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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찬양 목사의 ‘주님은 나의 안식처’(삼상 19:18~24)
    성경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안전한 곳’ ‘피난처’가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하면서 노골적으로 다윗에게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에 사울왕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없애려고 계속 살해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했습니다(삼상 19:1-7). 그리고 사울왕의 딸이면서 다윗의 부인인 미갈의 도움을 받아 다윗은 도피생활을 했습니다(삼상 19:8-17).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사울왕은 이번에는 세 차례에 걸쳐 자객을 보내 다윗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다윗이 죽지 않자 이번에는 직접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다윗이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해하려고 다윗이 있는 곳까지 쫓아갔지만 결국에는 자기옷을 벗은 채로 사무엘 앞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4절입니다.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사울 왕이 옷을 벗었다는 말은 그가 왕위에서 폐위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사울 왕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주시니까 사울왕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윗은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피신하였기에 안전했습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라마가 어디입니까? ‘라마’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간 곳인데, 사무엘의 출생지이며 주거지이고 매장지입니다. ‘라마 나욧’도 같은 단어입니다. 라마와 라마 나욧이란 단어는 본문에서 총 7차례 등장합니다. ‘나욧’이란 ‘처소, ‘거처’를 의미합니다. 라마 나욧은 라마 지역에 있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장소입니다. 사무엘 상 7:17입니다.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곳,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의 품’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다윗은 도피하면서 이 라마라는 곳을 안식처로 삼았습니다.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46: 1-3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피난처, 힘, 큰 도움 다 비슷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주시는 피난처요, 힘 이시요. 그리고 큰 도움이 되십니다. 아무리 인생의 지진이 일어나고, 고난의 해일이 덮쳐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은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세상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맞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저와 여러분을 늘 보호하시는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한계 상황을 만날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과 상처와 환난이 저와 여러분을 넘어뜨리려고 수시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한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고통과 환란 때문에 내 인생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우리주님’만 지속적으로 바라보시면 우리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며, 특별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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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0
  • [언론회 논평]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지 않아야 되는 이유
    지난달 말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에서는 각 분과별 특별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하였다. 특별위원회는 방송자문, 광고자문, 방송언어, 통신자문, 권익보호위원회가 있다. 여기에는 위원장을 포함하여 9명의 위원들이 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분과의 위원을 두고 동성애 단체와 친동성애 인권 단체들이 ‘성소수자 혐오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앞장서고 있는 인물을 위원에 임명했다’고 규탄성명서를 냈다. 또 이를 받아서 지지하는 진보·좌파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인물은 현재 복음언론인회와 차별금지법바로알기아카데미(차바아) 운영을 맡고 있는 전 KBS 보도본부장 출신의 김인영 회장이다. 김 회장은 차별금지법의 위험성을 전해왔었다. 그는 언론인 출신으로 언론들이 차별금지법의 핵심조항인 동성애 문제와 그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 등 여러 가지 병리 현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것은 2013년에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 사이에 맺은 ‘인권보도준칙’이 문제라는 것을 간파하여, 이를 역설해 온 바 있다. 동성애 단체와 친동성애 인권 단체들이 주장하는 방심위가 김 회장을 위원으로 임명한 것을 규탄한다는 내용을 들어보면, ‘성소수자 혐오’ ‘인종차별적 내용’ ‘특정종교(기독교)를 바탕한 단체 임원’ ‘반페미니즘’ 표현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없다. 그럼에도 지금의 상황은 국민들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마저 깡그리 무너뜨리려는 태세이다. 동성애의 문제점을 알리고 또 그것이 갖는 여러 가지 부정적 파급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동성애 혐오자’로 몰아가는 것은 <동성애 독재> 현상과 다르지 않다. 동성애 세력들은 자신들을 ‘성소수자’라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모든 국민들을 억압하고 한 마디라도 반동성애적 표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벌떼처럼 공격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편향된 언론들이다. 동성애 단체나 친동성애 인권 단체나 그쪽으로 기울어진 언론들은 자신들의 주장만 옳다고 생각할 뿐, 다수의 양심적이고 균형 잡힌 국민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양심적 목소리를 혐오로 몰아서 집중포화를 쏘아 댄다. 우리나라에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조차 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만약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진다면 양심적인 국민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적어도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 사회이고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면, ‘반동성애는 차별과 혐오’라는 단순·고착·억압·폭력적 태도로 국민들을 협박해서는 안 된다. 언론들도 ‘인권보도준칙’을 마치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알 권리, 국민들의 건강권, 동성애와 에이즈, 동성애로 인하여 저출산, 가정의 해체 등 그 폐해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국민들에게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한다. 그동안 10여 년 동안 언론들이 동성애 옹호의 족쇄를 스스로 채워서, 국민들에게 바른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면 이를 크게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인권보도준칙’은 무슨 법률적 조항도 아니고, 강제성을 띤 것도 아니고, 그것을 반드시 지켜 언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도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일방적으로 맺은 불편·부당한 처사에 불과하다. 다시 한번 확인하거니와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혐오이고 인권침해인가? 인권은 태어날 때부터 갖는 천부적인 인권이 있다. 그것은 철저히 지켜줘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동성애가 천부적 인권이 되었는가? 이것은 인간들의 쾌락과 오염된 이념의 결과일 뿐이다. 또 방송의 공공성, 공정성을 보장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면 동성애만 옹호하면 방송의 공공성과 공정성이 이뤄지게 되는 것인가? 오히려 동성애의 문제점을 아는 사람이 방심위 특별 분과 위원에 들어가서 방송의 공공성·공정성을 확립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그리고 특정종교(기독교)를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비판하는데, 기독교가 가진 가치관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데 훨씬 더 부합(符合)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특정종교 운운’ 하면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한다. 동성애가 실존하기에 이에 대하여 지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반대하고 그 문제점을 제기한다고 하여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가리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더욱 병약(病弱)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도덕과 윤리를 역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된다. 김인영 회장은 공영방송 KBS에서 수십 년을 언론인으로 살았고, 그가 현직에서 다하지 못했던 사회적 진실을 지키고, 우리 사회와 가정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이야말로, 방심위의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본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 독재>를 하려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만들어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누가 누구를 차별해서도 안 되지만, 억압과 비틀어진 힘으로 양심의 소리를 차별의 굴레를 씌워서 혐오로 낙인찍고, 그리고 그 선한 의도를 매도하려는 것이야말로 국민 모두의 단합으로 막아야 할, 매우 위험한 일이 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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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1-20
  • [언론회 논평] 헌법재판소, 에이즈 전파자에 대한 처벌은 합헌이다
    지난 달 26일 헌법재판소(소장 유남석, 이하 헌재)에서는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예방법의 제19조(전파매개행위의 금지)의 위헌제청에 따른 결정을 내렸다. 이를 보면, 합헌4, 일부위헌5로 선고하였다. 동법을 보면,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로 규정되어 있고, 또 제25조에서는 ‘이를 위반한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사건은 2018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숨긴 채, 피해자와 구강성교 및 유사성교행위를 함으로, 이에 감염된 사람의 고소로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접수한 해당 법원이 2019년 직권으로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함으로 시작되어, 약 4년 만에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헌재가 이를 선고함에 뚜렷하고 확실하게 했다기보다는 4:5로 겨우겨우 ‘합헌’에 이를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날 합헌 의견을 낸 헌재 재판관은 이은애, 이종석, 이영진, 김형두 법관이었고, ‘일부위헌의견’을 낸 재판관은 유남석, 김기영, 문형배, 이미선, 정정미 법관들이다. 합헌 의견을 낸 법관들의 의견은, 상대방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감염인과의 성행위를 통하여 완치가 불가능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평생 약을 먹고 치료해야 하는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 것으로, 개인의 행동자유권이 제약되는 것에 비하여, 국민의 건강 보호라는 공익을 달성하는 것이 더욱 중대함에 무게를 두었다. 반면에 유남석 소장을 비롯한 5명의 헌재 재판관은 일부위헌의견을 냈는데, 이유는 치료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감염인의 전파매개행위까지도 예외 없이 금지와 처벌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사생활의 자유와 행동자유권을 감내하기 어려운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는 행위를 한 사람에게 법률적 제한을 두지 못하게 한다면, 국가는 국민들의 생명을 어떻게 지켜줄 수가 있겠는가? 현재, 헌재 재판관의 구성원은 9명인데, 유남석 소장은 문재인 대통령 때, 지명•임명되었고, 이은애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종석은 자유한국당이, 이영진은 바른미래당이, 김기영은 더불어민주당이 지명하고, 각각 모두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하였다. 또 문형배, 이미선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임명하였다. 그리고 김형두, 정정미 재판관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명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하였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를 퍼트린 사람에 대한 명백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헌법 재판관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모습을 보였다. 에이즈에 한번 감염되면 평생토록 치료를 해야 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이뤄지기가 어렵다. 또 국가에서도,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에이즈 환자들의 치료비를 지불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범죄행위에 대하여 헌법 최고 기관에서조차 아슬아슬하게 ‘합헌’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처사라고 본다. 헌법을 다루는 최고의 헌법기관 재판관들이 엄연히 평생 씻지 못할 질병을 앓아야 하는 사람의 불행과 전체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야 됨에도, 개인의 생활자유권을 보장해야 된다며, 일부위헌결정을 내린 것을 국민들은 어떻게 보겠는가? 이번 사건의 심각성은 헌재에서 일부 의견을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헌’ 의견보다 더 많은 일부위헌결정을 내렸다는데 문제점이 크다고 본다. 향후 헌재 재판관들이 순차적으로 바뀌게 될텐데, 헌법을 다루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들은, 헌법적 가치와 목적을 구현하고, 국민 전체의 헌법적 권익을 수호하고 나타낼 재판관들로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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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1-20
  • [언론회 논평] 중국은 가입된 국제인권조약을 준수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북한의 심각한 경제 사정과 인권 탄압으로 인하여 탈북민들이 2,60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중국 당국은 지난달 항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이후 10월 초 600여명을 강제로 북송하였다. 나머지도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전에 이미 야금야금 강제로 북송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8월에도 약 80명을, 9월에도 약 40명을 보내는 식으로, 탈북자들을 사지(死地)로 내몬 것이다 중국이 북한으로 강제 북송한 사람들은 90%가 여성이며, 노약자, 유아, 아동 등이 있다. 심지어는 탈북한 지 25년이 지난 사람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중국 당국이 얼마나 세밀하게 탈북자를 색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탈북민들은 중국의 공안이나 변방대에 붙잡히면 철저히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 중국 공안 당국은 탈북민들의 행적을 자세히 조사하여 그 자료를 북한 당국에 넘기는데, 그중에서 교회나 종교 관련된 정보가 있으면 그 처벌 수위가 치명적으로 높아진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의 보위부로 이송되었을 때에는, 여성들은 알몸 상태로 온갖 인권 유린을 당하는데, 고문과 강제낙태, 영아 살해, 생체실험, 처형까지 당한다고 한다. 이런 지옥(地獄)임을 모를 리 없는 중국 당국이 탈북민을 강제로 북송하는 것은 저승사자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또다시 중국은 자국에 남아 있는 탈북자들마저 북송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중국은 북한의 속국이 아닌 주권국가이다. 또 국제적으로 인권에 관한 협약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성실히 준수해야 한다. 중국은 중요한 국제인권협약 9개 가운데 6개에 가입하고 있다. 인종차별철폐협약(1981년 가입) 여성차별철폐협약(1980년 비준) 고문방지협약(1988년 비준) 아동권리협약(1992년 비준) 사회권규약(2001년 비준) 장애인권리협약(2008년 비준) 등에 가입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여성과 아동들이 대부분인 탈북자들을 마치 군사작전을 하듯 북한으로 강제로 북송하고, 중국에 있는 모든 탈북자들을 ‘싹쓸이’하듯 찾아내어 그들을 죽음의 땅으로 보내려는 것은 무자비하며, 스스로 비인권국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중국의 이런 행태는 탈북자들을 난민이 아닌 경제적 궁핍자로 보며, 난민 절차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UN 총회, 인권이사회, 특별절차,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주요 인권조약기구 등은 탈북자를 난민협약 제1조에 의거하여, 정치적 난민의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현장 난민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밝혀 왔다. 중국 정부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속히 탈북민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들이 체류하는 동안 인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탈북자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여, 생사를 뛰어넘어 탈북한 것에 대하여 새로운 자유를 얻도록 해야 한다. 북한 형법 제221조의 ‘비법국경출입죄’에 의하면, 국경을 출입한 자는 1~5년의 노동단련형에 처하고, 이것이 여러 번 반복되고 특히 선교사 등과 접촉한 자는 ‘정치범’ 대상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런 탈북자들에게 난민의 지위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을 위해 촉구해야 한다. 우리 정부도, 우리 국민인 탈북자들을 구출하는 일에 국내•외적인 노력을 다하고, 끊임없이 국제사회와 발을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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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1-2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내 생의 마지막까지 기도의 사명을“
    저는 지난 11월 16일 목요일에 모교인 광신대에 가서 ‘해원(故 정규오 목사님) 17주기 기념 예배’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실 그 날은 수능 시험 날이기 때문에 광주에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인 한기승 목사님이 내려오라고 하고 스승이신 故 정규오 목사님의 사상과 정신을 기념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내려갔습니다. 저는 그냥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총회장 시절 총회 역사를 주제로 갈라콘서트를 했던 ‘불의 연대기’ 중 정규오 목사님과 관련된 부분을 편집하여 보여주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불의 연대기’는 제가 105회 총회장 시절 각본을 쓰고, 총감독을 하여 목사장로기도회 때 공연했던 작품입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역사를 왜곡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51인 신앙동지회에 대한 역사적 팩트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1인 신앙동지회(회장 정규오 목사님)가 있었기에 당시 좌경화된 신학을 바로 잡을 수 있었고, WCC를 반대했으며 故 박형룡 박사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박형룡 목사님의 아들인 박아론 박사님께서 「나의 아버지 박형룡」이라는 책에서 아버지께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분이 정규오 목사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통 보수 신학의 횃불을 들도록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와준 분이 바로 정규오 목사님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정규오 목사님도 교단 분립이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회개하고 다시 하나됨의 기치를 들었던 분입니다. 자신의 오점과 과오를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회개할 수 있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칼빈의 제자 베자의 이야기처럼 ‘비방하기는 쉬우나 본받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 분의 사과와 회개로 저도 합동 총회의 일원이 되었고 105회 총회장까지 역임을 하였습니다. 그분의 지고지순한 신학적 사상과 신앙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내려가서 극화적 설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일 오후 2시에 정읍 내장산에서 글로벌 에듀 이사들과 임원들이 모이기로 했습니다. 잠시라도 들렀다가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괜히 심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원래는 내장산 안까지 차를 갖고 가서 케이블도 한번 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집사람이 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수능 현장 기도회 모습을 동영상으로 계속 찍어서 보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고, 제가 늦게라도 가서 수능생들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장산 모임에는 양해를 구하고 바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물론 차 안에서도 기도 할 수 있고 내장산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기도에 동참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니깐 차가 막혀서 교회에 도착하니 5시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고 마지막 제2 외국어 시험 시간인데 그래도 그 기도에 참여를 했습니다. 저는 글로벌 에듀 이사장이기 이전에 새에덴교회 담임목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능생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빗속을 뚫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른 어떤 모임이나 일보다도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로서 성도들과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아니, 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의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저의 자리이고, 가장 가슴 설레는 자리이고,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눈을 감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늦가을의 스산한 가을비가 내리는 오후였지만 제 가슴만큼은 다시 한번 목양과 기도의 사명으로 뜨겁게 타올랐던 어느 멋진 가을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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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1-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환난이 주는 유익’(롬 5:3-4)
    우리의 삶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있습니다.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주신 까닭은 바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무나무에서 고무액을 받을 때는 나무껍질을 찢어놓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을 더욱 복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을 찢어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즉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참는 것은 귀한 축복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신앙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시 40:1-2에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참되고 올바른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나의 조급한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스턴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과 욕구가 지금 당장 만족되어야 하기에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원한다며 안달을 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인내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영적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상에서 고뇌가 계속 되었는데도 끝가지 참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진주를 만들기 위해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겪는 조개처럼, 우리도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고난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고난은 우리의 자아를 깨뜨립니다. 그래서 고난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것은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달콤하고 수지맞는 일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럽고 손해나는 쓰디쓴 고난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쓰디쓴 고난을 주심으로 더 큰 은혜를 받게 하고 더 귀한 그릇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영적 성장을 가져오고, 겸손하게 되며(사 57:15), 연약함과 죄를 깨닫게 되는 유익을 얻게 됩니다(고후 12:9). 고난의 환경은 우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기도하면 응답하셔서 환난 중에 내가 너를 건지고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말씀하셨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만 바라볼 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내로 고난 다음에 올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고난 다음에 주실 은혜와 축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덕분에’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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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11월의 가을 단상
    지난 목요일 점심에 몇 분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 기관의 회장은 아니지만 어느 기관의 정기총회 일로 저를 찾아와 의논을 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입을 모아 저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입니다. “소 총회장님, 요즘 얼마나 힘드세요. 과거에 소 총회장님이 배려하고 베풀어 주었음에도 그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 보고 있을 텐데요. 어쩌면 소 목사님의 영향력이 여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닙니다. 누가 저에게도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고 전화도 했지만, 전혀 일말의 관심도 없습니다. 그 뒤로는 전화도 안 받고 그런 문자도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지도 없고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를 세울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코로나의 상흔이 있고 후유증이 있는데 이 상흔과 후유증의 안개를 뚫고 어떻게 교회의 새로운 영토를 확장해 나갈 것인가. 어떻게 한국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될까 고민하며 ‘뉴트로 전략, 핵처치(사도행전적 원형교회)’라는 책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도대체 언제 그런 책을 쓰셨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책을 쓸 수가 있습니까?” “저는 원래 아침형이 아니라 저녁형이어서 날밤을 새워서 책을 썼지요.” 이런 덕담을 나누면서 식사를 같이했습니다. 그들을 교회 정문까지 배웅해드리고 나서 잠시 거리를 걸었습니다. 얼마 안 남은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내렸습니다. 문득 이런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가을나무 한 그루 / 차가운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 애타는 얼굴로 / 팔을 휘젓고 서 있다 / 햇빛 쏟아지는 / 거리에서 / 바닥에 떨어진 / 나뭇잎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 하나 하나 / 이름을 부르고 있다.” 제가 부총회장에서 총회장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어떤 분이 집요하게 반대를 하였습니다. “어떻게 개혁측 출신이 그렇게 쉽게 총회장을 하느냐. 좀 어렵게 총회장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이 어느 노회 소속인가 알아봤더니, 파악한 바에 의하면 21 당회도 갖추지 못한 미조직 노회라는 것입니다. 교회 실사위원회를 맡았던 분이 저에게 그걸 알려줘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원칙적으로는 총회에 나올 수도 없고 총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제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그분이 알고 먼저 총회에 고소했던 것부터 취하하고 부랴부랴 저의 접견실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어떤 분이 소 총회장님이 너무 잘나가고 쉽게 총회장이 되는 거 같아 곤경을 선물로 줘야 된다고, 그래야 소 총회장이 날뛰지 않고 겸손하게 될 거라고 저를 뒤에서 컨트롤을 했습니다. 어쩌면 자격지심일지도 모르죠.” 그러면서 녹음된 통화 내용을 저한테 들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장 책상을 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선배님,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었습니까? 왜 이렇게 나이답지 않은 행동을 하십니까? 그런 걸 들려준다고 제가 들을 사람입니까? 그런 일로 왔으면 어서 가십시오. 저는 그런 거 개의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에게 교통비까지 줘서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행동했던 저를 생각하면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를 수행하는 유송근 장로님이 전철역까지 그분을 태워다 드렸는데 그분이 차 안에서 들려주더라면서 유 장로님이 그 내용을 저에게 보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장로님께 그랬지요. “장로님, 저한테 보고하지 마세요. 저도 사람인지라 그런 얘기 들으면 편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장로님,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줄 아십니까? 그 편견과 선입견이 잘못 표현되면 꼴불견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난 꼴불견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때 유 장로님이 오히려 저한테 감동받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저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떨어진 낙엽을 밟는데 지난 여름 푸르른 나뭇잎들과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무성하고 푸르렀던 나뭇잎도 결국 가을이 되니까 떨어지잖아요. 그래서 제가 떨어지는 낙엽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어찌 낙엽뿐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저와 관계했던 사람들, 얽히고설켰던 사람들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생각하며 축복을 하였습니다. 저를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저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까지도 생각하며 축복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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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적극적인 순종’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30). 감람산은 올리브 산입니다. 거기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제자로 택함을 받았던 가룟 유다의 배반과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올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한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달아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습관을 따라 기도드렸던 곳, 척하면 예수님이 계시는 위치를 짐작할 만한 곳, 그러기에 유다가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함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있는 힘을 다하여 피하고 싶은 곳이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는 찬미하며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가십니다.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이기에 찬미하며 올라가십니다. 순종은 적극적인 순종과 소극적인 순종이 있습니다. 찬미는 적극적인 순종을 드러냅니다. 소극적으로 순종하면 시험이 올 때 돌아서기 쉽습니다. 작은 일에도 유혹을 받아 넘어가고 맙니다. 소돔성이 악하여 하나님께서는 소돔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소돔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롯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소돔성을 멸할 계획을 말씀하시고 그 처와 두 딸이 성 밖으로 나와 산으로 도망할 것을 말합니다. 롯이 산보다 가까운 소알성으로 가겠다고 하자 그것까지 허락하십니다. 순전히 삼촌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소돔에 유황불이 쏟아질 때 롯의 처는 성안에서 나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9:23-29). 롯의 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은 하였지만 그 말씀을 자기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고 억지로 소극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소극적인 순종은 이처럼 실족하기가 쉽습니다.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가 다윗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지 않았습니다. 행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가 그를 죽이고 그 나라를 다윗왕조에게 돌릴까 봐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웠던 것입니다(왕상12:29). 이 소식을 멀리서 들은 유다에 사는 선지자는 매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를 쓰시지 않으시고, 멀리 유다에 사는 선지자를 벧엘에 보내어 여로보암을 책망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내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왕상13:9). 이 말씀에 유다에 사는 선지자는 ‘말씀을 받아 전하면 그만이지 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하셨을까? 왜? 가던 길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돌아올 때는 쉬면서 음식도 보충하고 이미 익숙한 길로 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억지로 소극적으로 순종하다가 그만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의 속임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오던 길로 다시 가지 말라는 말씀,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이 마음에 걸렸는데 자신보다 한참 선배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물과 떡을 주라고 하셨다.”는 말에 그만 마음이 녹아들고 만 것입니다(왕상13:19). 이처럼 순종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때 마귀는 그 틈을 노립니다. 그리고 넘어뜨리고 맙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종종 보았습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 마음이 상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이 하지 말라고 그랬어.” “아버지께서 보지 말라고 그랬어.” 물론 소극적인 순종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소극적인 순종 속에는 자신은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다소 섭섭한 감정과 원망 섞인 감정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순종할 내용에 대하여 다소 왜곡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순종을 피해야 합니다. 어차피 순종할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 복음(롬2:16)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도 함께 주십니다(행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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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레드와 그린 사이에 있지만···
    지난 수요일 우리 교회 김미화 집사님이 개소한 하은상담소에 심방을 갔습니다. 김미화 집사님은 ‘내 마음의 별똥별’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데요. 4년간 우리 교회 상담실에서도 봉사를 했고 학교에서 아동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신 분입니다. 가서 예배를 드리고 축복 기도를 해 주었는데, 김미화 집사님께서 갑자기 “CPTI라고 하는 비채컬러 성격 유형 검사가 있는데 검사 좀 받아보고 싶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받아보면 뻔할 텐데요.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랬더니 얼마 안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검사지를 받고 체크를 했습니다. 검사하는 시간 보다 해설하는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더라고요. 비채컬러, 성격 유형 검사는 색깔을 통해서 성격을 나타내는 것인데, MBTI의 축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가 하면, 레드(빨간색)가 64점으로 제일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린(초록색)이 56점으로 두 번째로 나왔습니다. 레드는 적극적이며 진취적이고 실행력을 갖고 활기차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뿐만 아니라 통솔력과 결단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개방적이고 외향적이며, 현실감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작용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충동적이며 단순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중심적일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솔직하여 상대방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온 색깔이 그린이었습니다. 그린의 특징은 모범적이며 원칙에 공정하고 책임감과 충성심이 높은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변과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배려심과 관대함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린이 반대급부로 나타날 때는 이따금씩 인색하거나 냉담하며 관망의 성향을 갖고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억압하여 잘 드러내지 않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미화 집사님에 의하면 제가 검사지에 체크를 하는 모습이나 태도, 중얼거리는 모습을 볼 때 타고난 기질은 오히려 그린이라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은 그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삶의 환경과 상황이 레드를 만들어 냈다고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린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고 레드는 후천적으로 길러진 성격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기복의 차이가 큰 사람도 많이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다른 색깔도 거의 원만하게 나온 것입니다. 엘로우(노란색)도 54점, 퍼플(자주색)도 54점이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블루(청색)도 50점이 나왔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레드가 주도적이긴 하지만 다 비슷하게 나온 것입니다. 엘로우는 명랑하고 낙관적이고 호기심이 강하며 관찰력이 높습니다. 사교적으로 수용하며 친절하고 희망과 기대로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퍼플은 창의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천성적으로 높은 직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창적 사고와 예술적 재능을 보입니다. 우아하고 고상한 품위로 격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엘로우와 퍼플은 같고 가장 적게 나온 게 블루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성격은 주도적이긴 하지만 모나지 않고 또 충돌하지 않으며 원만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심과 배려심도 많고 창의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또 높은 직관력도 갖고 있습니다. 대체로 검사 결과에 저는 동의를 했습니다. 나름 성실하게 기록을 한 결과라고 믿어졌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색깔이 좋고 나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나쁜 것이 있으니까요. 가령 보라색에서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천성적으로 높은 직관력을 갖는 반면에 현실 도피 내지는 개인적인 우울감과 교만함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블루 같은 경우는 안정적이며 신뢰감을 갖고 인내심이 깊고 강한 의지력이 있지만, 반면에 엄격한 자신이 부동의 상태를 만들고 비사교적이며 내향적 관계의 도피를 갖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 제 자신을 돌아보는 데 유익하였지만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성격과 기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성격과 기질이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소신이기도 하지만 일찍이 팀 라헤이가 ‘성령과 기질’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런 주장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질과 성격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부정적 감정으로 표출되고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레드와 그린 사이에 있고, 또 다른 색깔도 대부분 원만한 균형을 이룬다고 하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고 다스림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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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1-05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임희국 박사(1955-)
    ‘구술사’ 및 ‘미시사’ 통해 지역교회사 발굴에 공헌 역사방법론에 기여한 사가… 여성 교역자들의 역할 중요시 경북 김천 출신, 불름하르트 연구로 바젤대학서 학위 받아 임희국(林熙國)은 1955년 1월 17일, 경상북도 김천시 삼락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삼락동은 일제 때 경부선 철도가 생기기 전에는 소위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선비의 고장이요, 지역에서 가장 큰 유림촌(儒林村)으로 시가지 중심을 이룬 마을이었다. 일컬어 구읍(舊邑)으로 불리는 김천의 행정 교육 중심지였다. 임희국이 태어난 1955년은 6.25 전쟁이 3여년 만에 겨우 휴전으로 매듭 짓고 나라가 심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러나 희국은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며 머리가 총명한 소년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초등학교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중고등학교는 당시로서는 대도시인 대구로 유학을 가 선교사들이 세운 계성(啓聖) 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미션스쿨에서 학업과 신앙훈련을 받고, 계명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2월 24일?문학사(B.A)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어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교역학 석사(M.Div) 과정을 마치고, 다시 대학원 석사(Th.M) 과정에 진학했다. 당시 상황을 임희국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신학수업 3년으로 전임교역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판단해서 공부를 좀 더 하기로 했다. 전공을 교회사 분야로 선택했다. 대학원 수업은 세미나식으로 진행되었다. 석사학위 논문을 이형기 교수의 지도로 초기 칼 바르트(K. Barth)의 성경해석에 관하여 서술했다. 그런데 논문 작성 과정에서 바르트 신학사상이 불름하르트(Blumhardt) 부자(父子)의 영향 아래 새로이 출발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것이 몇 년 뒤에 바젤에서 불름하르트(아들) 연구에 연계되었다."(교회사연구, 이제는 한국과 아시아로, p.29). 이 연구로 장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학위를 받았다. 임희국은 1987년 9월, 로흐만 교수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개혁교회 총회장학금을 받아 독일에서 어학연수를 거쳐, 바젤대학교 신학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이곳에서 로흐만 교수의 지도로 불름하르트 연구로 학위논문을 쓰게 되었다. 학위논문 내용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독일어권의 교회사와 신학사상사로 전공 정체성을 여기에 두고, 불름하르트의 설교를 신학화 한 학문성을 인정받아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역사신학 강의하며 지역교회사 탐구 그의 논문은 지금까지의 불름하르트 연구를 한 걸음 넘어 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불름하르트의 우주적 이해(Universal Cosmic)를 밝힌 점이 특출하다는 평이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 그 해에 경산에 있는 영남신학대학교에서 1995년 3월 학기부터 역사신학(교회사) 분야를 맡아 가르치기 시작해, 세계교회사와 함께 선택과목으로 영남지역교회사 과목을 병설했다. 이것이 그의 지역교회사 탐구의 디딤돌을 놓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를 중심해 경상도내 경산, 청도, 고령, 경주 등지의 역사있는 교회들을 대상으로 초기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며,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어 연구케 했다. 이어 안동지역의 유림문화권, 경주지역의 불교문화권, 고령지역의 가야문화권을 대상으로 지역 교역자들과도 협력하여 지방교회사 연구에 기초를 다졌다. 그런 가운데 안동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 이원영(李源永) 목사에 관한 자료와 정보협력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당시 안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기수 목사였고, 김 목사를 통해 그의 유족 중 대구 대봉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이정순 권사를 알게 되었다. 이원영 목사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세 후손으로 뼈속까지 유림사상이 가득한 인물이었으나 안동에 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919년 안동과 예안 3.1독립운동 시에 만세 시위를 주동하고 투옥되어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성령을 받아 평생 향촌 안동에서 목사로 헌신하였다. 그는 지역사회와 교회가 존경하는 목사요, 독립운동가와 교육자, 그리고 선비의 삶을 산 실천가였다. 임희국에게 이원영 연구는 스위스 바젤에서 배운 기독교의 보편성과 특성, 곧 그리스도교의 세계적 보편성과 한국 지역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주력한 것이었다. 이원영 연구를 통해 미시사(Micro-History) 연구에 천착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교회사 연구에서 거시적 연구 뒤에 가려져 있던 작은 규모의 역사를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즉 망원경으로 관찰하던 거시사(Macro-History) 작업에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미시사 작업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동 유림 출신 이원영 목사 연구로 서북지역과 영남지역 간의 개신교 선교 비교 영남지역의 장로교회는 역사 속에서, 한편 평안도 서북지역과 연계되어 그 영향을 받았고, 또 다른 한편 영남의 유림전통을 선별적으로 계승하면서 발전하였다. 서북지역은 조선시대에 중앙정부로부터 홀대를 받았기에 정치권력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중국 대륙에 인접해 있으므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층을 중심으로 대륙의 문물이 소개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을 겪은 평양주민들은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명치유신으로 국력을 키운 덕택에 중국을 이겼다고 판단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이 서양문물을 한국에 가져오는 개신교 선교사에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경상도 북부지역에는 조선시대의 지배이념인 성리학(性理學) 전통이 뿌리깊게 자리 잡았으므로 서양종교와 문물이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하였다. 게다가 외세를 배격하는 위정척사(衛政斥邪) 운동이 1880년 안동유림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시작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이처럼 영남지역은 여러가지 면에서 평안도 서북지역과는 다른 환경이었다. 그런데 안동 유생 가운데 몇몇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관한 연구가 지금까지 드물었는데, 이원영 연구를 통해 상세히 그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임희국은 임옥 목사와 그의 부인 이연옥의 생애와 리더십 연구로 계속 이어갔다. 김수만 장로 전기 통해 '구술사'의 중요성 발견 다음으로는 교회사 연구 형태 가운데 하나인 구술사(Oral History) 연구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그 실례가 된 주인공은 김수만(1901-1971) 장로 전기 집필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 연구의 단초는 영남신학대학교 재직시 김석구 학생이 수집 제공한 자료를 만나면서 부터였다. 김수만은 1946년부터 세상을 떠난 1971년까지 25년간 안동지역의 남후면, 임하면, 길안면 내의 여러 동네를 찾아다니며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10여 개 마을에 교회를 개척 설립한 전도자이다. 그의 실화를 근거로 그에 대한 이야기가 교인들만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그의 이름과 행적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확산되어 있는 사실을 수집 정리해 경상도 북부지역의 무명의 전도자 행적을 정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역사 속에 숨겨져 잠자고 있는 실체를 증인들로부터 캐낸 살아있는 전도자의 이야기요, 선교역사 연구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임희국은 이름하여 교회사 속의 구술사 연구라는 장으로 만든 것이다. 임희국의 관심사는 한국교회사의 면모를 파악하며 연구할 수록 연구분야가 점점 확대되어 갔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한 여성교역자들의 연구와 여성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겠다는 사실의 인식으로 나간 것이다. 현역에서 은퇴해 물러나 있는 여교역자들의 삶과 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구술사로 서술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다. 이 일에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작업이라 임희국은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는 세미나 참석자들을 '역사방법론' 과목의 실습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도우미로 활용하였다. 연구대상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소재한 예장통합측의 여교역자 안식관에 기거하고 있는 은퇴교역자들이었다. 안식관에 거처하고 있는 11명의 왕년의 전도 사역자들에게 장신대 대학원생들을 1명씩 짝을 이루어 ①가족사항, (②학교 및 신학교, ③청소년 시절의 사회환경 및 겪은 역사적 사건, (④배우자 및 자녀, 사회경험, ⑤교역자로 사명 깨들은 계기, (⑥ 목회경력, ⑦내게 힘이 된 성경 및 찬송, ⑧다음세대에 전해주고 싶은 신앙유산 및 후배에게 남기고 싶은 말, ⑨사전에 이력서 작성 및 소장하고 있는 자료 수집 등을 정리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역과 역사가 한국교회 부흥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파악하기도 하지만 귀중한 자료로 삼을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개교회사 및 지역 노회 역사연구로 확대 마지막으로, 임희국의 관심사는 마을 및 지역교회사 연구와 함께 개교회사 및 노회역사 연구로 관심의 폭과 연구의 범위가 점점 확대되어 갔다. 구체적인 성과물로는 서울 동신교회 50년사, 소망교회 30년사, 평양노회 100년사, 강원노회 60년사 등을 집필하기에 이르렀고, 특이한 연구 프로젝트로는 제주지역 전통문화와 그리스도교 연구가 있고,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예장통합 역사위원회의 사업으로 장로교회 전수조사를 한 것은 큰 과제였고 보람된 일로 기억하고 싶다고 하였다. (같은 책, p.34-60 참조). 임희국 박사는 1995년 이래로 2019년까지 세계화 시대에 상응하는 지역교회사 연구에 착수했다. 연구가 진척되는 동안에 이 연구가 교회사 바깥 일반 역사학계에서도 담론으로 정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포스터모던 시대에 일반역사학에서 논의되는 새로운 연구방법을 살펴가면서 1995년 이래로 25년 간의 지역교회사 연구를 진척시켰다고 회고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름하르트가 증언한 하나님나라(Ph.D 학위논문), 선비목사 이원영(2013), 여성지도자 이연옥(2011), 김수만 장로 절면서 10개 교회 세움(2004), 베이도의 선교와 사상(2013), 성효 최거덕 목사(2010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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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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