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18(일)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머리로는 당에게, 심장은 하나님을 찬양”
    목요일 저녁 오리CGV에서 ‘신의 악단’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신의 악단’이란 북한 보위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가짜 찬양단을 조직하고 연습하는 과정을 다룬 휴먼 드라마이면서 기독교적 드라마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독교를 전혀 강요하지도 않고 신앙을 주입하지 않지만, 관객이 함께 찬양을 부르고 불신자들도 전혀 거부감이 없도록 만들어 참신했습니다. 1994년 북한이 물자 및 달러 지원이 사방으로부터 제한된 때, 헝가리 한 인권센터에서 2억 불을 지원해 주겠다고 합니다. 조건은 평양에 두 개의 교회를 짓고 직접 부흥회를 하라는 것입니다. 국제그리스도연합회가 이 부흥회를 직접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보위부 박교순을 중심으로 해서 ‘신의 악단’이 꾸려집니다. 그런데 박교순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쟁이들을 추적하여 사형시키고 자기 사촌 형까지 총살 시켰던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의 악단’을 꾸려 하나님의 찬양을 연습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통성기도를 연습하고 찬양하며 스스로 마음 문이 열리게 됩니다. “♪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갑니다...”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 한없는 은혜 /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 살 수 없는 곳 / 광야 광야에 서 있네...” 그런데 문득 하루는 박교순의 머릿속에 어머니가 성경을 읽고 예수님께 기도하다가 적발이 돼서 처참하게 죽는 모습이 상기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 엄마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던 모습을 일기장에 썼고 그 일기장을 교사와 학생들 앞에서 읽어주는 바람에 자기 어머니가 처참하게 순교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때 시절을 생각하면서 어머니가 읽던 성경, 어머니의 기도에 대한 근원적 향수에 젖어 듭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가짜로 불렀던 찬양을 진짜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부하이자 경쟁자였던 김대위 역시 찬양을 부를 때마다 마음속에 자유, 평화 같은 것을 느낀다고 고백하죠.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가짜가 진짜로 변하는 모습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전개해 나갑니다. 저는 여러 번에 걸쳐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아멘” 소리가 얼마나 진심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 역시 가짜에서 진짜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가짜에서 진짜가 되어버린 성도들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제가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가봤기 때문에 영화에서 대동강교회로 가다가 차가 고장이 나서 설원에서 연습을 하는 부분은 현실과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영화처럼 잘 구성해 넣은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영화 속에 찬양곡과 CCM 음악은 대사보다 더 강하게 감정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무대 속에 펼쳐지는 배경이 아주 스펙터클 하지는 않지만 각자 배우들의 연기와 감정선을 따라 그들은 실제 성령 충만한 모습이고 하나님을 그토록 사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웃음과 울림, 눈물과 해학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관객, 아니 저의 감정 리듬을 끌어당겨 버렸습니다. 이런 감정 리듬 그리고 가짜에서 진짜로 변화하는 순간 김대위와 박소좌가 모의하여 가짜 찬양단을 압록강 부근으로 내려주어 북한을 탈출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총살을 당합니다. 박교순이 하얀 눈밭에서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총살당하면서 했던 대사가 있습니다. “나 잘했지. 내가 한 일이 정말 잘한 것이지...” 그러면서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처럼 대한민국의 대형 교회에서 “♪ 주 여기 운행하시네 / 나 경배해 나 경배해 / 주 여기 역사하시네 / 나 경배해 나 경배해...” 그 노래를 박교순과 김대위가 함께 부르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언제든지 성경을 읽고 교회 와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정말 눈물 나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한 대사처럼 교회는 폐쇄되다가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가짜 교인들을 동원한다니, 지금도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문이 닫혀 있을까? 내가 봉수교회를 갈 때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이 자리를 꽉 메웠는데, 설교할 때마다 아멘 소리가 우렁차고 성가대와 헌금 특송을 하는 분들의 찬양이 너무 애절하게 느껴졌는데 다 가짜였을까? 아니, 아닐 거야. 거기서도 가짜가 진짜로 변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진짜로 아멘을 하고 찬양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 않았을까...” 눈으로 보지만 마음이 심쿵하게 울리는 ‘신의 악단’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영화를 강추해 드립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6-01-18
  • [언론회 논평] 생명을 살리는 의사에게 살인 면허를?
    지난 해 12월 더불어민주당의 박주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5713)이 무제한 낙태를 허용하는 법이 될 것이라고 하여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공동발의: 박주민, 이주희, 김 윤, 진성준, 이수진, 남인순, 손 솔, 진선미, 김한규, 이병진, 전진숙) 이들은 법률 개정의 이유에 대하여,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이후, 후속 조치가 없었다. 그래서 이에 따른 현행 모자보건법의 개정을 하자는 것이다. 그 중점은 인공임신중절(낙태)에 관한 규정을 정비하는데, 태아의 생명 보호보다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한다는 취지이다. 이에 대하여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가 그 문제점에 대하여 밝힌 바에 의하면, 태아 생명 보호 기준이 사실상 사라졌다. 낙태가 가능한 임신 주수(週數)를 전혀 정하지 않았다. 낙태를 위한 상담 제도가 생명 보호가 아닌 낙태 절차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미성년자(16세) 예외 규정이 가져올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의료인의 윤리와 양심의 자유 침해가 예견된다. 마지막으로 국가 재정 사용(낙태를 위하여 국가에서 지정하는 상담 기관 설치와 운영 등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감)의 방향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저출산율로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 특별한 예외 없이(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는 인공임신중절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으로 유전학적 정신 장애나 신체 질환의 경우, 전염병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간강으로 임신된 경우, 혈족이나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경우는 낙태를 합법적으로 간주한다) 무조건 본인이 원한다고 낙태를 허용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그런데 국가가 법률로 정해진 것을 빌미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태아를 죽이는데 앞장 서는 셈이 된다. 즉 개정 법률안에서는 국가 부서인 보건복지부가 중앙상담기관을 지정하게 하고, 또 지자체장이 낙태를 포함한 지역 상담 기관을 설치•운영•유지하는 것은 막대한 국고를 축내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인공임신중절에 있어, 주수(週數)를 따지지 않고(전에는 12주 이상은 제한을 두자는 의견도 있었음)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을 허락하자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건강상에도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낙태할 때 수술뿐만 아니라, 약물 투여 등의 방법도 추가하고 있다. 약물의 안정성 문제도 따를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무분별한 태아(胎兒) 살해 사건들이 빈번해질 것이다. 태아는 모성(母性)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생명체이다. 그런데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빌미로, 수많은 생명을 죽이자는 법안을 만들어 놓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들도 모체(母體)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아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런 무서운 법을 만들어 생명을 살해하자는 것은, 단순한 법률 개정이 아니라 ‘살해법’을 만들자는 것으로, 신(神)의 영역에 도전하는 죄악이 될 것이다. 국회에서는 이런 법안을 절대로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 어미가 태중에 잉태된 자식을 함부로 죽이고, 의사는 자기 양심에 반하는 살인 행위를 하게 되고, 국가는 살인행위와 다름없는 허가를 내주고,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그런 행위들을 지원하는 나라가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가피하게 인공임신중절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정부든, 국회이든, 사회이든, 의사이든, 여성이든, 누구든지 최최소한(最最小限)에 그쳐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6-01-14
  • [언론회 논평] 비무장지대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이 한반도 긴장 완화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우리나라는 북한 김일성과 중국의 모택동,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 일으킨 6.25전쟁에서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1953년 휴전선이 그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휴전선에는 남북으로 각각 2km의 비무장지대가 있다. 이를 DMZ(demilitarized zone)라고 한다. 분단의 비극이며, 상징과 같은 곳이다. 이곳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W 클라크 미 육군 대장이 한국 및 파견국 22개국을 대표하여 정전협정에 서명하여 체결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지역은 유엔 회원국 18개국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어떤 군사적 행동이나 출입도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8월 더불어민주당의 이재강 의원이 대표 발의한 ‘비무장지대의 보전과 평화적 이용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다(공동발의자-이재강, 김준형, 한정애, 조인철, 정일영, 채현일, 정진욱, 장종태, 오세희, 박선원, 이광희, 윤후덕, 김우영, 염태영 의원) 이 법률안에서 주장하는 목적을 보면 ‘비무장지대의 보전과 평화적 이용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여 생태적•문화적 가치를 보전하고, 평화적 이용을 지원함으로 비무장지대에 대한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한반도 평화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엔사는 정전협정 1조 10항에서 ‘군사분계선 남측 DMZ 내 민사 행정 및 구호는 유엔군사령관의 권한’임을 못 박고, 또 1조 9항에서 ‘민사 행정 및 구제 사업 집행과 관련된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 허가를 받은 인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DMZ에 출입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정치권에서 이런 법률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비무장지대에서의 ‘비군사적 목적’의 활동에 있어 우리 정부가 주권을 가지려는 것이겠지만, 유엔사가 이곳을 통제하며 제한하는 것은 주권의 문제가 아니라 관할권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헌법상으로는 북한 전역도 우리의 영토로 본다. 그러나 그 땅을 우리가 관할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비무장지대에 특수한 목적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본다. 이는 또한 국제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비준한 “비엔나 협약” 제27조는 ‘당사자는 자신의 조약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 근거로서, 자신의 국내법 규정을 원용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국제법으로 체결된 것을 국내법을 바꾸어 그 주권을 주장하려는 것은 자칫하면 국제적으로 망신을 살 수도 있다. 더군다나 남북한의 엄청난 군사력이 집결된 비무장지대에서 한국 정부에 의한 출입이 잦아질 경우 북한은 어떤 주장을 할 것이며, 그들도 잦은 출입을 통하여 어떤 식으로 평화를 깰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DMZ 내 활동을 우리 주권의 침해로만 해석하여, 섣부른 입법은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차피 남북한이 통일되면 이곳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괜히 ‘주권 운운’하다가 오히려 목적하는 바처럼 평화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안 되고, 국제 사회와의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이 된다면 긁어 부스럼이 되지 않겠는가?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6-01-14
  • [국제교회논평회 신년 논평 전문] “자유를 수호하는 책임 있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시다”
    국제교회논평회는 2026년 신년을 맞아, 사회적 신뢰의 위기와 공적 책임의 혼란 속에 놓인 한국교회가 다시금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공적 책임을 분명히 확인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외형적 성장보다, 사회 앞에서 어떤 책임을 지는 공동체인가를 더욱 엄중히 묻습니다. 침묵해서는 안 될 때 침묵하고, 말의 품격과 진리를 잃을 때 신앙은 왜곡되며 교회는 공적 신뢰를 상실한다는 설립 초기의 경고를 우리는 다시 무겁게 되새깁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질서는 인간의 존엄,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라는 기독교적 가치 위에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이 자유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자유를 지켜야 할 도덕적 책임의 주체입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민주주의는 다수의 힘이 아니라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특별히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 안팎으로 스며드는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적 이념의 침투를 철저히 경계합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계급과 구조로 환원하며, 초월적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앙을 도구화해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는 자유를 박탈당했고, 신앙은 억압되었으며, 양심은 국가 권력에 종속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인간의 자유와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는 이념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신학적 혼란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힙니다. 국제교회논평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훼손하는 종교다원주의, 십자가와 회개를 희석시키는 자유주의 신앙, 창조 질서와 성경적 윤리를 상대화하는 동성애 옹호 신학, 그리고 복음과 세속 사상과 이념을 혼합하는 혼합주의 신앙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다른 길도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심을 증언합니다. 자유주의 신앙은 복음을 윤리로 축소하지만, 교회는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능력을 붙들어야 합니다. 혼합주의 신앙은 교회를 시대정신에 종속시키지만, 교회는 시대를 분별하고 말씀으로 시대를 비추어야 합니다. 교회의 공적 신뢰는 세상에 동조함으로 회복되지 않으며, 진리를 지키는 신실함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를 정치화하기 위한 기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특정 정파를 대변하지 않으며, 권력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를 훼손하고 신앙을 왜곡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공산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성경적 복음을 해체하는 왜곡된 신학과 극단적 이념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책임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방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6년 새해를 맞아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가 ▲자유 앞에서 책임 있게 서며, ▲권력 앞에서 양심을 지키고, ▲이념 앞에서 진리를 분별하며, ▲신학 앞에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사회 앞에서 신뢰를 회복하도록 공적 논평 사역을 흔들림 없이 이어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시다 2026년, 모든 혼란과 분열의 시대 한가운데서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교회의 중심은 이념도, 세력도, 시대정신도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떠날 때 자유는 왜곡되고, 진리는 상대화되며, 신앙은 이념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할 때, 진리는 분명해지고 양심은 깨어나며 교회는 세상 앞에서 다시 신뢰받는 공동체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선언합니다.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적 이념도, 종교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신앙도, 혼합주의와 성경적 질서를 해체하는 모든 흐름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2026년, 국제교회논평회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권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이념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신앙, 십자가 앞에서 겸손한 교회, 진리 앞에서 담대한 교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는 이 고백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교회다운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있는가.” 2026년 1월 13일 설립자  박조준 목사 명예회장 림택권 목사 이사장  임우성 목사 논설고문 민경배 박사 · 정일웅 박사 · 정인찬 박사 논설위원 김열 박사 · 박순형 박사 · 김석주 박사 국제교회논평회 일동
    • 칼럼
    • WAIC 칼럼
    2026-01-1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이 함께하신 땅’(출 9:22-26)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게 학대받을 때,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서 내보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말씀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출 5:1) 그 말을 들은 바로는,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겠다며 백성을 더욱 학대하고 노동을 무겁게 시켰습니다. 고집 센 바로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 결국 열 가지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우렛소리와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곱째 재앙으로 우박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늘로 그의 지팡이를 내미니, 하나님께서 천둥소리를 나게 하시고, 우박을 내리시니, 벼락이 땅에 떨어지면서 번갯불도 함께 번쩍거렸습니다. 우박이 쏟아져 내리면서, 이집트 온 땅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할 것 없이, 들에 있는 모든 풀을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하나님이 함께하신 고센 땅입니다. 고센 땅은 요셉 시대부터 출애굽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창 47:27)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고센 땅은, 바로가 야곱과 후손들에게 목축할 수 있도록 준 좋은 목초지였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아버지와 형들에게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주어 그들의 소유로 삼게 하였습니다.(창 47:11) 고센 땅은 출애굽 때 파리 재앙도 면제된 곳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나는, 나의 백성이 사는 고센 땅에는 재앙을 보내지 않아서,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겠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나 주가 이 땅에 있음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출 8: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고센 땅은 파리 재앙과 우박 재앙이 면제된 하나님이 함께하신 은혜의 땅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생존을 위한 싸움에 동행하시며, 조정하시며, 인도하시고, 모든 것에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잊고 사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생명과 온전함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교류지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은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질 것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창 12:7) 하나님은 그 약속의 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힘을 얻고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여 그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하늘에서 내린 빗물로 물을 공급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몸소 돌보시는 땅으로서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 날까지 늘 보살펴 주시는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1:8-12)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잘 지켜서 힘을 얻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 살며,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까지 몸소 돌보시는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기쁨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할 때 우리의 앞길을 책임져 주실 줄 믿기 바랍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 37: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경험하며,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함께 가시며, 뒤따라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6-01-1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검은 모래 속에서 별을 봤습니다”
    제 평생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해외 집회를 갈 때마다 골프채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주일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남미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주일 새벽에 도착해서 밤 예배까지 모두 인도한 뒤, 그다음 주도 또 국내 집회든 해외 집회든 다시 다닐 정도로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제 생각에 골프를 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날이 오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골프가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도를 많이 하고 경건하게 사는 한 목사님이 만나기만 하면 저에게 권유하셨습니다. “소 목사, 하늘 아래 가장 좋은 운동이 골프예요. 골프를 하세요. 목사처럼 그렇게 불도저처럼 일하다가 나중에 쓰러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십수 년 전에도 한 번 탈진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여름에도 불도저처럼 살아오다가 또 탈진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계기가 되어서 유송근 장로님의 안내로 골프 연습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필드에 나가는 순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사실인지 아닌지…. 마치 초원의 풀잎들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 골프가 뭔지 넌 정말 몰랐지, 이 푸른 필드에서 둥지를 틀어봐.” 그런 소리가 빗발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필드에 나가서 공이 맞지 않았다면 아마 골프를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80타 중, 초반의 점수를 친 것입니다. 또 주변에서 골프 신동이니 골프 천재니 하는 말들을 하니까 ‘이다음엔 더 잘해야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싱글을 치고 언더까지 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년 축복 성회를 앞두고는 정말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데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몇몇 장로님들이 “신년 축복 성회를 마치면 일본 최남단에 있는 미야자키에 가서 며칠 쉬면서 골프 전지훈련 좀 하시죠.”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가 그저 무심코 “예 알았습니다.” 대답한 것이 현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특히 장로 회장이신 송원중 장로님이 적극적으로 열심히 챙겨시고 섬겨주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골프채를 찾는 동안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을 때 얼마나 한가하면 골프채를 들고 다니는가 했더니,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되었구나.’ 드디어 미야자키 피닉스 골프장에 와 보니 일본의 최남단은 아직도 풀들이 푸르고, 초원이 그린 컬러로 쫙 펼쳐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칠 때만큼 일본에서 또 잘 칠 것인가, 진짜 이 공이 안 맞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다행히 기대 이상으로 공이 아주 잘 맞아주었습니다. 저 역시 한일전을 한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불사조(피닉스)처럼 쳤을 때 이틀은 모두 언더(71타)를, 마지막 날은 투 언더(70타)를 기록했습니다. 저녁에는 온천을 하며 설교 준비를 하는데 어쩌면 그리 꿀잠도 잘 수 있는지요. 저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큰맘 먹고 미야자키까지 왔는데 공도 안 맞고 잠도 못 잤으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송구한 마음이 들고 얼마나 후회가 막심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골프를 끝내고 미야자키 해변을 잠시 걸었습니다. 그 날따라 왜 그리 이국적으로 보이는지요. 제가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을 비롯해서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경치와 풍경을 보았지만, 미야자키의 태양이 정열적으로 비치는 검푸른 파도와 검은 흑사장은 참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흑모래 속에서 별을 보았습니다. 저녁도 아닌데 무슨 별을 보았느냐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별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묵상하는 목사로서 바다의 모래를 보면 하늘의 별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별들 속에서 일본인들의 영혼이 보이기 시작했고, 앞으로 비칠 일본의 별들을 생각했습니다. ‘왜 일본은 우리보다 더 빨리 복음을 받아들였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우상과 거짓 신의 그늘에 씌어서 일본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 선교, 또 일본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할 사명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야자키 해변의 흑모래를 밟으면서 일본의 검은 영혼들을 봤고 별빛처럼 빛날 맑은 영혼들로 가득할 일본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할 희망의 사명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6-01-1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고립(孤立)을 잘하면 고립(高立)이 된다.”
    장재열 님이 쓴 ‘리커넥트-누구나 한 번은 혼자가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은 한 번쯤은 혼자가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고립의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고립된 상태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노년과 중년을 제외하고도 사회적 고립에 처해 있는 청년만 54만 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립자들은 갈수록 늘어갈 추세라고 합니다. 고립무원의 상태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쓸쓸한 삶이겠습니까? 그토록 꿈이 많던 아이가 청년이 되면 은둔형 고립 상태가 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니 은둔형 외톨이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고립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여러 사례를 들며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혼자가 되고 고립 상태가 된다고 하는데요. 저는 이 글을 읽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무리 생동감이 넘친다 하더라도 어쩌면 사각지대에서 고립 상태로 존재하는 분들이 있을 거야. 올 한 해는 사각지대에 성도들을 더 잘 돌봐야 하겠구나.” 그런데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고립(孤立)을 잘하면 오히려 고립(高立)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봤다는 것입니다. 창의적 고독, 창조적 고립을 긍정적으로 축적하고 생산적으로 농축을 하다 보면 어느새 고립(高立), 즉 오너러블 스탠딩(Honorable Standing)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성경에도 보면 고립, 아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을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 야베스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고립을 하나님과 함께 긍정적이고 생산적으로 축적을 했을 때 그들은 고립, 오너러블 스탠딩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고도가 다른 삶을 산 것이죠. 저도 누구보다 고립과 고독을 많이 겪어본 사람입니다. 광주신학교를 다닐 때의 고립, 특별히 5.18광주민주화항쟁 속에서 거의 완벽한 고립무원 상태를 경험했죠. 백암교회 시절의 고립... 아니,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고 이곳저곳에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립 상태에 들어가죠. 그런데 그 고립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맞을 때 저만의 글이 나오고 저만의 설교를 준비하고 저만의 시를 쓰곤 합니다. 이번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아래에 새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성경을 더 새롭게 보고 깊이 보고 넓게 보면서 성경신학과 교의신학의 틀 안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발견하고 그 내러티브를 스토리로 창작하여 말씀을 전한다는 게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고립이나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그럴 때 부족하지만 오너러블 스탠딩을 하며 참으로 격조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삶이 윤택하고 모든 것이 풍요하다 할지라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혼자가 되고 고립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립(孤立)이 고립(高立)이 되게 하고 오너러블 스탠딩이 되게 하고 오너러블맨과 우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어쩔 수 없이 고립과 같은 상태를 맞는다 할지라도 그 고립을 창조적이고 생산적 고립으로 맞으셔서 정말 고립(高立), 고도가 다른 차원의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사무엘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에서는 고도를 쳐다보기만 했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고립을 맞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립을 경험할 때 어느새 우리는 고립(高立)의 상태가 되며 고도 위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026년 새해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아니 작년과도 차원이 다른 고도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신년소원헌금 봉투에 기록한 5가지 기도 제목, 그리고 받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차원 높은 고도의 고립(高立)과 고도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6-01-04
  • [언론회 논평] 2025년 주요 종교 호감, 종교 영향, 효능감 조사발표
    한국리서치가 “2025년 종교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조사는 2025년 11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전국의 만18세 이상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응답률은 요청 대비 2.9%, 참여 대비 52.8%를 차지하였다. 조사 대상 종교는 기독교(개신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이슬람교이다. 우리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는 전체가 34.7점으로, 남자들에서는 33.6점, 여자들에게서는 35.8점으로 여성들이 높은 호감도를 가지고 있다. 연령층으로 보면, 18~29세에서는 32.0점, 30대에서는 26.8점, 40대에서는 28.8점, 50대에서는 32.0점, 60대에서는 39.7점, 70세 이상에서는 49.0점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타종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는 낮게 나타나고 있다. 천주교인들은 28.0점, 불교인들은 22.9점, 무종교인들은 23.2점을 주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타종교들끼리는 서로 간에 상관관계가 높게 나타난다(단위는 -1~1까지로, 숫자가 높을수록 상관 관계 상승) 기독교와 천주교와의 상관 관계는 .077, 기독교와 불교의 상관관계는 -.182, 기독교와 원불교의 상관관계는 .093 등이다. 반면에 불교와 천주교와는 .482, 원불교와 불교와는 .504, 이슬람교와 원불교와는 .607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다른 종교들과 분리되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념 성향에 따른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는 어떨까? 진보층에서는 28.5점, 중도층에서는 35.1점, 보수층에서는 41.5점으로, 보수층에서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가 높게 나타났다. 이는 지난 조사(2024년)에서 진보층에서는 5.8점이 떨어졌고, 중도층에서는 0.4점이 올라간 것이며, 보수층에서도 2.5점이 올라간 상태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측면에서는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가? 전체적으로는 37%가 ‘종교가 내 삶에 영향을 준다’고 응답했는데, 남자의 비율은 32%, 여자는 43%를 차지하였다. 그렇다면 종교 간 영향력을 받는 격차는 어떨까? 기독교인은 84%가 영향을 준다고 응답한 반면에, 천주교는 62%, 불교는 47%를 차지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인들에 비하여 종교가 자기 삶에 영향력을 크게 준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의 효능감은 어떨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안정감을 얻는 것’이 82%, ‘긍정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78%, ‘윤리적인 행동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74%, ‘인간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74%, ‘소속감을 갖는다’는 것이 74%,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 것’이 69%, ‘본인의 정체성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 등이 59%로 나타났다. 특히 기독교인은 윤리적 행동을 하는데 92%, 의지하여 안정감을 찾는데 91%, 긍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에 91%,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 것이 91%, 인간관계와 소속감을 갖는 것에 84%, 본인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83%로 나타나, 타종교인들보다 종교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목표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비록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가 불교의 54.4점, 천주교의 52.7점에 비하여 낮지만, 종교에 대한 긍정적이고, 올바른 가치관은 월등하게 높게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만큼 기독교의 활동성에 따른 삶에 대한 영향력과 효능성이 높은 것이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노력과 함께, 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더하고, 신앙생활에 더 큰 동기 부여를 주어,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높이 감당하도록, 노력을 경주(競走)해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12-2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분노 버리기’(민 20:10-13)
    “미련한 사람은 화를 있는 대로 다 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화가 나도 참는다.”(잠 29: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급하게 남을 정죄하거나 분노하는 습관이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분노는 마귀에게 틈을 주기 때문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8절)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반역한 너희여”라는 말과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모세의 실수는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운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반석을 향하여 말로 명령하지도 않고 백성을 향한 격한 감정으로 반석을 두 번 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원망하는 백성에게도 이적을 베푸셔서 거룩함을 나타내기 원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모세가 격한 감정을 쏟아내서 주님의 거룩함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불평이 그치게 하시고, 모세와 아론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등 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세와 아론은 분노로 불순종함으로써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신뢰는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전에도 주님을 불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실컷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채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2)라고 투정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친 행동은 공개적으로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잘못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도 공동체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분노와 불평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분노는 버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목마른 영혼들에게 신령한 음료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3-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출 16장), 신령한 음료는 광야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가리킵니다.(출 17장)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식물과 음료는 참떡과 참된 음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요 6장) 야고보서 4장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11-1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방은 거슬리는 말이거나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이며, 거칠고 불친절한 태도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을 버려야 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악한 언행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버리도록 생각과 말을 다스려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12-2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성도의 격(格)’(수 21: 1~7)
    가나안 땅 실로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족장들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레위 지파가 살 성읍들과, 레위 지파의 가축을 기를 목초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들의 기업 가운데서 성읍들과 목초지를 떼어서 레위 사람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들의 형제애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제비를 뽑아 레위 지파를 위한 분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먼저 그핫 가족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은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에서 제비 뽑은 대로 성읍을 받았는데, 그 수가 열세 성읍이었고, 그핫 자손 중 남은 이들도 에브라임, 단,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서 열 성읍을 받았습니다. 또한,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잇사갈, 아셀, 납달리, 그리고 바산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로부터 열 세 성읍이 주어졌고, 므라리 자손들은 르우벤, 갓, 스불론 지파로부터 열두 성읍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위 사람들은 각 지파로부터 성읍과 목초지를 분배받아, 그들의 삶과 사역을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레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즉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라는 선언은 레위인의 생계가 토지 수익이 아니라 예배 질서 속에서 공급되는 몫에 의해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레위인은 하나님의 선언하심 속에서 십일조와 함께 제사와 관련된 몫(제물의 일부 등)을 통해 생활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레위인을 무소유로 낭만화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그들의 지속적인 성소 봉사를 위한 공동체적인 처우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오늘날에도 목회자를 처우하곤 합니다. 레위 지파를 향한 이러한 처우는 그들의 소속의 중심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다른 지파가 땅을 통해 자리를 확보한다면, 레위인은 하나님과 그 예배에 붙들리는 방식으로 위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이 정체성의 기반이 되기 쉬운 사회에서, 레위인의 삶이 하나님 중심성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제도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레위인은 성소 봉사를 위해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의미는, 레위인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 즉 거룩함과 헌신과 율법 준수와 교육에 의해 규정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레위인에 대한 잦은 오해가 있습니다. 즉 레위인은 가난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레위인을 무소유자로 미화하기보다는, 예배와 사역이 공동체 안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일꾼을 지탱하고 유지하도록 하는 제도와 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레위인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의 사실과는 다른 오해입니다. 지파로서의 기업이 하나님이라는 특별성으로 인해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기 위한 토지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거주해야 할 성읍과 가축을 키우기 위한 목초지는 다른 지파들로부터 각각 필요한 만큼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말은 결코 추상적 낭만이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소속되었으며, 땅에서는 다른 지파로부터 나오는 기업의 나눔과 십일조와 제사로 드려진 몫을 통해 삶을 영위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역을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입장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분과 레위적 원리에 따라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 함께 성립하는 자리입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구별되어 예배와 봉사, 그리고 삶 속에서의 언약공동체를 유지하도록 부름받은 직분이며, 그 사명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 그리고 능력과 변화를 은혜로 받은 자들입니다. 부름받은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소망해 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12-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