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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76
    바른 신학운동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신학이란 상아탑학문이나 응용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일 뿐 학문으로 논설이나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체험적 신앙이요, 실천적 복음 그 자체입니다. 머리에 맴도는 학문이 아닌 가슴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실천이요, 체험 그 자체입니다.“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신령과 진정이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종교적 대상인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고 하버드대학의 모토로 삼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입니다.그러기에 바른 신학운동이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학문적인 연구로 삼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사렛에서의 인간 예수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탄생 때 하늘의 천사가 말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신약성경에만 1,390번이나 나타난 예수에 대한 사건 속에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마 1:18).◦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느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바른 신학 자체가 오직 그리스도인 것은 예수님의 상황 설명이나 배경 설명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 대한 감추어진 삶 속의 비밀로 인한 생명적 삶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리려는 의욕이나 열심히 아니라 그리고 교재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 속에 생명으로 역사 하시는 그분이 내 속에 계심에서 오는 나 자신의 이야기와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학 자체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한 것입니다.영적 생명운동은 오직 믿음입니다. 영성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즉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깁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개혁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주장은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믿고 성경이 말씀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든 육체적인 것들과 악한 것들이 개혁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나타나는 결과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대상을 우상으로 만드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예수를 자기 성공의 도구로 사용함은 분명히 믿음이 아닙니다.믿음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믿음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는 분명한 영적 변화인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1-0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8
    얼마 전 종로 3가에 있는 H음식점에서 열린 이희국 시인의 북-콘서트에 갔다. 손해일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장을 비롯한 시인들이 100여 석의 좌석에 앉아 시인의 시를 감상한다. 유명 낭송가들이 시인의 「다리」·「아버지」등의 작품을 낭송한다. “섬으로 가는 다리가 놓이고/ 사람들은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어린 시절 그런 대교 같은 선생님은/ 나의 다리였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시던 부모님/ 나는 어둑할 때가지 교실에 남아 책을 읽었다// 창밖에 눈이 내리던 날/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 국어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교무실로, 집으로 데려가 주셨다// 외진 구석에 피어 있던 꽃, 어루만지며/ 목말까지 태워주신 사랑은/ 겨울에서 봄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창밖에는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꼬리를 문 차들이 어둠을 밝히며 영종대교를 지나고 있다// 바닷길 위에 길이 훤하다”(이희국,「다리」전문). 어릴 적 시인의 외로움을 달래 주던 선생님의 다사로운 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수천 명의 불임 여성을 임신하게 한 일로도 유명한 그는 약사 시인이다. 아마도 어릴 적 자신의 외로움을 감싸주었던 “국어 선생님”이 있었기에 그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는 지도 모른다. 그는 약국을 운영하여 많은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의 싹을 심어 주기도 하였다. 필자가 이 북콘서트를 소개하는 것은 바로 그와 비슷한 문화를 영위해 가는 시인들의 삶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아직도 많은 시인들이 자비를 들여 시집을 상재하고 북-콘서트를 연다. 유명 가수가 노래를 하고, 낭송가들이 장내 분위기를 압도하는 낭송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시의 세계를 통해 감동의 전율을 느낀다. 그렇다. 그렇게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또하나의 시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시를 영위하는 기쁨을 가족이나 지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쩌면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시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허당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외로움의 바다에서 자신만의 항해를 계속한다. 누군가가 알아 주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외로움은 시를 통해서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니까. 낭송회가 끝나면 끼리끼리 낭만적인 분위기를 찾아서 간다. 나도 K시인, Y시인과 함께 전종안 시인의 카페로 간다. 서울역 11번 출구에서 나와 한적한 공원과 고층 빌딩들 사이를 지나 조그만 3층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면 그의 카페가 있다. 크럼펫과 드럼 등의 악기들이 무대와 한 쪽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다. 녹음실처럼 방송 시설도 그럴 듯하다. 서로간의 악수를 나누고 우리는 시낭송회를 시작한다. “우이동 골짜기에 비가 내리고/ 산골짜기 내려오는 심포니 5번/ 안개는 등성이에서 미끄럼타면서/ 바이얼린 현을 추스린다네// 창문 열고 바라보는 비에 젖은 山/ 흥분한 낙수물은 클래식 되어/ 땅 밑으로 숨은 수줍음 찾아/ 하나 되어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낙상을 염려하는 한 떨기 음악/ 수백 년 뛰어내린 꿈을 낚으리/ 비는 물길 따라 도시를 적시는데/ 저렇게 많은 현을 어찌하리오/ 첼로와 하프까지 가세하여서/ 바순이 걸러내는 도시의 방귀/ 당신의 입술을 기다리면서/ 벗겨낸 권태를 떨구렵니다// 넉넉한 시인의 훈훈한 입김/ 당신의 귓바퀴는 낙조가 되고/ 전등처럼 매달린 꿈의 청춘은/ 환하게 웃을 날을 기다립니다”(정신재,「비오는 숲속에서」전문)이렇게 도시의 먼지가 걸러지고 순화된 정서를 수놓으면, 또하나의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래서 우리는 낭만에 젖고 그동안 찌들렸던 스트레스를 단숨에 날려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도 인간미를 찾아 진실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자신을 어둠으로부터 건져줄 구원의 문이 될 수 있다면, 남들이 알아 주지 않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리하여 시 감상은 개인의 순수성을 회복할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를 생각한다면 순수는 어린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른에게도 있다. ‘순수’는 ‘순진’과는 다르다. 순진은 사람들이 상대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를 때 비아냥거릴 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순수는 진실이나 믿음과 통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태복음> 18:1-5)‘어린 아이’는 순수하며 정직하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를 낮”춘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비유로 해서 천국에 들어갈 자의 자격을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는 무구(無垢)하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 유희, 스스로 회전해 오는 차륜, 제 일 운동, 성스러운 긍정이다. 정신은 이제야 스스로의 의지를 의지한다. 세계를 잃었던 정신이 스스로의 세계를 획득한다. 시가 죄악으로 오염된 존재에 순수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구원의 문을 열게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 순수를 되찾을 수 있는 영감의 이슬을 찾아 도시로 나아간다. 행복하시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10-26
  • 목회는 쉬운 것이다·75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라는 주제는 세계교회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안주하고 있던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의식들이 무너져야함은 예루살렘 성전의 무용성이 곧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먹고사는 도구로 매여 달린 수많은 사람들의 수단이 멈추어져야 하는 것처럼 그러기에 예수님이 고발되는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로마 천주교회도 동일한 이방적 신앙 방법에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에 기독교라는 허울로 로마 가톨릭의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지속적으로 부패라는 큰 덩어리들이 개혁자들로 통하여 무너뜨린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 속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가장 온갖 잡신들에 얽혀 현대교회의 부흥이라는 명예로움으로 우리는 안고 있으며 안주하고 있습니다.유교와 무교와 전통적 습관 속에서 그래도 현실 속에 피나는 고통으로 사신 선진들을 통해 오늘과 같은 터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래도 50년대는 피나는 희생으로 지켜왔다면 서구의 긍정신학인 촬스 피니나 로버트 슐러의 현실 축복에 얽힌 곳에 유럽의 신학과 프로그램이 교회를 마케팅 중심과 기업형으로 완전히 뒤덮어 성경도, 목회도, 신앙 자체가 둔갑된 시대에 장종현 박사는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그리고 선언문으로 현장적 실천을 말했고 이제 그 일의 성취인 근본적 원인에서 목사의 진정한 자리 찾기에 구약적 제사장이 아니라 성경적 목사의 정상적인 위치를 외친 것입니다. 이제 실천적 삶의 확실한 지침을 설명해야 할 차례입니다. 제시와 행동방안입니다. 이미 기본적인 틀은 완성되었습니다.개혁주의 5대 표어가 중심이 된 7대 선언문입니다.바른 신앙운동은 오직 성경입니다.바른 신앙운동은 신앙의 기본이 교회의 의무입니다. 교회의 모든 방편은 성경이기에 성경의 말씀에 여러 가지 인간적 설명이 아닌 말씀 자체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말한다고 설명하다가 말씀의 생명을 놓쳐 버립니다. 신앙의 방법으로 모든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 신앙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의식, 용어(드린다, 섬긴다, 헌신)들이 예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 습관, 멀리 떨어진 우상적 신이 아니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장치, 가운, 꽃꽂이, 십자가, 조명, 화려한 강대상, 강단 위에 앉는 의자, 성찬상, 촛대, 목사의 가운, 영상, 교회 버스 운행, 동일한 제복의 안내위원, 형상물, 성화, 제물, 헌금이란 용어, 교회 돈 관리, 교회 홍보, 기타 우리의 원래의 모습을 가리려는 방법이나 도구들입니다.이런 것들이 제사장 문화에서 발생된 가리개의 것들입니다. 이런 것에 능숙한 로마 천주교회, 동방정교회, 한국적인 우상적 이방종교의 신전들이 사용한 도구와 방법입니다.이미 구속을 약속하신 창세기 2장 21절에 범죄한 아담과 여자가 가린 무화과 나뭇잎으로의 고통스러운 가리움을 가죽옷으로 바꿔주신 하나님의 계획으로 성경 전체에 이 의식적 가림에 대한 행위는 무참하게 멸망시키셨습니다.그런 행위가 다른 신이요, 우상이요, 입으로 염불하는 그럴 듯해 보이는 망령됨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은 곧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일 뿐입니다. 그곳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더라“(행 2:47)바른 신앙운동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줍니다. 한국적 의식이 영성을 망가뜨립니다. 설교한 후 광고시간에 다 까먹게 만듭니다. 초신자가 학습받고 세례받는 1년에 모든 신앙이 세속화 되게 만듭니다.예배 순서의 복잡성이 영적 순수성을 망가지게 합니다. 지금의 순서가 유교적 제사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비서도, 순서도, 의식도 없습니다. 신자에게 예수와 함께 계심의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게 합니다.요즘 원터치로 스마트폰 시대에 예수님 만나기를 중간 뚜쟁이들인 제사장들이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어떻게 복음화를 가능케 하겠는가 말입니다.예수님을 만나는데 순서절차나 준비물이 필요없습니다. 70인 전도대원을 보내실 때도 전대를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0-26
  • 민족이란?
    우리말에 ‘겨레’라는 말이 지닌 그 의미는 한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들, 동포, 민족을 말하며 “배달겨레”로 알게 한다. 여기서 그 삶의 살아가는 형태를 보아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함으로써 언어나 풍습 따위 문화내용을 함께하는 인간. 집단. 겨레를 가리킴에서 그 삶의 내용을 엿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단일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차지하고 있거나, 한 민족이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상태의 국가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한 민족의 공통적 감정, 언어, 풍습, 생활환경 등을 기본으로 하여 그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기에 여기에서 그 민족문화의 특성을 알게 한다. 곧 이는 그 민족이 겪어 온 역사가 경험되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민족 문화적 공통사항에는 언어, 종교, 세계관, 사회조직, 경제생활, 그 밖의 생활양식 등이 포함된다. 민족은 문화적 특징을 바탕으로 하여 설정된 범주이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관념 자체가 문화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을 분류할 때 같은 언어가 주된 기준으로 사용됨에서 이를 알게 된다. 언어는 민족 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이고 사람의 사고방식과 심성(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 지능적 소질, 습관, 신념(정신적 특성) 참된 본성, 잘 드러나기 때문에 여기서 민족의식은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됨을 알게 한다. 현대에 와서 민족의 개념은 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한 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민문화와 국민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바로 민족의 양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민과 민족이 엄격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여하간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자신에 의한 자각, 또는 집단에 의한 인식(민족의식)을 계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민족은 공동사회적 성격을 갖춘 사회 집단이기 때문에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강한 동료의식을 갖고 있다. 사실로 민족은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면서 서서히 그 집단적 확대와 통일을 실현했으며 대민족으로서 명확한 민족의식(자기 집단이라는 자기 인식)을 갖게 된 것은 근대에 와서이다.외형적인 조건으로서는 중세 말기 이후 상품생산의 편리한 교통과 국왕으로 부터 절대적인 왕권확립과 가톨릭교회의 분열 등으로 사회적인 상황을 알게 한다. 이에 따라 민족 구성원 상호간에 전체적인 접촉이 촉진되어 집단적 협동이 강화되었기에 그 결과 능동적인 민족적 자의식이 성립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민족의식에서 합리적.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애국사상의 체계화이며 이는 곧 민족주의임도 알게 한다. 현대에 와서 민족의 개념은 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한 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민문화와 국민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바로 민족의 양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민과 민족이 엄격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여하간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자신에 의한 자각, 또는 집단에 의한 인식(민족의식)을 계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민족은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적 성격을 갖춘 사회 집단이기 때문에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강한 동료의식을 갖고 있다. 이를 성서에서 살피게 되면 구원의 역사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상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으로(신 7:6) 친히 택하셨음을 거듭 선포함을 알게 한다.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번역한 곳에서는 “백성” “민족”으로 이해하여 ‘한 지역의 전체 주민의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구약과 신약에서는 인류의 각종, 민족 구분에 놀랄만한 관심을 가진다. 성서에 나타난 등장인물을 보면 하나님, 민족들, 이스라엘이 등장한다. 민족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삶의 모체이며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와 소명의 근거가 됨을 알게 한다.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민족들의 이야기들 속에 히브리인의 조상들을 포함한 70이상의 다른 종족의 집단들이 언급되어 있다. 성서에 계시된 선사시대 세계의 제1기가 노아의 대홍수로써 막을 내린 후 인류는 노아로 부터 새 출발을 시작하여 종족들, 언어들, 나라들, 민족들로 분화한다(창 10:5, 20, 31).이 범주들은 각각 인류의 특성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성들은 인류의 삶과 역사의 바탕이 되는 무한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표현들이 생겨난다. 구약과 신약에서 보면 인류의 각종 민족 구분에 놀랄만한 관심을 나타낸다. 특히 구약은 인종에 관한 다대한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0-19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7
    그 해 겨울 소도시 전주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함박눈이 정원의 과실나무들을 솜이불처럼 덮었고, 온 도시가 하얀 눈으로 칠해졌다. 우리집에서 백 미터 떨어져 있던 D교회는 전주역 가는 길목에 있었다. 벽돌집으로 지어진 예배당은 고딕 양식의 높다란 창문이 있었고, 뾰족 첨탑 위의 하얀 십자가가 멀리서도 보일 만큼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예배당 옆으로 목조로 된 종탑이 있었는데, 거기서 커다란 종이 새벽에 울릴 때마다 어머니는 종종 걸음으로 예배당으로 발길을 옮기곤 하였다. 어머니의 신앙심은 가족에게도 전해졌고, 3남 4녀의 형제들은 모두 교회에서 성가대나 교사로 활동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우리 형제들은 다가올 크리스마스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12월이 되면 어린이들은 성극이나 성극, 성경 암송 등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였고, 우리 형제들은 제각기 칸타타나 성경 암송 등을 저녁 늦게까지 연습하였다. 초저녁에 저녁을 먹고 나면 여섯 살 배기인 나도 초등학생인 누나들을 따라 예배당에 갔습니다. 소도시 교회인지라 우리를 지도하는 교사 J는 칸타타 연습을 끝낸 후 아이들을 모아 연습시키곤 하였다. 그러므로 J선생이 나타나기 전의 한 시간 가량은 아이들의 놀이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교육관 마룻바닥 위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공기 놀이도 하였다. 나는 착한 아이여서 누나들과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 옆에는 단발 머리를 한 영희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유치부 어린이로서, 전주 형무소에 가서 공연할 성경을 암송하는 나의 단짝이었다. 나는 누나들 옆에서 영희와 나란히 낮아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영희는 이 세상 어떤 여자애보다도 예뻤다. 계란형의 얼굴에 눈이 큰 영희는 내 마음을 쏙 빼앗아, 나는 그녀의 눈빛 속으로 속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녀만 생각하면 수많은 공상이 천장 위에 떠다니는 것이었다. 빨간 오픈카를 타고 그녀와 함께 갈대밭 사이를 달리는 광경이 떠오르고, 아주 예쁜 침대 위에서 공주가 된 그녀와 달콤한 잠을 자는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얼굴이 예쁜 여자 아이한테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서양화에서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예쁜 여자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하는 모습이 생각났다. 그래서 얼굴이 예쁜 영희의 볼에 그만 나도 모르게 뽀뽀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갑작스런 뽀뽀 세례를 받은 영희가 마구 울음을 터뜨렸다. 이 모습을 본 누나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너, 왜 그러냐? 좋으면 좋다고 말로 헐 것이지.”누나들은 영희를 달래느라 눈깔 사탕을 구해다 주었다. 영희는 그 사탕을 볼에 가득 담고 울음을 그쳤다. 세월이 흘러 나는 서울로 올라와 S고에 입학을 하였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편지 한 통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여학생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나는 여학생이 먼저 편지를 보낸 사연을 발신자에게 당당히 물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J중학교 졸업 앨범을 보고 내 주소를 찾아냈다며, 나와 펜팔로 교제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편지가 몇 차례 오가는 가운데 나는 그 여학생이 어릴 적 영희임을 알게 되었다. 편지 교제가 일 년이 지난 즈음 영희에게서 소식이 뚝 끊겼다. 나는 영희가 어디로 이사라도 갔나 싶어 궁금하였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던 터라 영희가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편지를 끊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공부하는 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짝꿍인 K가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가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한다면서 쉬는 시간에도 책을 들고 다니기에 입시에 대한 압박감에서 그러는 줄 알았다. 고교를 졸업한 후, K는 동창회 모임에도 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들 사이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K가 병태의 펜팔 친구를 빼앗아 결혼해 버렸대.”나는 그제서야 고교 시절 K가 나에게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K는 나의 펜팔 친구였던 영희와 결혼하게 되어 삼십 년 이상을 동창회에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자식. 그럼 진작 나한테 고백을 할 것이지.’요즘도 K는 동창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K와 친한 H에게 전갈을 보냈다. ‘나는 이제 K를 용서하였으니, 이제 동창회에 나와도 된다는…’ 그러나 K는 동창회에 나오지 못 할 것이다. 나보다도 다른 동창의 따가운 눈초리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K는 평생토록 나에게 죄의식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이제 머지 않아 또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K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겨울이 되면 내리는 함박눈처럼 나는 그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태복음> 12:20). 주님이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셨음을 믿으면 구원받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어둠 가운데 헤매이고 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10-19
  • 목회는 쉬운 것이다·74
    외적인 장엄한 의식을 예배의 본질로 보낸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왜냐하면, 진리의 하나님이 받으시기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영적이요 성령중심적입니다. 찬송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은 마음과 뜻과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으로 화려한 교회장식이나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의 장식으로가 아닌 성가대 중심의 찬양보다 회중 중심의 찬양으로 칼빈의 가르침은 시편 찬송을 존중하여 악기사용을 반대했다고 합니다.결국, 인간이 조작한 과잉이 하나님의 진심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복한 설명이 얼마나 영적 감각을 마비시키는가? 오늘 우리가 하는 준비는 모두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훼방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칼빈은 교회음악에 정통한 사람이었으나 교회에서 악기사용을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 천주교회가 악기를 예배중심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적인 감각을 충동하는 이유이고 외적인 오만함과 엄숙해 보이려는 준비된 찬양보다 생생한 음성으로 드리는 찬양을 받으신다는 이유입니다.악기는 인간중심적이요 찬양대의 준비조차도 그리고 현대 찬양단의 소란스러움 모두가 인간중심이라는 것입니다.기도에 대한 것도 주문 외우듯,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나 일반적 기도문을 만들어 반복하는 것 모두가 틀에 박힌 기도를 하게 되면 성령을 제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 하는 기도는 주문과 같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형상과 우상에 대한 이야기로마 천주교회의 예배는 미신적이어서 천사나 성자들 또는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깁니다. 오늘 우리가 주께서 금하시는 인간이 고안한 예배가 곧 로마 천주교회를 모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고안한 상징물은 육적이요, 맹목적이며, 무능하게 인간의 본성을 유도하는 것입니다.성의에 대한 이야기성의를 착용하는 것이나 성찬을 받을 때 제단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이나 그리고 세례를 베풀면서 성호를 긋는 행위는 성경적인 배경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습관처럼 생각했던 것이 음행하는 죄를 짓는 것이요, 사단이 교회의 중심에 세워 넣은 우상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성찬에 대한 이야기성찬의 의미를 성경에서는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이 귀중한 일을 의식에 묶여서 아무 의미를 알 수도 없게 코앞에 들이대 먹으라고 하는 일은 참으로 몸과 피를 범하게 했고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왜 성찬이 필요했는가?주의 죽으심의 확신이 중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는 일은 그가 죽으심에 대한 일인가. 그가 죽으시기 전의 일인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가 죽지 않으신 복잡한 사건 속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만일 죽으심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일은 헛수고인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설명이나 변명이나 그가 하나님의 일인가 아닌가 따지고 설명하고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곧 생명으로 연결되는 순간의 모습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이란 새 생명의 확신이 우리의 삶 자체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가치를 논설을 펼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그 귀중한 사실을 의식적으로 코앞에 들이대 자신을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행사로 마친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최소한 내가 죽은 예수와 있는가 아직 죽지 이니한 사람들 틈에 있는가를 나 자신이 의식할 수 있는 자율의 선택을 주어야 합니다. 이 행사를 지속적으로 강조하신 이유가 뱀에게 인간적 아주 좋은 조건을 받은 인간 원래의 모습에 대한 양심적 고백입니다. 이럴 때 주님의 죽으심에서 발생한 부활적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주님의 피흘림에 대한 새생명의 환희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0-19
  • 한반도의 분단을 생각해 본다
    독일의 사회학자이며 정치경제학자인 ‘베버’(Max Weber)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은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의한 것이며 이 가치관 수립에 비합리적인 요소인 종교가 그 기반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을”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그는 이를 해명함에 대하여 이 문제를 다시 비교사회학적인 <세계 종교와 경제 윤리> 연구로 전개시켜 종교사회학에 필요한 많은 관점과 개념을 밝힌 바 있다. 오늘의 분단된 우리민족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그 삶을 손수 경험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 체재에서 해방을 맞은 기쁨에 이어 우리 민족의 조국 해방이라는 민족적 희열과 더불어서 생겨난 비극적인 이념적인 문제로 한 민족의 아픈 분단의 역사에서 살아옴은 민족의 부끄러움임을 알게 한다. 이는 곧 우리 한 민족이 그동안 분단을 당연한 사실로 인정하면서 통일에 대한 진정한 사실을 외면하면서 문제의식이 없이 살아 왔던 그동안 우리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평양의 인민들이 남한의 대통령에 대단한 환영으로 그들의 뜻이 삶의 비교의식에서 보여줌은 통일에 대한 그동안 우리의 무심한 태도에 우리민족 서로가 부끄러움을 갖는다. 이렇게 분단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같은 민족으로 긍지는 고사하고 두 동강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질적 형편은 우리 모두의 삶에 자아 분열로 뿐만 아니라 민족의 분열로 이어 지기 때문에 그동안 분열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삶이었음을 통감한다. 이는 통일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슬쩍 스치며 살아왔다가 남과 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결속한 만남은 오늘의 민족통일이라는 명제를 두고 오늘을 잘 살아가는데 한 민족의 만남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생각하며 삶의 경제적인 면에서의 그 가치를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자기 확립의 힘이 없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데 힘이 부족했음을 알게 한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에게 자기 확립의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해방은 민족의 자기 확립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니다. 분단은 민족과 국민의 주체적 노력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삶의 모든 태도가 타의 의존에서는 아니됨을 알게 된다. 삼천리 반도로 국토를 금수강산을 이루고 살아 온 우리 한 민족이 나눠진 체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 모두가 8.15 해방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잠정적으로 그어진 3.8선으로 말미암아 그어진 분단이 오늘날에까지 오게 된 것, 그 모두가 한반도의 지도자들이 민족분단 극복을 위한 한 민족의 삶에 그 사명감을 인식하지 못하고 차일피일로 민족통일의 때를 가누지 못함에 있어서 이를 반성하게 한다. 따라서 해방 후에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족주의적인 근대에 맞는 삶을 회복될 뻔했으나 그 당시 근대 국가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당파에 얽힌 권력 때문에 통일의 꿈이 사라졌음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온 삶을 알게 된 것은 부정적인 정치이념과의 관계에 의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정치이념은 결국 분단을 고착화 시켰으며 그러므로 이 부정적인 이념은 남과 북이 이념적으로 서로 달리하여 체제를 굳히고 부정적 이념들이 서로의 주장들로 일색이 되어 주체성이 손실되어 오다가 민족주의가 사라져 왔음을 보게 한다. 국가주의(Nationalism)로 이는 우리말로 여기면 ‘국민주의’, ‘민족주의’라 한다. 여기서 챙겨 보면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첫째 지금 한반도에 동질성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민족의 이질화를 막아야 한다. 한반도 안에 남과 북의 언어도 점차로 이질화 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 지금의 남과 북은 자주적인가? 생각해 보면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해방된 우리 조국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과연 독립했는가? 현실로 경제적인 면을 보면 북은 외국의 빚에 압박을 받고 있으며 남은 외자 중심의 경제 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남쪽의 경제성장이 민족 자본에 의한 자주적인 성장이라 하겠는가? 자주 경제의 입장에서 보면 남한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 기업이 들어와 민생을 증대시켜주는 지는 의심스럽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정치적인 뒤에 나타난 제국주의는 ‘신제국주의’라는 이념이 국제경제질서를 꿈꾸며 나타나고 있기에 오늘의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갱신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다만 민족 경제와 민족 자본이 반드시 민중을 위한 것 일 때 바람직함을 알게 한다. 이는 곧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도 역시 그것은 ‘민중’이 주인 됨을 알게 한다. 우리는 ‘한 조국이 분단을 넘어서야 한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위한 기도”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0-05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6
    남자는 황금빛 연애 시절이 있고, 결혼하여 가장으로서 대접받을 때가 있고, 장년에 전문가로 활동할 때가 있으며, 노년에 가정에 봉사할 때가 있다. 요즘 퇴직하여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남자들을 보면, 처량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남자가 젊은 시절에 가족을 위하여 직장에서 눈칫밥 먹으며 열심히 일했던 때를 아내는 생각 안 하는지, 집에서 삼식이 노릇 하지 말고 나가서 단돈 백 만원이라도 벌어 오란다. 이를 보면 이것이 남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다. 물론 아내가 폐경기를 지나게 되면 여성 호르몬이 줄어듦에 따라 자연히 남성 호르몬이 많아지게 되어 남자를 압도하는 야성적인 힘이 넘치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가끔 아내의 행동을 볼라치면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이 있다. 그 남자는 신혼 시절을 생각해 낸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아내가 예쁜 쟁반 위의 작은 접시에 사과를 내 온다. 예쁘게 벗긴 사과 껍질이 토끼 귀 모양 예쁘다. “당신도 들지 그래요.”“난 나중에 들테니 먼저 들어요.”아내의 말이 매우 공손하다. 그 남자는 신문을 들여다 보면서 포크로 사과를 찍어서 입에 갖다 댄다. 아랫목에 앉은 그 남자의 모습은 제법 의젓하다. 신혼 시절 이후 삼십 년이 지났다. 저녁 식사 후 아내가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한다. “여보. 사과 좀 깎아줘요.” “음? 으응.” 그 남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껍질째 먹을 테니까 수세미로 박박 밀어 깨끗이 씻어요.”그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해 본다.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그 남자는 어느 순간 바뀌어 버린 부부의 위상을 헤아려 본다. 그때가 아마 아내의 폐경기가 지났을 때부터인 것 같다. 그 남자에 대한 아내의 말투가 명령조로 바뀌어 있다. “나도 당신 만큼 직장 생활 했으니까 우리 집안 일은 반반씩 나누어서 합시다.”아내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이건 이제까지의 관습에 비하면 좀 심하다.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 아내가 가사(家事)를 책임지는 편이다. 대개 아내가 요리를 하고, 청소와 세탁과 설거지도 한다. 그것이 남편이 삼십 년 이상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가정을 책임진 데 대한 보상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은퇴를 하고 나니 아내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것도 많이 달라졌다. 은퇴 후, 아내가 그 남자에게 내민 것은 앞치마 두 벌이었다. 그것도 전철 안에서 산 비닐로 된 앞치마였다. 하나는 빨간색, 다른 하나는 군청색. 그 남자는 그걸 받아들고 뻘쭘하였다. 그리고 못내 섭섭하였다. 이건 아니다. 여기서 물러섰다간 앞으로 가정에서 아내의 노예가 될 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단호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대부 역할을 하는 형님인 S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 남자는 최근 그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구체적으로 알렸다. 그 남자의 말을 듣는 S의 태도가 자못 진지하였다. ‘아아, 형님이 내 편이 되어 주려는가 보다.’ S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듯 오랫동안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 남자가 S에게 귓속말로 물었다.“형수씨는 형님한테 그러지 않지요?”형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 보니까 남자가 바싹 아내 앞에 바싹 엎드려지내야겠더라. 아마 여성이 폐경기가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생겨 강해지나 봐.”그 얘기를 듣고 그 남자는 묵묵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재에 들어가 아내의 구박을 제압할 만한 묘안을 모색하였다. 이제 와서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고, 아내를 황홀하게 해 줄 정력도 남아 있지 않다. 아내와 말다툼을 하자니 위아랫집에 소음 공해를 유발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남자는 집을 나왔다. ‘이대로 가출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잘 꾸며진 아파트 정원을 산책하고, 중랑천을 따라 죽 이어진 산책로를 걸어도 아내를 이길 방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천변에 있는 느티나무와 산수유 나무, 계수나무 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 산책하는 이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줄기도 제법 굵어져 사람 허벅지 넓이로 자란 나무도 있었다. 관리인이 따로 물을 주지 않는 데도 나무들은 어느새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 보니 제법 두터운 뭉게 구름이 파아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남자는 결혼하여 미국으로 간 딸아이를 생각하였다. 평소 말이 없는 그 남자에게 식사 때마다 말동무가 되어 준 아이였다. 이제는 가정 생활도 열심히 하여 얼마 후면 아이도 출산한단다. 그토록 취업이 안 되던 아들놈도 계약직으로나마 취업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집에는 부부만 있을 때가 많다. 집 안은 언제나 고요하다. 아내의 잔소리마저 없으면 공허감이 몰려 올지도 모른다. 주변의 친구 중에는 아내가 없어 외로워 하는 경우도 있다. 그 남자는 생각한다. 그래, 이제 가족을 사랑해 주자. 남자가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10-05
  • 목회는 쉬운 것이다·73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예배의 습성이 루터가 성경을 강조하였으나 구약보다 신약성경을 신앙과 윤리의 기초로 보아 교회전통을 높이 평가하여 성경이 금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나 교회정체에 로마 천주교회의 것을 목사들이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신앙의 원리는 ‘성경이 명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했습니다. 세속정치와 신앙과 윤리만이 아니라 예배와 교회정치도 성경의 교훈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전통과 관습을 부인하고 오직 성경만을 강조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가 성경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도 성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과 도덕의 부분적인 규율이 아니라 완전한 규범입니다. 성경이 허락하지 않은 사람의 권위나 전통에 기초한 어떤 것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방법으로 예배할 때만 하나님이 받으십니다.둘째로 전통이나 인간의 고난에 의존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전적으로 부패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교만으로 눈 멀어서 선을 택할 수 없으므로 회개할 수 있게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과 전통에 호소하면서 인간적인 고난을 예배에 가미하던 자들의 예배의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예배의 지침에 대한 이야기성경에서 예배의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제시가 십계명 가운데에서 하나님에 관한 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1계명부터 4계명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입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다만,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제2계명은 예배의 방법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어떤 인간적인 전통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에 따라 드려야 하고 어떤 인간적인 전통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에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상징물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제3계명은 예배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특히 예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 속성과 규례, 성례, 맹세, 서약, 분깃, 그 외에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명상하고 말하며 기록해야 합니다. 제4계명은 예배하는 시간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이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제 7일로 지켜왔으나 그 후부터 매주 첫째날로 되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되어 있습니다.이것이 기독교의 안식일이요, 신약에서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청교도들은 일하기 위하여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으로 압니다. 구약의 예배는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의식적이었습니다. 구약의 예표나 상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미리 보여주기 위하여 비유나 상징을 제정하였고 또한 그러한 것을 통하여 도덕적 의무를 제시했습니다.성막과 성전제도, 번제, 화제 등의 제사제도, 제사장과 제사장이 입던 에봇과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상징이요 예표들입니다.현대교회 목사가 제사장으로 착각함이란 바로 의식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예수님은 예표와 상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의식에 매여 있다면 분명히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이방적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구약적인 의식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지금 양이나 소를 잡을 필요도 없거니와 제사장의 예복을 입을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화려해 보이는 스톨을 둘러 가운을 입는 것이 거룩한 것으로 착각함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유대적인 제사의식에서 벗어나고 해방한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이제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속에 근거하기 때문에 율법의 그림자나 세상적인 화려함이나 또는 세속적인 미덕과 같이 장엄한 의식을 할 수 없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0-05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50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50.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혜성같이 나타난 침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마 3:2)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똑 같은 말씀을 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이 말씀 가운데서 ‘천국’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 곧 ‘은혜의 왕국’를 가리킨다. 사탄이 우선 지배하고 있는 흑암의 세상에 하나님께서 빛의 왕국을 세우시는 것이다. 나라가 있으면 그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이 나라의 왕으로 임하셨다. 통치를 하려면 법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이미 시내산에서 선포되었지만, 예수께서 오셔서 그 법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태복음 5장의 팔복으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이다. 그 교훈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혜의 왕국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 국민들의 자질과 자격을 매우 세부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하나님 백성의 첫째 조건–회개하나님의 왕국에는 죄를 품고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천국의 입구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어떤 것인가? ①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하나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말씀에 비추어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일이 일어난다. ② 그 다음 단계에서는 그 죄에 대하여 슬퍼해야 한다. 그러한 죄를 품고 살아 온 자신에 모습에 대하여 슬픔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③ 그리고 나서 그 죄를 깊이 통회하고 뉘우치며 회개하는 것이다. ④ 죄를 회개한 다음에는 죄를 미워해야 한다. 죄가 미워지지 않으면 다시 그 죄의 행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⑥ 죄를 미워하면서 죄에서 떠나야 한다.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해서 범하면 안 된다. 혹시 반복되었을지라도 즉시 돌이켜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⑦ 죄를 회개한 다음에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법도를 따라서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해결책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 반복되고 지속되면서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한다. 이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온 시민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교만한 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성품이 온유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이 깨끗해야 왕이신 하나님을 뵐 수 있다. 옳은 일을 지키기 위하여 핍박을 받을 각오도 돼 있어야 한다.하나님의 임시 정부와 공무원들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우신 ‘은혜의 왕국’은 어떤 의미에서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만들어진 하나님의 임시정부에 비유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 하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세운 임시정부의 일꾼들은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으며,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그들은 처절한 투쟁의 현장에서 피흘리며 싸웠다. 마찬가지로, 사탄의 세계에 임시로 세워진 ‘은혜의 왕국’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공무원들은 이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투사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임시 정부의 각료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을 내보내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 10:16~18)고 하셨다. 또 우리의 왕께서는 이 나라의 공무를 수행하는 일꾼들에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셨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노심초사 하며 타협하는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단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일제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투사들은 이런 각오로 일본에 저항하였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세계에 대하여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방법으로 투쟁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맞추어 교회를 개혁하고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력을 다하고 있는가?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긴급동의 교회연합신문에서 기획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50회를 마감하면서 그 동안 기고한 글들을 요약하여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오직 성경’ 정신의 회복–종교개혁의 정신은 ‘오직 성경’이었다. 현대 교회는 성경과 너무 멀어졌다. 그리고 성경을 너무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한다. 여기에 교회 위기가 있다. (2) 목회자 수준 향상을 위한 공동의 노력–교회와 성도들은 목회자의 영적 수준을 능가하기 어렵다. 성직자의 지적, 영적, 도덕적 수준을 높이는 일에 온 교회가 연합하여 노력해야 한다.(3)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성령의 핵심 사역은 방언도 아니고 치유도 아니고, 복음전도의 능력을 더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고 구해야 한다. (4) 복음이 상품화 되어가는 문제–복음을 성도들의 욕구에 맞추어 변질시켜 놓은 것이 현대교회의 치명적인 문제이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여 성도를 회개케 하고 각성시켜야 한다. (5) 성서적 종말 신앙의 부활-기독교는 종말신앙이다. 예수의 권면은 대체로 종말사상에 근거한다. 항상 깨어서 구원의 날, 재림의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라는 것이 신약의 핵심이다. (6) 교회 세속화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오늘날의 현대교회는 화려함과 물질만능주의와 세속화된 음악과 경건하지 못한 예배 때문에 병들고 있다. 이 세속화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7) 지도자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 –성도들은 지도자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기 보다는 그들의 정신과 삶을 보고 배운다. 교회는 철저히 자신을 희생하여 헌신하는 지도자를 찾는다.[결론] 예레미야 선지자가 애타게 탄원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40). 호세아 선지자도 호소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인류의 역사는 ‘타락’과 ‘회복’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단진자 운동의 연속이다. 타락은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만, 회복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과 세속화의 문제는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회복은 절대로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강력한 의지가 발동하고 간절하고 열렬한 심령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이 있어야 변화와 개혁이 시작된다.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대한민국의 성도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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