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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가르침’(요 13:12~15)
- 제자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승의 사전적 의미는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이고, 선생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교육(education)은 라틴어로 ‘끄집어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사람됨이 되도록 가르침이 교육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하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을 키워가기 위해서 서로 배워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주와 선생으로서 섬김을 받기보다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섬겨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는 자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에서 겸손하신 스승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년간 공생애 기간 동안 두 가지 예식, 즉 성찬식과 세족식을 베푸셨습니다. 성찬은 구원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족은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승이 되시고 주가 되셨지만,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족식은 예수께서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으로 가르쳐주신 참된 스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세우실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부르셨습니다.(막 3:13)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며,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과 눈높이에서 출발하셔서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셨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로부터 출발하셔서 예배에 대한 대화로 옮겨가셨습니다. 결국 그 여자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전도하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뒤에서 살짝 만지고 오랜 혈루병이 나은 여인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까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으로 생각하고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때 몸이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눅 8: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더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손을 댄 이유와 곧 낫게 된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 알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 그 여자를 세우심으로써 그 여자가 치유되었고, 더는 부정하지 않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 여자가 당당하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인들에게나 병자들에게는 그들의 눈높이로, 제자들에게는 제자들의 눈높이로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되도록 생명력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 되기 위해서 주님처럼 삶으로 사랑으로 가르쳐주는 겸손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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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가르침’(요 1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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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초절제가 초감탄을 이룬다
- 지난주 화요일 부산에서 총회가 주관한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 저녁설교를 하였습니다. 제가 화상을 입기 전에 저녁 강사로 초청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합쳐 보니까 목사장로기도회에서 8번 설교를 했더라고요. 총회 역사에 이런 유례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첫날 저녁 시간은 목사장로기도회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먼저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설교도 40분 이상 해도 된다고 문자가 와서 넉넉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설교자가 두 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투트랙으로 기도회를 하고 투트랙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30분으로 줄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0분 정도 하자 하고 거기에 맞게 준비를 하고 갔습니다. 오랜만에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집회 장소에 도착하니까 여러 목사님, 장로님들이 인사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한 임원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강의가 많아서 좀 피곤하고 힘듭니다. 좀 졸립니다. 목사님, 제발 설교를 좀 재미있게 해 주세요.” 이 말은 좀 짧게 해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동행한 송종호 안수집사가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설교를 짧게 해야 한다고 압박감을 주었습니다. 사실은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칸타타 ‘빛의 연대기’ 곡도 몇 곡 소개하고,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대한 영상 등 다채롭게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가서 보니까 순서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제 설교 후 많은 분들의 특별기도, 그다음에는 또 제가 아끼는 후배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설교 중에 나와야 할 영상이 제때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안 되겠구나...” 저는 영상 시스템이 우리 교회와 비슷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설교와 함께 영상이 따라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왕 절제한 김에 확실하게 절제를 하자” 생각하고 정말 과감하게 설교를 짧게 끝냈습니다. 끝나고 보니까 설교를 딱 21분 했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전하고 싶은 말씀은 거의 다 했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마치고 나오자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최고였습니다!” 다음날 이종민 목사님도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를 짧게 하시기를 너무나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나 들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짧고 간결하면서도 할 얘기는 다 전했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저도 젊은 날에는 시간을 초과하면서 많이만 듬뿍듬뿍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초절제가 초감탄을 이룬다고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가 절제입니다. 교회는 혼자서만 신앙생활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절제와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생각난 것이 있었는데요. 지난번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공연했던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칸타타 공연을 안 하기로 한 것은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고, 상황이 안되었기 때문이죠. 사실은 제가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을 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감격했습니다. "초절제 초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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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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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초절제가 초감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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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사법 정의가 살아나야 우리나라가 산다
- 최근 대법원(대법원장 조희대)이 공직선거법 위한 사건에 대하여 빠른 판결을 위한 속도를 내는 것으로 일려진다. 본래 공직선거법 위반은 3.3.6으로 끝나야 한다. 즉 1심에서 3개월, 2심에서 3개월, 그리고 불복하여 3심까지 갈 경우에도 6개월 내 끝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근자에 사법부는 큰 권력에 연관된 사람이나 일부 법관들과 이념과 사상에 맞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직선거법 위반자에 대해서도 재판을 질질 끌다가 결국 4년 임기를 마치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다. 혹은 임기를 80% 이상을 채운 가운데 결론을 내는 경우들도 있었다. 이것이 ‘사법부 정치화’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니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권력무죄’로 불의(不義)가 판치고 있었던 것이다. 법을 만드는 입법부 사람들이 법을 안 지키고, 법으로 죄를 단죄해야 할 사법부가 제대로 법을 집행하지 않는 법치주의를 무너트리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죄가 명백해도 유명 정치인, 유력 정치인이라고 ‘법정 구속’을 않고 봐주는 경우들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는 만민에게 평등한 ‘법치주의’를 이루기 어렵게 된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특혜를 그야말로 일부 특정 정치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대법원이 이재명 의원(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유력한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3심에서 신속하게 처리하려 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즉 이 사건을 심리하기 위하여 전원합의체를 구성하여(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되는 사건, 종전 대법원 판례를 변경해야 할 경우에 판결하는 형태) 연속적으로 심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것이었으나, 2심에서는 모두 무죄로 선고한 것이어서, 그래서 중요한 쟁점을 대법원이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법원의 판결 내용과 시점에 따라 6월 3일 치르게 될 대선에도 큰 파장이 일어날 수 있다.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2심 법원에 ‘파기 환송’이나, 대법원이 직접 형량을 정하는 ‘파기 자판’을 할 경우, 이 전 대표는 대선에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전 대표는 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말고도 여러 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 또 과거에도 전과 4범이란 불명예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법부 최고의 권위와 최종 판결을 가를 대법원의 현명한 판단으로 사법부의 정의를 세워주기 바란다. 이 나라는 이미 법치주의가 무너져, 불법, 탈법, 편법, 법꾸라지들에 의하여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막아주고, 정의를 세워달라고 사법부를 만든 것이 아닌가? 대법원이 지난 2018년 공정한 판결을 내렸었다면, 오늘날의 이런 혼란스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법부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법의 정신과 법의 정의와 법의 양심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 됨을 잊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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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사법 정의가 살아나야 우리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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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성명(姓名)을 넣은 기념관과 재단 설립은 명예로워야
- 부사관으로 군에 입대한 남성이 성전환 수술을 하여 군 당국으로부터 ‘심신 장애 3급 판단’으로 전역 조치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본인은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겠다며, 강제 전역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런 일이 끝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여군들의 입장은 생각해 봤을까? 안타깝게도 이 소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본인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지난 2021년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2월부터 군 인권을 위한 명목으로 활동하는 단체에서 그의 이름을 넣은 재단(財團)을 만든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설립을 위한 신청을 하였다. 국가인권위에서는 이에 대하여 몇 차례 다뤘지만,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상태이다. 이를 반대하는 자유인권실천국민행동 등 50여 개 시민단체들은 ‘군인권센터가 변00재단을 만들어 대한민국 정부 독립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를 압박해 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며, 21일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실 어떤 재단이나 기념관에 사람의 성명(姓名)을 넣어 만들 때에는 그가 역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훌륭한 업적이나 공적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승만, 박정희, 안창호, 김구, 백선엽 등의 기념관이나 재단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다. 군 복무를 해야 할 군인 신분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군인으로 복무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전역 조치를 당한 후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의 이름으로 재단을 만든다는 것은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어떤 국민들이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인정하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뒤바뀌고 왜곡된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국가에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성정체성을 겪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공익적 재단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법인을 허락한다면 국가 기관이 이를 인정하고 부추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 기관이 이들의 요청을 들어줘서는 안 될 것이며, 이를 반대하는 시민 단체들의 우려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개인적인 한 사람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우나, 그렇다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재단을 만들어 기린다는 것은 국민들과 우리 젊은이들을 어떻게 보고 하는 행동인가? 생명은 누구나 소중하고 귀하다. 그런 측면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것과, 그의 이름으로 전 국민 앞에 재단을 만들어 크게 기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불편하고 서로 힘들게 될 것이다. 그런 불편과 불쾌함을 자초하는 우(愚)는 범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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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성명(姓名)을 넣은 기념관과 재단 설립은 명예로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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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효와 사랑과 감동에 대해’ (딤후 1:11~14)
- 사람의 마음이 감동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감동’(感動)이란, 무언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동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래 마음과 태도가 변화되고, 비로소 귀한 마음가짐과 행동의 변화를 이루어 무언가 새롭고 소중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일꾼인 디모데를 향해서 안수하기를 원했고, 디모데에게 안수할 때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불일듯 되살아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그 마음과 능력을 전달하고 전수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안수는 그 자체로 매우 고귀하고 선한 행위에 해당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일꾼, 순수한 사랑의 사역자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먼저 디모데의 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었는데, 디모데에게도 그러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바울은 발견했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순수한 열정과 진정한 믿음은 어느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으며 대를 이어 나타난 그 성실함과 진실함과 온전한 믿음가운데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디모데의 삶과 인성과 마음을 보았고, 감동했으며, 안수를 주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한 결심 또한 바울의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그분의 거룩한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무슨 자격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인 우리 주님을 증거하는 일과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고 있음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 13-1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제가 잘 알던 고(故) 최성규 목사의 효(孝) 사역이 시작된 계기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였습니다. 16일만에 극적으로 살아난 3명의 젊은 청년들이, 비록 신앙을 갖지 않았음에도 살아난 것에 대해, 그들이 공통적으로 모두 효자, 효녀였다는 것과 연결되면서 최 목사로 하여금 ‘효’를 본격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효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일곱가지로 효가 정리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1효), 부모와 어른 스승을 공경하고(2효), 어린이와 청소년, 제자를 사랑하며(3효), 가족사랑(4효)과 나라사랑(5효), 자연사랑과 환경보호(6효)에 이어 이웃사랑과 인류봉사(7효)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곱 효가 이뤄지면 다시 7가지 행복(가정 학교 사회 경제 나라 교회 인류)이 온다는 내용입니다. 효의 원전은 효경이나 유교 경전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를 가르친 공자는 BC 551년 인물이지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가르친 모세는 BC 1526년 인물입니다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 얻지만 행복은 효를 통해 받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복과 장수를 얻는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열심은 언제나 그 삶의 방향이 주님의 뜻인 복음과 긴밀히 밀착되어 있어야 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효를 행하는 사람들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 때,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법으로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순전한 마음과 진정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부모를 공경하며, 자녀와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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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효와 사랑과 감동에 대해’ (딤후 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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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녀들이 묻거든’(출 12:21-28)
- 자녀들이 묻거든 성경에서 답을 찾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중요한 두 가지가 말씀과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며,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3-4) 본문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말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를 불러서 너희와 너희 자손이 유월절 규례를 영원히 지키고, 후에 너희 자녀가 이 예식에 대해 묻거든, 이것은 주님께 드리는 유월절 제사인데, 주님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의 집만은 그냥 지나가셔서, 우리의 집들을 구하여 주신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참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고전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질문에 이어 성경에서 자녀들이 궁금한 것을 물을 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자녀들이 왜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여야 하는지를 묻거든,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 바로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처음 난 것을, 사람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셔서, 처음 태를 열고 나온 모든 수컷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고, 아들 가운데서도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3:11-16)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훈령과 규례와 법도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규례를 명하여 지키게 하신 것은,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잘 살게 하여 주실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6:20-25) 자녀들이 요단강에 있는 열두 개의 돌들이 지닌 뜻을 묻거든,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요단 강 물이 끊기었다는 것과 언약궤가 요단 강을 지날 때에 요단 강 물이 끊기었으므로 그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토록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4:7) 위 질문의 공통적인 대답은, 주님께서 그들을 바로의 노예에서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를 되새겨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영원토록 자손들에게 기념물로 남겨주는 그들의 신앙과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떠날 것인지, 어떻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것인지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신 6:5) 신앙생활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왜 공경해야 하는지 묻거든,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약속이 있는 계명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주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신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참 조언자로 중요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부모님을 공경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골 3:20)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여 낙심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격분하게 하여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어버이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격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골 3: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격분하게 하는 것은 잔소리를 하거나 멸시하여 분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의기를 꺾는 것은 낙심하고 자포자기하여 자라나는 심령이 훼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비전을 갖고 당당하게 살도록 슬기롭게 양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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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녀들이 묻거든’(출 12: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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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쑥 캐는 소녀는 어디 있는가?
- 4월부터 제 밥상에 어김없이 오르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쑥국입니다. 저는 쑥국이 맛있기도 하지만 쑥국을 먹을 때마다 쑥 캐는 소녀가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가 좋아했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봄이면 화사한 옷을 입곤 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너무 예뻤습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마을 뒷동산을 넘으면 냇가가 하나 있는데 소녀는 냇가 건너편 마을에 살았습니다. 하루는 우리 동네 한 친구가 쑥을 캐러 간다고 해서 따라가 보니 그 소녀가 쑥을 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훔쳐보면서 제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었을까요, 그저 막연한 동심의 연모였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과 같은 순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날 밤, 쑥 캐는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장착되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제 가슴에 사랑의 씨가 싹트면서 밤새 뒤척이며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도와줘야 할 일은 없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를 괴롭히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공부도 제법 잘했고 인기도 좋아 모든 친구와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얼마 후,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망쳐서 1등을 못했다고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 소녀를 보며 ‘다음 시험에는 일부러 몇 문제를 틀려서 그 아이에게 1등을 양보해 줘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녀를 위해 다음 시험을 일부러 망쳤는데도 다른 아이가 시험을 잘 보아서 그 소녀가 또 1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 그 소녀보다 제가 더 속상하고 분했습니다. 몇 년 뒤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남자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다녔지만 여자애들은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는데도, 영어 단어를 외우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저도 어느덧 중년을 넘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쑥 캐는 소녀가 어디에 사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또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으로 기억을 간직할 뿐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회를 한 후 쑥 캐는 소녀를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는 오직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목양 사역으로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월, 5월이 되면 쑥국을 먹을 때마다 쑥 캐는 소녀가 떠오르고 나이와 상관없이 다시 청춘, 아니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너무 삭막하고 강퍅한 시대 속에서 순수의 시대를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순수를 잃어버리고 온갖 야욕과 음모, 위선과 권모술수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마저도 너무 이념화, 정치화되어 사회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 모두 다시 순수의 시대를 회복해야 합니다.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쏙 캐는 소녀, 쑥 캐는 소년으로 생각하며 언제 어디서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목양 사역에 전념할 것입니다. 비록 빛바랜 추억의 흑백 앨범 같은 것일지라도 저의 가슴에 쑥 캐는 소녀와 같은 순수한 추억과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 기억마저 망각한 채 거친 세상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차갑고 삭막한 삶일까요. 저는 우리 교회에 오시는 모든 성도들이 쑥 캐는 소녀라고 여기며 반깁니다. 새로운 4월, 5월이 되면 한 살, 한 살 나이는 더 먹어 가지만 변함없이 저는 다시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천국 갈 때까지 저는 콘크리트 도시의 경쟁과 야욕, 망상을 떠나 그 눈부셨던 순수 시대의 봄의 길을 걷고 봄의 사역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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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쑥 캐는 소녀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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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에서 성도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유명함과 탁월함을 보려고 구름떼처럼 몰려든 당시의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7-8) 예수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신 것은, 많은 군중들이 세례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간 이유가, 깊은 영적 진리를 찾고 그것을 따르기 이르기 위함보다는, 갈대같이 흔들리는 마음을 갖고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 간 것이 아니냐는 사실에 대해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온통 정욕적인 속셈을 갖고 사는 곳이 이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재무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성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자기 자신도 이중적이고 가증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선택된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선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전한 사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어느 한 사람, 나다나엘을 향해 그가 사심이 없음에 대해 기뻐하시면서, “너야말로 참 이스라엘인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따라서 순수하고 온전하게 사는 사람이 드문 현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야 합니다. 기름 부으신다는 의미는 세워주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시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며, 믿음의 사람을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바로 이런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즉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보내셔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우리도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교회의 주된 사역으로 표방해서, 이름부터 특색있게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희망의 소식을 들려주어야 하며, 절망이 아닌 소망과 생명과 치유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나 사상, 물질이나 돈, 혹은 유흥과 각종 중독적인 성향에 포로가 되어 묶여있고,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육신과 영혼에 자유를 선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은혜받고 치유받아야 하며, 말씀으로 깨달아 전적으로 예수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잡하고 힘겨운 인생들에게 꼭 필요한 고백이 있습니다. 마라나타, 즉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속히 오실 날을 고대하면서, 그날이 오기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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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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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빛의 나라에서부터 빛의 연대기까지
- 지난주 수요일 오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빛의 연대기’ 공연을 하였습니다. 남들은 그냥 지켜보는지 모르지만 저는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제가 작사를 할 뿐만 아니라 영상 하나하나, 멘트 하나하나까지 다 체크를 해야 했거든요. 사실 제가 영상 내레이션을 몇 번을 보면서 “이렇게 고쳐라, 이렇게 편집하라”고 수정하고 또 수정했습니다. 영상 실무를 담당하는 나유진 자매가 우리 교인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시험에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고 지적을 했거든요. 사실 장소를 허락해 주신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마는. 아쉬운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도 한국교회 연합기관이 하나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애당초 한교총과 한기총이 합하여 이 칸타타를 공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무선에서부터 반대가 심하고 어떤 적대감, 증오심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는 사실 ‘빛의 연대기’ 공연을 더 넓은 광장에서 하고 싶었지만, ‘광장’하면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잠실에 있는 체조경기장이나 기타 다른 곳도 찾아봤지만, 대여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본당 2층을 가득 메운 우리 교회 성도들의 그 뜨거운 열기는 강단으로까지 전해졌고 저의 제스처에 따라서 다 움직이는 성도들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음악감독을 맡은 류형길 지휘자가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사실은 총 9곡인데 제가 과감하게 한 곡을 뺐습니다. 저라고 아쉬움이 있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마는, 저는 항상 시간을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한 곡을 더 불렀으면 그 한 곡 때문에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류형길 지휘자에게 서곡을 한번 멋지게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지역 차량이 돌기 때문에 12시까지 예배를 마쳐야 되거든요. 그런데 정확하게 행사가 끝나는 시간이 12시 1분 30초였습니다. 제가 7번 곡을 뺀 것이 너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특별히 서곡에서부터 시작하여 피날레에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할 때는 그야말로 모든 청중이 감동을 받고 다 일어서서 함성과 박수를 보냈습니다. “태초의 밤하늘에 떠오르던 별 / 달빛 아래에 잠든 꽃들이 깨어나고 / 구속사의 푸른 장강이 흐르고 /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길을 따라가 /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역사 / 길고 길었던 시간들 / 하나님 섭리로 이겨냈네 / 빛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 이제 어두웠던 역사 그치고 / 밝은 빛의 향해를 시작하네 / 우린 진정한 하나가 되어서 / 이 빛을 지켜가리라 / 우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 빛의 선민으로 나아가리라 / 우린 진정한 한민족 되어서 / 이 빛을 지켜가리라 / 거룩한 환상 생명의 언어로 /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리라 /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찬란한 / 찬란한 새벽빛이여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행사가 끝나고 나니까 어느 국회의원은 “이거 목사님이 진짜 쓴 거 맞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또 어떤 총회장은 “목사님이 시인이라는 걸 이제 알았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국민일보도 안 보십니까?” 사실 이 공연은 한 교회에서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유튜브에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본다 한들 현장에서의 느낌과 감동을 그대로 전해주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유튜브를 시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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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빛의 나라에서부터 빛의 연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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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부활하려면’(롬 8:11)
- 그리스 철학자들과 플라톤은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서 사람은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과 영혼을 분리하여 육은 죽지만, 영혼은 불멸하여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영, 혼, 육이 다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모든 피조물 중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몸에서 떠나면, 즉영이 죽으면 사람의 심장에서 나오는 혼과 육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영, 혼, 육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의 몸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임함으로써 예수님의 영, 혼, 육이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았습니다.(행 13:30) 어떻게 예수님의 영, 혼, 육이 죽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신적인 것을 비우시고 인간적인 것으로 낮아지셨기 때문에 영, 혼, 육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6-8) 죽음의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무서워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눅 24:38-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아직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눅 24:41)라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더니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눅 24:41-43) 이처럼 예수께서는 육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과 혼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영도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영, 혼, 육이 죽고, 성령님에 의해서 영, 혼, 육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육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 즉 영혼육이 부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영, 혼, 육이 죽었다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영, 혼, 육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몸을 바울은 신령한 몸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5:44) 신령한 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육의 몸이 새로운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즉 부활한 몸은 사람의 형상과 육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나 부활 이전 육의 몸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지상의 물질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신령한 몸도 지상의 몸과 초월의 몸이 연합된 것입니다. 즉 지상의 몸이 초월의 몸 곧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입니다.예수님의 변모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마 17장) 우리도 부활하면 예수님처럼 지상의 몸과 초월의 몸이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으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은 몸도 성령님에 의해서 일으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성령님에 의해서 사람이 다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타락 이후 사람에게서 이미 성령님이 떠났기 때문입니다.(창 6:3)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 떠나시지 않도록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행 2:38) 부활하려면, “생명을 주시는 영”(고전 15:45)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인 다른 보혜사가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도 부활합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죄 때문인 것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곧 생명을 주시는 영이 오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고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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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부활하려면’(롬 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