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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셈, 함, 야벳
    이번 주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은 국민일보 10월 1일 자에 게재되었던 소강석 목사의 성경 인물 시로 대체합니다. <작가 주> 셈, 함, 야벳 왜 그랬을까 포도주에 만취하여 벌거벗을 정도로 그를 혼미케 하였던 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가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고뇌인가 겉옷을 벗어 고개를 돌린 채 사실을 덮어 복의 문을 열었던 셈과 야벳 담요 한 장 덮어주지 못할망정 사실을 까발려서 오고 오는 세대에 저주의 문을 연 함 그대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는가 흉악하고 증오스러운 사실의 날카로운 칼날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고개를 돌려 겉옷으로 허물을 가려주는 따스한 침묵인가. 詩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해설 : 김종회 교수(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셈과 함과 야벳은 노아의 세 아들들이다.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을 정도로 혼미하여 잠들었다. 시인은 방주 사건 이후 살아남은 자의 슬픔 또는 고뇌로 그를 이해했다. 문제는 이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들의 태도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나신을 겉옷으로 덮고 함은 이를 ‘까발렸다.’ 노아가 깨어나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두 아들을 축복하고 한 아들의 후손을 그 종으로 지명했다. 이 엄중한 경험칙은 오늘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또 세속적 삶에서나 매한가지다. 시인은 이 아들들의 두 가지 태도를 두고 ‘날카로운 칼날’과 ‘따스한 침묵’의 양자로 구분하여 묘사했다. 성경의 고색창연한 문면에서 만나는 여러 일화와 그 교훈이 지금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도 여전히 상존함을 적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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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0-0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고전 11:1)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된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절; 빌 3:17)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절대로 교만이나 우월감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자신의 신앙의 삶의 전체를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행위나 실천은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본받는 것은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고 날마다 죽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고 죽지 않으면 본받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심중에 새기고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살고자 소원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본을 보이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순종 온유와 희생과 겸손 섬김 용서에서 모범이 되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 세상을 본받아도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본받으려는 신자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유행과 관습과 쾌락을 따르고 명예 영광심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에녹은 사악한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창 5:24). 노아 시대 역시 가인의 후손들의 악한 행실이 계속되고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창 6:5) 노아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할아버지 므두셀라로부터 증조할아버지 에녹에 대한 신앙교육을 받았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금보다 귀한 믿음이 싹 트기 시작했고 증조할아버지 에녹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멸망당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땅엣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본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본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순종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을 깨뜨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성과 아집이 깨어지고 부스러져야 합니다. 깨어질 때 향기를 발합니다. 옥합의 딱딱한 껍질이 깨어질 때 향기를 발한 것처럼 육성과 고집이 깨어질 때 영적인 향기를 발하게 되고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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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의 걸작품 지구
    저는 요 몇 주 동안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책들을 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와 절대 섭리를 알지 못하는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은하계와 초은하계에서 볼 때 점 하나에 불과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크기로 볼 때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의 환경과 세계로 볼 때는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김동찬 박사님이 쓴 ‘천문학적 관점에서 본 창조론’이라는 책을 접했습니다. 그는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서 근무를 하다가 지금은 미국 국립 전파천문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 시대에 석학 중의 석학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구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천문학적으로 볼 때 지구에는 10가지 정도의 중요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태양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서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을 하기 때문에 지구에는 물이 존재하고 생물들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전축이 적당히 기울어져서 사계절이 존재하고 극심한 기상 이변이 없는 온화한 기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로 기울어지지 않고 90도로 기울어져 있다면 지구촌에는 극심한 더위와 추위만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구는 적당한 자전과 공전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24시간으로 낮과 밤이 12시간씩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8시간 내외로 일을 하고 8시간 정도는 여가생활을 하며 8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할 수 있게 아주 이상적인 시간 체제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는 너무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는 적당한 공간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구가 지금보다 반으로 작아진다면 지구의 질량은 8분의 1로 줄어들 것이고 지표면의 중력도 반으로 줄어들고 만다고 합니다. 공기가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뿐일까요? 지구에는 해로운 자외선을 걸러내는 방패막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는 우주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지는 자외선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걸러지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세포가 파괴되고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거대한 자기 방패막인 밴앨런 복사대(Van Allen radiation belt)라는 자기권을 형성하여 온갖 우주의 해로운 자외선을 막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외적으로 지구에는 큰 달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달이 조석 현상을 일으키고 밀물과 썰물을 발생시킵니다. 이 밀물과 썰물 때문에 플랑크톤과 산소를 공급하여 어류들이 살 수 있게 합니다. 특별히 지구는 진공청소기인 목성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가 지구는 판구조론에 의한 자동 온도 조절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적당한 크기의 에너지원인 태양을 가지고 있고 은하계의 중심으로부터 최적의 위치에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를 통해 진화론을 철저히 부인하고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론을 주장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창세기에 근거하여 지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천명합니다. 이런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있어 주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김동찬 박사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과학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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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9-2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걷는 한 절망이 없다
    정말 올해만큼 더운 여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 생에 몇 년 동안 흘려야 할 땀을 올여름에 다 쏟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열대야 기후를 지닌 나라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회 때문에 가더라도 아예 에어컨을 틀어 놓고 호텔에서 방콕 하다가 돌아오죠. 그런데 올여름에는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정말이지 에어컨을 틀어 놓고 뭔 일을 해도 땀이 났습니다. 여름수련회 전후로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으면 제가 탈진을 겪었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쉬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먼저는 기도와 성경 연구죠. 그런데 그 외에 멈추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산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산책이지 정말 산에 오르면 숨이 가쁠 뿐만 아니라 땀이 소낙비 내리듯이 흘러내립니다. 산을 오르다가 멈추어서 땀을 닦고 또 걸어가면 또 흐르고 또 땀을 닦고 어떨 때는 아예 벤치에 앉아서 땀이 다 식은 후에 또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50m, 100m만 걸어가면 또 땀이 줄줄줄 흘러내립니다. 그래서 동남아에 가서는 방콕을 하지만 여기서는 제가 방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산책은 저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산책은 꼭 해야 하지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금요일입니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오늘부터 비가 온 후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과연 그 말이 얼마나 맞을지 아직도 참 믿어지지가 않지만요. 10월이 가까이 오는데도 이런 찜통더위가 말이나 된단 말입니까? 그래도 저는 끊임없이 산책을 했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계속 산책을 하였습니다. 프랑스말로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도시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고 서서히 걷는 산책을 ‘플라느리(flanerie)’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플라느리를 즐기는 사람을 ‘플라뇌르(flaneur)’라고 합니다. 저 역시 플라뇌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산책을 하면서도 숨이 가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주여”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 산에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참 처량한 것 같았습니다. 아직 가을이 먼 것 같은데도 한 달 전부터 귀뚜라미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뚜라미가 한 달 전부터 노래했는데 언제 가을이 올까요. 언젠가는 오겠죠. 가을이 올 걸 생각하니까 찜통더위에 산책을 하는 것보다 단풍 옷을 입은 나무 사이를 걸을 생각에 맘이 설렙니다. 정말 가을이 오긴 오겠죠. 자크 레다가 말한 것처럼 “걷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걷는 자에게 절망이 없다면 오르는 자이겠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가을보다 더 좋은 계절이 있네요. 그 계절은 바로 ‘너라는 계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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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9-2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올바른 비판’(마 7:1-2)
    사람이 살면서 남의 말을 빼면 별로 말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살면서 남 이야기 안하고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겁니다. 그런데 남의 말도 좋은 뜻으로 하기 보다는 비판하고 안 좋게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쉽게 남을 정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병폐를 바로 잡기 위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서 모든 비판을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를 통해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 12:57)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사실과 거짓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가 재판장 격이 되어 남을 정죄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오래한 교인들 중에서도 이런 허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그들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심판하곤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일 많이 짓는 죄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잘못된 죄입니다. 흔히 우리 인간은 내 잘못은 못 보고 남의 잘못만 찾아내는 수가 많습니다(마 7:3-4 ; 롬 2:1). 우리는 남이 잘못할 때 비판하기에 앞서 내게는 저런 잘못이 없나 살펴보고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0:21). 남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삶은 반드시 자기도 가혹하게 비판을 받게 되고 남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자기도 너그러운 판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처럼 심는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도 비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억울한 욕을 받으셨지만 같이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판단해주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했습니다(벧전 2:23). 모든 옳고 그른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시기에 우리가 조급하게 남을 비판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하겠습니다(시 37:7-8). 아무래도 우리가 교만해질 때 다른 사람을 날카롭게 비판하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너무 날카로운 비판이 나올 때 내 영적 상태가 병들거나 잘못되지 않았나? 깊이 반성해 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갈 6:1). 비판하는 즐거움은 깊은 내면의 더 큰 즐거움을 빼앗아 간다는 서양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집어든 사람들처럼 남의 허물을 향해 돌을 집어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으려면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약 2:13).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하셨습니다(벧전 4:8). 우리는 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실수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흠밖에 없음.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거나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살피며 올바른 판단으로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고 건강한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 화평을 이루는 일꾼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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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9
  • [언론회 논평] 한국교회 회복을 위한 거대한 기도의 불을 지피다
    “한국교회”라고 하면 기도로 세워진 교회이며, 기도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도로 부흥하였다. 또 기도로 교회를 지키고, 수많은 변화를 주도하였다. 1970년대 여의도광장에서 최대 100만 명이 모여 기도한 것은 전무후무한 연합 기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후에 한국교회는 산에서, 기도원에서, 교회에서 새벽 시간과 금요 철야기도로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는 열정적인 교회였다. 그와 비례하여 교회들이 부흥하고, 국가적으로도 크게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하여 선교 대국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이런 기도가 식어지므로 국가의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북핵으로부터 꾸준히 위협을 받는 것은 물론, 천문학적인 국가적 부채, 개인 부채의 증가, 세대 간, 지역 간, 진영 간 갈등과 정치권의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극단적 대립과 팬덤 정치는 국민들까지 분열시켜 서로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또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로 인하여, 국가 소멸의 위기까지 접하고 있다. 그뿐인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협과 국가 정체성의 심각한 훼손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창조의 신앙과 종교의 자유가 크게 위협받아 가정과 교회의 붕괴가 빨라지고 있다. 이럴 때 우리가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시급하게 연합으로 해야 할 것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주님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나라를 살려주시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게 하옵소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빼앗는 악한 것들로부터 가정과 교회와 청소년들과 미래 세대를 지켜주시옵소서, 평화적이고 복음으로 남북 통일을 이루게 하소서 등 수많은 현안을 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다행히 이런 위기감을 느끼고 한국교회가 이곳저곳에서 마음을 찢는 기도를 하려고 한다. 10월 3일에는 안양의 은혜와진리교회(조용목 목사)에서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마약과 중독 문제를 극복하고 코비드19로 무너진 교회 역할과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한다. 또 10월 27일에는 한국교회 성도 200만 명이 서울 광화문, 시청, 남대문 일대에 모여 온·오프라인으로 모여, 전환기 앞에 선 대한민국을 위하여 종교개혁 정신으로 대한민국에 다시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을 사모하고 기대하는 대규모 기도회를 연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이 지금 위급한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대하 7:14) 이런 기도회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성령의 강한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불일 듯 일어나며, 수많은 영혼들이 소생하게 되며,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또 모든 국가와 사회의 현안들에 하나님의 긴급하고도 강한 회복의 바람이 불어, 국가 전체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바르게 됨과 복주심이 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한국교회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클지는 아무도 예단하지 못하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기도를 좋아하시며, 기다리시며, 많은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이에 모든 한국교회와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함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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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참된 쉼은 하나님 품에서만
    제 인생 처음으로 휴식 기간을 가져보려 했습니다. 물론 사역적으로야 해외를 많이 왔다갔다 했고, 부모님을 전도하기 위해 고향을 왔다갔다 한 적은 있지만 진정한 휴식과 쉼을 위해 휴가를 가져본 적은, 성지순례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부교역자들이 다 휴가를 갔을 때도 저 혼자 남아서 교회를 지켰고 모든 사역을 다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름수련회 이후 지친 몸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체력이 번아웃되니 마음도 지치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 한 주간을 쉬어보려고 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알고 집사람이 강원도의 한 호텔을 예약해 줬습니다. 그곳은 깊은 산속에 계곡을 끼고 있는 호텔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된 쉼과 안식은 주님이 허락해야 되고 주님의 품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가는 도중에도 유튜브로 교역자수련회를 다 지켜봐야 했거든요. 게다가 도착을 했는데 세상에 설악산 그 깊은 계곡에도 무슨 찜통더위가 머물러 있는지, 바람 한 줄기도 없는 무더위가 앉아만 있어도 땀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후레시를 켜고 계곡길을 걸었는데 땀이 온몸을 적실 뿐만 아니라 땀이 눈에 들어가서 도저히 끝까지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내일은 시원해지겠거니, 에어컨 바람에 마음을 달래며 우선해야 할 철야기도 설교 원고 기초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은 늦게까지 늦잠을 자겠거니 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려고 창문을 열어놓고 잤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이른 아침부터 요란한 경고신호 소리와 드르렁 드르렁 하는 소리가 막 들려오는 것입니다. “삐삐삐삐~ 드르르르 드르르르~” 잠시 그러고 말겠지 했는데 계속 소리가 났습니다. 창문 밖으로 보니까 마침 호텔이 비수기라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이삿짐센터 같은 차가 와서 막 드르렁거리며 긴 사다리를 놓고 침대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 요란한 소리가 저의 심경을 거슬렸습니다. 그렇다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길을 걸을 수도 없고요. 그래서 다음 날은 일찌감치 약을 먹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은 더 이른 아침부터 삑삑 소리가 나고 드르렁 드르렁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호텔 측에 항의할 수도 없고, 게다가 띵동 소리가 나서 가보니까 호텔 청소하는 분이 수건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밥을 먹고 우산을 들고 계곡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계곡길이 대부분 흙길이었고 자연 길이었는데, 얼마나 폭우가 쏟아졌는지 길이 다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국립공원에서 길을 새로 만들어줬는데 대부분이 돌길이었습니다. 물론 그날은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목표 지점까지 다녀왔습니다. 이게 건강에 보탬이 되었는지 해가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강원도까지 간 게 너무 아까워서 깡을 발휘하며 다녀온 것입니다. 제 생애 처음으로 휴식과 안식의 낭만을 가지려고 했는데 그 낭만이 깨져버린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계곡길을 완주한 것은 보람스러웠긴 했습니다만. 그날 저녁부터 강원도에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짐을 싸들고 교회로 왔습니다. 돌아오면서 어거스틴의 말이 생각 났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쉬기 전까지는 결코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그렇습니다. 쉼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니 참된 쉼은 하나님 안에서만 있는 것입니다. 물론 환경도 중요하고 분위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대상관계가 잘 돼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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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9-15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계엄령 선포 준비’ 괴담의 진원은 극단적 보수 세력이다.’
    지금 우리는 난데없는 ‘정부의 계엄령 선포 준비’라는 정체불명의 괴담에 의해 나라 전체가 뒤숭숭하다. 경제대국 세계 10권 나라에서 ‘계엄령’, 지나던 소가 웃을 이야기를 야당은 4성장군 출신 국회의원을 내세워 집중포화를 쏘아대고 있으니 한심한 걱정이 출구가 없다. 헌법 제77조는 계엄령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①대통령은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③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④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⑤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정리하면 계엄령은 국가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초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국가의 안전과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이 선포하는 긴급 조치로, 군대가 치안과 행정을, 군사법원이 사법권을 갖는다. 따라서 계엄하에서 국민은 기본권의 제약과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는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소위 선진국에서 전쟁과 천재지변 그리고 자연재해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 집권당이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계엄을 선포한 예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다. 그런데 계엄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거대 야당이 왜 불가능한 괴담을 확대 재생산하며, 또 이게 먹혀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일 전 우파적 시각을 가지신 몇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중에 한분이 “계엄령 선포해서 싹 다 잡아넣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순간 필자는 “아, 이런 분들의 생각을 읽은 야당이 이를 근거로 만든 괴담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계엄령’이라는 재료를 극단적 우파 인사들이 야당에 제공한 것이 눈에 보였다. 그때 필자는 “정부에서 ‘계엄’을 공식적으로 말하는 순간,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 그것으로 이 땅의 우파는 폐족될 것이며,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정치적 파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으로 정치적 계엄 따위가 가능한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우파 인사들이 과거 박정희, 전두환 시절 속시원하게 반정부 인사들을 정리하고 폭력배들을 힘으로 제압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지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계엄령 준비 괴담의 진원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이다. 우리의 민주 사회는 힘들어도 어떤 정치적 독재와 그를 뒷받침하는 수단이 아닌 민주적 절차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 상하로부터의 혁명 혹은 쿠데타나 계엄과 같은 폭력적 방법은 시도하는 즉시 그 생명줄이 끊어지는 자승자박의 동아줄이다. 여야 모두 힘들어도 헌법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가치와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 민주적 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 거대한 야권의 일련의 행위들이 위법하고 불합리한데도 그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한 우파 보수의 진영논리의 충성심에 있다. 좌파 진보 진영은 상대를 파악하고 활용하는 데 탁월한데, 일부 극단적 우파 보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우월감에 의한 폭력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참 불행한 일이다. 결과보다도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민주사회에서 정상적인 정치 투쟁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지 과거 민주주의 역사가 보여준다.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하고, 거기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9-14
  • [언론회 논평] 새 역사 교과서, 바른 교육의 시작이 되기를
    내년 신학기부터 사용될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여 선보였다(중학교 7종, 고등학교 9종) 교육부가 30일, ‘2022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교과서 심사 결과를 공개했다. 그중에 역사 교과서에 대한 관심이 컸는데, 결과적으로는 좌편향에서 조금은 돌아섰다는 평가이다.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는 어제·오늘이 아니라서,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는 국민들의 여론에 따라 아예 ‘국정교과서’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탄핵으로 인하여 물러나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불과 수일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검정교과서’로 바꾼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 현직인 문재인 대통령까지 교과서에 실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교과서가 아니라, ‘국정홍보용’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아무튼 이번에 새로 나온 교과서는 그런 불신을 약간은 불식시켰다고 하지만, 지나치게 멀어졌던 좌편향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편향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는 국가의 정체성이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그런데 기존의 교과서에는 진보·좌파들이 사용하는 ‘민주주의’라고만 표기했었다. 둘째는 건국과 그 대통령에 대한 부정이다. 우리나라는 수천 년 동안 왕정·전제주의 국가였다. 국민은 왕의 지배를 받고, 왕을 위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공부하고 와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 이는 건국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셋째는 북한이 상투적으로 주장하는 일방적 내용을 표기한 것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내재적 접근’은 그들의 선전·선동에 불과한 것이다. 넷째는 6.25전쟁을 포함한 북한의 남침 행위와 북한 정권의 참상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발간되는 7종의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하여 7종이 서술하였다. 또 보수 정권의 경제 발전에 관하여 6종이, 천안함 폭침에 대하여 2종이 서술하였다. 반면에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것은 1종만이, 또 북한의 지독한 3대 세습에 대해서는 한 곳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섯째는 보수 정권의 공적(功績)은 무시하고, 진보 정권의 치적만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정체성 확립, 6.25 남침의 절체절명에서 국난 극복, 근대화, 경제 발전, 외교적.국제적 위상, 심지어 정치민주화 시작 등도 보수 정권에 의하여 되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은 빼고, 오직 부정적인 것만 강조해 왔었다. 그런데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서도 그런 측면을 완전히 해소했다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앞으로 만들어질 역사 교과서에서는 반드시 우리나라의 ‘건국’과 보수 정권의 절대적인 ‘공’과 북한 체제의 잘못됨을 분명히 서술해야 한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유지되어 온 것이 이웃 나라의 큰 도움으로 된 것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넣어야 한다. 우리 역사 교과서는 정치적 지형에 따라 너무 많이 한쪽으로 쏠림현상을 가져왔다. 역사는 후대 사람들이 선대에 일어났던 것을 기록하는 것이니만큼, 가슴에 손을 얹고 바르게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바른 역사를 기록하면 교육이 되고 교훈이 되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뒤집고 비틀면 역사의 큰 죄인이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어떤 공부보다도 바른 역사를 가르치게 되면 사회적 갈등이 줄어들고, 자라나는 세대의 역사관과 인성을 함부로 도둑질 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를 담은 교과서는 공정과 진실적 서술이 매우 중요하다. 이제 내년부터 사용될 새로운 교과서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충족시키기는 어렵지만, 그나마 국민들과 학부모들의 뜨거운 관심을 통하여 나타난 역사 교과서가 바른 역사 교육의 시작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9-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그리스도인이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나?’(고전 8:1-13)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까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상과 우상의 제물에 대해 반복하여 “우상 숭배를 멀리하십시오.”(고전 1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우상과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하는 것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우상 숭배로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만 마땅히 돌릴 영광을 헛된 우상들에게 돌리기 때문에 가장 큰 죄악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물질로 만든 생명 없는 피조물 곧 돌과 나무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도 단지 음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먹는 사람들에게 자기중심적인 지식을 앞세우지 말고 절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지식은 교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우상 숭배를 뒷받침하고 있는 만유신론을 가리킵니다. 그리스 스토아 철학의 자연학자들은 만유신론을 주장하며 만물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어 결국 우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전혀 쓸모없이 우상 숭배의 죄만 짓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낫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신 6:4) 바울은 자신의 잘못된 신에 대한 지식으로 약한 형제자매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10-1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음식 자체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8절)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1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책임감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비록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4절) 아니지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8-21절을 보면, “육신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그 제단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우상은 무엇이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귀신과 친교를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아울러 귀신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아울러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우상 제물에 참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귀신과 사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교제는 서로 인격적인 만남과 나눔이기에 단순한 제사 참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숭배자 자신이 숭배의 대상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0:20)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베풀어지는 성찬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단지 기념하는 제사 의미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식탁 곧 미래의 종말론적 식탁의 의미입니다.(막 14:25) 예수님의 몸과 보혈에 참여하는 성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몸에 연합되는 것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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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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