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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화진 순례길
    필자의 지인 가운데 충북대학교 부총장님으로 근무하시는 오기환 박사님이 계신다. 오 박사님은 안식년을 선교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오랜 준비 끝에 사랑의 원자탄으로 너무나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이 잠든 여수 애양원에서부터 선교사님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의 양화진까지 성구 암송과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하면서 걸으셨다. 이러한 마음은 보통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신앙의 마음이 담겨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사실 해외의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은 시기는 조선이 건국 된지 500여년이 지나면서 수명을 다한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선교사님들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쓸쓸하게 이 땅위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세상에 들어내고자 오 박사님은 여수 애양원에서부터 조용한 시골길은 물론 복잡한 도심의 자동차 매연을 감수 하면서 양화진에 이르렀다. 결국 순례는 열매를 맺어 2016년 12월에 ‘양화진 순례길’ 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필자는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선교는 순교”라는 말을 떠 올리면서 깊은 감명과 함께 오 박사님의 노력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 박사님은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 전에 먼저 양화진 순례길을 택했습니다. 오늘부터 한달 동안 걷고자 하는 이 길은 먼 나라의 유명한 순례길이 아닙니다. 피폐된 조선후기, 개화되지 못한 이 땅이 복음으로 꽃을 피워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을 그리며 찾아온 많은 이방 나라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을 개화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가까이 목숨까지 내어주었던 그들의 삶과 죽음이 광주, 전주, 공주 그리고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남아 있습니다. 몽매한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과 새로운 문화를 전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선교의 사명을 다하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내어준 순교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국을 떠나 낮선 땅 한국에서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헌신으로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 입니다. 이들은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며 한국인이 되고자 했던 이방인’으로, 설령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 땅 구석구석에 그들의 한숨과 눈물과 사랑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곳을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라고 각오를 밝히고 있다. 인간은 누구든지 순례길을 걷고 있다. 솔로몬은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떳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공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전 세대들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전 1:2-11).”솔로몬은 우리에게 태어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길속에서 누구를 의지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즉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의 길은 헛되고 무익함을 말한다. 하나님만이 인생에게 참된 길을 가르치는 분이며, 영원한 가치를 주시는 분이심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솔로몬은 ‘아가서’는 청년의 시기에, ‘잠언’은 중년의 시기에, 그런데 전도서는 노년기에 기록한 것으로 성서학자들이 말한다. 오기환 박사님께서 걸었던 순례길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귀한 시간이다. 특히 순례길 가운데 어려움을 겪은 일들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승화시킨 경험들은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천로 역정’을 생각나게도 한다. 주님을 향한 선교의 열정이 가득 담겨진 책인 ‘양화진 순례길’을 접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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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8-02-12
  • 스포츠와 남북한의 관계
    동계 올림픽이 한국의 평창에서 열린다. 세계의 많은 눈들이 그곳을 향하겠고, 선수와 임원 그리고 방송 카메라가 한동안 평창에 머무를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그동안 얼어붙어서 좀처럼 녹을 것 같지 않던 남북한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스포츠 분야에서 대화가 시작된 듯하다. 어쩌면 스포츠는 매력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일 수 있다. 두산 백과사전에 의하면 ‘스포츠는 심한 육체활동이나 연습의 요소도 포함하는 말이다. 현대의 스포츠는 경기규칙에 따라 승패를 겨루는 신체적 활동이지만,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활동의 강약도에 따라 레크리에이션 또는 유희로 부를 수도 있다. 대개 신체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신체활동을 체육이라고 하는데, 체육과 스포츠를 명확히 구분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스포츠 발생의 역사적인 뜻에서 본다면 낚시·바둑·장기·체스와 같은 것도 스포츠에 포함되는 경우가 있으나 현대 스포츠의 구성에는 들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사격은 신체적 활동을 주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20세기 초엽의 군국주의시대에 군인 경기로서 올림픽경기에 채택되었으며, 적중률을 겨룬다는 점에서 볼 때 경쟁이라는 스포츠 요소를 갖추었다 하여 그대로 존속한다. 스포츠는 형태상으로 보아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 그리고 도박경기로 나눌 수 있다. 프로경기는 직업적이라 하여 아마추어만이 스포츠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그런 의미에서 경기종목상으로 보더라도 아마추어스포츠가 가장 많고, 프로스포츠나 도박경기는 흥행적인 성립 여부에 좌우되므로 종목수도 많지 않다. 도박경기는 근대 스포츠 조직화의 첫걸음이 된 것으로서 동시에 영국 아마추어스포츠의 시조이다. 아마추어라는 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레이스인 헨리 레가타(1839)에까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도박이 공인되었다. 축구에서는 영국의 풀(pool), 이탈리아의 토토(toto) 등 내기의 뜻이나,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도박경기를 갬블(gamble)이라고 한다. 올림픽경기대회도 멕시코 올림픽 때는 갬블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라고 소개되고 있다. 스포츠를 통한 남북의 교류는 참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남북한 단일팀 사례로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협상 시작, 1963년 도쿄올림픽, 1979년 제35회 평양세계탁구대회, 1984년 LA올림픽, 1985~87년 서울올림픽, 1989년 북경아시안게임, 1990년 바르셀로나올림픽, 1991년 탁구 및 청소년축구 등이다. 특히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남북한 ‘코리아’팀의 쾌거는 남북한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으며 통일 후 남북한 주민들간 이질성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을 불식하고 완전한 통일에 대한 가능성과 기대를 갖게 했으며 남북 민족이 하나되어 외치는 ‘원코리아’ 그리고 같은 어깨를 맞대고 부르는 ‘아리랑’은 통일에 대한 염원이자 통일한국의 미래였다.경기대 김동선 교수는 “남북 스포츠교류를 추진함에 있어서 상호접근이 수월한 부분부터 선도적 접근을 통한 추진으로 체육계 주도의 정부지원 체계확립, 정례화를 통한 교류의 활성화 및 안정화 지향의 교류와 남북 관계의 특성을 고려하여 가능한 부문에서부터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스포츠교류, ‘비이데올로기적-비경쟁부문(제1단계)에서 이데올로기적 경쟁적부문(제2단계)’로 진행을 하고 북한과의 상호전략적 종목인 축구, 탁구, 농구, 마라톤, 씨름, 레슬링, 태권도, 권투, 유도, 양궁, 사격 등과 같은 전략적 종목의 교류활성화 도모가 중요하다”고 말했다스포츠를 매개로 한 정치적 교류는 중요하다. 민족 내부의 갈등 요소를 줄이고 지금까지 망가져 온 남북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 당장 남북이 공동 팀을 만들거나 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먼저 적극적으로 북한의 참가를 유도한다면 그것은 남북간 긴장 완화의 의미를 뛰어넘어 동북아 평화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더 나가서 남북의 스포츠를 매개로 하여 종교 통합이 지닌 의미를 살려야 하겠다. 그들이 당장 기독교를 받아드린다거나,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드릴 것 같지는 않다. 그러함에도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차근 차근이 그들의 마음을 두드려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동계 올림픽은 남북이 하나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선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북한 땅에 만계되기를 기대해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02-03
  • 원단금식기도
    원단이 되면 꼭 가야할 곳이 있다. 이는 전국에서 모인 나사렛형제들 이라는 금식기도 모임이다. 나사렛형제들 이라는 모임은 CCC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역교회나 직장을 통해서 신앙생활과 사역을 감당하는 평신도 그룹이다. 이 그룹이 주관한 원단금식기도회는 시초가 1979년1월1일-3일 이었다. 띠라서 어언 40여년 동안의 시간이 흐르면서도 변함없이 원단을 통해서 금식기도회를 갖고 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과거를 돌아볼 때면 젊은 시절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때가 무척 그립기도 하다.이 단체인 “나사렛 형제들의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른땅에 돋아나는 연한 순같이(사:53장)이새의 줄기(다윗의 혈통)에서 뻗어 나와 온 세상을 덮은 순으로서 인류의 죽음과 생명의 온갖 비밀을 지니신 채 30년간 팔레스타인의 나사렛 마을에서 맑고 고요하고 은밀한 기다림으로 살으셨다. 이 나사렛은 주님의 고향이요, 우리 모두의 영혼의 고향이다. 아울러 8가지 신앙 요소를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 형제들은 짙은 사랑의 연줄로 맺어진 계보 안에서만 나사렛형제들이라는 새 씨족을 형성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생명체이며, 독자의 특유한 체질과 사명을 지닌 한 기독교의 공동체이다. 둘째는 나사렛형제들은 민족의 죄를 대신하고, 그 고통을 겪은 그리스도의 상혼을 내국가와 민족에게 내 보이는 <수난자>로서의 <상>을 갖는다. 셋째는 나사렛형제들은 한국 땅에서 태어나서 한국 민족에게 먼저 보냄을 받은 공동체로서(요17:18,요20:21)먼저 사랑과 봉사의 자세로 민족복음화에 온갖 열정과 헌신을 바친다. 네 번째는 나사렛형제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로나 보다 적극적으로 인간존재의 전 영역의 심층부에 침투하고 사회 구조까지 복음화 할 책임의식을 갖는다. 다섯 번째는 나사렛형제들은 한국 교회사와 민족사의 책임자로서 이 공동체가 민족의 입체적 구심력을 이루어 기독교 한국을 이룬다. 여섯번째는나사렛형제들은 영적 집단의 교회처럼 성역을 가지지도 않고 가족과 마을 같은 자연집단도 아니며, 이념과 공리를 목적으로 한 세속적 집단도 아니다. 이런 모든 것보다 전위적이며 비제도적이어서 어느 곳 어느 때나 소박하게 모이고, 눌러도 번져만 가는 들풀이며 소리 없이 깊이 퍼져가는 새 누룩이다. 일곱 번째는 나사렛형제들은 그 모임이 세속의 외모를 취하나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가득 찬 종교사적 제 3집단이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나사렛형제들은 우리가 태어난 이 한국위에 보내어진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주님을 위해서 라면 어떤 이념이나 집단도 버릴 수 있는 분명한 용기를 갖는다. 아울러 그들은 중 헌신을 강조하고 있다. 즉 주님에의 헌신 △민족의 입체적 구원에의 헌신 △형제들에의 헌신 이다. 그리고 5대 강령으로서 성서를 읽는다. △전도한다. △기도한다. △서로 사랑한다. △협심한다는 강령을 가졌다. 필자는 이 그룹에서 젊음을 보냈다. 따라서 원단이 되면 그동안 못 보던 친구들과 간사님들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그러나 해년마다 보이던 얼굴들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에는 갑자기 불안해 지기도 하다. 왜냐 하면 벌써 고인이 되어버린 얼굴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면 금방 동심의 세계로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감정이 신앙의 동질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원단금식기도회 에서도 반가운 분을 만났다. 부디 이름을 밝히자면 충북대 약대 학장과 부총장을 지내신 오기완 박사 였다. 그분은 얼마 전 안식년을 통해서 국내 성지를 걸어서 순례를 하셨다. 그 결과 내어 놓은 책이 “양화진 순례길”이다. 필자에게도 많은 영적인 감동을 주었던 책이다. 오 박사님과 함께 금식기도를 마친 몇일 후 나에게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앞으로 30년 동안 원단금식기도회에 함께 참석하자는 내용 이었다. 물론 실현 가능할 수 없는 제안이지만 왠지 희망이 생기는 문구 였다. 왜냐 하면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날마다 새롭기 때문이다. 이제 2018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벌써 기대하는 것은 내년의 원단금식기도회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가눙하면 많은 열매를 안고 승리의 삶을 나누고 싶다. 할렐루야, 아멘.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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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8-01-22
  • 고마움이 있는 선교적인 삶
    많은 사건들로 점철된 2017년 한해가 넘어가는 순간이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많은 일들이 많았다. 한해가 지나갈 즈음에는 지난 일들을 돌아보게 되면서 감사함을 찾는 시간이기도 한다. 필자는 감사를 생각해보려고 해도 딱히 잡히지 않는 순간에 인터넷 신문에 나온 한 분의 이야기에 정말 감사를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국내의 한 일간지인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 기사화된 이야기의 제목은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네.”였다. 내용은 이렇다. ‘광주에 사는 한 70대 노모가 3남 1녀 자식에게 남긴 가슴 저미는 유서가 엄동 속에 주위를 숙연케 하고 있다. 나모(78)씨는 난소암으로 1년가량 투병하다 이달 중순 생을 등졌다. 유서는 그가 암말기 진단을 받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길 때 즈음, 자식들 몰래 작성했다. 유서의 내용은 단 14줄. 그러나 노모의 자식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도 애틋하고 숙연했고, 유서가 공개된 장례식장은 눈물바다로 변했다. 노모는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줌이 고마웠네”라고 운을 뗐다. 이어 “자네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 물려 배부르면 나를 바라본 눈길에 참 행복했다네…”라며 장성한 자식들의 갓난아이 적을 추억했다.그러면서 “지아비 잃어 세상 무너져, 험한 세상 속을 버틸 수 있게 해줌도 자네들이었네”라고 회상했다. 나씨는 40대 초반, 시청 공무원이던 남편을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뒤 35년간 수절하며 소천하는 그날까지 자식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이어 “병들어 하느님 부르실 때, 곱게 갈 수 있게 곁에 있어 줘서 참말로 고맙네”라며 “자네들이 있어서 잘 살았네, 자네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았네”라는 말을 남겼다.그런 다음, 노모는 맏딸과 세 아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등을 두드리듯 위로했다. “딸 아이야, 맏며느리, 맏딸 노릇 버거웠지? 큰 애야, 맏이 노릇 하느라 힘들었지? 둘째야, 일찍 어미 곁 떠나 홀로 서느라 힘들었지? 막내야, 어미젖이 시원치 않음에도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노모는 마지막으로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2017년 12월 엄마가”라며 글을 맺었다. 출산의 기쁨과 사별의 아픔, 자식을 사랑하고 위로하는 마음이 가득히 담겼다.지난 19일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한 한 지인은 “자녀들이 유서를 읽는 동안,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머니의 한없이 자식 사랑, 희생적인 삶에 가슴이 미어졌다”고 전했다. 노모는 장례식 후 함평군 대동면 선산에, 먼저 떠난 남편의 묘소 옆에서 영면했다.‘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 젊은 날에 남편을 잃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켜서 시집 장가 보내놓고 이제는 병을 얻어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들에게 남긴 사람의 유서 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유서를 우리가 읽을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한다. 백년을 해로 하자고 명세했던 남편의 죽음은 한 여인이 다른 길을 선택해도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을 위해서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한 고통을 보상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기득권을 주장할 수 도 있는 위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녀들이 함께 해 주었던 것을 고맙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마치 천사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세속주의적 가치관과 포스트모던적인 사고들 속에서 이기주의적 삶의 요소들이 팽배한 상황 속에서 마치 진주를 깨내는 듯한 글을 보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아침에 눈을 뜨면 대가 없이 주어지는 따뜻한 햇빛, 날마다 수천번 호흡을 해도 아낌없이 주어진 맑은 공기, 손을 펴면 잡혀지는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음에도 감사하고 살고 있는가?한해를 보내면서 독자님들은 어떠한 감사를 준비했는가? 먼저는 야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성경은 우리에게 시편 136편을 통해서 감사하도록 말씀 하시고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로 시작하면서 감사를 가르치고 있다. 다음으로는 가족과 이웃을 향한 감사가 있어야 하겠다. 그들이 있음으로서 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곧 선교적 삶 임을 알아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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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8-01-05
  • 중국의 대학생 선교를 위한 제언
    필자는 최근 중국을 다녀왔다. 이는 현지 지도자들이 공부하는 한 신학교에서 박사과적의 수업을 담당하기 위해서 였다. 그동안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이번 강의는 은퇴 후에 주어진 강의라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현지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은 18년 전에 중국의 연변 부근에서 탈북자 사역을 위해서 파견되었지만 이제는 다른 곳에서 신학생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계적이어서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많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 선교를 위해서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성향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다. 중국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지도자들에 의한 연구에 의하면 중국 대학생의 종교생활의 원은은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분석하여 복음의 접촉점을 찾아야 하겠다. 첫째는 가정환경의 영향이다. 자녀들의 성장과정 중,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가장 친밀하며 자녀들은 부모의 영향력 안에서 자라게 된다. 부모의 신앙관과 행동이 부지불식간에 자녀들에게 전달되는데, 이것은 가정생활 가운데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분위기가 농후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질 확률이 비교적 높다. 중국의 소수민족 가정에서 자란 학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민족신앙이 생활화 된 환경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신앙을 갖고 있는 학생들 중에 가정의 영향으로 종교를 갖게 된 학생들이 69,4%를 점하고 있다.둘째는 학교교육의 영향이다. 교육은 사람들의 활동을 배양하고 신앙적 필요를 무시하지 않는 역할이 있다. 학교는 신성한 교육적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일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고, 사람들의 정신적 필요를 배려해야 한다. 또한 심신의 건강발전을 촉진시켜야 하며, 대학단계에서는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을 형성하고 확립하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다.그러나 현실은 살기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기술적인 것에만 치중할 뿐, 왜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고등교육의 사상정치교육은 형식화, 서면화, 이론화 되어 있고 일률적인 주입식 정치이론과 정치관점만 있다. 이러한 교육은 정치이론은 강화할지 모르지만 신앙교육은 협소하고 간단하며 추상적이고 빈 설교에 불과하다. 셋째는 종교자체의 영향이다.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일상생활 가운데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갈수록 멀어지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또한 갈수록 냉랭해지고 있기에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갈수록 고독해지고 있다. 그런 반면 종교인들 간에는 서로 돕고 관심을 가지며 관용하며 진실한데 이러한 것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일부 대학생들은 안전감과 소속감을 찾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장경제논리아래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므로 욕심이 흘러넘쳐 이익에만 급급하고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종교는 인생과 세계 그리고 자연에 독특한 풍격을 지니도록 요구하기를, 탐하거나 구하지 말고, 욕망을 절제하고, 즐거이 남을 돕고, 사심이 없이 헌신하고,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라고 하는데 이런 종교문화들이 사회에 대한 정의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독특한 매력을 갖게 한다. 게다가 일부 종교계인사들의 종교 활동이 대학생들에게 강력한 영향력과 흡인력을 발휘한다. 어떤 종교단체의 사랑의 봉사단 활동은 자원하여 재난지역으로 들어가 자신의 청춘을 드려 고통과 고난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도왔다. 원촨대지진과 위수대지진 이후 도움이 필요한 곳마다 그들의 모습이 보였고 이들의 선행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하였다.네번째는 대학생 자신의 심리적 수요이다. 개인자아의 필요에는 세 가지 방면이 있는데, 먼저는 죽음의 염려를 제거하는 것으로 이 사망은 인류가 초월할 수 없는 문제이다. 다음으로는 안전감의 문제로 세상일이 다변화 되고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염려를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현실생활가운데 받는 상처를 메우기 위한 필요이다. 이상과 같은 현상들을 잘 살펴서 중국 대륙에 복음의 불길을 집혀서 사드로 인해서 갈라진 틈을 메우고 선교의 장을 힘 있게 열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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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7-12-23
  • 신화와 진리의 대결
    신학계에서의 설화에 대한 논쟁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전능하심과 이 세상에서의 독특한 사역에 대한 부분 까지도 역사성을 거부 한 채 설화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단군신화처럼 말이다. 한국의 종교를 다루다 보면 대두되는 이야기가 단군신화에 대한 것이다. 단군이라는 인물은 기원전 2333년 만주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방의 부족들을 모아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단군왕검’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은 종교적 지도자,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뜻한다. 단군설화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군설화는 우리 ‘삼국유사’에 적혀있을 뿐만 아니라 산둥 반도의 ‘무씨사당’이라고 하는 사당의 벽화에도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초대 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가 <단군신화의 신연구>라는 책에서 이것을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단군설화는 단순히 삼국유사에 기록된 정도가 아니라 산둥 반도의 무씨사당에도 하나의 시조설화 내지 개국설화로 나타나고 있다. 단군신화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군왕검이 있었는데,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서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성군인 고임금과 더불어 시간을 같이 했다. 오래된 기록에서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이 있었는데,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구했다. 아버지 환인은 자기 자식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을 보니 가히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더라. 여기서 홍익인간이 우리나라 교육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이에 하늘에서 보내었다는 신인 3개를 주어 파견하여 세상을 다스리도록 했다.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나무 밑에 내려왔는데 이를 일러서 신시라고 했다. 이가 환웅천왕이다. 바람을 주관하는 풍백과, 비를 주관하는 우사와, 구름을 주관하는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과 병과 형벌과 선악을 주관해서 무릇 인간의 365일을 주관토록 하며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시키도록 했다. 환웅이 하강해서 활동한 장면은 여기까지 이야기한다. 장면이 바뀌어서 한 곰과 한 호랑이가 있어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항상 환웅에게 기원하기를 원컨대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때 환웅이 영험스러운 쑥 일 주와 마늘 20매를 남겨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 무리들이 이를 먹고 100일 동안 일광을 보지 말라, 그러면 문득 사람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얻어서 먹고, 삼가기를 21일간 동안 했는데, 곰은 여자의 몸을 입었으나, 호랑이는 능히 인내하지 못해서 사람의 몸을 입지 못했다. 곰에서 여자로 된 사람이 더불어 혼인할 사람을 얻지 못하여 매양 신단수 밑에 와서 기도해서 아기 갖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와서 변화해 혼인하고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의 이름이 단군왕검이었다. 우리가 아는대로 고조선시대의 단군 이야기는 ‘건국신화’이다. 신성한 존재가 출현해 나라를 세운 이야기란 뜻이다. 그런데 신성한 존재의 출현과 나라 세우기에는 어떤 원리가 있다. 먼저 지상에 성스러운 나라를 세우려는 지극히 높은 신의 뜻이 있어야 하고, 뒤를 이어 뜻을 이룰 주인공이 지상에 탄생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탄생에는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건국신화에는 최소한 세 배역을 등장시킨다. 지고신(至高神) 환인은 홍익인간의 뜻을 가지고 환웅을 보낸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직접 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지만 그가 세운 것은 신시(神市) 즉 신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나라가 아니라 신의 아들이 머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환웅은 도우미 신들을 거느리고 인간계의 만사를 주관했지만, 그는 건국 영웅이 아니라 웅녀와 짝을 이루어 단군을 탄생시키는 매개자일 뿐이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세 번째 존재인 단군의 일이었다. 이것이 건국신화를 통해 국가권력을 신성화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신화를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대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국가를 신성시 하고 싶은 위정자들과 국수주의자들의 맹신을 통해서 단군신앙을 강요되기도 한다. 요즘 성경의 진리성을 훼손하면서 까지 하나님의 초월적 사역을 설화로 취급하는 신학자들과 교계의 지도자들이 있다.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12-15
  • 종교간의 갈등과 선교적 대안
    한국사회가 갖는 다양성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종교를 절대시 하는 경우에는 타종교를 배타적인 눈으로 처다 보고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사회통합이라는 정부의 정책과는 반대로 상오 갈등의 구조 속에 상대를 배척하는 극단적인 생각들을 갖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특정한 현상에 대한 원인은 다각도로 평가되며 분석되어야 한다. 필자는 오늘 종교간의 갈등 요인을 세가지 관점에서 간단히 살펴 볼 수 있다. 다음에 소개된 이론은 필자가 강의했던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의 박사과정에서 한 학생이 자신의 페이퍼를 통해서 주장된 내용이다. 첫째는 인지적 차원에서의 갈등이다. 이는 종교 간에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종교 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불교와의 갈등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불상파괴나 땅 밟기 기도의 모습은 우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교회는 최근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증가로 인해 무슬림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 존재를 위험시하고 있다. 따라서 메스컴을 통한 잘못된 정보나 유언비어가 아닌 실재로 무슬림을 만나 그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한국에서 살아가는지 관념적이 아닌 실재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여 진다. 두 번째는 종교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종교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종교의 배타적 특성에 있음을 여러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원규는 종교적 특수주의와 자기우월주의가 배타성을 낳는다고 설명한다. 이 특수주의는 자기 종교만 절대적 진리를 선점하고 선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으로 다수인이 특수주의적일 때 그들은 타 종교인들에게 적대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또 자기 종교만 우월하게 볼 때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타 종교인들을 열등하게 보며 나아가 ‘문화적 제국주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고 이원규는 설명한다. 이원규의 설명은 한국교회에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불교와의 갈등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불상이나 법구들을 파괴하여 자기우월주의와 특수주의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전성표는 종교의 배타성이 특정 종교 집단의 내적 유대를 증가시키기 위해 외부 종교에 대한 부정적 성향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드러남을 주장한다. 전성표가 지적한 배타성은 이슬람과의 갈등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모습과 흡사하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이 때에 늘어나는 무슬림의 숫자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더욱 위기의식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무슬림들의 존재가 기독교에 위협이 되는 것처럼 여겼고 무슬림들을 적대시하였다. 마치 그런 노력이 한국 교회를 지키고 복음을 수호하는 것처럼 여긴 것이다. 타 종교에 대해 비판과 비난이 아니라 자기성찰을 통한 한국 기독교의 근본적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고 사료된다. 세 번째는 사회적 요인을 들 수 있다. 대한민국은 정치와 종교가 불리 된 정교 분리 국가이다. 따라서 특정 종교를 우대하고 특정 종교를 무시할 수 없는 국가적 이념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제도를 무시하고 특정 종교가 유아독존하려는 태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정교 분리의 원칙은 특정 종교를 거부함에도 동일하게 사회적 시민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자유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통해 본질적으로 남들과 다르게 사는 법을 보여주기보다 기독교의 교세만을 넓히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종교간 갈등의 여지를 키우고 있다고 하겠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가 한국에서 자유롭게 포교활동을 할 수 있는 만큼 타 종교인들도 자신들의 포교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위에서 제기된 이론들은 타종교를 포괄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관용정신을 갖자는 의견이다. 이제 필자의 관점에서 종교간의 갈등속의 선교적 해법을 찾는다면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함을 말하고 싶다. 즉 진리가 지닌 가치의 배타성과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갖는 포괄성을 동시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기독교가 지닌 독특성을 타종교인들이 이해하고 따라오게 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12-08
  • 한국의 신흥종교와 기독교 선교
    필자는 이번 학기 한세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업에 “한국 종교와 기독교 선교세미나”라는 과목으로 한 학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 우리 기독교 속에서도 다양한 문제들로 말미암아 무척 시끄러운 잡음이 들린다.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한국의 종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또한 기독교가 갖고 있는 신학적 진리의 배타성은 왜 존속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는 연구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전통종교는 샤머니즘에서 시작하여 불교, 선(도교) 그리고 유교라는 줄기를 갖고 지금까지 왔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 속에서 조선 말기에 일어난 신흥종교들은 사회와 정치적인 요소들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신흥종교(韓國-新興宗敎)는 구한말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에 출현한 종교들이 그 효시가 된다. 사이트에 정리된 어느 글에 의하면 정치의 타락과 유교의 부패와 아울러 천주교는 토착화되지 못하고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하층민(민중) 사이에서 일어났다. 역사적 전환기와 사회적 급변기에 정국의 혼란, 사회적 불안, 가치관의 붕괴, 지배종교의 부재, 기성종교의 외면 등등 복합적 사회병리를 요인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오늘날 신흥종교는 기성종교의 과거성이나 고루성, 교리의 진부성, 행실의 불륜성·경제성 또는 경전 해석 차이 등으로 한없이 분화되어 나아간다. 한국 신흥종교의 발생은 눌려사는 민중들이 빈곤·질병·무지에서 살아남으려는 움직임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한사회에서의 신흥종교의 증가율은 사회적 ‘아노미’현상과 정비례하는 것이며, 반대로 안정된 사회일수록 신흥종교의 자연 소멸률은 높아진다는 것이다. 신흥종교란 단어는 한 사회의 혼란상을 배경으로 새롭게 발흥된 종교의 모습을 지칭한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있다. 하나는 부정적이며 어두운 면으로, 다른 하나는 긍정적이며 밝은 면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전자는 신흥이란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걷잡을 수 없는 풍조 속에서 한때 발생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타고 우후죽순격으로 발흥·유행하다가 또 다른 사조가 일어날 때에는 풍전등화격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을 내포하며, 후자는 역사적 창조성을 지닌 종교라고 이해하고 풀이할 수도 있다는 면에서 본 관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고등종교가 창교되던 당시 석가나 공자나 예수님의 활동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듯이 신흥종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신흥종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기성종교와 대치해서 쓰여진 상식적 용어이며, 그 의미는 ‘새로운 믿음의 집단’이 형성되어 가는 상태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 고유신앙 전체를 일괄하여 유사종교(類似宗敎)라고 단정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직후 혼란상을 틈타 또다시 많은 신흥종교가 발흥되었을 당시 민심을 현혹시키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하여 치안국에서 그들을 조사할 때 붙인 이름은 국산종교(國産宗敎)였다. 한국사회에서 신흥종교란 말의 개념은 문학적 반성없이 자기 종교 아닌 타종교를 저열시하려는 데서 한때 유사종교란 말로 무차별하게 통용되기도 했다. 신흥종교의 개념은 현대사회의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학문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와 같은 신흥종교의 틀 속에서 서구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래된 기독교는 선교 초창기에 서교라는 타이틀이 붙을 수 밖에 없었고, 민중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쉽게 받아드릴 수 없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님들의 효과적인 선교전략인 통전적 선교로 기독교는 좋은 종교로 각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로 이러한 편견들을 극복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적인 기독교 국가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즉 학교를 통한 교육 사역과 병원을 통한 의료 선교는 조선 말기의 국가적 위기로 말미암아 희망을 잃고 방항 하는 백성들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많은 축복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위기가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 곁에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종교가 지닌 본질의 요소인 진리성의 회복과 종교가 지닌 삶의 요소인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겠다. 마치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님들이 흘린 피 값처럼 헌신과 사랑과 용서와 이타적인 삶을 보여 주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조선 말기에 우우죽순처럼 일어났던 신흥종교의 길목 속에서도 기독교가 이 땅에 착실하게 정착 하였듯이 이단과 세속화와 타종교의 벽을 넘는 한국교회가 되어서 세계선교에 계속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11-25
  • 수고하는 일없이 받은 열매
    필자는 오늘 농사를 짖는 일을 소개하고 싶다. 농촌에서 출생하고 성장했지만 전통적 대가족 집안에서 큰아들로 자란 관계로 어지간한 일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삼촌들이 했기 때문에 농사일에는 무뢰 안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나는 10여년 전에 지인의 소개로 조그만 농토를 마련하였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농작물을 관리하는 것이 무척 버거웠다. 생각다 못해서 구찌뽕 나무를 심었다. 구찌뽕 나무를 소개해 주신분에 의하면 “나무가 잘 자라기 때문에 특별히 손볼 것도 없기 때문에 농사 짖기가 수월할 것이다”했다. 그러나 아시는 분이 있으시겠지만 구찌뽕 농사는 장난이 아니다. 가시가 많아서 찔리고, 상처가 나면 계속 아파 온다. 함께 일하고 있는 아내에게 짜증도 내고 원망도 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한 나에게 아내를 통해서 특별한 말을 듣게 되었다. 아내는 나에게 “우리가 별로 하는 일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밭을 이렇게 과일로 채워 주신 은혜가 감사하다”고 했다.짧은 말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맺혀진 열매를 통해서 느끼게 되었다. 사실 금년은 너무 바빠서 나의 기억으로는 세 번 정도 밭에 갔었다. 즉 3월경은 가지를 채집 하려 갔고, 7월에는 풀을 깎으려 갔고, 그리고 지난주에 갔다. 이러한 불성실한 농사꾼인데도 하나님께서는 풍성하게 저희에게 주셨다.우리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신가?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언급해 놓으셨다.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 가운데 모자람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항상 불평과 불만으로 현실을 대할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의 노력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 날마다의 삶을 공급해 주신분이 누구신가? 가을 들판에 풍성하게 익어 있는 열매들을 누가 재배했는가? 들판에 서서 추수절기를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우리에게 주신 마태복음 6장의 말씀들을 묵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묵상은 주일 설교문을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첫째는 매일의 식량을 예비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둘째는 공중의 새들도 먹이시는 주님이심을 만나게 되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셋째는 우리를 입시시고 먹이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농토에서 가져온 과일들을 강대상 앞에 놓으면서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었다.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도 많다. 은혜로 영생을 얻고, 은혜로 평안을 얻고, 은혜로 사죄의 확신을 얻고, 은혜로 놀라운 능력을 얻고, 은혜로 죄를 이길 힘도 얻었다. 이러한 모든 축복은 내가 잘하고,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힘들다고 투정하는 나를 깨우치는 농사일로 인해서 커다란 축복의 시간을 가졌다. 가시에 찔려서 상처난 살결을 쳐다보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게 되고, 하는 것도 없으면서 천국에서 큰 상을 바랐던 나를 깨우치는 시간이었다. 따라서 성도님들 모두는 할 수 있으면 농사를 지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결국 우리가 삶의 여정을 통해서 지어야 할 최선의 농사는 무엇인가? 바로 선교적 삶 이 라고 본다. 우리는 묵묵하게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면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복음증거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11-17
  • “종교는 보험사기 인가?”에 대한 선교적 응답
    강의안을 준비하는 동안에 2017년 초에 국내의 한 일간지에 소개된 글을 읽었다. 글의 제목은 “종교는 보험사기극”…스티븐 킹 등 거장들 ‘신(神)’에 도전 이었다.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 성도라면 이 글이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철저한 신앙도 결국 아무것도 건질 수 었는 허무하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논지로 글을 엮고 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한 해, 두 해 너무나도 독실하게 보험금을 납입하고, 그렇게 납입한 보험금의 혜택을 누릴 때가 돼서 찾아보면 내 돈을 가져간 회사가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사기극 말입니다.’(스티븐 킹 소설 ‘리바이벌’ 중에서)’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등골 서늘한 공포, 스티븐 킹 ‘리바이벌’을 소개하고 있다. 스티븐 킹의 소설 ‘리바이벌’(황금가지)은 평범한 한 가정의 막내아들인 제이미 모턴과 전기장치를 만들어내는 소질이 있지만 아내와 어린 아들을 참혹한 사고로 잃은 후 반미치광이가 된 목사 제이컵스의 이야기다.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 제이미가 그의 인생을 뒤흔든 ‘제5의 인물이자 변화 유발자이자 숙적’인 제이컵스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하는 것에서 책은 시작한다.제이미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마을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 제이컵스와 조우한다. 제이컵스 목사는 목소리를 잃은 제이미의 형을 간단한 전기장치로 고쳐주는 등 제이미 가족과 가깝게 지내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잃고 예배에서 ‘종교는 보험사기극과 같다’는 내용의 충격적인 설교를 하고는 마을에서 쫓겨난다. 수십 년 후 제이미와 우연히 재회한 제이컵스는 그동안 전기장치를 이용해 신기한 사진을 찍는 사진사, 그 후에는 전기장치를 이용해 병든 이들을 치료하는 목사 등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전기를 이용한 치료는 신의 영역을 넘본 목사의 ‘본 게임을 위한 연습’이었을 뿐이었다. 제이미는 그것을 눈치 챘지만 제이 컵스 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초자연적이고 공포스러운 일들의 목격자가 된다. ‘“너는 내 운명이었거든. 너희 집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흙먼지를 파헤치던 너를 처음 본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지.” 그는 독실한 신자처럼 아니면 정신병 환자처럼 침착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 둘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리바이벌’ 421쪽) 이 신문은 또 하나의 작품을 연결해서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작가인 쓰쓰이 야스타카의 ‘모나드의 영역’(은행나무)이다. 소설은 강변 둔치에서 여성의 오른팔이 발견되며 시작된다. 경찰들이 사체 훼손 사건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근처의 빵집에 고용된 한 대학생은 발견된 사체의 팔과 똑같은 모양의 바게트를 만들어 팔고 이어 나중에 발견된 한쪽 다리와 똑같은 모양의 빵까지 구워판다. 일견 엽기적인 범죄물 소설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하지만 빵집의 단골손님 교수가 자신을 ‘신 이상의 존재’라고 주장하며 기이한 행동을 하면서 신과 인간, 우주의 문제로 확대된다. 소설은 신의 존재를 놓고 장대한 철학적 논의에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신의 입을 빌려 신학, 철학, 양자역학을 횡단하고 현대사회의 문제를 꼬집으며 현실적이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선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만 가르쳐줄까. 나나 당신들이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가능세계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이야기 말이야. 여기가 단지 소설 속의 세계라고 하면 어떨까. 독자가 보자면 나나 당신들이 있는 이 세계는 가능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겠지. 당신들도 알잖아. 여기가 소설 속의 세계라는 것을.”(‘모나드의 영역’ 240쪽)세속적인 다양한 이론들은 종교의 무용론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기독교 까지도 보편적인 종교로 매도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이는 영생과 이 땅 위에서의 풍성한 삶과 평안과 그리고 절대적인 소망으로 가득찬 종교다. 심지어 죽음 이후의 문제도 우리에게 바울을 통해서 이미 보여 주고 있다. “누가 묻기를 죽은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진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기독교는 종교 사기가 아닌 확실한 영생의 보험에 가입된 진리 의 공동체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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