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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24-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수10:8-15)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9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들에게 갑자기 이르니 10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11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12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5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 여호와 하나님은 아이성에서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신 이후 처음으로 말씀하신다. 여호와가 그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었으며, 그중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안심시키는 말은 여호수아의 당면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다룬다. 1:5에서 하신 약속을 재차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이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하신 약속이 계속 존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출발할 때 당연히 매우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이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협정은 마땅히 맺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첫 번째 아이 공격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인지 아닌지 또는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싸우시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갈 수 있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렇게 안심시키는 말은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분명하게 해준다. 여호와는 참으로 그분의 약속들에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다. 여기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보인 다음에야, 그분의 약속들에 대한 신실함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서 신실함을 기대하시며, 거기에는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뿐 아니라 그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포함된다. 안도의 말을 듣고 나서 여호수아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야간 행군을 한다. 남쪽 왕들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성경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뭔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황에 대한 분별력 있는 접근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리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분은 또다시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기 위해 큰 우박을 보내신다. 이 지역에 큰 우박이 내리는 현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작은 공만한 크기의 우박이 온 경우도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아모리 왕들을 추격하는 것이 여호와인지 여호수아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호와가 관여하셨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우리는 여리고 및 아이의 경우처럼, 이 전투에서 승자는 여호와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왕들을 추격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산지를 벗어난다. 아세가와 막게다는 둘 다 기브온 남서쪽 저지대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승리라는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전쟁에 대한 설명에서 강조된다. 우박으로 죽은 자가 이스라엘이 죽인 자보다 훨씬 많다고 강조되어 있다. 여호와의 관여는 12-14절에 나오는 놀라운 진술들에서 더욱더 강조된다. 여기에는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데 그중 적어도 일부는 야살의 책에서 나온 옛 시를 인용한 것이다. 야살의 책에는 사울과 요나단에 대한 애가도 담겨 있었다고 한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 말하고 있지만, 그 시 자체는 여호와가 아니라 해와 달에게 직접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물리쳤던 때를 기억하며 지은 시이다. 그리고 해와 달은 여호와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그 시를 통해 여호와께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호수아는 해와 달이 문자적으로 멈추기를 구하고 있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그렇게 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모리 사람들을 완전히 물리치기 위해 더 긴 하루를 원했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여호와의 승리에 관여한다. 그리고 여호와가 여호수아의 기도에 응답하셨기 때문에 전투에서 이긴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다(14절).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든, 기본적 요점은 여전하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약속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셨을 때, 그분의 약속에 충실하신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또한 기브온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여호수아의 결정이 정당하다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인 여호수아의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싸우신다.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대하며 전진해 나아가 승리하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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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8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23 - 남쪽 왕들의 연합(수10:1-7)
    1 여호수아가 아이를 취하여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 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2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 3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가로되 4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5 이러므로 아모리 다섯 왕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 함께 모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와서 기브온에 대진하고 싸우니라 6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에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언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7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여기에는 9장의 처음 몇 구절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9장에는 가나안의 모든 왕이 뭔가에 대해 듣고 이스라엘에 맞서 모여들었다고 나온다. 그들은 아마 아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들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이런 측면은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장과 다음 장에서 가나안 왕들의 이런 연합이 먼저 그 땅의 남쪽에서(10장), 그 다음에 북쪽에서(11장)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보게 된다. 9:1에서 모든 왕이 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들은 소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여리고와 아이를 주시면서 이미 행하신 일로 인해 제한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초점은 처음에는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에게, 그리고 이스라엘과 기브온 사람들 사이에 맺은 언약과 아이 함락이라는 두 가지 중대한 소식에 관한 아도니세덱의 반응에 맞춰진다. 두 가지 소식이 모두 그에게 문제가 된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를 물리쳤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 요단 골짜기로부터 예루살렘 바로 북쪽 산지까지 그 지역의 중대한 지점들을 지배했다는 의미다. 기브온의 네 도시와 맺은 언약은 예루살렘에게 더 큰 압력이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지배가 이제 그 성읍의 북서쪽까지의 지역을 포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은, 기브온이 상당히 큰 도시로 아이보다 훨씬 더 중요했으며, 아마 아도니세덱이 그 성읍을 잠재적 동맹으로 여겼으리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그 도시의 군사 평판 때문이다. 그런데 아도니세덱이 북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그들의 동맹에 의해 차단되었고, 동맹을 형성하려면 남쪽 왕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도니세덱은 기브온을 공격하려는 명확한 목적으로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의 왕들과 연합을 형성한다. 그 성읍들은 모두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었다. 왜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고 기브온을 공격하는가? 그 대답을 추론할 수만 있을 뿐이다. 군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면 연안에 더 잘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기브온의 위치 때문에 연안에 접근하는 데 더 어려워졌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아무도 그들을 대적하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된다는 암시가 다시 한 번 나와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아도니세덱의 두려움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표현된 것이며, 그들이 그 땅으로 계속 나아갈 때 하나님이 정말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첫 번째 암시이다. 기브온 사람들은 아모리 왕들의 공격에 직면하자, 곧바로 여호수아와 접촉해서 남쪽 연합에 대항해 도움을 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이전에 했던 약속에서 빠져나갈 틈을 발견하는 기회를 맞는다. 기브온 사람들을 살려 주겠다는 약속은 단지 이스라엘이 그들을 죽이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을, 아모리 사람들의 손을 빌어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에게 했던 약속을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것은 기브온 사람들이 사실상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여호와에게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분명 라합보다 훨씬 약한 것이었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그들은 나머지 가나안 백성들과 구별되었으며, 그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라합을 보호해 주었던 것처럼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그의 병력과 함께 길갈로부터 기브온으로 간다.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신다. 사람끼리 한 약속이라 할지라도 신의를 가지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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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22-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수9:22-27)
    22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24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25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26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27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말하면서 사실은 그 땅 출신이면서 왜 멀리 살고 있다고 주장하여 이스라엘을 속였다고 물을 때 여호수아는 진리라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속이는 것이 언제나 문제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속이는 것은 기브온 사람들에게도 문제였다. 그들은 이제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었지만 또한 저주를 받아 종의 지위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문제로 인해 기브온 사람들의 지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그들의 노동을 중앙 성소와 관련시키는 것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와가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확실히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땅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때 그 땅 백성들이 진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실로 이 명령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러나 라합의 경우처럼 여호와에 대한 신앙 고백이 있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브온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속임수로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다. 기브온은 레위 지파의 성읍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다기 보다는 이제 여호와의 종이 되었다. 이제 하나의 해결책이 나왔다. 가나안 백성들이 멸망한 이유는 우상숭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김으로써 이스라엘을 섬길 때 그들의 언약을 더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마침내 진리가 밝혀져 우리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위한 여호와의 목적들에 반대하지 않는 백성들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기브온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과 여호와께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증명되게 된다. 우리는 9장을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는 오늘날 교회가 여러가지 결정을 내리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9장의 전반부는 모든 의사 결정에서 여호와를 찾는 것이 지닌 중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둘째로, 기브온 사람들의 잘못된 접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의 근본적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기브온 사람들의 접근법은 그들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축복 안에서 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종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이것을 분명히 가리킨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일에 기꺼이 순응해 그런 고백을 더 잘 보여 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분명 그들을 그런 상태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축복의 삶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그들을 격려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매우 놀라는 것은 대체로 가나안 원주민들의 멸망에 관한 책으로 여겨지는 여호수아서에서 이방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되는 예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많은 부분의 핵심에도 바로 이러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은 얼마나 믿음을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고백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축복을 받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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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21-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9:7-21)
    여기에 안건을 설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순종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기브온 사람들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이 부분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과서적인 예이다. 기브온 사람들은 도착해서 먼저 선수를 친다. 여호수아와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매우 먼 곳에서 왔다고 주장하면서, 이스라엘과 조약 맺기를 구한 것이다. 신명기 7:2은 이스라엘이 그 땅 거민 중 누구와도 언약을 맺지 말라고 명백히 금한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의 접근법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왜 자신들과 언약을 맺어야 하는지 묻는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기브온 사람들은 더 비굴한 자세를 취해 여호수아에게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등한 만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주도권을 쥐는 언약을 맺으려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더 면밀히 질문한다. 그들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다. 하지만 기브온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대답하면서 그들 자신에 대해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려 하면서 다만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이라는 주장만을 거듭한다. 그들이 심히 먼 나라에서 왔고 여호와의 명성 때문에 왔다고만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라합처럼 여호와가 출애굽과 시혼과 옥에게 하신 일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와 아이성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단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오기 전의 사건들만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장로들과 주민들이 그들에게 양식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의 종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양식과 여장을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너무 오랫동안 여행을 하여 모든 것이 다 썩고 해어졌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그들의 영적 실상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가져온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 여호와께 묻지 않는다. 모든 결정에는 결과가 따른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정죄를 받고 있는 백성과 언약을 맺음으로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언약을 맺은 지 얼마 안 되어 기브온 사람들이 사실은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임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성읍으로 출발한다. 알고 보니 그곳은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이 라는 네 성읍으로 서로 몇km 거리 안에 있는 성읍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읍들을 공격하는 대신 자기 족장들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했던 맹세로 인해 그 사람들을 살려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족장들은 자신들이 현 상황을 유발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에 위배 되는 행동을 하면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맹세를 어김으로써 이전에 저지른 실수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견해를 취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기브온 사람들에게 그 언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리라는 것이다(21절).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길 수는 없으므로, 기브온 사람들이 생명을 부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거짓말로 언약을 맺은 것에 비추어, 이전에 살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결정이다. 이스라엘이 상황을 바로 잡으려면 여호와가 인정하실 방법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여기에서 신명기의 두 본문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 본문인 신명기 20:10-11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잡힌 그 땅 밖의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을 허용한다. 이것이 분명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라는 말의 의도이다. 그러나 이 문구는 또한 두 번째 본문인 신명기 29:11에서 이스라엘 안에 거하면서 이 역할을 하는 외국인들을 묘사하는 말로 나온다. 그래서 그들로 인해 생겨 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이미 계시하신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에 문제는 여호와를 찾지 않음으로 인해 생겨났다. 그래서 해결책의 핵심은 여호와를 찾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선교지에서 너무도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경우 올무가 됨을 선교지에서 많이 보게 된다. 항상 하나님께 묻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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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0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20 - 기브온 거민들(수9:1-6)
    1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2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 3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6 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기브온 사람들이 나오기 전에, 이스라엘에 대한 새로운 반응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본문과 아주 비슷한 5:1에서는 가나안 왕들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녹았다”라고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들이 “이 일을 듣고”, 이스라엘과 싸우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모였다. 그들이 들은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아이성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아이성에서 이스라엘이 처음에 비교적 작은 성을 차지하는 데 실패하자, 이제 지역의 왕들이 고무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극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변화는 10-11장에 나오는 가나안 사람들의 반응을 계속 지배할 것이다. 10-11장에서 그 왕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에 다시 한번 반응하며, 2절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시사하는 전투가 거기에 기록되어 있다. 9장은 대부분 다른 길을 택한 한 집단의 이야기를 기록하지만, 여호수아서는 분명히 보다 호전적인 이 반응을 먼저 강조하고 싶어 한다. 여리고에서 아간이 저지른 죄와 아이에서 그것이 함축하는 것들은 아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7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공동책임을 강조했다. 이제 우리는 그 죄의 또 다른 결과를 본다. 죄의 결과들이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멀리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다. 여러 가나안 왕들은 더 이상 듣고 마음이 녹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모여서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로 한다. 그들은 이전에 여호와가 하신 일 때문에 마음이 녹았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한 일 때문에 용기를 내어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전에는 분열된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하나로 연합한다. 대부분의 가나안 왕들은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한 집단은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비록 속임수이긴 하였지만,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는다. 기브온 사람들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아이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여리고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스라엘이 아이에서 실패했다고 해도 모두가 그들을 반대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기브온 사람들은 더 큰 그림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들린 소식은 그 성의 멸망에 초점에 맞춰져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의 선택권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모를 것이다. 대신 그들은 속임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1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아이 남서쪽으로도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위치로 보아 그곳 사람들은 여리고와 아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신속하게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 대해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아직 기브온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지만,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결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기브온 사람들은 나중에 여호와가 시혼과 옥에 하신 일에 대해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군사적 실상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고대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그들의 신학을 일반적 삶, 특히 군사 상황과 분리하지 않았다. 기브온 사람들의 도전 과제는 이스라엘을 설득해서 그들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 평화가 유지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낡고 해어진 옷과 신발을 착용해 변장하고, 오래된 양식과 헤어진 여장을 갖추고 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주장할 내용, 곧 그들이 매우 먼 곳에서 왔고, 그 땅 거민들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품목들 목록은 길지만 다 나열된다. 그 목록은 그 사람들이 먼 길을 왔다는 증거로 제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길갈에 있는 이스라엘 진영으로 간다. 길갈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지명으로, 이스라엘이 그 땅에 처음 들어갔던 곳을 포함해서 적어도 세 개의 길갈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 시점에 처음에 갔던 길갈로 다시 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이곳은 아마도 길갈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알려지지 않는 장소일 것이다. 물론 벧엘 약간 북쪽에 있는 길갈일 가능성도 있다. 그것이 요단 골짜기에 있는 길갈이 아니라고 해도, 그 지명은 적어도 요단강을 건넌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며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순종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상기시킬 것이다. 죄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위한 문을 열어 주었으며 그들을 담대하게 해서 공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한다. 죄가 오늘날 교회를 공격할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보다 믿는 자의 실패에 반응하며 우리를 공격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헌신한 백성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넌 후에 할례를 시행한 것과 유월절을 지킨 것은 이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들에 헌신하고, 또한 우리 가운데서 매우 쉽게 발생하는 죄를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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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9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9 - 축복과 저주선포(수8:32-35)
    신명기 27장에 나오는 지시들은 희생 제사를 언급하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큰 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토라(아마도 신명기)를 그 위에 필사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 돌들은 단과 분리된 것으로, 아마 십계명이 새겨져 있던 돌판들 혹은 공개적 전시물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석 같은 것이었다. 이 본문은 피상적으로 읽으며 토라가 제단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신명기에 나오는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별개의 돌이 사용되었고, 그 위를 석회로 발라 토라를 그 위에 새기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읽고 쓰는 수준은 아마 별로 높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장소가 존재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및 예배와 분리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도 일부를 옮겨 썼다는 기록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들과 본토인들을 둘 다 포함한다. 이 시점에 이스라엘은 이미 여러 인종이 섞인 백성이다. 이집트에서 이미 여러 “잡족”(mixed multitude)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합의 집이 포함된 것은 이미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적에 동조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토라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이 모든 백성이 언약궤 주위에 모였다. 절반은 에발산에 절반은 그리심 산에 모였다. 다시 한 번 이것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신명기 27장은 언약의 축복과 자주 둘 다에 대해 기록하지만 33절에서는 오로지 복에 대해서만 강조한다. 돌들이 있었으므로 저주 역시 선언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공동체가 성찰해 본다면 이미 겪었던 그들의 경험을 통해 그 저주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축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의 토라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가 모인 사람들 앞에서 토라 전체를 낭독했다고 나온다. 거기 있는 사람들의 모임 역시 포괄적인 것으로 여자들, 아이들,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을 포함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예배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그들은 여호수아가 율법의 축복과 저주 전체를 그들에게 낭독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렇게 하나가 된다. 토라가 기록되긴 했지만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것을 포함하게끔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여호수아는 모인 사람 모두에게 그것을 낭독한다. 그들은 말씀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예배의 여러 활동, 특히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보다 공식적인 예배 행위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행동의 결합이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예배는 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포함한다. 그 말씀에는 축복과 저주가 둘 다 포함된다. 그래서 33절에서는 축복만 언급된 반면, 34절에서는 백성들이 축복과 저주의 모든 말씀을 들었다고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다는 것은 우리가 더 어렵다고 느끼는 본문들, 특히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에 대해 말하는 본문들과 씨름하는 것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예배는 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포함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사실상 백성 전체가 여호수아가 1:8절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건전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보여 준 순종이 오늘날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교회들은 성경을 읽는 것과 해설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정기적으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 그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을 본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에발산에서의 예배가 이방인과 본토인을 포함하는 백성 전체가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이 말씀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이 되도록 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어떤 수단을 쓰든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 하여금 반드시 순종의 축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예배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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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4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8 - 에발 산에 한 제단을(8:30-31)
    우리는 지금까지 여리고 함락, 아간의 죄,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이 성 점령에 관해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중단되고 북쪽으로 거의 30km 이동해서 세겜 근천에 있는 에발 산에서 예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직후에 다시 가나안에서 일어난 충돌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TV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가 중간 광고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우리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말해 주는 그 무엇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본문이다. 그것이 율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또한 지금까지 나왔던 줄거리를 중단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매우 선명하게 줄거리를 중단시킨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주력 부대가 여전히 길갈 지역에 있는 것을 보여주며 그래서 에발산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본문의 위치는 사본마다 다르다. 쿰란에서는 이 본문이 5:1과 5:2 사이에 있는 반면, 칠십인 역에서는 9:2 다음에 나온다. 이런 사본들은 여호수아가 아이를 점령한 후에 가나안 영토를 지나 위험한 북쪽으로 여행을 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인식한다. 특히 세겜의 주요 중심지에 그렇게 가까이 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간 이야기를 대략 연대기적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순서대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연대적 순서를 어길 수 있다. 바로 그것이 핵심 요점을 강조하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정복 전쟁 후기에 일어난 예배의 때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기에 나오는 것은 그렇게 하면 본문이 전개하는 중심 주제를 강조하고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여호와는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명령한 토라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모세를 통해 주신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삶을 형성해야 한다. 아이 성 전투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에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깨닫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자 아이 성은 점령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신실함에 헌신하지는 않았다. 에발 산에서 있었던 이 예배의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헌신을 하는 때다. 아이 성에서 죄로 인해 유발된 실패가 있은 후에 필요한 것은 그 백성이 여호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일에 다시 한 번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가 되어야 하며,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모세가 명령한 그대로 된 것이라고 거듭 반복해서 나 올 때 바로 그 점이 부각된다. 실로 이 구절은 본문을 형성하는 후렴구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토라가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그에 반응하는 적절한 방식이다. 실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으로 구현할 때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예배는 이스라엘의 삶의 핵심에 있어야 했다. 신명기 27장은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 에발 산에 가서 사실상 언약 갱신 식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때 레위인들이 언약의 축복과 저주들을 선포할 것이다. 에발 산이 이스라엘의 중심 산지에 있는 것과 비추어 볼 때, 이것이 그 땅에 들어가자마자 처음으로 할 일이라고 기대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신속하게 행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 여호수아가 “다듬지 않은 새 돌”(31절)로 단을 쌓을 때 성취한 것은 바로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이 명령이다. 이런 구조는 신명기 27:5-6에서 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출애굽기 20:25에서 나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 모세가 요구한 것에 따른 것이라는 단언이 두 번에 걸쳐 나온다는 사실이다. 에발산은 북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그 지역의 주요 무역로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땅 대부분을 내려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그래서 그곳은 전략적이고 상징적인 장소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 중 어느 것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과 제사가 여호와가 모세를 통해 계시하신 것에 따라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요구한 대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린다. 번제는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인 반면, 화목제는 하나님 및 공동체와의 관계를 재차 공고히 다지려는 것이었다. 아이에서의 사건들 바로 뒤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그곳에서의 실패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은 죄 사함 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죄 사함은 궁극적으로 또한 하나님 및 그분의 백성들과의 교제로 이어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사실상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 선물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행동은 신명기 27장에 기초하고 있지만 기록 된 순서가 같지 않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이유는 이 본문이 아이 성에서의 사건들 직후에 나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희생제사는 죄 사함과 새롭게 된 교제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는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에 비추어 필요했던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성만찬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죄 사함, 그리고 그리스도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교제를 둘 다 상기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이것도 하나님이 이미 예수님을 통해 계시하신 것을 순종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상기한다. 죄 사함과 교제는 형태가 다르지만 메시지는 같다. 우리는 죄를 사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수단을 이미 계시하신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예배가 중심이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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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22-02-23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7 - 아이성 전투의 승리(수8:10-29)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백성을 점호하고 백성에 앞서 아이로 올라가서 북쪽에 군사를 배치하고 성읍 서쪽에 오천 명의 복병을 배치하며 단단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이에 아이 왕이 이스라엘이 쳐들어옴을 보고 급히 모든 백성과 함께 나가서 싸우러 나오니 여호수아는 거짓으로 지는 척하며 도망하는 척하였다. 이에 아이 왕과 온 백성은 성문을 열어 놓고 무방비 상태로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다. 벧엘과 아이 사이의 거리에 한 3km의 거리이었다. 거기에 약 오천 명을 매복시키며 만반에 준비하였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어느 것 하나도 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제 이 아이 성을 넘겨주겠다고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전략을 짜며 지형도 익히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힘썼다. 아이 왕은 결정적으로 성읍 뒤에 있는 복병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패배한 척하면서 광야 쪽으로 도망할 때, 아이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느라 아이에서 스스로 멀어지게 된다. 사실상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책략에 완전히 속아서 모든 병력이 추격하러 나오는 바람에 아이 성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바로 이때 여호와는 여호수아에게 그의 손에 든 무기를 들어 복병들에게 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하신다. 여기서 중대한 점은 이 일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리고와 마찬가지로 아이는 궁극적으로 여호와로 인해 점령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아이 공격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전략을 결정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여리고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만 성공할 수 있었다. 방식은 좀 다르지만, 이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해당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은 의무이며 기쁨이다. 그것은 우리의 제자도의 실상을 보여 준다. 매복하고 있던 사람들이 여호수아의 신호를 분명히 볼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 신호는 그들에게 릴레이식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신호를 보자마자 그들은 즉시 일어나 성읍을 점령했다. 전에는 아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서둘러 쫓아갔지만 이제 그 성을 서둘러 점령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호와가 이전에 죄에 대한 그분의 전쟁에서 아간을 잡았던 것처럼 이제 자기 백성을 통해 아이를 함락시킨다. 그동안 여호수아는 무기를 계속 들고 있다. 그것은 모세가 아말렉과 전투할 때 지팡이를 들고 있었던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모세는 승리를 이룰 때까지 계속 팔을 들고 있었고 여호수아도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성읍을 불태울 때 그렇게 한다. 성읍이 불에 타자 아이 사람들은 복병이 성읍을 점령했다는 증거로 인해 낙담한다. 그때 그들은 도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갑자기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발견한다. 여호수아는 아이 사람들이 주력 부대와 복병 부대 사이에서 함정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쳐서 넘어뜨린다. 그 결과 왕만 남기고 모든 아이 사람들이 죽고 왕은 사로잡혀 여호수아 앞으로 끌려온다. 이 전쟁의 결과 12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한다. 이번에 이스라엘은 가축과 그 성에서 노략한 것을 탈취하는 것이 허용된다. 기다렸다면 아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죄에 맞선 여호와의 전쟁에서 멸망 당하는 것은 여호와의 목적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될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여호수아는 아이를 불태웠다. 그것은 여호수아서가 기록될 때까지 황폐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이 왕은 여호수아가 해질 적에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리라고 명할 때까지 나무에 달려 있었다. 해질 때 그 시체는 성문에 있는 돌무더기 아래에 매장되었다. 그 돌무더기 역시 여호수아서가 기록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율법의 요구사항들을 충실히 따르면서 여호와의 목적에 헌신하는 것을 보여 준다. 아이에는 두 개의 돌무더기가 남아 있었다. 아간이 하나의 돌무더기 아래 장사 되었고 아이 왕이 또 하나의 돌무더기 아래 장사 되었다. 각각은 하나님의 목적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결과를 가리킨다. 이것은 단지 구약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신약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기본 유형은 여전히 동일하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따르니 승리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여리고 성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손수 지휘하셔서 이스라엘을 도우셨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나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쉽게 지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가?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나의 안일함으로 얼마나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왔는가? 그 결과 아픔, 슬픔, 후회함, 상처들이 있었으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이 여리고와 아이를 함락시키셨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건재하고 있지 않은가? 늘 하나님 안에 거하면 나의 일생을 주님이 지켜 주시겠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여 주신 말씀을 붙잡고 성실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한 번의 실패로 좌절하지 말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며 다시 일어서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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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7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6 - 아이로 올라가라(수8:1-9)
    이스라엘은 그들 중에 있던 죄를 처리했다. 이것은 죄에 맞선 여호와의 전쟁이기 때문에, 아이의 문제도 여전히 해결해야 한다. 두드러지게 달라진 것은 아이를 취하기 위한 처음의 계획에는 여호와가 언급되지 않았던 반면, 이번에는 그 계획이 다시 여호와의 것이라는 점이다. 여리고 점령이 군사적으로 색다른 것이었던 반면, 아이 점령은 보다 정통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첫째로, 여호수아 자신이 하고 있는 염려를 다루신다. 여호수아는 그의 기도에서 처음의 패배가 연이어 패배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현했다. 이 기도는 비록 잘못된 해석에 기초하고 있지만, 여호와는 이제 은혜롭게 여호수아의 염려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아이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안심시키신다. 여호와가 이미 아이와 아이의 왕을 여호수아의 통제 아래에 두셨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가운데 있는 죄 문제를 처리했기 때문에, 그 땅에 들어갈 때 받았던 승리에 대한 약속들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여호수아에게 알리신다. 이것 자체가 기도의 은혜를 어느 정도 강조한다. 여호수아의 기도는 일어난 사건들을 잘못 해석한 것이었지만, 여호와는 여호수아가 기도하면서 여전히 드러내는 염려들을 다루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여호수아에게 그가 제기한 문제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 역시 보여 주셨다. 이 명령들은 여호수아의 염려들을 다루면서, 또한 여호수아에게 적절하게 전진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그것은 오직 여호와의 계획 안에서 다시 전진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이스라엘이다. 이번에는 백성들이 매복을 통해 그 성을 취하며, 여리고를 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이번에는 노략한 것과 가축을 전리품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여리고는 모든 것을 여호와를 위해 떼어두는 유일한 성읍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러한 차이는 모든 것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온 땅은 다 여호와의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전리품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아무런 작전도 없이 그저 삼천 명의 병력만 보냈던 첫 번째 공략 때와는 달리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총력전을 폈다. 그는 이스라엘 병력의 일부를 아이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서쪽 뒤에 매복시키고 자기가 공격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일어나 아이성을 점령할 만반의 준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여호수아 자신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아이성 북쪽에 진을 쳤다. 이렇게 병력을 두 진영으로 나눈 것은 주력부대가 전투가 시작되면 져서 도망가는 척하며 유인전술을 써서 아이성의 군사들을 성 밖으로 멀리까지 나오게 하고 배후에 매복했던 병력으로 빈 성을 먼저 점령하게 한 후 협공작전으로 아이의 군사를 궤멸시키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이 작전은 적중했다. 아이 왕은 자기들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자(8:14-15) 성읍에 있는 모든 병력을 데리고 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스라엘군을 추격해 나왔다(8:16). 얼마나 승리를 확신했는지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다"(8:17) 했다. 아이의 배후에 매복해 있던 병력이 아이성을 점령하고 불을 지르기에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는 거리까지 아이의 병력을 유인해온 여호수아는 갑자기 그의 손에 잡고 있던 단창을 높이 들어 성읍을 가리켰다(8:18). 그러자 이스라엘의 복병이 매복해 있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다(8:19). 아이 군사들은 뒤를 돌아보고 자기들의 성읍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했지만 이미 진퇴유곡의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갑자기 추격하는 자들로 돌변함으로써 앞뒤로 포위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완승이고 압승이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두 번째 아이성 전투 이야기를 첫 번째 아이성 전투 이야기와 비교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돌이켜보면 이스라엘이 처음 아이성을 공격할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나 약속이나 보장의 말씀이 없었다.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노하셨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는 혼자서 아이성을 다음 정복대상으로 삼았고, 정탐꾼을 파견했으며, 그들의 보고에 따라 공격을 명령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였다. 객관적으로는 질 수 없는 전투에서 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벌써 크든 작든 모든 전쟁에서의 승리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렸음을 깨닫게 된다. 선교지에서의 모든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모든 승리는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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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9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5 - 아간과 아골 골짜기(수7:14-26)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14절) 모든 사람은 바쳐진 것이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그 죄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각 지파가 나아오고, 그다음 관련 족속, 가족, 개인이 나아와서 책임 당사자가 밝혀질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여호수아는 일찍 일어나 여호와의 명령을 따른다. 그래서 결국 아간이 그 죄를 지은 사람으로 드러난다. 여호와가 선언하신 대로, 그의 집은 단계적으로 연이어 뽑혀 1절에 나오는 계보를 점차 역순으로 반복한다. 일단 아간이 죄를 범한 사람으로 드러나자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개역개정에는 “자복하고”라고 번역되었다.)라고 명한다. 이 두 진술은 그의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 지시, 곧 그가 한 일을 알게 하고 숨기지 말라는 지시와 기능이 같다. 다시 말해, 이 경우 아간은 그의 죄를 인정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은 성경의 찬양신학에 대해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찬양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선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찬양에는 그것이 분명히 포함된다. 하지만 우리는 찬양이 또한 실패와 죄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이라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찬양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상은 찬양이다. 그것은 찬양의 본질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성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은 말과 삶이 결합한 것이다. 그것은 시편의 처음부터 끝까지 발견할 수 있다. 여호수아의 도전을 받고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간은 자기가 실제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지은 죄는 구체적으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21절)를 훔쳤다는 것이다. 아간은 자신이 취한 것을 노략질한 물건이라고 묘사하는 데 그 말은 그 물건이 오로지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자신이 적어도 그 일부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간이 그의 장막 속에 그것을 숨겼다고 알린 후 실제로 그곳에서 물건이 발견되면서 이 이야기에서는 아간의 고백이 재빨리 확증되었다고 자세히 말한다. 그 결과 여호와가 이미 명하셨던 벌이 시행된다. 아간과 그의 자녀들을 포함한 그의 모든 소유를 아골 골짜기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아골의 뜻은 ‘괴로움’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아간은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왜 이 괴로움을 이스라엘에게 가져왔냐고 묻는다(25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불태웠다. 이런 심한 벌은 죄가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아간의 비극 중 하나는 이스라엘이 어떤 전리품도 취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이 내려졌던 성은 단지 여리고성 뿐이었다는 것이다. 기다렸더라면 아간은 어느 정도의 전리품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26절) 이스라엘이 이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무더기는 분명히 이 본문이 기록될 때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죄에 맞선 여호와의 전쟁을 계속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돌무더기는 하나님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시며 땅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죄에 대한 공격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은 아골 골짜기로 갈 때마다 아간의 실례를 기억하고 자신을 다시 한 번 거룩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헌신한다. 선교지의 소식을 접할 때, 때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다. 영적인 최전선에서 싸움을 하다보면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그때마다 선교지를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장되어야 한다. 아간의 범죄로 가나안 정복전쟁이 잠시 어려워 진 것은 사살이지만 멈춘 것은 아니다. 다시 회복하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어디서 실패했는지 살펴보고 승리의 자리로 돌아오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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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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