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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대통령 취임식장의 인사(人事)법
- 지난 5월 10일 국회의사당에서는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이뤄지고(윤석열 대통령은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으로 분류되었고, 문 대통령 시절에 승승장구하여 검찰총장까지 지냈지만, 문재인 정권하의 절대권력을 수사한 것 때문에 갈등을 겪다가 결국 검찰총장직을 물러나고, 정치에 입문한 지 8개월 만에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음) 역사적인 취임식까지 거행하게 된 것이다. 위대한 국민이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직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되게 한 촛불세력에 의하여 탄핵되어 4년 9개월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풀려나서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전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아직도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과, 고 전두환 대통령 부인, 노태우 대통령 딸도 뒷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입장하기 전 다른 분들은 단상에 앉아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마지막으로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때 나는 문 대통령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전직 대통령과 다른 전직 대통령 가족들과 손이라도 잡으면서 인사를 나눌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문 대통령 내외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서일까? 무안해서일까? 미처 보지 못해서일까? 사실 그런 인사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자리가 아니면 좀처럼 나누기 어려운 기회일 것으로 본다. 전직 대통령과 물러나는 대통령이 지난 시간들 속에서 이유야 어찌 되었든,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여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했다면, 마음이야 어떻든지 간에 ‘미안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건강하십시요’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면 얼마나 국민들이 보기 좋았을까? 우리나라는 현재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하여 열세 분의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그중에 한 분은 망명지에서 돌아가시고, 두 분은 짧은 임기를 마쳤고, 네 분은 감옥에 갔었고, 한 분은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아직도 한 분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다. 국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었고, 국민을 위한 가장 큰 봉사의 자리에 있었지만, 결말은 불행한 경우들이 많았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때는 미국의 생존한 전직 대통령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국가 원로의 모습을 보일 때,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그것이 왜 안 될까? 우리나라는 정치적 견해가 다르고, 정당이 다르면 마치 원수 대하듯, 특히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았던 분들이 정치적 견해의 다름으로, 줄줄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면 민망하다. 정치색이 다르다고, 후대의 잣대로 선대의 지도자를 평가하여 문제가 있다며 보복을 한다면, 이는 국민이 불행하고 국가의 품격이 떨어진다. 역대 대통령을 지낸 분들도 그 당시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 아닌가? 또 나름대로 업적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적을 대하듯 하는 모습은 어쩐지 슬픈 일이다. 그저 한 자리에 어렵게 모였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분이 거침없이 손을 내밀고 짧은 인사라도 나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면에 취임하는 대통령과 부인은 깎듯이 직전 대통령과 전임 대통령을 예우하는 것을 보았다. 온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넓은 마음으로 덥석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아량이 있다면, 대통령들이 국민통합이니, 협치니, 상호 갈등 해소니 하는 정치공학적이고 공허한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국민들 앞에서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실제 모습은 아닌 것을 보노라면, 우리나라 정치가 지금까지 저래왔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걱정이 된다. 정치가들은 흔히 국제적으로 유명 정치인이 사망하면, 조문(弔問)을 가는데, 그곳에서도 각국의 정상 사이에 ‘조문 외교’가 벌어진다. 국제회의에 참석하면 역시 그곳에서도 ‘막후 외교’가 벌어진다. 정치를 하는 분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고 본다. 그런 감각이 있다면,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경축의 자리에서 어찌 ‘경축식 인사’나 ‘취임식 인사’로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까? 성경에 보면, 화평하게 하는 것, 화목하게 하는 것, 용서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말씀한다. 대통령을 지낸 분들은 자신의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온 국민의 대통령이며, 국민 대통합의 정신과 자세를 항상 잃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의 인사법,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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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대통령 취임식장의 인사(人事)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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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부차 민간인 학살 만행 유엔과 서방세계에 책임있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결국 21세기에 상상할 수 없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세계는 러시아 군대의 부차 학살 현장을 보고 민간인 학살을 막지 못한 유엔의 존재 의미를 묻고 있다. 부차 뿐 아니라 다른 도시와 농촌에서도 민간인 학살과 여성에 대한 강간 살해가 계속 보고되고 있다. 아마도 이 추악한 전쟁이 끝나고 나면 1950년 한국의 6.25와 같이 우크라이나에서도 수만 수십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나올 것으로 보여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인간은 그 속에 천사와 같은 착한 마음도 있고, 사탄과 같은 악마성도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세계관은 '인간이 중심'이라면서도 인간의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인간 속에 있는 영혼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 만물보다 고귀한 영적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에 인권의 존엄성 따위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구권에 자유주의의 바람이 일어나 많은 위성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할 때 더 이상 참혹한 전쟁은 없을 것이라 믿었는데, 러시아는 공산주의 시대의 발톱을 드러내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전세계가 이처럼 비참한 인권유린을 목도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거대한 유엔은 이를 막을 아무런 조치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우리 말에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러시아의 퓨틴과 같은 반인륜적 만행을 저지르는 범죄자에게는 유엔의 경제적 제재만으로는 이를 막을 수 없다. 전세계가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 러시아 자체를 조각 내 더 이상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무고히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는 결국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보여주는 것이 유엔이 할 일이 아닌가. 지금의 유엔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없다면 이를 해체하고 그런 힘을 갖는 기구로 다시 조직될 필요가 있다. 러시아군의 부차 학살 만행을 막지 못한 책임이 유엔과 서방세계에 있다. 원칙론만 내세우지 말고, 세계가 일어나 지금 당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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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부차 민간인 학살 만행 유엔과 서방세계에 책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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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삶과 부활
-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난 나사렛 청년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가 된 것은 그의 부활에 있다. 예수는 공생애를 통해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이적을 베풀다 유대교의 핍박으로 고소당해 로마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시신을 끌어내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고 돌을 굴러 입구를 막고 봉인했다. 영원히 그 안에서 썩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40일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다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리워 올라갔다. 이것이 복음서가 증언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초기 사도들과 제자들의 눈으로 본 체험을 증언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고, 그들의 공동체가 곧 기독교라는 종교집단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인류사회를 향한 메시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부활'에 있다. 고대로부터 인간의 부활을 상정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특별한 교리이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어떠한 존재와 구별된다. 유물론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은 인간론에 대해 "성자께서 창조한 영원한 세계는 영(靈)들의 세계이다. 이 영원의 세계에서 모든 영들은 동일한 영광과 덕으로 지음을 받았고, 모두 자유의지를 가지도록 창조되었다. 이 영들 가운데 어떤 것은 이 자유를 덕되고 고결하게 사용해서 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천사가 되었다. 또 다른 영들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남용해서 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마귀가 되었다. 그러나 또 천사들처럼 복종하지도, 마귀들처럼 불순종하지도 않은 제3의 영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인간이 되었다. 이들 모든 영들은 동일하게 창조되었다. 천사들을 위해서는 하늘이 창조되었으며, 마귀들을 위해서는 지옥이 창조되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는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라고 했다. 이처럼 인간은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단지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죄 아래 있어서 죽음이 필연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 존재여서 죽음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마지막 때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부활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는 선언이다. 오늘도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활에 참여하기를 기대하며 종말론적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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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삶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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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부활의 날인가, 부활 주일인가
- 올 해(2022년) 4월 17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과 '부활 주일'이 같은 날 겹친 날이다. 부활절을 ‘부활의 날’로 할 것인가, ‘부활 주일’로 할 것인가는 초기 교회의 논쟁 중에 가장 첨예한 문제였다. 주후 325년 니케아 이전의 교회는 두 가지 절기를 지켰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유월절(니산월 14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오순절 날에 이르는 오순절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유월절과 부활절은 가장 깊은 슬픔과 가장 높은 기쁨이 만나는 연속적인 행사로 연결되었고, 이를 '파스카 스타우로시몬'(pascha staurosimo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는 날은 '파스카 아나스타시몬'(pascha anastasimon)이라고 불렀고, 후에는 이를 '부활절'(Easter)이라고 했다. 파스카 스타로우시몬은 슬픈 금요일에 해당하고, 파스카 아나스타시몬은 기쁜 주일에 해당하는 날로서, 이 주간은 두 큰 사건을 기념하는 거룩한 주간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유월절 양'(고전 5:7)이 우리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예언적 예표로 이해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통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 받은 사건이 곧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가 구속될 일을 예표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의 유월절이 시작되는 니산월 14일 성 금요일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한 17일 부활절 전야까지는 금식 기간으로 지켜졌다. 이 때 교회에는 부활절 철야 기도회가 있었다. '부활절 철야'는 온 회중이 각별한 신앙심으로 새벽까지 철저하게 지켰다. 구속 사역으로 완성한 부활을 기념하는 날은 점차 기독교 유월절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부활절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유월절 시기와 금식일의 시기에 관하여 지역의 교회마다 관습의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로 인해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다. 소아시아 교회를 비롯한 동방 교회는 니산월 14일에 엄숙한 금식으로써 기독교 유월절을 지켰다. 그리고 금식을 마치는 17일에는 성찬과 애찬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기독교 유월절과 구속의 잔치를 베풀었다. 니산월 14일 저녁에 베푼 성찬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을 기념한 것이었다. 이 관습은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죽으셨다는 사상을 강력히 내포하고 있었다. 이들을 '14일파'라고 한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 또 다른 서방 교회들은 부활절을 음력 3월 보름 다음에 오는 주일 날(일요일)에 '부활 주일'로 기념했다. 이로 인해 초기 기독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부활의 날'에 기념할 것인가, '부활 주일'에 기념할 것인가를 놓고 오랜 기간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 문제는 교회 밖의 세상에서 볼 때, 교회의식의 통일성이 크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였다. 이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325년 제1차 세계기독교공의회인 니케아에서 부활절 문제를 논의한 결과 로마교회의 관습을 따라 춘분 이후(3월 21일)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첫 일요일을 '부활 주일'로 지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르면 부활절이 이르면 3월 22일부터, 늦으면 4월 25일 사이에 오게 된다. 그리하여 부활절은 '부활의 날'이 아니라, '부활 주일'에 지켜지도록 강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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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부활의 날인가, 부활 주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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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뻐꾸기 둥지에 얽힌 사연'
- 윤모촌 수필가가 <서울 뻐꾸기>란 이름의 수필을 쓴 적이 있다. 이를 표제로 한 수필집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만큼 <서울 뻐꾸기>는 꽤나 이름난 수필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문점이 없지 않다. 왜 하필이면 ‘서울 뻐꾸기’일까? 한국인들 모두의 새라면 ‘한국 뻐꾸기’도 될 수 있고, 그의 고향 이름을 따서 ‘연천 뻐꾸기’라고 했더라면 훨씬 더 정감이 느껴지는 그런 이름이 되었을 법도 한데 왜 하필 ‘서울 뻐꾸기’란 말인가, 의문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무 근거 없는 의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광섭 시인이 자신의 시 한 편에다가 <성북동 비둘기>란 이름을 붙여 발표한 적이 있다. 성북동이 서울의 한 동네이니까 만일 그 시에다 ‘서울 비둘기’란 이름을 붙여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도 되지만 왠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름인 것 같다. 역시 그 시는 <성북동 비둘기>여야 했다고, 역시 근거 없는 단안이 한 순간 내려진다. 마찬가지로 윤모촌의 수필에다가도 ‘성북동 뻐꾸기’, 또는 그가 살았던 어떤 동네 이름을 붙여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번엔 예상 밖으로 신속하게 ‘역시 <서울 뻐꾸기>여야 해’, 라는 근거 없는 확답이 따라 나오고야 만다. 결국은 기성 명칭이 지니는 기득권의 위력이 그만큼 크다는 결론 아닌 결론이 나오고야 만 셈이다. 윤모촌의 <서울 뻐꾸기>는 뻐꾸기란 새의 아주 어렸을 때의 배은망덕的 만행(?)에 대하여 리얼하게 묘파해 놓고 있다. 남(개개비)의 둥지 속에서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것이 어찌 못되게 구는가를 그는 이렇게 그려 놓은 것이다. “털도 나지 않은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필사적으로 개개비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천길 만길 아래로 밀어내뜨리는 것이다. 저를 품어 키우는 은인의 알을 하나도 남김없이 밀어내고, 그놈은 개개비의 품을 독점하는 것이다.” 실로 사람들의 심금을 휘어잡는 구슬픈 울음을 울어대는 뻐꾸기의, 선천적으로 못된 습벽(習癖)을 이 수필이 완전히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았다고 보겠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습벽’이란 말을 풀이해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행동, =버릇”이라고 했는데, 이 말 풀이처럼 알에서 먼저 깨어난 어린 뻐꾸기가 주인(은인)인 개개비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의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못된 행동(버릇)’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수필(‘서울 뻐꾸기’)의 작가인 윤모촌은 이해하기 힘든 이 동물을 가리켜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이라고 하면서도, 이어서 또 이렇게도 반응하였다. “알 수 없는 것이 조물주의 그 조화”라고 말이다. 또 비슷한 이런 표현, 곧 “배은망덕으로 생존을 잇게 한 신의 의지와 섭리가 알 수 없는 일”이란 해석(표현)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제목에 의할 것 같으면 새들의 둥지에는 ‘개개비 둥지’만이 있는 게 아니라 ‘뻐꾸기 둥지’란 것도 있어서 다른 새(이를테면 개개비 같은 새)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게 한다. 나는 생물학자도, 조류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개개비 둥지’ 아닌 ‘뻐꾸기 둥지’란 게 따로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한다. 켄 키지의 소설에 ‘뻐꾸기 둥지’란 말이 분명히 쓰인 것을 보면 그런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으로만 쓰이지 실제로 ‘뻐꾸기 둥지’ 같은 게 있을 리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뻐꾸기는 개개비 둥지에서 실제적으로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 새이기 때문에 따로 무슨 ‘뻐꾸기 둥지’ 같은 것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켄 키지의 그 소설 속에서도 무슨 뻐꾸기 둥지라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단지 은유적 공간으로만 그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사례로써 분명한 실증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즉 ‘뻐꾸기 둥지’는 하나의 은유적 공간일 뿐이다, 라고 말이다. 실제로 ‘뻐꾸기 둥지’는 그 소설 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못된 뻐꾸기들이 득실거리는 권력집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 집단이 뻐꾸기 둥지로서의 성격을 지닌 이상, 그 구성원들이란, 개개비를 이유 없이 밀어내는 뻐꾸기와도 같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근성의 소유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이 될는지도 모르겠고, 또는 그들에게 “배은망덕으로(라도) 생존을 잇게 한” 조물주(神)의 섭리마저 의심케 만들 그런 존재가 되고 말지, 우리는 오늘의 ‘서울 뻐꾸기’들의 앞으로의 행태를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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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뻐꾸기 둥지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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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찬수 목사는 ‘동행’이 아닌 ‘독주’를 바랬나?
- 설교 내내 이어진 비판과 지적에 불편함 가중 새에덴교회 향한 도를 넘는 우려에 성도들 경악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10일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에서 한 설교를 두고 교계의 논란이 뜨겁다. 시종일관 이어진 기도회와 목회자에 질타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도회가 열린 새에덴교회를 빗댄 극단적 비유에 일각에서는 이를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이라 비판하고 있다.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은 일개 교단의 프로젝트를 넘어 지난 6개월 간, 총 14개 지역, 163개 노회를 돌며, 그야말로 전국교회를 눈물과 회개의 장으로 이끌었던 만큼, 당연히 이날 새에덴교회에는 교계와 언론의 관심은 집중됐다. 문제는 2부 말씀을 전한 이찬수 목사의 설교자로서의 ‘시선’이었다. 앞서 1부 설교를 맡은 소강석 목사나 3부 오정현 목사는 ‘동행’이라는 취지에 맞게 자신의 스탠스를 참석한 모든 목회자와 동일한 위치에 고정했다. 하지만 이 목사의 시선은 묘하게 청중과 자신을 분리했다. ‘비판’과 ‘회개’, ‘각성’의 대상에 자신은 없었다. 그 예로 “기도회가 너무 화려하다” “진짜 이렇게 목회하면 안되는 것 아니냐?” 등 설교 곳곳에서 등장한 비판들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목회자들의 무지에 대한 지적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이 이찬수 목사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갈수록 더해가는 한국교회의 위기 속에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겹쳐 나온 한탄인 듯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를 듣는 목회자들의 불편함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정적으로 과연 그것들이 그렇게 불편하고, 비판할 일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이 목사는 기도회의 규모와 순서, 찬양의 웅장함을 오직 화려함으로 해석하며 이를 비판의 대상으로 봤지만, 흔한 일반적 시선에서는 그저 최고의 예배를 위한 노력의 결과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 가장 최고의 것을 드리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지극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과시욕’으로 치부하는 것은, 몇날며칠을 기도하며 준비한 이들의 노력에 대한 폄훼일 뿐이다. 여기에 새에덴교회의 예배당이 50년 후에 텅텅 비어, 술집으로 쓰일 수 있다는 극단적인 우려를 내놓으며 정점을 찍었다. 당시 예배당 안에는 다수의 새에덴교회 성도가 함께 했던 상황, 아무리 그 의도가 좋다 하여도 상황과 자리에 맞지 않는 도를 넘는 발언은 결코 존중받을 수 없는 법. 이를 두고 한 언론은 참석했던 목회자의 말을 빌려 “새에덴교회에 대한 모욕이자,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키도 했다. 한 사람의 설교에 눈물과 무릎으로 함께 달려 온 지난 6개월의 대장정이 한순간에 그 빛을 잃었다. 스스로 깨어있음을 증명하고자 남을 깎아내리고 비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건만, ‘동행’이 아닌 ‘독주’를 택한 듯 보인 그의 설교에 어떠한 배려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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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찬수 목사는 ‘동행’이 아닌 ‘독주’를 바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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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새로운 정부가 유의해야 할 대목
-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결과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1636만표(48.57%) 표를 얻어 1611만표(47.81%)를 득표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0.76%(25만 여표) 차이로 당선됐다. 이로써 20년 집권을 말하던 좌파 운동권 정권은 5년 만에 물러나고 우파 정권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그러나 국회는 아직 좌파 운동권이 주도하는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선거운동 기간 동안 정치권이 무속과 신천지 등을 끌어들여 우리사회에 종교문화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종교자유를 위축시키고 우리사회를 분열시키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무속이든, 신천지든, 종교 문제는 종교계 내부의 문제로 남겨 두어야지, 애초에 정치권이 나서서 이러쿵 저러쿵 휘둘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종교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그것은 믿는 자의 절대신념체계이고,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대표적 다종교사회이다. 다종교사회란 말은 우리사회를 대표하는 뚜렸한 주류종교가 없이 여러 종교전통이 엇비슷하게 그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엇비슷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종교적 현상을 드러내는 민족종교 또는 무속종교 및 기성종교에서 파생한 분파적 현상들이 뒤섞여 있다. 가히 한국사회를 향해 종교박물관이라고 부르는 말이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의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나 혐오는 적절치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나 사회적 가치관은 그 사회의 주류 종교 또는 지배 종교에서 나온다. 종교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의 주류 종교의 정통성과 건강성이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 가치관을 공급하는 주류 종교가 기복화 되거나, 세속주의화 하여 본래적 가르침에서 일탈하게 되면 그 종교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도 가치관의 혼돈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교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사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종교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인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가치가 종교의 자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건강한 문화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사회 모든 영역에서 종교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고, 종교가 폄훼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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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새로운 정부가 유의해야 할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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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언더우드 기념관
-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총회가 에큐메니칼(통합측)과 엔에이이(합동측)로 갈라진 이후, 한국교회에서 최근 하나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쾌거를 이룬 사건이 있었다. 지난 2월 8일, 통합측 서울노회 소속의 경신학원(이사장 이효종)과 합동측 경기노회 소속의 혜화동 혜성교회(담임목사 정명호)가 이룬 '언더우드 기념관' 준공식이 그것이다. 지상 3층, 지하 4층, 연면적 3,500여 평 규모의 언더우드 기념관은 혜화동 서울성곽을 끼고 자리잡고 있는 경신중고등학교(교장 신광주) 부지에 들어선 체육관 및 교육시설이다. 여기에는 강당(예배당), 체육관, 주자장 등이 들어서 있다. 주일에는 혜성교회의 예배실과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이 건물은 경신학원이 부지를 내고, 혜성교회가 건축비를 담당해 136년 전 이 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이름으로 준공한 것이다. 경신학원과 혜성교회는 언덕 위에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이 언더우드 기념관은 설계에서부터 내외부 설비와 완공까지 혜성교회가 건축비 250억원을 들여 준공해 경신학원에 기증했다. 1,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은 평일에는 학교가 사용하다가 주일날에는 혜성교회가 에배당으로 사용한다. 학교측과 교회측이 이같은 시설 건립을 계획하게 된 배경은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학교 운동장이 잔디구장으로 바뀌면서 주일날 학교 운동장을 이용하던 혜성교회가 주차 공간이 사라지자 학교측과 협의한 끝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학교측은 숙원이던 강당과 체육관이 마련되고, 교회측은 주차장과 새로운 예배당이 확보된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학교와 교회가 서로 필요에 의해서 강당을 지어 학교측에 기증하고, 주일날 교회가 사용하는 사례는 더러 있어왔다. 그러나 이번처럼 교단이 다른 학교측과 교회측이 서로의 필요를 위해 윈윈하게 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장로교회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이라고 불리우는 두 교단은 1959년 제00회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로 논쟁하다, 서로 간에 사소한 감정을 넘지 못하고 에큐메니칼운동의 주체인 WCC를 지지하는 'CAL측'과 미국 복음동지협의회를 지지하는 'NAE측'으로 갈라졌다. 그 후 칼측은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하고 '통합측'이라 불렀으며, 엔에이측은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하고 '합동측'이라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교단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개혁주의 신학과 개혁파 신앙고백의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갈라져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장로교파이다. 그런데도 이 두 교단의 답답한 지도자들 중에는 마치 상대를 이단시 하며 거부해왔다. 그래서 한때는 양 교단 목회자 간의 강단교류를 아예 금지하는 등 형제를 정죄했다. 그런데 이번에 두 교단 간에 성취된 에큐메니칼적 업적은 한국교회의 하나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곳곳에서 이런 사업이 논의되고 성취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바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라고 함과 같은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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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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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언더우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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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진보가 보는 진보의 몰락?
-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야당 후보의 0.73%포인트의 승리였다. 이는 야권이 정권을 잡는 것이기도 하지만, 5년 만에 진보 정권의 재집권 실패이기도 하다. 대략 진보건 보수건 10년 정도는 집권하는데, 이번에는 5년 만에 깃발이 넘어간 것이다. 사실 야당은 5년 전 당시 현직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면서 지리멸렬했다고 본다. 오죽하면 당에서 인물을 뽑지 못하고 정치 신인인 여당 쪽의 공직자였던 사람을 대선후보로 선택했겠는가? 반면에 여당은 야당에 비하여 많은 것에서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여당이 참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야당 후보가 주장한 ‘공정’과 ‘상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출범할 때, 과정과 결과가 공정할 것이란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는가? 그러나 그런 정치적 주장과 실제 행태는 너무나 달랐다. 현 정권의 이념적 색채는 어떨까? 2018년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리셉션에서 문 대통령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가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일종의 사상적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미국의 부통령, 일본의 수상, 북한에서 온 손님들도 있었다. 그만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동조 세력이 있다는 것이었나? 이 정부의 사상적 이념적 색채는 좌파·진보이며, 종북에 가깝다. 현 정부는 왜 5년 만에 대권을 내주게 되었는가? 그것도 정치에 입문한 지 8개월밖에 안 되고 현 정권에서 충성했다 하여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던 사람에게 말이다. 이것은 진보의 가치를 잃어 버린 때문이 아닌가? 이를 소위 ‘진보’라고 불리는 인사들의 말을 통하여 들어보자. 진보 논객으로 유명한 전 동양대 진중권 교수는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라는 책의 표지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자신들이 정의라는 독선, 공정을 무시하는 반칙과 특권, 자기들도 믿지 않는 평등의 위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조국(曺國-청와대 민정수석, 법무부장관 역임) 사태로 진보는 파국을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이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진보 전체의 죽음으로 느껴진다’고 평가한다. 고 박원순 씨는 인권변호사, 참여연대를 설립한 시민운동가, 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사람이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한 것은 위선이며, 어리석음으로 보고 있다. 진 교수는 진보가 이 사회를 폐허로 만드는 것을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 찬스’는 기회의 평등함이 되고 ‘문서위조’는 과정의 공정함이 되었고 ‘부정입학’은 결과의 정의로움이 되었다고 꼬집는다. 진보의 가치는 전도되고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 피해자 행세를 하며 그것을 적발한 검찰과 그것을 알리는 언론을 질타하는 것, 이 적반하장은 문재인 정권하에서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고 개탄한다. 역시 진보 언론학자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싸가지 없는 정치”(싸가지는 욕설이 아닌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를 속되게 하는 말로 해석함)에서, 문재인 정권의 문제점을 ‘싸가지 없음, 오만하다. 기존의 제왕적 대통령제와 청와대 정부가 심화(싸가지 없는 정치)되었고, 이의(異義) 제기마저 가로막는 열성 지지자 집단의 검열 활동이 성공한데 큰 책임이 있다’고 설명한다. 또 현 정권을 둘러싼 586운동권 문화는 ‘개인숭배 문화’가 있고, 거기에다 ‘진보의 완장화’가 있어, 싸가지 없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판단이다. 그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주장이 있으면 비아냥대고 저주를 퍼붓는 문화가 있는데, 개인을 숭배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 써먹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고 진단한다. 또 있다. 자신을 한 때 ‘묻따민’(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민주당을 찍는다)이라고 소개한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의 유성운 기자는 “사림, 조선의 586”이라는 책에서 조선 시대 당파 싸움을 주도했던 사림(士林)들과 현재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핵심인 586세대를 비교하면서, 공통점을 찾는다. 그는 ‘기득권층을 성토하면서 정작 자신들도 기득권층의 행태를 똑같이 따라 하는 것, 특정 가치관에 매몰되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눈을 감고 엉뚱한 정책을 펴는 것, 그리고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자신들만의 매트릭스를 꾸며 놓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또 대통령을 비판하면 ‘무엄하다’고 꾸짖는 행태를 보인다고 고발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진보정치의 모습이다. 물론 이번 대선에서 졌다고 진보계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를 자처하는 권력과 세력은 아직도 기세가 등등하다. 그러나 진보의 참된 가치를 잃어버린 세력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현재도 엄청난 권세를 가진 진보세력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양식 있는 진보 인사들이 보기에도 가치를 잃어버린 진보의 행태는, 보수 세력을 ‘적폐’로 몰았던 그 여세가 자신들을 들이치는 부메랑이 되지는 않을까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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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진보가 보는 진보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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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연합’에 목숨걸던 한기총 어디갔나?
- 임원회 ‘절차상 하자’로 재개최 불가피 WCC 소속 교단 이유로 통합 거부하는 것은 ‘억지’ 한기총 설립 예장통합측 한경직 목사 주도 한기총 설립 정체성은 오직 연합, WCC 논쟁 없었다 한기총-한교총 간 ‘통합 기본 합의서’를 부결시킨 한기총 임원회에 제기된 ‘절차상 하자’ 이의가 사실로 확인되며, 임원회 재개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회의에 보고되지 않은 인원들이 대거 의결에 참여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만큼, 더 큰 혼란과 법적 다툼을 막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 임원회를 재개최하는 것만이 유일한 최선이다. 그런 상황에 다시금 관심을 모으는 것은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다. 앞선 임원회에서 한기총-한교총 간 ‘통합 기본 합의서’가 부결되며, 사실상 ‘통합 무산’이라는 씁쓸한 결말을 맺는 듯 했으나, 해당 임원회의 명백한 하자가 드러나며,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는 극적인 부활을 이뤘다. 관건은 ‘WCC’다. 한기총 내 일부 회원들은 한교총 회원 중 WCC에 소속한 교단이 있다며, 한교총과의 통합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WCC는 한국교회 분열의 시작이자, 보수-진보 대립의 상징과도 같은 주제, 그런 만큼 이번 통합 프로젝트의 논란이 될 것을 예측 못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마냥 받아들이기에는 눈에 보이는 의도 가득한 억지가 이를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다. 물론 WCC는 보수교회에서 있어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영역이다.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에서 WCC로 인해 합동-통합(장로교), 예감-기감(감리교)이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고, 기성-예성(성결교)은 WCC와 신앙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NCCK 가입을 놓고, 분열하고 말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WCC가 몰고 온 한국교회의 상처이자, 불행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상처와 불행을 치유코자 초교파적 연합운동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NCCK가 있긴 했지만, 너무도 진보 일색인 탓에 한국교회 전체의 의견을 담아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이에 교계 주요 지도자들이 정치와 이념을 초월한 연합기관 설립에 손을 모았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즉 한기총이었다. 한기총이 보수색채를 띄기는 했지만, 그것은 NCCK와 대비되는 측면에서 유독 부각된 것이었고, 실제는 매우 중립적이었고 이성적이었다. 애초에 보수교회를 대변한다는 것보다는 한국교회를 대변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기에 결코 어느 한쪽에 일부러 치우쳐질 필요도 없었고, 특정 세력 혹은 교단을 배제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 한기총의 일부 임원들이 예장통합측과 함께 할 수 없다며, 한교총을 거부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기총을 설립한 이는 다름 아닌 예장통합측의 한경직 목사였다. 그 이후로도, 김기수 목사, 박종순 목사, 이광선 목사 등 통합측의 지도자들 다수가 한기총의 대표회장을 맡아 한국교회를 이끌었었다. WCC로 인한 한국교회 분열의 상처를 치유코자 만든 한기총에서 당연히 WCC는 논란의 이유도, 주제로 거론될 필요도 없었다. 한기총이 ‘반WCC’ 기조를 갖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한기총-한교연의 분열과 그 즈음 대표회장에 오른 홍재철 목사의 탓이 크다. 홍재철 목사는 예장통합, 기성, 백석 등이 한교연으로 빠져 나간 한기총을 자기 신앙적 정체성에 맞춰 완전한 보수단체로 새로이 구축했다. 여기에 당시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궜던 ‘2013 WCC 부산총회’에 맞춰 한기총을 ‘반WCC’의 대표 단체로 만들었다. 중대형교단이 대거 빠져나가며, 대표성을 잃은 한기총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며, 존재감을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 홍재철 목사는 반WCC에 대한 부분을 한기총 정관에까지 삽입한다. 설립 당시의 한기총 정관과 완전히 달라진 당시의 정관을 일부 관계자들이 ‘홍재철 정관’, 혹은 ‘홍정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임원회에서 홍재철 목사는 자신이 만든 ‘홍정관’을 앞세워, WCC 회원교단과 함께할 수 없다는 이유로, 통합 거부 여론을 주도했다. 그리고 이 여론에 경도된 상당수 임원들이 ‘반대’에 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런 선택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 엄밀히 이들은 WCC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WCC에 속한 회원교단이 가입되어 있는 한교총을 거부했다. 이를 WCC 거부로 받아들이기는 너무도 억지스럽다는 것은, 사실상 한국교회에서 WCC에 속한 예장통합, 기감 등과 섞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이를 어느 곳에서도 문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선교단체, 지역연합회, 복지, 교육 등 한국교회 어느 단체를 가든 통합, 기감의 교회는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당연히 한기총의 임원들 역시 또 다른 단체와 영역에서 통합, 기감과 함께하고 있고, 이에 대해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고 있다. 유독 한기총에서만 통합과 기감 자체를 이단시 하며,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집단인 듯 말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과 함께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절대 이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듯 말하는 억지를 범하는 것이다. “한기총은 다르다” “한기총만은 반WCC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가? 헌데 위에서 말했듯 한기총의 본래 정체성에 ‘반WCC’는 없다. 한기총은 WCC를 포함한 각종 분열로 상처입은 한국교회를 하나로 엮기 위해 나온 연합단체다. 그리고 지금 본래의 취지를 잃고 다시 분열된 연합단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기총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은 분열의 지속인가? 아니면 연합의 회복인가? 한국교회 대통합이라는 역사적 사명 앞에 한기총 임원회의 전향적 고민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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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연합’에 목숨걸던 한기총 어디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