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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다수(多數)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민주주의에서 다수는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것은 민의의 대변으로 누구도 거역해서는 안되는 민주질서의 기본이요, 법적 근간을 이루는 기둥이다. 이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포용하며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민주사회이다. 그래서 이 민주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민의를 대변하는 이들이 법을 만들고, 엄격한 선발 절차를 거친 판사들의 입법부가 법을 수호하며, 국민이 그 법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 앞뒤에서 법의 집행을 방해하는 자들을 척결하는 이들이 경찰과 검찰이 있다. 그러나 삼권분립에는 하나의 불변의 가치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양심에 기초한 정의'가 모든 것의 시종(始終)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다수의 의사가 결집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다수가 정의롭지 못하면 그 다수는 폭력이요 반인륜적 패역이다. 이런 다수의 폭력이 만든 역사는 일인 독재가 가져온 폐해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 현실이 이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다수당이 된 야당은 견제 불가의 절대 우위의 힘으로 입법권을 행사하고 있다. 행정부는 물론 사법부를 통제하고 압박함으로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사태가 오게 한 여당과 행정부의 책임은 나중에 따질 것이지만, 삼권분립에서 각 권력에는 도덕성과 책임이 따르는 국민적 위임이 있는데 이것을 자파 자당 그리고 지지 팬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는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반민주적 배신행위이며, 정치적 패륜이라 할 것이다. 검찰이 법과 원칙에 기초한 수사를 못하도록 검사를 겁박하고 탄핵한다면 이 땅의 질서와 안녕은 누가 지켜내는가? 판결이 마음에 안든다고 법관의 양심과 소신에 따른 판결을 물리적으로 위협하고 비난한다면 이 땅의 정의와 가치는 누가 지켜 준다는 말인가? 모든 판,검사가 법과 원칙에 정의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들의 윤리적인 가치를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에 안든다고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핍박하고 무찔러버린다면, 그것도 다수의 힘으로 장악한 입법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법을 바꾸고 집단의 힘의 위력으로 개인 판,검사를 찍어누르면 그 피해는 누가 당하게 되는가? 엄연히 삼심제가 있어, 혹시 있을 지 모르는 하급심의 오판을 살펴보는 정당한 이의제기 신청제재도가 살아있는데, 다수의 힘과 권력으로 사태를 뒤잡으려는 것이 바로 민간 쿠테타 음모요 시도인 것이다. 법은 양심과 정의의 편일뿐, 어느 집단의 편이 돨 수 없다. 그것을 믿기에 법의 보호 아래서는 법 위에 사람없고 법 아래 사람없다는 가치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분명히 지금 민주당은 잘못하고 있다. 국익앞에서는 정파가 없어야 하고 침략 위험에 대해서는 여야가 따로 없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야당은 오직 유일한 목표, 이재명 대표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또 챙기고 있다. 영부인의 잘못에 대하여 필자는 아는 것이 없지만, 명백한 허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국정을 멈추게 하고 대통령의 통치를 가로막아설 만큼 중대한 일인가?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줄도산을 하고 있고,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이는 아랑곳없이 죽기살기로 대통령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이 이재명 대표 살려달라는 애절한 몸부림으로 보여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수사 검사를 탄핵하고 유죄를 선고한 판사를 조롱하고 폄하하는 모습도 이제는 살려달라는 비겁한 협박으로 보여 한심할 뿐이다. 다수는 겸손해야 하며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음으로 품격을 지켜야한다. 지금같이 시정잡배만도 못한 처신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저급함은 이를 지켜본 국민들이 처결할 것이다. 이제 절대 다수 야당의 야당다움은 거칠고 무례한 전투력이 아니라, 겸손하고 단호하게 양심과 정의의 편에 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다수를 기뻐하지않으시는 하나님이 그 다수를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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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11-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눅 12:35-40)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더 살기 좋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역사의 수례 바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시계는 종말이 가까웠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재림을 준비하며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절)고 말씀하심으로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는 제자의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대비하여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감당하며 깨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출 12:11).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함으로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심판 즉 예수님 재림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받게 될 복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이란 더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보다 재림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 초기 교회 목회자나 성도들은 지진이나 천둥 번개 소리나 전쟁의 포성의 소리를 듣고도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냐고 집이나 교회 밖을 나아와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너무 세상적인 관심에 깊이 빠져 있어서 그만큼 주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이 훨씬 멀어졌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확고히 서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간 종들에게 주인이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주인으로부터 종이 수종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37절).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깨어서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귀하게 여겨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섬김이 만만찮은 순간도 있을 것이고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도착했을 때 그렇게 깨어서 기다리는 종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38-40절). 분명히 오신다는 것은 예고되어 있지만 그 정확한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때와 기한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예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처럼 풍요로운 세상에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쾌락과 염려가 우리의 천국 소망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물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재림에 대한 준비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의 평안과 성공 세상의 안일한 삶이 목표인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과 같이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라면 영적인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그때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십시다.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재림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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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책이 풍겨주는 가을 향기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해 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 시몬, 너는 아느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 낙엽은 날개 소리와 /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 시몬, 너는 아느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가까이 오라 /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가을길은 낙엽길과 같습니다. 단풍잎을 밟으며 가을길을 걸으면 뭔가 숙연해 집니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붉고 길은 스산합니다. 안도현 시인의 말마따나 나뭇잎이 가을엽서가 됩니다. 우리는 그냥 낙엽을 밟는 게 아니라 가을엽서를 밟는 것입니다. 낙엽은 정말 향기로운 가을향기를 물씬물씬 풍겨주죠. 그러나 우리는 가을낙엽이 주는 향기로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가을에는 책 읽기가 너무 좋은 계절입니다. 하늘이 푸르듯이 책도 푸르게 보이고 단풍이 아름답듯이 글씨가 어쩌면 그렇게 곱게 보이는지요.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에서 나오는 냄새가 가을 향기처럼 느껴집니다. 요즘 공원이나 기차 여행길에서 보면 책 읽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스마트폰에 집중을 합니다. 물론 저도 스마트폰 검색은 하죠. 그러나 스마트폰 검색 가지고는 다분히 정보만 얻을 수 있지 향기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하여 알게 된 책을 구입해서 책장을 넘길 때야 책 향기를 느끼거든요. 저는 요즘 무척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일로 많이 고민하고 애태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있을 어떤 행사에 우호적 반대를 해야 할지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야 할지 어제와 오늘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를 하고 교계의 몇몇 분들은 같이 하자고 주문을 합니다. 또 연합기관 통합 문제도 이렇다 할 해결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심란할 때 저는 책을 읽습니다. 쉬운 책은 빨리 읽히고 어려운 책은 늦게 읽히지만, 쉬운 책이건 어려운 책이건 책을 읽는 그 순간은 얼마나 마음이 평온하고 코끝에 향기가 묻어나는지 모릅니다. 특히 이소동집사(숙명여대 중문과교수)님이 쓰신 ‘공맹과 노장’이라는 책은 어려운 내용인데도 감탄사를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힘들면 책상에 앉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독서 탐닉가가 되죠. 그 많은 독서의 힘이 설교의 내용을 더 탄탄하게 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물론 목회자가 힘들 때 기도해야죠.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죠. 그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사실 일반 책을 읽는 것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는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모릅니다. 눈이 침침하도록 성경을 읽죠. 그 장을 읽다가 원근통시법적으로 그 장과 관련된 여러 편의 성경을 연구합니다. 또한 주석을 묵상하면 성경 본문이 제 안에서 거의 완벽하게 흡수가 되고 용해가 되어 새로운 창작의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어도 제가 읽는 책보다 읽지 않는 책이 훨씬 더 많고 성경도 제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끝없이 독서를 할 겁니다. 특별히 가을일수록 푸른 하늘과 책장을 넘기며 독서할 겁니다. 그리고 가을 길을 걸을 때 모든 잎새 하나하나가 가을엽서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길을 걸을 것입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도 종이 위에 가을 낙엽 향기가 폐 속 깊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 좋은 계절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양서를 읽으며 가을엽서를 이웃들에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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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1-24
  • [언론회 논평] KBS의 여전한 동성애 사랑과 방송물 방영
    지난 14일 공영방송 KBS 1TV에서는 동성애를 알리는 방송을 하였다. KBS는 다양한 가족을 알린다며, 미국에 있는 동성애 가족의 일상사를 방송하였다. KBS는 ‘다큐인사이트’를 통하여 이 방송을 했는데,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남성이 동성 결합을 하여 살면서, 두 쌍둥이 여자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아이들에게 엄마는 없고, 아빠와 대디만 있다. 사실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애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남성 동성애 가정에서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여느 가정들처럼 자녀를 가지고 싶어 하고, 가족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 충족되겠는가? 또 그들을 통하여 양육되는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여기에 나오는 한 사람이 말하기를 ‘사랑하면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공영방송인 KBS가 국민들의 수신료를 통하여 이런 방송물을 내보내는 것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이고, 또 조장하고 홍보하는 꼴이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용인되지 않는 동성애 가정을 방송한다는 것은, 곧 KBS가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더군다나 이들은 대리출산으로 아이들을 갖게 된 것도 방송 내용 가운데 나온다. 물론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한 제도가 있는 미국의 어느 주에서는 허용이 되는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 내용까지 슬쩍 끼워서 방송한 것이다. 이 방송에서 동성애자의 친척이 왔다 돌아갈 때, 아이들이 공항에서 엄청 울어서 공항 직원까지 나와서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다. 아이에게는 반드시 엄마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륜이고, 천륜이다. 그것을 KBS는 간과(看過)하고 있다. KBS의 이런 방송은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도 다양한 가족의 형태라는 빌미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사례들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할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아이들에게도 ‘아빠’와 ‘엄마’를 가진 가정에서 태어나야 할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왜 ‘아빠와 아빠’ 혹은 ‘엄마와 엄마’라는 비정상의 가정들을 만들어 내는데 공영방송 KBS가 앞장 서야 하는가? 거기에다 KBS는 가톨릭 성당에서 아이들이 세례를 받는 모습을 방영한다. 동성애는 종교적 영역에서도 인정해야 한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러나 함부로 종교를 끌어들여, 간접적으로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동성애는 성경에서 허락하지 않는 행위이기에, 이를 따르는 것이다. KBS는 이런 방송물을 제작한 관계자들을 엄중히 문책할 것이며, 다시는 이렇듯 동성애를 위한 방송물을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KBS는 방송 말미에 이런 방송물은 국민들이 낸 ‘수신료로 제작한다’는 문구를 빼놓지 않는다. 너무 뻔뻔하다. 언제 국민들이 KBS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는 방송물을 제작하라고 수신료를 낸단 말인가? KBS는 그동안 편파와 왜곡과 불공정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사장이 바뀌고 나름 대로 개혁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방송물을 내보내다니 크게 실망이다. 국민들은 KBS가 가정과 우리 사회를 해체시키는 동성애 방송을 하는 것을 결단코 원치 않는다. 공영방송 KBS, 아직도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 미래•발전적인 국가를 만들어 가는데 방송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른단 것인가? 이미 국민들은 동성애 옹호나, 동성애자들이 가정을 이룬다는 식의 허황된 말들에 아주 식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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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11-20
  • [언론회 논펴] 나라를 위태하게 하고 국민을 무시해도 되나
    최근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매우 위험하고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지난 9일 민주노총은 서울 도심에서 윤석열 퇴진 집회를 열고,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충돌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 105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쌍방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민주노총이 현재 하고 있는 집회도 국민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은 국가의 지도자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그리고 세력만 믿고, 대통령을 퇴진하라는 것은 국민들과 헌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이 시위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6일 간첩 사건에서 4명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왔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았다. 다른 사람은 각각 7년과 5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그중에 총책을 맡은 사람은 노동계에서 오랫동안 암약해 왔는데, 평택 미군기지, 오산 공군기지, 평택화력발전소, LNG저장탱크창고 배치도 등 국가 기간망 마비를 위한 북한의 지령에 따라 활동해 왔다. 그런데 이들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에 몸담고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조직국장, 기획국장, 교육국장, 조직쟁의국장, 보건의료노조 조직실장, 금속노조 부위원장 등 핵심 직책을 가지고 대남혁명을 대행해 온 것이다.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민주노총이 북한 정권을 대리로 하여, 국가 전복과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것을 국민들이 인정할까? 또 우려스러운 일이 있다. 현재 야당 대표가 여러 가지 범법의 의혹을 받고 재판 중에 있는데, 그의 무죄 판결을 촉구하는 서명이 지난달 8일에 시작하여 한 달이 조금 지난 이달 11일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야당 대표에 대한 1차 판결은 이달 15일쯤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그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법부를 위협하는 행동은 옳지도 정당하지도 못하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법치주의’ 국가이다. 누구라도 범법을 하게 되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루게 된다. 만약 야당 대표에게 죄가 없다면 법정에서는 무죄를 선고할 것이고, 죄가 성립된다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극렬 지지자들이 나서서 무죄 판결을 촉구한다면 사법부가 왜 필요하며, 법은 왜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지지도 필요하지만, 결격사유가 명백히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그를 지지하고 감싸서는 안 된다. 그런 일들을 국민들이 걸러내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망하는 것이고, 심각한 독재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꽃피게 하는 것은, 당연히 국민들의 몫이다. 국민들조차 정의와 공정을 무시한다면, 결국 국가는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가 없게 된다. 우리 국민은 120만명의 민주노총이나 특정 정당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가서는 안된다. 국민들의 바른 목소리를 통하여 잘못된 길로 가는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한다. 법의 잣대가 일정하지 않으면 그 법은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권력자들에게는 오히려 도피처가 됨을 알아야 한다.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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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11-20
  • [언론회 논평] 노벨문학상 작품이면 청소년들에게 다 필요한가?
    지난 10월 초에 한국의 여류 작가가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한국 사회가 시끌하다. 한국인으로 처음이고, 동양 여성 처음으로 그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불과 수일 만에 100만 부가 넘는 책이 팔리는 등 노벨문학상이 갖는 파급력은 대단하다. 그러나 이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분명해졌다. 어떤 이들은 ‘문학의 고급화를 상징하는 봉우리 같은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청소년의 영혼을 비릿한 정O 냄새로 타락시키는 패륜의 문학’이라고 부정한다. 거기에다 교육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진보 계열의 모 교육감은 ‘치열한 역사의식과 문화·예술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으로 그 작품을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는 국민신문고를 통하여 그 여류 작가의 책을 초·중·고교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 비치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또 다른 차원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의역과 오역의 합리적인 절충점을 찾는 것이 한국 여류 작가의 노벨상이 남긴 또 다른 과제’라는 말도 나온다. 이 작가의 작품들이 남긴 과제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전국 학부모 단체가 주장하는 ‘학생들의 발달 단계에 맞지 않는 도서이기에 학교 도서관에 비치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또 하나는 역사적인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구성했는데, 그것이 실제적 진실과 다르며 소문으로 떠돌던 내용들까지 표현하여 역사적 왜곡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 염려는 충분히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세계인들이 언제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을까? 그런데 소설적 서술들이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그것을 한국적 역사 상황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개연성이 매우 높다. 소설이 역사 교과서보다 더 확증을 발휘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보고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작품을 학교의 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 비치하는 것은 안 된다고 본다. 소설과 역사를 다른 것으로 구분할 정도로 학생들이 분별력을 갖추기에는 이르다고 본다. 작가가 표현한 약자들의 트라우마는 결국 강자들이 입힌 폭력이며, 용서받지 못할 행동인 것으로 각인된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와 국가를 지키려는 군인과 경찰을 ‘악마’로 만들어 간다면, 국가에 대한 부정과 반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그런데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의 대런 애스모글루 교수와 사이먼 존슨 교수, 그리고 시카고대학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세계 최빈국에서 50년 만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의 경제 상황을 연구하여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들은 한반도의 두 체제, 우리 대한민국과 북한 체제의 경제적 상황을 설파하였다. 그들은 2020년 기준으로, 한국과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을 조사했는데 한국은 1,933조 2,000억원이고, 북한은 34조 7,000억원으로 북한은 남한의 1.8%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리적 위치, 천연자원, 문화적 특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남과 북이 정치, 경제 제도를 다르게 선택한 결과인 것이다. 북한이 선택한 공산주의 체제는 소수 엘리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착취적 제도’였으나, 한국은 전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였다. 이것이 한국을 세계적 경제 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이다. 202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국의 여류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그런데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오늘날 한국이 세계 속에서 성공하고 강대국이 된 것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의한 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 여류 작가가 이런 소설을 마음 놓고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국가 제도와 이런 제도를 과감히 받아들인 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한 뒷받침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문학과 경제는 다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인으로 느끼는 자긍심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이 받은 상에서는 논란이 생기고, 외국인들이 한국의 상황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로 받은 상에서는 오히려 자긍심이 생긴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작이라고 하여 무조건 어린 학생들에게 읽혀야 된다는 생각은 미처 양생(養生) 되지 않은 콘크리트에 또 다른 복층을 연거푸 쏟아부으려는 무리함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잘못된 욕심이기에 자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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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11-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천국 갈 준비’(수 23:14-16)
    천국 갈 생각을 하고 살면, 오늘이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을 배우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 죽은 후에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는 천국 가기 전에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 알려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온 세상 사람이 가는 길로 갈 때가 되었으니, 당신들은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이 명하신 언약을 꼭 지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이어서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천국 갈 준비를 잘하였습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롭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끝이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벧전 1:3) 우리가 가진 산 소망은 모든 고통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죽음이란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형벌적인 요소가 죽음에 의해서 제거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로 변화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 12:23) 그래서 죽음은 성도에게 종말이 아니라 완전한 새 생활의 시작입니다. 성경을 보면, 죽은 자를 잠든 자로 말씀하셨습니다.(살전 4:13-14) 야이로의 딸이 죽어서 모든 사람이 울며 통곡할 때 예수께서는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눅 8:5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많은 사람이 슬퍼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 1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는 것은 잠이 드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단지 쉼표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를 그치고 참 안식을 얻기 때문입니다.(계 14:13) 그 안식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아주 없어지는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에 두고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구원의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시고 떠나실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이 되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롭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천국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약 4:14) 요셉은 천국 가기 전에 자손들에게 이집트를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행해 가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해골도 이집트 땅에 매장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 묻으라고 당부했습니다. 즉 요셉은 자손들에게 현재의 삶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도록 유언한 것입니다.(창 50:24-26) 우리도 요셉처럼 자손들에게 확실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있을 때 장차 상속받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보면,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며, 불의한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천국 갈 준비를 잘하는 것입니다.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천국에 갈 준비를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고난도 당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모든 악으로부터 건져주셔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보호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딤후 4:18) 천국은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계 21:4) 그래서 천국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소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때문인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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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영광이었지만 참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한교총 주관으로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한국교회 비전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2부에 ‘한국교회 대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여러 명이 수상을 했지만 그중에 저도 ‘목회와 연합’ 부문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시상식이 끝나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교계 어느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상 받는 모습이 너무 불편해 보이더라고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제가 바로 대답했죠.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불편한 자리였습니다. 제가 한국교회 연합에 관해 무슨 한 일이 있어야지요. 제가 지금까지 여러 상을 받았지만, 지금처럼 어색한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목회와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서 잘하라고 격려해서 주신 상이겠지만요.” 저는 수상 통보를 받고 한교총 사무총장에게 “제가 그 상을 안 받을 수 없느냐”고 두 번이나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장종현 대표회장님께도 전화를 드렸습니다. “존경하는 대표회장님, 제가 꼭 이 상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너무 부담이 됩니다. 제가 한 일이 있어야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요.” 그러자 어르신이 말씀하시기를, “소 목사처럼 수고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가 그 수고를 다 알고 있는데... 어색해하지 말고 그냥 오세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코로나 이전부터도 한국교회 연합을 줄기차게 외쳐왔습니다. 물론 연합기관은 하나가 안 됐지만, 정서적으로 하나 될 때가 많았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비롯하여 반기독교 악법을 막고 한국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데 정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가시적 성과는 많이 냈지만 가시적 성과는 아직 거두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도 회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닌가. 구호만 외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닌가...” 올해도 연합기관이 하나 되길 기대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과거에 연합사역을 열심히 한 걸 지금 대표회장과 상임회장들이 기억해 주고 알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세월은 여전히 제 편이라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저대로의 길을 갈 것입니다. 장소가 다르고 출발점이 달라도 결국은 건강한 교회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목표가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난주 밤 예배 때에는 이종민 목사의 주선으로 조영길 변호사님의 특강을 듣게 됐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밤 예배에 이언주 국회의원을 좀 오시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국회의원이 낮예배는 몰라도 밤예배에 나오는 건 흔치 않거든요. 그래도 이언주 의원님께 “교회에 오셔서 조영길 변호사님의 강의를 듣고 소감이나 소신을 이야기하든지 아니면 3자 토론을 하면 좋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기꺼이 와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언론에 아주 뜨거운 관심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제 아들이 저를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데 이번에 너무 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동영상을 보면서 좀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언론에서는 집중보도를 했는데도 제가 보기에는 불편하더라고요. 사실은 그 순간이 영광스럽고, 한국교회의 공익을 위한 자리였는데 녹화영상을 다시 보니까 제가 아는 것이 많아서 그런지 좀 잘난 척을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도록 놔둘 일이지 제가 너무 나섰지 않느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리허설도 없었고, 편집을 잘못하면 또 이상하게 될까봐 현장에서 주고받은 내용을 그대로 유튜브에 올린 것이니까 그런 느낌이 든거죠. 그래서 조영길 변호사님과 이언주 의원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있고 죄송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어쨌든 그 시간이 큰 물길을 바꾼 위대한 자리였지만, 제 마음속에는 어색함과 불편함이 계속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하나님의 종이면서도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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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님만 바라봅시다’(히 12:2)
    인생을 살면서 자기 한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의 한계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하고 주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를 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낙심하고 좌절하며 무기력해지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생명과 능력을 얻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평안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면 어떤 도전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세상 사람과 다르게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또한 인생에서 방향을 잃어버려 방황할 때에 세상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스티븐 고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에 보면 ‘시간관리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관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얼마나 바쁘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일어설 수 있으며 방향과 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 62:1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만 바라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까?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5:8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정함이 없어 주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다른 생각에 미혹을 받습니다. 똑같은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모세는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약속을 굳게 믿고 기적을 보면서 살았는데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환경만 보고 현실만을 보게 되니 육신의 생각이 나오며 거기에 미혹이 되어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나 명예, 혹은 안락함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방황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답고 선한 목표를 이루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만 향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은 예수님을 본을 삼아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항상 다른 것을 바라보게 역사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육신의 생각이 일어나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약 1:4). 여러 가지 악한 생각이 나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먹고 싶은 것 다 먹는 등 절제가 없다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힘듭니다. 힘든 자기와 싸움을 해나가야 합니다(고전 9:24-25). 예수님만이 우리 신앙의 푯대이십니다. 우리 삶의 목표이고 중심이며 시작이시고 생명이며 최고의 가치와 구원이시며 축복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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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차 한 잔의 여유
    제가 지지난 주, 미국에 다녀오자마자 홍복기 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수능생 기도회를 하는데 밤기도회로 하시겠습니까? 새벽기도회로 하시겠습니까?”라며, 선택의 여유조차 없도록 밀어붙이면서 무조건 밤기도회나 새벽기도회 중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좀 당황했습니다. 아니, 교육개발원 주최로 알아서 할 수도 있는데, 언제까지 담임목사만 의존할 것입니까? 그렇지만 곧바로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제가 젊고, 얼마든지 인도할 수 있는데 저도 모르게 좀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산행하기 딱 좋은 계절 아닙니까? 그리고 가을을 느끼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에 딱 좋은 때입니다. 얼마 전 제가 탈진을 했다고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께서 저에게 중국의 전통 보이차를 직접 보내주셨습니다. 이건 진짜로 최상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은 보이차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으세요. 그분은 아무리 바빠도 보이차를 마시는 여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해외를 가셔도 보이차를 항상 끓여 가지고 다니면서 보이차를 마신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군살 하나도 없어요. 몸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씬하시고, 아직 머리숱도 많으시고, 머리도 새카마세요. 그 비결이 보이차에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사랑과 배려와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 두어 주 동안 식사 후에 보이차를 마셨습니다. 물론 그때도 보이차를 마시는 여유와 즐거움을 모르고 그냥 의무적으로 마셨지요. 그런데 미국을 다녀오고 나서 아예 제 식당을 관리하는 박현옥 권사님이 보이차를 끓여주지도 않는 것입니다. 진짜 지난주는 산책 한번 못 했고, 차 한잔 즐기는 여유도 전혀 없었습니다. 큰 집회건 작은 집회건 목사는 집회를 앞두고 항상 부담감과 압박감을 가지게 되거든요. 어쩔 수 없는 목사의 운명이라고 할까요? 물론 운명이 아니라 사명이죠. 그래서 지난주는 진짜 보이차는커녕 제 일상의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산행 한 번도 못 했습니다. 아니, 설교 준비가 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산행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차 한 잔 마실 여유를 못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수능생 자녀의 부담이 저의 부담이고, 자녀 기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저의 부담감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준비되면 준비되는 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준비되지 않는 대로 항상 부담감을 가졌어요. 준비가 안 되면 쫓기는 마음으로, 준비가 되면 빨리 집회 시간이 다가오는 마음으로... 그래서 금요집회가 끝나고 토요일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산행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보온통에 보이차를 끓여가서 산에서 보이차를 마시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지난주에 못 한 산행도 하고, 보이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갖고 살아보겠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얼마나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지는 저도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여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가을을 맞이하여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물론 금주도 기도해야죠. 수능 시험이 끝나기까지 우리는 거룩한 압박감을 가져야지요. 여러분 모두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날씨는 차가워져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따스하게 하시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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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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