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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불의한 청지기 비유
- ◇ 누가복음 16장에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온다. 대표적 난해 구절 중 하나이다. 내용인즉, 어떤 부자 집에 그 부자의 재물을 관리하면서 그 재산을 제 멋대로 낭비하는 청지기가 있었다. 청지기는 집안의 총무 일을 맡은 사람이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주인의 재물에 대해 '횡령'을 일삼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부자는 그 청지기를 불러 해고를 통보했다. 그러자 그 청지기는 자신이 관리하던 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러다가 채무증서를 조작해 많은 빚을 일방적으로 감액해 주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해고된 후에 때때로 그 채무자들을 만나 밥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그런 짓을 벌인 것이다. 명백한 '배임' 행위이다. 그런데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도 그 청지기를 당국에 당장 고발키는 커녕,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8절)는 것이다. ◇ 물론 이 비유에서 주인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 것은 그 불의한 청지기의 사기성을 인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고, 그의 용이주도한 '지혜'를 칭찬했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아들들(세속적 사람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하나님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절)는 그 뒷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언급한 말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알아듣겠는데, 여기에 더 이해하기 곤란한 내용이 첨언되고 있다. 9절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이 불의한 청지기는 '직권 남용'을 행해 주인의 재산에 많은 손해를 끼쳤다. 이런 직원은 파면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 청지기의 불의한 처사를 당국에 고발해 횡령한 돈을 회수하고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청지기의 불법 행위에 동조한 채무자들 역시 같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비유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며 그 청지기의 불법적 행동을 용인하는 듯한 말씀을 하는 것일까? ◇ 이 청지기 비유의 촛점은 주인에 대한 '충성'을 재물의 관리에서 찾고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0절) 라는 것이다. 이는 청지기가 갖추어야 할 성실성의 문제이다. 성경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청지기에게는 오로지 주인의 재물을 바르게 사용해야 할 책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가 멋대로 판단하여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적 재물 즉 '불의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라는 말이다. 이 세속적 재물을 마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호의호식 하다 음부로 간 부자처럼 혼자 움켜지고 있지 말고, 그 재물이 필요한 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 세상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너희의 재물로 그렇게 하라는 교훈이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청지기에서 해고될 때, 즉 세상의 삶이 끝나고 숨을 거둘 때에 너희의 행위를 지켜봐 온 친구들(천사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뜻이다. 매우 의미있는 비유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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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불의한 청지기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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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설교-하나님의 말씀
- ◇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고 한다. 여기에 이 '말씀'(Word)은 그냥 '말, 낱말, 단어'를 뜻하는 word가 아니고, 헬라어 '로고스'(Logos)를 번역한 것으로 어떤 신적 존재에 대한 고유명사이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한다. ◇ 만물을 지은 창조주로 표현되는 이 어떤 존재에 대해, 본문은 "아버지의 독생자"(14절), 또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18절)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이 독생자를 칭하는 고유명사 '말씀'(Word)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say 또는 speak)고 할 때, 보통명사 '말씀'이 구분되지 않아 혼돈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 구원사에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이다. 이 성경에는 독생자에 대한 계시가 나타나 있기 때문에 말씀이다. 둘째는 '보이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독생자가 성육신(Incarnation) 하여 세상에 오사 행하신 것을 오늘날 기념하는 것이 성찬이다. 셋째는 '들리는 말씀'으로 설교이다. 설교는 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 말씀이다. ◇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이 '말씀'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 사역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증언되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목사가 설교란 이름으로 성경 본문 한 절 읽어 놓고 아침 신문에서 본?이야기나, 또는 자신의 신변 잡기를 코미디언처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애국심을 부추기며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또한 종교적 강화(講話)나 기복적 축복(祝福) 역시 마찬가지이다. 설교는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행한 구속 사역을 이 시대에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 하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역이 증언되지 않는다면, 그 설교가 아무리 훌륭한 종교적, 윤리 도덕적 가르침을 설파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 설교는 대체로 기복적(祈福的)이어서 소시민들의 기복주의에 경도(傾倒)되어 있다. 따라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으로서의 힘을 잃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사역에 대한 바른 설교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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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설교-하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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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부유한 영혼
- ◇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올라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눅 4:1,2). 예수님의 성령의 충만은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강림한 성령에 의해 된 것이며, 시험은 이 '성령의 충만함' 체험 후에 즉시 따라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증거가 오고, 다음에 바로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을 만들라"는 마귀의 유혹이 따라 온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큰 은혜 후에 반드시 반동의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거나, 또는 어떤 선한 일을 결심하거나, 헌신코자 할 때에 언제나 마귀의 시험이 따라 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다. 역사의 위대한 사명자들은 하나같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많은 영적 힘을 얻고 그 사명을 감당했다. 광야는 춥고 외롭고 배고프고 불편한 곳이다. 따라서 그만큼 사단의 유혹과 공격이 심한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봉착한 어떤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가 있다. 거기가 바로 광야이다. 그러나 광야는 성령의 인도함 없이 함부로 들어서서는 안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성령이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면 광야는 우리에게 반드시 유익한 장소가 된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시험을 받았다. ◇ 또한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바로 뒤따라 오며 바스락 거리는 뱀의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큰 은혜를 체험을 한 후에, 특별한 영적 사명을 받은 후에, 큰 성공을 거둔 후에, 하나님과의 만족한 친교에 들어간 후에, 사단의 공격을 조심해야 한다. 사단은 죽은 영혼은 거들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자기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사단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산 영혼을 노린다. 깊은 기도와 큰 은혜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사단의 유혹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혜 받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조심하지 않아 사단의 유혹에 넘어진다. ◇ 사단은 우리들이 주 안에서 평안히 잘 되는 것을 결코 보고만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이 부유한 사람일 수록 그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성해야 한다. 또한 때때로 시험은 우리의 신앙과 영혼의 유익을 위해 허락된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더 강하여지고 더 순결해지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약 1:2).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런 시험을 허락하는가 라며, 실의에 빠져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지고 신앙을 회의하는 것은 그 시험에 실패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시험을 허락하시기 전에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는 사실도 굳게 믿어야 한다(고전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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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부유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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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고트족 주교 울필라스
- ◇ 역사적 기독교는 초기 로마 시대를 지나 곧 게르만족이 이끌었다. 게르만족의 복음화에 공헌한 인물이 있으니 그가 주후 4세기 사람 울필라스(Ulfilas 또는 풀필라, 313-383) 주교이다. 그는 3세기에 고트족에게 포로로 잡혀가 도나우 강 북쪽에 정착한 카파토키아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30세 때, 게르만계의 일파인 고트족 왕 알라틱이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낼 때, 그 사절단을 따라 갔다가 콘스탄티노플에 10년간 머물면서 거기서 신학과 철학 등 다양한 공부를 하고, 341년 아리우스주의자인 콘스탄티노플 주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로부터 고트족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고트족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343년부터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고트족 문자를 창안하고 그 문자로 고트족 성경을 번역해 고트족 선교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하여 그의 전도로 서고트족(Visigoths) 전체가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다. 그는 이처럼 유럽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게르만족 개종에 역할을 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성자의 '유사본질론'(homoiousios)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따랐다. 그를 가르친 사람들이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는 유사본질파였기 때문이다. 유사본질론이란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지는 않고 유사(類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의 니케아 정통신앙은 성자는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는 '동일본질론'(homoousios)이다. 325년 니케아공의회 이후 유사본질론은 이단으로 규정되어 배척되었다. ◇그가 창안한 고트족 문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개조하여 만들어졌는데, 그는 381년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제외하고 성경 전체를 고트어로 번역했다. 그 가운데 복음서와 바울서신들은 지금도 상당부분이 현존하며, 구약의 일부도 남아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번역하지 않은 이유가 그 책에 전쟁 이야기가 많아 전쟁을 좋아하는 고트족에게 전쟁을 부추길까 봐 번역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울필라스의 이 고트어 성경번역으로 게르만계 대부분이 그를 따라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울필라스의 영향으로 서방은 오래동안 이단 아리우스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이다. ◇대부분의 교회사는 울필라스의 이 업적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정통 보편적 가톨릭 신앙이 아니고, 아리우스주의자였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고트족은 니케아의 보편적 가톨릭(catholic) 정통주의로 돌아왔다. 그가 교회사에 남긴 업적이 결국 게르만계 복음화의 밑바탕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주후 800년 칼 대제의 신성 로마제국은 바로 이 게르만족의 나라이고, 이들에 의해 유럽 기독교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오늘날 세계교회를 이끌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울필라스의 고트족 선교는 기독교의 역사뿐 아니라, 지금도 높이 평가해야 마땅한 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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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고트족 주교 울필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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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라틴 교부 터툴리아누스
- ◇주후 3세기 라틴(서방) 교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가 터툴리아누스이다. 본명이 '퀸터스 셉티머스 플로렌스 터툴리아누스'(Quintus Septinus Florens Tertullianus)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그는 150년 경에 북아프리카 카테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총독부의 백부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당시에 받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육을 다 받았다. 그리고 로마에서 정치학, 법률학, 웅변술 등을 공부하였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믿게 된 것은 주후 190년 경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유대인 및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호하는 일과 엄격한 도덕생활에 전념했다. ◇교회의 '장로'였던 터툴리아누스는 라틴 신학과 교회 어학의 원조이다. 그리스도교에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고, 로마 교회의 감독 제도를 정착 시킨 씨프리아누스의 선생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3세기 초부터 당시 이단시 되던 몬타누스 파의 주장을 변증하는 일에 나섰다.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주의자로 규정된 몬타누스 파는 대체로 정통 교리를 신봉했지만, 교리와 생활에 너무 엄격하여 광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이전에는 이단과 이교에 대항하여 맹렬히 싸우던 그가 이제는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이 비도덕적이며, 그리스도교 생활에 형식적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생활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고대 그리스도교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학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가 남긴 주요 저서로는, 변증서에 유대인들과 이단에 대한 '변증학'(Apologeticus), '영혼의 증언에 관하여'(On the Testimony of the Soul)가 있고, 논쟁서에 영지주의자들을 논박하는 '이단 대처법'(On the Prescription of Heretics), '세례에 관하여'(On Baptism), '영혼에 관하여'(On the Soul), '그리스도의 육체에 관하여'(On the Flesh of Christ), '육체의 부활에 관하여'(On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와 '기도에 관하여', '참회에 관하여', '인내에 관하여'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박해 때 도피하는 행위와 재혼을 비판하고, '육에 속한 자들'과 '신령한 자들'이라는 글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두 그리스도인이 한 소망, 한 언약, 한 예배로서 결합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들은 형제자매이며 다 같은 하나님의 종이고, 한 정신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함께 기도하며 함께 금식하고, 피차에 훈계하며 권고하고 또한 의지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에도 함께 가고 성찬에도 함께 참례한다. 부부는 고난과 핍박을 피차에 함께 나누며… 이들은 함께 병자를 심방하고 불쌍한 이웃 돕기를 즐겨하며, 구속 받음이 없이 자유로 구제하고, 망설이거나 주저함 없이 기꺼이 하나님의 제단에 예물을 바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이들의 찬양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평화를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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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라틴 교부 터툴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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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순절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기를
- 지금은 오는 4월 첫 주 부활주일을 앞두고 사순절(四旬節, Lent)) 기간이다. 교회력에서 사순절은 주의 고난을 기념하는 40일의 금식기간이다. 이는 주님의 공생애를 앞두고 행한 40일 금식을 함축하고 있다.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 고난주간이고, 주님은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기간 매 주일날과 부활주일은 사순절의 40일에 들어 있지 않다. 역사적 기독교는 이 사순절 기간을 금욕하며 기도하고 엄숙하게 보냈다. 하루에 한 끼 또는 두 끼를 금식하며 참회기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세례지원자들은 이 기간에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고 신앙고백을 엄수했다. 이는 부활절 전야에 다짐하는 마음가짐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 역사는 현대교회에서도 당연히 그대로 이어져 가고 있다. 특히 로마교회와 그리스교회는 사순절을 대단히 중요시 한다. 또 교회력을 중시하는 역사적 교회는 사순절 기간에 교회 안팎의 색깔도 대부분 검은 천으로 꾸몄고, 설교 역시 주의 고난에 맞추었다. 개신교회 중에는 루터교가 이를 잘 지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같은 의식과 정신이 많이 헤이해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서방교회나 동방교회처럼 고행의식에 빠지거나, 지나친 금식주의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사순절 기간에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영성을 가다듬는 것은 개혁교회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사순절 내내 하루 한 끼 정도 금식하고, 또 노래방이나 영화관이나 자신을 위한 유흥을 멀리하고, 관련 성경구절을 읽으며, 암송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려면 담임목사가 먼저 사순절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의식이 있어야 하겠다. 그래야 교인들에게 사순절에 대한 신앙적 의미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정국을 극복한 한국교회가 올 사순절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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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순절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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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 ◇ 고대 기독교가 낳은 가장 탁월한 교부 중 한 분이 역사상에 '어거스틴'이라고 불리우는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그의 원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이다. 그는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타케스테(Tagaste) 라는 조그만 촌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이교도였고,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어머니의 기도와는 달리 육체의 쾌락과 미로를 끝없이 방황하며, 한때는 마니교에 미치고, 학문적 회의주의와 플라톤의 관념론에 빠져 헤맸다. 그로 인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자와 동거하며 아들도 낳았다. ◇ 그러나 그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기도와 밀라노에서 만난 교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아타나시우스가 쓴 '성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읽고, 33세의 나이에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기독교 세계 전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유익을 끼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7년 부활절 주일에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회심자인 알리피우스(Alypius)와 일곱 살 짜리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마침내 아들로 인해 오랜 기간 극심한 영적 고통을 감내해온 신실한 어머니 모니카는 그녀가 죽기 직전에 그 기도와 기대가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례를 받은 그 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탈리아 티베르 강 어귀의 오스티아에서 그녀의 나이 56세에 아들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 아데오다투스도 그 다음 해에 죽었다. ◇ 어머니와 아들이 죽고 난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 그곳에서 집필에 몰두하며 열심히 가르치고 봉사하며 교회를 섬겼다. 그의 명성이 온 기독교 세계에 퍼져 389년에 장로로 임명되어 설교자가 되었고, 396년에 누미디아의 해안도시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밀라노에서 회개하고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세례 받은 지 9년 만에 장로(목회자)를 거쳐 감독(주교)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집을 수도원으로 삼아 순수한 삶을 추구하며동료 사역자들과 함께 살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430년 8월 28일 조용히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이어 설립된 수도회가 '아우구스티누스회'이다. 훗날 이 수도회가 종교개혁자 루터를 배출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책은 '참회록'(The Confession)이다. "당신은 저희를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셨으며,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안식하지 못하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과 명상록(Meditations)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확립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요, 저술가이다. 역사적 기독교의 정통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온 것이다. 루터도, 칼빈도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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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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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주교 암브로시우스
- ◇ 초기 기독교가 교리 논쟁이 한창이던 4세기에 유명한 교부 중에 암브로시우스(Ambrose, 374-397년)가 있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주교로서, 저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에게 세례를 베푼 멘토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암브로시우스가 주교가 되는 과정이 특이하여 교회사에서 크게 회자되는 사건이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당시 서방제국의 주요 지역 가운데 하나인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라인강 서쪽 지역)를 통치하는 총독의 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이탈리아 북부를 다스리는 집정관(장관)이 되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 가는 제2도시로서 황제들이 자주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로마 사회의 새로운 종교로 등장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도시였다. ◇ 그런데 암브로시우스가 374년, 그곳 장관으로 부임한 때에 이 도시의 주교가 죽고 후임자 선출 문제를 놓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직전 주교는 니케아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 파의 카바도키아 출신 아욱센티우스(Auxentius)였다. 그때 가톨릭 파와 아리우스 파 간에 후임은 서로 자기네 편 사람을 주교로 세워야 한다며 분열이 일어났다. 대다수 시민들은 정통 파인 가톨릭 쪽에 지지를 보냈지만, 발렌티아누스 2세 황제의 어머니인 유스티나 황후가 아리우스 파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가운데 여차하면 유혈 사태가 벌어질?조짐이 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자신에게 이 사태를 진정시킬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암브로시우스는 이 험악한 분위기를 설득키 위해 중재에 나섰다. ◇ 다행히 양측은 그의 의견에 동의해 주교를 뽑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양측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암브로시우스가 회중?앞에 나서서 발언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뒤쪽에서 한 소년이 손을 번쩍 들고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 세우세요,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 세우세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거기 모인 회중은 일순간에 압도되어 "아멘, 아멘!" 하고 동의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그 당시 세례도 받지 않은 교리문답자에 지나지 않았다. 암브로시우스는 당황하여 "나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는데 무슨 주교입니까 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밀라노 시민들은 가톨릭 파든, 아리우스 파든 어느 한쪽에서 주교가 나오게 되면 곤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중립적인 암브로시우스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 자칫 큰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그는 결국 8일 만에 승복했다. 곧바로 사제들이 세례(44세)를 베풀고, 이어서 밀라노 주교로 임명했다. 세례로부터 주교가 되기까지 불과 3일이 걸렸다. 그런데 그는 이때부터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평생을 교회를 위해 산 초기 기독교 세계에 위대한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수행 중에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있다. 돈오돈수란 말은 불교의 수행 진리를 오랜 기간 배우지 않고도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깨닫는 것을 뜻한다. 이후 암브로시우스는 아리우스에 대해서 단호히 비판하고, 니케아 신앙이 승리를 거두게 하는데 이비자했다. 암브로시우스는 바로 기독교의 정통주의와 그 사상을 돈오돈수 한 셈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계에는 전통 있는 교단이나 명망 있는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도 정통성과 깊은 영성을 가진 설교자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이들이 기독교 진리를 돈오돈수 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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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주교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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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라틴 교부 제롬
- ◇ 초대교회 교부 중 탁월한 인물에 제롬(Jerome, 345-420)이란 라틴(서방) 교부가 있다. 교회사에서는 그를 가리켜 히에로니무스(Heronymus)라고도 한다. 그의 원래 라틴 명이 <소프로니우스 에우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달마티아 접경 지역인 스트리디온(지금의 헝가리 지방)에서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 때 로마에서 귀족의 자녀들과 함께 유명한 문법학자 도나투스(Aelius Donatus)와 수사학자 빅토리누스(Victorinus)의 지도를 받아 법률가가 되었다. 그는 아주 근면하고 공부에 충실해 철학자 키케로(Cicero)를 비롯한 고전 작품을 읽었다. 그는 로마에서 세례를 받고 엄격한 금욕생활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 그는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가 죽게 될 만큼 극심한 금식 중에?희한한 꿈을 꾸었다. "영에 사로잡혀 어떤 힘에 끌려가 빛이 매우 밝은 심판대 앞에 섰다. 주위에 눈부신 빛을 발하는 어떤 분 앞에 엎드려 차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 분이 '너는 누구며 무엇하는 사람이냐 '고 물었다. 이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분은 다시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의 추종자이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 순간 그는 괴로움 속에서 '오 주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치면서 통곡했다. 그는 이후로 다시는 세상적인 책들을 읽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는 이 맹세를 가지고 꿈에서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 제롬은 라틴 교부 가운데 가장 박식하고, 가장 웅변력이 뛰어나고, 가장 흥미로운 저자로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생애를 다하는 날까지 쉬임 없이 가르치고 배우고 글을 썼다. 하루라도 끼니를 거르면 안되듯 책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 세계는 주전 250년에 유대인 학자들이 번역한 헬라어 성경(칠십인역)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칠십인역은 번역상의 오류도 있었고, 그것을 필사하고 또 다시 필사하는 과정에서?실수는 증가하였다. 이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면 전혀 엉뚱한 내용이 되기도 했다. 이에 제롬은 라틴어 성경을 히브리어로부터 직접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장년이 된 후에 시리아 광야에서 5년간 금욕생활을 할 당시 회심한 한 유대인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 이후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가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위해 정착한 곳은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근교였다.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과 교회를 세우고, 여성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많은 책들과 사본들에 둘러싸여 번역사업에 착수했다. 제롬은 랍비 바르 아니나(Bar-anina)를 비롯한 여러 유대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사업을 시작한지 2년 후 주후 405년에 불후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Vulgate)역을 출판했다. 이를 '불가타'역이라고도 한다. 초기 기독교 세계에 칠십인역이 끼쳤던 것 같은 영향을 불가타역은 라틴 기독교 세계에 끼쳤다. 그는 철학자요 수사학자요 문법학자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능통한 학자였다. ◇제롬은 해석학과 교회사와 교리적, 윤리적 저서 등 수없이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또 신구약 성경주석도 썼다. 창세기, 대선지서, 소선지서, 전도서, 욥기, 시편, 마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의 주석을 남겼고, 교부들과 성인들의 역사, 기독교문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논쟁적인 교리적 . 윤리적 저서들 가운데는 아리우스파 논쟁, 오리게네스 논쟁, 펠라기우스 논쟁 등도 다루었다. 그가 친구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들은 오늘날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당시 교부들의 삶과 교훈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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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라틴 교부 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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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동방 교부 아타나시우스
-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교회 역사에서 니케아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언제나 'the Great'라는 칭호가 붙어 다닌다. 그리고 그는 훗날 '정통신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아타나시우스는 297년경 이집트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랐다.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Alexander)는 소년 아타나시우스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그를 데려다 가르쳤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비서로 삼고 얼마 후 교회의 집사(부제)로 임명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고전과 성경, 교부들의 저서들을 공부하면서 금욕자로 생활했다. △로마의 박해 아래 있던 교회는 313년 콘스탄티누스로부터 로마의 ‘합법적 종교’로 인정받아 박해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론에 대한 견해가 갈라져 있던 교회는 전체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 교회회의를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 니케아에 제1차 세계기독교공의회를 소집했다. 이때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 감독을 보좌하는 집사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 회의를 지켜보던 아타나시우스는 회의장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논박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옹호하는 열정과 지성을 드러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후 장로가 되었다가 328년에 임종을 앞둔 알렉산더 감독의 천거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으로 지명되었다. △325년 니케아에서 아타나시우스의 ‘동일본질’파가 정통신앙이 되고, 아리우스의 ‘유사본질’파는 이단이 되었음에도, 당시에는 아직도 아리우스파가 황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를 설득하여 아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유배지에서 돌아오도록 했다. 이제는 그들의 공격으로 오히려 아타나시우스가 면직과 추방에 거듭 처해졌다. 첫 번째 유배생활은 트레브에서, 두 번째는 로마에서, 세 번째는 이집트 사막에서 수사들과 함께 보냈다. 황제 율리아누스는 추방된 주교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아타나시우스가 다시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네 번째 다시 이집트로 추방되었다. 362년 율리아누스가 죽자 후임 황제 요비아누스에 의해 다시 교구로 돌아왔으나, 얼마 안가 요비아누스가 죽고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발렌스가 즉위하자 367년에 다섯 번째 다시 추방됐다. 그의 유배생활은 모두 20년이나 되었다. △그는 기독교 정통신앙의 옹호자였지만, 수많은 적들의 공격을 받아 20년 간의 유배를 견디고, 마침내 373년에 76세의 나이로 아직 아리우스주의와의 투쟁의 종결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교구에서 눈을 감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를 향해 다신론자들, 무신론자들, 거짓말쟁이들, 개새끼들, 이리들, 적그리스도들, 마귀들이라고 불렀다. 교회는 정통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적들로부터는 그토록 심한 증오를 받았고, 그를 지지하는 신도들로부터는 그토록 큰 사랑을 받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 “위대한 계몽자” “하나님의 교회의 모퉁이돌”이라고 칭송했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기독교 변증서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니케아 신앙에 대한 교의서로서 '수사들에게 보내는 아리우스파의 역사', 금욕주의를 강조한 '성 나토나우스의 생애'가 있고, '시편 주석'을 비롯한 수많은 편지와 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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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동방 교부 아타나시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