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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도척지견(盜拓之犬)과 중구난방(衆口難防), 어떻게 할까?’
    옛말에 ‘도척의 개’라는 뜻을 지닌 ‘도척지견’이란 말이 있다. 이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밥 주는 주인에게 무작정 굴종하며 맹종하는 개와 같은 얼뜨기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도척(盜拓)’이란 악명높은 큰 도둑의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도척에게는 졸개가 무려 2천여 명이나 될 정도로 대단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에 걸맞은 도척의 행패는 자심하였다. ‘도척’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유린하고 약탈하는 악마와도 같아서 그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이런 악한인 도척의 집에서 기르는 개는 도척이 어떤 놈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먹다 남은 밥 찌꺼기나 던져주는 주인 도척에게 꼬리를 흔들어 댔을 뿐아니라, 도척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냐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짖어대고 물어뜯기 일쑤였다. 그 개는 도척이 짖어라 하면 짖고, 물어라 하면 물었다. 그 알량한 밥 찌꺼기 한 덩이를 더 얻어먹고자 도척의 눈치를 보면서 꼬리를 흔들면 오로지 충성하는 개, 이 개를 지칭하여 만들어진 말이 ‘도척지견’이다. 이후 이 말은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모르는 채 ‘도척’의 개(犬)처럼 앞도 뒤도 가리지 못하고 그저 먹다 남은 밥찌꺼기 한 덩이 던져주는 주군에게 굴종하며 비열하고도 악랄한 개 노릇을 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를 빗대어 ‘도척지견’이라 하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국에 이 말이 뼈를 아리는 말처럼 들려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야말로 정치는 사라지고, 어른의 조언과 권면이 천대받고, 권위와 질서가 조롱받는 희한한 세상에서 오직 살아남는 자는 도척의 개와 같은 소인배들 뿐이다. 낮에는 험하게 싸우다가도 저녁에는 서로 만나 길을 모색하던 그 알량한 여의도 정치 풍토도 사라져 버렸다. 특히 막강한 영향력으로 당을 지배하고 있는 민주당은 이 말에 자신을 각성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에는 도척지견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어떻게 민주사회에서 민주정치가 이런 오류와 탈법과 편법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독단의 정치가 진행되는데, 단 한사람도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지금 당 대표의 지지도 하락을 기다리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인가? 단언컨대 도척의 개들이 득세하는 세상에는 미래가 없다. 그렇다고 여당은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맹종할 도척이 없기에 그의 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당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지, 뭘 하겠다는 지 모르겠다. 비대위원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원내대표는 뭘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흐름도 주장도 소신도 안보이는 초라한 초선들의 모습, 모두 설 명절을 핑계삼아 지역구 관리에 여념이 없는 못한 소인배들, 아직 총선이 가마득한데 표밭 관리에만 정신이 없어 살아남기에 몰두하며 아무 말이나 내뱉는 이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중구난방이다. 야단법석인 듯한데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이 시끄럽기만 하다. 이런 모습으로 도대체 이 탄핵정국을 어떻게 책임지고 수습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1951년 1월에 2차 대전에서 나치에 대항하여 프랑스를 구한 삼성 장군 랄프 몽클라는 자청하여 중령 계급장을 달고 프랑스군 대대 제1진을 인솔하여 6.25에 참전하였다. 계급보다 자유 우방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신념은 중장을 떼고 중령 계급으로, 미군 대령 프리먼 연대장의 지휘를 받으며 진지를 지켜낸 불세출의 장군이다. 그의 군인정신은 도척지견도 아니며 중구난방도 아닌, 오직 자유의 정의를 위한 군인으로서 계급에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6.25 같은 정치 난장판에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왜 랄프 몽클라와 같은 제대로된 정치 인물이 없을까? 그렇게 추한 행동으로 욕을 먹고도 주인의 부스러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못난 도척지견들을 바라보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근심할 뿐이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5-01-25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지록위마(指鹿爲馬)가 통하는 슬픈 세상’
    중국의 진나라 환관이요 간신이었던 조고가 어린 황제 호해 앞에서, 자신을 위해하거나 따르지 않는 지를 가려내기 위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말하고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말이 틀린 지 바른 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살 것이요 아니라 하거나 대답을 안하면 죽을 것인데, 결국 조고는 ‘지록위마’에 동의한 신하들만 남고 모두 죽이고 말았다.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 말한 신하들이 모두 죽어나간다는 명백한 현실, 그 현실을 넘어서서 용감하게 그것은 말(馬)을 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바른 말을 했던 신하들은 조고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황제보다 자신이 더 권력이 세다는 것을 세상에 확인시킴으로 절대 권력자임을 보여주었다는 고사성어, 지록위마. 지금 필자가 이 세상에 보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그 동안 거대 야당의 입법폭주와 탄핵 남발 정국을 보면서, 그것도 그것이지만 참 그곳에도 ‘지록위마라고 합창하는 못난 선량들과 많구나’ 했더니, 계엄 선포의 배경에는 참으로 딱한 지록위마 소인배들이 무능한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어쩌다 이나라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바른 말하는 정치인을 볼 수가 없는가? 왜 이렇게 ‘지록위록(指鹿爲鹿)’ ‘지마위마(指馬爲馬)’라고 쉽고 명백한 언사를 사용하는 정치인이 없는가? 선동자들의 주창에 따라 합창하는 패거리 천박한 스크럼이 횡횡하는 이 불쌍한 나라를 누가 바로 잡을까? ‘지록위마’하는 인사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죽기 싫어서, 조고의 눈 밖에 나면 정치적인 생명은 물론 육체적인 생명까지도 보장받을 수 없으니, 나부터 살고 보자는 비루한 이기주의가 이 지록위마의 근본이다.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비루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다. 지난 20일 고양시 의회에서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바꾸는 조례안이 17:17로 끝내 부결되었다. 당론으로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시의원들이 정말 베일에 쌓인 것같은 ‘성평등’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함정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요, 알았다면 그는 정말 지록위마의 비루한 정치인이다. 또 이것을 당론으로 밀어부친 민주당 역시 소수의 지지자들을 의식한 지록위마의 비겁한 정당이다. 어제 민주당 지지자의 토론을 보면서 무식하다기보다는 마치 초등학생 수준의 토론을 보는 것 같은 무능한 전형적인 지록위마의 현대판 정치인이었다. 그것이 두려워 무턱대로 자기 표를 헌상하는 의원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정치인들이 비겁하고, 이기적이 되면 그것이 망국의 징조이다. 조선이 그렇게 망했고, 광복 조국이 그렇게 분열되었다. 자신의 소신을 펴지 못하고 굴신함으로 생존하는 정치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을 살려줄 줄기를 찾아다니고, 그의 하수인이 되어 지록위마의 삶을 산다. 불쌍하고 딱하지만, 더 분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결정한 것에 우리가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록위마의 무리 속에 갇혀 사는 현대인의 아픔이다. 어제 고양시 의사당을 떠나오면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소리치기로 했다. 지록위마의 정치인을 몰아내자. 한 사람 힘있는 사람을 위해 참과 거짓도 상관없고, 국익도 국격도 자존심도 상관없이 오직 내 것만을 챙기는 비루한 정치인을 이제는 더 이상 의정 단상에 세워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다윗을 향한 나단의 절규는 생명을 담보한 것이었다. 오늘 이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교회가 나단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는 정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정권이 지록위마의 길을 가지 않도록 붙잡고 세우고 함께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다시 한번 깊은 성찰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 역시 지록위마의 누를 범하면 안될 것이다. 탄핵 정국에서 이를 다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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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12-21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다수(多數)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민주주의에서 다수는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것은 민의의 대변으로 누구도 거역해서는 안되는 민주질서의 기본이요, 법적 근간을 이루는 기둥이다. 이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포용하며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민주사회이다. 그래서 이 민주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민의를 대변하는 이들이 법을 만들고, 엄격한 선발 절차를 거친 판사들의 입법부가 법을 수호하며, 국민이 그 법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 앞뒤에서 법의 집행을 방해하는 자들을 척결하는 이들이 경찰과 검찰이 있다. 그러나 삼권분립에는 하나의 불변의 가치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양심에 기초한 정의'가 모든 것의 시종(始終)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다수의 의사가 결집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다수가 정의롭지 못하면 그 다수는 폭력이요 반인륜적 패역이다. 이런 다수의 폭력이 만든 역사는 일인 독재가 가져온 폐해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 현실이 이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다수당이 된 야당은 견제 불가의 절대 우위의 힘으로 입법권을 행사하고 있다. 행정부는 물론 사법부를 통제하고 압박함으로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사태가 오게 한 여당과 행정부의 책임은 나중에 따질 것이지만, 삼권분립에서 각 권력에는 도덕성과 책임이 따르는 국민적 위임이 있는데 이것을 자파 자당 그리고 지지 팬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는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반민주적 배신행위이며, 정치적 패륜이라 할 것이다. 검찰이 법과 원칙에 기초한 수사를 못하도록 검사를 겁박하고 탄핵한다면 이 땅의 질서와 안녕은 누가 지켜내는가? 판결이 마음에 안든다고 법관의 양심과 소신에 따른 판결을 물리적으로 위협하고 비난한다면 이 땅의 정의와 가치는 누가 지켜 준다는 말인가? 모든 판,검사가 법과 원칙에 정의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들의 윤리적인 가치를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에 안든다고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핍박하고 무찔러버린다면, 그것도 다수의 힘으로 장악한 입법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법을 바꾸고 집단의 힘의 위력으로 개인 판,검사를 찍어누르면 그 피해는 누가 당하게 되는가? 엄연히 삼심제가 있어, 혹시 있을 지 모르는 하급심의 오판을 살펴보는 정당한 이의제기 신청제재도가 살아있는데, 다수의 힘과 권력으로 사태를 뒤잡으려는 것이 바로 민간 쿠테타 음모요 시도인 것이다. 법은 양심과 정의의 편일뿐, 어느 집단의 편이 돨 수 없다. 그것을 믿기에 법의 보호 아래서는 법 위에 사람없고 법 아래 사람없다는 가치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분명히 지금 민주당은 잘못하고 있다. 국익앞에서는 정파가 없어야 하고 침략 위험에 대해서는 여야가 따로 없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야당은 오직 유일한 목표, 이재명 대표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또 챙기고 있다. 영부인의 잘못에 대하여 필자는 아는 것이 없지만, 명백한 허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국정을 멈추게 하고 대통령의 통치를 가로막아설 만큼 중대한 일인가?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줄도산을 하고 있고,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이는 아랑곳없이 죽기살기로 대통령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이 이재명 대표 살려달라는 애절한 몸부림으로 보여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수사 검사를 탄핵하고 유죄를 선고한 판사를 조롱하고 폄하하는 모습도 이제는 살려달라는 비겁한 협박으로 보여 한심할 뿐이다. 다수는 겸손해야 하며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음으로 품격을 지켜야한다. 지금같이 시정잡배만도 못한 처신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저급함은 이를 지켜본 국민들이 처결할 것이다. 이제 절대 다수 야당의 야당다움은 거칠고 무례한 전투력이 아니라, 겸손하고 단호하게 양심과 정의의 편에 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다수를 기뻐하지않으시는 하나님이 그 다수를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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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11-26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견풍전타(見風轉舵), 충언 측근을 귀히 여겨라!’
    지금 나라 안팎이 온통 난리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급기야 북한군까지 이 전선에 투입되는 극단의 상황에 이르렀다.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현실이 되고나니 심란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렇다고 국내 정치 현황이 공고한 것도 아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20%조차도 위험하고, 여당은 분렬하고 다수 야당은 폭주하고 있다. 책임있는 인사는 없고 비판적 인사들의 말의 잔치는 절망적인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다. 최고 지휘권자이며 결정권자인 대통령에게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스스로에게 모든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해소할 의무와 권리 역시 자신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재임기간에 치러진 총선에서 대패했다. 대선의 승리는 총선 승리의 견인차임에도 총선의 대패는 누가 뭐라고해도 이 원인자는 대통령이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지지자들의 절망 원인이다. 정권 말까지 윤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의 문제를 끌고 갈 것인가? 정치와도 경제와도 외교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김건희 여사의 문제를 털지 못해 문제 삼은 야당을 탓하고, 이를 다투는 여당 대표를 탓하고, 알아주지 못하는 여론을 탓하며, 돌연히 찾아올 어부지리를 기다리는 모습이 통탄할 지경이다. 대통령 주변에는 유능한 검사 빼고는 그리도 사람이 없는가? 어쩌면 두는 수마다 패착이고 졸수 투성이니, “하수(下手)는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를 둔다”라는 바둑교훈이 딱 이 상황이다. 사실 윤 대통령의 성적표가 지표상으로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외교는 물론 내치도 시비에 시달려 그렇지 정황에 비추어 선전하고 있지만, 정치만이 낙제점이다. 그 낙제의 중심에 김건희 여사가 있다. 사과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여당 대표를 조건 없이 만나 주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되는가? 야당 인사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힘든가? 솔직 담백한 직진 스타일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던 윤 대통령의 지금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 견풍전타(見風轉舵)라는 말이 있다. 바람을 보고 키를 돌리라는 말이다. 바람을 거슬러 키를 돌리면 배는 제자리를 돌거나 옆으로 회전할 뿐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사공은 바람을 탓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 바람을 힘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가 힘들지 않도록 키의 방향을 잡아야만 배도 사람도 화물도 안전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배에 항해술이 뛰어난 선장이라고 할지라도 그 항해 중에 돌연히 나타날 위기 상황에 차분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바다라고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차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은 선장으로서는 여간 중요한 자질이 아닐 수 없다. 야당도, 여당도, 국민도, 외국도, 김정은도, 푸틴도 대통령의 실책과 허물을 상쇄해 해줄 요인이 되지 못한다. 이 모든 난관들이 모두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상황일 뿐이다. 그것은 탓할 대상이 아니요, 넘어야 할 대상이고 힘을 얻을 동지가 될 수 있다. 상황을 부정한다고 해결되면 세상에는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 여하간 그 키를 잡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다. 그 키를 운전할 자신이 없으면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 야당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쥐어준 대권은 그렇게 쉽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장 큰 적이 앞에서 아부하는 가신에게 있음을 살펴야 한다. 너무 흔한 말이지만 “양약(良藥)은 고구(苦口)이나 이어병(利於病)이요 충언(忠言)은 역이(逆耳)이나 이어행(利於行)”이라는 말을 명심하여야 한다. 충언하는 각료와 측근을 귀히 여겨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대통령이 아니라, 모두가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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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10-30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계엄령 선포 준비’ 괴담의 진원은 극단적 보수 세력이다.’
    지금 우리는 난데없는 ‘정부의 계엄령 선포 준비’라는 정체불명의 괴담에 의해 나라 전체가 뒤숭숭하다. 경제대국 세계 10권 나라에서 ‘계엄령’, 지나던 소가 웃을 이야기를 야당은 4성장군 출신 국회의원을 내세워 집중포화를 쏘아대고 있으니 한심한 걱정이 출구가 없다. 헌법 제77조는 계엄령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①대통령은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③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④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⑤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정리하면 계엄령은 국가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초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국가의 안전과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이 선포하는 긴급 조치로, 군대가 치안과 행정을, 군사법원이 사법권을 갖는다. 따라서 계엄하에서 국민은 기본권의 제약과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는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소위 선진국에서 전쟁과 천재지변 그리고 자연재해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 집권당이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계엄을 선포한 예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다. 그런데 계엄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거대 야당이 왜 불가능한 괴담을 확대 재생산하며, 또 이게 먹혀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일 전 우파적 시각을 가지신 몇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중에 한분이 “계엄령 선포해서 싹 다 잡아넣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순간 필자는 “아, 이런 분들의 생각을 읽은 야당이 이를 근거로 만든 괴담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계엄령’이라는 재료를 극단적 우파 인사들이 야당에 제공한 것이 눈에 보였다. 그때 필자는 “정부에서 ‘계엄’을 공식적으로 말하는 순간,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 그것으로 이 땅의 우파는 폐족될 것이며,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정치적 파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으로 정치적 계엄 따위가 가능한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우파 인사들이 과거 박정희, 전두환 시절 속시원하게 반정부 인사들을 정리하고 폭력배들을 힘으로 제압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지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계엄령 준비 괴담의 진원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이다. 우리의 민주 사회는 힘들어도 어떤 정치적 독재와 그를 뒷받침하는 수단이 아닌 민주적 절차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 상하로부터의 혁명 혹은 쿠데타나 계엄과 같은 폭력적 방법은 시도하는 즉시 그 생명줄이 끊어지는 자승자박의 동아줄이다. 여야 모두 힘들어도 헌법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가치와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 민주적 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 거대한 야권의 일련의 행위들이 위법하고 불합리한데도 그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한 우파 보수의 진영논리의 충성심에 있다. 좌파 진보 진영은 상대를 파악하고 활용하는 데 탁월한데, 일부 극단적 우파 보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우월감에 의한 폭력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참 불행한 일이다. 결과보다도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민주사회에서 정상적인 정치 투쟁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지 과거 민주주의 역사가 보여준다.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하고, 거기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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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9-1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무분별한 ‘탄핵’의 부메랑 효과’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에서 임명된 방송통신위원장 3명 전원을 탄핵 대상에 올리며 정부 여당과의 공영방송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야당이 8월 1일 공동발의한 이진숙 방통위원장 탄핵소추안은 그의 위원장 임명 하루 만에 시작된 것으로 2일 표결에서 가결했다. 앞서 발의됐던 이동관·김홍일 전 위원장, 이상인 전 위원장(직)은 표결 전 자진해서 사퇴했다. 이로써 방송·통신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방통위는 ‘식물 조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들어 이진숙 위원장을 포함해 탄핵 대상 인사는 14명(18건)으로, 이상민 장관과 방통위원장·방통위 직무대행 등 4명, 검사 9명이었다(검사 2명 자진철회). 이 정도면 ‘습관성 탄핵중독증’이다. 그리고 탄핵의 종착지는 대통령이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헌재로부터 단 한건도 인용받지 못함에도 계속되는 야당의 무분멸한 탄핵시도는 다분히 계산된 정치 공세로 볼 수 밖에 없다. 대통령의 거부권이 당연히 예상되는 법안들도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여 지금까지 15번의 거부권을 유도한 것 역시, 이를 미리 염두에 둔 야당의 의도적 도발로 보는 것이 국민적 정서이다. 당연히 국회 입법권을 무시한다는 야당의 주장이 힘을 잃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탄핵은 당사자가 헌법에 준하는 확인된 중대한 범죄를 근거로 입법부가 국민적 심판을 가하는 일종의 헌법적 강제 기능이다. 그러므로 탄핵 시도는 매우 신중하고 진지해야 하며, 마지막 불가피한 선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의 발의한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된 경우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복하는 것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에게 탄핵 만큼 위협적인 수단도 없다. 탄핵은 해당자들을 압박하여 민주당에 불리한 결정이나 조치를 하지 못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탄핵에 대해 그 어떤 공직자도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국민적 동의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야당의 탄핵 시도는 지지자들의 이탈 방지와 결집을 위한 무리한 시도일 뿐이다. 아직 멀리 있는 총선에 지금 국민적 우려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현실적으로 지지층 결집이 필요한 야당에게서는 마치 마약과 같은 내성과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무분별한 대통령의 거부권은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지금의 거부권 행사는 마치 야당이 그렇게 하라고 유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뻔히 거부권 행사를 예상하면서도 강행하는 것은 잦은 거부권 행사에 대한 반발심리가 무분별한 탄핵의 부당함을 가려 줄 것이고, 거부권을 집중 공격함으로 탄핵 시도에 대한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탄핵으로 굳이 당사자를 그 자리에서 내쫒지 않더라도, 야당에 불리한 행정, 수사, 판결, 조치하는 공직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직면한 야당으로서는 수사기관과 사법부에 탄핵 카드는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야당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탄핵에서 돌아온 그들의 가지게 될 반발과 무분별한 탄핵을 바라보는 국민적 정서이다. 계속된 탄핵은 대상 기관의 집단 반발과 순수성을 의심한 국민적 저항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탄핵의 부메랑 효과는 그 어떤 것보다도 크다. 여야 정치세력이 연대하여 성공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효과는 보수정권의 궤멸과 대적 불가한 진보정권의 탄생을 가져왔다. 반면 한나라당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실패는 그 다음 총선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가져왔다. 그 만큼 탄핵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느 한 축은 거의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이런 경험들이 탄핵을 전가의 보도로 여기는 정치판이 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그 탄핵의 부메랑 효과를 고대하고 있다. 이런 정치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입법 폭주와 이에 맞서는 거부권의 쳇바퀴 돌기, 이런 정치에는 진실이 없다. 슬픈 일이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8-03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불법의 합법화 시대 앞에 선 교회’
    “희안하네, 내 주변에는 온통 빨간색인데 왜 꼭 선거만 하면 파란색이 이기는 거지?”라는 탄식 섞인 말을 지인들에게 듣곤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이 땅의 보수가 자기 매너리즘의 폐쇠적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임을 알기에 장탄식 할 뿐이다. 반면 진보세력들은 부수고 싸워야 할 대상들로 차고 넘쳐서, 불법이나 탈법, 편법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이겨먹고야 만다. 이런데도 보수의 무감각한 무기력은 우물안 개구리들의 만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신들의 우물이 메워지고 있고, 곧 그 우물에서조차 쫒겨날 것이 분명하고, 일부는 이미 쫒겨나서 생존을 위한 사이비 보수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덕주의자를 흉내내며 무기력과 무능력을 감추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쓴「군주론」은 국가통치와 권력유지에 관하여 실용적인 조언을 하는 군주제 국가의 통치지침서이다. 이탈리아의 분열과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군주의 자질과 행동 방침을 말한다. 이 내용 중 권력유지를 위한 권력자의 잔인함과 비도덕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비윤리적인 부분이 있다. “사자처럼 두려움을 주어야 하며, 여우처럼 교활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권력유지를 위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 곧 인권, 자유, 책임, 양심과 같은 것들을 중요한 정치적 리더십으로 여기는 현대 정치에는 부합하지 않는 위험한 사상들이다. 그런데 야당은 지금 이 조언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다. 그런데 민주주의 가치 존속을 부르짖는 여당은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고사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투쟁조차 포기한 듯하다. 정치적 도덕성을 앞세워 야당의 영역으로 돌진할 힘이 없는 무기력한 말잔치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야당은 명분이고 뭐고 상관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당의 영역을 넘나들며 상대를 초토화시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대법원의 법률심만 남겨놓은 사람이 지휘하는 정당이 제3당이 되었다. 그 당을 통해 이미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들이 당당히 국회로 입성했다. 정치적 이유가 아닌 전과를 가진 사람이 일주일에 몇 번씩 법정을 드나들면서도 지휘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제1당이 되었다. 야당 당선자 중에는 윤리적 역사적 학문적으로 문제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몰표를 준 국민들의 의중을 여당은 전혀 읽지 못한 듯 하다. 아니 읽을 능력도 읽을 의지도 없어보인다. 왜냐하면 온통 같은 색으로 만들어진 우물속에서 나올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야당 인사들은 자신들의 파란 우물에서 나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붉은 우물을 매우고 있는데, 여당은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여당은 무기력하고, 대통령은 정치적 경험 미숙으로 대통령의 언행에 적합하지 않는 수사로 연속하여 실언과 패착으로 지지도의 하락을 스스로 견인하고 있다. 반면 야당은 자신들의 법적 문제들과 비윤리성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정치적 수사와 팬덤들을 동원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들의 모든 약점을 일거에 덮어버리고, 여당의 작은 허물도 특검으로 몰아간다. 여기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여당의 전투력은 보이지 않는다. 불행이다. 최근 모 유명 가수가 음주운전 사건에서 보여준 비윤리적 처신이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팬덤이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지층에만 기대면 살아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큰 세력을 모을 수 있다는 그릇된 인식과 처신이 불량 정치인의 복사판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은 건전한 국민들의 의식 변화에 있다. 또 국민들의 도덕적 가치를 고양하고, 영웅적 신앙윤리의 실천을 보여줄 책임이 교회에 있다면 과도하다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한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5-25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윤리도 범죄도 묻어버린 제22대  총선의 슬픔’
    오는 29일 윤석렬 대통령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만난다. 그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을 압승으로 끝난 총선 결과 앞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협치라고 추켜세우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만, 왜 이렇게 그 말에 쉽게 동의하지 못할까? 만일 총선 결과가 반대였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총선이 끝난 다음 날 만난 친구는 이민 가버리겠다고 펄펄 뛰었고, 다른 친구는 저녁에 모든 친구들을 불러 한바탕 거하게 쏘겠다고 기세를 올렸다. 왜 우리의 선거가 이 모양이 되어버렸을까? 이겼으니 한턱 내겠다는 것은 탓할 수는 없지만, 이민 가버리겠다는 패배자의 마음은 어찌 보듬을 수 있을 것인가? 여당의 선거 패배의 원인이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윤 대통령의 불통과 권위적 처신에 있다고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이 또한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두 사람으로 대변되는 여당 내의 깊은 속내는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은 없다. 사회의 책임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야당의 압승일지라도 범죄자들, 막말에 괴변론자들, 참담한 역사관에 삐뚤어진 인물이해를 가진 이들 등등 그 구성원들의 윤리의식, 역사의식, 준법의식에는 결코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한다. 한갓 여당과 대통령의 약점에 기대서 얻을 결과를 두고 저토록 방자하다면, 정권에 내린 철퇴를 자신들의 철퇴로 쓰면 안된다. 반면 참담하게 패배한 여당의 처절한 자기반성과 혁신의 의지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누구보다 온 몸을 던져 헌신하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책임지고 퇴진한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을 몰아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패배의 직접적 책임이 있는 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2선 퇴진은 고사하고 당권 장악 시도 역시 어불성설이다. 지금은 다 모여서 어떻게 하면 다시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밤을 새워 토론하고 다투어서 국민 앞에 혁신의 자기 변혁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이라는 높은 상전이 동료 시민이 되어 줄 것이다. 선거로 모든 것이 끝나고, 자신의 허물이 덮였다고 생각하면 이는 진실로 오만한 야당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전과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 앞에 어떤 법적 판단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들이 과거 뭐라고 말하고, 어떻게 글을 썼는지를 알고 있다. 그 엄청난 허물에도 여론의 바람으로 인해 금뱃지를 달았기에 면책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너무 잘 알 것이다. 국민은 그들의 동료시민이 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 많은 선거를 했고, 그 때마다 결과는 꼭 필자가 원하는 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결과에 대한 기분이 이토록 참담한 것은 처음이다. 야당 압승에 대한 불쾌감이 아니라 ‘어떻게 저런 사람을 나의 대표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서부터, ‘정말 아까운 사람이 왜 나의 대표가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당한 결과라고 호소하는 마음 속에 반발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흐름에 순종하지만,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을 때 이방을 회초리로 사용하였던 것을 기억하며, 필자의 마음속에서 거부하고 있는 당선자들이 우리들의 회초리가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 매를 맞을 것이고, 아프더라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따르지 못한 허물에 대한 책임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신 회초리는 그 용도가 다하면 흔적도 없이 멸하신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번 선거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에서 수용하고, 하루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워, 무릎으로 회개하고, 손으로 섬겨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한다면 굳이 우리 손으로 내치지 않아도 급수에 못 미치는 당선자들의 이름은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그리고 빨리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시기는 더 빨리 올 것이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4-27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의료대란'과 '낭만닥터 김사부
    “오늘도, 내일도 여기 이 자리에서 이렇게 서서 날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계속 기다릴 거야.” 유명한 SBS 드라마 의학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중에서 나오는 명대사 중 하나이다. 팰자는 이 드라마의 1,2,3부를 모두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시청했다. 목사인 필자가 얼마나 목사다운가를 묻는 질문 앞에서 이를 대신해 주는 드라마로서 목사를 의사로 대입해서 이 드라마를 반복하여 시청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의사, 의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답은 목양 현실에서 목사임을 고미하는 필자에게 매우 진지한 참고가 되었다. 돈과 의사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병원장을 향하여 “난 믿고 있어. 아직은 의사 사장님보다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은 애들이 더 많다고 말이야”라는 일갈로, 험한 분야의 의사보다 우아한 기업 병원을 원하는 자들에 대하여 일갈하는 장면에서도 ‘목사 사장님’의 이미지가 떠올라 명치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병원 이사장의 사주를 받은 감사요원에게 “열심히 살려고 하는건 좋은데, 우리 못나게 살지는 맙시다. 사람이 뭣 때문에 사는지 그건 알고나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라며, 목적지향적인 저돌적인 무례한 인간에게 대한 일갈이 있다. 제자들에게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마.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거다.”라는 대사에서 왜 의사인가? 왜 의사로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있다. 지금 의료대란은 의사들의 절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사답지 못함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멱살을 잡고 있는 것은 대통령도 정치인도 아닌 국민의 멱살이다. 그것도 생명의 목줄을 잡고 정부를 향하여 시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의사 가운을 입는 순간부터 그들의 의술과 지식은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 주관적으로 결정하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민주 사회에서 대중과 개인의 생명에 관련된 직종은 절대로 자신들의 이익이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뀌어도 적어도 ‘종교인’, ‘교육자’, ‘군인’, ‘의료인’의 신념과 가치는 바뀌면 안된다. 그런데 지금 필자의 눈에 보이는 의료인들은 ‘의사 사장님’들로 보인다. 의사들이 열심히 살려는건 좋은데 못나게 살면 안된다. 의사가 뭣 때문에 사는지 그건 알고나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의사들은 의사들이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면 안된다.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의사의 의사다움도 끝나게 되는 것이다. 여론은 싸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임박한 4.10 총선을 앞둔 각 당의 의료대란 계산서의 총액이 다르다. 만일 의사들이 이 계산서를 의지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의사가 아니다. 의사가 생각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다. 그런데 의사들이 정치적 사고를 시작한다면 ‘의사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의사들의 절박함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의 수작에 놀아나면 안된다. 정치인들의 특기 중 하나가 절박한 사람들의 심리나 환경을 활용할 줄 아는 기술자들이다. 그들이 교사들과 공무원을 망가뜨렸다. 이제 의사들이다. 의사의 의사다움을 포기하는 순간 의사는 정치인들의 먹음직한 먹이감일 뿐이다. 교사들이 교사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월급쟁이 노동자로 자처하며 전교조를 만드는 순간 이 땅에 교육이 무너졌다. 필자는 최강의 낭만닥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사다움만은 잃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 기다림이 절실한 국민들 곁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다림이 오래 가지 않기를 기도하며, 이를 기회로 진정한 이 시대의 반듯한 의사 윤리가 확립되고, 풍족한 의사 인력과 개선된 의료 환경을 조성하여 세계적 한류 의료가 지구촌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3-23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여의도 사투리와 한동훈의 화법’
    결국 일은 이렇게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다. 지나친 자존의식과 왜곡된 우월의식, 그리고 펙트보다 표풀리즘에 생리적으로 익숙했던 선동, 또 억울하게 정권을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이 한동훈이라는 거물 여당 정치리더를 키워내고 말았다. 사실 똑같은 일의 선례가 윤석렬 대통령이다. 누가 윤석렬을 키웠는가? 야당은 내심 여당이 윤석렬을 키워주는 것을 고맙게 여겼고, 여당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줄 것을 고대했을 뿐,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온힘을 모아 윤석렬을 야당 후보로 결국 대통령으로 세워주고 말았다. 이런 처절할 실패와 경험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고질적인 우월 DNA는 천성적으로 개선이 불가능 한가보다. 똑같은 방법으로 일개 검사 한동훈을 일약 집권 여당의 비대위원장으로, 만일 그가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상대할 수 없는 대권 후보가 된다. 이는 누가 뭐래도 민주당의 공로요 뼈아픈 실책이다. 국정감사장이나 국회에서 한동훈과 맞붙어 깨지지 않는 의원이 있는가? 상대 한동훈이 누구인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도 모르고 찌라시 수준의 정보와 가짜뉴스, 인기 유도성 발언으로 덤볐다가 뛰어난 두뇌에 펙트와 논리로 무장한 탁월한 언변의 한동훈의 일격에 망신당하는 모습을 본 국민들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한동훈은 “여의도 사투리와 5천만의 화법(표준말)”이라는 기막힌 출사표를 던졌다. 필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동훈이 끌어갈 비대위의 그림이 미래 파노라마처럼 펼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여의도 사투리란 긍정적으로 말하면 대화와 타협을 위한 노련한 일련의 정치적 행위들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그들만의 리그에서 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당리당략을 넘어 길거리 양아치 패당들의 잡담들로 뒤엉킨 얍삽한 정치 놀음이다. 한동훈이 경험한 여의도는 여야를 막론하고 그렇게 보였다. 여의도 사투리에서 국민의 힘이 제외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은 한동훈의 5천만 화법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여의도 표준말을 듣게 된다면 국민은 행복할 것이고, 그 말 역시 어느 한 쪽만 알아들을 수 있다면 국민은 절망할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영광과 치욕의 부침을 대변하는 것이 ‘86’(80년대 학번·1960년대생) 운동권 출신들이다. 이들은 진영 정치에 몰입하고 팬덤 정치로 유지하고, 팬덤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와 의도적으로 극한 정쟁을 유발하였다. 이로 인해 국민을 질식 상태에 빠뜨려 숨쉬기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기대했던 이준석의 정치 실험은 30대 당대표라는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법은 여의도 화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더 노회하고 유치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왜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지, 참 오랜만에 좋은 인재를 만났다고 생각했던 기성세대들이 왜 옷깃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돌렸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더 한동훈에게 열광하는지 모르겠지만, 젊음과 신선함 그리고 여의도 화법을 일거에 제압하던 장면을 수없이 목격한 국민들은 그의 등장을 당연한 신선함으로 여긴다. 수십년 동안 운동권 전력 하나만으로 일하지도 땀흘리지도 않고 양지만 밟으며, 그 특권을 상속하려는 이들, 그러면서도 애매한 국민을 앞세워 정권 탈환은 물론 200석의 국회 장악을 거론하는 이들을 후안무치를 제압해줄 기대주 한동훈의 5천만 화법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에게 탈진영, 탈팬덤 시대를 열고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 열어갈 세계 10대 강대국으로서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제 한동훈은 온 국민이 알아듣는 5천만의 표준어로 여의도 화법을 바꾸어야 한다. 그 가능 여부가 그의 승패의 열쇠이니, 한동훈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칼이 자신을 벨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을 가졌다는 것이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의 결국이 온 국민이 행복하게 흘러가기를 기도할 뿐이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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