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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2023년 새로 쓰는 ‘토끼와 거북이’이야기
- 2023년 금년은 토끼의 해이다. 조선시대 고전 소설 ‘별주부전’에 토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토끼의 간을 먹어야 병이 낫는 용왕을 위하여 육지로 나간 별주부 곧 자라가 토끼를 용궁에 데려오는 데는 성공하지만, 토끼가 간을 빼놓고 다닌다는 말로 꾀를 부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도망친다는 내용이다. 토끼의 지혜로움을 표현했다. 그런가하면 유명한 이솝 우화 속에도 ‘토끼와 거북이’가 등장한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였다. 토끼는 달리다 보니 거북이가 하도 멀리 뒤떨어져 오기에 길가에서 한숨 잤다. 그 사이 거북이는 꾸준히 달려 결국 이기고 말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늘 보아왔던 동화로 토끼는 교만함의 상징으로, 거북이는 부지런함의 대명사가 되어 왔다. 공정사회는 혼자 뛰는 사회가 아니다. 잠든 토끼를 보고 그냥 지나쳐버린 거북이는 아무리 보아도 공정하지 않다. 토끼를 깨우지 않고 지나치는 거북이는 정말 인정 없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생각난다. ‘토끼의 잠’은 교만함 때문이라고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과거의 교육은 다른 한편으로 의식속에 남의 불행을 딛고 승리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았을까. 토끼와 거북이는 처음부터 '육지의 언덕 오르기'로 승부를 겨룰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거북이가 토끼보다 먼저 언덕을 올라야 하는 게임은 그 자체만으로 불공정하다. 토끼 역시 강물을 헤엄쳐야 하는 경기였다면 거북이에게 패배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경기나 재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승패에 민감하고 쉽게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려는 우리 문화는 그동안 하나의 운동장에서 1등이라는 유일한 목표만을 가지고 달려온 탓도 있다. 우화에서처럼 게임 중에 잠을 자거나 잠든 상대를 그냥 놔두고 승부에만 집착한 참가자 사실 모두 패배자다. 올해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시대에 맞게 이렇게 업그레이드(upgrade) 하면 어떨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성공, 출세, 목표 등 개발 성장시대의 버전(version)으로 계속 주입하기보다는 새롭게 버전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거북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다 생각했다. “야! 정말 토끼는 대단하다. 이렇게 잘 달리기가 쉽냐! 내가 토끼의 능력도 모르고 달리기를 응했으니 내 판단 미스테이크( mistake)야. 이제 토끼의 재능을 달리 보아야겠다. 솔직히 내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자.” 그런데 가다보니 토끼가 잠자고 있었다. 거북이는 혼자 생각했다. “피곤해 깊이 잠든 모양이군.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내가 이기는 게임인데.”하고 그냥 지나치려 하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거북의 마음속에 이런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야.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 남의 불행을 외면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딛고 내가 이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동이야. 요행으로 이기는 것보다 깨끗한 패배가 더 옳아.” 그리하여 거북이는 토끼를 깨웠다. “토끼야, 넌 왜 달리기를 하다 자니? 일어나 달려야지. 넌 참 달리기를 잘하는구나.” 눈을 비비며 일어난 토끼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거북아, 넌 너무 착해. 그냥 못본척 지나쳐도 되고 그러면 너가 이기는데 왜 날 깨운 거니? 나는 말이야, 너가 달리기를 못한다는 것 알고 일부러 골려 먹으려고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한 건데 너는 나를 이기지 않고 깨우니 내가 너무 미안해. 내가 나뻣어. 내가 진 거야.” 그러자 거북이는 고개를 흔들며 “토끼야, 넌 정말 잘 달려. 내가 너의 실력을 모르고 만만하게 본거지. 내가 어리석게 생각하고 무조건 이길 줄 알았던 거지. 네가 속인 게 아니라 내가 상대의 재능을 얕보고 몰랐던 거야. 나는 너를 못 이겨. 자 달려가 우승의 트로피를 가져. 너는 정말 재능있는 선수야” 거북이는 토끼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토끼는 “아니야, 너가 이겼어. 나는 경기중 잤으니 사실 졌어. 네가 이긴 거야.” 토끼와 거북이는 서로 자기가 졌다고 하며 둘은 나란히 손잡고 결승점에 도달했다. 마침내 둘 다 공동우승으로 이겼다. 둘은 평생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새로 이야기를 바꿔쓰면 어떨까. 교육이 그렇고 문화가 그렇다. 가장 행복한 일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지역을, 예술과 문화와 생활을 이어 아름다운 경주를 통해 함께 사는 관계의 방법을 찾고 배우고 익히는 일이다. 토끼의 잠, 남의 실수가 나의 승리가 되기를 바라는 사회는 분명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그런 승리가 결코 자랑스런 승리나 영광이 될 수 없다. 혼자 즐겁고 혼자 열심히 뛴다고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두사람이 다리를 묶고 뛰는 2인 3각 게임이다. 서로 함께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어느 사회든, 공동체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경쟁이 아닌 함께 같이 사는 지혜를 교육하고 그런 문화,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이 다음 세대와 환경이 바뀌어 바다나 강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더라도 토끼가 쓰라린 패배의 경험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경주에서도 마찬가지다. 육지의 산도 있지만 바다나 강물도 있다. 강물을 만나면 토끼는 거북이의 등에 의지해야만 한다. 아마 거북이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둘이 함께 결승점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일이지 않을까. 인류학자들의 학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현재의 인간이 된 이유를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에서 찾는다. 이들은 ‘적자생존’의 통념에 반기를 들며 최후의 생존자는 친화력이 좋은 다정한 자였다고 말한다. 우리의 근원이 다정함에 있는데 왜 세계는 문 빗장을 걸어 잠그고 폐쇄적 증오와 혐오, 차별로 뒤덮였을까? 이 문제에 대해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책 또한 교류와 협력이 기반이 된 오픈(open)된 친화력이다. 우리는 더 많은 적을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더 많은 친구를 받아들이고 만듦으로써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마음의 벽을 쌓고 문턱을 높이면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서로의 개성에 맞는 노력이 서로 뒷받침될 때 성숙한 관계가 이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꼭 사랑해서 함께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더 사랑하려고 함께 하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함께 즐기고 함께 승자가 되어야 할 세상이다. 편 가르기, 편 먹고 싸우기 그만하자. 그건 권력을 주야로 묵상하는 정치꾼들이나 할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정함을 기반으로 함께 뛰는 훈련, 경주가 필요하다. 시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상생하는 윈-윈게임(Win-Win Game)이 될 수만 있다면 겨루기는 승패를 떠나 모두에게 참된 기쁨과 새로운 기회, 희망이 될 수 있다.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하면 ‘즐겁데이(day)’다. 승패보다는 경기 자체가 우리 사회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이웃을 신뢰하고 협력하게 하는 일에 얼마나 소중한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우리 사회는 다함께 같이 승리하는 사회로 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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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2023년 새로 쓰는 ‘토끼와 거북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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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조지훈의 ‘기다림’
- 얼마 전 엘레지(Elegy)의 여왕 이미자 가수의 '동백아가씨(冬柏아가씨)'란 노래를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는 노래를 듣다 눈물을 적셨다. 그리운 님을 기다리는 애타는 사랑 이야기다. 차가운 바람맞고, 하얀 눈을 맞으면서 빨갛게 피어난 동백꽃의 모습이 뜨거운 심장, 붉은 중심으로 십자가 하나 달랑 가슴에 품고 그리운 주님을 기다리는 일종의 크리스천(christian)의 모습과 많이 닮았고 할까. 그렇다. 사랑도, 신앙도, 산다는 것도 일종의 기다림이다. 삶을 지탱하는 것이 기다림이라고 할까나. 2023년 새 달력을 집에 걸고, 끝까지 다 못 쓸 다이어리도 준비했다. 하지만 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의 삶의 노래는 곤고(困苦) 하기만 하다. 고단한 하루에 쉼표조차 찍기 버거운 날들이라고 아우성이다. 지난 한 해 버티기에도 몸과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으고도 부족했다. 마치 손발이 묶인 듯 마음이 막혔고, 내 마음도 살뜰히 살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렇게 추운 시대를 살아가며 추위를 견뎌내는 힘은 정작 사람과 사람의 체온이라는 것을 말이다. 공동체에서 나의 의견을 끝까지 말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은 필요수적이다. 나의 의견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똑같이 소중하므로 잘 듣고 경청하는 연습이 필수적이다. 규칙 없이 혼자 돋보이려는 것이 아닌, 규칙을 먼저 지키면 얼마든지 나의 차례가 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움이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다. 나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다른 친구의 말을 먼저 막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욕구와 기다림의 균형을 알아가는 훈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성공이나 목표지향을 별로 안좋아 한다. 오히려 느림의 미학을 좋아한다. 조용히 천천히 제대로, 성장보다는 성숙을, 삶의 양보다는 질을, 속도보다는 깊이와 넓이를 채워가는 그렇게 행복한 문화공동체 만들기에 주력해 왔다. 이렇게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한 노력과 기다림은 사실 용기 부족과 망설임 어쩌면 상대방을 위한 배려, 그리고 인내의 시간을 견디는 고통이 아니었을까. 평생을 기다리며 만족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고 믿음이 아닐까. 하지만 기다리는 그 시간 하루 하루가 행복이 될 수도 있다. 언제 어떻게 누굴 만나든 서로를 바로 알기 위해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 기다림이 헤어짐이 되거나 행복이 될 수 있다. 인간관계도, 사랑도, 성공도 기다림에 달려있다. 살아가면서 참 다양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첫 인상이 좋은 사람, 목소리가 좋은 사람, 똑똑한 사람, 얼굴이 이쁜 사람, 마음이 이쁜 사람, 애교가 많은 사람, 밥 잘 사주는 사람, 돈 많은 사람, 만나면 웃음이 나오게 하는 사람, 만나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 만남으로 그냥 행복한 사람 등 다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사람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행복도 깊이도 모두 다르다. 창 너머 마른 꽃가지 위에 하얀 서릿발이 내렸다. 창을 넘어 스며든 바람이 무심히 내 곁을 스쳐 지나간다. 내 마음에 작은 인연이 생겼다 지나간 듯 가슴 아프다. 허물을 벗고 자라는 갑각류처럼 사람도 성장하는 순간이 가장 많이 상처받고 약해지는 시기다. 스치기만 해도 상처받을 것 같은 힘든 순간이지만 참고 견디며 기다리면 그래도 성장할 수 있다. 인생이 어쩌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일말의 기대감 그래도 기다림이 있기에 행복하다. 사랑을 믿기에 기다림이 있고 그 기다림이 있기에 행복인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행복을 얻기 위해 기다림을 시작한다. 기다림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려면 낙심하지 말고 상처받지 말고 지치지 말아야 한다. 커피 한잔, 차 한잔을 나눌 수 있는 여유와 그런 기다림이 삶의 질을 풍성케 한다. 간혹 다산 선생을 기억하며 전통 차(茶)를 마시다 보면 피어오르는 김 한 자락에도 깊은 시름이 뿌옇게 옅어지는 놀라운 위로를 받게 된다. 타인에 의한 상처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스스로 내는 생채기에도 편하게 정좌하고 차 한잔하면서 소통하고 담소하다보면 금세 마음이 편하고 가벼워진다. 이처럼 차는 다양한 육신의 건강만이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효능이 있다. 차만 그런가. 시 한편, 시 한수에도 마음이 안정된다. 요즘 청록파 조지훈 시인의 시집을 즐겨 읽는다. 남양주의 자랑 다산 선생의 뒤를 이은 조지훈 시인의 시 ‘기다림’을 낭송하며 벌써 봄을 기다린다. ‘고운 님 먼곳에 계시기에/ 내 마음 애련하오나 / 먼곳에 나마 그리운 이 있어 / 내 마음 밝아라./ 설운 세상에 눈물 많음을 / 어이 자랑 삼으리 / 먼 훗날 그때까지 님 오실 때까지 / 말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 님 오시는 길녁에 피고 져라 / 높으신 님의 모습 뵈올 양이면` / 이내 시든다 설움이야 / 어두운 밤하늘에 / 고운 별 하나’ 기약 없는 기다림이 참 고통스럽다. 찾아올 사람,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다. 현재의 나의 나된 것은 순전히 은혜다. 참고 견디고 응원하고 기다려준 이들 덕분이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서 그런지 자주 잊어 버린다. 지금의 겨울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설 명절이 지나고 이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傳令) 입춘(立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쉽게 지나쳐버린 것들을 기억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다시 찾아올 봄날을 기다려 볼 일이다. 절망은 크고 희망은 작지만 우리는 희망에 더 시선을 빼앗겨야 한다. 그 용기로 딛고 일어나 끝끝내 희망과 마주해야 하리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오랜 기다림 그 끝에 다정히 손 내밀면 이 마음 받아 줄꺼나. 기다림의 미학을 믿고 너무 서두르지 않도록 하자. 지금 무엇을 기다리던,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 기다림 끝에는 미소 짓는 일이 생기길 소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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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조지훈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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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인생에 여러 가지 만남, 여러 번의 만남이 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인생은 새로운 기회를 만난다. 실패자는 늘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남으로 기회는 새로운 인생을 펼치게 한다. 사랑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연인적 만남에서 새가족이 탄생되어 파란만장의 인생사가 엮여지듯. 만남의 첫만남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매일 진흥원을 찾은 수많은 누군가의 방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던가.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다가가고 있나. 최근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을 읽으며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과 사람을 만나는 것,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 사람에 대한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 한 줄의 시 구절은 깊은 성찰을 가져다 주었다. 생각의 전환점이자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너무도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만나는 그 무수한 사람들, 그 과정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회적인 만남들. 그러면서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닌듯 너무도 가볍게 사람들을 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옛사람들은 작은 인연 하나도 그것이 쌓여 자산이 된다고 보았던 것 같다. 사람이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고, 필연이어서 아니었을까. 사실 지난 수십년간의 사역을 꾸준히 펼쳐 올 수 있었던 것은 만남과 동행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 특별함으로 인해 감사와 기쁨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위해 노력해 왔다. 2023년 새해는 다시 성숙을 위한 업그레이드된 시간을 만들어 줄 것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겨울이란 시간의 과정을 그냥 흘려 보내지 말자. 깊어지는 겨울의 시간속을 통과하며 내면의 성숙을 위해 시 한수, 문학작품 한편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더욱 성숙해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새해에는 또 다른 나에 대한 고민과 좋은 사람을 만날 계획을 세워본다. 실수를 통해 고쳐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알수 있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과정이 된다. 내가 먼저 솔직한 모습, 인간적인 모습,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면 상대방도 편안하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는 편견이 넓게 펼쳐져 있다. 오랜 기간 쌓이게 될수록 더 깨기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나부터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가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새해에 더 완벽해야 할 이유는 없다. 작은 실수를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상대방이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관용하며 마음의 여유를 기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성찰을 할 수 있다. 실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정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타인에 대해 항상 좋은 감정을 갖고 대하도록 노력하자. 짚신에도 짝이 있듯이 사람마다 맞는 짝이 있다. 싫은 사람과 억지로 친해지려고 애쓰지 말자. 인간관계가 많다보면 좋은 인연만이 아니라 악연이 생기기도 한다. 모든 사람을 친구로 만들려 하지 말고 나와 통하는 사람과 친해지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내가 웃어야만 거울속의 내가 웃듯이 사소한 실수나 오해로 뭔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사람과 원수맺지 말고 살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 희망이 족할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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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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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문화번혁, 교회가 나서야 한다.
- 귀신놀이 죽음의 문화로 상징되던 할로윈(Halloween)축제가 결국 국내에서 터지고 말았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면서 말이다. 매년 10월말이 되면 유령이나 괴물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사탕과 초콜릿 등을 얻는 축제이지만, 해마다 살인마 흉내를 내며 총기난사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총격’과 ‘죽음’으로 얼룩진 미국산 축제를 국내에 도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제 그만 걷어내야 한다. 뉴에이지(New Age) 운동처럼, 종교성을 제거한다면서 인간성을 높인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방식의 문화가 현저하게 나타남도 사실이다. 수도 서울의 중심에서 뉴에이지문화를 넘어 동성애을 조장하는 퀴어(queer)까지 축제가 되어 버젓이 열린다. 타락한 이 세상의 문화는 반신적(反神的)이고, 심지어 사탄적 문화가 아닌가 할 정도로 막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무관심은 오리혀 이런 현상을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복음’와 ‘문화’는 교회가 양손에 지년야 할 도구이다. ‘복음’이 교회적이라면 ‘문화’는 사회적이다. 이 둘을 담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 어찌보면 미래를 여는 빛이자 등불이다. 현대 역사에서 기독교 문화는 복음의 풍성함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상과 시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이야기와 증언이 주는 감동이 문화를 통해 전해진다. 2017년에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별이 된 시인 동주’ 전시회와 시낭송, 콘서트를 가진바 있다. 그런데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 교회가 무슨 세속 문화에 관심을 갖느냐는 일부 목회자들의 비협조적 태도를 보기도 했다. 과연 교회가 신학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가? 문화적 대변혁기를 맞고 있는 한국 사회를 사는 크리스천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특히 반기독교적 정서와 문화가 급속하게 밀려오고 있는 때,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흔히 문화와 문명 개념을 뛰어넘는, 고도한 문화 이해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반(反)문화적이라는 이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문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의 생각과 힘을 다해 그 분의 의도에 부합하게 잘 개발하여 원하시는 문화(culture)를 드러내도록 함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온전한 문화’라면, 인간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 피조계에 힘을 가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변형시키는 것을 ‘잘못된 문화’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이 생성해 내는 문화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구속함을 받은 교회와 크리스천의 사명 중 하나는 ‘문화 변혁’이다. 기존의 잘못된 형태의 문화나 정치를 방치하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변혁해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변혁 사역을 해야 한다. 이런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과 더불어 받은 소명에 따라, 각 문화 영역에서 전문가들이 되어야 한다. 문화는 다양한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들이 있어야 참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은 글 한편, 그림 한 장, 찬양 음반, 찬양 집회, 기독서적, 동영상, 문학의 밤, 기독교 유튜브, 기독 영화 한 편 등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더 깊은 신앙의 길로 이끌어준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축제는 교회안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야 한다. 교회는 이런 각 분야 전문가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활동을 넓게 지지해 나갈 수 있는 교두보가 되며, 지성인과 시민들에게까지 폭을 넓혀 나갈 수 있도록 그 층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교회가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라 죽음의 문화를 걷어내고 생명 문화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문가를 폭넓게 지지하는 교회의 관심과 지지가 있을 때, 진정한 문화 변혁이 이루어진다. 교회의 무관심속에 신실하게 이런 문화 변혁 활동을 하는 크리스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세력들도 크게 나타나 결국 세상은 끝까지 영적인 전쟁터일 수밖에 없다. 오늘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전쟁터에서 깨어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일에 피흘리며 묵묵히 감당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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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문화번혁, 교회가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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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후보자는 머슴인가, 상전인가?
- 이번 6월1일 치러지는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선거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광역자치단체장과 시·도교육감,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에 출마하려는 예비후보들이 여기저기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길을 가다보면 종종 출사표를 던진 예비후보자들로부터 극진한 인사를 받는다. 90도로 폴더(polder)인사를 하며 지역을 위한 머슴, 일꾼이 되겠다고 명함을 건넨다.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위해 경쟁하듯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발품을 팔고 소위 영업(?)활동을 한다. 이들 모두 지역을 위해 일할 머슴과 일꾼을 자처하며 표심(票心)을 얻기 위한 구애에 열중한다. 후보들 대부분은 자신의 당선을 낙관하지만 간혹 다음 선거를 겨냥해 이름을 알리기 위해 출마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출마자들이 건네는 명함에는 자신들의 학력과 경력 등 다양한 이력이 담겨져 있다. 또한 명함에는 ‘유능한 후보’, ‘참신한 후보’, ‘OO전문가’ 등 참신성과 전문성, 능력을 강조한다. 그리곤 저마다 ‘머슴’과 ‘일꾼’을 자처하며 표심에 호소한다. “부정부패, 거짓말하는 머슴은 머슴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같으면 곤장 좀 맞고 쫓겨나야 됩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경기 남부권 유세에서 “국민 이익이 뭔지 그거 하나만 딱 보고 가는 정직한 머슴이 되겠다”며 정권교체론을 펼쳤다. 특히 ‘머슴’이란 단어를 총 100번 가까이 사용하며 “국민의 머슴인 위정자는 부정부패 안 하고 깨끗하고 정직해야 한다. 머슴이 썩으면 갈아치워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자치단체장이나 교육감, 지방의원 모두 지역발전을 위해 일할 머슴, 일꾼을 뽑는 것이 옳다. 그러나 지난 1991년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기치로 부활된 지방의회와 1995년 본격 막을 올린 지방자치제 하에서 과연 누가 얼마나 주민의 대변자였고 머슴으로, 일꾼으로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볼 타이밍(timing)이다. 대다수 선출직 단체장과 시, 도의원들이 지역발전을 위해 머슴으로 일해왔다 라고 자평 하지만, 일부는 자질 부족과 비리 연루, 갑질 등으로 시민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여전했다. 다가오는 동시 지방선거 출마자들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다. 진정으로 주민을 위한 머슴과 일꾼이 되기 위함인지, 권력을 차지하고 상전이 되기 위해 ‘머슴’이라는 이름 팔이를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무릇 공직에 몸을 담아 주민을 위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심이 없이 다산 정약용선생이 말한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의 마음 정도는 지녀야 하지 않을까. 이번 지방선거에 후보자들은 말로만이 아닌 진정으로 지역발전과 주민을 위한 머슴이나 일꾼이 되기를 당부한다. 간혹 여러 정치인들을 보면 머슴인가, 상전인가 반문하게 된다. 선거를 개인의 권력욕이나 자리를 차지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거나 이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당선자가 되면 더 심하다. 정치를 오래하다 보면 국민이나 당원들을 자신을 위한 들러리나 병풍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정당에서 다선을 하고도 전국적인 인물임에도 당 대표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일명 ‘먹튀(먹고 튄다는 뜻)’는 선거 전과 선거후가 틀리다는 말로 정치권에선 거의 다반사다. 당선된 후에는 안면몰수 한다는 말로 통용되지만 그렇게 초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당선되었다고 편나누기나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매이는 것이 아닌 실생활의 유익을 목표로 시민을 위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가하면 전직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 미리 2,3년의 임명직 자리를 선점해버리는 알박기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따금 정치인은 자기 정당의 식구를 공공기관장이나 이사, 감사로 보낸다. 일자리를 위해 인재들을 뽑았지만 아이스팩과 쓰레기 수거의 싹쓸이 정도의 일자리로 그쳤고 기업의 청년 일자리는 부족해도 강의실 전등 끄기, 청소, 방역 등 공공 일자리는 늘어났다. 위든 아래든 일자리 배분이 코로나 재난에서 꼭 필요했겠지만 그나마 쓸만한 자리들은 다들 알아서 챙겼다. 빚더미는 국민이 늘 감당한다. 정치인들은 표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사실 포플리즘이 민주주의의 바른 정치를 병들게 하고 경제를 무너뜨리는 독성 바이러스를 전염시킨다. 철새 정치 사기꾼으로부터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달콤한 맛을 조심해야 한다.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는데서 부터 민주주의는 성숙하고 발전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절대로 공짜를 좋아하면 안된다. 어차피 빈공(空)의 공약(公約)일 수밖에 없다. 후보자의 사상과 국정운영에 대한 비전을 주목하고 투표 전 후보자의 인물, 공약, 삶의 과정 등이 담긴 홍보물을 꼼꼼히 다시 챙겨보게 된다. 도지사든, 시장이든, 교육감이든 사실 후보자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지켜내고 국가안보를 굳건히 할 것인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할지 않을까. 지난 5년간 갈라치기로 비틀어지고 허물어진 법치와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이번 6월 선거는 국민의 바른 판단이 정말 중요하다. 이번 선거가 오래도록 찌든 불판을 바꿀 수 있을까. 유권자들이 작심하면 가능할까. 중도층이 투표에 나서면 선거판은 바뀔까. 중도층의 역할이 선거판을 어떻게 좌우할지 몹시 궁금하다. 오피리언 리더들이 중심을 잡고 우리 지역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판단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할 역할이 반드시 있다. 해당 후보의 정책과 가치관을 검증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검증하고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한 표가 얼마나 엄중한지, 총알보다 강한 그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투표’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투표’가 ‘혁명’이다. ‘투표혁명’이 곧 ‘정치혁명’을 이룰 수 있다. ‘설마’하는 안일함이 결국 나라를 망친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단 한 표 차이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사례는 너무 많다. 민심은 정말 ‘파도’와 같다. 파도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고 삼키기도 한다. 민심의 소리나 평판을 들어보면 그 후보자의 인격을 알 수 있다. 권력을 갖기 위해 머슴 행세를 하는 사람은 유권자들의 손으로 심판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권자들의 선택이 중요하다. 역시 사사로운 정파에 이끌리기 보다는 진정 지역발전을 위해 일해 온 후보, 일할 후보를 뽑아야 한다. 특히 후보자라면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비전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러기에 향후 통큰 정치 행보와 결단을 요구한다. 더 이상 승자독식 구조로는 안된다. 혼자서 만능인 1인 영웅시대는 이미 지나 갔다. 열린시정, 새로운 운영방식이 요구된다. 비전과 정책을 모두가 공유하는 ‘공동의 열린정부’로 가야한다. 더 나아가 유권자의 한사람으로써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제왕적 집중된 권력을 최대한 분산 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싶다. 또한 당선되면 인(人)의 장벽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제도권 정치인들이 공무원이 되면 이미 활동가가 아님에도 아직 예전 정당인이나 운동가처럼 착각한다. 게다가 정당 관련인사들을 고위직에 자기편이라는 이유로 알박기하고 부패나 범죄에 아랑곳하지 않으므로 정치족벌이 생긴다. 머슴 팔이로 국민 팔아 공직 챙기질 않길, 정치인과 공무원은 언제나 머슴이길 국민은 간절히 고대한다. 이번에 출범한 윤석열 대통령 정부의 과제가 산더미다.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지만 국내외 정치·경제·사회·안보 여건이 만만치 않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시대정신을 내세운 윤 대통령의 포스트코로나 민생위기, 사회갈등과 양극화, 북핵·미사일 도발 등 산적한 대내외적인 과제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주목된다. 윤 정부나 차기 지역 자치단체장들도 도정이나 시정운영에 국민 통합과 야당의 협치는 필수적이다. 진영과 세대·젠더·지역 등으로 갈라진 민심을 한데 모아 대통합의 정치를 이뤄내는데 최선을 다해주었으면 한다. 선거에서 박빙의 표차로 당선된 만큼, 안정된 국정을 위해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국민까지 포함하는 공감과 소통의 정치가 필수적이듯 국민이 진정한 주인된 나라를 이루려면 통합과 협치를 이뤄내야 한다. 여든 야든 국민만 국민을 바라보고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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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후보자는 머슴인가, 상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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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가정 해체의 위기, 어찌할까나
- 코로나19 장기화와 경제적 이유 등의 영향으로 위기가정이 급증하고 있다. 가족해체의 대표적인 원인은 이혼율의 증가다. 고용과 소득 불안정 등 경제적 문제가 가족해체를 심화시킨다. 양육 부담 등으로 저출산 현상이 이어지고, 극심한 취업 경쟁으로 결혼 연령이 높아지는 만혼화 현상이 일어난다.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결혼을 피하는 청년층이 증가하며 혼인율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전통사회가 세대연속성을 구조적으로 가능하게 한 가족 중심의 ‘연결사회’라면 현대의 산업사회는 독립세대의 ‘단절사회’라 칭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왜 혼자 살려고 할까.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배우자도 없어서 혼자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 없어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싫고 자식도 싫고 배우자도 귀찮다고 하면서 독거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사랑과 용서, 이해와 희생이 없이는 가정이 세워질 수 없다. 진정 성격차인가. ‘귀차니즘(Lazism)’인가. 세상만사가 귀찮고 게으름 피우는 현상이 고착화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귀찮-'이라는 어간에 '행위, 상태, 특징, ~주의'라는 뜻의 추상 명사로 만드는 영어 접미사 -ism을 붙인 누리꾼들의 신조어다. 아니 엄밀히 말해 ‘홀로서기’인가. 1980년대 추억이라면,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시집으로 선풍적 유행을 만들었고 가수 변진섭도 이어 노래로 ‘홀로서기’를 열창하였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1인’ ‘홀로’의 시대를 맞았고 지금은 ‘혼밥’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혼밥을 하며 탈출구가 없는 이들은 고독하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 즐겁거나 낭만적인 일은 아니다. 혼밥이 고독과 단절의 슬픈 상징이자 시대상을 묘사하는 단어가 되고 있다. 급격히 가정의 해체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며 개인주의, 고령화, 저출산, 별거, 가출, 이혼율 증가 등이 맞물려 ‘가족해체’ 현상이 빠르게 증가한다. 구성원을 상실하여 가족구조가 붕괴되고 정서적 교류의 기능이 파괴되어 가족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살았음에도 코로나로 인하여 재정파탄에 이르렀다. 경제적 문제가 가정불화의 이혼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1인 가구 증가는 개인의 사회적 고립을 촉진시킨다. 여기에 우리나라 출산율이 현재 0.84, 전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소멸할 국가로 대한민국이 꼽히고 있는 현실에서 기존의 가족들보다 여성의 성격차, 인권, 자유만을 강조하며 가정해체전위대로 평가되는 여성가족부의 역할로 인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디로 갈지 더 심히 걱정된다.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 변화는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여겨지고, 자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인식도 줄어들고, 가정도 성격차를 이유로 쉽게 별거하거나 이혼한다. 별거, 이혼, 졸혼 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결속력이 심각히 흔들리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다. 인구 5명 중 1명 이상이 65세 이상이라는 의미다. 이제 노년의 삶은 공통 관심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황혼을 꿈꾸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아름답지만 않다. 사회 구조적 문제와 관계적 단절로 부터 야기된 외로움, 무력감, 우울증 등의 증가에서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늘어나는 주름과 함께 우울한 감정도 쌓여만 간다. 이렇게 가족이 없이 홀로 지내다 사망하는 이른바 ‘고독사’가 늘고 있다. 이렇게 주변의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모른다. 고독은 죽음을 더욱 참혹하게 만드는 질병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주변의 마주침이 덜한 상황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도움을 쉽게 요청하지 못한다. 평소 ‘은둔형 외톨이’로 주변과 교류가 단절되었기에 아픈 상태에서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숨진 뒤에도 한참 뒤 발견된다. 어떤 죽음이든 모두 안타깝지만, 꽃다운 20·30대 청춘들의 고독사는 더욱 가슴 아프다.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공동체인 ‘가정’이 붕괴되고 홀로세대가 늘어나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가족이 해체되고 홀로족이 늘어나는 세상에 인간이 탈없이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세대간의 소통도 쉽지 않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고통이 뒤따른다. 세대간 언어의 단절중 하나가 사전에도 없는 줄임말이다. 마치 외래어 같다. 청소년들과 언어의 소통과 공감에도 한계가 온다. 이미 세대 단절이 오고 있는 것인가. 어휘력에 문제를 가져오고 대화의 이해 차이를 가져와 소통의 단절을 겪게 된다. 또래집단에서 통용되는 은어나 용어의 사용은 어른 세대에서는 소통하지 못하는 단절시대가 왔다. 결국 아동과 청년, 청년과 중년, 중년과 노인에게도 세대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앞으로의 문화나 유행은 그 세대를 관통하고, 이 세대간의 차이를 얼마나 좁히느냐에 달려있다. 더 나아가 사각지대에 징검다리를 놓는 관계성에 누군가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노년층이나 홀로족의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지역사회 단위의 커뮤니티케어(Community Care)의 구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삶이란 것이 그렇다. 참 허무하다. ‘님’이 되기도 하고 ‘남’이 되기도 한다. 인연이 닿아서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되어 홀로 남겨지고, 홀로 떠나게 되는 세상. 그렇게 미련도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이 한순간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처럼 떠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리고 못다한 말을 천천히 들어줄 넓은 가슴을 가진 '어른'이 되어보자. 지혜롭고 현명한 부모가 되어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자. 플라톤은 한 가정의 두 기둥을 남편과 아내로 비유했다.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 맺어진 사닥다리를 타고 자라는데 그 사닥다리가 사랑의 끈으로 묶여져 있으면 아이들은 안정감 있게 자라나고 사닥다리가 흔들리면 아이들도 불안정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부부의 안정된 삶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올바르게 배우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산을 받은 자녀는 온전한 가능성의 그릇을 마음껏 활용하면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가정은 언어를 배우고, 생활을 배우고, 모든 것을 배우는 현장의 학습이기 때문에 매일 반복되는 학습의 기회가 아름다운 교훈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픔으로, 고통의 날들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일보다 더욱 관심을 갖아야 되는 일이며,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소중한 사역이다. 부모의 습관과 행동의 그림자가 자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부모가 되어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자. 우리는 ‘홀로’를 통해 ‘홀로서기’ 아닌 ‘함께서기’를 지금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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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가정 해체의 위기, 어찌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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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고독은 죽음을 부른다
- 1980년대 추억이라면,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시집으로 선풍적 유행을 만들었고 가수 변진섭도 이어 노래로 ‘홀로서기’를 열창하였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1인’ ‘홀로’의 시대를 맞았고 지금은 ‘혼밥’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 즐겁거나 낭만적인 일은 아니다. 혼밥이 고독과 단절의 슬픈 상징이 되면서 시대상을 묘사하는 단어가 되고 있다. 혼밥을 하며 탈출구가 없는 청년들은 고독하다. 지난 3월, 청주의 한 원룸에서 20대 청년이 홀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직장내 따돌림을 당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방에서만 지냈다. 박스째로 햇반과 라면을 쌓아두고 끼니를 때우며 술을 마셨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는 생활 쓰레기와 카드론 대출 4천900만원의 만기를 알리는 우편물이 쌓였다. 그에게는 친인척도 없고 왕래하는 지인도 없었다. 청년은 세 번의 시도 끝에 스스로 삶을 등졌고 숨진지 13일 만에 발견됐다. 고령화 사회의 도래와 함께 1인 가구 증가로 가족이 없이 홀로 지내다 사망하는 이른바 ‘고독사’가 늘고 있다. 청년들과 노인들의 외로운 죽음이 바로 그 '고독사'다. 과거엔 홀로 사는 노인층에서 주로 발생했으나 중년층과 청년층에까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주변의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모른다. 고독은 죽음을 더욱 참혹하게 만든다.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주변의 마주침이 덜한 상황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도움을 쉽게 요청하지 못한다. 평소 ‘은둔형 외톨이’로 주변과 교류가 단절되었기에 아픈 상태에서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숨진 뒤에도 한참 뒤 발견된다. 어떤 죽음이든 모두 안타깝지만, 꽃다운 20·30대 청년들의 고독사는 더욱 가슴 아프다. 삶을 마감한 한 30대 청년의 작은 원룸에서는 먹다 남긴 배달 음식 등 수북한 쓰레기들과 함께 150여 장의 이력서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인생에 단 한 번의 기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죽고 난 후 일정 기간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가족들조차 시신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쓸쓸히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을 지닌 사람들. 그들의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회적으로 고립돼 주변과 왕래없이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고독사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최근에는 특히 2030 세대들의 청년 고독사까지 확산되고 있는데 어찌 할 것인가. 청년 고독사는 대체로 높은 실업률에 코로나19 상황까지 겹치며 구직 기회가 사라지고 경제적 빈곤의 문제와 가족관계가 붕괴되면서 ‘1인 가구’가 증가한데 기인하고 있다. 사회 구조적 문제와 관계적 단절로 부터 야기된 외로움, 무력감, 우울증 등의 증가에서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020년에만 약 4천 명, 즉 하루 평균 11명이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고, 3년 새 청년 고독사는 62%가 증가했다. 돈을 가진 일부 유명인들의 자기 과시의 삶이 정답이 되어 버리고, ‘N포세대’, ‘수저계급론’, ‘욜로(YOLO)’로 점철되는 젊은 세대의 자포자기적 절망의 세상 풍조 속에서 끊임없이 세상을 비관하며 낙심하고 죽음으로 내 몰도록 하고 있다. 그런 슬픔과 한숨 속에서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누가 희망을 줄 수 있는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고독사로 추정되는 무연고 사망자 수는 2017년 2천8명, 2018년 2천447명, 2019년 2천656명, 2020년 3천136명, 2021년 3천488명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더 크게 늘었다. 40세 미만 무연고 사망자 수는 2017년 63명에서 2018년 76명, 2019년 81명, 2020년 104명으로 집계됐다. 통계에서 빠진 경우를 생각하면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권 등에 따르면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안'(고독사예방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2020년 4월부터 시행됐다. 해당 법안은 정부가 5년마다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실태조사, 통계작성 등을 의무화하도록 했다. 복지부는 고독사 예방에 관한 전담 부서도 아직 정하지 않은 상황이다. 나아가 복지부는 올해 고독사예방법 관련 예산으로 16억원을 요구했으나 이마저도 감액돼 10억원이 배정됐다. 요즘처럼 경제적·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 이들이 외로운 죽음을 맞은 적은 없었다. 혼자 사는 가구가 취업, 빈곤, 대출, 우울증 등 각종 원인으로 힘겨운 삶을 버텨내지 못할 정도 같다. 고통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수용한 후 필요한 것은 ‘삶의 가치 다시 찾기’다. 지금 내 삶의 고통을 회피로 해결해서 점점 더 괴로워지는 것을 경험한다면 하던 노력을 멈추고 이제는 고통을 수용하고 고통과 절망의 늪에서 헤엄쳐 나오는 법을 배워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또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최소한의 기본을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먹고, 자고, 입고하는 최소한의 삶의 기준을 만들기 위해선 일자리가 필수다. 거의 대부분은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데, 일자리가 없고 취직이 안 되는 것은 정말 절망일 수 밖에 없다. 한창 일할 20대의 나이에 취업난을 겪고, 대학생라지만 어린 시절부터 학자금 대출의 늪에서 채무자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심지어, 금 수저 흙 수저를 따지고, ‘부모찬스’로 통해 공정을 뛰어 넘어 살아가는 뉴스를 보며 큰 상실감에 의욕을 잃는다. 누군들 좋은 부모 만나 편한 세상 살아가길 바라겠지만 모두의 삶이 그렇게 다 똑같겠는가. 하지만 꿈을 그리며, 미래를 향해 나아갈 인물들이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이 세상의 미래가 될 청년들이 사회와 교류도 할 수 없어 세상을 등지고 떠나야만 하는 이 세상이 정말 정상적인가. 이제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다. 인구 5명 중 1명 이상이 65세 이상이라는 의미다. 이제 노년의 삶은 공통 관심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황혼을 꿈꾸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아름답지만 않다. “오래 사시라”는 덕담이 덕담이 아니라 악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죽지 못해 산다"는 어른신의 말처럼, 수시로 죽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나이가 들면 원래 다 그런다는 의사의 말이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늘어나는 주름과 함께 우울한 감정도 쌓여만 간다. 2020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실시한 전국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13.5%가 우울증상을 보였다. 주목할 점은 85세 이상 연령군의 우울증상은 24.0%로 65세~69세 연령군의 3배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다. 고령층 우울증상이 연령에 비례해 심각해지는 추세라고 해석할 수 있다. 홀로 사는 고령층 우울의 원인은 다양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주요 원인으로 배우자나 친구 등 주변인 사망과 이별이다. 그로 인한 충격과 상실감을 꼽는다. 은퇴로 인해 사회생활이 줄어들고, 경제력은 예전에 비해 떨어지고 스트레스 지수는 상승하는 것이 주된 이유다. 개인의 건강상태도 우울증에 영향을 끼친다. 신체와 정신 기능이 저하된 노인의 경우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우울증상 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신체나 정신 기능 저하는 자체로도 문제지만 사회활동 축소를 발생시키기에 노인의 우울 증상을 더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지닌 우울은 고독사로 나타난다.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홀로 죽음을 맞고, 시간이 지난 뒤에 발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통계청의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65세 이상 가구원 784만6천명 가운데 1인 가구는 166만1천명으로 21.2%를 차지한다. 65세 이상 인구 5명 중 1명이 가족 없이 홀로 살고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홀로 사는 고령 1인 가구 비중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80세 이상 고령자 1인 가구의 비중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고독사가 더욱 우려되는 상황이다.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복지 커뮤니티케어가 시급하고 필요한 이유이다. 통계청 관계자는 “고령자 1인 가구는 계속 증가해 2037년에는 현재의 2배 수준인 335만1천 가구, 2047년에는 405만1천 가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OECD 평균 기준보다 두 배 이상 높다. 2년 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 중 80세 이상이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였다. 독거노인 가구가 다른 가구보다 높은 자살률을 보였다는 점이다. 정부나 지자체가 행정적 노력을 기울이지만 AI 서비스보다 중요한 것은 고령층 고독사와 자살이라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혼밥족들과 관계를 이어주는 돌봄의 장이 필요하다. 부천시 성골로에서 성만교회를 섬기며 목회를 은혜롭게 하는 친구 이찬용 목사가 지역 내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을 섬기기 위해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할 수 있는 ‘행복한 식당’을 개업했다. 특히 ‘행복한 식당’은 어르신들을 섬기는 데 목적으로 두고 차별화된 가격 정책을 세운 점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75세 이상 어르신의 경우 1,000원만 내면 정성 들여 만든 한 끼 식사를 맛볼 수 있다. 60세~74세 가격은 7,000원, 60세 미만 손님은 받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주변 상권과 상생을 위한 정책으로 경제적 여력이 있는 손님들은 주변 상가 식당을 이용하도록 하는 취지다. 역시 생각이 앞서간다. 이참에 필자도 ‘아름다운 식탁’을 만들어 주방장이나 해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노년층이나 홀로족의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지역사회 단위의 커뮤니티케어(Community Care)의 구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역의 행정복지센터나 사회보장협의회, 희망케어가 다 감당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징검다리를 놓는 관계성에 누군가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지역의 커뮤니티 케어에 관심과 애정을 갖자. 삶이란 것이 그렇다. 참 허무하다. 인연이 닿아서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되어서 홀로 남겨지고, 홀로 떠나게 되는 세상. 그렇게 미련도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이 한순간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처럼 떠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여관이나 좁은 셋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임종을 맞이한 이웃들의 마지막을 챙길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소리 없이 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고 못다한 그들의 말을 천천히 들어줄 넓은 가슴을 가진 '어른'이 되어보자. 우리는 ‘홀로’를 통해 ‘홀로서기’ 아닌 ‘함께서기’를 지금 고민하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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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고독은 죽음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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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꿀벌이 사라졌다
- 올 봄 들어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양봉협회에 따르면 3월 전국 양봉협회 소속 농가를 대상으로 꿀벌 실종 피해조사 결과 4,159 농가의 38만 9,045개 벌통에서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약 70억 마리 이상의 꿀벌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도대체 꿀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늘 우리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꿀벌이 왜 사라진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나오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기후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꿀벌 집단 폐사 원인은 지난 겨울에 기상 환경이 상당히 불규칙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예년에 비해서 지나치게 추웠다는 것이 큰 요인이다. 특히 2021년 겨울 같은 경우는 소위 '몹시 추운 겨울'이었고 그 겨울이 오기 전에 11월과 12월은 상대적으로 너무 따뜻했다. ‘이상기후’다. 겨울에 뜬금없이 기온이 올라가자 착각한 벌들이 밖으로 나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것이다. 꿀벌들도 겨울 준비를 하고, 양봉 농가들도 겨울 준비를 하는 타이밍도 놓쳤다. 꿀벌들이 겨울 준비하는 생리적인 리듬이 깨진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 환경이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이 생태계의 생존기반을 무너지게 하였다. 그러다보니 꿀벌들이 자연의 복합적인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실제로 벌꿀의 대부분은 포도당과 과당, 당분이고 에너지원이 되고, 각종 미네랄과 항생 물질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이 꽃가루와 벌꿀이 충분히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으면 질병면역성과 저항성이 약해져 질병에 대한 감수성은 높아지고 전반적인 건강성은 낮아지는 현상이 생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건강한 삶을 살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꿀벌이 사라지므로 직접적으로는 우리 양봉 농가들의 생산이나 양봉 농가의 소득에 직접 피해가 생긴다. 생계에 큰 피해가 가고, 식물의 번식을 도와주는 생태계의 붕괴로 나타난다. 이런 생태계 서비스가 정상 작동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농산물의 생산량의 저하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농작물 생산이 매해 약 24조원에서 28조원 정도가 되는데 그중 6조원 이상이 꿀벌 등이 화분매개에 의한 생산이다. 꿀벌이 사라지므로 이러한 사과, 배, 딸기, 복숭아 등을 포함한 이런 과실, 과채류, 과수의 생산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이것이 물가인 상으로 결국은 개인의 영양 관리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꿀벌이 사라지는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위기가 처음으로 좀 이슈화된 미국에서 CCD(군집 붕괴 장애Colony Collapse Disorder: CCD)라는 이름으로 꿀벌 봉군이 붕괴된 2006년부터다. ‘벌들이 집을 나가서 사라진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꿀벌의 실종이 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이러한 현상들과 이러한 보고들은 미국에서부터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초기 아시아권에서는 이러한 위기 문제가 깊게 관심을 가지거나 논의되지 않았다. 최근에 기상이변과 기후변화를 맞으면서 영향의 크기가 커졌다, 그렇게 꿀벌의 사라짐이 본격적으로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면 꿀벌의 위기 대책은 있는가. 먼저 꿀벌의 건강성을 증진시켜줄 수 있는 어떤 관리의 문제. 이것은 대부분 양봉 농가들이 꿀벌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꿀벌이 사라진 표면적인 원인은 병충해다. 꿀벌의 관리에서 꿀벌 해충 대한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기생성인 해충들의 문제는 단순히 꿀벌을 괴롭히는 것뿐만 아니고 이 기생성인 해충들이 꿀벌의 다른 질병들, 바이러스병이나 세균병들을 매개로 한다. 다른 질병을 또 가져다준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전문가들은 꿀벌의 갑작스러운 대량 죽음이 종종 자연 파괴와 만연한 살충제 사용이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는 1천500여 재배 작물의 30%와 전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세계 100대 작물 중 71%가 꿀벌을 통해 수분을 공급한다고 한다. 만약 이렇게 계속 꿀벌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벌들의 수분을 통해 생장하는 식물들은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돼 멸종할 수도 있다. 인류에게는 대재앙이 될 수 있음도 불 보듯 뻔하다. 꿀벌이 사라진다면 100대 농산물 생산량이 현재의 29% 수준으로 줄어들어 지구상에 많은 사람의 삶의 질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각급 초등학교 학습,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교육 이런 수준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연을 보호할 수 있는지, 꿀벌을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실제로 실천적인 과제들을 만들어내고 이걸 수행케 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꿀벌을 보호하는 대국민운동 차원에서 벌과 나비들을 관찰을 하게 하면서 이런 화분매개의 중요성, 벌의 중요성, 그 다음에 이것이 만들어내는 이 자연계, 생태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 다른 측면에서는 이 화분매개 곤충, 꿀벌 모니터링 시스템을 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면 어떨까 싶다. 그렇게 국가 차원에서 자료들을 모으고, 물론 시민과 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함께 참여해서 조사해 온 결과들을 바탕으로 우리 지역에는 이런 곤충이, 꿀벌이 사라지고 또 어떤 새로운 곤충이 출현 하는가 이런 자료 구축을 통해 생태계 복원작업들이 이뤄낼 수 있다. 기후 변화와 기상 환경 변화로도 연결시켜 보호대책을 마련하는 작업도 병행 할 수 있다. 꿀벌은 협동과 근면, 생명력의 상징이었고, 인간에게 원기를 북돋아 줬다. 인류의 함께 한 작은 거인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꿀벌이 사라진 지구는 상상하기 어렵다. 꿀벌이 지탱해주던 생태계의 고리 하나가 붕괴되면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꿀벌의 처지는 2035년쯤이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올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UN은 2017년부터 꿀벌 보호를 위해 매년 5월20일을 ‘세계 벌의 날’로 지정해 벌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전국적으로 올 1~2월에 꿀벌 70억 마리 이상이 사라졌다는데 아주 작은 곤충이지만, 우리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위대하고 소중한 자산이다. 어떻게 꿀벌을 보호할 수 있을까. 양봉농가들이 앞장서 꿀벌들에게 적절한 영양을 제공해 주는 것. 이것이 중요한 이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꿀벌들이 밖에 나가서 먹이 활동을 할 수 있는 배경을 잘 만들어 주는 것이다. 꿀벌이 복합 영양분인 벌꿀을 제대로 먹지 못해 쇠약해진 상태에서 병해충과 싸워야 한다. 즉 야생의 많은 종류의 꽃과 꽃 피는 식물들에서 꿀과 꽃가루가 제공이 된다면 꿀벌은 조금 더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이 꽃 피는 식물들을 많이 심어주고 관리해 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 꿀벌을 살리는 지름길이다. 사실 집집마다 작은 꽃들을 키우는 것이 실은 어떻게 보면 어떤 아주 작은 노력이 될 수 있지만 이것들이 모이게 되면 생태계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아주 자그마한 자투리땅에 꽃을 심는데, 이 꽃들이 결국은 화분 매개자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공간을 제공하고 휴식처를 제공해 줌으로써 더 큰 생태계에서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 산에도 들에도 많은 꽃 피는 식물들의 경우, 화분매개를 통해서 종자들을 만들어내고 과실을 만들어냈을 때 이것이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는, 이런 먹이사슬 차원에서 생태계 순환이 매우 중요하다. 국제환경보호단체인 그린피스(Greenpeace)에 의하면 식량 재배에서 꿀벌의 기여 가치는 세계적으로 373조원이나 된다고 주장하고, 우리나라도 꿀벌의 경제적 가치가 6조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닌 꿀벌이 사라져가지만 평상시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 우리 인간의 단편적 어리석음은 주변의 소중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야 할 꿀벌같은 이웃이나 청년들이 고독사로 사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의 말은 함께 살아야 할 꿀벌이 사라지는 환경을 계속 방치한다면 농업의 위기, 미래 생태계의 위기 더 나아가 인류 자신에게도 큰 위기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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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꿀벌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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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관계를 이어주는 글쓰기 조언
- 사람들은 누구나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상으로서 쓰게 되고 또는 자신의 존재 흔적이나 기록을 남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일상이 기회인데 생각만 하다 시도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글은 혼자가 아니다. 글은 관계를 이어주는 통로다. 글은 내가 쓰지만 일기가 아닌 이상 꼭 나 자신만 읽기 위해 쓰지는 않는다. 글은 누군가에게 읽혀진다는 전제에서 쓰여 질 때 그 ‘누군가’와의 관계성을 지닌다. 글은 일상의 대화보다 한 차원이 다른, 더 깊은 소통의 창구다. 그 누군가는 가족이나 지인을 넘어 불특정 다수, 독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글쓰기는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으로 이어진다. 무명의 작가 조앤 롤링(Rowling, Joanne Kathleen Rowling)은 작가 지망생이였지만 글 쓸 공간이 없어서 동네 카페의 테이블을 빌려서 글을 썼다. 하지만 「해리포터」시리즈로 인해 전 세계적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이 시리즈로 인하여 5억 부 이상 판매되었고, 80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여덟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로 제작되었다. 글쓰기에 다른 사람이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을 넘어 세상과 이어주고,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강점을 지닌다. 글에는 공짜가 없다. 반드시 글쟁이는 애독자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산다. 글을 통해 독자가 생기고, 애독자가 만들어지며 관심과 지지, 후원 등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글은 명화 작품과 같이 가치있게 접근해야 한다. 모든 기록은 시대마다 그 가치를 지닌다. 자신의 기억을 기록해 책으로 엮고, 미래의 자신 혹은 소중한 사람들과 공유한 삶의 기억들은 또 다른 사료적 의미를 포함한다. 솔직히 글쓰기가 참 어렵다.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이 글쓰기 위해 생각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당장 먹는 것, 대화하는 것, 즐기는 것, TV 드라마나 뉴스를 시청하는 일에 더 익숙하다. 본능에 걸맞지 않는 어려운 글쓰기를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사실 글쟁이들도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글을 쓴다. 아무리 대단한 글쟁이라도 한 주는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마감 시간에 쫒기면서 작정하고 쓰지 않으면 한 편 쓰기가 쉽지 않다.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지만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왜 일까? 그 이유는 쓸 시간이 없어서, 쓸 거리가 없어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쓸 곳이 없어서이다. 글쓰기, 책 쓰는 법에 대한 강의와 도움을 종종 요청받는다. 각계각층 인사들의 책 출판에도 조언을 한다. “글 잘 쓰는 비법 좀 알려주세요?”라는 질문도 종종 받는다. 진정 글쓰기와 책 만드는 비법이 있을까? 글을 잘 쓰려면 쓸 시간을 내서, 쓸 거리를 만들어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쓸 곳을 찾아서라도 글쓰기를 시작해야 한다. 글쓰기를 시작하려면, 기초체력을 길러야 한다. 매일 침묵, 묵상, 상상, 그리고 꾸준한 독서를 통해 특히 다독(多讀)은 건강한 글쓰기를 위한 자양분이 된다. 독서는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준다.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준다. 글쓰기를 위한 영감을 얻는 방법,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법, 재미있게 쓰기 위해 단어를 조합하는 법, 글의 깊이를 위해 끈질기게 질문하는 법 등 글쓰기 비법의 기본은 먼저 다독하는 독자가 되는 것이다. 필자도 늘 책을 읽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어 나간다. 하루에 목표는 열 개씩이라도 적어본다. 글쓰기는 여행과 같다. 먼 길을 떠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글쓰기에도 나침반이 필요하다. 글쓰기는 자기 내면과 삶에 대한 성찰인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꺼내 다듬고 정리하는 과정인데, 글을 쓰면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다. 답이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정하고 가늠한다는 말이다. 나침반처럼 말이다. 우선 무엇에 대해 쓸지, 글의 주제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글을 왜 쓰는지, 글의 목적을 정한다. 같은 주제라고 목적에 따라 성격이 전혀 다른 글과 책이 만들어 질 수 있다. 글의 나침반(구성)에서 이 두 가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글(책)이 뒤로 갈수록 통일성을 잃고 여러 개로 갈라진 목소리를 내게 된다. 상류에서 보기 좋게 세차게 흐르던 강줄기가 하류에 가까워지면서 길을 잃고 수 갈래로 흩어져 버리는 상황이 된다. 글쓰기는 다른 말로 ‘생각쓰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솔직한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다. 불쑥 불쑥 머릿속에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를 캡처하는 습관에서 출발한다. 처음 글을 쓰려 할 때 우선 할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의 창밖으로 끄집어내는 솔직한 글쓰기가 우선이다. 글 이란, 세상의 유행이나 흐름과 관계없이 자신만의 색깔과 흐름으로 자신만의 시각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다. 글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않았던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말하면 된다. 글쓰기는 자신의 영혼에 피를 돌게 하는 정맥주사가 될 수 있다. 처음부터 글을 잘 쓰려 할 필요는 없다. 좋은 글은 자신에게 솔직할 때 나온다. 그래서 ‘솔직한 글쓰기’가 시작이다. 처음은 자신을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털어 놓는데 몰두하면 좋겠다. 이런 인생의 나침반을 하나 만드는 것으로 인해 삶이 더 행복해지고, 삶이 더 성숙해진다. 처음부터 수 천자를 쓰거나 몇 십장을 쓰려고 하면 좌절감을 느끼고 포기하게 된다. 과욕을 부리면 얼마못가 지쳐버리게 된다. 아기가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기까지 만 번 이상 넘어져야 한다고 한다. 글쓰기 작업도 누구든 이런 과정을 거친다. 처음에는 몇 주 동안 한 문단이나 한 문장을 목표로 해야 한다. 물론 그 이상을 하려는 시도는 해야 하지만 무리하지 않고 ‘작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꾸준히 쓰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글쓰기는 특출한 재능도 중요하지만 끈질긴 노력은 더 중요하다. 때론 끈질긴 노력이 특출한 재능을 낳기도 하는 것이 글쓰기다. 많이 쓰는 것만큼 좋은 경험은 없다. 먼저 펜을 들고 무엇을 쓸지 결정하고 적어 본다. 막연한 생각만 하는 것과 한 마디라도 적어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글을 막연하게 쓰려고 하면 햇살이 비치는 아침이면 공기중에서 사라지는 아침 이슬처럼, 생각이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다. 생각은 다분히 추상적이라면 말이나 글, 이미지는 구체화되어 표현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막연한 뜬 구름 잡기로 끝나게 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쓸 때 문장으로 최소 5개에서 10개 정도 적어 보는 것도 좋다. 이렇게 글을 편하게 쓰려면, 평소에 글감을 꾸준히 저축하듯 모아두는 것이 좋다. 글감은 일상 속 어디에나 있다. 가장 먼저 봄을 반기는 들풀 꽃잎, 쉬는 날 느지막이 일어나 마시는 커피 한 잔, 신문이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순간 번뜻 스치는 찰라적인 생각, 머릿속을 스치는 지난 기억이나 상념들을 재빨리 간직하고 그 자리에서 짧은 글이라도 적어 두면 좋다. 여기에 스마트폰(smart phone)으로 사진을 찍으면 글로 풀어내기도 좋고, 그 때 그 느낌 그 분위기로 이야기를 담아낼 수도 있다. 인터넷 미디어 sns가 발달한 시대에는 의미가 크다. 아이디어를 캡처(capture)해두면 아이디어가 없어 막막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아예 아이디어가 텅비어 있다면 글쓰기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이런 글감을 인터넷 카페(cafe)나 블로그(blog), 페북(facebook) 등에 꾸준히 모아두어야 한다. 생각만으로는 쓸 말이 너무 많아서 3박 4일은 쓰고 읽어야 될 것 같았는데 막상 책상에 앉아 펜을 들면 그것들이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한 줄도 힘들 때가 있다. 이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두지 않은 탓이다. 평소에 습관적으로 생각이 떠오르면 짧게나마 메모나 적어두는 습관이 글쓰기에는 한결 수월하다. 내용을 구성하거나 첫 문장이나 제목을 무엇으로 할지 미리 감이 잡히고 글쓰기가 아주 쉬워진다. 생각을 적어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적어라. 단어들 자체도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 이해가 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머릿속에서 떠오른 모든 생각을 끄집어내고 기록하는 훈련이다. 아니면 사전을 펴고 단어들을 찾아 가면서 그 단어와 관련해 떠오르는 모든 것을 적어볼 수도 있다. 그것은 실체 경험이고 삶의 고백이자 스토리(story)가 있는 재미있는 기억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업들이 어떤 날에는 단어들이 펜 끝에서 날아와 멋진 콘텐츠(contents)가 창조된다. 마치 퍼즐(puzzle)이 맞춰지는 것처럼. 갓 절인 겉절이처럼 바로 먹을 수 있는 핫(Hot)한 글이 있는가하면, 수정하고 숙성시켜 묵은지 같은 글도 있다. 필자는 후자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글의 수명이 길기 때문이다. 처음 글 쓰는 사람들의 경우, 단번에 완벽한 원고를 써 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기에 초고(草稿)에서부터 막힌다. 글감을 만들고 첫 생각을 풀어낸, 아직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원고가 ‘초고’다. 봄 들판 길가에 여기 저기 파릇파릇 돋아나는 어린 새싹과 같다. 새싹이 비, 바람, 햇볕을 거치며 풀로 나무로 꽃으로 자라가듯 수없이 많은 수정과 작업을 거쳐 글다운 글로 거듭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쓰려고 하다가는 영영 글을 마칠 수 없다. 초보는 형편없는 초고를 두려워한다. 그러다 수정과 편집에 시간을 낭비한다. “이건 초고야. 완벽할 필요가 없어!”라고 외쳐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정신줄’ 내려놓고 쓴 글이 뜻밖에 명작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더 집중해야 한다. 글 쓰는 이의 숨결이 담기지 않은 글을 죽은 글이나 다름없다. 한명의 독자가 있다면 그에게 이야기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여기서 독자는 자기 자신 일수도 있고 가족 또는 친구나 지인일 수도 있다. 그렇게 글을 쓰면 더욱 진솔하고 구체적인 글이 살아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상투적인 표현도 피해야한다.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다면, 글을 끊어서 쓰는 것이 도움이 된다. 글을 쓰려는 사람이 단번에 많은 양의 글을 쓰기가 어렵다. 필자도 매주 A4 두세장 분량의 글을 쓰기도 벅차다. 이럴 경우 주제별 키워드를 정하고 소주제별 어떤 글을 담을지만 정하며 여러개의 글 뭉치를 만들어 이 흐름에 맞춰 이으면 한편의 글이 완성된다. 마치 하나의 퍼즐 맞추기다. 글을 끊어서 쓰면 한 호흡으로 이어서 쓸 때보다 부담이 적어 초보자도 쉽게 쓸 수 있다. 초고는 부끄러움이다. 남몰래 감추어 두었던 진심을 들킨 것 같은. 초고는 수차례 고쳐 쓰기, 다듬기 과정을 거쳐 거듭난다. 초고가 한 주간 걸렸다면 재고(再稿) 삼고(三稿)로 고쳐쓰고 수정하고 다듬고 퇴고(推稿)는 또 그만큼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초고는 뜨겁게, 퇴고는 차갑게’라는 말이 있다. 초고는 열정적으로 쓰고, 퇴고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머리로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설사 독자가 단 한 명일지라도 그의 입장에서 글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이 글이 꼭 필요한가’ ‘이 글이 이해가 되는가’ ‘이 표현이 맞는가’ ‘이 문장이 진부하지는 않은가’ 등 개인의 일기가 아닌 이상 독자의 시점에서 판단해 글이 논리적이지 않으면 무엇을 빼고 무엇을 넣어야 할지, 글의 순서를 재배치해 구성을 탄탄히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글의 논리적 구멍을 메우기 위해 새로운 내용을 더 해야 하는 경우도 어쩔 수 없다. 뼈대와 기둥을 튼튼히 받치는 내용의 보충이라는 지지대가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불필요한 설명이나 유머, 묘사는 망설임 없이 과감히 빼는 편이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지름길이다. 글의 장황함을 막으려면, 한 문장에 한 가지 생각만 담아 짧게 쓰는 것이 제일 좋다. 되도록 한 문장에 주어와 서술어가 두 개 이상 들어가지 않도록 단문을 쓰는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접속사도 지나차게 많이 쓰면 글이 늘어져 버린다. 가능하다면 불필요한 접속사를 빼면 글이 오히려 전보다 잘 읽힌다. 접속사는 꼭 필요한 부분에 국한하여 최소화하자.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것도 글을 지루하게 만든다. 초고에서 반복 사용하지만 퇴고할 때 비슷한 의미의 다른 단어로 바꿔 문장의 변화를 주면 도움이 된다. 최근 책의 흐름은 글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이다. 포근한 에세이(essay)느낌, 객관적 칼럼, 아날로그(analogue)감성에 맞는 글, 사진이 들어간 이미지(image) 등 글의 내용을 한 층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해야 한다. 인터넷 매체라면 꼭 필수 사항으로 반영해야 한다. 꼭 기억해야 하는 흐름이 바로 시각적 이미지이다. 단지 글이라는 인식에 빠지기 쉽지만 이미지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글, 에세이(Essay) 등이라면 한편의 영화를 만들 듯 섬세한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은 글의 흐름 곧 내용의 연속성에 치중하다보니 글의 보조 수단 정도로 취급하지만, ‘커피’에 관한 글에는 커피를, ‘크리스마스’를 언급한 단락에는 크리스마스를 찍은 사진을 적당히 넣는 식이다. 의미와 의미가 하나의 맥으로 이어지듯 눈에 보이는 형태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이고 대세임을 반드시 기억하면 좋겠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이미지로 보여주거나 언어로 못다한 이야기를 이미지로 나타내게 된다면 같은 내용임에도 몇 배로 풍성해지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개수가 많다고 내용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적은 수라도 효과적으로 꼭 필요하게 이상적으로 넣어야한다. 자신이 찍은 가장 좋아하는 사진에 대해 찍기 전이나 찍은 후위 일들에서부터 풀어나갈 수도 있다. 초고가 완성되면, 퇴고를 시작하면서 세련된 내러티브(narrative)로 바꿔줘야 한다. 여기서 콘텐츠를 독자들의 기대에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색한 문장 고치고, 긴 문단 간소화한다. 불필요한 단어 삭제하고 비어있는 부분 살을 붙인다. 흐름에 어울이지 않은 것은 과감히 삭제한다. 문법 확인하고 오자 잡는다. 초고 작업보다 재고 작업의 시간이 더 걸려도 걱정하지 말자. 모든 단어, 문장, 문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점이 바로 이 때다. 원고를 마지막으로 손질하는 삼고에서 문법적 실수를 잡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크게 소리내어 읽고 어색하게 들리는 부분을 수정하는 것이다. 글이 입에 착착 자연스럽게 붙을 때까지 문장을 바꿀 수 있다. 이 부분을 건너뛰면 오자나 실수가 꼭 나온다. 독자는 반복되는 뻔한 일상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잡아내는 솔직하고 신선한 글에 관심과 흥미를 가진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크리스마스보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더 들뜨고 설레이는 것처럼. 글쓰기는 다가 올 책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동반한다. 나만의 솔직한 글쓰기가 출발점이 되어 자신의 책을 품에 안은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펜을 들면 어떨까. 포기하기 보다는 자신이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겨 보기를 권한다. 당장은 어설프고 부족해 보여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해 나간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손에는 자신이 직접 쓴 책 한권이 들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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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관계를 이어주는 글쓰기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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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시인 윤동주의 삶이 주는 7가지 교훈
- 시인 윤동주 서거 77주년이다. 2월 16일, 오늘은 시인 윤동주가 옥중에서 서거한 지 77주년이다. 몇 년전 민족저항 시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며 윤동주 시인탄생 100주년 행사를 다산문화예술진흥원(구, 근대문화진흥원)은 두 주간 동안 인사동 갤러리에서 행사를 가진바 있다. 일반인들 특히 시인, 주부, 교수, 수녀, 승려,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수 천여명이 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전시회는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만주 북간도를 중심으로 시작해서 그의 사후 출판된 유고 시집과 육필원고 그리고 추모 기념 작품들까지 300여점의 작품을 통해 처절했던 시인의 삶의 궤적을 소개하였다. 이 전시회에서 참석자들은 1948년 유고시집과 1955년 발행된 초판시집, ‘별헤는 밤’, ‘십자가’ 등 캘리그라피로 쓴 시 작품 등을 주목하였고, 공연, 기념강연과 시낭송 시음회 등을 통하여 시인의 정신을 되새긴 적이 있다. 모두들 왜 그렇게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사람들은 묻는다.“왜 윤동주 시인인가?”라고 말이다.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반도의 주변 인물이기에 우리가 무관심해왔던 탓인지 중국이 자기네 시인이라고 도용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사실 자유 대한민국의 보배이자, 자랑이다. 가슴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하겠다. 그의 조명해 보면, 짧은 인생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시인 윤동주의 삶을 주목하면 배우게 되는 7가지 인생교훈이 있다. 첫째, 시인 윤동주에겐 삶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있다. 송몽규와 문익환이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일본 유학까지 같이 간 강처중도 있었다.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함께 자란 친구들과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바로 친구 문익환이 진학하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옥중에까지 송몽규와 함께 저항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둘 다 같은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평생을 같이하며 죽음에 까지 함께하는 이런 친구를 가졌는가. 둘째, 시인 윤동주에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명동학교를 거쳐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광명학교, 연희전문학교를 넘어 일본 릿교대와 동지사대에 까지 유학하며 공부하였다. 그의 삶의 여정은 배움의 길이었다. 배움을 위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해외까지 가서 생활한 것이다. 셋째, 시인 윤동주에겐 남다른 한글사랑이 있다. 시인 윤동주의 한글 작품중 눈에 띄는 것은 「문우(文友)」에 발표한 작품인데, 그리고 이는 최소한 1941년 6월「문우(文友)」는 5호를 마지막으로 한글사용 금지라는 시대의 압박으로 종간되는데, 그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티며 작품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사실과 문학을 사랑했던 그들이었기에 숱한 고생 속에 겨우 모았던 원고 대부분이 검열에 걸려서 게재 불가능이 되었던 사실과, 식민지 공간 속에서 총력전의 군국주의 체제 강화로 인해 교우회 발행의 「문우」는 해산되는 마지막호 전체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일문(日文)으로 쓰여져 있을 정도였지만, 윤동주와 송몽규, 강처중 세친구의 시만은 끝까지 한글 작품으로 남아 있다. 넷째, 시인 윤동주에겐 좋은 멘토가 있다. 일제강점기하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으로 기독교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한 곳, 북간도! 김약연 목사님을 비롯하여 아리랑의 춘사 나윤규, 조두남, 윤극영, 이동휘 등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손에 쥐고 시대적 소명을 받고 북간도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고, 독립을 위해 헌신했는지, 그들의 희생과 눈물과 기도가 그에겐 좋은 멘토였다. 문학의 길에서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서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어갔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양하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그렇게 해서 조선일보에 시「아우의 인상」와 1939년 2월 조선일보에 수필 「달을쏘다」를 발표하게 된다.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다섯째, 시인 윤동주에겐 불의에 도전하는 저항정신이 있었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와서 그가 처음 부딪힌 것은 뜻밖에 일제의‘신사참배’강요였다. 일제는 한민족의 회유와 탄압, 말살이라는 정책을 가지고 그 일환으로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심지어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인신사참배 정책에 동료 학생들과 저항하면서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휴교에 처하게 되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가 침묵하며 불의에 동조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겐 도전을 준다. 여섯째, 시인 윤동주에겐 자기희생을 감당하는 자기성찰이 있다. ‘참회’와 ‘십자가정신“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기 위해 한 ‘창씨개명’을 평생 후회하며 참회하는 자기성찰이 있었다. 시대의 아픔을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기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하고, 잘못한 것에 대한 진실한 참회는 맑은 양심의 기초가 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반드시 해방의 날은 오리라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있다. 그래서 더욱 빚진 심정으로 민족의 고난과 역사에 자기를 헌신하게 된다. ‘십자가’시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겠다고 다짐하고 순례자의 삶을 묵묵히 살아간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더 깊어져야 할 것 같다. 일곱째, 시인 윤동주에겐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시(詩)로 다시 부활한 ‘시 세계’가 있다. 시인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으로 마땅히 감당해야할 고뇌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맑은 영혼과 깨끗한 시심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죽음을 맞았다. 윤동주 시인은 옥중에서 무명한 자로 남긴, 그의 정신세계의 표현이자 삶의 고백서인 두 권의 자필 시집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를 아는 지인과 가족들이 1947년 2월에 가진 추도회에서 유작 시집이 처음 출판되어 소개된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시인, 그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인《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시집이 나온 이후 잠시 죽은 것 같았던 그 죽음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았고 다시 시(詩)로 부활하여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살아나며, 전 세계인이 기억하는 한류시인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 그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시인 윤동주는 우리들에게 참 아름다운 시어를 남겼다. 육신은 비록 처참하게 산화되었지만 어려웠던 시대를 별빛처럼 빛낸 시인을 다시 기억하고 짧은 삶이지만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 시대의 아픔을 안고 밤하늘에 별빛같은 삶을 산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다시 추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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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시인 윤동주의 삶이 주는 7가지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