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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방송3법 개정으로 언론 장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제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지난 5월 31일, 소위 ‘방송3법개정안’이 입법 발의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9명이 공동 발의하여 올린 ‘방송법일부개정법률안’과 또 같은 날 역시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9명이 공동 발의하여 올린 ‘언론중재및피해구제등에관한법률일부개정안’과 역시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9명이 찬동하여 올린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일부개정법률안’이 동시에 올라온 것이다. 이 법안들은 제21대 국회에서도 발의되고 통과된 것이었으나,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폐지된 것이다. 그런데 제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똑같은 법안을 야당 의원들이 대거 올린 것이다. 입법 발의 이유로는 ‘공적 책임을 위해서 각 방송사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운영을 통해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방송사의 이사들을 현재 9~11명인 것을 자기편이 되는 인사들로 각각 21명으로 늘이는데 목적이 있다고 본다. 이 법안은 학계, 시청자, 방송계 종사자, 단체 등에 이사 추천권을 대폭적으로 주자는 것인데, 그들이 결국은 친야권 인사들로 채워져, 사실상은 더불어민주당이 방송을 영구히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말로는 방송사의 공적 책임 구현과 독립성, 정치적 중립과 합리적 운영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언론장악이라는 악마 같은 디테일을 숨겨놓았다’는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이 상당히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원(이하 방문진) 이사진 임명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방문진은 MBC 사장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올해 8월이면 방문진 이사진의 임기 만료가 된다. 현재 방문진 이사는 2021년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임명한 사람들인데, 방문진 이사 구성은 대략 여당 추천 6명과 야당 추천 3명으로 구성되므로, 이번에 여당 몫의 이사진이 많아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본다. 또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현재 방송통신위원장을 탄핵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데, 거대 야당이 탄핵을 소추하면 막을 방법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장이 탄핵소추되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기까지 직무가 정지되고, 방통위의 전반적인 활동이 중단되어, MBC 사장의 교체를 막겠다는 심산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언론중재및피해구제.....’에 관한 법률 개정 내용도 언론의 보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정정 보도와 반론 보도를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을 3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고, 언론 보도로 인한 인격권이 침해된 경우, 손해액의 3배라는 징벌적 조항을 넣고 있다. 물론 언론의 악의적 보도에 의한 피해를 구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를 지나치게 하다 보면 언론에 엄청난 압박을 주게 되는 것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이 법안이 발의되었을 때에도 국내는 물론, 유엔과 국제언론인협회 등에서 ‘자유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들 법안’이라고 맹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야당은 같은 편으로 여겼던 언론에 강한 압력을 넣으려는 것일까? 한 마디로 비리 정치인을 언론 보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언론 노조 등 막강한 권력들이 야당과 맥을 같이 해 왔는데, 그마저도 언론의 비판과 보도 기능에 더 단단한 족쇄를 채우려는 것은 아닌가. 이래서는 안 된다. 야당은 소위 ‘방송3법’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원하는만큼의 권력 유지와 제한을 두려고 하는데, 이는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그야말로 무제한의 권력을 누리는 정치권을 변화시키고, 견제하는 세력이 있어야 함을 원한다. 그것이 언론인데, 입법 권력을 가진 초거대 야당이 힘의 논리로 ‘방송법’을 바꾸려는 것은 횡포이다. 아무리 정치 권력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정권을 유지해 보려고 해도, 국민들은 얼마든지 정권을 갈아치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자신들이 빠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은 더불어민주당이 서슬퍼렇게 보여도, 결국 국민들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제22대 국회도 개원되고, 국민의 대표로 세움 받은 국회의원들이 이제는 대결과 파행과 악법을 만드는 일들을 중지하고, 정말 국민들을 위한 ‘민생법안’을 만드는데 주력하기 바란다. 우리 국민들은 ‘한풀이’하듯 엉뚱한데 힘을 소진하는 국회를 응원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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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방송3법 개정으로 언론 장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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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가정의 소중함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래서인지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이 있다. 가정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남음이 없다. 가정은 우리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이며, 국가를 형성하는 근간이 된다. 사람들은 가정을 통하여 사랑을 알고, 혈연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가족끼리 서로 돕고 이타심을 배우는 곳이다.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면 국가 전체가 병들게 된다. 뿐만이 아니라, 가정은 자녀를 낳고 길러 사회와 국가에 소중한 인력자원을 배출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소중함은 누구라도 지켜야 한다. 성경에서도 가장 먼저 가정이 이루어졌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 의한 가정이 이루어졌고, 그들을 통하여 인류가 생겨나고,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다. 이런 가정을 허물려는 시도와 세력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의 말씀대로 가정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는데, 이를 근본적으로 깨트리고 허무는 동성애를 위한 온갖 제도와 법률이 만들어지려고 한다. 동성애의 존재나 그들의 실체를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을 위해 건강한 가정과 국민들을 역차별하면서까지 보호하거나, 반대 의견을 강력하게 처별하려는 행위는 매우 악한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 어느 재벌의 이혼 소송이 있었는데, 언론에서는 ‘1조 3,800억짜리 이혼’이라며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 내용에 보면 항소심 선고에서 담당 판사가 ‘부정행위에 대해 전혀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고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재벌총수를 질타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혼인의 순결과 가정의 소중함, 일부일처제의 질서를 깨는 것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 근간이 되는 가정들이 지켜질 수 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본능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 가정의 가치를 지키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에 이혼 당사자가 된 재벌 기업인은 우리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지도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느낄 때에도 부끄러움이나 반성이 없었다면, 사회 지도자로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모두 지도자는 아니다. 적어도 국민들이 볼 때에 모든 욕심을 자제하고 모범이 될 때, 사람들을 그를 인정하고 존경할만한 지도자로 여기는 것이다. 한 지도자의 도덕성이 결국은 그 기업의 운영과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참된 가치는 재화나 물질로도 계산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국민들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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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가정의 소중함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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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팬데믹 조약’을 세계보건기구와 맺는 것은 위험하다
- 우리는 지난 2020년부터 약 3년 반동안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겪었다. 이 질병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자연 발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전문가에 의해서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팬데믹 현상이 다시 왔을 때, 이를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WHO(세계보건기구)와 이에 가입된 국가들이 ‘팬데믹 조약’(pandemic treaty)을 맺는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 회원국은 194개국인데, 이들과 조약을 맺어 세계보건기구가 해당 국가나 정부보다 보건정책의 통제권을 우선적으로 갖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개별 국가의 방역정책 결정권은 박탈된다. 또 백신 여권(旅券)과 같은 것으로 세계 기구에 의해 세계인의 활동이 통제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언론도 이에 반하는 보도를 할 수 없는 등, 그야말로 국가의 주권이 고스란히 침해당하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코로나19때 접종한 백신들은 안전했는가? 긴급하게 제약회사들이 특혜를 받아 백신을 만들어 세계인들이 접종했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백신을 만드는 방식은 mRNA로, 스파이크 단백질 유전정보 자체를 집어넣어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안정성을 장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미국 CDC(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가 2018년에는 코로나19백신에 대하여 ‘면역을 생성하게 한다’고 했다가, 2021년에는 ‘면역을 보호한다’로 바꾼 것에서도 백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19와 같은 심각한 질병이 번졌을 때, 그에 대한 대처도 중요하지만, 백신 처방이 적절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또 이런 팬데믹을 일으킨 질병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사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 백신으로 질병을 얻거나 혹은 장애를 얻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인 것으로 알려진다. 거기에다 팬데믹 상황이 인위적인 것이라는 소문도 사실에 근접하고 있다. 지난 4월 16일, 미국 청문회에서는 과학잡지 발행인 홀든 소프 박사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이론을 무시한 것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코로나19는 전 세계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으나, 유독 코로나 백신을 만든 회사들은 그야말로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었다. 코로나 백신을 만든 회사들은 존슨앤존슨, 아스트라제네카, 노바백스, 화이자, 사노피, 모더나, 시노백 등이 있다. 그중에 화이자 같은 경우는 2021년 백신 관련 매출이 335억 유로(한화 38조 6,500억원)이고, 바이오엔테크 백신 매출은 159억 유로(한화 21조원)에 이르며, 모더나의 2021년 매출 목표가 192억 유로(한화 22조원)가 될 정도였다. 한국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하여 환자 치료비, 진단검사비, 감염관리비 등으로 7조 6천억원을 사용하였다. 또 코로나19백신 구입비만도 7조원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니 전 세계가 부담한 경제적 수치를 합하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앞으로도 팬데믹을 가져올 가상의 질병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질병X’(Disease X)로 규정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5월 27일부터 6월 1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세계보건총회(the World Health Assembly)에서는 세계보건기구의 ‘팬데믹 조약’에 대한 것을 다룬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팬데믹 조약이 세계보건기구와 각 국가들 사이에 이뤄질 경우, 각국의 주권이 침해를 당하는 것은 피할 길이 없게 된다. 그래서 미국, 일본, 캐나다, 영국, 호주, 슬로바키아 등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입장이 없다. 지난 4월 WHO에서는 앞으로 변종 독감 바이러스(H5N1)가 올 수 있는데, 이때 인간의 치사율은 52%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가 앞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팬데믹’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만약에 인위적인 것으로 질병을 퍼트려 이에 따라 백신들을 만들어 내야 하고, 제약 회사들이 백신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를 통해 세계를 통제하려는 세력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강한 의구심이 든다. 코로나19 당시에 한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것은 교회이다. 당시 문재인 정권은 2020년 7월부터 모든 교회에 대하여 소위 ‘비대면 예배’를 강제화하여, 그로 인해서 수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도 그로 인한 피해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19 때에 한국 정부가 무조건적으로, 반기독교적으로 예배 중단을 강행했던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 정부가 보건으로 막강한 힘을 얻게 될 세계보건기구와 함부로 ‘팬데믹 조약’을 맺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도 강제로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빼앗아갈 사안들에 대하여 안일한 인식을 버려야 한다. 이에 대하여 한국의 연합 단체들과 그에 속한 교단들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비해야 한다. 지난 2020년에 중국 우한으로부터 닥쳐왔던 코로나19 앞에서, 한국교회는 귀중한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를 앞에 두고서도 우왕좌왕했던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당시 교계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부의 예배 제한과 금지에 대하여 무책임한 발언들을 쏟아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국가와 국제 사회의 ‘질병 X’를 다루는 문제에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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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팬데믹 조약’을 세계보건기구와 맺는 것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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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50:25). 며칠 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귀한 믿음을 남기시고 가셨다네” 이 말이 저에게는 퍽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들어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요셉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요셉은 큰 권력과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이나, 땅이나, 재물에 대하여 자손들에게 말하는 대신에 가나안 땅으로 그의 해골을 가져갈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체를 귀중히 여겨서 한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은 잠시 머무를 곳이며, 그들이 반드시 가야할 곳은 가나안 땅이다.”라는 점이었습니다. 430년 후 실제로 모세는 출애굽 당시 요셉의 시체를 취하였습니다(출13:19). 그리고 40년 동안 운구하면서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습니다(수24:32). 요셉이 형님들에게 팔려 나갔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신앙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3년 후, 그는 신앙 외에도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자녀들에게 상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겠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매우 잘 경외한 왕이었습니다(대하17:6). 그러나 그가 자녀를 신앙으로 잘 양육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 여호람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이세벨을 모친으로, 아합을 부친으로 둔 아달랴를 택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여호사밧 왕의 손자 아하시야왕이 예후에 의하여 죽자 아달랴는 왕의 씨를 거의 전멸하다시피 합니다(왕하11:1). 여호사밧왕은 여호람 외에도 생전에 여섯명의 아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 지혜롭게 하여 장자인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금은 보화와 유다의 성읍들을 많이 물려주어 그들사이에 다툼이 없도록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왕인 여호람이 동생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는 동생들이 차지한 성읍들과 금은보화가 탐이났던 모양입니다. 여호사밧이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지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못한 결과입니다(대하21:1~4). 자녀들에게 무엇을 상속하시려고 애쓰십니까? 집입니까?직업입니까? 금은 보화입니까? 하나님 경외하기를 심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마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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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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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께 영광, 성도들에게 감사”
- 몇 주 전에 우리 교회 평개원(평신도사역개발원)간사들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거의 준전도사급입니다. 월급을 받지 않으면서 매일 출근하여 사역을 하고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모임이 끝나고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아주 작고 초라한 모습의 내가 담임목사님의 축복이 흘러가는 사역에 함께 동역할 수 있다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버하지 말고 목사님이 은혜로 이루어놓으신 사역의 길에 누가 되지 않는 사명자가 되게 해달라고 눈물로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담임목사님을 영적 롤모델로 더 존경하고 도전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하략)” “목사님의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는 선포가 평개원 각 사람에게 촉촉한 단비처럼 내렸습니다. 새에덴의 새부흥을 이끌며 대체 불가한 린치핀이 되라는 목사님의 말씀은 성령의 불처럼 우리에게 뜨겁게 임했습니다. 목 놓아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세계 장자교회의 역할을 하는 새에덴교회를 만나게 됐는지... 존경하고 사랑하는 목사님을 만나 이 귀한 사역에 쓰임 받게 됐는지... 하나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하략)” 저는 이런 문자를 받고 너무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평개원 뿐이겠습니까? 거의 모든 교구가 다 이렇게 헌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요일까지 계속 헌신기도를 하고 또 심방을 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이런 심방만 하는 게 아니라 격달로 한 번씩 ‘사랑이를 위한 심방’을 합니다. 정말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찾아가서 구제비를 드리고 기도를 해 드리는 심방입니다. 메디컬처치의 이재훈 목사님께서 동행하셔서 함께 기도하고 의료봉사도 해 주십니다. 그런데 아직 남아 있는 일이 있는데, 6월 23일 주일저녁에 열리는 보훈음악회입니다. 지상작전사령부의 군악대가 직접 와서 연주를 할 뿐만 아니라 가수 남진, 김의영, 정미애, 테너 박주옥, 소프라노 서선영, 국악가수 오선지 등 최고의 출연진들이 나와서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가요와 가곡, 판소리 등을 열창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최고의 보훈음악회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 교회 행사가 정말 잔잔한 파도의 영향력을 확장시켜가고 있습니다. 18년째 이어온 참전용사 초청행사 소식을 모든 일간지들이 도배를 하다시피 하고 또 TV조선 뉴스퍼레이드까지 출연하여 인터뷰를 했지 않습니까? 혹자에 의하면 지상파 방송 50분 다큐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교회연합신문의 차진태 기자는 ‘새에덴교회 향한 사회적 관심에 한국교회 신뢰도 동반 상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 18년을 이어온 새에덴교회의 진심이 만들어 낸 가장 최고의 가치가 있으니, 바로 '신뢰의 회복'이다. 빠르게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의 처참한 현실과 사람들의 외면 속에 새에덴교회는 교회 본연의 공익적 사명을 200% 수행함으로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다시 되돌아보게끔 했다. (중략) 오늘날 위기를 부르짖는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신뢰의 부재'로 귀결된다. 더이상 교회의 경건함을 믿지 않고, 목회자의 도덕에 기대치 않는 현실은 교회와 목회자 스스로가 만들어 낸 오늘날 한국교회의 냉철한 단면이다. 더욱이 좌우, 빨강과 파랑에 극도로 함몰된 일부 교회의 모습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정치 집단으로 까지 비춰졌다. 그런 상황에 언론들을 사로잡은 새에덴교회의 소식은 국민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전도의 문을 여는 확실한 반전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새에덴교회를 향한 사회적 관심은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기독교 이미지 상승효과와 광고효과를 동반한다.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를 휩쓴 가수 싸이의 연말 뉴욕스퀘어 공연이 문화 강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듯, 새에덴교회의 보은행사는 한국교회 전체의 이미지 재고로 이어지고 있다. (중략) 18년째 이어오고 있는 참전용사들에 대한 새에덴교회의 헌신이 무너져가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저는 이 기사를 보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한 명의 기자뿐만 아니라 많은 언론 매체가 정말 도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걸 수많은 국민이 봤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자긍심 있는 마음으로 출국을 했고 미국에 가서 눈물겨운 보훈행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일저녁에는 정말 어느 교회,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 보훈음악회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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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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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께 영광, 성도들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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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가 분명하십니까’(빌 3:12-14)
- 이 세상은 막연한 삶이 아닌 목표 중심적 삶을 요구합니다. 목표를 확실하게 정하고 실행해가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큰 성공과 승리가 안겨지게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목표로 삼으나 믿는 우리는 세상 사람과 목표가 다릅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4)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나의 목적과 목표를 일치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마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고, 고전 10:31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승리를 꿈꾸는 사람이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승리를 이미 포기한 것이겠지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곳에 해결책도 있다는 말로도 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간에 수없는 뜻을 정해 보았고 시행착오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하려면 신앙생활의 목표가 명확해야 하며, 목표가 세워지면 즉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앙은 ‘차차 나중에 하겠다’하면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저하고 방황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인생입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뜻을 정했다면 철저하게 지금 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선한 뜻에는 은혜가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필요를 따라 물질도 사람들도 붙여주십니다. 모세는 가나안이라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늘 비판하고 반대하고 원망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없는 배는 방향을 설정할 수 없고, 이러한 배는 이리저리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인데 만일 천성이란 이 목표가 희미하거나 확정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 물결로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생활 뿐 아니라 우리들의 육신의 생활에도 이 진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목표가 분명치 못한 사람은 평생 성공하기 어렵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나 목표가 확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상실하면 그 때부터 방황하며 전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집니까? 목표가 없거나 목표가 있어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 손을 놓치지 마시고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면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미래를 바라보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소망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갔듯이 우리도 이 적극적인 신앙, 좇아가는 신앙을 본받기 바랍니다. 뒤에 있는 것 중에 오늘 푯대를 향해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모두 잊어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표를 세워나가는 사람은 목표 설정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즉각적인 실행에 옮기는 순종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목표를 이룬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있음을 기억합시다(딤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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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가 분명하십니까’(빌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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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18년째 이어온 보은행사 이야기
- 지난 화요일은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침에 TV조선 ‘뉴스 퍼레이드’ 생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태생이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저녁형 인간입니다. 그래서 젊을 때 새벽기도하는 게 참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피곤하다가도 저녁만 되면 눈이 반짝반짝 뜨이고 머리 회전이 팍팍 돌아가는 걸 느끼죠. 그런데 그날은 일찍 일어나서 분명히 찬물로 세수를 하고 출발을 했는데 차 안에서도 졸려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죠. 생방송이란 편집을 하지 않고 즉문즉답을 적절하게 잘 해야 하는 것인데 저는 현장에 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스튜디오로 들어갔습니다.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막상 인터뷰에 응하려고 하니까 목이 많이 잠겨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간 후회를 하였습니다. “물도 좀 마시고, 목소리도 고르게 발성연습도 하고 들어갈 걸 잘못했구나...” 그런데 끝나고 나올 때 앵커께서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목사님, 아주 적절하게 잘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수십 건의 문자가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내용이 “목사님, 너무 잘 하셨어요. 다큐 50분짜리보다 훨씬 더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요. 목이 잠겨서 몹시 불편했고, 워딩도 100% 만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에요. 꾸밈없이 순수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목사다운 목소리였습니다.” 그런 문자가 왔습니다. 이튿날까지 200통이 넘는 문자가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TV조선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피플 퍼레이드 시간에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아닌 목회자를 불러서 인터뷰를 한 것이 방송사로서는 큰 결단을 해야 했으리라고 봅니다. 돌아오면서 전날 있었던 평개원 간사들의 모임에 대한 피드백 문자가 몇 개 떠올랐습니다. 이분들은 매일 교회에 출근을 하셔서 몸과 시간과 물질로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어찌 이분들 뿐이겠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생각났습니다. 특별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은 김종대 장로님이었습니다. 이분은 18년째 참전용사 초청행사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해 오셨습니다. 수년 전에 장로님께서는 후두암으로 성대를 잃으셨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전문 닥터들이 생존하는 것도 어쩌면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굳센 믿음과 강한 신념으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해 왔습니다. 후두를 제거하면 음식 삼키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밥을 점심까지 씹어서 삼켰다고 합니다. 또 점심을 저녁까지 씹어서 삼키고, 저녁식사도 주무시기 전까지 씹고 또 씹어서 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살아야 합니다. 소강석 담임목사님의 사역을 돕고 6.25 참전용사 행사를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라면서 그는 성대를 잃은 후에도 이메일로 부지런히 미국과 소통을 해서 지금까지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겨오셨습니다. 올해는 텍사스주의 달라스에서 행사를 합니다. 왜 그곳으로 가게 되었냐면 그 지역에서 우리 교회 초청을 받은 참전용사들이 너무 감동을 받아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도 후원을 하였는데요. 그래서 그곳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김종대 장로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래서 그날 인터뷰를 하고 난 후에 장로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물론 장로님은 후두를 잃어서 전화로 통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께 “장로님 덕분에 인터뷰를 잘하고 왔습니다. 장로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김종대 장로님을 생각할 때마다 생명보다 귀중한 게 사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순간 또 한 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강종직 장로님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장로회수련회를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한 게 아니라 장로님들의 말을 다 경청했습니다. 대부분이 다 담임목사의 목회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건강을 염려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좀 약간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때 강종직 장로님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자기 생각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서도 안 돼요. 우리 목사님은 전적으로 우리와 다른 분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목사님께 순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처럼 강직한 발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래가 아주 엄숙하고 숙연해 진 것입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우리 교회는 18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보은이 한 개인의 인격이라면 보훈은 한 국가의 품격이죠. 우리 교회는 적어도 보은을 넘어 보훈의 정신을 함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아니 18년 동안 이어온 보훈행사의 스토리를 만들어낸 교회죠.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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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18년째 이어온 보은행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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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
-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1-5) 가인이라는 말은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최초의 여인일 뿐 아니라 최초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새 아이가 탄생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더군다나 자기의 실수로 인하여 아담과 자기의 영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게 되었고, 에덴 낙원까지 잃게 되어 소망 없이 살았었는데 아들을 낳았느니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낙원을 가인으로 말미암아 회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는 많이 공부를 못했기에 아들 대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시켜 대리만족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정 이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넘어지면 다칠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온갖 정성을 다 쏟았을 것입니다. 행여 풀 밭에 가면 뱀이 나타나 그를 유혹할까 봐 보는 즉시 잡아 죽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들의 기대와 점점 멀어졌습니다. 기만 살아서 한마디 충고도 듣지 못했으며, 자신의 뜻대로 무슨 일이 되지 않으면 성질을 내며 갈수록 난폭해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제는 기쁨보다 가인에 대한 트라우마같은 것이 생겨서 자녀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아벨’ 곧 허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면 실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소망을 갖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으며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십니다(시105:16). 돈을 의뢰하면 돈이 궁핍하게 됩니다. 자식을 의뢰하면 자식이 기대에 어긋나게 됩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자신의 지혜에 속게 됩니다. 이처럼 창조주 외에 그 어느 것도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며 주님을 의뢰하는 생활이 아니면 모두 빈 껍데기이며 허무한 것뿐입니다. 한 배에서 나온 자녀라도 성격이 다르고 소질도 다릅니다. 가인은 농사를 잘하여 농사짓는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을 잘 쳐서 양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은사는 가인과 아벨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은사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속죄하는 제사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는 아벨의 양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인이 농사한 밀, 보리, 수수, 조, 참깨, 들깨 등과 같은 곡식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동생이었기에 필요하면 가인에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은 속죄를 위한 양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최고로 알았기 때문에 아벨의 것을 애써 부인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제도 동생 아벨의 동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가 기른 곡식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드릴 때조차 자신의 곡식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히9:22). 오늘날 신앙인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점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입니다. 내가 형제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형제보다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겸손하게 형제를 찾아 자문을 구하거나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자리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시133).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낼 뿐 아니라 사랑도 기꺼히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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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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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내 입장보다 상대방 입장이 더 먼저죠”
- 저는 지난주에 필리핀 선교 50주년 희년성회 강사로 다녀왔습니다. 필리핀 선교 50년째를 맞아 열린 주빌리 성회였습니다. 몇 달 전부터 필리핀 선교사 회장되신 이영석 선교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주강사로 섬겨달라는 것입니다. 말이 주강사지 거기에 걸맞은 후원금을 담당해야 하는 부담스런 자리입니다. 처음엔 주저주저했는데, 제 신학교 입학 동기인 임종웅 선교사님이 또 찾아와서 통사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바빴던지 사실 그 집회를 위해서 설교 준비할 시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본 틀만 정해놓고 비행기나 차로 이동 중에 세세하게 원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비행기여서 새벽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일찍 잔다고 했지만 시간에 맞게 깨어나야 되는데 새벽 2시 이전에 깨버리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 시간에 설교 준비를 하고 또 특강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집회장소가 마닐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클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클락은 마닐라에서 2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사님들에게 “저는 차로 이동하는 중간에 좀 누워야 됩니다. 그러니까 옆자리로 누워갈 수 있는 차를 좀 준비해 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중에 좀 쉬겠다 싶었는데, 차에 타고 가는 사람 숫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누울 공간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닐라에 들려서 또 점심식사를 하고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기내식을 했거든요. 그래서 “제발 밥 먹지 말고 저 좀 쉬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교사님들이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대접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니 선교사님들 입장보다 제 입장이 더 중요한 거지, 그게 겉치레이고 불필요한 예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이미 예약을 해서 돈을 물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돈 내가 물어줄 테니까 그냥 가자”고 얘기까지 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지금 주강사 입장이 중요하지 밥이 중요합니까? 그런데 또 일행 중에서 “기왕 준비했으니까 밥 먹고 가시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에 약한 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밥을 먹으러 가야 했습니다. 순간 진짜 짜증이 났습니다. “몸은 피곤한데 밥 먹는 게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 강제로 식당에 가서 1시간 반이나 허비하고, 다시 2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아찔한 것입니다. 저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습니다. 물론 차로 이동하는 시간은 유익했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얘기, 총회와 교계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유익했습니다. 그러나 가면서 눕지 못하고, 펴지지도 않는 의자에 앉아서 두 시간 반을 간다는 게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습니다. 두 시간 반이 4시간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곧바로 가서 저녁식사하고 양치하고 바로 집회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하기 전에 개회예배와 특강 시간이 하나 있었습니다. 친구이자, 이 시대에 한 동역자인 고광석 목사님이 개회설교를 하시고, 그 유명하신 손현보 목사님께서 전도 특강을 하시는데, 피곤하다고 저 혼자 누워 있다가 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또 두 시간 이상을 앉아있다가 그 다음에 이어서 제가 저녁 메인 집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정말로 까무러칠 것 같았습니다. 머리는 띵하고 눈은 쓰리고 어깨는 무겁고요. 그래서 저에게 주어진 시간보다 짧게 끝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지방에서 온 선교사님들도 다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올라왔을 거 아닙니까? 선교사님들도 다들 피곤한 기색이 보이고 저도 피곤했구요. 집회가 끝나고도 제가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정말 설교를 잘할 수 있었는데 오늘 점심 때문에 버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차에서 이동하는 도중에 누워서 가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왜 그랬습니까? 제가 어떻게 온 줄 아세요? 주일 날 예배를 여섯 번이나 인도하고 쪽잠 자고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이런 사람에게 맞춰서 해줘야지 주최측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되나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그분들 입장에서 보면 강사로 오시는 분을 잘 대접해야 되겠죠. 그러나 정말 저에게 필요한 것은 ‘쉼’이었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기내식을 이미 해서 밥도 먹을 필요가 없는데 끝까지 자기들의 입장과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정말 내 입장보다 중요한 게 상대방 입장이라고 말입니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목사의 입장보다 교인의 입장을 먼저 배려해 줘야 되겠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내 입장보다는 그분들의 입장을 존중해 줘야 되겠구나.” 참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날 그런대로 잘 자서, 다음날 특강과 저녁집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마는. 어쨌든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내 입장보다 상대방 입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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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내 입장보다 상대방 입장이 더 먼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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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값진 인생’(엡 5:15-16)
- 사람은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그 시간은 시 90:10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칠십 혹은 강건하면 팔십의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천년만 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실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생의 시간이란 한정적이고 짧습니다. 이처럼 짧은 인생의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니 이 귀한 시간들을 우리의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시간은 생명이며 보화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이만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를 지혜롭게 생각하여 주어진 시간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15-16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정신없이 살다보면 시간을 낭비하고 헛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게으름 역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데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획 있게 쓰지 않으면 분명 후회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시간을 사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삶에서 우선순위가 세워지지 않으면 삶을 닥치는 대로 살게 됩니다. 시간을 관리하지 않으면 시간에 떠밀려서 살게 되며, 시간을 헛되고 무의미하게 사용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시간을 써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도록,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를 지으셨는데(사 43:7, 21), 우리가 ‘하루의 얼마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 시간은 우리의 인생을 반드시 바뀌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주시고 새 옷을 입혀주실 뿐 아니라 은혜가 채워지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산다고 똑 같은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유익한 것입니다. 내 멋대로 산 시간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서 늘 그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은 본래 뜻은 “시간을 사다”입니다. 시간을 산다면 얼마나 아끼며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신속히 날아가는 인생의 세월을 아끼지 않으면 그 값진 시간이 그냥 흘러가 버리고 의미 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합니다. 잃은 돈은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지나버린 시간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위대한 일을 이룹니다. 점이 모여 선이 되듯이 하루하루가 모여 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입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 받는 것도 바로 지금입니다(고후 6:2). 매 순간의 삶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생명 같은 시간이 낭비되어는 안 됩니다. 인생이 너무 나 짧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시간은 현재입니다. 현재를 일어버린 사람은 미래도 다 잃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며, 시간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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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값진 인생’(엡 5: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