 전성시대인가? 그래서인지 혼돈의 시대에 한국교회의 역할은 더욱 요구되지만, 현실에서 교회는 더욱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교회, 변화할 것인가? 변신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정 걱정을 한다면 정책 아젠다를 개발하고 후배들을 키우고 그들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 50대 대표, 40대 총무와 사무총장이라는 인적쇄신은 불가능한 것인가? 교단이든 기관이든 같은 자리를 세 번이상 역임했으면 그는 이미 원로다. 자신은 뒤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조직은 또 다른 세상의 변화와 함께 가야 성공할 수 있다. 아마 이런 글을 읽으면서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며 열을 많이 받으신다면 정말 죄송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사고(思考)의 올드보이’이다. 한국교회를 아우르는 유연성도, 사회변화를 읽고 받아 드리는 수용성도 떨어지니 그것이 그 수준이자 한국교회의 한계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6-19
  • 특별칼럼 한국교회 ‘싱크탱크’ 바로 지금이다
    최근 출간된 찰스 쿱찬의 『노원스 월드(No One’s World)』를 보면 ‘구심점이 사라진 세계’를 말하고 있다. 미국교회도 빌리그레함 목사 이후 분열했듯, 한국교회도 한경직, 조용기 목사 이후 중심이 될 좋은 지도자가 없이 연합과 공익적 가치보다는 개인이나 기관의 사적 이익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또한 연합사업을 진행하는 기관도 구심점이 없는 상황이다. 정치적 이합집산은 거듭하지만 별로 영향력은 없어 보인다. ‘연합’정신이 사라진 연합기관이라면 그것이 왜 필요한가 반문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창조적 지도자’나 ‘기관’의 출현도 절실하다. ‘창조적 지도자’는 큰 교회 목사가 아니라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지도자이다. 전략과 전술을 알고 시세를 읽는 자일 것이다. 이런 지도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나올 수 있는 토양, 즉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이 출현하고 커갈 수 있는 공론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70년대의 카리스마’가 통하는 시대가 지났다. 새로운 지도자는 어느 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토론과 헌신 등을 통하여 다듬어 지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국교회라는 정체성을 몸으로 체감하므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지금의 교계 흐름이 상당히 우려스러운 것은 치열한 논의구조를 외면하는 것이다. 현재의 모든 의사결정 구조, 교회가 접하는 이슈에 대한 논의구조가 전근대 방식이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 운영이다. 그리고 행사를 단회적 이벤트로 치룬다. 시대 흐름에 대한 통전적 역사 이해가 없는 공시적 행사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인지 점점 동력이 떨어지고 ‘연합’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몇몇 사람들의 사진찍는 행사에 “돈내고 들러리 서라”는 식이라서 “‘연합’이라는 자리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중견목회자들은 말한다. 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고질병중 하나는 한국교회에 다양한 그룹, 엄청난 인적 자산이 있으면서도 ‘공공성을 전제로 한 연합’의 부재이다. 그로 인하여 많은 낭비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기관이나 일부 인사들은 자신만이 모든 것을 해야 하고, 자신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 그 정도가 지나치면 다른 기관들은 자신의 통제하에 있기를 바라면서 될 일을 안되게 만드는 독특한 은사가 있다. 이건 엄청난 낭비이자, 사적인 욕심일 뿐이다. 나는 못하지만 다른 기관이나 다른 사람들이 하려할 때 격려하고 지원하며 축복할 수 는 없는 것일까? 이런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국교회는 발전이 있지 않겠는가? 한국교회에는 많은 연합기관들이 있다. 그 기관들이 아젠다에 대해 정책적 연대 혹은 협의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능이 마비된 것으로 보인다. 기관은 많은데 어느 기관도 그런 기능, 제 구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런 싱크탱크를 지원이나 연대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기관이든 어디는 사람을 키우지 않았으니 정작 브레인이나 논객도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방향감각 제로, 존재감 제로의 상황이다. 한국교회, 사회발전에 기여하려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런 큰 그림중 하나가 싱크탱크를 만드는 일이다. 지금처럼 예측불능, 통제불능의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략과 전술을 갖추고 그 역할에 맞는 인재들을 적재 적소에 배치하여 사역들을 철저히 분산해야 한다.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듯 운행되는 그런 구조가 건강한 사역구조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발전을 위한 ‘한국교회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싱크탱크란 특정 사항에 대한 조사·분석 및 연구 등을 통해 각종 정책 개발뿐 아니라 정책 실행 피드백, 지속적인 개선 유도까지 수행할 수 있는 고급 두뇌집단을 일컫는다. 교단과 교파, 목회자와 평신도적 입장을 초월해 모인 브레인과 논객, NGO그룹들이 신앙, 그리고 실천력을 성경적으로 걸러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대안을 모색하고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공교회의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기관과 사람들이 네트워크화 할 수만 있다면, 싱크탱크가 출현한다면 상상외로 큰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공공적 목표와 가치를 펼쳐서 함께 공유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가려고 하는 새로운 발상의 시도가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정치 지향과 편향성, 개인의 이익만 제외한 비정치적이고 균형감각을 지닌 다양한 인물, 각자가 가진 재능과 은사, 헌신을 전제로 ‘다양성 속에 연합’을 도모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그룹이 포진한다면 이처럼 환상적 팀일 수 있겠는가? 구성원이 꼭 목사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 사회를 70년대 신학교에서 배운 단순한 목회자적 사고와 수준으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평신도들로 10년이상 한분야에 헌신해왔던 각계 각층 전문 사역자들이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자리가 아니라 사역이 더 중요하고, ‘다양한 사고와 다양한 접근 방식을 인정하고 상대방과 함께 가야 산다’는 일명 ‘상생 소통법’을 가진 이들이 모이지 않으면 이대로 미래를 열 길은 없다. 지금 교회는 과연 기독교 가치관을 수호하며 미래를 열어갈 전략실 싱크탱크를 보유하고 있는가? 지금이 한국교회 싱크탱크가 출현해야 할 타이밍이다. 미래사회에 한국교회의 새로운 역할을 기대될 수 있다. 무엇보다 여러 사안들이 쌓여 있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두뇌집단을 모아 정책적 접근이 가능한 싱크탱크를 만들고 인재를 키워낼 적기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며 새로운 시대적, 사회적 과제에 눈을 돌려야 할 때를 보내고 있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5-04
  • 특별칼럼 한국교회 미래를 위한 보수와 진보의 역할
    한국에 개신교 복음이 전해진지 134년이 되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한국역사와 함께 영욕을 경험해 왔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개화와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하면 일제 치하에서 일제의 식민정책에 순응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사회변동의 주체로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했는가 하면 체제에 순응하면서 변화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현재의 한국교회는 양적으로는 성장이 멈춰버렸고 최근에는 쇠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고, 질적으로는 사회적 공신력과 신뢰감을 상실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한국교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반성적인 평가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에 한국사회의 근대화 혹은 개화에 중심적인 역할을 함으로 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형태로 사회적 변형을 주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 부흥운동의 형태로 개인들의 심리적 회심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일부가 동화되어 신앙적 순수성과 사회적 책임성을 상실하는 불운을 겪음으로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한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적으로는 내적인 교파분열과 갈등으로, 사회적으로는 독재정권을 비호함으로 사회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그룹은 새로운 신앙운동, 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함으로 교회는 오랜 군부독재 체제 아래서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박탈감과 소외감의 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것은 사회치유와 통합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같은 기간동안 진보그룹은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평등화, 사회적 복지화, 문화적 성숙화, 창조 환경의 보존 이라는 시대적 역할을 수행함으로 한국사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교회가 개인의 영혼구원과 양적인 교회성장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그리고 많은 교회가 인적, 물적, 시설 자원에 있어서 점점 풍요로워지면서 사회적 책임을 점차 외면하게 되었고, 이것은 사회적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의 둔화, 사회적 공신력의 약화라는 양적, 질적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놀랍게 발전해 왔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 과정은 눈부신 사회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파생된 수많은 사회문제들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어느 정도 수준이고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해야 하는지 주목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이제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며 새로운 시대적, 사회적 과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자랑스러운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현재 보수그룹에는 한기총, 한기연(구,한교연), 한교총 등이 있고, 진보그룹에는 교회협이 있으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전후로 ‘한지붕 두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드는 기구 ‘통합’의 최고 기회였다. 명분이 절정을 이루었고 한기총과 교회협의 통합논의가 양측의 합의하에 정관과 단체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부의 ‘제 밥그릇 챙기기’의 벽에 가로막혀 결국 통합의 문앞에서 깨어져 10년을 허송세월하다 한기총은 분열 하며 보수그룹은 그새 두서너개로 늘어났다. 그래서인지 ‘연합기관’의 정체성이나 성격규명과 더불어 정책적 방향성을 제시하지 하지 못하다보니 때론 극우나 극좌로 치우쳐 한국교회의 보편적 가치나 상식에 반하는 일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하곤 한다. ‘연합’기관이라고 해도 자기 업무가 뮌지도, 자기 책임이 뮌지도 모르는데 기인한다. 종로 5가 바닥에서 전직 총회장, 총무라고 명함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브레인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다. 정신 똑바르게 차린 열사람만 있어도 이 지경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감 제로, 거의 투명기관이다. 한기총과 한교총 등 연합기관의 통합논의가 또 다시 시작됐다. 기구통합, 좋다. 합의서에 사인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양측이 상호 공감대를 형성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책적으로 우리는 어떤 기관을 만들고자 하는가? 하는 ‘정체성’과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하는 ‘방향성’,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사역성’, 이 세가지에 대한 공통분모는 진지하게 논의하고 가야 한다. 또 혹 서로 다른 기관으로 간다 하더라도 한국교회가 부딪히는 아젠다에 대해 정책적 연대 혹은 협의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능도 마비된 것으로 보인다. 기관은 많은데 어느 기관도 그런 기능, 제 구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남과 북도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는 상황에서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한국교회내 보수그룹과 진보그룹은 언제까지 각자도생 할 것인가? 그리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정책협의를 하는 자리는 요원한 것일까? 지금이 상대의 다름을 이해하고 보수와 진보가 상생의 길을 모색할 때다. 그래야 미래사회에 한국교회의 새로운 역할이 기대될 수 있다. 무엇보다 과학기술문명이 가져올 수 있는 생명파괴와 환경파괴의 문제, 정보화 시대에 생겨날 수 있는 통제와 비인간화의 문제, 점 점 더 벌어지는 양극화의 문제, 민족주의의 강화로 인한 국제적 갈등의 문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인한 공동체성 파괴의 문제, 맘모니즘에 빠져드는 도덕성 붕괴의 문제, 통일시대 복음통일의 문제 등 여러 가지 현안이 쌓여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변신을 통해 사회발전을 위해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정책협의의 장을 마련하는데 상호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미래에 한국교회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며, 교회가 그 본질과 목회생태계를 회복하는 데로 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4-24
  • 특별칼럼 일제치하의 한국교회 핍박
    1910년 경술년 ‘국치조약’ 즉 ‘일제에 의한 병탄조약’이 있었다. 8월 16일,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의 침략시대 36년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식민지정책에서 처음부터 ‘동화정책’을 넘어 곧 한민족 자체를 해체시키려는 ‘민족말살정책’에 목표를 두었고, 전 식민지기간 한국교회를 식민지 통치의 거침돌로 인식했다. 즉 한국교회를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불령선인의 집단’으로 규정했다. 일반적인 침략사례로 볼 때 침략은 수탈과 예속적 관계로 그치지 그들의 고유한 관습과 종교, 교육까지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달랐다. 그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충실한 신민’을 만드는데 있었다. 매켄지 기자의 보고서『조선의 비극 』에 따르면 한국을 자국의 영원한 식민지로 복속시키기 위해 한국민족 자체를 해체·동화시키려는 ‘민족말살정책’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한국교회를 경계와 주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교회가 가진 유일신 교리적 특성과 세계사적 역사성 외에도 한국내 기독교의 위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는 개항이후 일본의 진출과 동시기에 한국에 수용되었다. 비록 활동 영역이나 목적은 달랐으나 결국 동일한 역사의 장(場)에서 각기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실현 시키는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이후 정치력이 일본에 쏠리게 되면서 자연히 기독교세력은 상대적으로 반일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이같은 성격은 결국 한국기독교의 성격을 분명히 하며 발전된 결과를 가져왔다. 즉 한국기독교가 기독교계 신교육기관을 통해 자유·평등사상과 더불어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점차 민족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새로운 세계관의 안목을 가지게 된 것이다. 1890년대 이후 민족 모순에 대한 민족적인 인식이 고양되었던 시기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1900년대 한국근대사의 초기에 접어들 때 기독교 교세의 급속한 확장과 동시에 민족적 자각의식이 대중속에 확산되었는데, 그 중심적인 집단이 바로 교회였고 그 주체가 기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 기독교를 향후 식민지 지배의 최대 거침돌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일제의 경계와 적대적인 기독교 인식을 가져온 사건이 ‘강제병합’직전에 일어난 일련의 암살사건과 ‘노도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갔던 기독교 교세의 확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기독교의 급성장은 일제의 식민지화에 큰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의 기독교 핍박은 회유와 탄압이라는 양면정책으로 진행되었다. 회유책은 대체로 외교권을 박탈한 통감부 기간에, 탄압책은 ‘합방’이후 3.1운동이전까지 행해졌다. 1909년 10월 이토오 히로부미가 살해된 이후 일련의 배후세력으로 기독교를 지목한 일제는 기독교 단체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바로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려는 성급함을 나태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1910년 가을, 이상재, 양전백, 최병헌 등 당대 기독교지도자인사 19명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환대하는 등 회유정책에 공을 들인다. 일본 조합교회에 이시기 집중적으로 재정적인 특별지원금을 풀어 직접적인 탄압정책을 유보하고 한국교회의 와해와 분열, 기독교인을 회유하는 전략을 집요하게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이 민족계몽과 개화의 문을 열고 있었다. 1900년대 초기 기독교 사립학교들이 대단한 속도로 파급되자 이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통감부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고, 민족주의계 사립학교를 대폭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학교의 운영자 명의를 치외법권을 갖고 있는 선교사들의 명의로 변경함으로써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 당시 마펫선교사가 134개교, 노블선교사가 74개교, 쿤스선교사가 35개교 등 미션스쿨을 운영할 정도였다. 한국교회 핍박이 더 심화되고 탄압으로 전환된 것은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만주시장권과 만주철도경영권 문제로 미·일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한 것과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반기독교적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강제병합’직후 세계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외국 선교사들과 기독교 박해를 목적으로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이 사건은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하던 신민회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 조작하여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으로 일제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비도덕성을 전세계에 드러내는 한편 기독교 대박해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이 사건은 한국 교회의 신앙의 심도를 더욱 깊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한국기독교의 역사성과 민족성을 한층 더 공고히 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일본군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 20여명을 학살한 것만이 아니라, 간도(間島) 용정(龍井)시를 중심하여 수천 교인들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다가 17명이 총살당하였다. 청산(靑山)에서도 백운교회당이 불태워졌고 부속된 학교 교사도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이때 9명의 교인이 총살되었다. 새 노루바위(間獐岩)에서도 교회당이 소실되고 33명 교인이 학살되는 참상을 빚었고 양무정자(楊武亭子)교회당도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렇게 일본군은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둔 채 불을 지르고 총을 쏘고 칼로 찌르고 무차별 학살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듯 일제의 한국교회 핍박의 절정은 ‘신사참배’였다. 일제는 한국인을 강제징용, 노역장으로 끌고 가며 신사참배를 강요, 억지 충성을 요구했다.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사상, 자유를 말살하기 위하여 남산을 비롯한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참배할 것과 예배 시작에도 궁성요배를 강요하였다. 더 나아가 찬송가에 기미가요· 우미유카바· 황국신민서사 등을 앞부분에 페이지 표기없이 강제삽입하고 예배시 부르게 하였고, 예배순서지에는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신사를 향하여 참배하는 동방요배와 기미가요, 황국신민서사를 반드시 하도록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배를 천황을 섬기며 황국신민을 만들고 대동아 건설에 참여하게 하는 장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성서강의회’라는 이름으로 경찰서장과 목사가 함께 인도하는 집회를 열어 일제가 벌인 전쟁에 참여를 독려하였다. 일제의 천왕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는 한국교회의 순교신앙과 함께 공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노골적으로 억압해서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끊고 고립시켜 ‘황국신민화정책’과 ‘침략전쟁수행’에 순응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일제 36년간 사상 유례가 없는 잔인하고 원색적인 방법으로 일제는 한국교회를 짓밟으며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갔고 신앙부흥과 배일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사하기도 하였다. 순교자의 피가 한국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 ‘부흥’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다. 한국교회가 꼭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는 ‘국치조약’과 ‘신사참배’, ‘6·25’이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 한국교회는 핍박중에도 십자가정신으로 실의에 빠진 민족에게 복음을 통해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각종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지도자를 배출하고 지도력을 양성하여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해 왔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가진 끈기와 저력으로 오늘 한국교회가 회복해야할 것, 즉 ‘순교신앙’이다. ​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04-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