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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정병준 박사(1963-)
- “호주장로회의 한국선교는 정당한 평가 받지 못해”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상과 한국선교’ 등 저술 서울에서 출생... 미국 프린스턴과 호주 멜버른대학원에서 연구 정병준(鄭丙準)은 1963년 3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줄곧 수도권에서 자랐고 교육을 받았다. 그는 사회적 기업가로 알려진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와 또 같은 대학의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M.Div)를 받고, 같은 해 5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를 마친 후, 호주 멜버른신학대학원에서 "이분법을 넘어: 호주 장로교 선교사의 통전적 선교이해와 한국선교에 대한 공헌-1889-1942"이란 제목으로 신학박사 학위(Th.D)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과천교화 협동목사, 부천 하늘소망교회 개쳑 설교목사, 세계선교회 이사, 대한예수교장로회역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예장통합 교단의 서울장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등 학회 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한국교회 분열 현상에 대한 우려와 대안모색에 온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증주의적 에큐메니칼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역사관은 폭이 넓다. 호주 멜보른신학대학원에서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 역시 이같은 사관에서 작성된 글이기도 하다. 그의 전공분야는 한국교회사와 함께 선교역사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그의 주저로는 (1)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한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2) 한권으로 읽는 기독교 역사와 사상(2016), (3) 강신명 목사의 생애와 사상(2016), (4) 무학교회 60년사(2009), (5) 21C 한국교회 에큐메니칼운동(2008 공저), (6) 한국기독교 탐구(2011 공저), (7) 대한예수교장로회 100년사(2015) 등이 있고, 외에도 10여권의 번역서가 있다.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이해 향상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2007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출간했는데, 당시 연구소 소장 김흥수 박사가 간행사에서 밝힌 글을 여기에 인용함으로 정병준 박사의 사관을 엿보기로 하겠다. "이 책은 그동안 한국교회사 연구자들이 거의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자들과 구분되며, 연구 방법이나 연구 범위에 있어서도 기존의 연구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이 책은 연구 시기를 호주의 첫 선교사가 내한하누 1889년부터 선교상황의 악화로 호주선교사들이 철수하는 1942년까지의 비교적 긴 시기를 연구하고 있으며, 여섯 선교사들을 연구할 때는 젠다 연구(Gender Study) 관점을 적용하여 여성선교사들의 시각과 소리를 찾아내고 있다. 호주장로교 소속의 존 브라운 박사(Dr. John P. Brown)는 이 논문은 한국과 호주의 범위를 넘어서서 당시의 세계적인 사건들과 사회운동들, 그리고 세계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국제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성찰,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1921년 뉴욕 국제선교대회,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 등을 통해 광범위한 콘테스트 안에서 호주선교부와 그 선교정책의 발전을 해석하고 있는 점이 두더러진다. 한국에서 미국장로교 선교부의 큰 규모와 광범위한 활동들에 대한 많은 책들이 기록되었다. 또한 미국에서 공부한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미국선교부들이 남긴 기록들을 다루어왔다. 그러나 호주선교부의 기록들을 토대로 활동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가르쳤던 왕길지(Dr. Gelson Engel)와 권임함(Rev. Frank Cunningham), 그리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가르쳤던 거얼휴 의사(Dr. Bugh Curroll)와 마라연 의사(Dr. Charles Mclaren)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주로 경남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이 한국교회사 안에서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교회와 경남지역의 그리스도안들에게 커다란 손실이었다. 이런 면에서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의 연구 작업은 이러한 공백을 부분적으로 채워왔다. 이번에 학위 논문을 쓴 정 박사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호주장로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이해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p.6 참조). 서울 중심의 역사이해가 경남을 중심한 호주선교 연구에 대한 방해 정병준 박사는 그의 책 서론에서 한국교회사를 논하면서 왜?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며 기술해야 할 구조를 제기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사 연구는 선교역사학자 라투레트(K.S. Latourete) 교수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제 한 후, 1927년에 백낙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를 비롯해, 그의 제자 민경배 박사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기술한 민족교회 사관을 선언한 1968년을 기점으로 1979년부터 민족주의적 사관이 과도하게 엘리트 중심이라고 비판하고 나선 한신대학교의 주재용 박사가 민중교회사를 간행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민중(民衆)의 역사관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부 신진 소장파 교회사가인 감신대학교의 이덕주 박사가 시도하는 토착교회의 역사관을 통해 역사를 기록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전통과 함께 토착 종교문화의 특별한 가치를 수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통과 토착문화 사이의 관계를 단절. 배척의 관계가 아니라, 연결. 완성의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같은 견해는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을 수용. 해석. 적용하는 토착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에 무게를 두고 기술한다. 또한 이들은 피선교지의 정치. 사회적 상황뿐 아니라 토착종교와 문화적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사회정의와 해방의 문제와 함께 토착종교. 문화전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선교사적(宣敎史的),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민중주의적(民衆主義的) 관점을 넘어서서 한국토착문화를 교회사 연구에 수용하는데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사 연구에 어떤 접근 방법을 사용하던 간에 한국교회사 연구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보다 철저한 연구를 요청하는데,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기초를 놓은 일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사건들은 늘 새로운 분석과 해석을 동반한다. 역사는 해석이다 라는 말의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에 앞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 이루어 질 때 분석과 해석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호주장로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아닌가 분석해 본다. 첫째, 국내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가 미국선교사들에 편중되어 있다. 미국선교사들은 카나다와 호주선교사들보다 일찌기 한국에 왔고, 그 인력과 지원도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선교지역 또한 광범위했다. 게다가 한국교회 사가들의 많은 숫자가 미국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들의 역사관과 사용한 역사 자료들도 미국 중심적이었다. 둘째, 서울 중심적인 역사이해가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경상남도(부산을 포함)에서 활동한 호주장로회에 대한 연구를 방해했다. 1950년-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의 민중들은 장기간의 독재로 고통을 겪었고,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발전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경험은 향토사 연구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셋째,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사이에 에큐메니칼 관계의 미성숙이 두 교회 사이에 학문적 교류를 방해하였다. 일제의 억압과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한국에서 철수했던 호주선교사들의 일부가 1947년부터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6.25 전쟁의 발발로 다시 철수했고, 휴전으로 전후에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였다. 이외에도 호주장로회는 한국으로 새로운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미북장로회보다 카나다와 호주장로회 역사 연구 부진의 원인을 그는 이와같이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1977년에 이르러서는 호주장로교회는 감리교와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호주연합교회(Uniting Church of Australia)로 발전하였다. 연합교회로 발전한 이후에도 선교사역은 계속되었다. 아쉽게도 이렇게 명맥은 유지되었으나 한국과 호주 두 교회 사이에 신학적. 인적 교류는 이민교회를 제외하고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로 남아 있다. (정병준, 같은 책 pp.16-18). 호주기독교는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정병준 박사는 한국교회사 연구자들이 무엇을(What)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는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을 복음주의 에큐메니칼의 특성을 지닌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그들의 통전적 선교이해와 형성과정을 연구하고, 그들이 1889년부터 1942년 어간 자신들의 신학사상에 근거해서 한국에서 수행한 선교정책과 선교활동을 연구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 후 첫째,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어떻게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기독교에 도달하였는가? 둘째,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은 선교를 위해 그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유산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셋째, 그들의 선교정책과 선교활동 안에서 발견되는 선교사상은 무엇인가? 넷째, 그들은 한국에서 어떠한 종류의 신학적 이분법들을 극복했고, 어떻게 극복했는가? 다섯째, 호주장로회는 한국에서 무슨 결과를 얻었는가?이다. 그래서 그는 연구 시기를 헨리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가 한국선교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일제에 의해 추방된 마지막 5명의 호주선교사들이 멜버른에 귀국하는 싯점을 끝으로 삼고 있다. 이 기간 총 78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섬겼다. 이 시기는 일제의 통치기간(1910-1945)과 호주기독교 해외선교의 전성기와 겹쳐 있지만, 이 시기는 호주장로회의 초기 한국사역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시기로 규정한다. 그는 또 어떻게(How)라는 명제를 제시해 자신의 연구를 진술하고 있다. 즉 문헌연구(文獻硏究)에 근거한 사회역사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선교잡지, 공식보고서, 선교자료, 선교사 일기, 편지, 인터뷰를 통해 얻어진 자료들을 분석해서 선교사들의 사상과 선교정책의 유형과 특성을 일반화 하는 귀납적인 방법을 적용한다. 그러나 증거를 찾아내는 과정은 연구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연역적 과정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역사연구는 엄밀하게 연역과 귀납적 방법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의 연구가 지닌 특징 중 하나는 호주선교사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본국 선교본부와 선교사들 사이의 관계, 선교사들의 사회적 계층, 그들의 집단적인 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효과적이고, 특별히 이 시도는 그들이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케 해주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들은 선교사 개인과 그들의 사역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류대영 박사 같은 이는 한국에 온 미국선교사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미국종교사의 탈식민지주의 관점에서 그들의 중산층적 성격을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야 말로 한국선교사(史) 연구에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공했다고 보여진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선교사에 대한 연구는 그 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세부 단원들에 따라 서로 다른 인식론적 존재론적 접근을 요청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석들이 필요하게 된다. 호주선교사들은 이런 종교문화적인 환경속에서 은둔의 세계 속에 잠들어 있었던 한국에 와서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유산을 통해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를 증거하였다. 호주선교사들의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기독교와 한국 경상남도 현장과의 만남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만남의 작용에서 선교사들의 통전적 선교이해가 더욱 깊어졌다고 보여지기도 하다. 정 박사는 그의 글 마지막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호주장로회 선교사역의 열매보다는 호주장로교회의 역사적 뿌리의 신학이 무엇인가에 강조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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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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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정병준 박사(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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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수진 박사(1935-2023)
- 본격적 지방교회사 연구 시대를 연 교회사학자 ‘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호남기독교 100년사’등 대표적 저서 많아 전라남도 신안 출신…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 김수진(金守珍)은 1935년 4월15일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에서 부친 김환웅과 모친 김길례 사이에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절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주전쟁으로 인해 모든 물자를 약탈 당하고, 민중의 삶은 초근목피로 생명을 근근히 이어가는 처참한 시기였다. 그래도 수진이는 부모님의 보살핌으로 어린 시절을 구김살 없이 천진난만하게 자랄 수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선말을 잃고 고향 미금국민학교에서 일본말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명석해 광주제일중학교로 진학하였고, 졸업 후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광주 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는 부모님과 스승들의 보살핌도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다져온 기독교 신앙교육이 그의 내적 발전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태어나던 해 유아세례를 받았고,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은 후에 그가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데 큰 원동력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호남지방에 복음을 전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대학은 서울에 있는 단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는데, 미래를 위해서 외국어를 택한 것은 그의 혜안이었고 주님의 섭리였다. 대학을 마친 후엔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에 지원했다. 이는 목회자로서 소명의 길을 걷기 위함이었다. 그는 장로회신학대학을 마친 후, 당시 WCC로부터 제3세계 신학발전을 위한 T.E.F 기금을 유치해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역사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남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스칼라십을 얻어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Toshishd University) 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았고, 이어서 미국 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D.Min) 과정을 거쳐, 코헨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마쳤다. 교회사 연구와 강의… 목회에 헌신 김수진이 이와같이 일본과 미국의 신학대학들을 섭렵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고 본다. 일제 때 국민학교에서 듣고 배운 일본어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것이 그의 역사신학연구에 기초가 되었고 학문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교회사 연구를 하면서, 특히 호남지방교회사를 연구하게 된 계기도 호남땅에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해준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 고마움도 있었지만,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호남땅에, 19세기 말 희망이 보이지 않던 척박한 시대에 복음과 의술, 교육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희망을 심어주고 무지를 깨우쳐 준 신문명의 선구자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동지사대학에서<일본기리시도교회사> 교수인 도이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도이는<일본기독교회사>를 쓴 학자요 교수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 유학을 온 김수진에게 학문적인 스승이 되어 주었고, 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해준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는 모교인 장로회신학대학을 비롯, 대전신학교, 중앙신학교 대학원 등에서 한국교회사를 강의하며 목회를 겸해 헌신하였다. 그가 최초로<한국기독교회사>를 집필하면서 간행한 저서가 '호남편'이란 이름으로 그의 제자 한인수(韓仁洙)와 공편으로 낸 교회사 관계 저서이다. 이 책은 1980년 11월 30일 범륜사에서 간행했는데, 국판으로 430면에 이르는 본격적인 저서였다. 책의 명칭은<韓國基督敎會史 湖南篇>(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으로 되어 있다. 한국기독교 100년사 가운데 특정지역을 연구한 시초였다. 본 필자는 당시 대구 지방에서 목회를 하던 중 이 책을 단번에 밤을 새워 완독을 하고 감동을 받아, 그때부터 대구 경북지방 교회관계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1994년 <大邱地方敎會史>(대구지방교회사)를 낸 바 있다. 미국 남장로회, 호남지방에 수많은 지도자 배출 김수진의<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의 출간은 한국교회에서 직간접으로 지방교회사 연구에 불을 붙인 연구물로 기록될만 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저서가 간행된 후 한국기독교 역사가 한 세기에 접어들었고, 이에 발맞추어 한국교회사 연구에 기름을 부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즈음에 일반 역사학계에서도 소위 지방사 연구붐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간간히 역사있는 교회들이 80년사 혹은 90년사 등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각 교단 신학교에서도 한국교회사 관련 학위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또 능력있는 교회사학자들 중심으로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학술연구단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김수진. 한인수가 펴낸<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의 편찬 내용을 보면, 표제에 걸맞는 호남선교를 위해 내한한 미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사진 14면,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 및 6.25 동란 때 희생된 순교자 7면, 호남선교 역사 관련 화보 10면, 호남 출신 총회장 사진 3면 등이 있으며, 호남선교를 위해 헌신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어 편집상 많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이 저서를 뒷받침한 발간위원회 위원장 김종대 목사의 머릿말을 보면, 이 책을 내게 된 동기를 읽을 수 있다. "… 한국교회사 하면 이것은 장로회신학교가 있던 평양을 중심한 평안도와 황해도의 역사와 미 연합장로교의 한국선교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들의 노고는 높이 평가해야 하고, 또 그 지방의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활동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북장로교의 선교사들의 충동에 그 넓은 곡창지대 호남땅을 밟기 시작했다. 이들도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 못지 않게 갖은 고생과 고난을 겪으며 복음을 전했다. 교회도 수없이 세우고, 병원도, 학교도 세웠다. 또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며, 앞으로 경기도지방을 중심한 교회사도, 또 경상도지방을 중심한 교회사가 나올 때, 한국 전체 교회를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믿는다."(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 1980 p.61). 오늘날 호남지방 교회성장은 수난 당한 성도들의 '피의 열매' 저자 김수진 박사는 책의 머릿말에서 집필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호남지방교회사를 엮어간다는 것은 여간한 고충이 아니었다. 이미 한국에 많은 교회사가 출간되었지만, 호남지방을 배경으로 한 교회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되는 일이어서 자연히 자료를 준비하는데 많은 애로가 있었다. 모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데서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여러 생존해 있는 증인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또 오래도록 간직했던 자료를 제공하는데 힘을 얻고 직접 지방을 답사하면서 얻어진 자료를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여기에 특별한 사관을 가지고 집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료에 의거 연대기적으로 나열한 것임을 밝혀둔다. 말없이 조용하게 호남교회(湖南敎會)가 성장하는 것처럼 느꼈지만 자료를 대하고 직접 만나고 교회를 답사했을 때, 호남교회들은 피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노력과 또 완고한 유교적 가정에서 이교도(異敎徒)의 기독교를 접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예수를 영접했다는 사실들이다.또 일제의 학정으로 인한 숱한 성도들의 곤욕, 누구나 다 겪여야만 했던 이 민족의 6.25 동란이었지만, 호남지방 교회만큼 수난을 당한 교회는 없으리라고 본다. 결국 이들의 피가 지금 호남 평야 넓은 들에 수없이 흘러가고 있다. 이 피가 가는 곳마다 우뚝 솟은 교회를 볼 수 있으며, 산촌(山村)에서도, 수많은 도서(島嶼) 지방에서도 교회는 우뚝 솟아 있다. 막상 책이 손에 쥐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좀더 정확하게 기록을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 밖에 없다. 그저 기쁨보다는 후회가 많다." (같은 책, p.63). 이 책 외에도 김수진 박사의 저서로는1994년 1월부터 전북일보 지상에 매주 연재한<전북 개신교 100년>이란 글을 모아<호남기독교 100년사>(1998)를 간행한 바 있고, <한국교회 평신도운동사>(1984), <6.25 전란과 순교자들>(1981), <호남선교 100년과 그 사역자들>(1993), <한일교회의 역사>(1990), <일본개신교사>(1992), <광주초대교회사연구>(1994), <일제의 종교 탄압과 한국교회의 저항>(199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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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임희국 박사(1955-)
- ‘구술사’ 및 ‘미시사’ 통해 지역교회사 발굴에 공헌 역사방법론에 기여한 사가… 여성 교역자들의 역할 중요시 경북 김천 출신, 불름하르트 연구로 바젤대학서 학위 받아 임희국(林熙國)은 1955년 1월 17일, 경상북도 김천시 삼락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삼락동은 일제 때 경부선 철도가 생기기 전에는 소위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선비의 고장이요, 지역에서 가장 큰 유림촌(儒林村)으로 시가지 중심을 이룬 마을이었다. 일컬어 구읍(舊邑)으로 불리는 김천의 행정 교육 중심지였다. 임희국이 태어난 1955년은 6.25 전쟁이 3여년 만에 겨우 휴전으로 매듭 짓고 나라가 심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러나 희국은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며 머리가 총명한 소년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초등학교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중고등학교는 당시로서는 대도시인 대구로 유학을 가 선교사들이 세운 계성(啓聖) 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미션스쿨에서 학업과 신앙훈련을 받고, 계명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2월 24일?문학사(B.A)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어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교역학 석사(M.Div) 과정을 마치고, 다시 대학원 석사(Th.M) 과정에 진학했다. 당시 상황을 임희국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신학수업 3년으로 전임교역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판단해서 공부를 좀 더 하기로 했다. 전공을 교회사 분야로 선택했다. 대학원 수업은 세미나식으로 진행되었다. 석사학위 논문을 이형기 교수의 지도로 초기 칼 바르트(K. Barth)의 성경해석에 관하여 서술했다. 그런데 논문 작성 과정에서 바르트 신학사상이 불름하르트(Blumhardt) 부자(父子)의 영향 아래 새로이 출발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것이 몇 년 뒤에 바젤에서 불름하르트(아들) 연구에 연계되었다."(교회사연구, 이제는 한국과 아시아로, p.29). 이 연구로 장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학위를 받았다. 임희국은 1987년 9월, 로흐만 교수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개혁교회 총회장학금을 받아 독일에서 어학연수를 거쳐, 바젤대학교 신학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이곳에서 로흐만 교수의 지도로 불름하르트 연구로 학위논문을 쓰게 되었다. 학위논문 내용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독일어권의 교회사와 신학사상사로 전공 정체성을 여기에 두고, 불름하르트의 설교를 신학화 한 학문성을 인정받아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역사신학 강의하며 지역교회사 탐구 그의 논문은 지금까지의 불름하르트 연구를 한 걸음 넘어 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불름하르트의 우주적 이해(Universal Cosmic)를 밝힌 점이 특출하다는 평이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 그 해에 경산에 있는 영남신학대학교에서 1995년 3월 학기부터 역사신학(교회사) 분야를 맡아 가르치기 시작해, 세계교회사와 함께 선택과목으로 영남지역교회사 과목을 병설했다. 이것이 그의 지역교회사 탐구의 디딤돌을 놓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를 중심해 경상도내 경산, 청도, 고령, 경주 등지의 역사있는 교회들을 대상으로 초기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며,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어 연구케 했다. 이어 안동지역의 유림문화권, 경주지역의 불교문화권, 고령지역의 가야문화권을 대상으로 지역 교역자들과도 협력하여 지방교회사 연구에 기초를 다졌다. 그런 가운데 안동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 이원영(李源永) 목사에 관한 자료와 정보협력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당시 안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기수 목사였고, 김 목사를 통해 그의 유족 중 대구 대봉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이정순 권사를 알게 되었다. 이원영 목사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세 후손으로 뼈속까지 유림사상이 가득한 인물이었으나 안동에 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919년 안동과 예안 3.1독립운동 시에 만세 시위를 주동하고 투옥되어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성령을 받아 평생 향촌 안동에서 목사로 헌신하였다. 그는 지역사회와 교회가 존경하는 목사요, 독립운동가와 교육자, 그리고 선비의 삶을 산 실천가였다. 임희국에게 이원영 연구는 스위스 바젤에서 배운 기독교의 보편성과 특성, 곧 그리스도교의 세계적 보편성과 한국 지역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주력한 것이었다. 이원영 연구를 통해 미시사(Micro-History) 연구에 천착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교회사 연구에서 거시적 연구 뒤에 가려져 있던 작은 규모의 역사를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즉 망원경으로 관찰하던 거시사(Macro-History) 작업에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미시사 작업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동 유림 출신 이원영 목사 연구로 서북지역과 영남지역 간의 개신교 선교 비교 영남지역의 장로교회는 역사 속에서, 한편 평안도 서북지역과 연계되어 그 영향을 받았고, 또 다른 한편 영남의 유림전통을 선별적으로 계승하면서 발전하였다. 서북지역은 조선시대에 중앙정부로부터 홀대를 받았기에 정치권력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중국 대륙에 인접해 있으므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층을 중심으로 대륙의 문물이 소개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을 겪은 평양주민들은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명치유신으로 국력을 키운 덕택에 중국을 이겼다고 판단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이 서양문물을 한국에 가져오는 개신교 선교사에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경상도 북부지역에는 조선시대의 지배이념인 성리학(性理學) 전통이 뿌리깊게 자리 잡았으므로 서양종교와 문물이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하였다. 게다가 외세를 배격하는 위정척사(衛政斥邪) 운동이 1880년 안동유림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시작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이처럼 영남지역은 여러가지 면에서 평안도 서북지역과는 다른 환경이었다. 그런데 안동 유생 가운데 몇몇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관한 연구가 지금까지 드물었는데, 이원영 연구를 통해 상세히 그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임희국은 임옥 목사와 그의 부인 이연옥의 생애와 리더십 연구로 계속 이어갔다. 김수만 장로 전기 통해 '구술사'의 중요성 발견 다음으로는 교회사 연구 형태 가운데 하나인 구술사(Oral History) 연구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그 실례가 된 주인공은 김수만(1901-1971) 장로 전기 집필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 연구의 단초는 영남신학대학교 재직시 김석구 학생이 수집 제공한 자료를 만나면서 부터였다. 김수만은 1946년부터 세상을 떠난 1971년까지 25년간 안동지역의 남후면, 임하면, 길안면 내의 여러 동네를 찾아다니며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10여 개 마을에 교회를 개척 설립한 전도자이다. 그의 실화를 근거로 그에 대한 이야기가 교인들만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그의 이름과 행적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확산되어 있는 사실을 수집 정리해 경상도 북부지역의 무명의 전도자 행적을 정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역사 속에 숨겨져 잠자고 있는 실체를 증인들로부터 캐낸 살아있는 전도자의 이야기요, 선교역사 연구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임희국은 이름하여 교회사 속의 구술사 연구라는 장으로 만든 것이다. 임희국의 관심사는 한국교회사의 면모를 파악하며 연구할 수록 연구분야가 점점 확대되어 갔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한 여성교역자들의 연구와 여성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겠다는 사실의 인식으로 나간 것이다. 현역에서 은퇴해 물러나 있는 여교역자들의 삶과 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구술사로 서술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다. 이 일에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작업이라 임희국은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는 세미나 참석자들을 '역사방법론' 과목의 실습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도우미로 활용하였다. 연구대상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소재한 예장통합측의 여교역자 안식관에 기거하고 있는 은퇴교역자들이었다. 안식관에 거처하고 있는 11명의 왕년의 전도 사역자들에게 장신대 대학원생들을 1명씩 짝을 이루어 ①가족사항, (②학교 및 신학교, ③청소년 시절의 사회환경 및 겪은 역사적 사건, (④배우자 및 자녀, 사회경험, ⑤교역자로 사명 깨들은 계기, (⑥ 목회경력, ⑦내게 힘이 된 성경 및 찬송, ⑧다음세대에 전해주고 싶은 신앙유산 및 후배에게 남기고 싶은 말, ⑨사전에 이력서 작성 및 소장하고 있는 자료 수집 등을 정리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역과 역사가 한국교회 부흥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파악하기도 하지만 귀중한 자료로 삼을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개교회사 및 지역 노회 역사연구로 확대 마지막으로, 임희국의 관심사는 마을 및 지역교회사 연구와 함께 개교회사 및 노회역사 연구로 관심의 폭과 연구의 범위가 점점 확대되어 갔다. 구체적인 성과물로는 서울 동신교회 50년사, 소망교회 30년사, 평양노회 100년사, 강원노회 60년사 등을 집필하기에 이르렀고, 특이한 연구 프로젝트로는 제주지역 전통문화와 그리스도교 연구가 있고,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예장통합 역사위원회의 사업으로 장로교회 전수조사를 한 것은 큰 과제였고 보람된 일로 기억하고 싶다고 하였다. (같은 책, p.34-60 참조). 임희국 박사는 1995년 이래로 2019년까지 세계화 시대에 상응하는 지역교회사 연구에 착수했다. 연구가 진척되는 동안에 이 연구가 교회사 바깥 일반 역사학계에서도 담론으로 정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포스터모던 시대에 일반역사학에서 논의되는 새로운 연구방법을 살펴가면서 1995년 이래로 25년 간의 지역교회사 연구를 진척시켰다고 회고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름하르트가 증언한 하나님나라(Ph.D 학위논문), 선비목사 이원영(2013), 여성지도자 이연옥(2011), 김수만 장로 절면서 10개 교회 세움(2004), 베이도의 선교와 사상(2013), 성효 최거덕 목사(2010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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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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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임희국 박사(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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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만열 박사(1938-)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창립, 본격적 한국교회사 연구 ‘한국사’전공에서 ‘한국기독교사’연구자로 나선 교회사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4년?간 교수직에서 해직 이만열(李萬烈)은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으로 어린 시절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삼촌 두 분이 마산에서 살고 있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마산에서 다녔다. 총명했던 만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아,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명예교수로 정년 퇴직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재직시 당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7월부터 1984년 8월까지 4년간 해직 상태로 지냈다. 휴직 기간에 젊었을 때에 하고자 했던 꿈이 이루어졌다. 박윤선 박사가 막 시작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학교의 요청으로 한국교회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학생으로 등록해 신학을 공부한 것이다. 후에 기독교사상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대한성서공회 100주년을 앞두고 성서공회 100년사 집필 의뢰를 받고 자료정리와 자료수집을 위해 미국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를 방문하여 프린스턴신학교와 미국 장로교 역사자료실, 카나다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 감리교 본부를 방문하여 선교사들이 기록한 한국 관계 문헌들을 열람하고, 많은 자료들을 마이크로 필림으로 복사해 국내로 가져왔다. 1982년 그 자료들을 국내 한국교회사 관련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이를 초교파적으로 운영해 오다가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개편, 오늘의 한국교회사 연구의 발판을 놓았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창립은 이만열 박사에겐 인생 후반의 전기가 되기도 하였다. 수집된 자료로 UCLA대학 교수로 있는 옥성득 박사와 함께 <대한성서공회 100년사>를 집필했다. 그는 숙명여대 교수로 복직한 이후 도산학회, 함석헌학회, 김교신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복음과상황 공동발행인, 외국인근로자를 위한?희년선교회 대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사)뉴코리아 대표, 사)남북역사교류협회 이사장, 학교법인 상지학원?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수주일'이 신앙생활에 큰 영향 그는 고백한다.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어릴 때 받은 주일학교 교육의 영향이 크다. 고향 함안지역은 1897년에 호주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있고, 1909년에 세워진 군북교회가 있다. 이 교회를 세울 때 우리 할머니, 아버지, 삼촌들이?힘을 많이 썼다. 해방이 되면서부터 그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해방이 되던 해가 초등학교 1학년?때인데, 아침에 일본인 교장 훈시를 듣고 학교 내 신사 앞에서 묵념하는 의례가 없어진 것만 달랐지, 해방의 의미는 몰랐다. 그러나 주일학교에서 모세와 출애굽, 삼손, 다윗, 다니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식민지 치하에서 투쟁을 통해 해방을 얻게 되었는가를 배웠다"고 하였다. 자신이 역사공부를 하게 된 것도 주일학교 교육의 영향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오늘날 피폐해 가고 있는 주일학교 교육 실태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오늘날 한국교회 주일학교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요인을 지적한다. "저희 때만 해도 주일성수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어릴 때 주일성수 교육을 받고 집에 와서 머슴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 저 사람들 오늘 일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라고 할 정도로 성수주일 교육을 철저히 받았는데, 요즈음 한국교회는 성수주일 교육을 등한히 하고 있음을 질타하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자신은 대학 4년동안 8번의 학술답사 행사가 있었는데, 그 일정 중에는 꼭 일요일이 끼여 있어서 한 번도 그 답사 행사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유는 주일학교에서 주일성수에 대한 신앙훈련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72년 숙명여대 재직시에 10월 유신이 있었는데, 대학교수로서 사회의식이 많이 생긴 때이라 이 때는 못견디겠습디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후퇴시키는 유신인데 역사를 공부한다는 젊은 교수가 한 마디 못했으니까. 그래서 1973년에 쓴 글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이란 논문이었는데, 그 논문을 읽은 사람들이 그건 한말 191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이야기라고 생각했던지 그 논문을 읽은 진보적 교회 인사들이 저를 부르기 시작했고, 기장측에 속한 김상근 목사, YMCA 강문규 회장 등이었고, 이게 원인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1980년대에 같이 교수직에서 해직된 이문영, 안병무, 서광선, 현영학, 서남동 교수 등과 동지가 되어 함께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는데,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신군부가 12.12 사태를 일으키게 됨으로 민주화는 커녕 분위기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5.18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저녁에 요시찰 인사들과 각 대학 학생회장들과 간부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당시 해직된 교수들이 86명이었다. 그 중 30여 명은 해당 학교의 분규로 해직되었고, 50여명은 시국 관련으로 해직된 자들이었다." 해직 기간 신학훈련 마치고 한국기독교사 자료 수집 및 정리 그는 또 해직된 동안 감사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전에도 가끔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강연도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저를 자주 청해주었습니다. 청하는 이유 가운데 물론 강연을 듣겠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해직된 후엔 경제력이 없어지니까 강사료를 주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5.18 만주화 운동 1주년 되는 때에 광주YMCA가 초청하여 3일 간이나 강연을 하게 되었고, 또 하나는 서울 향린교회에서 한 강연인데, 그 때 문익환 목사, 이기탁 교수, 송건호 선생 등과 함께 두 사람씩 짝이 되어 강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청중 속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당국에서 파견한 형사들이었습니다." 이만열 박사는 젊었을 때 소원이 목사(牧師)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하니, 소속 교단 고려신학교가 부산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 이 박사는 어머니와 동생 셋을 부양했던 관계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소원은 뒤늦은 때였지만 해직교수가 된 후, 박윤선 박사의 권유로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에까지 합격했으나 담임목사의 꿈은 접기로 하였다고 고백한다.(기독교사상 2021년 10월호, 최상도 교수와의 대담). 이만열 박사가 한국근현대사 연구에서 <한국기독교사>로 학문 영역이 확대된 계기가 있었다. 1980년 7월 신군부에 의해 교수직을 해직 당했을 때, 해직 기간동안 미국에서 내한 선교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자신의 학문 영역이 기독교사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전공이 한국사 중심이었는데, 이 때의 자료 수집과 '기독교역사연구회' 설립을 계기로 한국교회사 연구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논문도 그 쪽으로 더 많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평가해 볼 때, 저는 일반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사를 연구한 최초의 학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한국교회사 연구를 대부분 신학 하신 분들이 했습니다. 백낙준 민경배 송길섭 교수도 신학을 하고 교회사를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사를 공부하고 교회사 연구로 넘어온 셈입니다. 저 다음부터 윤경로 교수나?김흥수 교수를 비롯해서 일반사학이나?종교학을 전공한 이들 중에 한국교회사를 주제로 학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됐습니다. 사실 백낙준 박사나 민경배 박사의 경우는 자료를 가지고 실증적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했지만, 다른 분들은 주로 구전으로 들은 것을 그냥 강의 시간에 얘기해 주는 정도였어요. 엄격한 학문적 검증을?거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사 연구의 기초를 가지고 한국교회사를 하게 된 사람들은 역사학 방법을 교회사에 도입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료를 공유하면서 공동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백낙준 박사나 민경배 박사는 주로 혼자서 자료를 찾고 연구했어요. 그리고 찾은 자료를 공유하지 않고 혼자 소장 하면서 개인 연구로 업적을 내고 그랬어요. 제가 후배 동지들과 함께 1982년에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고, 1990년에 연구소를 함께 설립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료 공유를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집체적 연구라 할 수 있지요. 그렇게 자료를 공유하니까 여러 사람이 업적을 많이 내게 됐죠. 한국교회사 연구를 엄격한 자료 검증을 통해서 하게 된 것, 그리고 자료 공유와 공동연구에 제가 조금은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발전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의 증가 이만열 박사는 또 "저는 글을 쓸 때 생각의 촛점을 신앙(信仰)과 민족(民族)과 역사(歷史)에 둡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그게 나의 역사관인 것처럼 들릴 수 있겠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고, 제 생활과 사고의 주 영역이 신앙, 민족, 역사라는 말입니다. 민족주의 역사주의가 아니라 제 삶의 바탕이 신앙과 민족 그리고 역사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끔 사관(史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데 답하기 참 어려워요. 우선 저는 역사는 시간 속에서 어떤 생동감을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은 시간입니다. 저는 시간의 변화 속에서 인간, 지역 등의 변화를 파악해 내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항상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를 어떻게 파악 하는냐가 역사가의 중요한 역할이지요. 동양 사상에 역학(易學)이 있습니다. 여기서 역은 변할 역(易)자에요. 천태만상 변하는 것을 동양 학문으로 엮어 놓은 것이 역학이에요. 이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면 역사 의식이 굉장히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변화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을 따르죠. 젊은 사람들은 저항을 해야만 사회의 변화가 오고그 변화를 통해 새로움이 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저항이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이런 변화를 확신하기 때문에 저항하고 그 변화를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인격과 사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양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역사 발전으로 봅니다. 옛날에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왕이나 권력자 몇 사람 밖에 없었는데, 민주화 이후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인간이 양적으로 증가할 수록 평등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러므로 역사 발전은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많아짐과 동시에 주체적인 인간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만열은 우리가 일제 하에서 차별 받은 것을 경험으로 하여 우리나라 군인들이 월남에서 주민들에게 횡포한 부끄러움도 민주화 된 국가의 일원으로써,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받고 고통 받았던 바를 거울 삼아 이 땅에 먹고 살기 위해 찾아온 다민족들, 그들 거류민들에게 선의로 대하고, 오히려 봉사와 섬김으로 이를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일제 때 정신대 문제를 두고 일본에게 사과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가 외국에서 잘못한 것, 특히 월남전에서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보상하는 차원에서 이 땅에 온 이주민들에게 잘 대할 것을 강조하는 역사학자이다. 저서로는 <삼국시대사 강좌><한국근대역사학의 이해><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역사의 중심은 나다><한국기독교의 역사의식><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대한성서공회사 1,2><한국기독교 의료사><역사의 길 현실의 길>(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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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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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만열 박사(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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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윤경로 박사(1947-)
- 시대의 변천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역사의 재 해석이 중요 ‘새문안교회 100년사’ 등 저술… 국사학자로서 교회사 연구 양주 덕정 출신... 고려대에서 한국사 전공 윤경로(尹慶老)는 1947년 4월 20일, 경기도 양주시 덕정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과 초등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1967년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학의 명문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문학사(BA),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한 후 1974년 교육학석사(MA), 그리고 1988년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 역사문화학부에서 가르치기 시작해?교수협의회 회장을 비롯 총장직무대행을 등을 지냈다. 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공동대표, 사법시험관리위원회 민간대표, 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 및 통일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재일동포교육진흥재단 공동대표, 서울YMCA 시민논단위원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운영위원, 국가보훈처 공적심사위원 등을 맡았으며, 한성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윤경로는 일반 사학자이면서 한국교회 역사를 탐구해온 역사학자요, 교회사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국사학에 뿌리를 두고 연구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관련 연구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크리스챤 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의 어머니 교회인 <새문안교회 100년사>라는 거작을 남겼고, 자신의 학윈논문도 한국 기독교와 깊은 연관이 깃든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1990)를 쓴 바 있다. 그는 "역사란 고백하는 것이다. 역사란 지나온 사실을 파악하여 교훈을 얻고 새로운 미래를 구축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한국근현대사의 성찰과 고백, 윤경로 2008 서문)라고 한다. 역사는 인류생활의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해석 그는 자신의 저서 속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계속 설명한다. 역사란 인류생활에 관한 과거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곧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같다고 한다. 이 물음에 대한 정의는 간단치 않다고 전재하고, 우선 인간에 관한 과거의 기록이면 모든 것이 역사가 될 수 있는가? 라면서 자신의 역사관을 펼치고 있다(위의 책 p.15). 우리는 점과 점의 연결을 선(Line)이라 부른다. 수많은 점들이 있다 해도 이를 상호 연결시키지 않으면 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의 정의를 이 같은 선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선을 역사선(歷史線)이라 가정해 보자. 이 역사선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점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점들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우선 역사선상에 오른 점들은 '과거의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점들은 수학에서의 그 것과는 다르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학적으로는 점과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된다. 다시 말해 선의 크고 작음이나 그 점 자체가 특정한 가치나 의미를 지닐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역사선상의 점들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역사선상에 오르기 위해서 그것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역사선상의 점들은 수많은 과거의 사실(事實, facts) 가운데 의미를 부여받은 사실(史實, Historical facts)로서의 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왔다는 정도이다. 문익점의 삶 전체를 언급하지 아니하고 그 개인의 행적 가운데 전 생애를 주목하지 않고 그가 목화씨를 가지고 돌아와 전했다는 사실(事實)만을 역사는 기억하는 것과 같다. 서양 고대사에 나오는 로마 공화정 말 씨저의 루비콘강 도하를 역사적 사건으로 주목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루비콘강을 도하했지만 씨저의 도하만을 의미있는 사실(事實), 곧 사실(史實)로 보는 것이다. 우리 근대사에서도 1961년 5월 16일 새벽 정치군인들의 한강 도강만을 우리 현대사에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과 같다고 비교 설명한다. 한강을 가로질러 넘나드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의미가 부여된 점(Meaning of Events)만 연결해 역사화 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해석하는 사람 이상과 같은 작업을 행하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역사가(歷史家)라고 한다.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역사가에 의해 역사선 위에 올려질 때 비로서 그 사실(事實)이 사실(史實)로써 발언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역사가의 사안(史眼)은 매우 중요하다. 어떠한 입장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 그 선 위에 오를 수도, 제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의 평가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볼 때 '역사란 무엇인가?'란 결국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역사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 가리켜 사관(史觀)이라 한다. 그리고 이 사관은 역사가의 시대 인식과 당 시대의 정치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역사의 정의와 개념이 시대와 상황? 그리고 역사가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규정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인 것이다. 예컨데 아놀드 토인비(A. Toynbee)는 역사를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으로 보았으며, 역사철학자 헤겔(Hegel)은 절대정신이?변증법적으로 자기발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 사실과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규정하였다. 한편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족사학자인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렇듯 역사란 역사가의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정의를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객관성을 중시한다. 흔히 역사가의 기본적인 자세와 임무를 과거사실 그 자체가 어떠하였는가를 밝히는데 있다고 정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만큼 역사에서는 실증성(實證性)과 객관성을 중시한다. 동양에서는 고대로부터 역사를 사(史)라고 표기하고, 기록하는 사람을 사관(史官)이라 하고, 역사기술에 사용된 사료를 사초(史草)라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史'란 모두 이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엄밀한 이미에서 객관성은 존재하기 어렵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역사선의 비유에서 보듯 수많은 사실 가운데 역사선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역사가의 가치판단에 의한 선별된 사실들이다. 이렇게 볼 때 '선별된 사실' 그 자체에는 이미 역사가의 주관성(主觀性)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또한 시대의 변천과 상황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과거사실 그 자체를 있었던 그대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리고 그 복원이 역사연구의 최종 목적도 아니다. 그보다는 과거의 그것이 현재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역사 해석의 문제가 보다 중요한 관심사이다. 역사의 재 해석은 '동학란'에서 '동학 혁명'으로 승화시켜 다시 말해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 자체를 알려는 단순한 지적 만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사실을 통해 현재 우리 모습을 보다 객관적이고 역사적으로 인식하려는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들의 역사 공부는 과거 사실을 암기하는 단순한 지적 학습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 공부 내지 역사 연구는 과거의 단순한 사실을 익히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즉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을 밝히고 이를 해석하는 학문인 것이다. 과거의 소극적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던 인물이나 사건이 시대의 변천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적극적,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연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우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평가를 살펴보면 당시의 봉건적 지배 세력은 동학란(東學亂)이라 규정해 동학(東學)이란 혹세무민 하는 종교집단이 정치 사회적 혼란을 틈타 기존 봉건사회를 파괴하려 했다는 시각에서 난(亂)으로 가정한 결과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해방 이후 동학에 대한 평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동학이란 개념에서 학문이란 가면을 벗어나 '동학 난'이 아니라 '동학 혁명'으로 바뀌었다 하는 점이다. 즉 난(亂)에서 혁명(革命)으로 그 의미가 크게 제고된 것이다. 비록 당시의 거사는 실패하였으나 그 시대 우리 민족이 풀어나가야 할 역사적 과제였던 반봉건과 반침략의 문제를 온 몸으로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 주목하여 '혁명'이란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한 것이다. (같은 책 p.20). 이를테면 4.19 부정선거 타도에서 4.19 혁명이란 이름으로의 승화랄까? 5.18 광주사태가 아니라 5.18 민주혁명으로 재 해석하기에 이른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역사에 만일이란 테제가 있을 수 없다지만 중세 봉건통치와 일제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면 이 같은 전봉준의 동학반란은 동학혁명으로의 승화는 불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역사는 재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있다" 흔히 말하기를 역사를 공부하면 미래가 보인다고 한다. 이미 지나가 없어져 버린 과거를 통해 어떻게 미래를 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역사는 개인이나 가족 혹은 한 사회를 점치는 예언과는 다르다. 뿐만아니라 새로운 세기의 진입 이후 주목 받고 있는 미래학(未來學)과도 그 궤를?달리한다. 불확실한 각종 통계와 자료분석 그리고 유사한 사회현상 등을 추스려 향후 세계는 이러할 것이며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라고 미래학은 진단하고 예언하지만 정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나온 인류 역사를 보아도 그 같은 추리나 예언대로는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카의 지적대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하였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은 나를 나 되게 한 과거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미래를 유추하고 전망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역사의 현재성이란 의미는 크로체(B. Croce)의 말대로 '모든 과거의 역사는 현대사 이다'란 말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윤경로는 역사는 늘 새롭게 재 해석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를들면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할 당시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종의 진심과 그 목적이 애민사상에만 집착 해석할 것이 아니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세종의 마음 속에 한글 창제를 통해 백성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다스릴 목적은 없었겠는가? 역사는 이 같은 재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역사관을 그는 피력하고 있다. (같은 책 p.22). 주요 저서로는 (1)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1990), (2)?한국근대사의 기독교사적 이해(1992), (3) 낙산의 삼학송(1993), (4) 안창호 일대기(공저 1996), (5) 새문안교회 100년사(1987), (6) 한일YMCA 교류 역사(2002), (7) 105인 사건 공판 참관기(2001), 한국근현대사의 성찰과 고백(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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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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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윤경로 박사(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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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형기 박사(1938-)
- 강원도 영월 출생... 서울대 종교학과 거쳐 독일과 미국서 공부 이형기(李亨基)는 1938년 4월 17일,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에서 한국 종교학의 석학인 신사훈 박사 밑에서 어학과 종교학의 이론에 대한 기초훈련을 쌓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교역학 석사과정(M.Div)을 마치고, 독일 뮌스터대학 신학부를 거쳐 미국 하바드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Th.M), 드류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Ph.D)를 마쳤다. 그는 미국 뉴욕 엠허스트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1978-1980)로 사역하다가 1980년 모교 장로회신학대학의 부름을 받고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한국교회사학회장(1997-1998), 공적신학과교회연구소장(2008-2016)을 비롯?WCC 산하 여러 분과에 소속위원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세계교회사>(1994), <에큐메니칼운동사>(1994), <역사 속의 교회>(1995), <기독교사상사>(공저 2002) 등이 있다. 그는 '나의 신학 수업의 여정'이란 글에서 "인간은 개인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산다. 나는 한 아내의 남편과 두 자녀의 아비로서 가정공동체 안에서 살았고, 통합측 장로교단 안에서 목사로서 활동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장신신학공동체 안에서 23년 간(1980-2014)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면 이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뜻?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2005년에 고관절 수술을 하였고, 2013년에 경추수술을 하였으나, 과학기술적 지식과 인문과학적 지혜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의 원천이기도 한 생명의 샘, 곧 하나님의 영께서 모든 제2차적 원인들을 통하여 부족한 사람을 큰 병으로부터 치유하여 주심에 아무리 크게 감사해도 부족하다"(에큐메니칼운동과 에큐메니즘, 2017 p.19)라고 진술한 바 있다. 1980년 이후 장신대서 은퇴할 때까지 교수 생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그에게 사사한 제자들이 2019년 9월에 그의 팔순을 기리는 기념논문집 두 권을 만들어 스승에게 헌납하였다. 그 논문집 제2권 <공적신학과 교회갱신>에서 출판위원장 임희국은 출간에 즈음하여란 인사말에서 "이형기 선생님은 1980년 모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에 교회사 교수로 부임하였고, 이때부터 4반세기 동안 교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4반세기 선생님의 신학여정에는 그 이동의 폭이 넓었습니다. 부임 후 약 5년 동안에는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하여 그 시대의 서양교회사 및 신학사상을 가르치셨고, 그 다음 약 5년 동안에는 본 훼퍼와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20세기 개혁교회 신학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주력하였고, 1990년대에는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다양한?신학사상을 연구하셨고, 2001년부터 은퇴하시던 때까지는 몰트만의 신학과 포스트모던이즘에 대응하는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의 제자들은 재학한 연도에 따라서 각자의 성향과 지향점에 맞추어 나름의 형형색색 신학사상을 배웠습니다"(공적신학과 교회갱신, 2017 p.7-8). 이형기 박사는 장신대학원 교수 생활을 은퇴한 후의 자신의 신학 활동 편력을 '그동안의 신학 활동을 회고하면서'란 글에서 자신의 신학 여정을 정리하고 있다. "나는 1980-2004년 동안 장신공동체 안에서 나 자신을 키우고 후배들을 키우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은퇴하면서 '나의 신학 수업의 페러다임 이동'(2004)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핵심은 제1시기(1938-1968), 제2시기(1980-1985), 제3시기(1986-1990), 제4시기(1991-2000), 제5시기(2001-2016)로 신학연구 페러다임 변화를 정리하였다. 은퇴 후(2005-2012) 바른교회 아카데미 위원장으로? 한국교회 직제 개선을 위한 방안 연구(2011), 한국교회를 향한 경제 선언문(2012)을 공포하였고, 이에 덧붙여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소그룹 연구모임을 결성해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집중 연구하였다. 제5시기에 해당하는 기간에는 불트만 신학과 포스트모던이즘에 대응하는 신학으로?몰트만의 신학과 내러티브 신학에 대한 내용이었다. 몰트만 신학에서는 역사 속의 종말론은 전적으로 몰트만의 종말론으로부터 동기부여를 받고 기독교 신학 역사 속에 나타난 종말론을 평가해 본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와 공적신학> 그리고 <교회론의 페러다임 전환>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교회론으로부터 몰트만의 교회론으로, 역시 몰트만의 종말론적 신학에 입각한 글들이었다. 한 마디로 몰트만의 저서들의 신학에?대한 요약 정리였다. 내러티브 신학은 이레네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루터와 칼빈 그리고 칼 바르트와 한스프라이로 이어지는 내러티브 신학을 소개하였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성경읽기>는 포스트모던이즘의 '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성서의 거대 담론과 담론들이 위협을 받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신학적 대안이었다. 그리고 성서의 내러티브 신학과 교회의 공적책임에서는 한스프라이, 칼 바르트, 몰트만, 크리스라이트, 보캠과 하트, 그리고 스탠리 하우어와스의 내러티브 신학자들을 소개하고, 본문과 본문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와 같은 성경 이해가 공적신학 차원이 취약함을 밝히고, 생명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및 교회에서 그와 같은 취약성을 크게 보완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관점에서 모던이즘 시기의 역사학자들의 역사관들과 포스트모던 시기의 포스트모던 사관들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대안적 사관을 제시하였다. 에큐메니칼 신학 분야에서는 운동의 페러다임 전환은 그동안 WCC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에큐메니즘의 역사가 10 차례의 총회를 겪으면서 어떠한 신학적인 페러다임을 보여 왔는가를 논구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신학>(2013)은 1990년대부터 2013년에 이르는 동안에 강연이나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들을 모음으로서 다양한 에큐메니칼 신학적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번역서인 <에큐메니칼 운동>은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서 그동안 축적된 에큐메니칼 운동과 에큐메니즘에 대한 매우 귀하고 꼭 필요한 자료들을 싣고 있다"(에큐메니칼 운동과 에큐메니즘, 2017 pp. 20-23).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신학적 대안 모색 임희국 박사 은퇴 기념논문집(2020)에 '장신대 역사신학의 발자취'란 논문을 쓴 서원모 박사는 이형기의 역사신학을 '신학의 전환 신정통주의 신학'이란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형기는 자신의 신학사상의 변천을 서술하면서 1986년부터 1990년까지를 제3시기라 불렀다. 제1시기가 유년기로부터 장신대 신대원과 대학원 졸업까지의 시기(1938-1968)라면, 제2시기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연구한 시기로 1980년부터 1985년에 해당한다. 1980년에 이형기가 <에라스무스와 루터에 있어서 인간론 비교>라는 논문으로 드류대학(Derew University)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시기로, 가을학기부터 장신대 강의를 시작했다. 하바드(Havard University) 신학부에서 공부할 때에도(1972-1974) 그는 종교개혁 분야를 공부하였으니 종교개혁 신학에 대한 관심은 뿌리가 깊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 신학에 대한 관심은 <종교개혁 신학사상: 루터와 칼빈을 중심하여>(1984)와 <기독교 강요 요약>(1985)의 출판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이형기는 1986년부터 자신의 신학이 "신종교개혁신학" 혹은 "신정통주의신학"으로 변화했다고 말한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미국에서 귀국하여 종교개혁 신학과 세계교회사만을 강의하다보니 너무 신학의 시야가 비좁은 것으로 여겨졌고, 이종성 박사 등이 신정통주의를 소개하는 분위기도 함께 작용하여 당시에는 종교개혁 신학보다 신정통주의 신학서들이 더 큰 감명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오늘을 사는 교회에게 말하는 것으로 생생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86년에 장로회신학대학 신학성명의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 초안에서부터 신종교개혁 신학이 암시되었고, 대화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해 눈을 띄게 되었다. 1985년 신학성명을 기초한 이형기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성명 안에는 신종교개혁 신학, 대화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등 신학의 새로운 방향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오늘의 사람들과 교회에게 말하는 신학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졌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종교개혁신학에서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넘어가는 확실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개관한 서적들과 바르트의 신학입문서를 번역했고, 본 훼퍼의 교회와 사상을 연구했다. 특히 그는 바르트의 신학입문서를 번역하면서 바르트의 성경해석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첨부했는데, 이것이 그의 신학 제2기의 말씀 이해에서 바르트의 말씀 이해로 페러다임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교회사연구, 이제는 한국과 아시아로, 임희국 교수 은퇴 기념도서, 2020 pp.83-85). 이형기의 제4기(1991-2000)에 해당하는 시기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신학으로 페러다임이 이동하는 시기를 말한다. 그는 이미 1990년에 세계교회협의회(WCC),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섭렵하여 바르트 신학에서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같은 책, p.86). 이형기의 제5기(200년 이후)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의 신학과 몰트만 신학과 내러티브 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시기의 이형기는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면서 에큐메니칼 신학과 몰트만의 종말론적 복음., 내러티브 신학을 종합하였다.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 시대의 문화적이고 사상적인 흐름을 읽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모던이즘에 대한 포스트모던이즘의 비판은 받아들이면서도 극단적인 해체론은 경계하면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합한 기독교 신학을 탐구했다. 그는 바르트, 몰트만, 에큐메니칼 신학이 스탠리 그랜츠가 포스트모던 신학의 요건으로 제시한 개인주의, 합리주의, 이원론, 주지주의를 넘어서는 복음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신학적 대안으로 내러티브(narative) 신학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에 이형기 박사는 몰트만의 희망신학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는 몰트만 신학을 통해 복음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 모두가 그것보다 큰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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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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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형기 박사(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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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은석 김의환 박사(1933-2010)
- 전남 장흥 출신... 군목 제대 후 미국 유학 은석 김의환(恩石 金義煥) 박사는 1933년 11월 19일 전라남도 장흥군 대적읍에서 출생했다. 의환이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어머니와 함께 경남 진주로 이사하여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해 1951년 졸업하고, 1953년 고려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1957년에 졸업한 후 육군 군목으로?입대하여 2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제대 후 미국 커버넌트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가, 1960년에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레피즈에 있는 칼빈신학교(Calvin Seminary)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63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하고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고, 1966년에 미국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The Korean Church under Japanese Occupation with Special Reference Movement with Presbyterianism>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개혁장로회(CRC) 필라델피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OMF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일본 선교사로 가고자 하였으나,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인 선교사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966년 귀국 후 그의 모교인 부산의 고려신학대학의 교수로 가게 되었는데, 정식 발령이 나기 전에 특강을 하는 중에 한 학생이 "전에는 고신측에서 승동측과 합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다시 환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목사님은 역사신학자로서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분열하는 것이 무슨 하나님의 뜻이냐"고 대답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려신학대학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을 총신대학교의 명신홍 학장이 그를 초청하여 1967년 3월부터 총신대학교 조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하여 부교수, 정교수로 봉직하다가 1976년 총신대학교를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총신대 교수직 사임하고 미국서 교회개척 당시 그가 총신대학교를 사임한 배경은 안식년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LA에 갔을 때, 총신대 이사회에서 외국에 가족이 있는 교수들은 3개월 안에 모두 한국으로 이주시키라는 결의가 있었는데, 이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그는 교수직을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나성한인교회를 개척하여 1995년까지 시무했으며, 그 기간 1982년부터는 미국에 국제신학교(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여 1995년까지 학장을 역임하였고, 1985년에는 미국 개혁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초빙교수가 되기도 했다. 1995년 다시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부름 받아 1999년까지 총장직을 역임한 후,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서울 성북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였고, 2002년에 한국 칼빈대학교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2007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1967년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54년 간 교수로, 목회자로, 총장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교회와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지사충성을 다하다가, 2010년 5월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영면에 들어갔다.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와 접목시킨 칼빈주의자 은석 김의환 박사를 흔히 개혁주의 신학자요, 칼빈주의 학자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가 교회사학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은석은 1982년에 <기독교회사>(성광문화사)를 저술하고, <복음주의 신학과 한국교회>(2004), ,현대신학과 개혁주의 신앙>(2004) 등 여러 편의 교회사와 관련된 책을 썼다.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이인선 박사는 김의환 박사를 가리켜 복음주의적인 개혁신학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은석이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와 접목시키고자 한 것을 일컬어 지적한 것이다.(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 2020 p.895). 김의환 박사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 교회사가(敎會史家)의 안목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나, 민중신학, 또는 WCC신학 등을 비판하였다. 진정한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르면서 알미니안주의를 포함하여 개혁주의와 구분된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영적 갱신과 선교적 책임감을 일깨우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을 정리한 김의환은 먼저 복음주의의 두 가지 과제로 건전한 정통신학의 보수와 발전, 즉 이단과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는 책무를 감당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세계 선교전략을 수립하여 선교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오늘의 상황에 맞는 가장 효과적인 선교를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복음주의 운동의 결실로 ACTS 설립에 역할 김의환 박사는 미국에 유학하던 시절에 미국 교계를 신복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았고, 거기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들 신복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의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한국교회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첫째로, 이러한 복음주의의 연합된 복음전파 활동에 영향을 받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를 설립하는데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복음주의운동이 전개되어 결실을 맺은 가장 중요한 사례이다. ACTS는 1974년 5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개교하였다. 둘째로, 김 박사는 미국에서 신복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던 복음주의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를 국내에서도 설립코자 하였다. 한국교회가?1960년대에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 속에서 분열하면서 교단의 벽에 갇혀 있던 상황에서 김 박사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교류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미국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의 폐쇄성과 현대주의의 탈교회화 현상을 동시에 비판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적에 동조하는 신학자들의 교류를 촉진하고자 하였다. 한국에서 이러한 시도를 제일 먼저 했던 사람이 바로 김의환이었다. 그는 귀국하여 미국에서 신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던 미국의 복음주의신학회를 본받아 한국복음주의신학회를 1971년에 조직히였다. 기록을 보면, "1971년도에 김의환 한철하 오병세 조종남 제씨는 한국복음주의신학회를 창설하고, 한국 내의 신학정립과 해외 학자들과의 신학운동을 다짐한다. 그후 10여년 간 잠시 침체기에 들어가 있었으나, 해외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젊은 학자들끼리 자주 만나 복음주의신학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됨에 따라 당시 회장직을 맡아 보고 있던 한철하 박사가 발전적 해체를 하고 재출발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의환 박사는 한국교회가 교단적 폐쇄성을 극복하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건전한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주의신학회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김의환은 철저한 개혁주의자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의 신학논쟁 과정에서 가지게 되었던 소극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생활과 분리된 신앙생활을 하는 반동적인 신학의 부정주의적인 정신 풍토를 극복하고자 했다. 김의환은 예장합동 교단의 경직된 교단적?분위기 속에서도 분명한 교회연합 활동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활동하며 기여했다. 교회연합 활동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조직과 연합을 우선시 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비판하면서 교회연합과 일치에서는 교리적인 순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교회의 사회참여도 복음주의적 시각 반영 김박사는 이러한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가지고 복음주의적인 선교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는 김의환 자신이 일본에 선교사로 가고자 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교수 사역을 하면서도 선교활동에는 항상 적극적이었다. 그는 1990년대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그의 교회사적이고 세계사적인 안목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김 박사는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서도 개혁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시각에서 교회사적이며 선교사적인 면에서의 입장임을 엿볼 수 있게 노력하곤 한다. 그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두 가지 유형을 언급한다. 첫째 유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탈세계적인 경건주의를 부르짖는다. 이러한 탈세상적 경건주의는 현실도피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기도원 운동과 일반은총을 무시하는 재세례파적인 부흥운동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한다. 둘째 유형은 교회가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유형이다. 한국교회는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영향으로 정치참여의 반열에 직접참여하는 형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식의 보유자는 될 수 있어도 민족주의자는 될 수 없다. 정교분리의 기본정신을 떠나 교회 이름으로 한 정권에 부질없이 관여하여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킨다고 경고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는 경건주의적이고 부정주의적인 반응과 정치 현실에 대한 직접 참여의 양극단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말씀의 봉사, 둘째 기도의 봉사, 셋째 구제의 봉사라는 교회 원래의 본질을 말한다. 또 그는 교회는 신앙적 문제에 저촉될 때만이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영역에 직접 발언할 수 있다는 개혁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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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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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은석 김의환 박사(1933-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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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명직 목사(1890-1973)
- 서울 출신... 한학에 능통 동양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에 관심 이명직(李明稙) 목사는 1890년 12월 3일, 서울에서 한산 이씨 이승태(李承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산 이씨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중시조로 삼는 일파로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신(文臣) 양반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유명한 인물인 이상재(李商在)도 한산 이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직의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이라 하고, 또 어떤 연구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라고 한다.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는 지금의 성북구 종암동이다. 이명직의 조상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던 것 같다. 이명직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익혔다. 김기삼은 이명직 연구의 글에서 소시에는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은 물론, 통감을 읽어 동양의 역사와 한학 문장에 능통하였다고 말했다. 이 한학 공부는 이명직의 삶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와 동양 사상, 특히 유교를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서로 조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조선의 운명이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직은 자신이 한편으로는 정치를 공부하고 출세해서 이름을 펼쳐보려는 야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등지고 삼림에 들어가서 도승이 되어 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두 가지 중 하나는 성취하리라 생각하였다. 이명직의 집 뒤에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새벽과 저녁에 들리는 예불 소리와 종소리가 그의 귀에 인상 깊었고, 승복을 입은?승려들이 삭발을 하고 염주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그에겐 신비감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그는 15세 때부터 장차 도승이 되어 금수강산을 유람하리라 꿈을 꾸기도 했다. 그는 16세 때 자신이 잠간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서 선교사들 통해 기독교 만나 그러나 이명직은 어떤 기회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공부를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선교사들이 경성의 젊은이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원래 선교사들은 조선사회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세운 선교활동의 일환이었지만, 이 가운데 젊고 똑똑한 상류층의 사람들도 선교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양반의 자녀들이었기에 낮은 계층이 다니는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양반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모임을 주선했고, 이런 이유로 인해 생겨난 곳이 황성기독교청년회였던 것이다. 이명직이 18세 되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출세의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의 표어가 있었는데, "이 시대에 나도 남과 같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권하였고, 이것은 이명직의 꿈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1907년 박갑은과 결혼했다. 이것은 유학 전에 아버지가 계획한 소망이었던 것 같다. 결혼 후 1년이 지난 1908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역을 떠나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주일만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일본 동경에 이명직이 도착한 곳은 동경조선연합교회였다. 한국에선 부모의 반대로 마음대로 교회에 다닐 수 없었으나 동경에 와서는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출세를 꿈꾸고 동경에 왔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자신이 신실한 신앙을 갖게 만들었다는 소명을 의식하게 하였다. 동경YMCA에서 김정식 만나 동경성서학원 입학 이명직은 동경의 한인 YMCA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김정식(金政植)을 만나게 된다. 김정식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상재 이승만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감옥에서 출옥한 후 연동교회에 출석하며 황성YMCA 부총무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 연동교회 담임목사 게일이 경성의 YMCA 회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경성YMCA가 동경에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YMCA를 설립하고 김정식을 총무로 파송한 것이었다. 김정식은 많은 조선유학생들을 지도하며 애국심을 심어주었다. 이 시절 당시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조만식과 신앙생활을 함께하며 조선독립의 열의를 일깨우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명직의 신앙생활은?외형적으로는 출중하였다. 주초(酒草)의 금지는 물론, 민속행사 때처럼 백지에 자신의 과오를 적어 불태워 날리기도 했다. 원래 이명직은 일본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려 했다. 당시 많은 유학생들은 법학을 공부해 양명출세를 꿈꾸었다. 대학에 들어갈려고 1년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경성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라왔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사업이 갑자기 실패로 돌아가고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속히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온 이명직은 그래도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도를 찾던 중?동경의 어느 거리에서 구세군의 '가로전도단'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나팔을 불고 찬송을 하며 열심히 전도하는 구세군인들의 전도 광경을 보고 이명직은 자신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럴 때쯤 김정식이 동경성서학원을 소개해 주어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원은 동양선교회가 세운 성경학교로 미국 시카고의 무디성경학원과 비슷했다. 이 학원에서는 오전엔 성경공부, 오후에는 전도, 저녁에는 전도한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하였다. 그는 동경성서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1911년 이명직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개성전도관의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개성전도관은 동양선교회가 경성의 무교동과 진남포에 이어 세번째 세운 전도관으로 1909년에 문을 열었다. 먼저 사역하고 있는 주임교역자는 강태온이었다. 1912년에는 후배인 이명헌이 개성에 와서 노방전도를 통해 구도자가 된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사역하였다. 이때로부터 이명직은 성결교회의 전도자로 또 지도자로 성장해 같다고 볼 수 있다. 해방정국에서 성결교단 정비... 성결교회 초기 발전사 기록으로 남겨 일제 시대를 지나 동양선교회의 전도관은 교회 수의 증가로 전도관 체제를 탈피하고, 장로교나 감리교처럼 자연 교단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8.15 광복 이후 혼란기를 겪으며 교단이 안정되기도 전에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되자, 교단을 새로이 정비하고 조직 발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명직 목사는 자연스럽게 성결교단의 중심에 서서 일하게 되고, 교단장의 일로부터 인재양성의 중심이었던 경성신학교를 복원하는데 그 중심 역할을 했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이명직과 한국성결교회>라는 저서에서 "이명직은 성결교회 초대 인물의 일원으로 성결교회와 신학교를 키워 놓은 인물이다. 그는 이 교단의 사부요 교부이다. 이 교단이 이만큼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은 그의 공이 절대적 역할을 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오영필 목사는 그의 저서 <성결교회 수난사>에서 이명직을 가리켜 "성결교단을 이룩한 성결의 기수요, 남여 교역자를 양성한 유일한 사부"였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가 남긴 많은 글 중 1929년에 성결교회 초기 발전사를 기록한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에 주목한다. 이 글은 성결교회의 초기 역사를 정리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 저서는 192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사기>가 나온 바로 이듬해에 발간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장로교단에 비교할 수 없는 소규모 교단역사가 출판물로 공간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책 이름이 좀 긴 것 같지만 성결교회를 지원하고 후원하고 있는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를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조 및 개교회들의 실재를 잘 소개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교단 역사 사료이다. 그 형태를 보면 판형도 책자다운 국판형으로, 내용은 위에서 아래로 즉 세로 쓰기로 되어 있으며, 고어체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양장본으로 총 198면에 이른다. 여기에는 동양선교회 계통과 신앙개조 및 성결교회의 연혁과 조직, 성서학원 그리고 각 지방교회의 역사 및 교역자와 선교사들을 소개하는데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기할 것은 총 74매의 교회 및 교역자들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어 역사서로써 역사성을 지닌 저서라 하겠다. 성서학자, 교회행정가, 신학교수로서 '교회사가' 이 책의 서문을 쓴 당시 경성신학교의 곽재근 목사는 조선에 전래된 동양선교회의 성결교회가 한 세대도 덜 된 이 때에 이명직 목사에 의해 저술 출판된 성결교회 략사 출판에 대해 "지나간 역사를 정리 못해 안타깝게 생각해 왔는데, 본 교회의 원로 이명직 형이 몇 년 전부터 이 일에 뜻을 두고 재료 수집 및 기타에 전심 노력한 결과 이에 책 한 권을 제작하니 곧 우리가 기대하던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이다. 그 미묘한 춘추필법은 독자로 하여금 심오한 섭리와 놀라우신 축복과 엄위하신 권위를 일목요연하게 하였다"라고 하면서, 책의 출간을 반기웠다. 무엇보다도 이명직이 친히 쓴 서문을 보면 이 책의 간행 의미와 저술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옛날에 이스라엘 르비딤에서 아말렉으로 더불어 싸워 승전한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책에 기록하여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 17:14)라고 하셨고,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행하신 일 곧 그 역사를 기록하여 자손에게 전하라 하셨은즉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 우리의 제1 총리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길보른(Emest A. Kilbourne)으로 말미암아 일으키셨는데, 22년 후 오늘에 앉아 생각하니 하나님의 축복의 현저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22년 전에 카우만 부부가 가방을 들고 태평양을 건널 때에 이렇게 성공하리라고 믿었겠는가? 그러나 카우만 부부의 믿음의 안중에는 벌써 이러한 환상이 나타나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 믿음과 같이 이루어졌으니 일본, 조선, 중국에 전도자를 양성하는 성서학원이 4곳이요, 성결교회로는 일본에 200여 곳, 조선에 70곳, 중국에 20여 곳, 동양 전체는 그로 말미암아 '순복음'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적이 아니며,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짐작할 수 없어 그 능력과 그 축복하심을 만분의 일이라도 증거하기 위하여 감히 붓을 들어 본 약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넓고 크신 능력의 역사를 어찌 졸필로 다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다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해도 거룩한 주의 역사에 이즈러짐과 더럽힘이 없으면 다행이라 하겠다..."(같은 책 서문 p.2). 본 필자가 성서학자요, 교회행정가요, 신학교수요, 한 교단의 사부요, 교부로 추앙받는 이명직 박사를 교회사가(敎會史家)로 칭하는 이유는 장로교와 감리교회가 희년을 맞이해서도 겨우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차재명 1928, 창문사)를 출간했는데, 조선에 후반 선교자로 시작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30년 한 세대가 되기 전(1907-1929)에 교단사(교회사)를 정리해 친히 저술하여 간행했다는 것은 신학자와 행정가로서만 아니라 먼 미래를 바라 볼 줄 아는 사안(史眼)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명직 목사를 한국교회사가의 반열에 올려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명직 목사의 저서가 간행된 후 40년 만에 서울신학대학의 그의 제자 이천영 교수에 의해 서울신학교로서는 최초로 문교부의 교수 저작지원금으로 <한국성결교회사>(1970)가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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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명직 목사(1890-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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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상규 박사(1950-)
- 경북 영주 출신... "신실한 개혁주의 역사학자" 이상규(李象奎)는 1952년, 경북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에서 아버지 이창(李昌)과 어머니 박귀돌(朴貴乭) 사이에 태어났다. 그때는 6.25 전쟁 중이라 출생신고를 늦게 해 호적상 생일은 1952년 12월 13일로 되어 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 이창은 전쟁 중인 1952년 2월 24일 40세의 나이로 늑막염으로 돌아가셨다. 경북 예천 용문이 고향인 어머니는 17세 때에 남편과 혼인하여 1930년 장남 재영(在榮)을 비롯 10남매를 두었으나 절반은 죽고 5남매만 살아남았다. 상규는 그 중 막내였다.?장남 재영은 1950년 8월 좌익의 난동을 피해 잠시 집을 나갔는데 그 뒤 행방불명 되어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상규는 1964년 2월, 고향의 안정남부국민학교를 마치고, 그해 경북 경산시 압량면에 있는 메노나이트 중학교로 진학하여 그곳에서 기독교적인 교양과 중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일 이곳에서 자신의 신앙의 기초가 확립되는 시기였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는 이때 기독교 학술월간지?기독교사상지와 기독교서회가 펴낸 현대신서 시리즈 중 민경배가 쓴 '한국의 기독교회사'란 문고판을 처음 접하고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에 사는 누님 댁에서 잠시 지낼 때, 1970년 4월에 창간된 함석헌의 '씨알의소리'와 1969년 7월 안병무가 창간한 '현존'을 접하고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려신학대학?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학부서 강의 시작 1975년 2월, 부산고려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고려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목회학 과정(M.Div)에 이어 신학석사 과정(Th.M)을 마친 후, 학부에서 교양과목과 이론신학 등을 강의하다가 군대에 갔다. 제대 후 1987년 2월, 호주로 유학 길에 올라 호주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990년 3월부터 고신대학교에서 만 36년간 교수로 사역한 후 2018년 2월말에 정년퇴임하였다.(정년퇴임기념논문집 <한국교회와 개혁신학>, 이상규의 '내가 살아온 날들' 2018, p.53 이하). 아신대학교 대학원 박응규 박사는 '이상규 박사의 학문여정에 관한 소고'란 글에서, 이상규 박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성실하게 연구한, 교회를 위한 교회사가(敎會史家)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교회의 역사를 진솔하게 가르친 '교회의 교사'였다고 평했다. 그는 이상규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 대한 고찰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이상규는 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주제, 인물, 사상별 접근을 통한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분석하였다. 이상규는 이 책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통합사적인 안목으로 읽어 내고 있다. 그가 통사적인 차원에서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저술하기 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중심으로 엮었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역사적 연속성이 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초대교회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사와 현대교회사 그리고 한국교회사에 이르는 역사의 강줄기를 따라가며 역사의 긴 폭을 헤아리는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본류는 지류를 형성하고, 지류는 다시 본류로 통합되는 역사의 연속성을 보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다양한 주제별 접근은 지류일 뿐만?아니라, 동시에 본류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접근방식이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해석하며 서술하는 데에도 여실히 반영되어 나타난다. 둘째, 주제, 인물, 사상별 접근을 통한 <해방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은 이상규가 스스로 인정했드시 한국교회사 분야로 볼 때, 그의 대표 작품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특히 2012년을 전후하여 한국에서의 장로회 총회조직(1912) 1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학술모임에서 논문을 발표하거나 토론에 참여하면서 장로교의 역사와 신학 혹은 신학전통과 그 유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에 관한 본서를 출판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도 저자의 저술의 특성인 중요한 주제들을 선별하여 연구한 주옥같은 논문들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로서 한국교회사 현황?등에 대한 글들이 담겨있다. 셋째, 이상규 교수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는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신학적 토대에서 연구하고 가르쳤고, 그것이 학자로서 그의 신학적 기초이자 그가 속한 고신대학이 지향하는 신학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 왔으며, 교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연구와 교육이기에 다른 욕심없이 본업에 충실하고자 했고, 이 일에만 집중하고 살아왔다. 그는 그의 전공학문을 통해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 개혁주의가 그의 학문적 기초이자 토대이기도 했지만, 그가 고신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역점을 두었던 바가 개혁주의 사상에 관한 과목을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모든 강의와 연구활동에 있어서 기독교적 기초 혹은 기독교적 가치를 드러낼 때, 기독교대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동료 교수들과 고신대학이 기독교 이념형성에 기초한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는 훗날 <개혁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저술한 책이 <한국에서 칼빈연구>란 자료집 성격의 책이었고, 이는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낸 책이었다. "이상규의 기독교 역사관은 '통합사적' 역사관" 이상규의 기독교 역사관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통합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규는 교회역사 전반에 걸친 남다른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지금까지 연구와 교육에 전념해 왔다. 이러한 배후에는 그가 즐겨 인용하곤 하는 필립 샤프(Philip Sharp)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역사는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며 지혜의 가장 풍요로운 기초이자 가장 확실한 안내자이다." 그의 연구 분야도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사를 중심으로 연구했지만, 모든 교회역사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단순히 한국의 상황과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교회역사의 시각에서 보려는 자세를 견지했으며, 또한 서양교회의 역사도 한국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융합의 자세도 지니고 있다. 그는 초대교회에서 현대교회 그리고 한국교회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헤아리는 긴 안목을 갖고 있으며, 역사의 연속성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어느 한 시대의 역사도 그리고 어느 한 나라의 역사도 역사의 큰 강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 모든 역사의 흐름을 통전적으로 보면서 다양한 시대와 주제들에 관한 연구에 전력해 왔다고 보여진다. 이상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서양교회사를 한국교회사의 눈으로 인식하고, 한국교회사를 서양교회사적인 전통으로 헤아리는 원근법적인 안목을 갖게 되었다. 또 한 나라 교회의 특수성은 보편교회 안에 있고, 보편성은 개별교회의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근거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서양교회의 눈으로 읽고, 서양교회의 유산은 한국교회의 눈으로 해독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런 입장을 역사연구에 있어서 '통합적인 접근'(Integrative approach to History)이라고 말해 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면서도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헤아리고자 노력해 왔다. 이런 비교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은 이 집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 주었고, 흔히 신학적 보수주의자가 빠지기 쉬운 독선의 성(城)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p.4). 대표작, "해방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 한 마디로 하면, 그는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교회사 전반에 대한 교회론적 사관과 통합사적 접근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여 그의 역사해석과 서술에 독특한 공헌을 해 왔다. 그는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는 서양교회의 전통에서 한국교회를 헤아리려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서양교회의 유산을 수용하는 창의적 자세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상규는 한국교회가 당면한 도전을 네 가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번째 도전은 이단 문제이다. 과거에는 이단들이 은밀하게 침투하고 은밀하게 활동하였는데, 현대에 와서는 공개적이고 공격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두번째 도전은 이슬람의 활동 전개이다. 현재 국내의 무슬림 수가 21만여 명이지만, 2050년에 이르면 개신교 신자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세번째는 동성애 문제와 동성혼 문제이다. 정치계에서 이를 법제화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교회가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네번째 도전은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러서 한국교회가 각성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며 가르쳐온 학자의 양심에서 우러난 한국교회를 향한 충정어린 충고라 여겨진다. 이상규 박사의 은퇴기념논문집에 이 박사를 격려하며 남긴 교계 인사들의 말을 들어보자. 예장합신 총회장을 역임한 박병식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한 역사신학자"라고 했고, 고신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류윤옥 목사는 "은퇴 후가 더욱 더 기대되는 교수"로 평가했다. 또 선한사마리아인 가족 대표 손상률 목사는 이상규의 사람됨을 "종려나무 같이 백향목 같이" 라고 표현했으며, 또 고신측 총회장을 역임한 김상석 목사는 "좋은 스승" 같은 분이라고 했고, 고신대 석좌교수 손봉호 장로는 "신실한 개혁주의 역사학자"라고 평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을 소개하면 (1) 한국교회의 역사적 흐름(1991), (2) 교회개혁사(1997), (3) 교회의 역사(1999), (4) 부산지방 기독교전래사(2001), (5) 한상동과 그의 시대(2006), (6)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2007), (7) 부산지역 기독교회의 선구자들(2012), (8) 해방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2015), (9) 한국장로교사(198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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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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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상규 박사(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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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두암 박용규 박사(1956-)
- ‘한국기독교회사’(1.2.3권) 방대한 자료로 정리 출간 교계와 학계에 한국교회사에 대한 역사 인식 지평 넓혀 경기 여주군 가남면 출신... 어머니의 신앙 영향 두암 박용규(頭巖 朴容奎)는 1956년 1월 19일,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삼군리에서 부친 박부석과 모친 유내석 사이에 5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다.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삼군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할머니와 외할머니도 삼군교회를 섬겼지만, 부친은 말년에 이르러서야 교회에 출석했다. 두암은 유년 시절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교사들이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에 심취하여, 그 때의 이야기들이 지금도 선하게 기억된다고 술회하고 있다(신학지남 2020 여름호 p.9). 1962년 동리에서 2Km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는 가남국민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5학년 때 신증후군에 걸려 1년 간 휴학한 후 어렵게 졸업하고, 이천읍에 있는 이천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증후군이 다시 재발하여 1년을 쉰 뒤 겨우?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신증후군은 성균관대학교에 진학 후에도 그를 괴롭혀 학창 시절을 질병과 함께 지냈으나, 이후 하나님께서 건강을 회복해 주셨고,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의 지도로 1982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는 총신대 신대원을 이수 한 후, 미국?웨스턴에반제리칼신학교(Western Evangelical Seminary)의 장학금으로 해외?유학의 길에 올라 M.A 과정을 마치고, 다시 신학석사(Th.M) 과정을 밟기 위해 일리노이 주에 있는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으로 옮겨 그곳에서 저명한 마크놀 박사, 데이빗 웰스 박사, 우드브릿지 박사, 스위니 박사 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배운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총신대 신대원에서 30여년 간 교회사 가르쳐 두암은 10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91년 2월에 귀국해 그 해 3월 학기부터 자신의 출신학교인 총신대 신대원에서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로서 총신대 신대원 교수로 있는 이영식 박사는 두암의 저술활동을 평가하는 글에서 다음의 7가지 특징을 분석하였다. 첫째, 그는 자신의 연구 활동을 통하여 평소 지론이었던 "교회를 위한 신학"을 구현했다고 규정한다. 목회자 양성소인 신학대학원은 매우 중요하다. 목사후보생 한 사람이 미래의 한국교회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저술과 연구에 있어서 원자료 및 의미있는 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적실한 해석을 통하여 총체적인 역사방법을 모색하며 제시했다. 그는 역사의식의 중요성과 역사방법론을 신학(神學)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셋째, 그의 방대한 <한국기독교회사(1,2,3권)>는 수많은 참고자료에 대한 철저한 사료분석과 성실한 전개를 통해서 출판됨으로 한국 교계와 학계에 획기적인 역사서로 부상했다. 일연의 한국기독교의 통사를 구성하면서 한국교회사 학계에 기념비적인 저술로 자리 잡았다. 넷째, 그의 저술 작품에는 교회사와 일반사가 종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대하(大河)와 같은 역사의 중심에는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다는 것을 자주 드러낸다.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도 성령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키면서 성도들의 열망을 촉구하고 있다. 다섯째, 그의 작품에는 한국교회의 복음전파의 사명과 복음의 순수성 회복, 그리고 교회가 처한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책임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놓치지 않고 계승해야 할 본질이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초기 한국교회의 선진들은 말씀에 생명을 걸었고,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신사참배와 모진 박해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이단들과 자유주의 신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계승하고, 조국을 향한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여 3.1독립운동에 앞장 섰고, 사회를 계몽하고 개혁시켜 나갔으며, 한국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섯째, 역사 속에 묻혀있을 뻔한 생생한 사료들을 발굴하여 평양대부흥운동과 후속 저술들을 출판하고 언론에 연재함으로써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열망을 갖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일곱째, 그는 자신의 작품활동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진리수호에 대한 열정으로 이단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단에 대해 논문 게재와 발표 및 세미나를 개최했고, 한기총의 이단해제를 반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섰다.(같은 책 pp.266-267). ‘한국장로교 연구’에 중요한 공헌 또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은선 박사는 박용규 박사 은퇴를 기념하는 논문 "박용규 교수와 한국장로교회 연구"에서, 박 교수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한국장로교회의 형성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전해준 정확무오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 프린스턴학파의 성경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였다. 프린스턴의 성경관은 스코틀랜드의 상식 실재론의 보편적 인식원리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으로 이루어져 성경의 무오(無誤, inerancy)를 보장하는 유기적 완전 축자영감론이다.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개혁주의는 청교도개혁파 복음주의, 장로교 개혁주의 그리고 화란 개혁주의이며, 청교도 개혁주의에서 교리, 문화, 경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을 제시한다고 보고 있다. 그 증거로 첫째, 복음전파에서는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 선교사 토마스(Thomas), 권서로 와서 구약 번역에 기여한 유대인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Peters), 복음전파 및 교육과 사회적 책임을 다해 개혁주의 이상을 실현한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를 논하였다. 그리고 마팻(Samuel Moffett)을 중심으로 한 매코믹신학교 출신들은 조선 서북지방의 복음화와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장로교의 뿌리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공부 중심의 네비우스(J. Nevius) 선교방식을 채택하여 주일학교의 건실한 성장과 사경회 중심의 한국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둘째, 교육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과 독노회 설립, 12신조 채택, 1912년의 총회 설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대해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그 연속 선상의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총회 100년사를 기획히여 대표집필하였다. 12신조에 대하여는 엄격한 칼빈주의에 미치지 못하고 복음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측면과 장로교회를 연합시키는 측면을 고찰하였다. 셋째, 대사회적 책임에 대해 장로교가 105인 사건과 3.1운동에서 담당한 중요한 역할을 규명하였고, 개별교회로서는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산정현교회와 강규찬 목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운동의 보루로서의 산정현교회를 탐구하였다. 그리고 1939년 12월 평양임시노회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면직시킨 것이 아니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사면시킨 것이란 것을 밝혔고,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최봉석과 손양원 목사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해방 후에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WCC에 대한 견해 차이라는 것을 밝혔고, 1950년대 장로교 분열의 주역들인 박형룡, 한경직, 김재준에 대해 박형룡은 정통주의 신학자, 한경직은 온건한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목회자, 김재준은 칼 바르트 신학에 입각한 진보주의자로 평가하였다. 개혁주의 전통 아래서 복음주의 이해 두암이 한국장로교회를 연구하면서 했던 중요한 공헌은 한국교회가 그 시대에 찾아야 할 시대적 과제와 의미를 남보다 먼저 발굴하고 연구했다는 선견의 소유자였다고 하겠다. 두암은 2000년에 이미 <평양대부흥운동>을 저술했고, 연이어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총회 100년사>, 그리고<한국교회와 민족을 깨운 평양장대현교회>, <제주교회사>를 저술하여 복음주의 역사관을 나타냈다. (신학지남 2020 여름호, pp.187-189).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도 박용규 박사 은퇴기념논문집에 기고한 '박용규 교수와 개혁파 복음주의'란 글에서 두암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에 대하여 세 가지로 평가하고 있다. 첫째, 박용규 교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예장합동측의 근본주의적인 모습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60년대를 전후해서 ICCC와 연결됨으로서 근본주의와 정통주의를 혼동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이 사실상의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전천년설은 교회를 사회로부터 도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복음주의의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셋째, 박 교수는 오순절운동에 대해서 그 부흥운동적인 열정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인 신앙이 정통신학의 범주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사실 20세기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큰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그룹이 오순절운동이다. 박 교수는 이런 오순절운동이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WCC 등 진보신학과 타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장로교 보수 신학자의 입장에서 오순절운동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박용규 교수 자신이 속해 있는 장로교 합동측의 신학, 즉 개혁주의 전통 아래에서 복음주의를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신학적 틀에서 다른 운동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본다. (신학지남 2020 여름호, pp.214-217). 필자는 이제 한국교회에 기여한 그의 학문활동과 교수 사역을 넘어 원로학자로서 더 큰 기여를 기대하면서, 한국교회 1대 교회사가들의 미진했던 부분의 역사를 2000년대까지 취급, 정리연구해 간행한 공로는 한국교회 후학들에게 큰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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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두암 박용규 박사(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