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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삼권분립(三權分立)은 국가의 기본이다’
    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국정감사를 통하여 조희대 대법원장을 증인석에 출석시킨 가운데 회의를 진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 대법원장은 ‘재판 사항에 대해 법관을 증언대에 세운다면 법관들이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 위축되고 외부의 눈치를 보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현 여당이 조 대법원장을 국회 증인석에 세워 그야말로 ‘망신주기’를 하려는 것은 지난 2022년 대선에서 당시 이재명 후보가 ‘공직선거법’에 기소가 된 것을, 대법원에서 지난 5월 1일 고법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한 ‘파기 환송’을 결정한 때문이다. 이 사건은 2022년 9월에 기소가 되었다. 그리고 2024년 11월 15일 1심에서는 ‘일부 무죄’를 선고했고, 2심에서는 2025년 3월 26일에 ‘전부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2025년 5월 1일 ‘유죄 추정’의 ‘파기 환송’을 한 것이다. 보통 ‘선거법 위반’은 ‘6•3•3원칙’을 지킨다. 즉 기소에서 1심까지 6개월, 2심까지 3개월, 그리고 3심까지 3개월로 재판을 끝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이렇듯 ‘6•3•3원칙’을 제대로 지켰다면, 결말이 나는데 2023년 8월까지 마쳤어야 했다. 그런데 재판을 질질 끌다가 2024년 말부터 신속하게 처리하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재판 결과에 대하여 입법부가 사법부를 ‘사법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대법원장을 국회로 불러다 정치적 압력을 넣는 것은, 삼권분립의 요체인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라며 깔보는 것으로 국민들은 느낀다. 그러나 삼권(三權)은 어떤 것이 세고, 혹은 약하고의 순서가 없다(사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하여도, 법관들은 고도의 법률 지식과 그와 함께 법률 적용에 대한 훈련이 요구되는데, 국민들이 투표로 선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법원장은 국정감사에 나와 인사말만 하고 퇴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답변은 법원행정처장이 해 왔다.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으로, 사법부에 대한 예우도 있지만, 그보다도 국가의 ‘삼권분립’을 해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국회가 대법원에서 판사가 헌법과 법률과 양심적 법리를 따라 판결한 것을 가지고, 따져,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한다면, 모든 법관들의 판결은 부정될 수 있다. 그럼, 누가 국가기관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사법부를 흔든다고 사법개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법부의 수장을 망신 주어 내쫓으려고 한다고, 사법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과거 2018년 현 정권이 권력을 가진 집권 여당일 때, 당시 김명수 대법원장을 국정감사장에 내세워야 한다는 일부 야당 의원의 주장에 대하여 삼권분립을 이유로 반대하여 사법부를 옹호한 정당이 누구인가? 지금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걸핏하면, ‘무슨 개혁, 무슨 개혁’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정말 국민과 국가를 위한 개혁일까? 어느 언론인은 ‘집권 세력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일구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까. 집권층이 비난하는 이승만의 건국과 호국 및 교육입국, 박정희의 산업화와 자주국방이 없었다면, 식민지 피지배국에서 유일하게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한다. 사법부의 핵심인 일선 법관들은 상당히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법관들에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외부적 압력을 받은 적이 있나’라는 질문에 47.1%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14일부터 24일까지 10일간 전국의 법관 69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이다. 이때의 조사에 의하면, 법관들의 85%는 그 ‘부적절한 외부 압력을 국회로 보고 있다’고 한다. 또 외부 압력을 넘어 협박이나 위협을 받은 경우도 26.7%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법부를 지켜주는 것은 오히려 정치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국회가 사법부의 법관들에게 압력을 넣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대법원장을 증인석에 앉혀 법률적 판단에 대하여 시비를 한다면 그것이 사법개혁의 올바른 방향인가를 묻고 싶다. 오늘의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국내 정치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정치에서 보기 어려운 반(反)자유, 역(逆)민주의 수준 낮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의 국회가 국민을 대표한다고 믿는 이는 드물다. 국회는 본래의 주어진 기능을 민주당에 빼앗겼고, 민주당은 잘못된 운동권 세력과 스스로를 개혁의 딸이라 지칭하는 집단에 실권을 내주었다’고 개탄하고 있다. 국회나 행정부는 우리 국민들이 직법 선출한 권력이다. 그렇다면 현재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들은 그들을 뽑은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10-14
  • [토요시평] 목회자 구속은 한국교회의 문제다
    지난 8일 부산의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에 대하여 부산지방법원 엄 모 영장 전담 부장 판사는 ‘도망의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선거법 위반 등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발부하여, 현직 목회자를 구속하였다. 이에 대하여 법조계에서도 ‘종교인을 무리하게 구속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와 종교 지도자를 탄압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손현보 목사가 ‘세이브코리아’를 이끌며, 윤 전 대통령의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하고, 교육감 후보자와 대담한 것을 유튜브에 올린 것은 맞지만, 이것을 ‘괘씸죄’로 여겨, ‘도주로 간주하며’ 현직 목회자를 구속한 것이라는 견해들이 많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손현보 목사의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은 국가를 위한 것으로, 성직자는 국가와 권세를 가진 권력자들이 잘못할 때, 얼마든지 신앙과 양심의 소리를 낼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랬고, 역사 가운데 선각자들이 바르고 옳은 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종교 지도자의 외침은 정치인들의 정치적 손익계산과는 사뭇 다르다. 오로지 국가의 안위와 발전과 안정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발로(撥路)이다. 현재 사법부는 삼권분립의 해체 수준을 당하고 있다. 그만큼 사법부가 법률 적용과 ‘법치주의’를 제대로 견지하지 못하고, 정치권에 휘둘려 온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정치권이 사법부를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사법부는 왜 목회자는 감옥에 가두면서, 권력자들에 대한 재판은 중단하고 있는가? 누구는 법 위에 서 있고, 누구는 법 아래 두는 것인가? 한국 기독교계는 이번 사건을 ‘정치 운운’으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분명한 종교와 표현과 양심에 대한 탄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직 목회자도 현행법에 저촉을 받아야 되는 것은 맞지만, 손현보 목사는 얼마든지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나 판결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 현직 목회자를 도망갈 수 있다는 추측으로 구속하는 것은 종교와 양심에 대하여 재갈을 물리며, 자신들이 지향하는 권력의 세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신(人身)구속으로 고통을 준다는 사인이며, 증거로 본다. 여기에 침묵한다면,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공정에 대하여 입을 닫아야 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복음 전래 이후 140년 동안 오직 ‘애국의 종교’였으며, 근현대사에서 이 나라 발전의 기틀이었고, 근간이었다. 학교, 병원, 복지시설, 인권, 생명 사랑, 남녀평등, 평화, 자유민주주의가 형성되는데 대단한 동력(動力)이 되었다. 따라서 권력에 의하여 종교 탄압을 받는 것을 방관하지 말고, 이 땅에 양심 세력, 하나님에 의한 통치와 질서가 세워지는 것에 협력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누가 바르고, 옳고 정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어쩌면 기독교가 우리 사회를 떠받드는 마지막 보루(堡壘)가 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사건은 단순히 어느 지방 목회자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선거법 위반 사건’이 아니라, 언제라도 권력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무릎을 꿇리려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방치하면, 다음은 내 차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성직자들은 불의와 부정과 부패와 독재에 대하여 못 본 척, 못 들은 척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몰지각한 목자들을 꾸짖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사56:10)라고 책망하신다.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마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公法)을 외쳐야 한다. 정부와 사법 당국은 과도하게 목회자를 인신 구속한 것을 사과하고, 속히 석방시키며, 다시는 이런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유념하기 바란다.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제대로 지키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사회였다면, 굳이 목사들이 나서서 이 나라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자들은 양심 세력의 목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려 하지 말고, 그 소리를 진심으로 들어 주기 바란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제2, 제3, 그리고 수많은 손현보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10-13
  • [기자수첩] 합동중앙의 정통성과 김록이 목사의 복귀
    최근 양평힐링기도원 제2성전 건축으로 한국교회 재부흥의 깃발을 내건 김록이 목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양평힐링기도원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현장 집회가 연일 대성황을 이루는 것은 물론 김 목사의 유튜브 채널은 이미 10만명을 넘어섰다. 온라인에서 그의 영향력이 이미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주목할 것은 이미 충분한 유명세를 구축한 김 목사가 돌연 지난 9월 총회에서 그의 모(母)교단인 예장합동중앙(총회장 권필수 목사)으로 복귀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신학목회연구원의 제3대 총장과 재단영구이사장직으로 말이다. 이런 김 목사의 선택이 의아스러운 것은 이미 그는 한국교회 최대교단에 올라선 예장백석총회에서 매우 안정된 목회를 보장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굳이 극한 난장에 놓인 합동중앙에 올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합동중앙 출신의 김 목사는 일전에 백석총회에 새둥지를 트고 본격적인 힐링 부흥, 힐링 목회를 시작했다. 한국 장로교 재통합의 기치를 내 건 백석총회는 장종현 목사의 영향 아래, 중소교단을 흡수하며, 엄청난 교세 성장을 이뤘고, 이제는 예장합동측과 더불어 국내 2대 교단 반열에 올라섰다. 여기에 김 목사는 최근 양평힐링기도원 제2성전을 구축하며, 무너져 가는 기도원 문화의 유일한 돌파구로 주목받던 상황, 여기에 더해진 백석총회라는 배경은 김 목사의 기도원 성공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열쇠였다. 하지만 김록이 목사는 안정된 성공을 뒤로하고, 올해 9월 합동중앙으로 돌아왔다. 교단은 지난해 분란과 이탈측의 여파로 여전히 어수선하고, 재정, 행정 모든 면에 있어 백석총회와 비교가 불가했지만, 굳이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다. 김 목사가 지난 9월 총회에서 밝힌 복귀의 이유는 복잡한 듯 했지만 매우 간단했다. 모 교단에 대한 책임과 사명, 무엇보다 애초 백석총회로 간 것이 합동중앙으로의 복귀를 염두한 결정이었음을 강조했다. 마치 조선시대 선진문물을 공부하기 위해 고된 청나라 유학을 자처했던 학자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백석총회에서의 경험과 한국교회 재부흥의 선두로 주목받는 그의 이력은 새로운 회복을 준비하는 합동중앙에 있어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 마치 하나님이 예비하셨던 계획인 듯, 그의 복귀는 교단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그가 필요로 하던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 무엇보다 교단 회복의 핵심으로 꼽히는 신학목회연구원의 제3대 총장까지 맡았다. 그의 영향력은 위에서 주지했듯 오프라인은 물론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만큼, 김 목사의 이름값이 교단 신학교에 입혀질 수 있다면, 그 시너지는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근래 계속되는 김 목사를 향한 근본없는 일각의 시비다. 그의 신학성을 운운하며, 시비하는 일각의 행태는 정당함보다는 질투(?)에 가깝다. 이미 김 목사는 백석총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신학의 건전성을 검증 받은 인물임에도 말이다. 백석총회는 근래 교단 규모가 급작스레 커지며 나타난 부작용을 예방키 위해 여타 장로교단과 달리, 교회 및 회원 관리를 단순히 노회에 맡기지 않고, 총회가 직접 일일이 검증한다. 김 목사 역시 백석총회에서 신학적인 부분을 매우 면밀히 검증받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지난 7월 양평힐링기도원 제2성전 입당 예배 당시 백석총회 이단대책위원장 박계환 목사도 이 부분에 대해 "김록이 목사의 신학적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항간에 일고 있는 불필요한 시시비비에 대해 백석총회의 이름으로 모두 거짓임을 확인해 준 셈이다. 사실 김 목사에 대한 이런 불편한 시비는 김 목사 자체에 대한 이슈라기보다 현재 합동중앙이 처한 상황의 여파로 보여진다. 지난해 합동중앙은 일부 인원들의 이탈로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고 강용식 목사가 설립한 합동중앙총회는 지난 역사에서 수차례의 분열을 겪으며 정통성에 대한 부분이 매우 중요한 교단이 됐다. 지난해에도 교단 이탈이라는 혼란 속에 이종남 총회장이 고군분투하며, 합동중앙의 정통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그런 합동중앙에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갖춘 김록이 목사의 복귀는 합동중앙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고자하는 누군가에게 매우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교계 연합단체들에 이를 문제삼는 이간질(?)이 횡행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합동중앙은 예전에 비해 교세가 현저히 적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자생교단’으로 성공한 사례적 측면에서 한국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한국교회 최고 부흥을 이끌던 오산리, 용문산, 한얼산 등의 기도원 문화를 다시 살리는 것은 회복을 고민하는 한국교회에 있어 반드시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적 가치가 불필요한 시비에 희생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5-10-09
  • [사설]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 구속 사태를 보고
    부산지방법원은 지난 8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를 이끌던 세이브코리아 대표 손현보 목사를 공직선거법 위반협의로 구속했다. 손 목사가 유튜브 등을 통해 부산시 교육감 사전선거운동에 개입해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예장고신측 부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지난 봄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정국을 맞아 전국적으로 탄핵반대 집회를 대대적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손봐야 할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찍힌 것으로 보인다. 손현보 목사의 세이브코리아 운동은 한국기독교 목사로서 그 양심에 따라 나선 선한 행동이다. 이만한 결단력을 가진 목사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손 목사를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 시킨 것은 종교의 자유를 심대히 침해하며,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양심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고신측 뿐 아니라, 모든 한국기독교가 손 목사에 대한 구속의 부당성에 대해 항의해야 한다. '우리 교단과는 관계가 없다, 또는 내 생각과는 달라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일원으로서 옳은 태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교파나 교단이 달라도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오만한 정치세력, 부패한 사회를 향해 끽소리도 못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벙어리 개'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 꾸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사 56:10). 이 말은 이 시대 목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 시대는 정치집단이 모든 국민의 생활을 좌지우지 한다. 콩나물 값 하나, 두부 한 모도 정치권의 결정에 좌우된다. 모든 국민의 삶을 정치가 좌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치세력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언론뿐 이니라, 모든 국민이 관심 가져야 할 중대한 사안이고, 특히 우리 사회의 정의를 대변하는 종교의 몫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회자 또는 종교인들이 이런 사태를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남의 일로만 여기게 되면 언젠가는 그 불길이 한국교회 전체로 번져 자신의 옷자락에도 옮겨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 독일 나치에 항거했던 우리가 익히 아는 마틴 니뮬러 목사의 시 한편을 인용한다. "처음에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또 사회주의자들을 잡으로 왔을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시 노동조합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또다시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이제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70-80년대 정치권에 대해 그렇게 당당했던 한국교회가 왜 이처럼 주눅이 들었는지, 벙어리 개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다. '손현보 목사가 잘 난체 해서 밉다거나, 교단이나 교계의 동의도 없이 세이브코리아를 조직해 정치적 문제에 개입했다'거나 하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은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손 목사 구속에 대해 항의해야 마땅한 일이다.
    • 연지골
    • 사설
    2025-09-10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언행에 품위있는 지도자가 그립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근에 새로운 인물들이 국가의 공직자로서, 지도자가 되겠다고 국민들 앞에 노출이 되고 있다. 그들 가운데 과거에 자신이 행동하고 했던 말들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품위와 인격이 알려진다. 듣는 사람들은 ‘정말 그런 말을 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내용들도 있다. 그중에 부총리급인 교육부장관 후보자가 과거에 했던 말은 소름이 끼친다. 그는 전교조 출신 교사였는데,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에 참여하여 ‘잘 가라 병XX’이라고 했단다. 그해는 붉은 원숭이해라고 하여, 병신년(丙申年)이었는데, 그가 쓴 말은 그 해가 잘 가라고 했을까?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운동이 열린 세종문화예술회관에 딸과 사위와 함께 나왔다며, ‘박근혜를 구속하라’는 손팻말을 든 사진까지 SNS에 올렸었다. 그리고 201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격 사건을 맞아 ‘탕탕절’이라고 썼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그런 표현을 굳이 쓰고 싶었을까? 그리고 2021년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자녀 입시 비리 수사를 두고 ‘검찰의 칼춤’이라고 표현했다. 이때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실망하고, 심지어 같은 정치적인 성향을 가졌던 사람들도 여기에 분노하여, 떠난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를 동조하다니. 또 수행 여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3년 6개월 실형을 받은 전 지사에 대해서는 ‘사법 살인’이란 취지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진보는 인권을 중요시한다면서, 이렇듯 피해를 당한 여성에게 두 번 고통을 주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과연 교육부 수장이 될 자격이 있나? 그런가 하면 고용노동부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는 통일부장관의 발언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그는 민주노총에서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2011년 북한의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조문을 가기 위해 방북 신청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으로 전사한 우리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는 갈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고위 공직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과거 막말 행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사혁신처장의 막말들은 압권이다. 그는 유튜브와 SNS를 통하여 여러 정치인과 정당, 고령자, 장애인, 여성에 대한 막말을 서슴없이 해왔는데, 그가 사용한 말들은 옮기기조차 어렵다. 그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험한 ‘말 폭탄’을 사용해 온 사람이다. 또 엊그제는 국민들의 거센 반발과 비난 속에, 자녀의 입시 비리 등의 문제로 지난해 12월에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형기(刑期)를 반도 못 채우고 나온 전 법무부장관이 서울 강남의 비싼 고기집에서 식사를 하고, 된장국만 사진에 올려, 처음에는 사람들이 소박한 식사를 했다고 생각하다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의 ‘위선적 행동’에 분노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도자의 삶은 그의 언행심사(言行心思)를 통하여 다 드러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한 말들이 기록이나 영상으로 잘 남지 않았기 때문에 상세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요즘은 자신의 생각과 말을 자랑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SNS에 퍼트렸던 것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삽시간에 공개되고 잘못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그들이 일반인이 아닌, 고위 공직자라는 것이다. 과거 자신의 부끄러운 말들이 알려지고, 그것이 품위를 지키는 말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공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 또 국가의 품격은 어떻게 되는가? 성경은 말씀한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언13장 3절)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잠언18장 7절)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도 ‘입과 혀라는 것은 화와 근심의 문이요, 몸을 죽이는 도끼와 같다’고 했다. 아프리카의 모로코 속담에는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고 했다. 말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말과 행동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를 과연 지도자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바르고 품위있는 인격을 갖춘 지도자들이 그리운 시대가 되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08-27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대통령에게 손해 배상을 받는다?’
    최근에 1심 재판부에서는 전 대통령에게 정신적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들에게 1인당 10만원 씩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전 대통령에게 손해 배상을 인정한 첫 사례로, 이런 일들은 앞으로 어떤 형태로 변형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지난 2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단독의 이 모 부장판사는 국민 104명이 윤 전 대통령을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들에게 각각 10만원 씩과 지연손해금까지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당초 이번 소송은 현재 채 상병 특검의 특검보를 맡은 이 모 변호사가 지난해 12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하여 소송 참여자를 모집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이 변호사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참여하지 않은 국민의힘 의원 105명에 대한 항의 표시로, 소송 참여자를 105명으로 한정하여, 처음에는 주변의 지인들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불특정 다수까지도 포함했다고 한다. 이런 사태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또 다른 쪽에서 비슷한 소송을 준비하는 김 모 변호사는 이번에는 1만명 가량이 참여하는 2차 손해 배상 청구를 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그는 전 윤 대통령에 대하여 형사책임뿐만 아니라, 물질적 손해 배상까지도 엄중히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란다. 사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소송은 지난 2017년에도 있었는데,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하여 4,000명이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하여 자신들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손해 배상 소송을 진행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었다. 우리 사회는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 종종 벌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이런 현상들이 바람직한 것인지, 혹은 지나친 것인지 여러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타인으로 인하여 입는 정신적 피해는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을까? 정말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면, 물질로 배상이 끝나면 되는 것인가? 손해 배상을 청구하여 막상 돈을 받는다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쓰게 될까? 그리고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에 의한 손해 배상은 얼마나 될까? 국민들이 모두 손해를 입었다고 전직 대통령에게 소송을 건다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인들 가운데 특히 대통령을 지낸 분들 가운데 박근혜, 윤석열 대통령만 국민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줬을까? 대통령을 지낸 분들이 모두 국민들로부터 소송을 당하면 배상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또 지금도 대통령을 지냈거나, 현직에 있는 분은 나중에 과연 자유로울까? 우리 국민들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국민들이 선택하여 대통령을 뽑아놓고 그분들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대통령은 누가 있을까? 이런 판결을 해야 하는 법관이나 재판부는 언제나 동일한 잣대로 재판을 할까? 우리나라는 ‘법치주의국가’라고 하는데, 과연 법이 제대로 지켜주고 있으며, 모든 것을 충족시켜 줄까? 비록 현행법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용하는 국민들은 과연 현명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더욱 경직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전 대통령에 소송을 걸어 배상을 받는다 하여도 그것이 그리도 통쾌하고 즐거운 일일까? 또 법원은 계속하여 이번처럼 전 대통령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에서 원고들의 편을 들어주게 될까? 별별 생각들이 다 든다. 우리 사회에는 각계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영적,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종교 지도자가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외로 크다고 본다. 과거 역사와 현재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보아도, 정치 지도자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 사례는 많다. 그래서 그들은 국민적 심판과 역사적 단죄를 받은 경우들이 많다. 정치 지도자에 대한 잘•잘못은 여러 기준과 판단 근거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정치를 성숙하고, 현명하고, 협치와 상생을 통한 잘하는 정치로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정치를 보면 답답함이 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지금은 별로 힘도 없고 권력도 미미한 정치인에게 쏟아붓는 비난과 모욕보다는, 실제로 큰 권력을 가진 세력에 대한 감시가 우선이 아닐까! 선진국의 대통령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국가의 일에 대하여 서로 협력하고, 중요한 행사에는 한 자리에 모여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럽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감옥’ 아니면 ‘원수지간’이 된다. 정말 우리나라는 선진 국가들처럼 할 수 없나? 국민들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는 없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08-07
  • [사설] 종교적 근본주의가 망가뜨린 나라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무력 충돌이 미국의 직접 개입으로 그나마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어 다행이다. 대체로 국가 간 충돌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끼리 다툰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이란은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이란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시오니스트라며 그 존재를 부정한다. 이스라엘은 시오니즘 운동으로 건국된 나라이니 시오니스트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란의 이슬람 시아파 종교지도자의 입에서 '시오니스트'라고 하는 것은 곧 이슬람에 대한 테러리스트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들린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란이 핵을 가지게 되면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 위협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핵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테러집단의 손으로 넘어갈 것을 우려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절대로 이란의 핵 개발을 용납할 수 없다. 이란은 문화와 역사가 깊은 나라이다. 일찌기 종교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팔레비 왕조까지는 친서방 정책으로 신생 이스라엘과도 잘 지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미국과도 외교를 단절하고 반서방노선을 견지하며 시아파의 맹주노릇을 자임하기 시작하면서 서방측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그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하면서 불량국가로 변질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말에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대로 중동의 모든 반이스라엘 테러리스트의 배후에는 이란이 있다는 말을 들어온 것이다. 서방과 대척점에 선 이같은 이란의 외교노선은 결국 이슬람 혁명을 빙자한 근본주의 종교지도자들의 권력 유지 수단과 맞물려 있다고 봐야 한다. 전 세계에 석유 수출로 국가 경제를 유지하는 이란은 외교가 중요한 나라인데도, 굳이 서방측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순전히 이슬람 근본주의 종교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이이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나 종교적 근본주의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면 결국 그 사회는 퇴보한다. 오늘날과 같은 탈종교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다민족사회인 이란의 경우 이슬람 시아파는 국민의 60%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슬람 종교정권을 떠받치고 있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으로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다. 특히 이번 미국의 적극적 개입으로 이스라엘과의 휴전이 이루어져 다행이다.
    • 연지골
    • 사설
    2025-07-17
  • [사설] 우리사회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원동력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4만불 시대에 이르고 있다. 이대로만 나아가면 수십년 내에 선진국을 넘어 세계로부터 문화대국이란 부러움을 살 수도 있다. 이미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을 찾아 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국내의 정치와 경제 상황이다. 오늘날 같이 정국이 불안정하고 보혁간 이념투쟁이 지속되면 경제활동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거기에다가 자칫 좌파 정권이 포플리즘 정책에 매달리게 되면, 공들여 쌓아온 외교와 경제가 타격을 받아 남미 베네수엘라 꼴로 전락할 수도 있다. 과연 대한민국이 일류국가로 나아갈 수 있느냐는 문제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이다. 국민의 절대적 각성이 필요하다.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에는 반드시 국민의 정신 수준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국민의 정신이 미개하면 아무리 애를 쓰도 문화적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종교적 가치관이다. 사회적 주류종교가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에 서 있느냐에 따라 국민의 정신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해방 후 이만큼 선진화 된 데에는 기독교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컸다. 세계종교에 유일신관을 가진 종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유대교이고, 둘째는 기독교이며, 셋째는 이슬람이다. 이 셋 다 성경의 아브라함의 유일신관에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기독교만이 세계화 인류화 되어 있을 뿐, 유대교는 유대인들의 민족종교에 지나지 않고, 이슬람은 아랍인들의 종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는 각 시대정신에 맞는 신학을 제공하고 있어 사회 정치 경제 발전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주류종교인 한국사회는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이다. 한국 개신교회는 약67%가 개혁파인 장로회주의 교회이다. 중세 종교개혁으로 파생한 개혁파 교회는 그 가치관이 그 어떤 기독교 종파 보다 뚜렷하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회는 몇 가지 극복되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기복주의이고, 둘째는 개교회주의이며, 셋째는 세속주의이다. 이런 신앙형태의 극복 없이는 종교적 미개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사회가 일류국가가 되고, 더 나아가 초일류국가가 되려면 먼저 주류종교인 한국교회의 신앙의식 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독교가 우리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원동력을 유지할 수 있다.
    • 연지골
    • 사설
    2025-07-17
  • [연지골] 선지자 사무엘
    ◇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광야 생활 중에 레위족에 속한 '고라'라는 인물이 있다. 이는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반기를 든 인물이다(민 16장). 고라는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인데, 그는 같은 레위족인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여 유력한 지휘관 250명과 함께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에게 "모든 회중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며 정면 대항했다. 이에 성경은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32-33)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호와께서 세운 지도자를 거스르는 자들이 어떻게 패망하는가를 보여주는 실예로 거론되는 사건이다(유 11절). ◇ 이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시기 사사 시대 말기 사무엘이란 선지자가 있다. 이 사무엘이 구약성경 사무엘서의 중심 인물이다. 에브라임 산지 사람 엘가나와 한나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얻은 사무엘은 실로의 제사장 엘리의 문하생으로 자랐다. 그는 사사요, 선지자요, 제사장을 겸한 특이한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사울 왕조를 탄생시키고 사울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판단되자, 곧바로 다윗을 왕으로 세워 다윗 왕조의 출범을 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무엘이 일찌기 모세와 아론에게 대적했다가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그 일족이 망한 고라 자손의 17대 손이라는 점이다(대상 6:33-37). 가히 반역으로 저주를 받아 멸족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집안의 후손이 사사이고, 선지자이며,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 초대 왕조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 사무엘은 젖 뗀 후에 그 부모가 서원한 대로 실로의 제사장 엘리에게 맡겨져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자랐다. 그리고 엘리가 죽은 후 제사장 겸 사사가 되었다(삼상 4:18). 제사장 직(職)은 본래 그 아들들에게 세습되는 직이었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하고 품행이 좋지 않아 일찍 죽고 그 직이 사무엘에게 맡겨진 것이다. 사무엘도 제사장 직을 이어 받을 수 있는 레위족이었기 때문이다. 사사 사무엘은 당시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던 이방 신들, 즉 바알과 아스다롯 등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신앙인이었다. 사무엘은 라마를 주거로 하여 벧엘, 길갈, 미스바 등을 순회하며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사무엘의 사사직은 두 아들들에게 세습되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지도자였던 사무엘도 그 자식들의 교육에는 실패하여 민원이 끝이지 않았다(삼상 8장). ◇ 레위족 고라는 특별히 여호와의 택함을 받아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여 대적하는 바람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모두 화를 당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자가 있어 집안의 대를 잇고 후대에 거기에서 이스라엘을 일으키는 큰 선지자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이고 은혜이다. 이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1:9).  
    • 연지골
    • 연지골
    2025-07-17
  • [기자수첩] 한국 기독교 140주년, 교회는 존중받고 있는가?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이라는 뜻깊은 한해를 보내고 있지만, 어째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다. 일부 교단과 단체가 1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이벤트를 진행키도 했지만, 사회는 물론 기독교 내부에서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계엄과 탄핵정국, 그리고 대선의 여파로 한국교회는 자연스레 시국의 이슈에 묻혀 조용한 축제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첫 발을 디딘 140년 전 이 땅은 가난과 불평등이 지배한 암흑 그 자체였다. 허나 모두가 포기하고 외면했던 그 곳에 하나님의 복음은 기적을 싹틔웠고, 한국교회는 전 세계 유례없는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최고의 교회들을 배출키 이르렀다. 1,000만명이라는 최대 집단, 최대 세력으로 성장한 한국교회는 단연코 대한민국의 가장 압도적인 주류가 됐다. 허나 오늘날 기독교의 사회적 입지가 심히 불안하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일군 절대적 공로자인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반국가 집단으로까지 매도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기독교 대다수를 '극우'로 몰며, 마치 한국교회가 국가의 가장 큰 골칫거리라 말하고 있다. 급기야 최근에는 교회가 선거법 위반을 빌미로 공권력의 압수수색을 받는 것도 모자라, 상당수 목회자들이 '내란선동'이라는 이유로 고발까지 당했다. 국가와 국민을 향한 자유로운 의사 표현조차 '내란선동'으로 매도되는 것은 지금 이 사회가 결코 정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여기에 굳이 이념의 잣대로 교회의 행동을 구분짓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순수한 애국심을 왜곡하기 위한 심히 의도적인 행위로 보아진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이라고 했던가? 지난 탄핵정국 속 전국을 그야말로 뜨겁게 달궜던 한국교회의 '세이브코리아'가 이제는 언론들에 의해 '극우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140년 전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는 의료, 교육, 경제 등 대한민국의 모든 토대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복음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결코 허세가 아니다. 굳이 기독교의 근대적 기여와 업적을 알아달라고 읍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건실한 애국조차 이념의 잣대에 짓밟혀, 조롱당하는 현실은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까지 됐는지에 대한 불편한 자문을 하게 된다. 물론 교회의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 것은 스스로의 잘못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교회를 향한 의도적인 공격과 왜곡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사회와 국민은 기독교의 업적을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무시해서도 안될 일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5-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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