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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기독교인 81% 종교가 내 삶에서 중요하다
- 종교활동이 내 삶에서 중요하다는 응답이 기독교인은 81%가 그렇다고 답했고, 천주교인은 53%, 불교인은 33%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종교인의 평균 58% 가운데 기독교인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종교활동에서도 매주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에서 기독교인은 55%, 천주교인은 27%, 불교인은 4%로 자기 신앙에 대한 충성도에서도 기독교가 월등하게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통계는 한국리서치가 지난 11월 22일부터 25일 사이에 전국에 있는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표본 집단으로 하여 조사한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3.1%의 응답률과 95% 신뢰수준에서 오차는 ±3.1%p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전체 종교인은 49%인데, 그중에 기독교인 20%, 불교인 17%, 천주교인 11%로 나타난다. 이런 추세는 지난 2018년부터 거의 변함이 없다. 기독교는 2018년에는 22%를 차지했으나, 그 후에는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천주교는 2018년에 12%를 차지했으나 그 후에는 11%대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불교는 변함없이 17%대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무종교인은 51%를 차지한다. 연령대를 놓고 보면, 기독교인은 18~29세까지 젊은 층이 13%를 차지하고 있으며, 불교는 8%, 천주교는 7%로 나타난다. 연령층이 올라갈수록 종교를 가진 비율이 높아진다. 그중에 기독교인은 30대 16%, 40대 20%, 50대 20%, 60대 23%, 70세 이상이 29%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서울에서 기독교인은 22%, 불교와 천주교는 각각 13%를 차지한다. 인천•경기에서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아 22%를 차지하는 반면, 불교•천주교는 각각 12%를 차지한다. 그리고 대전•세종•충청에서 기독교인은 21%, 불교는 17%, 천주교는 10%를 차지한다. 광주•전라에서는 기독교인이 25%, 불교인 11%, 천주교인이 10%를 차지한다. 대구•경북에서는 기독교인 15%, 불교인 24%, 천주교인이 10%를 차지한다. 부산•경남에서는 기독교인 14%, 불교인 29%, 천주교인이 7%를 차지한다. 마지막으로 강원•제주에서는 기독교인 17%, 불교인 19%, 천주교인 11%를 차지하여, 기독교는 서울•경기•인천•대전•세종•충청•광주•전라권에서 비율이 높고, 불교는 대구•경북•부산•울산•경남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 보면, 기독교인은 남자가 18%, 여자는 22%를 차지하여 여성의 비율이 높다. 불교도 여성의 비율이 높아 17%, 남성이 16%를 차지한다. 역시 천주교도 여성의 비율이 높은데 12%, 남자는 10%를 차지한다. 이는 지난해 조사와 비교해 보면, 기독교는 여성이 1%로 늘어난 것이고, 불교는 남자•여자가 각각 1%씩 줄어들었으며, 천주교는 남자 신도가 1% 늘어난 결과이다. 60세 이상 고령층으로는 천주교 47%, 불교 44%, 기독교 41%의 비율로, 전체 인구의 평균 32%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즉 모든 종교인구 비율이 고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년 전과 비교하여 믿는 종교가 변화된 사람은 7%이다. 그중에 자기가 믿던 종교를 떠난 비율은 불교가 11%로 가장 많았고, 기독교가 9%, 천주교가 7%였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 매주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전체적으로 31%로 지난해보다 2%p 늘어났다. 그중에 기독교인은 55%가 참여하고 있고, 천주교인 27%, 불교인은 4%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인의 충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기독교인 가운데 10%는 종교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이에 비해 천주교인은 31%, 불교 신자는 19%) 그리고 가장 중요한 종교활동이 내 삶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가의 조사에서,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에서 기독교인은 81%, 천주교인은 53%, 불교 신자는 33%만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이번 조사를 보면서 우리 기독교에 큰 과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10~20대의 13%와 30대의 16%에 머물고 있는 복음화율을 더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젊은 세대를 겨냥한 다양한 복음 전수의 접근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두 번째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51%에 이르는 무종교인에 대한 복음 전파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무종교인이 늘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부유함과 생활의 안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 또 교회에 대한 부정적, 불신앙적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다. 이런 걸림돌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세 번째로 지역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대한 복음 전파에도 힘써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도의 비율뿐만 아니라, 그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느냐의 문제이다. 성경은 분명히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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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기독교인 81% 종교가 내 삶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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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성령충만과 상’(출 31:1-5, 고전 9:18)
- 사울은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춤추며 예언을 하였습니다.(삼상 10:10)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주님의 영이 떠났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습니다.(삼상 16:14)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왔을 때 뉘우치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시 51:11)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충만은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 브살렐은 성령충만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직분을 감당할 때 성령충만하였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신 3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영적인 안목이 밝아져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백성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트집을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어디서든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 특징은 정상적인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하면 부부관계, 자녀관계, 고용주 관계 등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엡 5-6장)성령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성령의 열매(fruit)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하나입니다. 그 방법이 여덟 가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려면,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음 없음을 깨달을 때 믿음이 돈독해집니다. 믿음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 9:24)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사 55:8) 셋째,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행 2:38-39) 회개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 12: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를 드리도록 인도하시며,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해주시는 성령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존재를 믿고,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로 있어야 상을 주시는데, 사역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상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칭찬받을 수 있는데 칭찬을 안 받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주신 사명 위해 충성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자기 인생을 마라톤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을 달려가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행 20:24) 바울은 지나간 것으로 만족하거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복음 전파와 계속 성장해야 할 자신의 신앙을 추구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성령충만함으로 미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며 주님의 상을 바라보고 복음 전파와 자신의 신앙 성장에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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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성령충만과 상’(출 31:1-5, 고전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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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환대가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오게 한다”
-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그 책에 보면 인생 시간 계산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24시간 아닙니까? 그런데 하루를 분으로 하면 1440분, 한국인 평균 수명을 80세로 본다면 1년이 18분으로 계산이 됩니다. 즉 내 나이에 18을 곱하고 대략 60으로 나누어 보면 하루 중 내가 몇 시쯤에 있는지가 짐작이 되지요. 제가 계산해 보니까 0살은 0시, 10살은 새벽 3시, 20살은 오전 6시, 30살은 9시, 40살은 12시입니다. 50살은 15시, 60살은 저녁 8시이지요. 70살은 21시, 80살은 24시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생을 80으로 볼 때, 평균적 기준을 말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인저리 타임이 있지 않습니까? 경기 도중 부상 선수 발생으로 인한 시간 손실을 만회하는 추가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승부가 안 나면 연장전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시간이 인저리 타임, 연장전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환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생 후반전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인저리 타임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인생 후반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낳은 후에 나이를 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마침내 이룬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인생의 전반전을 자기중심으로 살았다면 인생 후반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사명을 붙들고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낳고도 75세 이상을 더 살았거든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잘 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세 나그네를 마주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환대하며 물로 발을 씻기고 떡을 가져다주고 송아지 요리를 하여 극진하게 대접합니다.(창18:1-8)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이었습니다. 그가 내년 이맘때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합니다.(창18:10)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창18:18) 저는 저온화상으로 아직도 상처의 아픔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저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인저리 타임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준비한 설교 원고이지만 또 다듬고 보완하며 보충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정말 하나님을 환대하고 성도들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설교준비를 하면, 반드시 저에게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35년이 넘도록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를 강사로 모신 적이 없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 그리고 장년여름수련회는 오로지 저만 강사로 서 왔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올해도 변함없이 말씀을 준비하고 강사로 서려고 합니다. 비록 그때까지 발이 완치될지, 상처가 덜 아물지는 몰라도 저는 끝까지 강사로 나설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상처로 소모한 시간을 만회하는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2025년 한 해에 인저리 타임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환대하는 새해에 인저리 타임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더해 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확고한 신앙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신년축복성회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통해 새해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온 생애에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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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환대가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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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의 흔적’(갈 6:17-18)
- 한평생 주님의 사도로 신실하게 살았던 바울에게는 입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전도자들과 달리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며 깊은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흔적이라는 말은 ‘스티그마’라는 단어인데 고대사회에서 주인들이 자기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노예의 어깨나 엉덩이에 화인을 찍은 데서 유래했습니다. 불에 달군 쇠를 노예의 살 위에 찍어 자기의 소유임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낙인(烙印)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종임을 당당하게 말했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인 사실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그리스도의 소유됨과 고난의 상처로 대변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도 아니요, 마귀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사 43:1).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면서 하나님의 것이지(고전 3:23) 그 외에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속했으면 주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고 또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최대의 기쁨과 최대의 영광으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음으로 예수의 흔적은 고난의 상처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따라가느라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핍박을 당했습니까? 바울의 몸은 고난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그는 희생적인 복음의 사자로서 숱한 고난의 흔적 영육 간에 증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고후 11:23-27). 고후 4:10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대속의 희생으로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예수님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바울은 도리어 그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말했습니다. 그 해답은 마 5:11-12절에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매 맞는 것 주님을 위하여 욕먹는 것 주님을 위하여 원망 듣는 것 주님을 위하여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가운데 고난과 눈물과 희생이 따를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과 발에 못 박힌 상처, 주님의 옆구리에 난 창자국 가시관을 쓴 자리에 난 주님의 머리의 상처는 누구를 위한 상처입니까? 모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요 눈물의 흔적이요 매 맞은 흔적이요 찔린 흔적이요 피의 흔적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묻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나는 발자취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발자취를 존귀케 여기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녀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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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의 흔적’(갈 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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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 올해는 성탄절을 좀 뜻깊게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1월 초부터 교회 주변 가로수에 성탄 트리를 장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인시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고 또 전기사고 등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죽전 중앙공원에서 루체비스타 성탄 행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헌혈을 하여 헌혈증을 모아 한국소아암재단에 기부하고, 취약계층을 위한 사랑의 쌀 나눔을 비롯하여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을 위한 성탄 선물도 전달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영호 집사님을 비롯한 우리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별히 헌혈을 하신 성도들과 지역주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행사를 하는 동안 너무 음악 소리가 크고 음향 소리가 커서 혹시 민원이 제기되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아계신 이상일 용인특례시장님이 “목사님, 저기 좀 보세요”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니까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베란다에서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정말 희한하고 놀라웠습니다. 사실 제가 담임목사의 직권으로 혹시라도 주민들이 불편해할까 봐 브라스밴드 연주를 생략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도 희한하게 아파트 주민들이 다 내다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행사가 끝난 이후에 물어봤습니다. “혹시라도 민원이 제기되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한 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냥 브라스밴드 공연을 하도록 놔둘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분들도 다들 보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루체비스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왜 이런 어려운 언어를 썼냐”고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설명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루체비스타는 ‘빛의 풍경’이란 말입니다. 저는 언어에 있어서 선점을 하고 좀 앞선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밤의 긴장과 설렘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거룩한 잔상이 제 심장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루체비스타 행사가 끝나고 줄을 서서 교회로 오시는 성도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고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사람과 사람, 또 사랑과 사랑 사이에 연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금실이라는 것입니다. 루체비스타 행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 가슴에 금실로 연결되는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거룩한 금실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교회 주차장으로 오는 모습이 금실에 이어진 행렬처럼 느껴졌습니다. 진짜 욕심 같아서는 그 행사를 한 번 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평생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그날 밤, 유달리 별이 반짝이었던 것처럼 지난주 저녁에 우리는 가슴에 별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별들이 금실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헌혈을 비롯하여 헌신해 주신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 또한 그날 현장에 함께 하신 성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올해는 크리스마스 전야제 행사는 없지만, 성탄감사축하예배 때 다 오셔서 다시 한번 아기 예수가 주신 별의 선물을 받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 별빛을 기대합니다.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우리 가슴에 빛나게 될 아기 예수의 별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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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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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지록위마(指鹿爲馬)가 통하는 슬픈 세상’
- 중국의 진나라 환관이요 간신이었던 조고가 어린 황제 호해 앞에서, 자신을 위해하거나 따르지 않는 지를 가려내기 위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말하고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말이 틀린 지 바른 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살 것이요 아니라 하거나 대답을 안하면 죽을 것인데, 결국 조고는 ‘지록위마’에 동의한 신하들만 남고 모두 죽이고 말았다.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 말한 신하들이 모두 죽어나간다는 명백한 현실, 그 현실을 넘어서서 용감하게 그것은 말(馬)을 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바른 말을 했던 신하들은 조고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황제보다 자신이 더 권력이 세다는 것을 세상에 확인시킴으로 절대 권력자임을 보여주었다는 고사성어, 지록위마. 지금 필자가 이 세상에 보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그 동안 거대 야당의 입법폭주와 탄핵 남발 정국을 보면서, 그것도 그것이지만 참 그곳에도 ‘지록위마라고 합창하는 못난 선량들과 많구나’ 했더니, 계엄 선포의 배경에는 참으로 딱한 지록위마 소인배들이 무능한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어쩌다 이나라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바른 말하는 정치인을 볼 수가 없는가? 왜 이렇게 ‘지록위록(指鹿爲鹿)’ ‘지마위마(指馬爲馬)’라고 쉽고 명백한 언사를 사용하는 정치인이 없는가? 선동자들의 주창에 따라 합창하는 패거리 천박한 스크럼이 횡횡하는 이 불쌍한 나라를 누가 바로 잡을까? ‘지록위마’하는 인사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죽기 싫어서, 조고의 눈 밖에 나면 정치적인 생명은 물론 육체적인 생명까지도 보장받을 수 없으니, 나부터 살고 보자는 비루한 이기주의가 이 지록위마의 근본이다.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비루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다. 지난 20일 고양시 의회에서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바꾸는 조례안이 17:17로 끝내 부결되었다. 당론으로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시의원들이 정말 베일에 쌓인 것같은 ‘성평등’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함정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요, 알았다면 그는 정말 지록위마의 비루한 정치인이다. 또 이것을 당론으로 밀어부친 민주당 역시 소수의 지지자들을 의식한 지록위마의 비겁한 정당이다. 어제 민주당 지지자의 토론을 보면서 무식하다기보다는 마치 초등학생 수준의 토론을 보는 것 같은 무능한 전형적인 지록위마의 현대판 정치인이었다. 그것이 두려워 무턱대로 자기 표를 헌상하는 의원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정치인들이 비겁하고, 이기적이 되면 그것이 망국의 징조이다. 조선이 그렇게 망했고, 광복 조국이 그렇게 분열되었다. 자신의 소신을 펴지 못하고 굴신함으로 생존하는 정치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을 살려줄 줄기를 찾아다니고, 그의 하수인이 되어 지록위마의 삶을 산다. 불쌍하고 딱하지만, 더 분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결정한 것에 우리가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록위마의 무리 속에 갇혀 사는 현대인의 아픔이다. 어제 고양시 의사당을 떠나오면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소리치기로 했다. 지록위마의 정치인을 몰아내자. 한 사람 힘있는 사람을 위해 참과 거짓도 상관없고, 국익도 국격도 자존심도 상관없이 오직 내 것만을 챙기는 비루한 정치인을 이제는 더 이상 의정 단상에 세워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다윗을 향한 나단의 절규는 생명을 담보한 것이었다. 오늘 이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교회가 나단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는 정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정권이 지록위마의 길을 가지 않도록 붙잡고 세우고 함께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다시 한번 깊은 성찰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 역시 지록위마의 누를 범하면 안될 것이다. 탄핵 정국에서 이를 다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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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지록위마(指鹿爲馬)가 통하는 슬픈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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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격랑(激浪)정치, 격동(激動)시대, 격견(格見)이 필요
-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 1주일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이전과 이후는 엄청난 격랑(激浪)이 몰아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1주일 사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대통령은 ‘종북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기 위하여 계엄을 선포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탄핵과 수사의 대상이 되고, 사상 초유로 ‘출국금지’까지 당하고 있다. 또 검찰과 공수처와 경찰은 서로가 경쟁하듯 대통령을 잡겠다고 한다. 그런 막강한 권력들이 다른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수사는 왜 지지부진했을까? 여론 조사 결과,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의 탄핵을 지지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누가 대통령이 될까? 2024년 대학교수 1,086명이 뽑은 올해(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전에 조사됨)의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이다. 이는 ‘권력이나 세력을 함부로 부리고 날뛴다’는 뜻이다.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하여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때 당시 가장 앞장서 대통령 탄핵을 외친 사람이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을 우리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현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 가량 남은 상태에서 한국 정치는 다시 대통령 탄핵의 분위기로 들어갔고, 정말 탄핵이 이뤄진다면, 온갖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수혜자가 될 상황이다. ‘세계 속에 한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짧은 시간에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국가 체제는 급격히 바뀔 것인가? 우리 국민들이 격변의 시기에, 지도자를 잘못 세우면 사회주의로 갈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79년 전 해방을 맞았을 때도 하마터면 사회주의 국가가 될 뻔하였다. 이것을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공부하고 돌아온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주의를 획책하는 사람들이 있다. 20세기 영국의 유명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허구성을 간파했는데,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은 완벽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유혹에 빠져 종국에는 수많은 사람의 자유를 희생시켜, 노예가 되는 길로 나가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우리나라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가 무너지면 필연코 사회주의가 될 것이고, 결국 국민들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공짜’와 ‘무상분배’로 국민들을 유혹한다. 공짜가 정말 공짜일까? 20세기 미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이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밀튼 프리더먼은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내가 받는 공짜는 누군가의 피눈물의 결정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정의하였다. 오늘의 한국 정치를 보고, 한 원로 언론학자는 ‘반대편의 증오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하여 악마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증오와 혐오를 정당화 한다’고 분석하였다. 상대방을 악마화하지 않고는 권력을 잡기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바른 정치요, 선진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탄핵’ 문제로 인하여 많은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고, 외교와 안보, 국가신인도 등이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오직 ‘탄핵 일방통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막상 탄핵이 이루어져,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고 하여도, 그것이 곧 국가 발전과 국민들의 삶이 행복해질 것인가는 장담하기 어렵다. 자칫하면 ‘노예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노예의 길을 좋아하거나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오직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왔고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다. 이제 또다시 국민들이 깨어 일어나 결정해야 할 시기가 올 수도 있다. 그것은 국민들의 주권이며, 바른 선택을 해야 할 의무이며, 또한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일말의 희망을 거는 것은, 사법부의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삼권분립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맞춰지기를 바란다. 모 언론이 여론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협되는 문제는 정치권의 극단 대립’이라는 응답이 35%로 가장 높았다.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의 삶에 위협이 된다는 것은 우리 정치가 정도를 가지 않고 있다는 증명이다. 우리 국민들도 정치의 혐오와 증오가 활활 불타는 화염 속으로 같이 들어가지 말고,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은 마치 전설 속의 불가사리와 같다. 쇠붙이를 먹어야 힘을 얻는 존재라고 한다. 국민들이 마치 쇠붙이를 공급하는 것처럼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정치권도 극한 상황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특정 정파의 주장에 휩쓸리지 말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며, 하늘의 능력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이 나라에 안정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국민들을 위하여 정치인들에게 권세와 권력을 더 주셨고, 또 그에 따른 심판도 엄하게 하실 것이다. 지금 격동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모든 국민들은 격견(格見-품위와 격에 맞는 의사 표현)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격랑 가운데에는 기독 의원들도 상당수 있다. 그들이 국회에서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기 바란다. 한국교회도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국가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앞장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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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격랑(激浪)정치, 격동(激動)시대, 격견(格見)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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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이단이 극성을 부리는 것은 종말의 현상이다
- 최근 국민일보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국립대학인 충남대에서 신천지(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 교주:이만희, 이하 신천지)가 수년간 동아리 전체의 임원진을 독식하면서 그 영향력을 미쳐온 것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신천지는 충남대에서 총동아리연합회를 장악하여 그 활동력을 넓혀 왔는데, 학생들은 신천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들의 포교전략에 넘어가, 이 시대에 가장 지독한 이단에 빠졌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신천지의 이런 악행은 충남대뿐만 아니라, 충청지역의 우송대, 한남대, 한밭대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 과거에는 역시 국립대학인 공주대와 전남대를 포교 대상으로 삼았던 일도 있어,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대학 생활 가운데 동아리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을 통하여 활력을 얻고, 선후배가 함께 어울려 학과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나누고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이다. 그런데 신천지가 대학의 청춘들까지 자신들의 영향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은, 그들의 꿈 많고 건강해야 할 대학 생활을 망치는 꼴이 된다. 참으로 개탄을 금할 수 없다. 학교 측은 그 실태를 낱낱이 파악하여 국립대학교가 불건전한 이단들의 포교의 온상이 되지 못하도록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야 한다. 이단들은 결과적으로 사람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망가지게 할 뿐, 건전한 종교 생활에 훼방을 놓을 뿐이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렵게 양육하여 대학에 보내는 것은 그들이 한 인격체로 성장하여 국가와 사회, 이웃과 혹은 가정을 위하여 선(善)한 기여(寄與)를 위함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하였는바, 신천지의 문제점은 그동안 저들에게 속아서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움과 고통을 당했는가는 탈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신천지가 대학까지 파고 들어가 젊은 청춘들의 일생과 영혼까지 망가트리려 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하여 각 대학 측과 학부모들과 학생회 측과 지역 기독교연합회 측이 공동으로 조사하여, 이단들의 발호(跋扈)를 막아야 한다. 또 학생들도 이런 이단의 활동으로 기존의 건전한 동아리, 특히 종교동아리, 그중에서도 기독동아리의 정상적 활동에 장애를 주지 않도록 조치하여야 한다. 지금은 종말의 때이다. 그런 현상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현상으로는 미혹과 배교와 불법의 사람과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그런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12) 우리 자녀들이 이단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에 나가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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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이단이 극성을 부리는 것은 종말의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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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결혼은 소중한 것이며, 가정은 축복의 장소이다
- 우리나라는 출산율 저하로 해마다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이다. OECD 국가들의 출산율 가운데 1.0명 이하인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0.6~0.7명대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상황이다. 지금 추세대로 간다면 2072년에는 인구 3,600만 명으로 자녀 1명이 4명의 부모 세대를 부양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세계 인구는 이때가 되면 102억 명이 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인구 감소를 하게 된다. 한 마디로 가임(可姙) 세대가 자녀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도 출산율을 높이고, 부족한 인력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그러는 사이 혼외자는 계속 늘고 있다. 최근 유명한 남자 배우가 아이를 낳았는데, 여자 모델 사이에 ‘혼외자’라고 한다. 그는 자기 아이임을 확인하고서도 상대방과 결혼하지는 않겠다니, 공인(公人)의 책임 의식이 아쉽다. 우리나라에서는 출생율 저하와 함께 신생아의 숫자도 크게 줄고 있다. 지난 2013년에는 신생아가 43만 7,000명이었는데, 지난 해에는 23만 명으로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그런데 혼외자는 오히려 늘어나 1만 9,362명으로 4.7%를 차지하여 역대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낮은 편이지만, 결코 권장할 일은 아니다. 자녀는 정상적인 혼인 관계에서 낳아 길러야 한다. 그것이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도, 또 가정을 통해 자녀를 주시는 생명의 주권자인 하나님께도 합당하고 바른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공인된 사람들부터 결혼과 출산의 축복된 모습을 솔선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민정책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이민청’을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 대한 이민자의 증가율은 전년도에 비하여 50.9%가 늘어나(2022년에는 5만 7,800명인데, 2023년에는 8만 7,100명) OECD 국가 가운데 2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고, 선호도도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민정책은 산업 분야에서 인력난을 해소하려는 ‘고용 위주’가 대부분이다. 그래서는 양질의 인력을 받아들여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기가 어렵다고 본다. 과거 중세기 유럽에서는 이민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들도 있었지만, 20세기에 이민정책을 폈던 나라들에서는 ‘다문화 정책은 실패 했다’는 선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슬람이라는 특정 종교 세력들에 의한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국가는 저출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출산율을 높이는 문제나, 혹은 양질의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거기에다 혼외자(婚外子)가 증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라도 출산율을 높이려는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국가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회로부터 바른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사랑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축복임을 자꾸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비혼에서 나타나는 ‘혼외자’나 태어난 아이를 물질로써 책임만 지면 된다는 비뚤어진 의식을 버리도록 해야 한다. 성경은 바른 결혼 과정과 그 가정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을 축복한다. 그리고 태어나는 자녀들도 양쪽 부모의 사랑과 관심과 기도 속에서 태어나고 자랄 권리가 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온 국민들이 동참해야 하고, 특히 교회가 앞장서서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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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결혼은 소중한 것이며, 가정은 축복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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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시선을 주님께’(마 2:1-18)
- 시선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의 시선을 살펴보고, 베드로의 시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시선, 가나안 여자의 시선, 바울의 시선을 살펴봅니다. 그들이 주님께 시선을 집중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고, 시선을 집중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살펴봅니다. 첫째, 동방박사들의 시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찾아온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간 그 아기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아기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의 시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천사가 전하여준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듣고 별을 따라서 가다가 그만 잠시 별을 보지 않고 헤롯 궁을 바라보았습니다. 왕궁에서 왕이 태어나실 줄 알고 생각의 시선대로 찾아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자 당황한 헤롯은 결국 베들레헴과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에서 잠깐 시선을 떼자 바라보지 않아야 할 곳을 바라본 것이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 생각의 시선대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다가 잠깐이라도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도록 시선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 베드로의 시선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물 때에 제자들이 탄 배가 육지에서 멀리 떠나서 강풍으로 고난당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인 줄 모르고 유령이라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이 물 위로 걸어가도록 예수께 부탁하고,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시선을 주님께 집중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께 시선을 떼는 순간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다가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며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가벼운 사람은 풍랑을 만날 때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선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셋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시선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으나 두 제자는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얼마나 무디던지,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빵을 떼어주실 때야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두 제자처럼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면서 말씀해주시고, 들어주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얼마나 무디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넷째, 가나안 여자의 시선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와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쳐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께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신의 간청에 거절당하자 더욱 주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다가가 마침내 딸의 병을 치유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여자의 시선입니다. 가나안 여자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시선을 집중할 수 있습니까? 다섯째, 바울의 시선입니다. 바울은 성령님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고,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이면 가고 싶어도 가지 않았습니다.(행 20장) 이것이 바울의 시선입니다. 바울은 생명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고후 5:14-15) 바울은 다양한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약한 것 때문에 기도를 더 많이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시선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시선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시선을 주님께 집중하여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힘을 다해 동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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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시선을 주님께’(마 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